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김응원 각왜비
1. 개요
장흥 김응원 각왜비는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킨 김응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883년 김응원의 7대손 김원주가 세운 의병장 행적비이다. 비문에는 김응원의 생애와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 이괄의 난, 병자호란 시기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토구동에서 왜구를 물리친 활약과 오우당 건립 등의 내용이 담겨 있으며, 김응원의 묘비명과 비문을 짓게 된 배경, 후손들의 감회가 함께 실려 있다.
| 이름 | 장흥 김응원 각왜비 |
|---|---|
| 한자 표기 | 長興 金應遠 卻倭碑 |
| 로마자 표기 | Jangheung Gim Eungwon Gangwaebi |
| 설명 | 왜를 물리친 김응원의 공적을 기리는 비 |
| 국가 | 대한민국 |
|---|---|
| 위치 |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평장리 602-1 |
| 유형 | 문화재자료 |
| 지정 번호 | 288 |
| 지정일 | 2018년 8월 23일 |
| 시대 | 조선시대 (1883년, 고종 20) |
| 소유자 | 경주김씨 두계공파 장흥종중 |
| 수량 | 1기 |
| 크기 | 높이 196cm, 너비 59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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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작품 -
바람에 휘날리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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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의 문화유산 -
강성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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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의 문화유산 -
동백정
동백정은 김성장이 지은 정자로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삶의 철학을 반영하며, 재건축을 통해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계승하고, 대동계 집회소 및 별신제 개최 장소로 사용되는 등 지역 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공간이다. -
조선의 석비 -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조선 중종 시대에 세워진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는 묘비 훼손을 막기 위한 경계문이 한글로 새겨진 비석으로, 국어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비석으로 평가받으며 보물로 지정되었다. -
조선의 석비 -
해남 명량대첩비
해남 명량대첩비는 1688년 박신주가 이순신 장군의 명량 해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비석으로, 명량대첩의 상황과 이순신 장군의 충의를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국난 시 눈물을 흘린다는 전설이 있다.
2. 김응원 행적비 건립 배경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김응원(1569~1638)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883년(고종 20) 김응원의 7대손 김원주가 글을 지어 세운 의병장 행적비이다.
3. 김응원의 생애와 활동
3.1. 임진왜란 시기 의병 활동
3.2.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4. 비문의 내용
4.1. 원문
有明朝鮮國成均生員行參奉慶州金公卻倭碑
公諱應遠 字而乆 號五友堂 考諱希鍊 中大小科 歷宰六邑 終至校理 及關西評」事 祖諱益煥 行直長 妣槐山崔氏 隆慶三年己巳三月十八日生公 公生而聰穎性」 又至孝 稍長器局超邁 壬辰倭變 與兄判官公諱應虬 率數千人 入菟裘洞 夜設雉」尾炬散綴樹梢 晝置疑兵以環洞外 倭寇疑有大兵屯結 不敢逼人 皆附之賴以全」活 府伯報營 轉達于朝 特除寢郞 府伯就其洞 刻郤倭洞三字于磎石 至今完然 丁甲」子适變 公爲長興倡義都有司 募兵聚糧 赴 行在 聞賊授首而止 當丙子亂 公年六」十八 老病不能振作 詩送于倡義諸公 有曰 胡塵蔽目列郡風靡七十老翁更何所」望偉哉羣雄出此湖南云云 與判官公共居同㸑 每於枕上擊釼作氣 其氣槩可想矣 結」精舎于其洞 扁號五友堂 五友者 松梅竹菊我 古昔莬裘洞今稱道高者 盖以公之道高而」然也 配安東金氏 抱恙無嗣 取兄子爲繼養諱天吉 戊寅二月二十八日卒于正寢 今整一碑」纔銘略于事實惟我 後裔觀此 興感永孚 于休幸甚
崇禎甲申後四癸未三月十五日七代孫 元柱謹識
4.2. 번역문
조선국 성균관 생원 행 참봉 경주 김공 각왜비
공의 휘(諱)는 응원(應遠)이고, 자(字)는 이구(而久)이며, 호는 오우당(五友堂)이다. 아버지의 휘는 희련(希鍊)이며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여섯 읍을 다스렸으며 마지막에 교리(校理)와 관서평사(關西評事)에 이르렀다. 조부의 휘는 익환(益煥)으로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선비(先妣)는 괴산최씨(槐山崔氏)인데 1569년(융경(隆慶) 3년 기사년) 3월 18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자품이 뛰어나고 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조금 장성하여 기국(器局)이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인 판관공(判官公) 응규(應虬)와 함께 수천 명을 거느리고 토구동(菟裘洞)에 들어가 밤에는 치를 설치하고 나무를 엮어 불을 지르고, 낮에는 나뭇가지 끝에다 병사처럼 보이게 위장해 놓고 동네 바깥을 둘러치니 왜구(倭寇)가 대군(大軍)이 주둔한 것으로 의심하고서 결국 감히 가까이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이에 의지하여 살 수 있었다. 부백(府伯, 장흥부)이 병영(兵營, 전라병마절도사영)에 이 사실을 알려 조정에까지 전해져 침랑(寢郞)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부백이 그 동네에 나아가서 계곡의 바위에 ‘각왜동(卻倭洞)’ 세 글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뚜렷하다.
갑자년 이괄의 난 때 공은 장흥 창의도유사(長興 倡義都有司)가 되어 병사를 모집하고 식량을 모아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다가 적장(賊將)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공의 나이가 68세였는데 연로하고 병이 들어 떨치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킨 제공(諸公)에게 시(詩)를 지어 보냈는데 그 시에, “오랑캐의 먼지로 눈을 가리니 여러 고을이 바람에 쓰러지듯 하는구나. 칠십 된 늙은이가 어찌 공을 세울 수 있으랴. 위대하도다 군웅(群雄)이여 바로 이곳 호남에서 나왔도다”라 하였다. 공은 판관공과 함께 거처하며 한솥밥을 먹고 자리에 누워서도 칼을 두들겨 기운을 북돋았으니 그 기세를 가히 상상할 수 있다.
그 동네에 정사(精舍)를 짓고 오우당(五友堂)이란 편액(扁額)을 걸었으니, 오우(五友)란 소나무와 매화, 대나무, 국화와 자기 자신을 말한다. 옛날엔 토구동(菟裘洞)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도고(道高)라고 하니 아마도 공의 도(道)가 높아서(高) 그렇게 부르는 듯하다.
배(配) 안동권씨(安東權氏)는 후사가 없어서 형의 아들을 데려와 후사로 삼아 계양을 했으니 휘가 천길(天吉)이다. 1638년(무인년) 2월 28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했다. 이제야 다듬어 하나의 비를 겨우 세우고 명을 약술한다. 사실에 따라 오직 우리들 후예들은 이를 보고 흥감하여 길이 빛나고 광대하게 아름답고 참으로 기뻐할 일이도다.
1883년(고종 20, 1644년 갑신(인조 22) 뒤 네 번째 계미년) 3월 15일 7대손 원주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