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수안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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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주-수안보 전투는 1950년 7월 한국 전쟁 초기,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국군 제2연대가 충주 지역에서 벌인 전투이다. 북한군은 한강 방어선 돌파 이후 국군의 재정비를 방해하고 유엔군 참전 전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공세를 강화했다. 국군은 충주 지역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의 공격에 맞섰으나, 7월 8일 북한군 제12사단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충주에서 철수했다. 이후 국군은 수안보에서 부대를 재정비하고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며 전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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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수안보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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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수안보 전투 | |
교전 세력 | |
대한민국 | 김종오 제6사단장 대령 함병선 제2연대장 대령 박노규 제1대대장 중령 이종기 제2대대장 대위 이운산 제3대대장 소령 김용기 제19연대 2대대장 소령 김장근 제16포병대대 1포대장 대위 김대벽 충주 경찰서장 총경 이정일 제8사단장 대령 백선엽 제1사단장 대령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최광 제1사단장 소장 황석 제1연대장 대좌 김양춘 제2연대장 대좌 이창권 제3연대장 대좌 현학봉 포병연대장 대좌 최충국 제12사단장 소장 최혁 제30연대장 대좌 김철 제31연대장 대좌 박영 제32연대장 대좌 |
병력 | |
대한민국 | 알 수 없음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알 수 없음 |
사상자 | |
대한민국 | 알 수 없음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알 수 없음 |
2. 배경
북한군은 한강 방어선을 돌파한 뒤, 기동성 있는 추격을 강조하며 국군의 재결집을 방해하고 유엔군이 참전하기 전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려 했다.
7월 5일 사단 지휘부가 증평으로 이동한 후, 충주 지역의 방어는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제2연대가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충주 지역에 대한 북한군의 정확한 상황은 파악되지 않았으며, 원주와 청주 방면에서 다수의 북한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정보만 있었다. 이에 제2연대는 충주 북쪽의 19번 도로(원주-충주 간)와 북서쪽의 3번 도로(이천-충주 간)를 중심으로 경계를 강화하고, 동량면과 가금면 일대에 대한 위력수색 및 지형 정찰을 실시하며 방어 준비에 들어갔다.
이에 맞서 국군은 빠른 시일 내에 전열을 정비하여 차령산맥 회랑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한 후, 기회를 포착하여 공세로 전환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작전 계획의 일환으로 육군본부는 작전명 제23호를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제7연대와 제19연대는 국군 주력 부대의 철수를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동시에 서부전선에 분산되어 있던 병력은 음성-진천-청주 부근으로 집결시켰다. 당시 육군본부의 계획은 전선이 정비되면 이 두 연대를 충주 지역으로 이동시켜 중부전선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3. 전투 과정
7월 7일, 충주 북쪽에서 북한군과의 접촉 보고가 이어지자 연대는 남한강과 달천강을 자연 방벽 삼아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북한군은 제12사단으로 추정되었으며, 선봉 부대가 충주 북쪽 태고산 부근에 집결하고 다른 부대도 가금면 방면으로 남진하면서 충주 서북면 일대의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7월 8일 새벽, 북한군 제12사단은 대규모 포격과 함께 남한강 도하 공격을 개시했다. 짙은 안개와 포격 속에서 국군은 북한군의 정확한 움직임을 파악하기 어려웠으나, 제3대대와 제1대대는 도하하는 북한군을 상대로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다. 그러나 북한군의 계속된 병력 투입으로 국군 진지 일부가 돌파되었고, 동쪽에서도 북한군의 침공이 확인되면서 제2연대는 결국 충주에서 철수하여 수안보로 이동, 제19연대에게 방어 임무를 인계했다.
7월 9일, 국군 제19연대가 충주 탈환을 위한 반격을 준비하는 동안, 충주를 점령한 북한군은 작전 방향을 변경했다. 제12사단은 단양 방면으로, 후속 부대인 제1사단은 수안보 방면으로 진격을 준비했으며, 제105기갑사단 소속 전차 부대도 충주에 집결했다. 국군 제19연대는 이러한 북한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3. 1. 7월 7일
7월 5일 17시에 사단 지휘부가 증평으로 이동한 후, 충주 지역의 방어는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제2연대가 맡게 되었다. 당시 충주 지역은 북한군의 정확한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였다. 원주와 청주 방면에서 수많은 북한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정보 외에는 구체적인 동향을 알 수 없었다.
