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부르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카부르트는 셀주크 제국의 지배 가문 출신으로, 1072년 알프 아르슬란의 사망 이후 조카 말리크샤 1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이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카부르트는 삼촌 투그릴 베그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동생 알프 아르슬란이 술탄이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술탄을 칭하기도 했다. 1073년 하마단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으며, 그의 반란은 셀주크 제국의 튀르크적 성격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케르만에서 통치하며 케르만 셀주크 술탄국을 세웠고, 이 나라는 셀주크 제국보다 오래 존속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수니파 왕조 - 가즈나 왕조
가즈나 왕조는 963년 사부크티긴이 건국하여 마흐무드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으나 셀주크 제국의 부상과 내부 분열로 쇠퇴하여 구르 왕조에 의해 멸망했지만, 페르시아 문화를 수용하고 이슬람의 인도 전파에 기여했다. - 수니파 왕조 - 무자파르 왕조
무자파르 왕조는 14세기 중엽 페르시아 지역을 다스린 이슬람 왕조로, 몽골 제국 쇠퇴기에 야즈드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시라즈를 점령하고 술탄을 자칭하며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티무르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건축물 외벽 타일 장식 기법 발달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발전을 이루었다. - 이란의 역사 - 이란 혁명
1979년 이란에서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샤의 권위주의 통치와 서구화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이란 혁명은, 루홀라 호메이니의 주도 하에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하여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혁명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인권 억압 문제와 함께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이어지고 있다. - 이란의 역사 - 사파비 왕조
사파비 왕조는 1501년부터 1736년까지 이란을 통치하며 시아파 이슬람교 십이 이맘파를 국교로 삼아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나, 퀴즐바시의 지지를 받아 성장하고 압바스 1세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후 쇠퇴하여 아프샤르 왕조의 나디르 샤에 의해 멸망했다.
카부르트 | |
---|---|
기본 정보 | |
이름 | 카라 아르슬란 아흐마드 카부르트 빈 다우드 차그리 |
원어 이름 | قرا أرسلان أحمد قاورد بن داود جَغْرى |
출생 연도 | 1040년대 |
사망 연도 | 1073년 |
가문 | |
가문 | 셀주크 |
아버지 | 다우드 차그리 베그 |
종교 | |
종교 | 수니 이슬람 |
군사 경력 | |
복무 기간 | 기원후 1060년대 – 1073년 |
전투 | 셀주크 왕위 계승 전쟁 |
수상 | 없음 |
이미지 | |
![]() |
2. 배경
셀주크 왕조는 튀르크 계통의 수니파 이슬람 왕조로, 셀주크 제국과 룸 술탄국을 세웠다. 전성기에는 아나톨리아에서 페르시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카부르트는 왕조 창시자인 셀주크의 손자이자 차그리 베이의 아들이었다.[6] 그의 형제인 알프 아르슬란이 삼촌 투그룰의 뒤를 이어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했을 때, 카부르트는 페르시아 남부 키르만의 총독으로 있었다.
2. 1. 셀주크 왕조의 기원과 발전
셀주크 왕조는 튀르크족 계통의 수니파 이슬람 왕조로, 셀주크 제국과 룸 술탄국을 세웠다. 전성기에는 아나톨리아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카부르트는 셀주크 왕조의 주요 인물로, 왕조 창시자인 셀주크의 손자이자 차그리 베이의 장남이었다.[6][1]1063년 셀주크 제국의 초대 술탄이자 카부르트의 백부인 투그릴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다. 카부르트는 당시 페르시아 남부 케르만의 총독으로 있으면서 술탄 자리를 노렸으나, 그의 친동생인 알프 아르슬란이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카부르트는 동생에게 반기를 들고 스스로 술탄을 자칭하며 골육상쟁을 벌였다.
1072년 알프 아르슬란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말리크 샤가 술탄 자리를 계승하자, 카부르트는 다시 한번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며 조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1074년 하마단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말리크 샤의 군대에게 크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고, 결국 처형당했다.
