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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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유 선거는 1573년부터 1764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국왕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모든 남성 귀족(슐라흐타)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이 제도는 국왕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외세의 간섭을 초래하여, 1791년 5월 3일 헌법 개정을 통해 폐지되었다. 자유 선거는 소집 세임, 선거 세임, 대관 세임의 세 단계를 거쳐 진행되었으며, 총 10번의 선거를 통해 11명의 국왕이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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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선거 | |
---|---|
지도 | |
선거 정보 | |
유형 | 선거 군주제 |
선출 방식 | 선거 |
선출권자 | 슐라흐타 |
선출 기간 | 1573년 ~ 1791년 |
역사적 배경 | |
이전 체제 | 세습 군주제 |
첫 선거 | 1573년 |
마지막 선거 | 1791년 |
폐지 이유 | 5월 3일 헌법 채택 |
선거 과정 | |
후보자 지명 | 슐라흐타의 지명 |
선거 장소 | 바르샤바 근처의 볼라 평원 |
선거 방식 | 모두가 참여하는 투표 |
결과 발표 | 선출된 왕의 즉위 |
선거 결과의 영향 | |
정치적 영향 | 슐라흐타의 권력 강화 |
사회적 영향 | 왕의 권력 제한 |
국제적 영향 | 외국 세력의 개입 |
관련 사건 및 용어 | |
선거인단 | 슐라흐타 |
자유 권리 | 리베룸 베토 |
선거 왕 | 선출 군주 |
2. 역사적 배경
=== 초기 왕조 시대 ===
9세기부터 폴란드에서는 국가 지도자를 선출하는 전통이 존재했다. 전설에 따르면 폴란드 최초 왕조의 창시자인 피아스트 대장장이와 그의 아들 시에모비트가 선거로 선출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아이슬란드의 알싱보다 한 세기 앞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자료가 부족하여 이 선거가 형식적인 절차였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비에츠라고 불리는 집회에서 선거권이 행사되었는데, 이는 대개 유력 귀족(거상)이나 관리들에게 제한되었고, 지역 전통과 통치자의 힘에 큰 영향을 받았다. 폴란드 분열 시대에는 지역별로 전통이 달랐는데, 마조프셰 공국에서는 세습 원칙이, 선임 지역에서는 선거가 중요해졌다. 12세기 또는 13세기까지 ''비에츠'' 제도는 고위 귀족과 관리들로 참여를 제한했고, 1306년과 1310년 관리들의 전국적인 ''비에츠'' 집회는 총 세임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
선거는 선거인단(귀족)의 권한을 강화시켰는데, 왕위 후보자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귀족들에게 약속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1291년 벤체슬라스 2세는 이러한 약속 중 첫 번째인 리토미슐 특권을 했다. 피아스트 왕조 대부분 기간 동안 선거인들은 세습 계승에 따라 왕조의 통치자를 지지했다. 1370년 카지미에르 3세 대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피아스트 왕조가 막을 내렸고, 루이 1세가 카지미에르 3세 대왕과 폴란드 귀족 간의 합의(부다 특권)에 따라 왕으로 선출되었다.[1]
=== 야기에우워 왕조 시대 ===
1386년 리투아니아 대공국 대공 블라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요가일라)가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폴란드 제2왕조가 시작되었다. 야기에우워 왕조 시대에도 선거 원칙이 유지되었으나, 실제로는 왕조 내 상속자를 확인하는 절차에 가까웠다. 당시 폴란드의 군주제는 "선거 입법부를 가진 세습 군주제"로 묘사할 수 있다. 이는 폴란드 귀족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유지하고자 했고, 야기에우워 왕조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세습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통한 선택이라는 구실은 귀족들에게 중요했다. 1530년 지기스문트 1세 늙은이가 자신의 10세 된 아들을 위해 세습 왕위를 확보하려고 시도했을 때 정치적 위기가 발생했고, 폴란드 의회인 세임은 전임자 재위 중에 새 국왕을 선택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이것은 폴란드 정치에서 ''비벤테 레게''로 알려지게 되었다).
