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1세 (키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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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리 1세는 1218년에 태어나 1225년 8세의 나이로 키프로스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해 조기에 대관식을 치렀으며, 1232년 친정을 시작하여 이벨린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앙리 1세는 1246년부터 1253년까지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을 지냈으며, 세 번 결혼하여 플레장스 당티오크와의 사이에서 아들 위그 2세를 얻었다. 그는 1253년에 사망했으며, 키프로스 왕위는 아들 위그 2세가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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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 1세 (키프로스) | |
|---|---|
| 기본 정보 | |
| ![1375–1380년 판 《프랑스의 위대한 연대기》에 실린 앙리가 전령을 받는 모습의 [[채색 삽화|미니어처]]](https://cdn.onul.works/wiki/noimage.png) | |
| 칭호 | 키프로스 왕 | 
| 재위 기간 | 1218년 1월 10일 – 1253년 1월 18일 | 
| 이전 통치자 | 휴 1세 | 
| 다음 통치자 | 휴 2세 | 
| 배우자 | 알릭스 드 몽페라 스테파니 드 람프론 플레장스 당티오크 | 
| 자녀 | 휴 2세 | 
| 왕가 | 뤼지냥 가문 | 
| 아버지 | 휴 1세 | 
| 어머니 | 알리스 드 샹파뉴 | 
| 출생일 | 1217년 5월 3일 | 
| 출생지 | 니코시아 | 
| 사망일 | 1253년 1월 18일 | 
| 사망지 | 니코시아 | 
| 프랑스어 이름 | |
| 프랑스어 | Henri de Lusignan | 
| 별칭 | |
| 프랑스어 | le Gros (르 그로) | 
| 그리스어 | Λίπος (리포스) | 
2. 생애
앙리 1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롬바르드 전쟁, 예루살렘 왕국 섭정 등을 겪었다. 세 번의 결혼을 통해 안티오키아의 플레상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휴를 얻었고, 휴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앙리 1세는 니코시아의 템플 기사단 교회에 묻혔다.
2. 1. 어린 시절과 즉위

앙리 1세는 1225년, 8세의 어린 나이에 니코시아의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키프로스 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렀다.[2] 이렇게 어린 나이에 대관식을 거행한 것은 섭정 필리프의 작전이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어린 앙리 1세를 이용하여 키프로스 왕국에서의 권력을 잡으려 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항하기 위해 대관식을 서둘러 치른 것이다.
1228년, 필리프의 예상대로 프리드리히 2세가 장 디블랑을 섭정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키프로스 왕국에서의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4월, 프리드리히 2세는 성지로 떠났다. 이 틈을 노려 장은 다시 키프로스 왕국의 정치를 잡고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항하려 했다. 이로 인해 키프로스 왕가와 신성 로마 황제 간에 War of the Lombards|롬바르드 전쟁영어이 발발했다. 1232년, 앙리 1세는 15세가 되어 스스로 정치를 다스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앙리 1세는 이블랭 가문과 키프로스 왕가와의 유대를 강화해갔다.
2. 2. 롬바르드 전쟁
헨리는 1225년 니코시아의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8세의 나이로 즉위했다.[1] 조기 대관식은 삼촌 필리프의 정치적 책략이었다. 필리프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권력을 잡으려 할 것을 감지했다. 1228년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프리드리히는 이벨린의 요한에게 섭정을 아말릭 바를레에게 넘기도록 강요했고, 키프로스 섬을 빼앗았다. 그러나 프리드리히가 4월에 섬을 떠나자 요한이 반격을 가하여 지배권을 되찾았고, 이것이 롬바르드 전쟁의 시작이었다. 1232년 15세가 되어 성년이 되면서 헨리는 왕국을 장악할 수 있었고, 이벨린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2. 3. 예루살렘 왕국 섭정
앙리 1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으로서 1246년부터 1253년까지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콘라트를 섬겼다.2. 4. 결혼과 자녀
앙리 1세는 세 번 결혼했다.[1]| 배우자 | 출신 | 비고 | 
|---|---|---|
| 몬페라토의 알릭스 | 몬페라토 후작 빌헬름 6세의 딸 | 자녀 없음 | 
| 람프론의 스테파니 |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섭정 람프론의 콘스탄틴의 딸 | 자녀 없음 | 
| 안티오키아의 플레상스 | 안티오키아 공이자 트리폴리 백인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5세의 딸 | 아들 휴 출생 | 
2. 5. 죽음과 계승
앙리 1세는 1253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유일한 자녀이자 갓난 아들이었던 휴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만약 휴 2세에게 자녀가 없었다면, 앙리 1세의 상속자는 장녀의 아들 장 드 브리엔(1234년 출생)과 브리엔의 휴(c. 1240년 출생), 그리고 여동생의 아들 안티오키아의 휴, 즉 미래의 휴 3세(c. 1235년 출생)였다. 앙리 1세는 니코시아의 템플 기사단 교회에 묻혔다.참조
[1]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ume Three: The Kingdom of Acre and the Later Crusad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1
 
[2]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ume Three: The Kingdom of Acre and the Later Crusad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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