카부르트 사후, 그의 아들들은 케르만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으나, 대 셀주크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복속해야 했다.[5] 이후 카부르트의 손자인 아르슬란 샤 1세 시대에 케르만 셀주크 왕조는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2. 2. 카부르트의 가계와 초기 생애
셀주크 왕조는 튀르크족 계통의 수니파 이슬람 왕조로, 셀주크 제국과 룸 술탄국을 세웠다. 전성기에는 아나톨리아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지배했다.[6][1]카부르트는 셀주크 왕조의 창시자인 셀주크의 손자이자, 차그리 베이의 아들이다.[6][1] 그의 아버지는 셀주크 제국의 시조인 투그릴 베그의 동생이었으며, 카부르트는 차그리 베이의 장남이었다.
1063년 백부인 투그릴 베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카부르트는 조카로서 왕위를 노렸다.[1] 그러나 그의 친동생인 알프 아르슬란이 투그릴 베그의 뒤를 이어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했다.[6] 당시 페르시아 남부 케르만의 총독이었던 카부르트는[6][1] 이 결정에 불만을 품고 동생에게 맞서 스스로 술탄을 자칭했다.
1072년 동생 알프 아르슬란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말리크샤 1세가 술탄 자리를 계승했다. 카부르트는 이 계승에도 불만을 품고 조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1074년 하마단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말리크샤 1세의 군대에게 크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고, 결국 처형당했다.
카부르트 사후 그의 아들들은 케르만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지만, 대 셀주크 제국의 지배하에 있어야 했다.[5] 카부르트의 손자인 아르슬란 샤 1세의 시대에 케르만 셀주크 왕조는 전성기를 맞이했다.[5]
3. 알프 아르슬란의 유언과 왕위 계승 분쟁
셀주크 제국의 시조 투그릴 베그의 동생인 차으리 베그의 장남이었던 카부르트는 1063년 백부 투그릴 베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를 노렸으나, 친동생 알프 아르슬란에게 밀려났다. 이후 카부르트는 동생에게 반기를 들고 스스로 술탄을 칭하기도 했다.
1072년, 알프 아르슬란이 사망하면서 그의 유언에 따라 차남 말리크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알프 아르슬란은 생전에 장남 아야즈와 형제 카부르트가 왕위 계승에 도전할 것을 우려하여 이들에게 상당한 권한과 보조금을 약속하는 유언을 남겼다.[1][2]
그러나 카부르트는 어린 조카 말리크샤 1세의 계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1074년 하마단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말리크샤 1세의 군대에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고 처형당했다. 카부르트의 아들들은 케르만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으나, 대 셀주크 제국의 종주권을 따라야 했다.[5]
3. 1. 알프 아르슬란의 유언
1072년, 알프 아르슬란이 사망했다.[1] 그는 사망하기 전 자신의 왕위를 차남인 말리크샤 1세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2] 알프 아르슬란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우려했다.[1][2] 당시 왕위 계승의 주요 경쟁자는 그의 장남 아야즈와 형제인 카부르트였다.[1][2] 이를 막기 위한 타협책으로, 알프 아르슬란은 아야즈와 카부르트에게 상당한 권한 또는 관대한 보조금을 주기로 유언했다.[1][2]3. 2. 카부르트의 불만과 반란 준비
