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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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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루살렘 왕국은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건국된 십자군 국가이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성묘 수호자로 임명되었으나, 그의 동생 보두앵 1세가 국왕 칭호를 사용하면서 왕국이 시작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은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에 대한 종주권을 가졌으며,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의 교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십자군 내부의 갈등과 이슬람 세력의 반격으로 위기를 겪었으며, 특히 살라흐 앗 딘의 하틴 전투 승리로 예루살렘을 상실했다. 이후 제3차, 제6차 십자군을 통해 예루살렘을 일시적으로 회복했으나, 1291년 맘루크 왕조에 의해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멸망했다. 멸망 이후에도 칭호는 유럽 왕가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사회적으로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특징을 보였고, 봉건 제도와 상업 발달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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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일반 명칭예루살렘 왕국
링크 이름예루살렘 왕국
존속 기간1099년–1187년, 1192년–1291년
왕국 깃발
왕실 깃발
왕국 문장
왕실 문장
지도 유형왕실 깃발
지도 유형 문서예루살렘 십자가
상징 유형왕실 문장
상징 유형 문서예루살렘 십자가
1135년 십자군 국가 지도
1135년 제2차 십자군 직전 레반트의 십자군 국가 (에데사, 안티오크, 트리폴리, 예루살렘) 지도
시대고중세
선행 사건제1차 십자군
선행 날짜1096년–1099년
시작 사건예루살렘 점령
시작 연도1099년
시작 날짜7월 15일
사건 1예루살렘 1차 함락
사건 1 날짜1187년 10월 2일
사건 2제3차 십자군
사건 2 날짜1189년–1192년
사건 3제6차 십자군
사건 3 날짜1228년–1229년
사건 4남작 십자군
사건 4 날짜1239년–1241년
사건 5예루살렘 2차 함락
사건 5 날짜1244년 7월 15일
종료 사건아크레 함락
종료 연도1291년
종료 날짜5월 18일
선행 국가 1준드 필라ستين
선행 국가 2준드 알-우르둔
후행 국가 1아이유브 왕조
후행 국가 2맘루크 술탄국
수도예루살렘 (1099년–1187년), 티레 (1187년–1191년), 아크레 (1191년–1291년)
공용어라틴어, 고대 프랑스어 (링구아 프랑카)
종교로마 가톨릭교, 이슬람, 유대교, 사마리아교, 동방 정교, 드루즈교
정부 형태봉건 귀족 군주제
지도자 1고드프루아 드 부용
지도자 1 재임 기간1099년–1100년 (최초)
지도자 2앙리 2세
지도자 2 재임 기간1285년–1291년 (최후)
지도자 직함예루살렘 국왕
입법부고등 법원
인구 링크예루살렘 인구 통계 역사
인구 통계 연도 11131년
인구 1250,000명
인구 통계 연도 21180년
인구 2480,000–650,000명 (프랑크족 120,000–140,000명 포함)
통화베잔트
현재 국가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레바논, 요르단, 이집트

2. 역사

로마 교황청의 호소에 답해 성지로 향한 제1차 십자군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당시 군대의 지도자였던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성묘 수호자로 임명되었다. 그리스도가 목숨을 잃은 장소에서 자신이 왕이 되어 같은 절차를 밟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거절했기 때문이다. 고드프루아는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남은 무슬림 세력을 토벌하다가 1100년 예루살렘에서 죽었다. 그의 동생 보두앵(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이 뒤를 잇게 되면서 공식적으로 예루살렘의 국왕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 이로써 십자군 국가 예루살렘 왕국이 탄생했다.

예루살렘 왕은 처음엔 십자군에 의해 정복된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등 십자군 국가에 대한 종주권도 갖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인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유럽과의 해상교통 및 병참로를 확보하는 것과 더불어 레반트 교역에 종사했다.

원래 십자군은 이해가 대립된 제후들의 연합군이었기에 창립된 현지 제후국도 에데사 백국(블로뉴 백작 등 북부 프랑스 제후), 안티오키아 공국(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인 제후), 트리폴리 백국(툴루즈 백작 등 남부 프랑스 제후)이 그것을 그대로 반영해 서로 대립하였다. 거기에 현지 제후는 이교도와 융화하거나 공존을 목표로 하기 시작한 것에 비해, 새로운 십자군들이나 교회관계자는 이슬람교도와의 전투를 요구했기 때문에 왕국의 방침은 항상 일정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왕국은 주변의 무슬림 도시 다마스쿠스와 협력 및 성전 기사단 등 종교 기사단의 활약에 의해 영토를 유지했으나, 1144년 이슬람의 사자, 장기에게 에데사 백국을 빼앗기고, 제2차 십자군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하자 다마스쿠스가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에게 지배당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 후 약체화된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에 대한 공세를 가해 누르 앗 딘의 부장 시르쿠와 이집트의 지배를 다투었으나, 결국 이집트는 시르쿠의 조카 살라흐 앗 딘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누레딘, 예루살렘 왕 아모리가 같은 시기에 사망했기 때문에 왕국은 살라흐 앗 딘의 강력한 압력을 받게 되었다. 아모리의 사후, 뒤를 계승한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는 지병인 나병으로 인해 후사가 없었고 그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종래 십자군들을 중심으로 한 궁정파와 현지 제후를 중심으로 한 귀족파의 세력다툼이 치열했다.

1187년 누레딘의 사업을 계승한 이슬람의 영웅 살라흐 앗 딘이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낭을 격파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팔레스타인의 해안쪽으로 쫓겨났고, 서유럽에서 제3차 십자군이 조직되어 성지로 몰려왔으나, 성지탈환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제6차 십자군 당시 시칠리아에서 자라나 아랍어에 능숙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교교섭을 통해 예루살렘을 회복하였으나, 1244년 전체 면적의 3분의 2를 잃어버렸다.

그 후에도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국가는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에게 아크레항 주변으로 쫓겨났었고 예루살렘 왕국의 이름도 계속 존재했으나, 1291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의해 아크레를 함락당해 멸망했다.

2. 1. 제1차 십자군과 왕국 건국

로마 교황청의 호소로 성지로 향한 제1차 십자군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군대의 지도자였던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성묘 수호자로 임명되었다.[9][10][11] 이는 그리스도가 목숨을 잃은 장소에서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고드프루아는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무슬림 세력을 토벌하다가 1100년 사망했고, 그의 동생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가 뒤를 이어 예루살렘의 국왕 명칭을 사용하며 십자군 국가 예루살렘 왕국이 탄생했다.[14]

1099년 예루살렘 포위 공격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제1차 십자군의 지도자 부용의 고드프루아는 예루살렘 왕국의 첫 번째 통치자가 되었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셀주크 제국의 침략에 맞서 동로마 제국을 지원하고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제1차 십자군 원정을 결정했다.[7] 아나톨리아 반도와 시리아의 영유권을 놓고 대 셀주크 제국과 다투던 이슬람 세력은 1092년에 분열되었고, 이는 십자군이 예루살렘 왕국을 건국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99]

예루살렘 왕은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등 십자군 국가에 대한 종주권을 가졌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인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유럽과의 해상 교통 및 병참로를 확보하고 레반트 교역에 종사했다.

십자군은 이해가 대립된 제후들의 연합군이었기에,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은 서로 대립하였다. 현지 제후들은 이교도와의 융화나 공존을 목표로 한 반면, 새로운 십자군들과 교회 관계자들은 이슬람교도와의 전투를 요구하여 왕국의 방침은 일정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왕국은 다마스쿠스와 협력하고 성전 기사단 등 종교 기사단의 활약으로 영토를 유지했으나, 1144년 장기에게 에데사 백국을 빼앗기고 제2차 십자군이 철수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파티마 왕조에 대한 공세로 시르쿠와 이집트 지배를 다투었으나,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를 지배하고, 누르 앗 딘과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가 사망하면서 왕국은 살라흐 앗 딘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궁정파와 귀족파의 세력 다툼이 치열했다.

1187년 살라흐 앗 딘이 하틴 전투에서 뤼지냥의 기를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팔레스타인 해안으로 쫓겨났고, 제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으나 성지 탈환은 실패했다. 제6차 십자군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교 교섭으로 예루살렘을 회복했으나, 1244년 영토의 3분의 2를 잃었다.

아이유브 왕조에게 아크레 주변으로 쫓겨난 예루살렘 왕국은 1291년 맘루크 왕조에 의해 아크레를 함락당해 멸망했다.

2. 2. 왕국의 확장과 발전

로마 교황청의 호소에 따라 제1차 십자군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을 성묘 수호자로 임명했다. 고드프루아는 그리스도가 목숨을 잃은 장소에서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1100년 예루살렘에서 사망했다. 그의 동생 보두앵이 예루살렘의 국왕 칭호를 사용하며 십자군 국가 예루살렘 왕국이 탄생했다.[16][17][18]

예루살렘 왕은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등 다른 십자군 국가에 대한 종주권을 가졌다.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유럽과의 해상 교통 및 병참로를 확보하고 레반트 교역에 종사했다.

초기 십자군은 제후들의 연합군이었기에, 현지 제후국들도 에데사 백국(북부 프랑스 제후), 안티오키아 공국(남부 이탈리아 노르만인 제후), 트리폴리 백국(남부 프랑스 제후) 간의 대립이 있었다. 현지 제후들은 이교도와의 융화나 공존을 목표로 했지만, 새로운 십자군이나 교회 관계자들은 이슬람교도와의 전투를 요구하여 왕국의 방침은 일정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왕국은 다마스쿠스와 협력하고 성전 기사단 등 종교 기사단의 활약으로 영토를 유지했다. 그러나 1144년 장기에게 에데사 백국을 빼앗기고, 제2차 십자군이 성과 없이 철수하면서 다마스쿠스가 누르 앗 딘에게 지배당하는 등 상황이 악화되었다.

발두인 1세 통치 기간 동안, 1101년 십자군의 지원으로 유럽인 거주자가 증가하고 왕국은 확장되었다.[110] 그는 1115년 요르단강 건너편을 원정하여 프랑크족과 토착 기독교인들로 예루살렘을 재건했다.[16][111] 시구르 1세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도움으로 아크(1104년), 베이루트(1110년), 시돈(1111년)을 점령하고, 다른 십자군 국가들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했다. 그는 람라 전투와 알-산나브라 전투에서 무슬림 침략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17][111] 토마스 매든은 발두인이 "예루살렘 왕국의 진정한 창시자"이며 "불안정한 상황을 확고한 봉건 국가로 변모시켰다"고 평가했다.[18][112]

책에서 발두인 1세의 장례식 1462년까지 프랑스인들이 투르크족에 대항하여 샤를마뉴 이후 행한 해외 통행.


발두인은 아르다와 결혼했으나, 이후 아델라이드 델 바스토와 중혼했다가 이혼했다. 이로 인해 시칠리아의 로제르 2세는 예루살렘을 용서하지 않고 해군 지원을 거부했다.[19][113]

1118년 발두인 1세 사후, 그의 형제 부르의 유스타스 3세는 왕위를 거절했고, 부르의 발두인이 왕위를 계승했다. 발두인 2세는 파티미드와 셀주크의 침략을 막아냈고, 아게르 상귀니스 전투 이후 안티오크가 약화되었지만, 아자즈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구호 기사단과 템플 기사단이 설립되었고, 나블루스 공의회에서 왕국의 초기 법률이 편찬되었으며,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상업 조약(파쿰 웜문디)이 체결되었다. 베네치아의 지원으로 티레를 점령했고, 예루살렘의 영향력은 에데사와 안티오크로 확대되었다.[20][114] 발두인 2세는 멜리테네의 모피아와 결혼하여 네 딸을 두었고, 맏딸 예루살렘의 멜리센데가 앙주의 풀크 5세와 함께 왕위를 계승했다.[21][115]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는 약화되었고, 누르 앗 딘의 부장 시르쿠와 이집트 지배를 다투었으나,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를 지배하게 되었다. 누레딘과 아모리가 사망하면서 왕국은 살라흐 앗 딘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아모리의 후계자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는 나병으로 후사가 없었고, 후계자를 둘러싼 권력 다툼이 치열했다.

