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위 공백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위 공백은 위나라의 인물로, 희후의 아들이자 위 무공의 형제이다. 희후 사후 군위에 올랐으나 동생 희화에게 살해당하고 묘지에서 자결했다.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공백(共伯)으로 시호하고, 희화를 위 무공으로 세웠다. 사마천의 기록과 사마정의 비판을 통해 그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위나라의 군주 - 위 문후
    위 문후는 전국시대 위나라의 군주로서 이회, 오기 등 인재를 등용하고 법가적 개혁을 통해 위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법치를 통해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여 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 위나라의 군주 - 위 무공
    위 무공은 춘추 시대 위나라의 군주로서 강숙의 선정을 본받아 나라를 다스렸다는 기록과 주나라를 도와 공작으로 봉해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의 덕을 기리는 송시가 《시경》에 실려 후대에 영향을 주었다.
  • 기원전 9세기 중국 사람 - 주 선왕
    주 선왕은 서주 시대의 왕으로, 주 정공과 소 목공의 보좌를 받아 국세를 중흥시키고 동생 우를 정나라 군주로 봉했으며, 사주편을 저술하여 전서를 완성했다.
  • 기원전 9세기 중국 사람 - 송 애공
    송 애공은 춘추 시대 송나라의 마지막 군주로, 내부 권력 다툼과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여 송나라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위 공백
기본 정보
작위
시호공백
희(姬)
여(余)
존칭백(伯)
국적위(衛)
봉지공(共)
미상
생몰년미상 ~ 기원전 813년
재위기간기원전 813년
가계
부친위 례후(衛釐侯)
형제위 무공(衛武公)
기타
수도조가(朝歌)

2. 생애

위 희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원전 813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위나라의 군주가 되었으나, 동생인 희화에게 곧바로 피살되었다. 재위 기간이 매우 짧아 정식 군주로 인정받지 못하고 '공백'(共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1. 출생과 가계

희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기원전 813년에 재위 42년 만에 사망하자, 희여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러나 동생인 희화는 아버지 희후의 총애를 받아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병사들을 모아 희여를 아버지의 묘지에서 습격했다. 습격을 당한 희여는 묘지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위나라 사람들은 희여를 아버지 희후 곁에 장사 지내고 '공백(共伯)'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그리고 희화를 새로운 위나라 군주로 세웠다.

2. 2. 죽음

아버지 위 희후가 기원전 813년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사기》 〈위강숙세가〉에 따르면, 공백의 동생인 희화(姬和)는 아버지 희후로부터 생전에 많은 총애와 재물을 받았다. 희화는 이 재물을 이용해 무사들을 포섭하여, 희후의 장례가 치러지는 묘지에서 공백을 습격하게 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공백은 희후의 묘도로 피신했으나, 결국 그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위나라 사람들은 공백을 희후의 무덤 곁에 장사 지내고 '공백'(共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재위 기간이 짧고 비정상적으로 퇴위했기 때문에 정식 군주로 인정받지 못하여, 시호에 (侯)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희화가 위 무공으로 즉위했다.

한편, 사마정은 《사기색은》에서 계찰이 강숙과 무공의 덕을 칭송한 점, 《국어》에서 무공의 치세를 기리고 '예성'(叡聖)이라 칭한 점, 《시경》에서 “위나라 세자 공백이 일찍 죽었다”라고만 기록하고 피살되었다는 언급이 없는 점 등을 근거로, 무공이 공백을 죽이고 즉위했다는 《사기》의 기록은 잘못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3. 평가

위 공백에 대한 평가는 주로 그의 죽음을 둘러싼 기록과 해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그가 동생 무공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공백을 비극적인 희생자로, 무공을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인물로 평가하는 근거가 되었다.

반면, 당나라사마정은 《사기색은》에서 무공의 덕망과 다른 기록들을 근거로 들어 사마천의 기록에 의문을 제기했다. 사마정은 공백이 단순히 일찍 죽었을 뿐이며, 무공이 형을 살해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무공을 현명한 군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과 연결된다. 이처럼 상반된 기록 때문에 위 공백의 죽음과 무공의 즉위 과정에 대한 평가는 명확하게 내려지지 않고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또한, 위 공백은 재위 기간이 매우 짧고 정식으로 즉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정식 군주로 인정받지 못하여 시호에 (侯)를 받지 못했다는 점도 그의 역사적 평가의 일부이다.

3. 1. 사마천의 기록과 비판

사마천의 《사기》 〈위강숙세가〉에 따르면, 희후 42년에 희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자 공백 여(餘)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희후에게 총애를 받았던 공백의 동생 화(和)는 희후에게 받은 많은 재물로 무사들을 매수했다. 화는 희후의 묘지에서 공백을 공격했고, 공백은 희후의 묘도로 피신했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위나라 사람들은 공백을 희후의 무덤 곁에 장사 지내고 시호를 '공백(共伯)'이라 하였다. 이후 화가 군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무공이다. 공백은 재위 기간이 매우 짧고 정식으로 즉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식 군주로 인정받지 못하여 시호에 '(侯)'를 받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나라사마정은 《사기색은》에서 이러한 사마천의 기록에 의문을 제기했다. 사마정은 오나라의 계찰이 강숙과 무공의 덕을 칭송한 점, 《국어》에서 무공의 통치를 기리며 그를 '예성(叡聖)'이라 일컬은 점, 그리고 《시경》 〈용풍〉 '상서' 편에 "위나라 세자 공백이 일찍 죽었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피살되었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를 통해 사마정은 무공이 형 공백을 죽이고 군위를 찬탈했다는 사마천의 기록이 사실과 다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