=== 자유 선거 시대 ===
1572년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야기에우워 왕조가 단절되고, 연방은 공위 기간(interregnum)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연방의 존속에 불안을 느낀 귀족(슐라흐타)들은 '인테렉스' 제도를 도입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석 대주교에게 주권을 넘기고, 각 지역의 통치는 귀족 조직인 콘페데라치아(konfederacjapl, 연맹)가 맡도록 하였다. 또한, 1573년 바르샤바 연맹 협약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연방의 안정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대법관이자 헤트만인 얀 자모이스키를 중심으로 한 폴란드 남부 귀족들의 주도로, 모든 남성 슐라흐타(귀족, 참정권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자유 선거 제도가 도입되었다. 귀족들은 각 지방(보이보드보)에서 투표를 하고, 지방에서 선출된 대의원이 각 후보의 투표수를 세나트에게 전달했다. 원로원 의장이 국왕 선출을 포고하고, 수석 대주교가 새로운 왕에게 축복을 내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선거는 바르샤바 교외의 비엘카보라(Wielka Wola, 현재 시가지의 서부, 보라 지구)에서 열렸으며, 선출된 국왕은 '파크타 콘벤타(pacta conventa;라틴어:"협정의 승인")'와 '헨리크 왕의 조항(artykuly henrykowskiepl)'을 준수해야 했다. '헨리크 조항'은 최초의 선거왕이었던 앙리 드 발루아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이다.
1697년 이후 국왕 선거는 외국군의 압력으로 자유 선거의 성격을 잃었다. 자유 선거는 국왕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외국의 왕가가 폴란드 국내에 간섭할 수 있게 만들었다.
=== 자유 선거의 폐지 ===
자유 선거는 국왕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후보자 지지를 둘러싼 각 선거구 (보이보드보)내의 다툼을 야기했으며, 외국의 왕가가 폴란드 국내에 간섭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4년 세임(1788년-1792년)이 5월 3일 헌법에서 단행한 중요한 개혁 중 하나로써 자유선거는 폐지되었다.
2. 1. 초기 왕조 시대
9세기부터 폴란드에서는 국가 지도자를 선출하는 전통이 존재했다. 전설에 따르면 폴란드 최초 왕조의 창시자인 피아스트 대장장이와 그의 아들 시에모비트가 선거로 선출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아이슬란드의 알싱보다 한 세기 앞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자료가 부족하여 이 선거가 형식적인 절차였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비에츠라고 불리는 집회에서 선거권이 행사되었는데, 이는 대개 유력 귀족(거상)이나 관리들에게 제한되었고, 지역 전통과 통치자의 힘에 큰 영향을 받았다. 폴란드 분열 시대에는 지역별로 전통이 달랐는데, 마조프셰 공국에서는 세습 원칙이, 선임 지역에서는 선거가 중요해졌다. 12세기 또는 13세기까지 ''비에츠'' 제도는 고위 귀족과 관리들로 참여를 제한했고, 1306년과 1310년 관리들의 전국적인 ''비에츠'' 집회는 총 세임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
선거는 선거인단(귀족)의 권한을 강화시켰는데, 왕위 후보자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귀족들에게 약속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1291년 벤체슬라스 2세는 이러한 약속 중 첫 번째인 리토미슐 특권을 했다. 피아스트 왕조 대부분 기간 동안 선거인들은 세습 계승에 따라 왕조의 통치자를 지지했다. 1370년 카지미에르 3세 대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피아스트 왕조가 막을 내렸고, 루이 1세가 카지미에르 3세 대왕과 폴란드 귀족 간의 합의(부다 특권)에 따라 왕으로 선출되었다.[1]
2. 2. 야기에우워 왕조 시대
1386년 리투아니아 대공국 대공 블라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요가일라)가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폴란드 제2왕조가 시작되었다. 야기에우워 왕조 시대에도 선거 원칙이 유지되었으나, 실제로는 왕조 내 상속자를 확인하는 절차에 가까웠다. 당시 폴란드의 군주제는 "선거 입법부를 가진 세습 군주제"로 묘사할 수 있다. 이는 폴란드 귀족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유지하고자 했고, 야기에우워 왕조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세습 통치자였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통한 선택이라는 구실은 귀족들에게 중요했다. 1530년 지기스문트 1세 늙은이가 자신의 10세 된 아들을 위해 세습 왕위를 확보하려고 시도했을 때 정치적 위기가 발생했고, 폴란드 의회인 세임은 전임자 재위 중에 새 국왕을 선택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이것은 폴란드 정치에서 ''비벤테 레게''로 알려지게 되었다).