1187년 살라흐 앗 딘은 하틴 전투에서 기 드 뤼지낭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해안으로 쫓겨났고, 제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으나 성지 탈환에 실패했다. 제6차 십자군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교 교섭으로 예루살렘을 회복했으나, 1244년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다.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국가는 아이유브 왕조에게 아크레 주변으로 쫓겨났고, 예루살렘 왕국의 이름은 계속 존재했으나, 1291년 맘루크 왕조에 의해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멸망했다.

2. 3. 에데사 함락과 제2차 십자군

제1차 십자군이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십자군 국가예루살렘 왕국이 탄생했다. 초기에는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등에 대한 종주권을 가졌으나, 이들 국가와의 대립, 그리고 새로운 십자군과 기존 정착민 간의 갈등으로 왕국의 방침은 일관되지 못했다.

1144년 이슬람의 사자, 장기에게 에데사 백국을 빼앗기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에데사는 1144년 장기에게 함락되었고, 이는 유럽에 큰 충격을 주어 제2차 십자군의 원인이 되었다.[26][120]

앙주 백작풀크 5세 사후, 멜리잔드 여왕과 이에르주의 마나세스가 예루살렘 군을 지휘했으나, 1146년 장기가 암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데사 탈환에 실패했다.[26][120]

1148년 아크에서 회의를 통해, 프랑스의 루이 7세, 독일의 콘라트 3세, 멜리센드, 발두인 3세 등은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로 합의했다.[27][121] 다마스쿠스는 이전과 달리 누르 앗딘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27][121] 다마스쿠스 공방전은 실패로 끝났고, 십자군은 퇴각했다. 배신과 뇌물에 대한 소문이 돌았고, 콘라트 3세는 예루살렘 귀족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27][121] 결국 프랑스와 독일 군대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몇 년 뒤 다마스쿠스는 누르 앗 딘의 완전한 통제하에 들어갔다.[27][121]

1922년판 프랑스어 사전 프티 라루스에 그려진 십자군 병사의 삽화.

2. 4. 내부 갈등과 혼란

로마 교황청의 호소로 제1차 십자군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성묘 수호자가 되었으나, 그리스도가 목숨을 잃은 곳에서 왕이 되는 것을 꺼려 이를 거절했다. 고드프루아 사후, 동생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가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 왕국이 탄생했다. 초기 십자군은 연합군이었기에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등이 서로 대립했고, 현지 제후와 새 십자군 간의 갈등으로 왕국 방침은 일정치 않았다. 다마스쿠스와 협력, 성전 기사단 등의 활약으로 영토를 유지했으나, 1144년 장기에게 에데사 백국을 빼앗기고 제2차 십자군마저 실패하자 상황이 악화되었다.

현재의 다윗의 탑


제2차 십자군의 실패는 예루살렘 왕국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유럽 제후들은 대규모 원정군 파견을 주저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소규모 군대만 파견되었다.[122] 반면 이슬람 세계는 누르 앗 딘 아래 점차 통일되었고, 1149년 이나브 전투에서 안티오키아 공국 군대가 격파되었으며, 1154년 다마스쿠스가 제압되었다. 누르 앗 딘의 통치 하에서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반격은 지하드로 여겨졌다.[122]

예루살렘에서는 국왕 보두앵 3세와 섭정 멜리상드 사이의 갈등으로 왕국이 혼란스러웠다.[123] 멜리상드는 마나세스 드 이르주, 아모리, 필리프 드 밀리, 이벨린 가문의 지원을 받았다. 보두앵 3세는 안티오키아와 트리폴리 분쟁을 조정하고 이벨린 가문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주장했다. 1153년, 보두앵 3세는 단독 왕으로 즉위하고 왕국을 분할 통치하는 타협을 이루었으나, 곧 멜리상드의 영지를 침공하여 다윗의 탑에 웅거한 멜리상드를 포위했다.[123] 멜리상드는 항복 후 나블루스로 물러났지만, 보두앵 3세는 그녀를 섭정으로 임명하여 영향력을 유지시켰다.[123] 1153년, 아스칼론을 함락하여 야파 백국에 편입시켰다.[124]

비잔틴 제국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의 프레스코화


아스칼론 점령으로 남부 국경은 안정되었지만, 파티마 왕조는 쇠퇴하여 속국으로 전락했다. 동쪽에서는 누르 앗 딘이 여전히 위협적이었고, 보두앵 3세는 마누엘 1세 콤네노스와 동맹을 맺었다. 보두앵 3세는 테오도라 콤네노와, 마누엘 1세는 마리아 도 안티오키아와 결혼했다.[125]

1162년 보두앵 3세 사후, 아모리 1세가 즉위했다. 1163년 파티마 왕조가 공납 지급을 중단하고 누르 앗 딘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아모리 1세는 이집트를 원정했으나 실패했다.[126] 파티마 재상 샤와르는 누르 앗 딘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장군 시르쿠가 파견되었다. 샤와르는 아모리 1세와 동맹을 맺고 빌베이스를 포위했으나, 안티오키아 공국이 누르 앗 딘의 침공을 받아 철수했다.[126] 1166년 누르 앗 딘은 다시 시르쿠를 파견했고, 샤와르는 십자군과 동맹을 맺어 알-바베인 전투에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양측 모두 철수했고, 샤와르는 십자군 주둔 병과 함께 카이로에 머물렀다.[126] 아모리 1세는 테오도라 콤네노와 결혼하고, 기욤 드 티르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하여 군사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모리 1세는 빌베이스를 약탈하여 샤와르가 다시 누르 앗 딘 측으로 돌아서게 했다. 샤와르는 암살되었고, 1169년 시르쿠 사후 살라딘이 계승했다. 마누엘 1세는 300척의 함대를 파견하여 다미에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127]

십자군의 이집트 원정 실패 후, 살라딘은 술탄이 되었고, 누르 앗 딘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누르 앗 딘은 원정을 준비했으나 1174년 사망했고, 살라딘은 시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128] 1180년 마누엘 1세 사망으로 예루살렘은 최대 동맹국을 잃었다.

이후 코트네의 아그네스와 코트네 가문, 유럽 출신 신참들로 구성된 "궁정파"와 트리폴리의 레이몽 3세와 하위 귀족들이 이끄는 "귀족파" 간의 투쟁이 격화되었다.[40] 마일스 드 플랑시는 보두앵 4세의 섭정이었으나 1174년 암살되었고, 트리폴리의 레이몽 3세가 섭정이 되었다. 보두앵 4세는 1176년 성년이 되었고, 에데사의 조슬랭 3세를 궁내관으로 임명했다. 나병 환자였던 보두앵 4세는 후사가 없었고, 시빌라와 이사벨라에게 왕위가 넘어갔다. 시빌라는 몬페라토의 윌리엄과 결혼했고, 윌리엄 사후 샤티용의 레이날드가 섭정이 되었다.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의 이상화된 12세기 지도.


플랑드르의 필립이 예루살렘에 왔으나 섭정을 거절했고, 시빌라의 남편 협상에 개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예루살렘 군대 대부분이 북쪽으로 진군한 사이, 살라딘이 왕국을 침략했고, 보두앵 4세는 1177년 9월 몽기사르 전투에서 승리했다. 1180년 부활절, 레이몽과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3세는 시빌라에게 이벨린의 보두앵과 결혼을 강요하려 했으나, 보두앵 4세는 루시냥의 기와 결혼시켰다.

1180년 총대주교 선출에서 티레의 윌리엄과 카이사레아의 헤라클리우스가 대립했고, 헤라클리우스가 선출되었다.[41] 1181년 말, 샤티용의 레이날드는 아라비아 남쪽을 습격했고, 무슬림 대상을 공격했다. 살라딘은 1182년 왕국을 공격했으나 벨부아 성에서 패배했다. 1182년 12월, 레이날드는 홍해 해상 원정을 시작했으나 실패했다.

1183년 왕국에 일반 세금이 부과되었고, 살라딘이 알레포를 장악하면서 더 많은 군대가 필요했다. 보두앵 4세는 기를 섭정으로 임명했으나, 기는 살라딘에게 공격 기회를 놓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1183년 10월, 이사벨라는 케라크에서 결혼했고, 살라딘은 케라크를 포위했다. 보두앵 4세는 기를 해임하고 보두앵 5세를 공동 왕으로 즉위시켰다. 레이몽과 화해하고 군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184년 살라딘은 다시 포위했으나 실패했다. 1184년 10월, 기는 베두인족 유목민을 공격했다. 보두앵 4세는 1185년 5월 사망했다.

1184년 헤라클리우스 총대주교는 유럽을 방문했으나 도움을 받지 못했다. 보두앵 5세는 1186년 여름 사망했다. 시빌라는 기와의 결혼 무효 조건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기에게 왕관을 씌웠다. 레이몽은 이사벨라를 즉위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벨린의 보두앵은 안티오키아로 떠났다.

1256년, 베네치아 공화국제노바 공화국의 상업 경쟁이 전쟁으로 번졌다.[148] 아크레에서 성 사바 수도원 소유권을 두고 다투었고, 제노바는 베네치아 구역을 공격했으나 베네치아가 승리했다. 구호 기사단은 제노바를 지원했다. 1257년 베네치아는 수도원을 정복했으나 제노바를 몰아내지 못했다. 1258년 제노바 함대가 아크레를 공격했으나 해전에서 패배했다.[148] 우르바노 4세는 1261년 공의회를 통해 왕국 질서 회복을 시도했으나, 제노바는 아크레로 돌아오지 못했다.[148]

2. 5. 살라딘의 등장과 예루살렘 함락

로마 교황청의 호소로 제1차 십자군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성묘 수호자가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목숨을 잃은 장소에서 왕이 되는 것을 꺼려 이 칭호를 거부했다. 1100년 고드프루아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가 예루살렘의 국왕 칭호를 사용하며 십자군 국가 예루살렘 왕국이 탄생했다.

예루살렘 왕은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등 다른 십자군 국가들에 대한 종주권을 가졌다.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유럽과의 해상 교통 및 레반트 교역에 종사했다.

십자군은 제후들의 연합군이었기에,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은 서로 대립했다. 현지 제후는 이교도와의 융화를 추구한 반면, 새로운 십자군과 교회 관계자는 이슬람교도와의 전투를 요구하여 왕국의 방침은 일정하지 않았다. 다마스쿠스와 협력, 성전 기사단 등 종교 기사단의 활약으로 영토를 유지했으나, 1144년 장기에게 에데사 백국을 빼앗기고 제2차 십자군이 철수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파티마 왕조에 대한 공세로 누르 앗 딘의 부장 시르쿠와 경쟁했으나, 이집트는 시르쿠의 조카 살라흐 앗 딘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누르 앗 딘과 아모리의 사망으로 왕국은 살라흐 앗 딘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는 나병으로 후사가 없었고, 후계자를 둘러싸고 궁정파와 귀족파의 다툼이 치열했다.

아스칼론 점령으로 남부 국경은 안정되었고, 파티마 왕조는 예루살렘 왕국의 조공국으로 전락했다. 보두앵 3세는 마누엘 1세 콤네노스와 동맹을 맺고, 와 결혼했다.[125] 마누엘은 보두앵의 사촌 마리아 도 안티오키아와 결혼했다.[125]

1162년 보두앵 3세 사망 후, 아모리가 즉위했다.[125] 1163년 했으나 실패했다.[125] 샤와르는 시르쿠를, 이후에는 아모리 1세와 동맹을 맺는 등 변동을 거듭했다.[126] 1164년 하림 전투에서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3세와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패배했다.[126] 1166년 시르쿠는 다시 이집트로 파견되었고, 에서 십자군과 전투를 벌였다.[126] 아모리는 와 결혼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군사 원정을 협의했다.[127]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지원을 기다리지 않고 이집트를 공격하여 실패했다.[127] 1169년 살라딘이 시르쿠의 사업을 계승했다.[127] 마누엘 1세는 300척의 비잔틴 함대를 파견했으나, 다미에타 공격은 실패했다.[127]

살라딘은 이 되었고, 누르 앗딘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128] 1174년 누르 앗딘과 아모리 1세 사망 후, 살라딘은 시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128] 1180년 마누엘 1세 사망으로 예루살렘은 최대 동맹국을 잃었다.[128]

1174년 누르 알딘과 아모리 1세가 사망하고, 살라딘의 세력은 시리아까지 확장되었다.

