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룸 술탄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룸 술탄국은 1077년 쉴레이만 샤 1세가 건국한 소아시아 지역의 셀주크 왕조이다. 초기에는 비잔틴 제국과 대립하며 영토를 확장했고, 12세기 후반에는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승리하며 소아시아에 정착했다. 13세기 초 케이카부스 1세와 케이쿠바드 1세 시대에 전성기를 누리며 흑해와 지중해 무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1243년 쾨세다그 전투에서 몽골에 패배하며 쇠퇴, 몽골의 간섭을 받다가 14세기 초 멸망했다. 룸 셀주크는 페르시아 문화를 수용하여 건축, 문학 등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오스만 제국의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룸 술탄국 - 아르슬란 야브구
    아르슬란 야브구는 11세기 초 오구즈 튀르크족 키니크 부족의 지도자로, 카라한 왕조 내전에 관여하며 세력을 확장했지만 가즈나 왕조의 마흐무드에 의해 유폐되어 사망했고, 그의 후손들은 셀주크 제국과 룸 술탄국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룸 술탄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공식 명칭룸 술탄국
다른 명칭아나톨리아 셀주크 술탄국 ()
이코니움 술탄국
아나톨리아 셀주크 국가 ()
튀르키예의 셀주크 ()
지리
1100년경부터 1240년까지의 술탄국의 확장
1100년경부터 1240년까지의 술탄국의 확장
수도니케아(İznik) (1077년–1097년)
콘야(Iconium (Konya)) (1097년–1308년)
스ivas(Sebastia (Sivas)) (1211년–1220년)
역사
성립1077년
소멸1308년
주요 사건만지케르트 전투(1071년)
셀주크 제국으로부터의 분열
쾨세 다으 전투(1243년)
카라만侯国 정복
이전 국가비잔티움 제국
셀주크 제국
다니슈멘드朝
멩귀제크朝
살투크朝
아르투크朝
이후 국가아나톨리아 베이국
일칸국
정치적 상태독립 술탄국 (1077년–1243년)
몽골 제국의 봉신 (1243년–1256년)
일칸국의 봉신 (1256년–1308년)
정치
정치 체제세습 군주제
삼두정치(1249년–1254년)
二頭政治(1257년–1262년)
역대 술탄룸의 셀주크 술탄 목록
초대 술탄쉴레이만 이븐 쿠탈미쉬 (1077년–1086년)
마지막 술탄메수드 2세 (1303년–1308년)
인구
종교수니 이슬람(공식), 그리스 정교(인구 대다수)
사용 언어페르시아어(공식어)
아랍어(주화)
비잔틴 그리스어
고대 아나톨리아 튀르크어
기타 정보
통화디르함
현재 국가튀르키예

2. 역사

룸 술탄국의 역사는 크게 건국기(12세기 후반까지), 전성기(12세기 후반 ~ 1237년), 쇠락기(14세기 초반까지)로 나뉜다. 룸 술탄국은 전성기에 중동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했다.[150]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많은 튀르크멘 집단이 소아시아로 들어왔다. 1243년 쾨세다그 전투에서 바이주 노얀이 이끄는 몽골 제국군에 크게 패하면서 몽골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 룸 술탄국은 점차 몽골과 셀주크의 통제에서 벗어난 작은 토후국들(베일릭)로 분열되었다. 1277년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가 아나톨리아를 침략, 엘비스탄 전투에서 몽골을 격파하고 일시적으로 셀주크 영토를 관리하기도 했다. 1303년 카이카우스 2세의 아들 메수드 2세가 카이세리에서 술탄으로 즉위했으나, 1308년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메수드 3세도 곧 살해되었다. 셀주크 왕조의 먼 친척이 잠시 코냐의 에미르가 되었지만, 1328년 카라만 왕조에게 패배하고 영토를 빼앗겼다.

2. 1. 건국 초기

쿠탈므쉬의 아들 쉴레이만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소아시아로 진입한 다수의 튀르크멘 집단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 쿠탈므쉬의 실패한 반란 이후 소아시아에서 권토중래를 노렸고, 1081년 니케아를 동로마 제국에서 얻어내 그곳에 수도를 세웠다.[151]

미리오케팔론에 매복한 투르크군. 구스타브 도레 작.


