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러미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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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러미 테일러는 17세기 영국의 성공회 성직자이자 작가이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윌리엄 로드의 후원을 받아 옥스퍼드에서 활동했으며, 잉글랜드 내전 시기에는 왕당파를 지지했다. 내전 이후에는 저술 활동에 전념하며, 경건 서적과 윤리 지침서를 썼다. 왕정복고 후에는 아일랜드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종교적 관용과 주교제 옹호를 주장했다. 주요 저서로는 『성스러운 삶과 죽음의 규칙과 수행』, 『우정의 본질, 직무 및 척도에 관한 담론』, 『회의론자의 안내자, 또는 양심의 규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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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테일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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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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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 다운 대 코너 주교 |
교회 | 아일랜드 성공회 |
교구 | 다운 대 코너 |
임기 시작 | 1661년 |
임기 종료 | 1667년 |
이전 | 헨리 레슬리 |
이후 | 로저 보일 |
서품 | 1633년 |
축성 | 1661년 1월 27일 |
축성자 | 존 브램홀 |
출생일 | 1613년 8월 15일 이전 |
사망일 | 1667년 8월 13일 |
국적 | 잉글랜드 |
종교 | 성공회 |
교육 | 퍼스 스쿨 |
모교 | 곤빌 앤 케이어스 칼리지 |
기념일 | 8월 13일 |
숭배 | 성공회 공동체 |
2. 생애
제러미 테일러는 1613년 8월 15일 케임브리지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 성 삼위일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3] 아버지로부터 문법과 수학을 배운 후 퍼스 스쿨을 거쳐[4] 케임브리지 곤빌 앤 키스 칼리지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5] 1633년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잠시 강사로 일하다가 윌리엄 로드 대주교의 후원으로 옥스퍼드 대학교 올 소울스 칼리지의 펠로우가 되었다.[6] 1638년에는 러틀랜드의 업핑햄 교구에 임명되었다.[6]
잉글랜드 내전 기간 동안 왕당파였던 테일러는 찰스 1세를 따라 옥스퍼드로 갔고, 1643년에는 왕에 의해 노샘프턴셔주 오버스톤의 교구에 임명되었다.[6] 1645년 카디건 성 포위에서 포로로 잡히기도 했지만,[6] 찰스 1세의 마지막 몇 주 동안 런던에 있으면서 왕에게 귀중품을 받기도 했다.[6]
이후 테일러는 카마던셔주에서 학교를 운영하며 카버리 백작의 개인 채플린으로 활동했고, 골든 그로브에서 저술 활동에 힘썼다.[6] 그는 런던 탑등 여러 차례 투옥되기도 했다.[6]
왕정복고 이후, 테일러는 다운 앤 코너 로마 가톨릭 교구 주교로 임명되었고,[6] 아일랜드 추밀원의 일원이자 더블린 대학교 부총장이 되었다. 그는 장로교 목사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드로모어 대성당을 신축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테일러는 1667년 8월 13일 리스번에서 사망하여 드로모어 대성당에 묻혔다.[6]
2. 1. 초기 생애 (1613-1635)
제러미 테일러는 케임브리지에서 이발사인 나다니엘의 아들로 태어났다.[3] 그는 1613년 8월 15일, 어린 시절 케임브리지 성 삼위일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교육을 받았으며 그에게 문법과 수학을 가르쳤다. 그 후 그는 케임브리지의 퍼스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고,[4] 케임브리지 곤빌 앤 키스 칼리지로 진학하여 1630/1631년에 문학사 학위를, 1634년에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5]이후 여러 해 동안 그가 너무나 쉽게 구사했던 엄청난 학습 능력은 그가 학생으로서 부지런했다는 가장 좋은 증거이다. 그는 1633년, 아직 법정 연령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성직을 받았고, 옛 동료 학생이었던 토마스 리스덴의 초청을 받아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잠시 강사로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2. 2. 로드의 후원과 옥스퍼드 시절 (1635-1638)
윌리엄 로드 대주교는 테일러를 불러 램버스 궁전에서 자신의 앞에서 설교하도록 했고, 이 젊은이를 보호했다. 테일러는 1636년까지 케임브리지의 펠로우십에서 물러나지 않았지만, 로드가 그의 상당한 재능이 끊임없는 설교의 의무가 허용하는 것보다 더 나은 연구와 발전을 위한 기회를 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런던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1635년 11월, 로드에 의해 올 소울스 칼리지, 옥스퍼드의 펠로우십에 지명되었으며, 앤서니 우드에 따르면, 사랑과 존경이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시간을 거의 보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후원자인 대주교의 채플린이 되었고, 국왕의 특별 채플린이 되었다.옥스퍼드에서 윌리엄 칠링워스는 역작 ''개신교의 종교''를 집필하느라 바빴고, 칠링워스와의 토론을 통해 테일러가 당대의 자유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했을 가능성이 있다. 옥스퍼드에서 2년 후, 1638년 3월 윌리엄 족슨 런던 주교에 의해 러틀랜드의 업핑햄 교구에 임명되었다.