2. 3. 자유 선거 시대
1572년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야기에우워 왕조가 단절되고, 연방은 공위 기간(interregnum)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연방의 존속에 불안을 느낀 귀족(슐라흐타)들은 '인테렉스' 제도를 도입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석 대주교에게 주권을 넘기고, 각 지역의 통치는 귀족 조직인 콘페데라치아(konfederacjapl, 연맹)가 맡도록 하였다. 또한, 1573년 바르샤바 연맹 협약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연방의 안정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대법관(great chancellor)이자 헤트만(hetman)인 얀 자모이스키(Jan Zamoyski)를 중심으로 한 폴란드 남부 귀족들의 주도로, 모든 남성 슐라흐타(귀족, 참정권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자유 선거 제도가 도입되었다. 귀족들은 각 지방(보이보드보)에서 투표를 하고, 지방에서 선출된 대의원(deputies)이 각 후보의 투표수를 세나트에게 전달했다. 원로원 의장이 국왕 선출을 포고하고, 수석 대주교가 새로운 왕에게 축복을 내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선거는 바르샤바 교외의 비엘카보라(Wielka Wola, 현재 시가지의 서부, 보라 지구)에서 열렸으며, 선출된 국왕은 '파크타 콘벤타(pacta conventa;라틴어:"협정의 승인")'와 '헨리크 왕의 조항(artykuly henrykowskiepl)'을 준수해야 했다. '헨리크 조항'은 최초의 선거왕이었던 앙리 드 발루아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이다.
1697년 이후 국왕 선거는 외국군의 압력으로 자유 선거의 성격을 잃었다. 자유 선거는 국왕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외국의 왕가가 폴란드 국내에 간섭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4년 세임(Four-Year Sejm)(1788년-1792년)에서 5월 3일 헌법을 통해 자유선거제는 폐지되었다.
2. 4. 자유 선거의 폐지
자유 선거는 국왕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후보자 지지를 둘러싼 각 선거구 (보이보드보)내의 다툼을 야기했으며, 외국의 왕가가 폴란드 국내에 간섭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4년 세임"(Four-Year Sejm)(1788년-1792년)이 5월 3일 헌법에서 단행한 중요한 개혁 중 하나로써 자유선거는 폐지되었다.3. 선거 절차
왕위 계승 기간 동안 세 종류의 특별 세임(sejm)이 왕위 계승 절차를 담당했다.
- 소집 세임 (Sejm konwokacyjny): 폴란드의 대주교가 국왕의 사망이나 퇴위 시 소집하는 세임(Sejm)이다. 소집 세임은 선거 일정과 특별 규정(특히, 국왕이 선서해야 할 특권 조항인 팍타 콘벤타(pacta conventa) 준비 및 후보자 심사)을 설정하는 데 집중했다. 소집 세임의 기간은 2주였다.
- 선거 세임 (Sejm elekcyjny): 선거 세임(Sejm elekcyjny)은 귀족들이 왕위 후보자에 대한 투표를 실시하는 세임이다. 모든 귀족이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세임보다 참석자가 훨씬 많았다. 참석자 수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1만 명에서 1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일반적인 참석자 수는 1만 명에서 1만 5천 명 정도였다. 투표는 수일 동안 진행될 수 있었으며, 1573년에는 4일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세임 전체 기간은 6주였다. 참석자 증가에 대비하여 당시 바르샤바 근교 마을이었던 볼라(Wola)에서 개최되었다. 왕위 후보자들은 세임 참석이 금지되었지만 대표를 파견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선거 세임에 참석하기 전에 지역 세이믹(sejmik) 회의에서 선호하는 후보를 논의했지만, 종종 수일간 지속되는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져 싸움과 전투로 번지기도 했다. 노먼 데이비스(Norman Davies)는 "1764년에는 13명의 선거인만 사망하여 이례적으로 조용한 선거였다고 한다."라고 언급했다.