그러나 룸 술탄국이 소아시아에 뿌리내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서쪽으로는 비잔티움 제국과, 동쪽으로는 소아시아 중부와 서부를 장악한 다니슈멘드와 싸워야 했다. 클르츠 아르슬란 1세의 치세(1092년 ~ 1107년)는 이러한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그는 비잔티움, 다니슈멘드, 십자군과 차례로 싸웠다. 1096년 십자군에 패배한 클르츠 아르슬란은 니케아를 포기하고 동쪽으로 후퇴했다. 1106년에는 다니슈멘드조에게서 말라트야를 빼앗고 이듬해 모술을 점령했으나, 결국 에미르 차불에게 패배하고 하부르 강에서 익사했다.[152]

클르츠 아르슬란의 아들 메수드 1세(재위: 1116년 ~ 1156년)는 십자군에게서 이코니온을 빼앗아 수도로 삼았다. 그의 후계자 클르츠 아르슬란 2세(재위: 1156년 ~ 1192년) 역시 십자군에 대항했고,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전투를 통해 튀르크인들은 소아시아에 정착할 수 있었다. 1178년 룸 술탄국이 다니슈멘드 국가를 합병하면서 소아시아의 약 3분의 2 가량이 룸 술탄국의 영토가 되었다.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죽기 전 옛 튀르크 전통에 따라 왕국을 아들들에게 분할했다. 제3차 십자군이 소아시아에 나타난 1189년은 룸 술탄국 전체가 내분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룸 술탄국은 영토를 지켜냈다. 결국 이젯딘 케이카부스 1세(재위: 1210년 ~ 1220년)가 다른 형제들을 제압하고 왕위에 올랐다.[152]

케이쿠바드 1세 시기 룸 셀주크의 확장


건국자 수라이만 1세 이븐 쿠탈미시는 셀주크 가문의 시조 셀주크의 현손에 해당한다.[65] 수라이만의 아버지 쿠탈미시는 알프 아르슬란과 셀주크 왕조의 왕위를 다투었으나, 1063년 데헤-나막 전투에서 패하여 패주 중 사망하였다.[66]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왕조가 승리한 후, 아나톨리아에서는 투르크멘 유목민의 진출이 시작되었다.[68][69]

니케아의 이스탄불 문


니케아 포위전


드뤼라에움 전투

2. 2. 전성기

룸 셀주크의 역사는 크게 건국기(12세기 후반까지), 전성기(12세기 후반~1237년), 쇠락기(14세기 초반까지) 세 단계로 나뉜다.[150] 룸 술탄국은 전성기에 중동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였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쿠탈므쉬의 아들 쉴레이만1081년 니케아를 동로마 제국에서 얻어내고 수도로 삼았다.[151] 그러나 룸 셀주크는 서쪽으로는 비잔티움, 동쪽으로는 다니슈멘드와 싸워야 했다. 클르츠 아르슬란 1세(재위: 1092년 ~ 1107년)는 비잔티움, 다니슈멘드, 십자군과 싸웠고, 1096년 십자군에 패해 니케아를 포기하고 동쪽으로 후퇴했다.[152] 1106년 다니슈멘드조에게서 말라트야를 빼앗고 모술을 점령했으나, 에미르 차불에게 패배하고 하부르 강에서 익사했다.[152]

클르츠 아르슬란 1세의 아들 메수드 1세(재위: 1116년 ~ 1156년)는 십자군에게서 이코니온을 빼앗아 수도로 삼았다. 그의 후계자 클르츠 아르슬란 2세(재위: 1156년 ~ 1192년)는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에 승리하여 튀르크인들의 소아시아 정착을 가능하게 했다.[152] 1178년에는 다니슈멘드 국가를 합병하여 소아시아의 약 3분의 2를 차지했다.[152]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왕국을 아들들에게 분할했고, 제3차 십자군이 출연한 1189년에는 내분으로 혼란스러웠지만 영토를 지켜냈다.[152] 이젯딘 케이카부스 1세(재위: 1210년 ~ 1220년)는 형제들을 제압하고 왕위에 올랐다.[152]