1072년, 알프 아르슬란이 사망하면서 그의 왕위는 차남인 말리크 샤 1세에게 넘겨졌다. 알프 아르슬란은 사망 전에 이러한 계승 계획을 유언으로 남겼지만, 동시에 장남 아야즈(Ayaz)와 자신의 형제인 카부르트가 왕위 계승에 도전할 것을 우려했다. 실제로 셀주크 제국의 시조 투그릴 베그가 1063년 후사 없이 사망했을 때, 그의 조카였던 카부르트는 왕위를 노렸으나 동생 알프 아르슬란에게 밀려난 전력이 있었다. 알프 아르슬란은 이러한 분쟁을 막기 위해 아야즈와 카부르트에게 상당한 권한과 보조금을 약속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2]그러나 알프 아르슬란이 사망하고 불과 17세 혹은 18세의 어린 나이였던 말리크 샤 1세가 왕위에 오르자, 카부르트는 이러한 계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장남 아야즈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나, 카부르트의 반란은 젊은 술탄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2] 특히 말리크 샤의 재상이었던 니잠 알-물크는 카부르트의 도전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였는데, 이는 어린 술탄을 대신하여 자신이 제국의 사실상 통치자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부르트가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상대적으로 소규모였지만, 말리크 샤의 군대 내 투르크멘 출신 장교들은 카부르트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말리크 샤와 니잠 알-물크는 셀주크 군대에 투르크계가 아닌 다른 민족으로 구성된 연대를 추가 편성하여 군 내부의 불안 요소를 해소하려 했다. 또한 아르투크 왕조의 지원을 확보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4] 양측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4. 카부르트의 반란과 패배
1072년 동생 알프 아르슬란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말리크샤 1세가 셀주크 제국의 술탄으로 즉위하자, 카부르트는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5] 당시 17세 또는 18세였던 말리크샤 1세[7][2]와 재상 니잠 알 물크는 이 반란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니잠 알 물크는 카부르트가 사실상 제국의 군주가 될 것을 우려했으며,[7][2] 군대 내 오구즈 튀르크 장교들이 카부르트를 지지할 가능성에 대비해 비(非)튀르크계 연대를 추가하고 아르투크 왕조의 지원을 확보했다.[7][2]
1073년 5월 16일[7] (다른 기록에는 1074년[5]), 하마단 근교의 케르스 카프(Kerç kapı) 또는 케르츠(Kerec)[8][3]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말리크샤 1세의 군대가 카부르트 군을 격파했다.[7][2] 패배 후 도주하던 카부르트는 체포되었고, 처음에는 관용을 베풀려던 말리크샤 1세는 니잠 알 물크의 설득에 따라 카부르트를 처형했다.[7][4][9] 니잠 알 물크는 카부르트의 아들 두 명을 추가로 처형하고 그의 지지자로 의심되는 튀르크 지휘관들을 숙청했다.[9][4] 카부르트의 살아남은 아들들은 케르만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셀주크 제국에 복속되었다.[5]
4. 1. 반란의 발발과 초기 상황
1072년 동생 알프 아르슬란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말리크샤 1세가 셀주크 제국의 술탄으로 즉위하자, 카부르트는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말리크샤 1세는 당시 17세 또는 18세의 어린 나이였다.[7][2] 카부르트는 일찍이 1063년 백부 투그릴 베그가 후사 없이 사망했을 때에도 술탄 자리를 노렸으나 동생 알프 아르슬란에게 밀려난 전력이 있었다.말리크샤 1세의 재상 니잠 알 물크는 카부르트의 반란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어린 술탄의 통치 기간 동안 자신이 사실상 제국의 통치자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카부르트의 도전을 더욱 우려했다.[2] 카부르트의 군대는 규모가 작았지만, 말리크샤 1세 군대 내의 오구즈 튀르크 혹은 투르크멘 장교들은 카부르트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7][2] 이에 말리크샤 1세와 니잠 알 물크는 셀주크 군대에 튀르크계가 아닌 연대를 추가하여 군대를 보강했다. 아르투크 왕조 역시 말리크샤 1세를 지지했다.[7][2]
1073년 5월 16일, 양측 군대는 하마단 근처의 케르스 카프(Kerç kapı) 혹은 케르츠(Kerec)라 불리는 지역에서 충돌했다.[7][8][3] 전투 결과, 말리크샤 1세의 군대가 카부르트의 군대를 격파했다. 카부르트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주했으나 곧 체포되었다.[7][2]