- 즉위 세임 (Sejm koronacyjny): 즉위 세임(Sejm koronacyjny)은 전통적으로 크라쿠프(Kraków)에서 열렸으며, 폴란드의 대주교가 즉위식을 거행하고 선출된 국왕에게 권한을 넘겨주었다. 기간은 2주였다. 국왕은 팍타 콘벤타(pacta conventa)와 헨리크 조항(Henrician Articles)을 준수할 것을 선서하는 등 여러 의식과 형식을 거쳤다. 즉위식 자체는 바벨 대성당(Wawel Cathedral)에서 거행되었다. 예외적으로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Stanisław I Leszczyński)와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Stanisław August Poniatowski)의 즉위식은 바르샤바(Warsaw)에서 거행되었다.
3. 1. 소집 세임 (Sejm konwokacyjny)
폴란드의 대주교가 국왕의 사망이나 퇴위 시 소집하는 세임(Sejm)이다. 소집 세임은 선거 일정과 특별 규정(특히, 국왕이 선서해야 할 특권 조항인 팍타 콘벤타(pacta conventa) 준비 및 후보자 심사)을 설정하는 데 집중했다. 소집 세임의 기간은 2주였다.3. 2. 선거 세임 (Sejm elekcyjny)
선거 세임(Sejm elekcyjny)은 귀족들이 왕위 후보자에 대한 투표를 실시하는 세임이다. 모든 귀족이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세임보다 참석자가 훨씬 많았다. 참석자 수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1만 명에서 1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일반적인 참석자 수는 1만 명에서 1만 5천 명 정도였다. 투표는 수일 동안 진행될 수 있었으며, 1573년에는 4일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세임 전체 기간은 6주였다.참석자 증가에 대비하여 당시 바르샤바 근교 마을이었던 볼라(Wola)에서 개최되었다. 왕위 후보자들은 세임 참석이 금지되었지만 대표를 파견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선거 세임에 참석하기 전에 지역 세이믹(sejmik) 회의에서 선호하는 후보를 논의했지만, 종종 수일간 지속되는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져 싸움과 전투로 번지기도 했다. 노먼 데이비스(Norman Davies)는 "1764년에는 13명의 선거인만 사망하여 이례적으로 조용한 선거였다고 한다."라고 언급했다.
3. 3. 즉위 세임 (Sejm koronacyjny)
즉위 세임(Sejm koronacyjny)은 전통적으로 크라쿠프(Kraków)에서 열렸으며, 폴란드의 대주교가 즉위식을 거행하고 선출된 국왕에게 권한을 넘겨주었다. 기간은 2주였다. 국왕은 팍타 콘벤타(pacta conventa)와 헨리크 조항(Henrician Articles)을 준수할 것을 선서하는 등 여러 의식과 형식을 거쳤다. 즉위식 자체는 바벨 대성당(Wawel Cathedral)에서 거행되었다. 예외적으로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Stanisław I Leszczyński)와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Stanisław August Poniatowski)의 즉위식은 바르샤바(Warsaw)에서 거행되었다.4. 선거의 영향 및 평가
자유 선거는 군주 권력을 제한하고, 귀족들이 혁명권(rokosz)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여 절대 군주제의 등장을 막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민주적인 절차였지만, 실제로는 연방 정부의 비효율성을 초래하고 외세의 개입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그나트들은 선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여러 차례 내전이 발발하기도 했다(가장 대표적인 예는 1733-173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과 1587-158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다). 연방 말기에는 왕 선거가 갈등과 불안정의 원인이 되었으며, 래스키(Lerski)는 이를 "무정부 상태의 상징"으로 묘사했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보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선거는 귀족에게만 제한된 민주주의였지만, 권력 분립과 선거를 통한 지도자 선출이라는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중요한 선례라고 할 수 있다.