2. 3. 잉글랜드 내전과 왕당파 활동 (1638-1649)
윌리엄 로드 대주교의 후원으로 옥스퍼드 대학교 올 소울스 칼리지의 펠로우가 된 테일러는, 1638년 3월 윌리엄 족슨 런던 주교에 의해 러틀랜드의 업핑햄 교구에 임명되었다.[6] 이듬해 그는 피비 랭스데일과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두었다.[6]테일러는 화약 음모 사건 기념일에 성모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로마 가톨릭에 대한 은밀한 경향이 있다는 의심을 해소하려 했다.[6] 그러나 왕당파에 대한 그의 애착은 파면된 목사 위원회가 1644년 그의 교구를 몰수하게 만들었다.[6]
잉글랜드 내전 기간 동안 테일러는 국왕을 따라 옥스퍼드로 갔고, 1643년에는 찰스 1세에 의해 노샘프턴셔주 오버스톤의 교구에 임명되었다.[6] 그는 그곳에서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노샘프턴 백작 (2대) 스펜서 컴튼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645년 2월 4일 카디건 성 포위에서 왕당파와 함께 포로로 잡히기도 했던 테일러는, 1649년 찰스 1세의 마지막 몇 주 동안 런던에 있었으며, 찰스 1세로부터 시계와 성경을 보관하던 흑단 케이스를 장식했던 보석을 받았다고 전해진다.[6]
2. 4. 은둔과 저술 활동 (1649-1660)
이후 15년 동안 테일러의 행적은 쉽게 추적되지 않는다. 그는 1649년 찰스 1세의 마지막 몇 주 동안 런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찰스 1세로부터 시계와 성경을 보관하던 흑단 케이스를 장식했던 보석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1645년 2월 4일 카디건 성 포위에서 다른 왕당파와 함께 포로로 잡혔다.[6] 1646년에는 두 명의 다른 성직자와 함께 카마던셔주의 란피항엘 아베르비스 교구의 뉴턴 홀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리처드 본, 카버리 백작의 개인 채플린이 되었고, 그의 호의를 입었다. 그의 저택인 골든 그로브는 테일러의 여전히 인기 있는 경건 수칙의 제목에 영원히 남아 있으며, 그의 첫 번째 부인은 테일러의 변함없는 친구였다. 골든 그로브에서 테일러는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들을 썼다.[6] 앨리스, 세 번째 카버리 부인은 존 밀턴의 ''코머스''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모델이었다. 테일러의 첫 번째 부인은 1651년 초에 사망했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은 조안나 브리지스 또는 브리짓으로, 찰스 1세의 사생아라고 전해지지만,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9] 그녀는 카마던셔의 맨디넘에 좋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의회파의 수탈로 가난해졌을 것이다. 결혼 후 몇 년 동안 그들은 아일랜드로 이주했다. 때때로 테일러는 그의 친구 존 이블린과 함께 런던에 나타났으며, 그의 ''일기''와 서신에 그의 이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는 세 번 투옥되었다. 1645년에는 그의 ''골든 그로브''의 부적절한 서문 때문에, 1655년 5월부터 10월까지는 쳅스토 성에서, 어떤 혐의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세 번째는 1657년 런던 탑에서 그의 출판인 리처드 로이스턴의 경솔함 때문에 투옥되었는데, 그는 기도의 자세를 취한 그리스도를 묘사한 판화로 그의 ''공무집''을 장식했다.2. 5. 왕정복고와 아일랜드 주교 시절 (1660-1667)
왕정복고 시기에 제러미 테일러는 다운 앤 코너 로마 가톨릭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고,[6] 곧 인접한 다운 앤 드로모어 교구를 감독하는 추가적인 책임을 맡게 되었다. 주교로서, 그는 1661년에 드로모어 교구를 위한 드로모어 대성당을 신축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또한 아일랜드 추밀원의 일원이 되었으며, 1660년에는 더블린 대학교 부총장이 되었다.그는 대학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나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무질서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남자와 소년들의 무더기였지만, 대학의 구성원은 없었으며, 동료나 학자 중 누구도 자신의 자리에 대한 법적 권리가 없었고, 폭정이나 우연에 의해 밀려났다.