이에 제2연대는 북한군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충주 북쪽의 19번 도로(원주-충주 간)와 북서쪽의 3번 도로(이천-충주 간) 부근을 중심으로 경계를 강화했다. 특히 충주 북쪽의 동량면과 서쪽의 가금면 일대에 대한 위력수색과 함께 방어진지 편성을 위한 지형 정찰을 실시했다. 전날(7월 6일) 오후, 충주 북쪽 8km 지점인 송강리 부근에서 중대 규모의 북한군과 처음 접촉한 이후, 10km 내외의 인접 지역에서도 북한군을 확인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결국 7월 7일 07시를 기해 연대는 방어진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연대의 방어 방침은 남한강과 달천강을 자연 방벽으로 삼아, 강을 건너려는 북한군을 저지하고 격멸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제3대대는 남한강으로, 제1대대는 서쪽의 달천강 부근으로 신속히 이동하여 강안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때 충주 지역으로 접근하는 북한군은 제12사단으로 추정되었다. 그 선봉으로 보이는 연대 규모의 병력은 이미 충주 북서쪽 12km 지점인 목계를 지나 충주 북쪽 6km 지점인 태고산 부근에 집결 중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다른 북한군 부대는 청주에서 목계 서쪽 13km 지점인 용포리를 거쳐 계속 가금면 쪽으로 남진하고 있다는 정보도 있어, 충주 서북면 일대에는 점차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3. 2. 7월 8일
북한군 제12사단은 7월 8일 05:00를 기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앞서 북한군은 이날 01:00경부터 포격을 시작하여 04:30까지 3시간 넘게 교란사격을 실시했다. 04:30 이후에는 공격 준비 사격으로 전환하여 포격 밀도를 높였으며, 사병화력까지 동원한 집중포격을 가했다. 주요 공격 목표는 연대 우측의 제3대대 진지와 제1대대 3중대가 배치된 칠금동 부근이었다.
이는 북한군이 남한강 도하를 준비하는 신호로 해석되었고, 양 대대장은 예하 중대에 방어 강화를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 짙은 안개가 3m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짙게 깔렸고 계속되는 포격으로 인해 국군은 북한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05:00가 넘어서자 북한군은 본격적인 도하 공격을 시작했다. 제3대대 9중대장 남백봉 대위는 용곡 부근으로 중대 규모의 적이 도하하여 접근하고 있음을 보고했다. 안개와 포격 때문에 매복 초소에서도 적의 도하를 늦게 인지했으며, 확인했을 때는 이미 중대 규모의 병력이 진지로 침투하고 있었다. 국군은 미리 준비된 화망을 통해 집중 사격을 가했으며, 특히 기관총 사격으로 큰 피해를 주었다. 이어 제10중대 정면의 목수 부근에서도 2개 소대 규모의 적이 도하를 시도했으나, 제10, 11중대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06:00까지 파악된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이는 북한군 주력이 남한강을 건너 충주 북쪽으로 진격하려는 의도로 보였으며, 특히 제3대대 방면에 공격이 집중되어 치열한 혼전이 벌어졌다.
약 1시간 30분간의 격전 끝에 07:00경, 제3대대 진지 일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국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계속해서 병력을 투입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고 진격해 들어왔다. 계속된 전투로 국군은 심하게 지친 상태였고, 충주 동쪽에서도 북한군의 침공이 확인되면서 충주에서의 철수가 불가피해졌다.
결국 연대는 이틀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충주에서 철수하여 병력을 재정비하고, 제19연대에 방어 임무를 인계한 뒤 수안보면으로 집결했다. 이로써 전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3. 3. 7월 9일
7월 9일 새벽, 전날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가랑비가 그치지 않고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국군 제19연대는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익을 맡은 김용기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는 한천리를 지나 목벌리 동남쪽 1.5km 지점인 문지골 부근에 도달했다. 용천리와 수회리에 집결했던 제1, 2대대는 최종 점검을 마치고 세성동 방면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한편, 충주를 점령한 북한군은 이곳에서 작전 방향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제12사단은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국군 제8사단 정면의 단양 지역으로 진격시키고, 후속 부대인 제1사단은 3번 도로(충주-수안보면-문경 구간)를 따라 수안보로 진격시킬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각각 연대 규모의 선발 부대가 기동로 확보를 위해 이미 이동 중이었다. 동쪽으로 향하는 부대는 마지막재를 넘어 목벌리 방면으로, 남쪽으로 향하는 부대는 단월동을 지나 소향산으로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또한, 충주 점령 직후 제105기갑사단 소속 제109기갑연대로 추정되는 전차 30대가 충주역 광장에 후속하여 집결 중이었다. 특히 북한군 제1사단은 충주 점령의 공을 세우지 못한 것에 자극받아 수안보까지 빠르게 침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북한군의 움직임과 계획을 국군 제19연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반격을 준비하고 있어, 어려운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었다.
4. 결과 및 영향
이 전투 이후 제2연대는 수안보면에서 흩어진 병력을 모아 부대를 재정비했다. 7월 10일 14시에 하달된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지휘소를 남쪽으로 4km 떨어진 화천리로 옮겼다. 병력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연풍으로 가는 길목 양측의 610고지-478고지 선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했다.
이 시기 제1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 양측 모두 정찰대 활동만 있었고, 겉으로는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이 무렵 새로운 침공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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