이즈엣딘 케이카부스와 그의 형제 알라엣딘 케이쿠바드(재위: 1220년 ~ 1237년) 치세에 룸 셀주크는 정치, 경제적으로 확장했다. 흑해의 시노프와 지중해의 안탈리아를 정복하여 교역로를 통제하고 번영했다.[153] 시합 알딘 알수흐라와르디, 무히 알딘 이븐 아라비 같은 학자들이 소아시아로 왔다.[153]

1207년 지중해 항구 도시 안탈리아를 점령하여 해양 진출 거점을 확보하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통상 관계를 맺었다.[89][91] 1211년 아라셰히르 전투에서 니케아 제국에 승리했지만, 카이호스로 1세는 전투 전후에 전사했다.[89][91] 카이카우스 1세는 1214년 트라브존 제국을 공격해 알렉시오스 1세를 사로잡고, 시노프를 획득했다.[89] 카이카우스는 자신을 “두 바다의 술탄”이라 칭했다.[91] 1216년 안탈리아를 점령한 십자군과 소아르메니아 왕국을 격파하고, 알레포를 일시 점령했다.[89]

200px


카이쿠바드 1세는 굴람 출신 군인과 서기관을 발탁했다.[93] 1223년 칼로노로스를 정복하고 알라야로 개칭, 겨울 거처로 삼았다.[94] 1227년 크리미아 반도에 원정군을 파견, 킵차크족을 복속시켰다.[94] 1228년 에르진잔의 멩구제크 왕조를 복속시켰다.[94] 1230년 야스 치멘 전투에서 호라즘 샤 왕조에 승리했다.[94] 1235년까지 카프타, 에데사, 에르주룸 등을 지배하에 두었다.

쾨세다그 전투


그러나 그야스엣딘 케이휘스레브 2세(재위: 1237년 ~ 1243년) 시대에 1240년 바바이 반란으로 룸 셀주크는 약화되었다.[154]

1330년대 아나톨리아

2. 3. 쇠퇴와 멸망

1237년 5월, 케이쿠바드 1세가 원정 중 카이세리에서 병사하면서 룸 술탄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97] 그의 죽음은 그야스엣딘 케이휘스레브 2세에 의한 독살로 추측되기도 한다.[96][97][98] 케이휘스레브 2세 시대에 룸 셀주크 왕국은 쇠퇴했는데, 1240년 튀르크멘족이 일으킨 바바이 반란은 왕국을 약화시켰다.[154]

케이휘스레브 2세는 즉위 후 궁정 내 호라즘 출신 유력자를 살해했고, 이에 호라즘 출신 신하들은 복종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97] 1240년부터 1241년에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바르바르 이스하크라는 달비시(수피 수도승)가 튀르크멘족을 지휘하여 종교 반란을 일으켰다.[97][99] 이 반란은 종교적 측면 외에도 반귀족적, 정치적인 성격을 띠었으며,[99] 룸 셀주크 군은 여러 번 패배했다. 한때 케이휘스레브 2세가 수도 콘야에서 탈출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97] 반란은 프랑크인 용병에 의해 진압되었고,[97] 지도자 바르바르 이스하크는 교수형에 처해졌지만,[99] 이 사건은 룸 셀주크 왕조의 군사력 저하를 보여주었다.[100]

1241년, 케이휘스레브 2세는 아르투크 왕조가 소유했던 아르미드(현재의 디야르바크르)를 점령하며 동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다.[100] 그러나 직후 룸 셀주크 왕조는 동쪽에서 성장한 몽골 제국의 공격을 받았다. 1232년경부터 몽골군은 아나톨리아를 정찰했고, 1240년대부터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100] 1242년 가을, 에르주룸이 몽골에 함락되었다. 1243년 6월 26일, 룸 셀주크 군은 쾨세다그 전투에서 바이주 노얀이 이끄는 몽골군에게 대패했다.

패전 후, 시바스는 항복하여 약탈을 면했지만 성벽과 무기가 파괴되었고, 토카트, 카이세리는 약탈당했다. 몽골에 신종을 맹세한 룸 셀주크에는 매년 공납이 부과되었다.[100]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나톨리아는 기근에 시달렸고, 많은 사람들이 흑해나 지중해 연안으로 피난했다.