이에 따라 그는 대학 구성원의 입학과 행동에 대한 규정을 제정하고 시행하며, 강사직을 설립하는 과제에 적극적으로 착수했다. 왕정복고 당시 북아일랜드에는 약 70명의 장로교 목사가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스코틀랜드 서부 출신으로, 주교제도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테일러는 서임 직후 제임스 버틀러 제1대 오몬드 공작에게 "나는 고통스러운 곳에 던져진 것을 느낀다"라고 쓸 정도였다.
이전에 관용적인 태도를 옹호했던 테일러였지만, 새로운 주교는 장로교 성직자에게 주교 서품과 관할권에 대한 복종이나 박탈 외에는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었다. 그 결과, 그는 첫 번째 방문에서 36개의 교회를 공석으로 선언했고, 그의 명령에 따라 재산 반환이 확보되었다.
레지널드 헤버는 "영국 왕실이 아일랜드를 통치하는 데 있어 개혁된 종교를 도입하기 위해 추구한 시스템보다 더 특별하고 불행했던 부분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아일랜드 주교들의 요청에 따라 테일러는 ''교황주의 반대 담론''(1664년과 1667년의 두 부분)을 착수했지만, 윌리엄 베델의 방법을 채택하고, 그의 성직자들에게 아일랜드어를 습득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그의 목적을 더욱 효과적으로 달성했을지도 모른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찰스 1세의 사생아로 추정되는 조안나 브리지스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 결혼에서 두 딸이 태어났는데, 프랜시스 마시 대주교와 결혼하여 자녀를 둔 메리와 리스번 국회의원인 에드워드 해리슨과 결혼하여 자녀를 둔 조안나이다.[11]
테일러는 1667년 8월 13일 리스번에서 사망했다. 그는 1870년에 그가 묻힌 지하 묘지 위에 앱시달 성가대석이 건설된 드로모어 대성당에 묻혔다.
3. 사상과 신학
제러미 테일러는 왕정복고 시기에 다운 앤 코너 로마 가톨릭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곧 인접한 다운 앤 드로모어 교구를 감독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6] 그는 1661년에 드로모어 교구를 위한 드로모어 대성당을 신축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북아일랜드에는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목사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주교제도에 강하게 반대했다. 테일러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의 진실성, 헌신, 웅변에 설득된 사람들도 있었다.
『성스러운 삶과 죽음의 규칙과 수행』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실천 지침서였다. 이 책은 모든 덕을 얻는 방법, 악에 대한 치료법, 유혹에 저항하는 방법, 기독교인의 의무를 담은 기도를 다루고 있다.[10] 그는 캐서린 필립스에게 영감을 받아 『우정의 본질, 직무 및 척도에 관한 담론』(1657)을 헌정했다. 『회의론자의 안내자, 또는 양심의 규칙 …』(1660)은 기독교인을 위한 케이스 스터디와 윤리 지침서로 기획되었다.[10] 그의 작품들은 나다나엘 존스에 의해 웨일스어로 번역되었다.
3. 1. 주교제 옹호
왕정복고 시기에 테일러는 다운 앤 코너 로마 가톨릭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고,[6] 곧 인접한 다운 앤 드로모어 교구를 감독하는 추가적인 책임을 맡게 되었다. 주교로서, 그는 1661년에 드로모어 교구를 위한 드로모어 대성당을 신축하도록 지시했다.당시 북아일랜드에는 약 70명의 장로교 목사가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스코틀랜드 서부 출신으로, 주교제도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테일러는 서임 직후 제임스 버틀러 제1대 오몬드 공작에게 "나는 고통스러운 곳에 던져진 것을 느낀다"라고 쓸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편지에는 위험에 대한 과장이 있었을 수 있지만, 그의 권위에 대한 저항과 제안에 대한 거절은 분명했다.
이전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테일러는 장로교 성직자들에게 주교 서품과 관할권에 대한 복종, 그렇지 않으면 박탈 외에는 다른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첫 방문에서 36개의 교회를 공석으로 선언하고, 그의 명령에 따라 재산 반환을 확보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젠트리(gentry, 소지주 계급)들이 그의 진실성, 헌신, 그리고 웅변에 설득되었다.
