아치 윌리엄스
1. 개요
아치 윌리엄스는 1936년 하계 올림픽 400m 육상 금메달리스트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이자 교육자였다. 1936년 올림픽에서 400m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했으나, 아돌프 히틀러는 그를 포함한 흑인 금메달리스트들을 축복하지 않았다. 육상 선수 은퇴 후에는 기계 공학을 전공하고 조종사 훈련을 받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14명뿐이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항공 기상 훈련생으로 복무했다. 이후 공군에서 기상학 강사로 활동하다가 퇴역 후에는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출생일 | 1915년 5월 1일 |
|---|---|
| 출생지 | 미국캘리포니아주오클랜드 |
| 사망일 | 1993년 6월 24일 (향년 78세) |
| 사망지 | 미국캘리포니아주페어팩스 |
| 신장 | 1.83 m |
| 체중 | 80 kg |
| 종목 | 육상 |
|---|---|
| 세부 종목 | 200 m, 400 m |
| 소속 클럽 | 캘리포니아 골든 베어스, 버클리 |
| 개인 최고 기록 | 200 m – 21.4 (1936년) |
| 400 m – 46.1 (1936년) | |
| 모교 |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
| the | |
| 올림픽 게임 | |
| 1936년 베를린 | |
| 400 m |
-
1936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
손기정
손기정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육상 선수이자 체육인으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나 일본 대표로 출전해야 했으며, 광복 후에는 육상 지도자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체육 발전에 기여했다. -
1936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
남승룡
남승룡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대의 마라톤 선수이자 육상 지도자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동메달을 획득하고 전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그의 삶은 드라마와 영화로도 다뤄졌다. -
1936년 하계 올림픽 육상 참가 선수 -
손기정
손기정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육상 선수이자 체육인으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나 일본 대표로 출전해야 했으며, 광복 후에는 육상 지도자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체육 발전에 기여했다. -
1936년 하계 올림픽 육상 참가 선수 -
루이스 잠페리니
루이스 잠페리니는 미국의 장거리 육상 선수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으로, 올림픽 국가대표 출전 후 전쟁 중 일본군 포로로 억류되었으며, 전후에는 복음주의자로 용서와 화해를 전파하고 그의 삶은 여러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
올림픽 육상 메달리스트 -
얀 젤레즈니
얀 젤레즈니는 체코의 육상 선수로 남자 창던지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올림픽 3회 금메달과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3회 우승을 달성했으며, 98.48m의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2006년 은퇴 후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
올림픽 육상 메달리스트 -
댄 오브라이언
미국의 육상 선수 댄 오브라이언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10종 경기 금메달리스트이자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3회 우승자이며, 1992년에는 10종 경기 세계 신기록을 세웠고, 은퇴 후에는 저술, 모델, 방송 해설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 선수 경력
아치 윌리엄스는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태어나 오클랜드 대학교와 샌 마테오 주니어 칼리지(현재 샌 마테오 칼리지)를 거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기계 공학을 전공하며 육상 경기를 계속했다. 1936년 스웨덴에서 열린 경기에서 다리 부상을 입어 육상 선수로서의 경력은 끝났지만, 이후 그는 상업 조종사가 되었다.
1936년 하계 올림픽 400m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당시 아돌프 히틀러는 다른 흑인 금메달리스트와 마찬가지로 그와 악수하지 않았다. 금메달 획득 후, 윌리엄스는 "히틀러도 내 손을 잡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윌리엄스는 미국 공군에서 조종사로 복무했으며, 22년 후 중령으로 군에서 퇴역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항공 기상 생도 프로그램에서 임관된 14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전쟁 후, 그는 정규 노선 조종사 자격을 얻었으며,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공군 기술 연구소에서 공학 과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윌리엄스는 1964년 공군에서 퇴역하기 전까지 여러 기상 부대를 지휘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윌리엄스는 캘리포니아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컴퓨터를 가르쳤으며, 서 프랜시스 드레이크 고등학교에서 72세로 퇴직할 때까지 21년 동안 교사로 재직했다.
2.1. 초기 경력
윌리엄스는 1936년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기 전까지 400야드(402m)를 49초대에 뛰는 선수였다. 그러나 1936년에는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어 전미 대학 선수권 400m 예선에서 46.1초의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다. 결선에서도 47.0초로 우승했다. 윌리엄스는 올림픽 선발전까지 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여 46.6초로 1위를 차지하며 올림픽 출전을 확정지었고, 본선에서도 46.5초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금메달을 획득한 윌리엄스에 대해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다른 흑인 금메달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악수로 축복하지 않았다.
2.2.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윌리엄스는 1936년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기 전까지 400야드(402m)를 49초대에 뛰는 선수였다. 그러나 1936년에는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어 전미 대학 선수권 400m 예선에서 46.1초의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다. 결선에서도 47.0초로 우승했다. 윌리엄스는 올림픽 선발전까지 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여 46.6초로 1위를 차지하며 올림픽 출전을 확정지었고, 본선에서도 46.5초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금메달을 획득한 윌리엄스에 대해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다른 흑인 금메달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악수로 축복하지 않았다.
