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맥도넬
1. 개요
조 맥도넬은 아일랜드 공화국의 임시 IRA 요원으로, 1981년 아일랜드 단식 투쟁에 참여하여 61일간 단식 투쟁을 벌이다 사망했다. 그는 벨파스트에서 태어나 오퍼레이션 데메트리우스 작전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석방 후 IRA에 합류하여 활동하다가 총기 소지 혐의로 14년형을 선고받았다. 단식 투쟁 중 1981년 아일랜드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81년 7월 8일에 사망하여 밀타운 묘지에 묻혔다. 그의 죽음에 대한 논란과 함께, 그는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로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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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조지프 맥도넬 |
|---|---|
| 출생일 | 1951년 9월 14일 |
| 출생지 | 벨파스트, 북아일랜드 |
| 사망일 | 1981년 7월 8일 |
| 사망지 | 메이즈 교도소, 북아일랜드 |
| 매장지 | 밀타운 공동묘지 |
| 배우자 | 고레티 (1970년–1981년; 그의 사망) |
| 자녀 | 2명 |
| 조직 | 아일랜드 공화국군 임시파 |
|---|---|
| 알려진 이유 | 61일간의 단식투쟁, 1981년 5월 9일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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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 분쟁으로 죽은 사람 -
바비 샌즈
바비 샌즈는 북아일랜드 분쟁 시기 IRA 단원으로, 정치범 지위 획득을 위한 단식 투쟁을 주도하고 영국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단식 중 사망하여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에게 순교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
북아일랜드 분쟁으로 죽은 사람 -
마틴 허슨
북아일랜드 출신 용접공이자 건설 노동자인 마틴 허슨은 IRA 활동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롱 케시 H 블록에 수감되었으며, 1981년 단식 투쟁에 참여하여 46일 만에 사망 후 아일랜드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단식투쟁하다 죽은 사람 -
바비 샌즈
바비 샌즈는 북아일랜드 분쟁 시기 IRA 단원으로, 정치범 지위 획득을 위한 단식 투쟁을 주도하고 영국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단식 중 사망하여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에게 순교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
단식투쟁하다 죽은 사람 -
토머스 애시
토머스 애시는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이자 교사로, 1916년 부활절 봉기에 참여하여 체포 후 단식 투쟁 중 사망했으며 아일랜드 독립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
아일랜드 공화국군 임시파 관련자 -
마틴 맥기네스
마틴 맥기네스는 북아일랜드의 정치인으로,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에서 활동하다가 신 페인으로 전향하여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에 참여했으며, 북아일랜드 부수반을 역임하고 2017년에 사망했다. -
아일랜드 공화국군 임시파 관련자 -
게리 애덤스
게리 애덤스는 1948년 벨파스트에서 태어난 아일랜드 공화주의 정치인으로, 신 페인 대표를 역임하며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에 관여하고 영국 및 아일랜드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IRA 연관 의혹에도 불구하고 평화 정착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초기 생애
조 맥도넬은 벨파스트 폴스 로드 하부의 슬레이트 스트리트에서 8명의 자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근처의 로마 가톨릭 학교에 다녔다. 1970년에 고레티와 결혼하여 레나둔 지역의 혼 드라이브에 있는 처형의 집으로 이사했다. 그들의 집은 충성파 거리에서 단 두 가톨릭 가구 중 하나였기에, 고레티의 어머니 집으로 이사하기 전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다.
3. IRA 활동
맥도넬은 오퍼레이션 데메트리우스 작전으로 체포되어 게리 아담스 등과 함께 교도소 선박 HMS 메이드스톤에 수감되었다. 이후 몇 달 동안 HM 감옥 메이즈로 이송되었다. 석방 후 임시 IRA 벨파스트 여단에 합류, 바비 샌즈와 함께 던머리 밸모럴 퍼니싱 컴퍼니 부지에 대한 소형 소이탄 공격을 준비했다. IRA와 로열 얼스터 경찰대(RUC) 및 영국군 간의 총격전이 벌어졌고, 맥도넬은 세이머스 피누케인, 숀 라베리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들은 총기 소지 혐의로 14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법원의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선고 후 HMP 메이즈 H5 구역에 수감되었다.
4. 1981년 단식 투쟁
조 맥도넬은 1981년 아일랜드 단식 투쟁에 참여하여 61일 동안 단식을 지속하다 1981년 7월 8일에 사망했다. 그는 두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아내 고레티는 단식 투쟁 지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맥도넬은 밀타운 묘지에 바비 샌즈 옆에 묻혔다. 그의 선거 사무원이었던 존 조 맥걸은 슬리고-레트림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패트릭 피어스의 말을 인용하여 "그는 세상의 현명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바친 바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아일랜드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은 겉보기에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라고 말했다.