3. 2. 경건 생활과 윤리
『성스러운 삶과 죽음의 규칙과 수행』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실천 지침서였다. 이 책은 모든 덕을 얻기 위한 수단과 도구, 모든 악에 대한 치료법, 유혹에 저항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고려 사항, 그리고 기독교인의 모든 의무를 담은 기도를 다루고 있다.[10] 캐서린 필립스("비할 데 없는 오린다")에게 영감을 받아, 그는 필립스에게 『우정의 본질, 직무 및 척도에 관한 담론』(1657)을 헌정했다. 『회의론자의 안내자, 또는 양심의 규칙 …』(1660)은 기독교인을 위한 케이스 스터디와 윤리의 표준 지침서가 되도록 의도되었다.[10] 그의 작품들은 나다나엘 존스에 의해 웨일스어로 번역되었다.4. 주요 저서
제목 | 출판 연도 |
---|---|
예언의 자유에 대한 담론 | 1646 |
성령의 변명에 대한 전례의 공식화 및 설정 | 1649 |
위대한 모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 1649 |
거룩한 삶의 규칙과 훈련 | 1650 |
거룩한 죽음의 규칙과 훈련 | 1651 |
골든 그로브에서 설교한 스물일곱 편의 설교, 여름 반년 동안… | 1651 |
Clerus Domini: 또는, 신성한 제도, 필요성, 성스러움 및 사역의 분리에 대한 담론 | 1651 |
골든 그로브에서 설교한 스물다섯 편의 설교, 겨울 반년 동안… | 1653 |
거룩한 성명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현존과 영적 현존은 화체설의 교리에 반하여 증명되었다. | 1654 |
골든 그로브; 또는 매일의 기도와 연도… | 1655 |
Unum Necessarium | 1655 |
우정의 본질, 직무 및 척도에 대한 담론 | 1657 |
Ductor Dubitantium, 또는 양심의 규칙… | 1660 |
가치 있는 성찬 참여자; 또는 주의 만찬을 가치 있게 받는 데 따른 본질, 효과 및 축복에 대한 담론… | 1660 |
『성스러운 삶과 죽음의 규칙과 수행』은 독실한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기독교 실천 지침서를 제공했다.[10] 모든 덕을 얻기 위한 수단과 도구, 모든 악에 대한 치료법, 모든 유혹에 저항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고려 사항, 그리고 기독교인의 모든 의무를 담은 기도를 다루었다.[10] 『성스러운 죽음』은 아마도 훨씬 더 인기가 있었을 것이다.[10]
그의 친구인 캐서린 필립스("비할 데 없는 오린다")가 "기독교의 원칙에 의해 얼마나 멀리 사랑하고 완벽한 우정이 허용되는가?"라는 질문에 영감을 받아, 그는 부인 필립스에게 『우정의 본질, 직무 및 척도에 관한 담론』(1657)을 헌정했다.[10] 그의 『회의론자의 안내자, 또는 양심의 규칙 …』(1660)은 기독교인을 위한 케이스 스터디와 윤리의 표준 지침서가 되도록 의도되었다.[10] 그의 작품들은 나다나엘 존스에 의해 웨일스어로 번역되었다.[10]
테일러가 ''이생과 다가올 삶에서 인간의 상태에 대한 묵상''(1684)의 표지에 저자로 명명되어 있지만, 이 작품은 후안 유세비오 니에렘베르그의 1672년 영어 번역본인 ''De la diferencia entre lo temporal y lo eterno, y Crisol de Desengaños''(''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차이, 그리고 속임수의 도가니'', 1640)를 요약한 것으로 보이며, 테일러가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5. 가족 관계
제러미 테일러는 롤랜드 테일러의 직계 후손이라고 전해지지만, 그 주장은 입증되지 않았다.[14] 그는 딸 메리를 통해, 메리가 프랜시스 마시 대주교와 결혼하여 수많은 후손을 두었다.[15]
참조
[1]
서적
A First Book of English Literature
Macmillan
[2]
서적
Jeremy Taylor
https://archive.org/[...]
Macmillan
[3]
간행물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4]
뉴스
The Perse School 400-year anniversary supplement
Cambridge News
2015-09-16
[5]
acad
[6]
웹사이트
Jeremy Taylor
https://www.ccel.org[...]
[7]
간행물
Athenae Oxonienses
[8]
웹사이트
Jeremy Taylor, Bishop and Theologian
http://justus.anglic[...]
[9]
문서
Jeremy Taylor
[10]
서적
The Science of Conjecture: Evidence and Probability Before Pascal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1]
문서
Sir Henry Marsh, Baronet
Burke's Peerage
[12]
웹사이트
The Calendar
https://www.churchof[...]
2021-03-27
[13]
서적
Lesser Feasts and Fasts 2018
https://books.google[...]
Church Publishing, Inc.
2019-12-17
[14]
DNB
[15]
문서
Sir Henry Marsh, Baronet; Burke's Landed Gentry, 1871, Vol. II, p. 888, Marsh of Springmount
Burke's Peerage
[16]
웹사이트
eBook
https://ccel.org/cce[...]
[17]
웹사이트
eBook
https://ccel.org/cce[...]
[18]
서적
Contemplations of the State of Man in this Life, and in that which is to Come
https://books.google[...]
Printed for John Kidgell at the Golden-Bell, near Grays-Inn-Gate, in Holb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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