보두앵 4세는 나병으로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다. 궁정파는 시빌라를, 귀족파는 이사벨을 지지하며 대립했다.

1176년부터 보두앵 4세는 친정하며 균형을 잡았으나, 몽기사르 전투 이후 파벌 싸움은 심해졌다. 시빌라는 기 드 뤼지냥과 결혼하고, 이사벨은 옹프로와 4세와 결혼했다.

1183년 케라크 성에서 열린 이사벨의 결혼식을 살라딘이 습격하자, 보두앵 4세는 출진하여 기의 섭정직을 해임하고 보두앵 5세를 공동 왕으로 삼았다.

1185년 보두앵 4세 사망 후, 보두앵 5세가 즉위했으나 1년 만에 사망했다. 시빌라는 즉위 조건으로 기와의 이혼을 요구받았으나, 즉위 후 기를 국왕으로 즉위시켰다. 쿠데타는 실패했다.

기는 템플 기사단과 결탁하여 살라딘과의 대결 자세를 강화했다. 1186년 르노 드 샤티용은 메카 순례자들을 학살했고, 살라딘과의 휴전은 깨졌다. 1187년 7월 4일 히틴 전투에서 십자군은 대패했고, 기, 르노 등이 포로가 되었다.

살라딘은 콘라트 1세가 지키는 티르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를 함락시키고 예루살렘에 육박했다. 은 했지만, 1187년 10월 2일 항복했다. 살라딘은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여 시민들의 퇴거를 허용했다.

1187년 누레딘의 사업을 계승한 살라흐 앗 딘이 하틴 전투에서 기 드 뤼지낭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팔레스타인 해안으로 쫓겨났고, 제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으나 성지 탈환에 실패했다. 제6차 십자군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교로 예루살렘을 회복했으나, 1244년 대부분을 상실했다.

십자군 국가는 아이유브 왕조에게 아크레 주변으로 쫓겨났고, 1291년 맘루크 왕조에 의해 아크레를 함락당해 멸망했다.

얀 리벤스(Jan Lievens)가 그린 기 드 뤼지냥(오른쪽)이 살라딘(왼쪽)에게 사로잡힌 17세기 그림.


제3차 십자군이 시작될 무렵인 서기 1190년경 근동 지역.


티베리아스에 무슬림 수비대가 주둔했다. 살라딘은 1187년에 휴전이 만료될 때 갱신할 의사가 없었다. 휴전 만료 전, 르노 드 샤티용이 무슬림 대상단을 공격했다. 이벨린의 발리앙은 1187년 부활절에 화해를 성사시켰다. 살라딘은 4월에 케라크를 다시 공격했고, 5월에는 크레송 전투에서 패배했다.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왕국의 군대는 파괴되었다. 트리폴리의 레몽, 이벨린의 발리앙, 시돈의 레지날드는 탈출했지만, 레날드는 살라딘에게 처형되었고, 기는 다마스쿠스에 투옥되었다.

몇 달 동안 살라딘은 왕국 전체를 장악했다. 콘라트 1세 (몬페라토)가 방어하고 있던 티레만이 프랑크인들의 손에 남아 있었다. 예루살렘의 함락은 초대 예루살렘 왕국을 종식시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티레, 트리폴리 또는 이집트로 도망갈 수 있었고, 자유를 얻을 돈이 없는 사람들은 노예로 팔렸다. 제3차 십자군으로 이어졌지만,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항해 중에 익사했다.

아크레 공방전 동안, 예루살렘의 헤라클리우스 대주교, 여왕 시빌라와 그녀의 딸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1190년 시빌라가 사망하면서 기는 왕위에 대한 법적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왕위는 이사벨라에게 넘어갔다. 콘라트는 이사벨라와 결혼했지만, 기는 왕위를 양보하는 것을 거부했다.

리처드가 1191년에 도착했을 때, 그와 필리프는 왕위 계승 분쟁에서 서로 다른 편에 섰다. 필리프는 1191년에 귀국했다. 리처드는 1191년 아르수프 전투와 1192년 자파 전투에서 살라딘을 격파하여 해안 대부분을 회복했지만, 예루살렘이나 왕국의 내륙 영토는 회복할 수 없었다.[42] 콘라트는 1192년 4월에 왕으로 선출되었지만, 암살단에 의해 살해되었다. 키프로스 섬을 보상으로 기에게 팔았고, 기는 1194년 사망할 때까지 예루살렘의 왕위를 주장했다.

1192년에 협상된 람라 조약으로 십자군은 평화롭게 종결되었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으로의 순례를 허용했다. 토착 십자군 남작들은 아크레와 다른 해안 도시에서 왕국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2. 6. 제3차 십자군과 아크 왕국

로마 교황청의 호소로 제1차 십자군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성묘 수호자가 되었다.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가 뒤를 이으며 예루살렘 국왕 칭호를 사용, 십자군 국가 예루살렘 왕국이 탄생했다. 초기 예루살렘 왕은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등 다른 십자군 국가들에 대한 종주권을 가졌고,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 등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유럽과의 해상교통 및 병참로를 확보하고 레반트 교역에 종사했다.

십자군은 제후들의 연합군이었기에, 현지 제후국들도 에데사 백국(북부 프랑스 제후), 안티오키아 공국(노르만인 제후), 트리폴리 백국(남부 프랑스 제후) 간의 대립이 있었고, 현지 제후와 새 십자군 및 교회 관계자 간의 갈등도 있었다. 예루살렘 왕국은 다마스쿠스와 협력, 성전 기사단 등 종교 기사단의 활약으로 영토를 유지했으나, 1144년 장기에게 에데사 백국을 빼앗기고 제2차 십자군이 실패하며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후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공격, 누르 앗 딘의 부장 시르쿠와 경쟁했으나,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를 지배하고, 아모리가 사망하며 압박이 커졌다.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는 나병으로 후사가 없었고, 후계자를 둘러싼 궁정파와 귀족파의 다툼이 치열했다.

1187년 살라흐 앗 딘이 하틴 전투에서 기 드 뤼지낭을 격파해 예루살렘을 탈환했고, 예루살렘 왕국은 팔레스타인 해안으로 쫓겨났다. 제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으나 성지 탈환에 실패했다. 제6차 십자군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교를 통해 예루살렘을 회복했으나, 1244년 다시 상실했다.

트리폴리의 레몽은 기를 상대로 살라딘과 동맹을 맺고 티베리아스에 무슬림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살라딘은 1187년에 휴전이 만료될 때 갱신할 의사가 없었고, 샤티용의 레날드는 무슬림 대상단을 공격했다. 기는 레몽을 공격하려 했지만, 이벨린의 발리앙이 화해를 성사시켰다. 살라딘은 4월에 케라크를 공격했고, 5월에는 크레송 전투에서 패배했다. 레몽과 기는 티베리아스에서 살라딘을 공격하기로 합의했지만, 기는 살라딘을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패배했다. 레몽, 이벨린의 발리앙, 시돈의 레지날드는 탈출했지만, 레날드는 처형되었고, 기는 투옥되었다.

이후 살라딘은 왕국 전체를 장악했고, 콘라트 1세 (몬페라토)가 방어하던 티레만이 남았다. 예루살렘 함락으로 예루살렘 왕국은 종식되었다. 사람들은 티레, 트리폴리, 이집트로 도망갔고, 자유를 얻을 돈이 없는 사람들은 노예로 팔렸다. 제3차 십자군이 이어졌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항해 중 익사했다.

콘라트가 티레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기에 기는 1189년 아크레를 포위했다. 1191년까지 이어진 포위 동안, 여럿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1190년 시빌라가 사망, 왕위는 이사벨라에게 넘어갔다. 이사벨라와 험프리의 결혼은 무효가 되었고, 콘라트는 이사벨라와 결혼했지만, 기는 왕위를 양보하지 않았다.

리처드가 1191년에 도착, 왕위 계승 분쟁에서 기를 지지했고, 필리프는 콘라트를 지지했다. 필리프는 1191년에 귀국했다. 리처드는 1191년 아르수프 전투와 1192년 자파 전투에서 살라딘을 격파, 해안을 회복했지만, 예루살렘은 회복할 수 없었다. 콘라트는 1192년 4월에 왕으로 선출되었지만, 암살단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사벨라는 샴페인의 앙리 2세 백작과 결혼했지만, 리처드는 키프로스 섬을 기에게 팔았고, 기는 1194년 사망할 때까지 왕위를 주장했다.

1192년 람라 조약으로 십자군은 평화롭게 종결되었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으로의 순례를 허용했다. 토착 십자군 남작들은 아크레와 다른 해안 도시에서 왕국을 재건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그 다음 백 년 동안 시리아 해안선을 따라 자리 잡은 작은 왕국으로 남았다. 수도는 아크레로 옮겨졌으며,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남부 및 중부 레바논 해안선의 대부분을 통제했는데, 여기에는 야파, 아르수프, 카이사레아, 티레, 시돈, 베이루트 등의 요새와 도시가 포함되었다. 기껏해야 아스칼론과 몇몇 내륙 요새, 그리고 종주권이 있는 트리폴리와 안티오크와 같은 몇몇 다른 주요 도시만 포함했다. 새로운 왕, 샹파뉴의 앙리는 1197년 사고로 사망했고, 이사벨라는 네 번째 결혼을 하여 기의 동생인 루지냥의 아모리와 결혼했다. 아모리는 이미 기에게서 키프로스를 상속받았고,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의 아들인 황제 하인리히 6세로부터 왕으로 즉위했다. 하인리히는 1197년 십자군을 이끌었지만 도중에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군대는 1198년에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베이루트와 시돈을 왕국을 위해 재탈환했다. 이후 1198년에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와 5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아이유브 제국은 1193년 살라딘 사망 후 내전에 휩싸였다. 그의 아들들은 제국의 여러 부분을 차지했다. 아즈-자히르는 알레포를 장악했고, 알-아지즈 우스만은 카이로를, 장남 알-아프달은 다마스쿠스를 유지했다. 살라딘의 형제 알-아딜 사이프 아드-딘 (십자군에게는 종종 "사파딘"으로 불림)은 알-자지라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획득했고, 알-아딜의 아들 알-무아잠은 카락과 트란스요르단을 차지했다. 1196년, 알-아프달은 우스만과 동맹을 맺은 알-아딜에 의해 다마스쿠스에서 쫓겨났다. 우스만이 1198년에 사망하자, 알-아프달은 우스만의 어린 아들을 위해 이집트 섭정으로 권력을 되찾았다. 그는 아즈-자히르와 동맹을 맺고 삼촌을 다마스쿠스에서 공격했다. 동맹이 깨지자, 알-아딜은 이집트에서 알-아프달을 격파하고 그 땅을 병합했다. 1200년 알-아딜은 스스로를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으로 선포하고, 다마스쿠스는 알-무아잠에게, 알-자지라는 또 다른 아들 알-카밀에게 맡겼다. 두 형제의 두 번째 실패한 다마스쿠스 포위 공격 후, 알-아프달은 사모사타와 여러 다른 도시로 구성된 봉토를 받아들였다. 알레포의 아즈-자히르는 1202년에 삼촌에게 복종하여 아이유브 영토를 재통합했다.