1245년, 케이휘스레브 2세는 몽골군에 협력한 소아르메니아 왕국에 대한 응징 원정 도중 사망했다.[101] 그의 죽음 역시 독살 의혹이 제기되었다.[99] 이후 룸 셀주크는 몽골의 속국이 되었고, 점차 작은 토후국들(베일릭)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1277년,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는 아나톨리아를 침략하여 엘비스탄 전투에서 몽골을 패배시켰지만, 곧 이집트로 돌아가면서 몽골의 통치가 재개되었다. 카이쿠스라우 3세 통치 말기, 그는 코냐 주변 땅에 대해서만 직접적인 주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1303년, 카이카우스 2세의 아들 메수드 2세가 카이세리에서 술탄으로 즉위했지만, 1308년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메수드 3세도 얼마 후 살해되었다. 셀주크 왕조의 먼 친척이 잠시 코냐의 에미르로 즉위했지만, 1328년 카라만 왕조에게 패배하고 영토를 빼앗겼다.

3. 정치

셀주크인들은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다. 이는 니잠 알물크의 저서와 튀르크 전통에서 군주가 텡그리의 대리인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룸 셀주크 왕국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당대 사가들이 이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157]

룸 셀주크의 행정 체제는 셀주크 제국에 비해 덜 발달했다. 군주들은 페르시아계 비서나 관료들에게 의존했고, 그리스계나 아르메니아계 관료들도 있었다. 따라서 페르시아식 관료제를 기반으로 동로마와 튀르크의 영향이 나타났다.[158]

콘야에서 발견된 쌍두 독수리 문양

3. 1. 셀주크 제국과의 관계

룸 셀주크 왕국의 첫 군주 쉴레이만은 셀주크 제국 본가의 입장에서는 역적이었고, 초기 군주들 역시 이란의 셀주크 제국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따라서 양측의 관계는 항상 긴장 상태였다.[159] 그러나 쉴레이만 1세는 술탄 칭호를 사용하지 않아 직접적인 대항 흔적은 찾기 어렵다. 셀주크 제국 몰락 후 권좌에 오른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셀주크 가문의 가주라는 인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대한 술탄, 아우구스트, 샤한샤,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의 술탄, 국가들의 주인, 세계와 종교의 영광, 이슬람과 무슬림의 기둥, 왕들과 술탄들의 영광, 법의 수호자, 무신론자들과 이교도들의 파괴자, 신앙의 전사들의 후원자, 알라의 나라들의 수호자, 알라의 종들을 보호하시는 분, 룸, 아르메니아, 프랑크, 시리아의 술탄, 아불 파스 클르츠 아르슬란 이븐 마수드 이븐 클르츠 아르슬란, 신자들의 지도자를 도우시는 분”이라고 칭했다.[160] 이는 말리크샤 1세의 칭호를 그대로 채용한 것으로, 클르츠 아르슬란 이후 군주들도 이 칭호를 계속 사용하여 셀주크 제국의 계승자임을 주장했다.[161]

12세기 초, 룸 셀주크의 구리 동전이 코냐와 동부 아나톨리아의 여러 토후국에서 처음 주조되었다. 13세기 중반부터 중앙 및 동부 아나톨리아에서는 은 주조소와 은화가 번성했다. 킬리치 아르슬란 2세의 동전 대부분은 1177년에서 1195년 사이 코냐에서 주조되었고, 일부는 시바스에서 발견된다. 그의 동전은 대부분 은 디르함이고, 몇 개의 디나르와 풀루스(소형 구리 동전)도 있다.

태양 사자와 기수는 룸 셀주크 화폐의 중심 모티프이다. 활시위를 당긴 기수 이미지는 힘과 통제를 나타내며 이상적인 셀주크 왕을 상징한다. 이 이미지는 11세기 후반 룸 셀주크 구리 동전에 처음 등장했고, 술레이만 2세(Suleiman II of Rûm)가 은화와 금화에 추가했다.

11세기와 12세기 대부분 이슬람 근동은 "은 기근"을 겪었지만, 13세기 초 아나톨리아 은광 발견으로 룸 셀주크 영토에는 "은 홍수"가 발생했다. 룸 셀주크 디르함의 순도는 디나르와 유사하며, 종종 같은 주형을 사용했다. 셀주크 은화의 우수한 품질과 중요성은 왕조의 부유함에 기여했고, 지역 "통화 공동체"의 기준점 역할을 했다. 트라브존 제국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은화는 룸 셀주크 동전의 순도와 무게 규격을 본떴다.