2.3. 부상과 은퇴
이듬해 다리 부상으로 선수 생명이 끊어져 은퇴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기계 공학 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한 후, 1939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민간 파일럿 훈련 시설에 입소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1942년 공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서 14명밖에 없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항공 기상 훈련생이 되었다. 파일럿 면허를 취득하고 공군 파일럿 훈련사이자 기상학 강사가 되었다. 종전 후에도 1964년까지 파일럿과 기상 강사로 근무했다.
1964년 공군을 은퇴한 후에는 72세까지 캘리포니아주의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컴퓨터 교사로 재직했다. 캘리포니아주 페어팩스에서 사망했다.
3. 군 복무
UC 버클리에서 기계 공학 학위를 받은 윌리엄스는 1939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열린 최초의 민간 조종사 훈련 과정에 참여했다. 개인 조종사 면허를 취득한 후 강사 자격을 얻었으며, 나중에 터스키기에서 민간 강사로 활동했다. 1942년 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항공 기상 생도 프로그램에서 임관된 14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1944년 9월까지 터스키기에서 최초의 육군 조종사 훈련 과정에 참여했으며, 졸업 후에는 계기 비행 훈련을 지도하고 기상학을 가르쳤다. 전쟁 후, 정규 노선 조종사 자격을 얻은 후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공군 기술 연구소에서 공학 과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윌리엄스는 평생 기상 장교이자 유능한 조종사로 남아, 지휘 조종사 자격을 얻어 1964년 공군에서 중령으로 퇴역하기 전까지 여러 기상 부대를 지휘했다.
3.1.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36년 하계 올림픽 이후 다리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한 윌리엄스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기계 공학 학위를 취득했다. 1939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민간 파일럿 훈련 시설에 입소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1942년 공군에 입대했다. 윌리엄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4명뿐이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항공 기상 훈련생 중 한 명이었다. 파일럿 면허를 취득하고 공군 파일럿 훈련사이자 기상학 강사로 복무했다. 종전 후에도 1964년까지 파일럿과 기상 강사로 근무했다.
3.2. 은퇴
1936년 하계 올림픽 이후, 이듬해 다리 부상으로 선수 생명이 끊어져 은퇴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기계 공학 학위를 취득하고, 1939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민간 파일럿 훈련 시설에 입소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1942년 공군에 입대했다. 윌리엄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4명밖에 없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항공 기상 훈련생이었다. 파일럿 면허를 취득하고 공군 파일럿 훈련사이자 기상학 강사가 되었다. 종전 후에도 1964년까지 파일럿과 기상 강사로 근무했다.
1964년 공군에서 은퇴한 후에는 수학, 컴퓨터 교사가 되어 72세까지 캘리포니아주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캘리포니아주 페어팩스에서 사망했다.
4. 교육 경력
오클랜드 대학교를 거쳐 샌 마테오 주니어 칼리지에서 수학했으며, 그의 코치인 올리버 버드 박사는 그가 미래의 업적을 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로 전학하여 기계 공학을 전공했다. UC 버클리에서 기계 공학 학위를 받은 후, 1939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열린 최초의 민간 조종사 훈련 과정에 참여했다.
1942년 말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항공 기상 생도 프로그램에서 임관된 14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43년 9월 6일 UCLA 프로그램을 졸업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공군 기술 연구소에서 공학 과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교육 분야에 남아 캘리포니아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컴퓨터를 가르쳤다. 서 프랜시스 드레이크 고등학교에서 72세로 퇴직할 때까지 21년 동안 교사로 재직했다.
5. 사망과 유산
아치 윌리엄스는 캘리포니아 페어팩스에서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알파 파이 알파 동아리의 회원이었다.
1936년 스웨덴에서 열린 경기에서 다리 부상을 입어 육상 선수 경력이 끝났지만, 상업 조종사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 공군에서 조종사로 복무했으며, 22년 후 중령으로 군에서 퇴역했다. 공군에서 비행 교관이었던 윌리엄스는 군 복무를 마치고 교육 분야에 남아 캘리포니아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컴퓨터를 가르쳤다. 서 프랜시스 드레이크 고등학교에서 72세로 퇴직할 때까지 21년 동안 교사로 재직했으며, 샌안셀모에 거주했다. 그는 미래의 작가 콘래드 드라이든을 포함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돕는 것을 좋아한 것으로 유명했다. 서 프랜시스 드레이크 고등학교는 조지 플로이드 시위가 전 세계적으로 지명과 기념물의 인종차별 관련 재검토를 촉발한 후 2021년에 아치 윌리엄스 고등학교로 이름이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