한편, 이집트를 통해 예루살렘을 재정복하기 위한 계획이 수립되었다. 세 번째 십자군의 실패 후 제4차 십자군이 계획되었지만,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로 이어졌고, 관련된 대부분의 십자군은 왕국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모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의 우회를 알지 못하고 예상된 침략에 앞서 이집트를 급습했다. 1205년 이사벨라와 아모리가 모두 사망했고, 이사벨라와 콘라드의 딸인 미성년 소녀 몽페라의 마리아가 예루살렘의 여왕이 되었다. 이사벨라의 이복 형제 베이루트의 늙은 영주 이벨린의 존은 1210년 마리아가 경험이 풍부한 프랑스 기사 브리엔의 존과 결혼할 때까지 섭정으로 통치했다. 마리아는 1212년 출산 중 사망했고, 브리엔의 존은 딸 이사벨라 2세를 위해 섭정으로 계속 통치했다.

프리드리히 2세(왼쪽)가 알-카밀(오른쪽)을 만나는 모습.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이집트를 상대로 더욱 잘 조직된 새로운 십자군을 소집했다. 1217년 말,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와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6세 공작이 아크레에 도착했고, 브리엔의 존과 함께 타보르 산을 포함한 내륙 지역을 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헝가리인들이 떠난 후, 남은 십자군은 1217년 겨울과 1218년 봄 동안 카이사리아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와 템플 기사단의 요새 샤토 펠랭(Château Pèlerin)을 재건하는 데 착수했다.

1218년 봄, 독일 십자군 함대가 아크레에 상륙하면서 제5차 십자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십자군의 지도자로 선출된 존 왕과 함께 함대는 이집트로 항해하여 5월에 나일강 하구의 다미에타를 포위했다. 포위 공격은 천천히 진행되었고, 십자군이 다미에타의 탑 중 하나를 점령한 후, 이집트 술탄 알-아딜이 충격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알-카밀이 그의 뒤를 이었다. 1218년 가을, 교황 사절 알바노의 펠라기우스를 포함한 유럽에서 지원군이 도착했다. 겨울에 십자군은 홍수와 질병의 영향을 받았고, 포위 공격은 1219년까지 이어졌으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휴전을 협상하기 위해 도착했다. Ayyub 왕조는 30년 휴전과 예루살렘과 이전 왕국의 대부분을 복원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양측은 합의에 도달할 수 없었다. 십자군은 마침내 도시를 굶주리게 하여 11월에 점령했다. 알-카밀은 인근 요새 알-만수라로 후퇴했지만, 십자군은 1219년과 1220년 내내 다미에타에 머물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 Holy Roman Emperor)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존 왕은 다마스쿠스에서 왕국을 습격하고 있던 알-무아잠에 맞서기 위해 잠시 아크레로 돌아갔다. 황제의 임박한 도착을 여전히 예상하며, 1221년 7월, 십자군은 카이로로 출발했지만, 나일강 범람으로 멈춰 섰고, 알-카밀은 강을 따라 댐을 파괴하여 홍수를 일으켰다. 술탄은 갇힌 십자군을 쉽게 물리치고 다미에타를 되찾았다. 실제로 황제 프리드리히는 유럽을 떠난 적이 없었다.

십자군 실패 후, 존은 지원을 구하기 위해 유럽 전역을 여행했지만, 프리드리히로부터만 지원을 받았고, 프리드리히는 1225년 존과 마리아의 딸 이사벨라 2세와 결혼했다. 다음 해, 이사벨라는 그들의 아들 콘라트 4세(Conrad IV of Germany)를 낳다가 사망했고, 그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동방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제5차 십자군을 이끌겠다는 약속을 저버렸지만, 콘라트를 통해 왕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굳히고 싶어 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이집트 사절과 논의되었던 동맹인 알-카밀과 다마스쿠스의 알-무아잠을 공격할 계획도 있었다. 그러나 성지로 출발을 계속 지연시키면서, 함대에서 질병이 발생한 것을 포함하여, 그는 122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 파문당했다. 프리드리히가 아닌 그의 대리인 리처드 필란기에리, 림부르크의 하인리히 4세, 독일 기사단의 대기사 잘차의 헤르만이 이끄는 십자군은 1227년 말 동방에 도착했고, 황제를 기다리는 동안 시돈을 재건하고, 그곳에 시돈 해상 요새를 건설했으며, 나중에 튜튼 기사단의 본부가 된 몽포르 성을 건설했다. 다마스쿠스의 Ayyub 왕조는 감히 공격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알-무아잠이 얼마 전에 갑자기 죽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는 마침내 1228년 9월 제6차 십자군에 도착하여, 어린 아들의 이름으로 왕국의 섭정을 주장했다.

프리드리히는 즉시 아웃르메르의 토착 귀족들과 갈등을 겪었는데, 그 중 일부는 키프로스와 예루살렘 모두에 황제의 권위를 부여하려는 그의 시도에 반대했다. 키프로스 귀족들은 이미 아직 어린 키프로스의 앙리 1세의 섭정을 두고 서로 다투고 있었다. 키프로스 고등 법원은 이벨린의 존을 섭정으로 선출했지만, 앙리의 어머니 샹파뉴의 앨리스는 자신의 지지자를 임명하고 싶어했다. 앨리스와 그녀의 측근, 즉 뤼지냥 왕조의 구성원 또는 지지자들은 프리드리히 편에 섰는데, 그의 아버지는 1197년에 뤼지냥의 아메리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리마솔에서 프리드리히는 존에게 키프로스 섭정뿐만 아니라 본토의 베이루트의 영주권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존은 프리드리히에게 그러한 요구를 할 법적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며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존의 아들을 인질로 잡아 존이 자신의 십자군을 지지하도록 보장했다.

존은 프리드리히와 함께 본토로 갔지만, 프리드리히는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그의 몇 안 되는 지지자 중 한 명은 시돈의 발리안이었는데, 그는 전년도에 십자군을 환영했고, 이제 Ayyub 왕조에 대사로 활동했다. 알-무아잠의 죽음은 알-카밀과의 제안된 동맹을 무효화했는데, 그는 동생 다마스쿠스의 아슈라프 무사(Al-Ashraf Musa)와 함께 조카인 알-무아잠의 아들 안-나시르 다우드로부터 다마스쿠스(및 예루살렘)를 차지했다. 그러나 알-카밀은 프리드리히 군대의 규모가 작다는 사실과 파문으로 인한 분열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또 다른 십자군에 맞서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고 싶지 않았다. 프리드리히의 존재만으로도 싸움 없이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 주변의 여러 성들을 되찾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1229년 2월에 Ayyub 왕조와의 10년 휴전과 예루살렘의 무슬림 주민들의 예배 자유를 대가로 회복되었다. 이 조약의 조건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로잔의 제랄드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고, 그는 그 도시에 성무 정지를 내렸다. 3월에 프리드리히는 성묘 교회에서 스스로에게 왕관을 씌웠지만, 그의 파문과 성무 정지 때문에 예루살렘은 왕국에 진정으로 재통합되지 않았고, 아크레에서 계속 통치되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 교황은 프리드리히의 파문을 핑계로 그의 이탈리아 영토를 침략했다. 교황군은 프리드리히의 전 장인이었던 브리엔의 존이 이끌었다. 프리드리히는 1229년에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아크레 시민들로부터 "승리가 아닌 오물 세례"를 받으며 성지를 떠났다.

|thumb|마리아 몽페라토와 브리엔의 장의 대관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는 1231년 리처드 필란지에리를 지휘관으로 하여 황제 군대를 파견하여 베이루트와 티레를 점령했지만 아크레를 장악하지는 못했다. 장의 지지자들은 코뮌을 아크레에 결성했고, 장은 1232년에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제노바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코뮌은 베이루트를 탈환했다. 장은 또한 티레를 공격했지만, 1232년 5월 카잘 임베르 전투에서 필란지에리에게 패했다.

키프로스에서, 1232년에 국왕 앙리 1세가 성년이 되었고 장의 섭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장과 필란지에리는 모두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키프로스로 달려갔고, 황제 군대는 6월 15일 아그리디 전투에서 패배했다. 앙리는 키프로스의 명실상부한 국왕이 되었지만, 루지냥가와 황제 측보다 이벨린가를 계속 지지했다. 본토에서, 필란지에리는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4세, 튜튼 기사단, 구호 기사단, 피사 상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장은 키프로스에 있는 자신의 귀족들과 베이루트, 카이사레아, 아르수프에 있는 자신의 대륙 영토뿐만 아니라 템플 기사단과 제노바의 지지를 받았다. 어느 쪽도 진전을 이루지 못했고,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장과 그의 지지자들을 파문했다. 이것은 1235년에 부분적으로 철회되었지만, 여전히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은 1236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베이루트의 발리안과 그의 조카 티레의 영주 필립 몽포르가 전쟁을 이어받았다.

한편, 아이유브 왕조와의 조약은 1239년에 만료될 예정이었다.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새로운 십자군 계획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프리드리히는 1239년에 다시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파문되었다. 그러나 나바라의 테오발도 1세, 샹파뉴 백작이자 나바라 왕,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 몽포르의 아모리 6세를 포함한 다른 유럽 귀족들이 이 대의를 받아들여 1239년 9월 아크레에 도착했다. 테오발도는 십자군의 지도자로 아크레에서 열린 회의에서 선출되었으며, 여기에는 브리엔의 발터 4세, 아르수프의 장, 시돈의 발리안 그리니에를 포함한 왕국의 가장 중요한 귀족 대부분이 참석했다. 십자군의 도착은 롬바르드 전쟁으로부터의 짧은 휴식이 되었고, 필란지에리는 티레에 머물며 참여하지 않았다. 회의에서는 남쪽의 아스칼론을 재건하고 북쪽의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 내부의 새로운 분열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카밀은 1238년에 다마스쿠스를 점령했지만 곧 사망했고, 그의 영토는 그의 가족에게 상속되었다. 그의 아들 알-아딜 2세와 아스-살리 아이유브가 이집트와 다마스쿠스를 상속받았다. 아이유브는 알-아딜을 몰아내기 위해 카이로로 진군했지만, 그가 부재한 동안 알-카밀의 형제 다마스쿠스의 아스-살리 이스마일이 다마스쿠스를 장악했고, 아이유브는 안-나시르 다우드에게 포로로 잡혔다. 한편, 십자군은 아스칼론으로 진군했다. 그 과정에서 브리엔의 발터는 다마스쿠스를 재보급하기 위한 가축을 포획했는데, 아이유브 왕조가 십자군의 공격 계획을 알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고, 십자군은 1239년 11월 가자에서 이집트 군대에 패배했다. 바르 백작 앙리 2세가 사망하고 몽포르의 아모리가 포로로 잡혔다. 십자군은 아크레로 돌아갔는데, 이는 왕국의 토착 귀족들이 티레의 필란지에리를 의심했기 때문일 수 있다. 다우드는 12월에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아이유브의 승리를 이용했는데, 10년의 휴전이 만료되었기 때문이다.

아이유브는 다우드의 포로였지만, 두 사람은 이제 1240년에 아이유브가 점령한 이집트의 알-아딜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 다마스쿠스에서, 이스마일은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다우드와 아이유브의 위협을 인식하고 십자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테오발드는 이스마일과 조약을 체결하여, 예루살렘을 기독교 통제 하에 되돌리고 프리드리히가 1229년에 회복한 것보다 더 많은 영토, 즉 왕국의 대부분을 회복하는 영토 양보를 받았다. 그러나 테오발드는 롬바르드 전쟁에 좌절하여 1240년 9월에 귀국했다. 테오발드가 떠난 직후, 콘월의 리처드 1세가 도착했다. 그는 아스칼론의 재건을 완료했고, 또한 이집트의 아이유브와 평화를 맺었다. 아이유브는 1241년에 이스마일의 양보를 확인했고, 가자에서 잡힌 포로들은 양측에 의해 교환되었다. 리처드는 1241년에 유럽으로 돌아갔다.