카이카우스 2세 즉위 후, 그의 동생 클르츠 아르슬란 4세와 카이쿠바드 2세가 공동 통치자가 되어 화폐와 후트바에 세 형제의 이름이 새겨졌다. 1249년부터 1256년까지 카이카우스와 클르츠 아르슬란은 왕위를 두고 다퉜지만, 실질적으로 카이카우스가 단독 통치했다.몽케 칸은 룸 셀주크를 동서로 분할 통치하도록 명령했다.[104] 몽케의 재판 후, 클르츠 아르슬란의 당파가 카이카우스에게 패배하고 클르츠 아르슬란은 투옥되었다.[104] 훌레구는 룸 셀주크의 분할 통치를 승인했고, 서쪽은 카이카우스, 동쪽은 클르츠 아르슬란이 지배했다.[105] 1261년, 훌레구의 명령으로 카이카우스는 코냐에서 쫓겨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105]

룸 셀주크 왕조는 셀주크 제국의 지배권을 인정했다.[74] 그러나 내정,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 외교는 독자적으로 행할 수 있었다.[74] 건국기에 룸 셀주크 왕조는 셀주크 가문과 싸웠지만, 클르츠 아르슬란 1세 이후에는 셀주크 제국과 싸우지 않았다.[80]

4. 경제

소아시아는 풍부한 지하자원과 풍요로운 초원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생산된 품목들은 멀리 북유럽까지 수출되었다. 이 거래를 통해 얻은 자산을 이용해 룸 셀주크의 통치자들은 거대한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148] 쾨세다그 전투 3년 후 소아시아를 방문한 생캉탱의 시몬은 룸 셀주크 왕국의 풍요로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소아시아에 100개의 도시가 있으며, 은, 동, 철이 풍부하게 생산되며, 이곳에서 만들어진 직물은 프랑스와 영국까지 수출된다고 기록했다.[162]

룸 셀주크 통치자들은 경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티레의 윌리엄은 클르츠 아르슬란 1세가 “헬레스폰트에서 타르수스까지 모든 지역을 통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각지에 대리인을 파견해서 각종 공물과 세금을 긁어모았다.”라고 기록했다.[163] 1207년 케이휘스레브 1세의 수닥, 안탈리아 등 정복은 경제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64]

13세기 말, 룸 셀주크 왕조는 몽골 제국의 간접 지배하에 경제적 압박을 받았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룸 셀주크 왕조의 내정은 기록이 불분명해졌다.[118] 1308년 마수드 3세가 카이세리에서 급사하면서, 남자 후계자가 단절되어 룸 셀주크 왕조는 멸망했다.[113]

4. 1. 토지 제도

룸 셀주크 왕국에서 토지는 대부분 국유지(miri|미리tr)였다. 이 토지는 세 가지 방법으로 분배되었다. 첫 번째는 개인에게 자유소유권(mülk|뮐크tr)을 부여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토지의 세금수취권(ikta|이크타tr, اقطاع|이크타|l2=faar)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방법은 바크프(vakıf|바크프tr, وقف|와크프|l2=faar)로, 종교적 자선재단에 헌납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제도적 틀은 오스만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165]

4. 2. 농업

소아시아는 농업에 있어 축복받은 땅이었다. 중앙부 고원지대는 방목에 적합했고, 서부, 남부, 동부는 곡식, 면화, 콩, 채소, 과일, 쌀, 꿀, 설탕 등을 생산하기에 좋았다. 특히 남부, 에게 해 연안, 카파도키아에서 생산되는 포도는 품질이 매우 뛰어나 와인으로 만들어 외국에 수출되었다. 12세기 룸 술탄국의 금고에는 와인 수출 대금도 한 몫을 차지했을 정도였다.[166]