5. 역대 국왕 목록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시대에는 총 10번의 자유 선거를 통해 11명의 국왕이 선출되었다. 각 선거는 소집 세임, 선거 세임, 대관 세임의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선출된 국왕 (국적, 재위 기간) | 비고 | 다른 후보자들 |
---|---|---|
앙리, 앙주 공작 앙리 (프랑스, 1573~1574) | 연합의 초대 국왕.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퇴위함. | |
슈테판 바토리 (헝가리, 1576~1586) | 트란실바니아 공작이기도 함. 안나 야기에우워와 결혼. 선거 분쟁으로 인해 단치히 반란이 발생함. | |
시기즈문트, 핀란드 공작 시기즈문트 3세 바사 (1587~1632) | 스웨덴 출생. 카타지나 야기에우워의 아들. 선거 분쟁으로 인해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587~1588)이 발생함. | |
스웨덴 왕자 라디슬라프 우와디스와프 4세 바사 (1632~1648) | 시기즈문트 3세의 아들. | |
스웨덴 왕자 얀 카지미에시 얀 2세 카지미에시 (1648~1668) | 시기즈문트 3세의 아들이자 우와디스와프 4세의 동생. 퇴위함. | |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 미하우 1세 (1669~1673) | ||
얀 3세 소비에스키 얀 3세 소비에스키 (1674~1696) | ||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아우구스트 2세 (작센, 1697~1706; 1709~1733) | 북방 전쟁으로 인해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1704~1709)가 일시적으로 대신함. 레슈친스키의 선출은 분쟁을 야기하여 폴란드 내전 (1704~1706)을 초래함. | |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 (1733~1736) | 선거 분쟁으로 인해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생하였고, 아우구스트 2세의 아들인 아우구스트 3세(작센, 1733~1763)가 승리함. | |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냐토프스키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 (1764~1795) | 연합의 마지막 국왕. 퇴위함. |
5. 1. 자유 선거를 통해 선출된 국왕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시대에는 왕위 계승자를 자유 선거를 통해 선출하였다. 1573년 초대 국왕 앙리를 시작으로, 1764년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냐토프스키까지 총 10번의 선거(소집, 선거, 대관 세임)를 통해 11명의 국왕이 선출되었다.선거는 소집 세임, 선거 세임, 대관 세임의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소집 세임은 선거를 준비하는 단계였고, 선거 세임에서 귀족(슐라흐타)들의 투표를 통해 국왕을 선출했다. 대관 세임은 새 국왕의 즉위식을 거행하는 자리였다.
선출된 국왕 (국적, 재위 기간) | 비고 | 다른 후보자들 |
---|---|---|
앙리, 앙주 공작 앙리 (프랑스, 1573~1574) | 연합의 초대 국왕.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퇴위함. | |
슈테판 바토리 (헝가리, 1576~1586) | 트란실바니아 공작이기도 함. 안나 야기에우워와 결혼. 선거 분쟁으로 인해 단치히 반란이 발생함. | |
시기즈문트, 핀란드 공작 시기즈문트 3세 바사 (1587~1632) | 스웨덴 출생. 카타지나 야기에우워의 아들. 선거 분쟁으로 인해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587~1588)이 발생함. | |
스웨덴 왕자 라디슬라프 우와디스와프 4세 바사 (1632~1648) | 시기즈문트 3세의 아들. | |
스웨덴 왕자 얀 카지미에시 얀 2세 카지미에시 (1648~1668) | 시기즈문트 3세의 아들이자 우와디스와프 4세의 동생. 퇴위함. | |
미하우 코리뷔트 비시니오비에츠키 미하우 1세 (1669~1673) | ||
얀 3세 소비에스키 얀 3세 소비에스키 (1674~1696) | ||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아우구스트 2세 (작센, 1697~1706; 1709~1733) | 북방 전쟁으로 인해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1704~1709)가 일시적으로 대신함. 레슈친스키의 선출은 분쟁을 야기하여 폴란드 내전 (1704~1706)을 초래함. | |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 (1733~1736) | 선거 분쟁으로 인해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생하였고, 아우구스트 2세의 아들인 폴란드의 아우구스트 3세(작센, 1733~1763)가 승리함. | |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냐토프스키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 (1764~1795) | 연합의 마지막 국왕. 퇴위함. |
선거를 통해 선출된 국왕들은 때때로 외국 출신이었으며, 이들의 선출은 국내외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앙리는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폴란드 왕위를 포기했고, 시기즈문트 3세의 선출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587~1588)을 야기했다. 또한,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의 선출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졌다.
참조
[1]
서적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 Volume 1: The Origins to 1795
Ox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Elective monarchy in Transylvania and Poland-Lithuania, 1569-1587
https://www.worldcat[...]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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