왕국이 본질적으로 회복되었지만, 롬바르드 전쟁은 왕국의 귀족들을 계속 괴롭혔다. 템플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이 서로 반대편을 지원하면서 서로를 공격했고, 템플 기사단은 1241년 나블루스를 공격하여 아이유브 왕조와의 조약을 깨뜨렸다. 콘라드는 1242년에 성년이 되었다고 선포하여, 프리드리히의 섭정권 주장과 그의 자리를 대신할 황실 수호자의 필요성을 모두 제거했지만, 그는 아직 예루살렘의 관습에 따라 과반수 연령인 15세가 되지 않았다. 콘라드를 통해, 프리드리히는 황실 섭정을 보내려고 했지만, 아크레의 반황제 파벌은 예루살렘의 법률이 그들 스스로 섭정을 임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6월에 "오트 쿠르"는 섭정을 샹파뉴의 앨리스에게 부여했는데, 그녀는 이사벨라 1세의 딸로서 콘라드의 고모이자 왕국에 살고 있는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다. 앨리스는 필란지에리를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이벨린가와 베네치아인들과 함께 티레를 포위했는데, 1243년 7월에 함락되었다. 롬바르드 전쟁은 끝났지만, 콘라드는 동방으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왕은 여전히 부재했다. 앨리스는 티레를 장악한 몽포르의 필립과 아크레를 계속 점유한 베이루트의 발리안에 의해 섭정으로서의 실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방해받았다.

아유브 왕조는 여전히 이집트의 아유브, 다마스쿠스의 이스마일, 케라크의 다우드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었다. 이스마일, 다우드, 그리고 호메스(Homs)의 알 만수르 이브라힘(al-Mansur Ibrahim)은 아유브와 전쟁을 벌였고, 아유브는 그를 위해 싸울 호라즘을 고용했다. 호라즘은 중앙아시아 출신의 유목민 투르크족으로, 최근 몽골에 의해 동쪽으로 밀려나 현재 메소포타미아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유브의 지원으로 그들은 1244년 여름 예루살렘을 약탈하여 폐허로 만들었고 기독교인과 무슬림 모두에게 쓸모없게 만들었다. 10월에 호라즘은 바이바르스가 지휘하는 이집트 군대와 함께 몽포르의 필립, 브리엔의 발터, 그리고 템플 기사단, 병원 기사단, 튜턴 기사단의 마스터들, 알 만수르와 다우드가 이끄는 프랑크 군대와 만났다. 10월 17일에 이집트-호라즘 군대는 프랑크-시리아 연합군을 격파했고 브리엔의 발터는 포로로 잡혀 나중에 처형되었다. 1247년까지 아유브는 1239년에 양도된 영토의 대부분을 재점령했고 다마스쿠스에 대한 지배력도 얻었다.

제7차 십자군은 1245년 리옹 공의회에서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논의되었다. 공의회는 프리드리히 2세를 폐위시켰으므로 제국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지만, 프랑스의 루이 9세는 이미 십자군에 참여하겠다고 맹세했다. 루이는 1248년 키프로스에 도착하여 자신의 군대를 모았는데, 여기에는 그의 형제들인 아르투아의 로베르, 앙주의 샤를, 푸아티에의 알퐁스, 그리고 키프로스와 예루살렘의 군대가 포함되었으며, 이들은 이벨린 가문 출신인 자파의 존(John of Jaffa), 키프로스 콘스터블 기 드 이벨린(Guy of Ibelin), 베이루트의 발리안(Balian of Beirut)이 이끌었다. 이번에도 목표는 이집트였다. 1249년 6월 십자군이 상륙했을 때 다미에타는 저항 없이 점령되었지만 십자군은 그곳에서 11월까지 멈추었는데, 그 무렵 이집트 술탄 아유브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알무아잠 투란샤가 계승했다. 2월, 십자군은 알만수라 전투에서 패배했고, 아르투아의 로베르가 전사했다. 십자군은 나일강을 건널 수 없었고 질병과 보급품 부족으로 4월에 다미에타로 후퇴했다. 그들은 도중에 파리스쿠르 전투에서 패배했고 루이는 투란샤에게 포로로 잡혔다. 루이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투란샤는 장군 아이바크가 이끄는 맘루크 병사들에 의해 전복되었고, 아이바크는 다미에타와 많은 몸값을 대가로 5월에 루이를 석방했다. 그 후 4년 동안 루이는 아크레에 거주하며 카이사레아, 야파, 시돈과 함께 그 도시를 재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또한 시리아의 아유브 왕조와 휴전을 맺고, 이슬람 세계를 위협하기 시작한 몽골과 협상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낸 후 1254년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세르진의 제프리(Geoffrey of Sergines)가 지휘하는 프랑스 군대의 대규모 주둔군을 아크레에 남겨두었다.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샴페인의 앨리스는 1246년에 사망했고, 그녀의 아들인 키프로스 국왕 앙리 1세가 섭정으로 교체되었으며, 자파의 존은 아크레에서 ''바일리''로 활동했다. 루이 9세가 아크레에 머

2. 7. 몽골의 침입과 맘루크 왕조의 발흥

예루살렘 왕국은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살라흐 앗 딘에게 패배하고 예루살렘을 빼앗겼다. 제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으나 성지 탈환에 실패했고, 제6차 십자군 당시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교 교섭으로 일시 회복했으나 1244년 다시 상실했다. 이후 십자군 국가는 아이유브 왕조에게 밀려 아크레 주변으로 쫓겨났고, 1291년 맘루크 왕조에 의해 아크레가 함락되며 멸망했다.

13세기 후반, 몽골 제국이 근동에 등장하여 호라즘 제국을 멸망시키고 서진했다.[57][149] 십자군은 몽골과의 동맹을 시도했으나, 몽골은 동맹에 관심이 없었다.[57][149] 몽골은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하고,[57][149] 1260년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함락시켜 아바스 왕조와 아이유브 왕조 잔재를 파괴했다.[57][149] 아르메니아 왕 헤툼 1세와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6세는 몽골에 복속했다.[57][149] 몽골군 사령관 키트부카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지만,[57][149] 아크레 귀족들은 항복을 거부했다.[57][149] 1260년 시돈의 줄리앙이 몽골군을 공격하여 키트부카의 조카가 살해되자, 키트부카는 시돈을 약탈했다.[57][149]

훌라구몽케 칸의 사망으로 철수하면서 몽골의 정복은 중단되었다.[57][149] 맘루크 왕조는 십자군 영토 통과를 승인받아 1260년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했고,[57][149] 키트부카는 전사했다.[57][149] 맘루크 술탄 쿠투즈바이바르스에게 암살당했는데, 바이바르스는 십자군과의 동맹에 부정적이었다.[57][149]

2. 8. 멸망

로마 교황청의 호소로 제1차 십자군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성묘 수호자가 되었다. 그리스도가 목숨을 잃은 장소에서 왕이 되는 것을 꺼려 수호자 직위를 택했기 때문이다. 1100년 고드프루아가 죽고 동생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가 국왕 칭호를 사용하며 십자군 국가 예루살렘 왕국이 탄생했다.

예루살렘 왕은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등 다른 십자군 국가에 대한 종주권을 가졌다.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유럽과의 해상 교통 및 병참로를 확보하고 레반트 교역에 종사했다.

십자군은 제후들의 연합군이었기에, 건국된 국가들도 에데사 백국(북부 프랑스), 안티오키아 공국(노르만인 제후), 트리폴리 백국(남부 프랑스)이 서로 대립했다. 현지 제후는 이교도와의 융화, 공존을 추구했지만, 새로운 십자군과 교회 관계자는 이슬람교도와의 전투를 요구하여 왕국 방침은 일정하지 않았다. 다마스쿠스와 협력, 성전 기사단 등 종교 기사단의 활약으로 영토를 유지했으나, 1144년 장기에게 에데사 백국을 빼앗기고, 제2차 십자군이 실패하자 다마스쿠스가 누르 앗 딘에게 넘어가며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공격하여 시르쿠와 다투었으나, 이집트는 살라흐 앗 딘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누레딘, 아모리가 같은 시기에 사망하여 왕국은 살라흐 앗 딘의 압력을 받았다.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는 후사가 없었고, 후계자를 둘러싼 권력 다툼이 치열했다.

1187년 살라흐 앗 딘이 하틴 전투에서 기 드 뤼지낭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왕국은 팔레스타인 해안으로 쫓겨났고, 제3차 십자군이 왔으나 성지 탈환에 실패했다. 제6차 십자군 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교로 예루살렘을 회복했으나, 1244년 영토의 3분의 2를 잃었다.

이후 십자군 국가는 아이유브 왕조에게 아크레 주변으로 밀려났고, 1291년 맘루크 왕조에게 아크레를 함락당해 멸망했다.

1258년 존 오브 아르수프(John of Arsuf)가 사망하고, 제프리 오브 세르지네(Geoffrey of Sergines)가 바일리(bailli)가 되었다. 1261년 플레상스(Plaisance)가 사망하고, 키프로스의 이사벨라가 섭정을 맡아 남편 안티오크의 헨리를 바일리로 임명했다. 1264년 헨리가 사망하고, 브리엔의 휴와 안티오크-루시냥의 휴가 섭정 지위를 두고 다투었다. 휴 2세가 1267년 사망하고, 휴 3세가 키프로스 왕위를 계승했다. 1268년 콘라딘(Conradin)이 처형되자, 휴 3세가 1269년 예루살렘 왕국을 상속받았다. 안티오크의 마리아가 이의를 제기했으나 무시되었다.

크라크 데 슈발리에, 시리아. UNESCO World Heritage Site


바이바르스(Baibars)가 이끄는 맘루크는 십자군 도시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1265년 카이사레아(Caesarea), 하이파(Haifa), 아르수프(Arsuf)를, 1266년 사파드(Safad), 토론(Toron)을 점령했다. 1268년 자파(Jaffa), 보포르(Beaufort)를 점령하고, 안티오크를 파괴했다. 휴 3세와 바이바르스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1270년 바이바르스는 암살단을 시켜 몽포르의 필립(Philip of Montfort)을 죽였고, 1271년 크라크 데 슈발리에와 몽포르 성(Montfort Castle)을 점령했다. 트리폴리를 포위했으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왕자가 도착하자 철수했다. 에드워드는 바이바르스와 휴전 협정을 맺고 떠났다.

휴 3세의 권위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벨린의 이사벨라는 바이바르스의 보호를 받았다. 휴 3세는 키프로스로 떠났고, 아르수프의 발리안을 바일리로 남겼다. 1277년 안티오크의 마리아는 왕국에 대한 주장을 앙주의 샤를에게 팔았고, 샤를은 로저 오브 산 세베리노를 파견했다. 1281년 휴전 협정이 갱신되었다. 로저는 시칠리아 만종 사건 이후 유럽으로 돌아갔고, 오도 포일레치엔이 그를 대신했다. 휴 3세는 1284년 사망했고, 존 2세를 거쳐 헨리 2세가 계승했다. 1285년 앙주의 샤를이 사망하고, 헨리 2세가 왕으로 인정받았다. 1289년 트리폴리가 함락되었다. 1290년 십자군이 아크레에서 폭동을 일으켜 무슬림 상인들을 공격했다. 1291년 알 아쉬라프 칼릴이 아크레를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헨리 2세 등은 탈출했지만, 도시는 함락되었다. 티레, 시돈, 베이루트도 함락되었다.

십자군은 북쪽으로 이동했으나, 아르와드 섬을 잃으면서 예루살렘 왕국은 본토에서 사라졌다. 키프로스 왕들은 성지 회복을 계획했으나 실패했다.