11세기 동로마령 소아시아는 전쟁, 약탈, 기근,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인해 농민들이 떠나면서 황폐해졌다. 룸 술탄국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주 장려 정책을 펼쳤다. 미개간지에 농민들을 이주시키면서 세금 혜택을 주고, 씨앗 등 농사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했다. 1198년에는 5,000명의 동로마 포로를 필로밀론에 정착시킨 것이 좋은 예시이다. 이들은 식량과 씨앗을 지원받고, 5년 동안 세금을 면제받았으며, 이후에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세금을 약속받았다. 이러한 정책은 동로마 신민들을 크게 매혹했다. 훗날 코니아테스는 동로마 신민들이 "그리스 도시와 고향에 남기보다는 야만인들 속에 정착하기를 선호한다"고 한탄했다.[167]

농업에는 서투르키스탄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농민, 튀르크화된 원주민,[122] 강제 이주당한 그리스인 농민들이 종사했다. 소작농으로 농업을 상시적으로 하는 경우는 적었고, 대부분은 일용직, 반상시적인 유기적인 고용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122] 슐레이만 1세는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아나톨리아로 이주당한 블라크인/왈라키아인, 슬라브인, 시리아인 농민들을 보호하고, 납세를 조건으로 농노를 해방시켰다.[73]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비잔티움 영토 내의 치안이 악화되자, 그리스인 농민들 중에는 룸 셀주크 왕조를 비롯한 투르크만 정권으로 탈출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13세기 아나톨리아에서는 화려한 문화를 누리는 도시 주민에 비해, 농민들은 그들의 생활을 지탱하는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126] 농민들은 아나톨리아 내에서의 전쟁과 약탈에 노출되었고, 농지는 황폐화되어 수확에 큰 타격을 받았다.[126]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의 불만이 축적되어, 1240년부터 1241년에 걸친 바바 이스하크의 반란으로 불만이 폭발했고, 반란은 종교적이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귀족 사회에 반발하는 반봉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4. 3. 광물

아나톨리아는 광물 자원이 풍부했다. 은광산, 철광산, 암염갱, 청금속 광산이 있었다. 소아시아 동북 방면의 카스타모누, 시노프, 삼순, 오스만즉에는 고품질의 구리가 나오는 광산이 있었다.[168] 또 다른 중요한 광물 자원은 백반이었다. 백반은 직물을 염색하는 데 쓰이는 재료였다. 5세기 중반 로마 남부에서 백반 광산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유럽에서 소아시아가 거의 유일한 산지였다. 소아시아산 백반은 스페인과 잉글랜드까지 팔려갔다. 특히 룸 술탄국은 제노아의 니콜로 데 산토시로나 베네치아의 베네파티오 데 몰렌디노와 협력하였다.[168]

4. 4. 교역

소아시아는 풍부한 지하자원과 비옥한 초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기서 생산된 물품들은 멀리 북유럽까지 수출되었다. 룸 셀주크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교역을 통해 얻은 부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148] 쾨세다그 전투 3년 후 소아시아를 방문한 생캉탱의 시몬은 룸 셀주크 왕국의 풍요로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소아시아에 100개의 도시가 있고, 은, 동, 철이 풍부하게 생산되며, 이곳에서 만들어진 직물은 프랑스와 영국까지 수출된다고 기록했다.[162]

룸 셀주크 통치자들은 경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티레의 윌리엄의 기록에 따르면 클르츠 아르슬란 1세는 “헬레스폰트에서 타르수스까지 모든 지역을 통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각지에 대리인을 파견해서 각종 공물과 세금을 긁어모았다.”[163] 1207년 케이휘스레브 1세가 크림 반도의 수닥, 지중해의 주요 항구 도시 안탈리아 등을 정복한 것은 경제적 동기에서 비롯된 정복 활동의 좋은 예시이다.[164]

케이휘스라브 2세의 디르함 (시바스, 1240~1241년)


룸 셀주크인들은 도시 발달에도 힘을 기울였다. 생캉탱의 시몬은 13세기 중반 룸 셀주크 왕국에 100개 이상의 도시가 있다고 언급했다.[169] 이 도시와 항구들은 국내외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카페트나 의류 등을 생산하는 산업 중심지였다. 예를 들어, 안탈리아는 조선 산업의 중심지였다. 13세기 중반 시르트는 고블릿, 데니즐리와 아크셰히르는 의류, 시바스카스타모누는 양모, 에르빌은 린넨 의류, 부르사는 비단 생산으로 유명했다. 이븐 바투타는 아크사라이에서 생산되는 양모 제품이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인도, 중국 제품보다 품질이 우수하다고 기록했다. 소아시아산 비단 의류는 몽골인들이 공물로 요구할 정도였으며, 안탈리아알라니아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피사로 판매되었다.[170]

