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정복경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정복경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예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평주를 다스렸다. 인종 때 국학직학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의종 즉위 후 시호부원외랑, 예부낭중 등을 지냈다. 학문을 좋아하고 청렴한 성품으로 칭송받았으며, 1152년에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생애

정복경은 초계 정씨로,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낸 정문(鄭文)의 아들이자 수태위 문하시중을 지낸 정배걸(鄭倍傑)의 손자이다. 학문을 좋아하고 맑고 검소한 성품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풍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공적인 일이 아니면 고위 관료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고, 재산을 모으는 데도 관심이 없어 집안에 재물이 없었다.

정복경은 김씨(金氏)와 혼인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자녀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죽음과 후손)에 있다.

2. 1. 관직 생활

정복경은 처음에 할아버지 정배걸의 덕택에 음서(蔭敍)로 관직에 나아갔다.[2] 예종 때 전시(殿試)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평주(平州)를 다스렸다. 인종이 즉위하자 국학직학(國學直學)에 임명되었고, 이후 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승평군(昇平郡) 지사가 되었다.[3] 예빈주부(禮賓注簿) 겸 당후관(堂後官)을 거쳐 다시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었고, 상식봉어(尙食奉御)로서 춘주도안찰사(春州道按察使)가 되었다.

의종 즉위 후 시호부원외랑(試戶部員外郞)을 거쳐 예부낭중(禮部郞中)으로 상주(尙州) 수령이 되었다. 이후 호부(戶部)와 예부(禮部)의 원외랑(員外郞)을 거쳐 시군기소감(試軍器少監)이 되었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의종 6년(1152년) 12월,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2. 2. 성품과 일화

정복경은 학문을 좋아하고 성품이 맑고 검소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풍채가 있었다. 공적인 일이 아니면 공경(고위 관료)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으며, 재산을 모으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 집에는 책상과 나무 의자뿐이었고 재물을 쌓아두지 않았다.

한번은 정복경이 지방관으로 임명되자 간의대부 김자의가 상소를 올려 정복경의 식견, 높은 뜻, 방정한 행동, 순수한 덕, 청렴함, 부지런함, 검소함을 칭찬하며 그를 중앙에서 임금을 보좌하는 직책에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자의 외에도 다른 현명한 대부들도 모두 정복경을 천거했다고 한다.

2. 3. 죽음과 후손

정복경은 고려 의종 6년(1152년) 12월에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2] 의종 8년(1154년) 5월 14일에 대법운산 동북쪽 기슭에 장례를 지냈다.

정복경은 김씨와 혼인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자녀들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이름구분상세
정영도(鄭永圖)장남할아버지 정문의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양온령(良醞令), 여택재유(麗澤齋瑜)를 지냈으며, 시전중내급사(試殿中內給事) 길경안(吉景安)의 사위이다.
정덕구(鄭德丘)차남천태종 승려가 되었다.
정영충(鄭永忠)3남어려서 관직을 받지 못했다.
정효윤(鄭曉胤)4남천태종 승려가 되었다.
큰딸해양현위(海陽縣尉) 양온령 권안국(權安國)에게 시집갔다.
작은딸미혼이다.


3. 묘지명

鄭公墓誌銘|정공묘지명중국어

공의 성은 정씨(鄭氏)이고 이름은 복경(復卿)이며 자는 세귀(世貴)로 초계(草溪)사람이다. 정문(貞簡公)의 아들이며, 정배걸(光儒侯)의 손자이다. 조음(祖陰)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예종 때 전시(殿試)에 급제하고 평주(平州)에서 다스렸다. 인종 즉위 후 국학직학(國學直學)에 임명되었고, 합문지후(閤門紙候)로서 승평군(昇平郡)의 지사가 되었다. 이후 예빈주부 겸 당후관(禮賓注簿 兼 堂後官), 상식봉어(尙食奉御)로서 춘주도안찰사(春州道按察使)를 역임하였다. 의종 즉위 후 시호부원외랑(試戶部員外郞)을 거쳐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상주(尙州)의 수령이 되었다. 이후 호부(戶部)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을 거쳐 시군기소감(試軍器少監)이 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천덕(天德) 4년 임신년(1152년) 12월 그믐에 66세로 돌아가셨다. 갑술년(1154년) 5월 14일 병인일에 대법운산(大法雲山) 동북쪽 기슭에 장례지냈다. 공은 학문을 좋아하고 청렴하며 검소하였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공경(公卿)의 집에 가지 않았다. 재산에는 관심이 없어 집안에 재물이 없었고 책상과 나무뿐이었다. 간의대부(諫議大夫) 김자의(金子儀)는 공의 식견, 방정함, 청렴함, 검소함을 칭찬하며 문한직, 청요직, 근시직에 임명하여 임금을 보좌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은 김씨(金氏)와 혼인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영도(永圖)는 양온령, 여택재유(麗澤齋瑜)를 지냈고 길경안(吉景安)의 사위이다. 차남 덕구(德丘)와 사남 효윤(曉胤)은 천태종 승려가 되었다. 삼남 영충(永忠)은 어렸다. 장녀는 권안국(權安國)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미혼이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주역』에서 말하기를 선(善)을 쌓으면 반드시 복이 있다고 하였으니 광유후의 공덕은 나라와 더불어 끝이 없으리라.

그 후손은 재능과 지략이 없어도 반드시 성할 것인데 하물며 공과 같이 총명하여 통달하고 부조(父祖)의 가르침을 실천할 사람에게 있어서랴.

당연히 큰 자리에 올라 나라 일을 돕고 적절한 계책으로 강하고 굳어서 힘들게 일하여도 병이 나지 않았다.

종말을 대범하게 맞는다는 것은 둥근 구멍에 모난 초꽃처럼 서로 잘 맞지 않는 일이지만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니 천명을 분명히 알아 처지가 즐겁기만 하네

근심한 것은 가난이 아니오 보배로 삼은 것은 오직 맑음이라

시(詩)와 서(書)로 스스로 즐거워하였으니 가문의 명성은 허물어지지 않으리라.

정원(貞元) 2년 갑술년(1154년) 5월 일 쓰다.

참조

[1] 서적 초계정씨족보
[2] 문서 황해도 평산군
[3] 문서 전라남도 순천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