3. 사회와 문화

예루살렘 왕국은 민족, 종교, 언어적으로 다양성을 띠었지만, 십자군과 그 후손들은 가톨릭 소수 엘리트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6] 그들은 유럽의 고향에서 많은 관습과 제도를 수입했으며, 왕국이 존속하는 동안 서방과의 긴밀한 가족적, 정치적 관계를 유지했다.[6] 그러나 왕국은 기존의 관습과 인구에 의해 영향을 받아 "오리엔탈"적인 특징 또한 물려받았다.[6]

왕국 주민의 대다수는 토착 기독교인, 특히 그리스시리아 정교회 신자들이었으며, 수니파시아파 무슬림도 있었다.[6] 주변화된 하층 계급이었던 토착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그리스어와 아랍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고, 주로 프랑스에서 온 십자군은 프랑스어를 사용했다.[6] 소수의 유대인사마리아인도 있었다. 1170년경 왕국을 여행한 투델라의 벤자민에 따르면, 나블루스에는 1,000명의 사마리아인이, 카이사레아에는 200명, 아스칼론에는 300명이 있었다.[6] 동시대의 사마리아 연대기인 ''톨리다''가 가자와 아크레에도 공동체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는 사마리아 인구를 최소 1,500명으로 설정한다.[6] 투델라의 벤자민은 왕국의 14개 도시의 전체 유대인 인구를 1,200명으로 추산했는데, 이는 사마리아 인구가 역사상 아마도 유일하게 유대인보다 더 컸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6]

|thumb|12세기 예루살렘을 묘사한 애니메이션 영상

왕국의 라틴계 인구는 항상 적었다.[150] 꾸준히 정착민과 새로운 십자군이 도착했지만, 제1차 십자군에 참전했던 대부분의 십자군은 그냥 고향으로 돌아갔다.[150] 티레의 윌리엄에 따르면, 1100년 고드프리가 아르수프를 포위하는 동안 왕국에는 "기사 300명과 보병 2,000명 정도밖에 없었다".[150] 처음부터 라틴족은 토착 유대인, 사마리아인, 무슬림, 그리스 정교회, 시리아 인구를 지배하는 식민지 개척자나 다름없었다.

새로운 세대가 왕국에서 성장하면서 자신을 토착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유럽인 또는 프랑크족으로서의 핵심 정체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의복, 식단, 상업주의는 특히 비잔틴의 영향을 많이 통합했다. 연대기 작가 샤르트르의 풀처는 1124년경에 다음과 같이 썼다.

> "우리 서양인들은 이제 동양인이 되었다. 로마인이나 프랑크족이었던 자는 이 땅에서 갈릴리인이나 팔레스타인 거주자가 되었다. 랭스나 샤르트르 출신은 이제 티레나 안티오크의 시민이 되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출생지를 잊어버렸고,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거나, 적어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151]

십자군과 그 후손들은 종종 그리스어, 아랍어 및 기타 동방 언어를 배웠으며, 토착 기독교인(그리스, 시리아, 아르메니아)과 때로는 개종한 무슬림과 결혼했다.[60]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공국은 이슬람 중심부에 독특한 서양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

제1차 십자군에 참여했고 보두앵 1세의 사제였던 풀처는 1127년까지 연대기를 계속 썼다. 풀처의 연대기는 매우 인기가 있었고, 오데릭 비탈리스와 말름즈베리의 윌리엄과 같은 서양의 다른 역사가들이 자료로 사용했다. 예루살렘이 점령된 직후부터 12세기 내내 많은 순례자들이 도착하여 새로운 왕국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중에는 영국의 세울프, 키예프 대공국의 다니엘 키예프스키 수도원장, 프랑크의 프레텔루스, 비잔틴의 요하네스 포카스, 독일의 뷔르츠부르크의 요한과 리벨루스 데 로키스 산티스의 테오데리히가 있다.[152] 이들 외에는 티레의 윌리엄, 티레 대주교이자 예루살렘 왕국 관료인 윌리엄이 1167년경에 글을 쓰기 시작하여 1184년경에 사망할 때까지 예루살렘의 사건을 목격한 사람은 없다. 그는 제1차 십자군과 풀처 사망 이후 자신의 시대까지의 기간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아헨의 알베르트와 풀처의 저술을 주로 참고하여 포함하고 있다. 무슬림의 관점에서 중요한 정보원은 다마스쿠스에서 예루살렘과 이집트로 자주 파견된 병사이자 대사인 우사마 이븐 문키드인데, 그의 회고록 ''실례를 통한 교훈의 서''에는 동방의 십자군 사회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담겨 있다. 투델라의 벤야민과 이븐 주바이어와 같은 여행자들에게서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thumb|1230년 아크의 십자군 주화]]

|thumb|1230년경 아크의 십자군 주화]]

왕국은 처음에는 충성스러운 피지배 인구가 거의 없었고, 왕국의 법과 명령을 시행할 기사도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 무역 회사의 도착, 군사 기사단의 창설, 유럽 기사, 장인, 농부들의 이주로 왕국의 상황이 개선되었고, 십자군이 유럽에서 알았던 사회와 유사하지만 구별되는 봉건제 사회가 발전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르네 그루세와 같은 프랑스 학자들은 십자군, 무슬림, 기독교인이 완전히 통합된 사회에서 살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로니 엘렌블룸은 이러한 견해가 프랑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62] 20세기 중반, 조슈아 프라워와 같은 학자들은 십자군이 현지 주민과 완전히 분리되어 살았다고 주장했다.[63] 프라워는 왕국이 식민화의 초기 시도였으며, 십자군은 생존을 위해 현지 인구에 의존했지만 그들과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소규모 지배 계급이었다고 주장했다.[63] 이러한 이유로 십자군이 익숙했던 유럽의 농촌 사회는 레반트의 기존 도시에서 더 안전한 도시 사회로 대체되었다.[64]

엘렌블룸의 해석에 따르면, 왕국의 주민들(라틴 기독교인은 현지 그리스시리아 기독교인, 시아 및 수니 아랍인, 수피, 베두인, 드루즈, 유대인, 사마리아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은 서로뿐만 아니라 십자군과도 큰 차이를 보였다.[65] 동방 기독교인과 라틴 십자군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고 모호했다".[65] 그는 동방 기독교인들이 무슬림 아랍인보다 동료 기독교 십자군에게 더 가까운 유대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65]

십자군이 고대 도시 사회에 도착했지만, 엘렌블룸은 그들이 유럽의 농촌 생활 방식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유럽 사회도 처음부터 완전히 농촌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레반트에서의 십자군 정착은 이미 유럽에서 시행되고 있던 식민화 및 정착 유형과 유사했으며, 요새를 중심으로 한 도시와 농촌 문명의 혼합이었다. 십자군은 현지 인구와 완전히 통합되지도, 농촌 원주민으로부터 도시에서 분리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도시와 농촌 지역 모두에 정착했으며, 특히 전통적으로 동방 기독교인이 거주하던 지역에 정착했다. 전통적으로 무슬림이 거주하던 지역에는 십자군 정착지가 거의 없었으며, 이미 원주민 기독교인도 거의 없었다.[66]

이러한 혼합 사회에서 십자군은 기존 제도를 채택하고 유럽에서 익숙한 관습을 도입했다.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귀족들은 봉신을 거느리고 있었고, 스스로도 왕의 봉신이었다. 농업 생산은 유럽의 봉건 제도와 대략 유사한 무슬림 토지 소유 및 지불 시스템인 ''iqta''에 의해 규제되었으며, 이 시스템은 십자군에 의해 크게 방해받지 않았다.[67]

한스 마이어가 말했듯이, "라틴 왕국의 무슬림 주민들은 라틴 연대기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에서의 그들의 역할에 대한 정보를 찾기가 어렵다.[68] 십자군은 "단순히 관심이 없고 기록할 가치가 없는 문제로 간주하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68] 무슬림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동방 기독교인도 시골에서는 거의 권리가 없었으며, 본질적으로 토지를 소유한 십자군 영주의 소유였다.[69]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은 일반적으로 중동의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높거나 낮지 않았다. 그리스인, 시리아인, 유대인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법과 법정에 따라 살았으며, 이전 무슬림 지배자는 십자군으로 대체되었고, 무슬림은 이제 사회 최하위 계층에 합류했다. 무슬림 또는 시리아 공동체의 지도자인 ''ra'is''는 자신의 토지를 소유한 귀족의 일종의 봉신이었지만, 십자군 귀족이 부재 지주였기 때문에 ''ra'is''와 그들의 공동체는 높은 수준의 자율성을 가졌다.[70]

프랑크족에게 적대적이었던 아랍-안달루스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이븐 주바이어는 12세기 후반에 기독교 십자군의 예루살렘 왕국 아래에서 살고 있던 무슬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우리는 팁닌을 떠나 농장 옆을 지나는 길을 따라갔는데, 그곳에는 프랑크족 아래에서 매우 잘 사는 무슬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알라께서 우리를 그러한 유혹으로부터 보호하시기를! 그들에게 부과된 규정은 수확 시 곡물 수확량의 절반을 넘겨주고, 1 디나르와 7 키라트의 인두세를 지불하며, 과일 나무에 대한 가벼운 세금을 내는 것입니다. 무슬림들은 자신들만의 집을 소유하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통치합니다. 이것이 프랑크 영토에서 농장과 큰 마을이 조직되는 방식입니다. 많은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형제들이 무슬림 통치하에 있는 지역에서 살고 있는 편안하지 않은 상황을 보면 이곳에 정착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불행하게도 무슬림들은 동료 종교인들이 통치하는 땅에서 그들의 지도자들의 불의에 대해 항상 불만을 가질 이유가 있는 반면, 프랑크족의 행동에 대해서는 칭찬할 수밖에 없으며, 그들의 정의는 항상 신뢰할 수 있습니다.[71]

도시에서 무슬림과 동방 기독교인은 자유로웠지만, 예루살렘 자체에는 무슬림이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2등 시민이었으며 정치나 법에 참여하지 않았고, 군 복무를 왕관에 빚지지 않았지만, 일부 도시에서는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시민들도 항구 도시의 자치 구역에 살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빚지지 않았다.[72]

문화적 통합 또는 문화적 아파르트헤이트 문제에 대한 21세기 입장은 여전히 다르다. 프랑크족과 현지 무슬림 및 기독교인 사이의 상호 작용은 모호했지만 실제적인 공존을 보여주었다. 비록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샤이자의 우사마 이븐 문키드는 안티오크와 예루살렘을 여행하면서 인종적 편견을 넘어선 수준의 귀족적 교류를 묘사했다.[73] 무슬림과 기독교인 간의 접촉은 공동체적 또는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세금이나 통역을 기반으로 한 행정적 또는 개인적 수준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피지배자에 대한 위계적 영주 관계를 나타냈다.[74] 문화 간 통합에 대한 증거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문화 간 협력 및 복잡한 사회적 상호 작용에 대한 증거는 더욱 흔하다. 말 그대로 통역가인 드라구만을 시리아 관리 및 아랍인 족장과 함께 사용하는 것은 양측의 이익을 협상해야 할 직접적인 필요성을 나타냈다.[75] 아랍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과 소수의 아랍화된 유대인 및 무슬림이 있는 가구에 대한 언급은 20세기 중반 역사가들이 묘사한 것보다 덜 이분법적인 관계를 나타낸다.[76] 오히려, 프랑크 기독교인이 비프랑크 사제, 의사, 기타 역할을 가구 내에 두고 문화 간 공동체를 갖는 것은 표준화된 차별이 없음을 나타낸다.[76] 예루살렘의 윌리엄은 유대인 또는 무슬림 의료 종사자를 라틴 및 프랑크족에 비해 고용하는 추세에 대해 불평했다. 심지어 위생과 관련하여 프랑크 문화 및 사회 관습의 변화를 나타내는 증거도 있으며, 관개 외에도 가정용 물 공급을 보장하기까지 했다.[77]

예루살렘 왕국에는 알 수 없는 수의 무슬림 노예가 살고 있었다.[84] 아크레에는 12세기와 13세기 내내 운영된 매우 큰 노예 시장이 있었다.[84] 이탈리아 상인들은 때때로 동남 유럽 기독교인을 무슬림 노예와 함께 노예로 판매한 혐의를 받았다.[84] 노예제는 특히 전쟁 포로에게서 몸값을 지불하는 것보다 덜 일반적이었다.[85] 매년 습격과 전투에서 많은 수의 포로가 잡히면서 기독교 국가와 무슬림 국가 간에 몸값이 자유롭게 오갔다.[85] 포로와 노예의 탈출은 아마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86] 시골 주민의 대다수가 무슬림이었고, 도망 노예는 항상 문제였다.[86] 유일한 합법적인 해방 방법은 (가톨릭)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었다.[86] 서방 또는 동방의 기독교인은 법적으로 노예로 팔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86]