처음에 말리크샤 1세는 삼촌인 카부르트를 용서하려 했으나, 재상 니잠 알 물크는 젊은 술탄에게 카부르트를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히 설득했다.[7][2] 결국 말리크샤 1세는 니잠 알 물크의 의견을 받아들여 카부르트를 처형했다. 니잠 알 물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카부르트의 네 아들 중 두 명을 처형했으며,[9][4] 이후 카부르트의 지지자로 의심되는 군대 내 튀르크 지휘관 대부분을 숙청했다.[9][4]
4. 2. 하마단 전투와 카부르트의 패배
1072년 동생 알프 아르슬란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말리크 샤 1세가 셀주크 제국의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했다. 당시 말리크 샤 1세는 17세 혹은 18세에 불과했다.[7][2] 카부르트는 이러한 조카의 계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5] 이는 말리크 샤 1세와 그의 강력한 재상 니잠 알 물크에게 심각한 도전이었다.[7][2] 니잠 알 물크는 카부르트가 사실상 제국의 군주가 될 것을 우려했다.[7]카부르트의 군대는 규모 면에서 열세였지만, 말리크 샤 1세의 군대 내 오구즈 튀르크(Oghuz Turk) 장교들 사이에서 카부르트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7][2] 이러한 내부 불안에 대응하기 위해 말리크 샤 1세와 니잠 알 물크는 셀주크 군대에 튀르크계가 아닌 병력을 보강했다. 또한 아르투크 왕조도 말리크 샤 1세를 지지하며 힘을 보탰다.[7][2]
결정적인 전투는 1073년 5월 16일[7] (다른 기록에는 1074년[5]) 하메단(Hamedan) 근처의 케르스 카프(Kerç kapı) 또는 케르츠(Kerec)라고 불리는 곳에서 벌어졌다.[8][3] 이 전투에서 말리크 샤 1세의 군대는 카부르트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파했다.[7][2] 카부르트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었다.[7][2]
처음에 말리크 샤 1세는 자신의 삼촌인 카부르트에게 관용을 베풀려 했으나, 재상 니잠 알 물크는 젊은 술탄에게 카부르트를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히 설득했다.[7][4] 결국 말리크 샤 1세는 니잠 알 물크의 의견을 받아들여 카부르트를 처형했다. 니잠 알 물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카부르트의 네 아들 중 두 명을 처형했으며,[9][4] 카부르트의 지지자로 의심되는 군대 내 튀르크 지휘관 대부분을 숙청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다.[9][4] 카부르트의 패배와 죽음으로 그의 야망은 끝났지만, 그의 아들들은 케르만 지역의 통치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셀주크 제국에 복속하게 되었다.[5]
4. 3. 카부르트의 처형과 반란의 종결
1072년 동생 알프 아르슬란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말리크샤 1세가 술탄으로 즉위하자, 카부르트는 이 계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17세 혹은 18세였던 말리크샤 1세에게 카부르트의 반란은 심각한 위협이었다.[7][2] 재상 니잠 알 물크는 카부르트가 사실상 제국의 군주가 될 것을 우려했다.[7][2] 카부르트의 군대는 규모가 작았지만, 말리크샤 1세 군대 내의 오구즈 튀르크(투르크멘) 장교들은 카부르트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7][2] 이에 말리크샤 1세와 니잠 알 물크는 셀주크 군대에 비(非)튀르크 연대를 추가했으며, 아르투크 왕조 역시 말리크샤 1세를 지원했다.[7][2]1073년 5월 16일, 양측 군대는 하메단 인근의 케르치 카피(Kerç kapı) 또는 케레치(Kerec)[8][3]라 불리는 지역에서 충돌했다. 전투 결과, 말리크샤 1세는 카부르트의 군대를 격파하고 도주했던 카부르트를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7][2] 처음 말리크샤 1세는 삼촌인 카부르트를 용서하려 했으나, 니잠 알 물크는 젊은 술탄을 설득하여 결국 카부르트를 처형하도록 했다.[9][4] 니잠 알 물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카부르트의 네 아들 중 두 명을 처형했으며,[9][4] 카부르트의 지지자로 의심되는 튀르크 지휘관 대부분을 숙청했다.[9][4]
카부르트의 반란이 진압된 후, 그의 살아남은 아들들은 케르만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지만, 셀주크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복속해야만 했다.[5] 이후 카부르트의 손자인 아르슬란 샤 1세 시대에 케르만 셀주크 왕조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5]
