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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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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충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벼슬하여 대사농, 광록대부를 거쳐 192년 태위와 녹상서사가 되었다. 가후와 함께 주준을 중앙으로 초빙하고, 사손예를 존경하여 그를 삼공에 천거하려 했다. 193년 태위에서 면직된 후 위위가 되었으며, 헌제가 동쪽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이각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가후의 간언으로 처형을 면했다. 그의 아들 주휘는 동탁의 횡포를 피해 낙향했으나, 헌제가 죽은 후 주충을 만나러 갔다가 동탁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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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충
기본 정보
이미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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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周忠
생몰? ~ 200년
계모 (季謀)
출생지여남군 (汝南郡)
사망지허창
소속원소, 조조
관직
기도위''
간의대부''
태중대부''
집금오''
위위''
가계
아버지주경 (周 경)
아들주선 (周宣)
기타
삼국지연의에서의 역할조조 암살 미수 사건 관련자

2. 생애

주충은 젊은 나이에 관직에 나아가 여러 차례 승진하여 대사농이 되었다.[5] 192년 12월, 광록대부였던 주충은 황보숭을 대신하여 태위·녹상서사가 되었다.[5] 태위로 재직하며 상서 가후와 함께 주준을 중앙으로 초빙했고, 대사농 사손예를 존경하여 자신이 삼공에 천거되었을 때 사손예를 대신 천거했다고 한다.

193년 6월, 태위 주충은 면직되었고 이후 위위가 되었다.[5] 헌제가 동쪽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이각동승, 양봉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각 등은 궁녀들을 살해하거나 유괴하였고, 소부 전분, 대사농 장의, 상서령 사손예가 살해되었다. 주충은 사도 조온, 태상 왕위, 사례교위 영소 등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이각은 주충 등을 처형하려 했으나, 가후가 간언하여 중지했다.[5]

그 이후의 기록은 없다.

주충의 아들 주휘는 낙양령이었는데, 동탁이 전횡을 시작하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주휘와 동생은 빈객을 좋아하여 강회(강수와 회수 사이) 지역에서 번성하였고, 수레는 항상 백여 대가 따라다니며 출입했다. 헌제가 붕어하자 주휘는 도성의 정세가 불안하다는 것을 듣고 주충을 만나러 갔는데, 동탁은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주휘와 동생을 죽였다.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일찍이 벼슬하여, 여러 차례 경력을 쌓아 대사농에 이르렀다. 광록대부 재임 중 초평 3년(192년) 12월, 황보숭의 뒤를 이어 태위,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다.[5] 초평 4년(193년) 6월에 면직되었다.

2. 2. 태위 임명과 활동

192년 12월, 광록대부였던 주충은 황보숭의 뒤를 이어 태위·녹상서사가 되었다.[5] 태위로 재직하며, 상서 가후와 함께 주준을 중앙으로 초빙했다. 대사농 사손예를 존경하여, 자신이 삼공에 천거되었을 때 사손예를 대신 천거했다고 한다.

193년 6월, 태위 주충은 면직되었다.[5] 이후 위위가 되었다.

2. 3. 면직과 이후 활동

193년 6월, 태위 주충은 면직되었다. 이후 위위가 되었다.

헌제가 동쪽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이각동승, 양봉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각 등은 궁녀들을 살해하거나 유괴하였고, 소부 전분, 대사농 장의, 상서령 사손예가 살해되었다. 주충은 사도 조온, 태상 왕위, 사례교위 영소 등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이각은 주충 등을 처형하려 했으나, 가후가 간언하여 중지했다.[5]

그 이후의 기록은 없다.

주충의 아들 주휘는 낙양령이었는데, 동탁이 전횡을 시작하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주휘와 동생은 빈객을 좋아하여 강회(강수와 회수 사이) 지역에서 번성하였고, 수레는 항상 백여 대가 따라다니며 출입했다. 헌제가 붕어하자 주휘는 도성의 정세가 불안하다는 것을 듣고 주충을 만나러 갔는데, 동탁은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주휘와 동생을 죽였다.

2. 4. 이각의 난과 죽음

192년 12월, 광록대부였던 주충은 황보숭을 대신하여 태위·녹상서사가 되었다.[1]

태위로 재직하며, 상서 가후와 함께 주준을 중앙으로 초빙했고, 대사농 사손예를 존경하여 자신이 삼공에 천거되었을 때 사손예를 대신 천거했다고 한다.[1]

193년 6월, 태위 주충은 면직되었고, 이후 위위가 되었다.[1]

헌제가 동쪽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이각동승·양봉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각 등은 궁녀들을 살해하거나 유괴하였고, 소부 전분, 대사농 장의, 상서령 사손예가 살해되었다.[1] 주충은 사도 조온, 태상 왕위, 사례교위 영소 등과 함께 포로가 되었으나, 이각은 주충 등을 처형하려다 가후의 간언으로 중지했다.[1]

3. 가계

주충의 아버지 주경(朱京)은 오나라에서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냈다.[2][3] 형제로는 주휘(朱輝)와 주융(朱融)이 있었고, 슬하에 주이(朱異), 주준(朱俊), 주호(朱ഹു)를 두었다. 손자로는 주유(朱鮪)와 주순(朱恂)이 있으며, 증손은 주윤(朱胤)이다.[4]

3. 1. 가계도

주영주흥주경[2][3]주숭
주충주휘
주이주준주호
주상[4]주유주순
주윤


참조

[1] 서적 『後漢書』にひく呉書
[2] 서적 後漢書巻45には「興子景」、三国志巻54裴注には張璠の漢紀を引いて「景父栄」とある。
[3] 서적 三国志巻54には「従祖父景」とある。
[4] 서적 三国志巻54には「瑜従父尚」とある。
[5] 서적 《후한서》 권9 효헌제기, 초평 3년 12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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