예루살렘의 아시즈는 왕국에서 노예제에 대한 법적 틀을 제공했다.[87] 이 문서에는 «농노, 동물 또는 기타 동산»을 거래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87] «농노»는 농노와 유사한 농촌 반자유 노동자였다.[87] 또한 동산 노예가 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87] 사람들은 출생에 의해, 습격에서 포획되어 노예가 되거나, 빚에 대한 벌칙으로 또는 도망 노예를 돕는 것에 대한 벌칙으로 노예가 될 수 있었다.[87]

유목 베두인 부족은 왕의 소유로 간주되어 그의 보호를 받았다.[88] 그들은 다른 재산과 마찬가지로 판매되거나 양도될 수 있었고, 12세기 후반에는 종종 하위 귀족이나 군사 기사단의 보호를 받았다.[88]

3. 1. 인구 구성

예루살렘 왕국은 민족, 종교, 언어적으로 다양성을 띠었지만, 십자군과 그 후손들은 가톨릭 소수 엘리트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6] 그들은 유럽의 고향에서 많은 관습과 제도를 수입했으며, 왕국이 존속하는 동안 서방과의 긴밀한 가족적, 정치적 관계를 유지했다.[6] 그러나 왕국은 기존의 관습과 인구에 의해 영향을 받아 "오리엔탈"적인 특징 또한 물려받았다.[6]

왕국 주민의 대다수는 토착 기독교인, 특히 그리스시리아 정교회 신자들이었으며, 수니파시아파 무슬림도 있었다.[6] 주변화된 하층 계급이었던 토착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그리스어와 아랍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고, 주로 프랑스에서 온 십자군은 프랑스어를 사용했다.[6] 소수의 유대인사마리아인도 있었다. 1170년경 왕국을 여행한 투델라의 벤자민에 따르면, 나블루스에는 1,000명의 사마리아인이, 카이사레아에는 200명, 아스칼론에는 300명이 있었다.[6] 동시대의 사마리아 연대기인 ''톨리다''가 가자와 아크레에도 공동체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는 사마리아 인구를 최소 1,500명으로 설정한다.[6] 투델라의 벤자민은 왕국의 14개 도시의 전체 유대인 인구를 1,200명으로 추산했는데, 이는 사마리아 인구가 역사상 아마도 유일하게 유대인보다 더 컸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6]

예루살렘 왕국의 인구에 대한 정확한 추정치를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78] 조슈아 프라워와 메론 벤베니스티와 같은 학자들은 도시에 최대 12만 명의 프랑크인과 10만 명의 무슬림이 거주했고, 시골에는 25만 명의 무슬림과 동방 기독교인 농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79] 십자군은 전체 인구의 15~25%를 차지했다.[79] 벤자민 Z. 케다르는 왕국에 30만~36만 명의 비(非)프랑크인이 있었고, 그 중 25만 명이 시골 마을 사람들이었으며, "예루살렘 왕국의 일부, 어쩌면 대부분 지역에서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79] 로니 엘렌블룸이 지적했듯이, 인구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으며, 어떤 추정치도 본질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80] 동시대 연대기 작가인 티레의 윌리엄은 1183년 인구 조사를 기록했는데, 이는 침략에 대비할 수 있는 병력 수를 파악하고 무슬림이든 기독교인이든 거주자로부터 징수할 수 있는 세금 액수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81]

예루살렘 왕국에는 알 수 없는 수의 무슬림 노예가 살고 있었다.[84] 아크레에는 12세기와 13세기 내내 운영된 매우 큰 노예 시장이 있었다.[84] 이탈리아 상인들은 때때로 동남 유럽 기독교인을 무슬림 노예와 함께 노예로 판매한 혐의를 받았다.[84] 노예제는 특히 전쟁 포로에게서 몸값을 지불하는 것보다 덜 일반적이었다.[85] 매년 습격과 전투에서 많은 수의 포로가 잡히면서 기독교 국가와 무슬림 국가 간에 몸값이 자유롭게 오갔다.[85] 포로와 노예의 탈출은 아마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86] 시골 주민의 대다수가 무슬림이었고, 도망 노예는 항상 문제였다.[86] 유일한 합법적인 해방 방법은 (가톨릭)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었다.[86]

예루살렘의 아시즈는 왕국에서 노예제에 대한 법적 틀을 제공했다.[87] 이 문서에는 «농노, 동물 또는 기타 동산»을 거래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87] «농노»는 농노와 유사한 농촌 반자유 노동자였다.[87] 또한 동산 노예가 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87] 사람들은 출생에 의해, 습격에서 포획되어 노예가 되거나, 빚에 대한 벌칙으로 또는 도망 노예를 돕는 것에 대한 벌칙으로 노예가 될 수 있었다.[87]

유목 베두인 부족은 왕의 소유로 간주되어 그의 보호를 받았다.[88] 그들은 다른 재산과 마찬가지로 판매되거나 양도될 수 있었고, 12세기 후반에는 종종 하위 귀족이나 군사 기사단의 보호를 받았다.[88]

3. 2. 종교

예루살렘 왕국은 민족, 종교, 언어적으로 다양성을 띠었지만, 십자군은 자신들과 그 후손들을 가톨릭 소수 엘리트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6] 그들은 유럽의 고향에서 많은 관습과 제도를 수입했으며, 왕국이 존속하는 동안 서방과의 긴밀한 가족적, 정치적 관계를 유지했다.[6] 왕국은 또한 기존의 관습과 인구에 의해 영향을 받아 "오리엔탈"적인 특징을 물려받았다.[6] 왕국 주민의 대다수는 토착 기독교인, 특히 그리스시리아 정교회 신자들이었으며, 수니파시아파 무슬림도 있었다.[6] 주변화된 하층 계급이었던 토착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그리스어와 아랍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고, 주로 프랑스에서 온 십자군은 프랑스어를 사용했다.[6] 소수의 유대인사마리아인도 있었다.[6]

1170년경 왕국을 여행한 투델라의 벤자민에 따르면, 나블루스에는 1,000명의 사마리아인이, 카이사레아에는 200명, 아스칼론에는 300명이 있었다.[6] 동시대의 사마리아 연대기인 ''톨리다''가 가자와 아크레에도 공동체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는 사마리아 인구를 최소 1,500명으로 설정한다.[6] 투델라의 벤자민은 왕국의 14개 도시의 전체 유대인 인구를 1,200명으로 추산했는데, 이는 사마리아 인구가 역사상 아마도 유일하게 유대인보다 더 컸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6]

3. 3. 경제

예루살렘 왕국은 도시적인 환경과 이탈리아 상인들의 존재로 인해 농업보다는 상업 중심의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89] 팔레스타인은 전통적으로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십자군 시대에는 유럽과의 교역이 활발해졌다. 북유럽의 양모 직물과 같은 상품은 중동과 아시아로, 아시아의 상품은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예루살렘은 특히 실크, 면화, 향신료 무역에 관여했으며, 오렌지와 설탕과 같은 새로운 품목들이 유럽에 소개되기도 했다. 티레의 윌리엄은 설탕을 "인류의 사용과 건강에 매우 필요한 것"이라고 묘사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십자군 동전. 왼쪽: 데니에르는 성묘가 있는 유럽 스타일 (1162–75). 가운데: 쿠피체 금 비잔트 (1140–80). 오른쪽: 기독교 상징이 있는 금 비잔트 (1250년대). 금화는 처음에는 디나르를 베껴 쿠피체 문자를 새겼지만, 1250년 이후 교황의 불만에 따라 기독교 상징이 추가되었다(대영 박물관).


시골에서는 밀, 보리, 콩류, 올리브, 포도, 대추야자가 재배되었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파크텀 워문디''와 같은 상업 조약 덕분에 이 무역에서 막대한 이윤을 얻었고, 이는 르네상스에 영향을 미쳤다.[89] 제노바베네치아는 그들의 특허지에서 농업 벤처 사업을 시작하여, 유럽으로 수출하기 위해 설탕을 재배했다. 이들은 아랍이나 시리아 출신의 노예나 농노, 또는 현지 농노를 이용하여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설탕 제조는 티레에서 시작되었고, 13세기에는 팔레스타인에서 설탕 생산이 계속 증가하여 상인들은 1291년 점령될 때까지 아크라 항구를 통해 무관세로 설탕을 수출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 왕국에서 개척된 설탕 착취 시스템은 아메리카의 설탕 농장의 전조로 여겨진다.[89]

예루살렘은 조공을 통해 돈을 모았는데, 처음에는 아직 점령되지 않은 해안 도시에서, 나중에는 다마스쿠스와 이집트와 같은 인접 국가에서 모았다. 보두앵 1세가 우트르요르당을 지배하면서 시리아에서 이집트 또는 아라비아로 지나가는 무슬림 낙타 캐러밴의 과세를 통해 수입을 얻었다. 예루살렘의 금전 경제는 용병 고용으로 이어졌는데, 이들은 동료 유럽 십자군이거나 투르코폴을 포함한 무슬림 병사들이었다.

3. 4. 교육과 예술

예루살렘은 왕국 교육의 중심지였다. 성묘 교회에는 라틴어의 읽고 쓰기 기초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다.[90] 상인 계층의 상대적인 부는 그들의 자녀가 귀족의 자녀들과 함께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 티레의 윌리엄이 미래의 왕 발두인 3세의 급우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등 교육은 유럽의 대학교 중 한 곳에서 받아야 했다.[91] 철학이나 신학보다 전쟁이 훨씬 더 중요했던 십자군 예루살렘의 문화에서는 대학교의 발달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과 일반 프랑크족은 높은 문해력을 보였다. 변호사와 서기가 풍부했고, 법학, 역사 및 기타 학문 분야의 연구는 왕족과 귀족들이 매우 좋아하는 오락이었다.[92] 예루살렘은 고대 및 중세 라틴 작품뿐만 아니라 아랍 문학의 광범위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중 많은 부분이 1154년 난파 사고 이후 우사마 이븐 문키드와 그의 측근으로부터 압수된 것으로 보인다.[93] 성묘교회에는 왕국의 필사실이 있었고, 이 도시에는 왕실 헌장과 기타 문서를 제작하는 관청이 있었다. 중세 유럽의 표준 문어인 라틴어 외에도 십자군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의 방언으로 소통했다.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심지어 아랍어까지 프랑크족 정착민들이 사용했다.

멜리센데 시편 9v 페이지 - 지옥의 파괴


예루살렘 자체에서 가장 큰 건축적 노력은 고딕 건축 양식으로 성묘 교회를 확장한 것이었다. 이 확장은 부지 내의 모든 별도 성소를 하나의 건물로 통합했으며 1149년에 완공되었다. 예루살렘 외부에서는 성과 요새가 주요 건설 대상이었다. 케라크와 몬트리올은 울트르요르댕에 있으며, 이벨린은 야파 근처에 있는데, 십자군 요새의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이다.

십자군 예술은 서양, 비잔틴 미술, 이슬람 미술 양식이 혼합된 형태였다. 주요 도시에는 목욕탕, 실내 배관, 그리고 세계의 다른 대부분의 도시와 마을에서 부족했던 다른 고급 위생 도구들이 갖춰져 있었다. 십자군 예술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마도 1135년에서 1143년 사이에 의뢰되어 현재 대영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멜리센데 시편, 삽화 필사본일 것이며, 조각된 나사렛 수도도 이에 해당한다. 회화와 모자이크는 왕국에서 인기 있는 예술 형태였지만, 13세기에 맘루크에 의해 많은 수가 파괴되었다. 가장 튼튼한 요새만이 재정복에서 살아남았다.