룸 셀주크 왕국에서 처음 주화를 발행한 것은 메수드 1세 때이다. 처음에는 동화만 발행되었고, 은화는 클르츠 아르슬란 2세 때 처음 등장했다. 금화는 13세기에야 발행되었는데, 이전에는 동지중해에서 달러 역할을 하던 동로마의 금화 히페르피론을 사용했다.[171]

룸 셀주크 군주들은 상업 요충지 확보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185년아미소스를, 1214년에는 시노프를 정복하여 흑해 방면 교역로를 확보했다. 안탈리아알라니아는 각각 1207년1222년에 정복하여 지중해 방면 교역로를 확보했다. 또한, 당시 동지중해 교역을 지배하던 베네치아키프로스 왕국과 협약을 맺기도 했다.[172]

이러한 교역 발달 노력의 결과, 시장과 거래에 부과된 세금은 룸 셀주크 지배자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 생캉탱의 시몬은 시바스가 셀주크 술탄에게 가지는 경제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셀주크인들은 소아시아 진입 초기부터 그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티레의 윌리엄의 기록에 따르면 클르츠 아르슬란 1세는 “헬레스폰트에서 타르수스까지 모든 지역을 통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각지에 대리인을 파견해서 각종 공물과 세금을 긁어모았다.”[163]

4. 5. 유목민 경제

소아시아 중부 고원 지대는 중앙아시아와 이란으로 이어지는 초원 지대의 연장으로, 가축을 키우기에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튀르크멘 유목민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말, 양, 소 등 다양한 가축을 길렀으며, 이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173] 특히 말은 유목민의 의식주 모두를 책임지는 중요한 가축이었다. 아나톨리아 중부 고원은 말을 사육하기에 적합했으며, 14세기 초 카스타모누 지역에서 키운 말은 금화 1000닢에 거래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이 말들은 병원기사단, 키프로스의 제노아, 크레타의 베네치아 등지로 팔려나갔다.[173]

튀르크멘 유목민들은 말 외에도 다른 가축을 길러 시리아, 이라크, 이란 등지에 팔았다. 또한 가축에게서 얻은 치즈, 요구르트, 고기, 양모, 가죽 등은 인근 정주민들에게 판매했다. 유목민들의 또 다른 주요 생산품은 양모로 만든 킬림과 카페트였다. 특히 마르코 폴로는 아크사라이의 카페트가 아름답다고 기록했다.[174]

유목민 경제에서 약탈 역시 중요한 요소였다. 만지케르트 전투 직후에는 약탈이 극심했으나, 13세기 룸 셀주크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잦아들었다. 그러나 13세기 말 룸 셀주크 쇠망기부터 다시 극심해졌다. 약탈의 부산물 중 하나는 유럽 노예였다. 1186년에는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인 26,000명이, 1282년 트랄레스 함락 당시에는 20,000명이 노예로 팔려나갔다. 14세기 초에는 튀르크멘의 약탈이 심해져 에게 해 섬들에서만 1331년 한 해 동안 25,000명이 튀르크인에게 잡혀 노예로 팔렸을 정도였다.[175]

5. 문화

룸 술탄국은 투르크-페르시아 전통과 그리스-로마 세계의 유산을 바탕으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52] 특히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페르시아 미술, 건축, 문학을 후원했으며, 행정과 문학에서 페르시아어를 널리 사용했다.[54]

알라냐의 붉은탑. 알라에딘 1세가 1221년에서 1226년 사이에 건설했다.


13세기에는 몽골의 침략을 피해 이란에서 많은 페르시아 난민들이 유입되면서 룸 술탄국의 페르시아 문화는 더욱 융성해졌다.[55][56] 룸 술탄국의 술탄들은 카이 코스로(Kay Khosrow), 카이 카우드(Kay Kawad/Qobad), 카이 카우스(Kay Kāvus) 등 페르시아식 이름을 사용했으며, 자랄루딘 루미(Jalal ad-Din Rumi)와 같은 페르시아 문학가들이 활동했다.[90]

금과 은으로 상감된 금속 촛대, 아마도 코냐(Konya), 1250-1300년경.