5. 반란의 결과와 영향
(내용 없음)
5. 1. 셀주크 제국에 미친 영향
카부르트의 패배는 셀주크 제국의 튀르크적 성격에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카부르트의 아들들은 말리크 샤 1세의 봉신으로서 케르만 지방에서 통치를 이어갈 수 있었고, 이들은 후에 케르만 셀주크 술탄국을 세웠다. 케르만 셀주크 술탄국은 셀주크 제국 본국보다 더 오랫동안 존속했다.5. 2. 케르만 셀주크 술탄국의 성립
1074년 하마단 근교 전투에서 카부르트가 말리크 샤 1세에게 패배하고 처형당하면서 셀주크 제국의 튀르크적 성격은 다소 약화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케르만 지역의 통치권을 인정받아 말리크 샤 1세의 봉신으로서 통치를 이어갈 수 있었다.[5] 이렇게 성립된 케르만 셀주크 술탄국은 이후 셀주크 제국 본국보다 더 오랫동안 존속하게 된다. 카부르트의 손자인 아르슬란 샤 1세의 통치 시기에는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다.5. 3. 니잠 알 물크의 권력 강화
말리크 샤 1세는 17세 또는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직후 삼촌인 카부르트의 반란에 직면했다.[7] 당시 최고위 관리였던 니잠 알 물크는 말리크 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카부르트가 사실상 제국의 실권을 장악할 것을 크게 우려했다. 카부르트의 군대는 규모가 작았지만, 말리크 샤 1세 군대 내의 오구즈 튀르크 출신 장교 다수가 카부르트를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이에 말리크 샤 1세와 니잠 알 물크는 셀주크 군대에 비(非)튀르크계 병력을 보강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아르투크 왕조 역시 말리크 샤 1세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결국 1073년 5월 16일, 하메단 인근의 케르스 카프(Kerç kapı) 혹은 케르츠(Kerec)라 불리는 지역에서 양측 군대가 충돌했다.[8] 이 전투에서 말리크 샤 1세는 카부르트의 군대를 격파했다. 카부르트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도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었다.
처음에 말리크 샤 1세는 삼촌인 카부르트를 용서하려 했으나, 니잠 알 물크는 말리크 샤 1세를 설득하여 결국 카부르트를 처형하도록 했다. 니잠 알 물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카부르트의 네 아들 중 두 명을 처형했으며,[9] 이후 카부르트파로 의심되는 튀르크 지휘관 대부분을 숙청했다.
카부르트의 패배와 그의 세력 제거는 셀주크 제국의 튀르크적 성격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니잠 알 물크는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말리크 샤 1세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며 권력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한편, 살아남은 카부르트의 다른 아들들은 말리크 샤 1세의 봉신으로서 케르만 지역에서 통치를 이어갔으며, 이들이 세운 작은 국가는 본가인 셀주크 제국보다 더 오랫동안 존속하게 된다.
참조
[1]
웹사이트
Family tree of Seljuks
http://sitemaker.umi[...]
[2]
간행물
Encyclopædia Britannica, Expo 70 ed. Vol 14, p. 699
[3]
서적
Türkiye Tarihi 1
Vatan Kitap
2009
[4]
서적
The New Islamic Dynasties: A Chronological and Genealogical Manual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6
[5]
문서
ただし歴代君主は大セルジューク朝に従う[[アミール]]を称することを余儀なくされた
[6]
웹사이트
Family tree of Seljuks
http://sitemaker.umi[...]
[7]
간행물
Encyclopædia Britannica, Expo 70 ed. Vol 14, p. 699
[8]
서적
Türkiye Tarihi 1
Vatan Kitap
2009
[9]
서적
The New Islamic Dynasties: A Chronological and Genealogical Manual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