4. 법과 제도

제1차 십자군 원정을 거쳐 예루살렘 왕국이 건국되자마자 초대 국왕 고드프로와 드 부용은 신하들에게 봉토를 분배했다. 이로 인해 왕국 내에는 가 탄생했다. 고드프로와의 후계자들도 마찬가지로 신하들에게 영토를 계속 수여했다. 그리고 12-13세기에 걸쳐 이러한 봉건 영주들이 계속 증가했으며, 그들이 가지는 중요성도 변화해 갔고, 왕국 내의 많은 도시들은 왕가의 직할령이 되었다. 예루살렘 왕은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많은 의 지원을 받아 왕국을 통치했다. 또한 국왕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아코, 나블루스, 티루스를 비롯한 왕국 각지의 여러 도시에서도 어전 회의를 개최하여 통치에 힘썼다고 한다. 왕족은 처음에는 성전산에 거처를 마련했지만, 이 언덕이 템플 기사단의 거점으로 그들에게 양도된 후 다윗의 탑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또한 다윗의 탑 외에 아코에도 궁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예루살렘 왕국에서는 다른 유럽 국가와는 달리, 배하의 여러 장수들은 자국 영토가 아닌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에 거처를 정하는 경우가 많았고, 예루살렘 왕은 제후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제후들은 주교들과 함께 이라는 통치 기구를 구성하여, 새로운 국왕이나 섭정의 선출, 징세, 화폐 주조, 국왕에 대한 지급액 산정, 왕국군의 소집 등 많은 정무를 맡았다. 또한 이 법원은 왕국 귀족에 대한 유일한 사법 기관이기도 했으며, 살인, 강간, 반역 등과 같은 여러 죄, 탈주 노예의 회수, 레엔(지행권)의 매매, 병역 불이행 등과 같은 보다 단순한 봉건 영주와 관련된 분쟁 등에도 대처했다. 예루살렘 왕국에서의 법률은 초대 국왕 고드프로와 드 부용에 의해 제정되었다고 전해지지만, 법의 대부분은 보두앵 2세가 1120년에 개최한 나블루스 공의회(:en: Council of Nablus)에서 제정되었다. 히브리 대학교 교수 은 이 회의에 대해 "나블루스 회의에서 제정된 법률은 12세기 말과 함께 점차 효력을 잃어, 13세기에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Marwan Nadar는 이 설에 이의를 제기하며, "이 법률은 어떤 시대에도 왕국 내에서 유효하다고 여겨졌다."라고 주장하고 있다[163]。또한 이라고 불리는 당시 예루살렘 왕국 최대의 판례집으로 알려진 법률집에서도, 13세기 중반에 편찬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많은 판례는 12세기의 사건에 의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164]

왕국에는 보다 하급의 법원도 존재했다고 하며, 특히 ''「Cour des Bourgeois」''라고 불리는 법정에서는 일반 민중이나 비 라틴인이 관여한 소규모의 범죄 행위(폭행, 절도 등)나, 법적 권리를 거의 가지지 못한 비 라틴인 간의 분쟁 등을 재판했다고 한다. 또한 왕국 연안부의 도시에는 ''「Cour de la Fond」''(상업 활동에서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상인용 법정)과 ''「Cour de la Mer」''(해군 장교를 재판하는 법정)과 같은 특수 법정이 설치되어 있었다. 현지 이슬람교인이나 동방 정교 신자를 재판하는 법원이 언제까지 기능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방의 여러 촌락에서는 ''ra'is''라고 불리는 법적 권위를 가진 현지인이 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Cour des Syriens」''라고 불리는 법원도 존재했다고 하며, 이 법원에서는 현지 기독교인이 관련된 비범죄 사항에 대해 재판을 했다고 한다. 범죄 행위를 저지른 비 라틴인은 정도가 가벼우면 ''「Cour des Bourgeois」''에서, 정도가 무거우면 고등 법원으로 보내져 처벌이 결정되었다[165]

또한 건국 초기의 예루살렘 왕국에서는 이탈리아인 거주자에게 거의 완전한 자치권이 부여되었다. 제1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이 베네치아제노바의 해군력과 군사력에 크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자치권에는 이탈리아인만의 사법 행사권도 포함되었다고 하지만, 그들의 사법권 관할이 된 사건의 종류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166]

예루살렘 왕은 이러한 고등 법원의 원장으로 여겨졌다.

1187년 예루살렘 왕국과 그 속국을 나타낸 지도. 이 시기 왕국에는 예루살렘 왕을 종주로 하는 21개의 봉건 영주가 존재했다.

4. 1. 예루살렘 고등 법원

예루살렘 왕국에서 귀족들은 시골의 영지보다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유럽에서보다 왕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귀족들은 주교들과 함께 새로운 왕(또는 필요하다면 섭정)의 선출을 확인하고, 세금을 징수하고, 동전을 주조하고, 왕에게 돈을 할당하고, 군대를 소집하는 책임을 지는 ''고등 법정''을 구성했다.[94] ''고등 법정''은 왕국의 귀족들을 위한 유일한 사법 기구였으며, 살인, 강간, 반역과 같은 형사 사건과 노예 회복, 봉토의 매매, 의무 불이행과 같은 더 간단한 봉건 분쟁을 심리했다.[94] 처벌에는 토지 몰수와 추방, 또는 극단적인 경우 사형이 포함되었다. 전통에 따르면 왕국의 첫 번째 법은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제정되었지만, 1120년 나블루스 공의회에서 보두앵 2세에 의해 제정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94] 케다르는 나블루스 공의회의 법규가 12세기에 효력을 발휘했지만 13세기에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마르완 나데르는 이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 법규가 항상 왕국 전체에 적용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94] 가장 광범위한 법률 모음집인 예루살렘의 아시즈는 13세기 중반에 작성되었지만, 많은 부분이 12세기에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95]

귀족이 아닌 사람들과 라틴인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다른 소규모 법정도 있었다. ''부르주아 법정''은 비귀족 라틴인에게 정의를 제공하여 폭행 및 절도와 같은 경미한 형사 범죄를 다루고, 법적 권리가 적었던 라틴인이 아닌 사람들 간의 분쟁에 대한 규칙을 제공했다.[96] ''콩데 라 퐁'' (시장의 상업 분쟁을 위한)과 ''콩데 라 메르'' (해군 법원)과 같은 특별 법정은 해안 도시에 존재했다.[96] 토착 이슬람 및 동방 기독교 법정이 어느 정도까지 기능을 유지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라이스''는 아마도 지역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법적 권한을 행사했을 것이다.[96] ''시리아인 법정''은 토착 기독교인("시리아인") 간의 비형사적 문제를 재판했다.[96] 형사 문제의 경우, 라틴인이 아닌 사람들은 ''부르주아 법정''(또는 범죄가 충분히 심각한 경우 ''고등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96]

이탈리아 코뮌은 제1차 십자군 이후 수년간의 군사적, 해군적 지원 덕분에 왕국 초창기부터 거의 완전한 자율권을 부여받았다. 이 자율권에는 자체 사법권을 행사할 권리가 포함되었지만, 그 관할에 속하는 사건의 종류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97]

왕은 고등 법정의 수장으로 인정받았지만, 법적으로는 단지 ''프리무스 인테르 파레스''였다.

4. 2. 법률 체계

예루살렘 왕국은 제1차 십자군 직후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충성스러운 봉신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면서 형성된 봉건 영지를 기반으로 발전하였다.[94] 고드프루아의 후계자들도 이러한 정책을 이어갔으며, 12세기와 13세기에 걸쳐 영지의 수와 중요성은 변화하였다.[94] 왕은 여러 명의 국가 관료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였으며, 왕실은 주로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아크레, 나블루스, 티레 등 다른 도시에서도 자주 궁정을 열었다.[94]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산에 처음 거주하였으나, 성전 기사단 창설 이후 다윗 탑 주변의 궁궐 단지로 이동하였다.[94] 아크레에도 별도의 궁궐 단지가 존재하였다.[94]

귀족들은 시골 영지보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경향이 있어 왕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94] 이들은 주교들과 함께 고등 법정을 구성하여 왕위 계승, 세금 징수, 화폐 주조, 군대 소집 등의 중요한 국정을 담당하였다.[94] ''고등 법정''은 귀족들을 위한 유일한 사법 기구였으며, 살인, 강간, 반역과 같은 중범죄와 봉건적 분쟁을 심리하였다.[94] 처벌은 토지 몰수, 추방, 사형 등이 있었다.[94]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통치 기간에 첫 번째 법이 제정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120년 나블루스 공의회에서 발두인 2세에 의해 제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94] 벤자민 Z. 케다르는 나블루스 공의회의 법규가 12세기에 효력을 발휘했지만 13세기에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마르완 나데르는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94] 가장 광범위한 법률 모음집인 예루살렘의 아시즈는 13세기 중반에 작성되었지만, 많은 부분이 12세기에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95]

귀족이 아닌 사람들과 라틴인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부르주아 법정''도 존재하여 폭행 및 절도와 같은 경미한 범죄를 다루었다.[96] 해안 도시에는 ''콩데 라 퐁''(상업 분쟁), ''콩데 라 메르''(해군 법원)와 같은 특별 법정이 있었다.[96] 토착 이슬람 및 동방 기독교 법정의 기능은 명확하지 않지만, ''라이스''가 지역 수준에서 법적 권한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96] ''시리아인 법정''은 토착 기독교인 간의 비형사적 문제를 재판했다.[96] 라틴인이 아닌 사람들은 ''부르주아 법정'' 또는 ''고등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96]

제1차 십자군 당시 군사적, 해군적 지원을 제공한 이탈리아 코뮌은 거의 완전한 자율권을 부여받았으며, 자체 사법권을 행사할 권리도 포함되었다.[97] 왕은 고등 법정의 수장으로 인정받았지만, 법적으로는 ''프리무스 인테르 파레스''였다.[94]

5. 멸망 이후의 유산

1291년 레반트의 모든 영토를 잃은 후,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부상으로 인해 성격이 방어적으로 바뀌었고, 발칸 지역을 거의 넘지 못했다. (알렉산드리아 십자군, 스미르나 십자군).[98] 잉글랜드의 헨리 4세는 1393-4년에 예루살렘으로 기독교 순례를 했고, 나중에 도시를 탈환하기 위해 십자군을 이끌겠다고 맹세했지만, 1413년 사망하기 전에는 그러한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98] 레반트는 1517년부터 오스만 제국의 분할이 일어난 1918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1302년 루아드 함락으로 예루살렘 왕국은 레반트 해안의 마지막 전초 기지를 잃었고, 성지에서 가장 가까운 영토는 키프로스 왕국이 되었다. 예루살렘의 앙리 2세는 1324년 사망할 때까지 예루살렘 왕 칭호를 유지했으며, 그의 후계자인 키프로스 왕들이 계속해서 그 칭호를 주장했다. "예루살렘 왕" 칭호는 앙주 나폴리 왕국의 나폴리 왕에 의해서도 계속 사용되었는데, 그 창립자인 앙주의 샤를은 1277년에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로부터 왕위에 대한 주장을 샀다. 그 후,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이 주장은 나폴리 왕관의 속국으로 취급되었으며, 이는 직접적인 상속보다는 유언이나 정복에 의해 자주 바뀌었다. 나폴리가 교황의 봉토였기 때문에, 교황들은 종종 나폴리 왕국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왕의 칭호도 승인했고, 이 주장의 역사는 나폴리 왕국의 역사이다.

1441년, 나폴리 왕국에 대한 지배권은 아라곤의 알폰소 5세에게 넘어갔고, 따라서 스페인 왕들이 칭호를 주장했으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에는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 모두가 칭호를 주장했다. 이 칭호는 현재 스페인 펠리페 6세가 소유한 스페인 왕관에서 여전히 ''사실상'' 사용되고 있다. 또한 1958년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장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1946년까지 이탈리아 왕들이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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