4.1. 투쟁 배경
맥도넬은 1981년 아일랜드 단식 투쟁의 목표에 동의했다. 그 목표는 다음과 같다.
* 죄수복을 입지 않을 권리
* 감옥 노동을 하지 않을 권리
* 다른 죄수들과 자유롭게 교제할 권리
* 자체 교육 및 오락 시설을 조직할 권리
* 일주일에 한 번의 면회, 한 통의 편지, 한 개의 소포를 받을 권리
맥도넬은 1980년 첫 번째 단식 투쟁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1981년 두 번째 단식 투쟁에 바비 샌즈 등과 함께 참여했다. 단식 투쟁 중 그는 1981년 총선에서 안티-H 블록 후보로 아일랜드 공화국의 슬리고-레트림 선거구에 출마하여 5,639표를 얻었으나, 315표 차이로 의석을 놓쳤다.
4.2. 참여 및 사망
맥도넬은 아일랜드 단식 투쟁의 목표에 동의했다. 그 목표는 죄수복을 입지 않을 권리, 감옥 노동을 하지 않을 권리, 다른 죄수들과 자유롭게 교제할 권리, 자체 교육 및 오락 시설을 조직할 권리,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의 면회, 한 통의 편지, 한 개의 소포를 받을 권리였다.
맥도넬은 1980년 첫 번째 단식 투쟁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1981년 두 번째 단식 투쟁에 바비 샌즈 등과 함께 참여했다. 단식 투쟁 중 그는 1981년 총선에서 안티-H 블록 후보로 아일랜드 공화국의 슬리고-레트림 선거구에 출마하여 5,639표를 얻었으나, 315표 차이로 의석을 놓쳤다. 그의 단식 투쟁은 61일 동안 지속되었고, 1981년 7월 8일에 사망했다. 그는 두 자녀를 두었다. 그의 아내 고레티는 단식 투쟁 지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맥도넬은 밀타운 묘지에서 바비 샌즈 옆에 묻혔다. 맥도넬의 선거 사무원인 존 조 맥걸은 슬리고-레트림에서 그의 장례식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패트릭 피어스의 말을 인용하여 "그는 세상의 현명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바친 바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아일랜드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은 겉보기에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라고 말했다.
4.3. 사후
맥도넬은 1981년 아일랜드 단식 투쟁의 목표에 동의했다. 그 목표는 죄수복을 입지 않을 권리, 감옥 노동을 하지 않을 권리, 다른 죄수들과 자유롭게 교제할 권리, 자체 교육 및 오락 시설을 조직할 권리,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의 면회, 한 통의 편지, 한 개의 소포를 받을 권리였다.
맥도넬은 바비 샌즈 등과 함께 두 번째 (1981년) 단식 투쟁에 참여했다. 단식 투쟁 중 그는 1981년 아일랜드 총선에서 안티 H-블록 후보로 아일랜드 공화국의 슬리고-레트림 선거구에 출마하여 5,639표를 얻었으나, 315표 차이로 의석을 놓쳤다. 그의 단식 투쟁은 61일 동안 지속되었고, 1981년 7월 8일에 사망했다. 그는 두 자녀를 두었다. 그의 아내 고레티는 단식 투쟁 지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맥도넬은 밀타운 묘지에서 바비 샌즈 옆에 묻혔다. 맥도넬의 선거 사무원인 존 조 맥걸은 슬리고-레트림에서 그의 장례식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패트릭 피어스의 말을 인용하여 "그는 세상의 현명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바친 바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아일랜드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은 겉보기에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라고 말했다.
5. 논란
2006년 3월, 전 수감자 리처드 오'라위는 맥도넬이 사망하기 3일 전, 영국 정부가 시위를 종식시킬 수 있을 정도의 실질적인 제안을 교도소 지도부에 했다고 주장했다. 오라위는 교도소 내부 지도부가 협상에 응하여 맥도넬과 그 이후 사망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시위를 끝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외부 지도부가 시위를 계속하라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롱 케시의 IRA 사령관이었던 브렌던 맥팔레인은 이 사건의 경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오라위와 맥팔레인이 함께 있었던 감방의 다른 수감자 중 앤서니 맥킨타이어만이 1981년 단식 투쟁과 관련하여 오라위의 주장을 뒷받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