룸 술탄국은 모스크, 마드라사(학원) 등 이슬람 건축물을 많이 건설하여 아나톨리아의 이슬람화에 기여했다.[72] 카라반사라이(대상들의 숙소)를 건설하여 상업을 장려하고, 와끄프 제도를 통해 공공시설을 유지했다.[141][142] 룸 술탄국의 건축은 이란 셀주크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비잔티움, 시리아, 아르메니아 건축 등 주변 지역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다.[129]

『정신적 마스나위』사본(코냐의 메블라나 박물관 소장)


말라즈기르트 전투 이후 튀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에 정착하면서 튀르크화가 진행되었고, 룸 술탄국의 지배하에서 이슬람화가 가속화되었다.[72] 룸 술탄국은 오스만 제국에 문화적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페르시아 문화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82]

5. 1. 궁정 문화

초창기 룸 셀주크 왕국에서는 왕실 중심의 문화 활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모스크(이슬람교 사원)도 거의 지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클르츠 아르슬란 2세 시대에 변화하여, 수도 이코니온을 중심으로 모스크, 궁성, 왕실 영묘(왕족의 무덤) 등의 건축 활동이 활발해졌다. 또한 페르시아어 문학도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후원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부터 소아시아(현재의 튀르키예 지역)는 문화적으로 이슬람 세계에 통합되기 시작했다. 특히 1194년에 이라크 셀주크의 투그릴 3세가 사망한 뒤, 룸 셀주크 왕국이 셀주크 제국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176]

몽골 통치 시기 룸 셀주크 왕국에서는 왕실 중심의 문화 활동은 줄어들었지만, 몽골 관료들이 소아시아에 모스크, 병원, 마드라사(이슬람 학교)를 건설하면서 소아시아 도시의 이슬람화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 문학 분야에서도 룸 셀주크의 관료 이븐 비비는 일칸국의 고위 관료 아타 말리크 주바이니의 후원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이븐 비비의 저서는 셀주크 왕조를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단점이 있지만, 룸 셀주크 내부의 중요한 사료(역사적 자료)로 평가받는다.[177]

카르다크(Cardak)의 카라반사라이(대상들의 숙소)

5. 2. 소아시아의 튀르크화

룸 셀주크 치하에서 소아시아는 지속적인 이슬람화와 튀르크화 과정을 겪었다.[179] 1256년에 룸 셀주크를 방문한 생캉탱의 시몬은 이 나라를 '''튀르키예'''(Turquie regnumla)라 불렀는데, 이는 튀르키예란 용어가 사용된 가장 초기의 용례 중 하나이다. 원래 그리스와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대다수였던 동로마 제국의 소아시아가 무슬림과 튀르크적 요소를 다수 포함한 아나톨리아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다.[148]

룸 셀주크 왕국의 지배하에서 진행된 소아시아의 튀르크화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 1단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튀르크멘 부족들이 집단으로 소아시아에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서방 사료에서는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코냐(이코니온)을 점령했을 때, 소아시아가 튀르크화되었다고 언급하며 이 지역을 '''튀르키예'''(Turchiala)라고 불렀다. 이를 통해 튀르크계 인구가 점차 증가하여 다수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2단계: 몽골 침공 이후 트란스옥시아나, 호레즘, 아제르바이잔, 에란 지역에서 튀르크계인들이 유입되었다. 또한 몽골 침공을 피해 도시화된 튀르크인들도 소아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소아시아의 튀르크화와 이슬람화는 동시에 진행되었다.[180][181]


룸 셀주크 왕조는 대 셀주크 왕조의 계승자로서 정치, 종교, 문화적 유산을 투르크-페르시아 전통과 그리스-로마 세계에 기반을 두었으며,[52] 아들들에게 페르시아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53] 룸 셀주크는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페르시아식 통치 방식을 물려받았고, 이는 훗날 오스만 제국에 전수되었다.

투르크-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아,[54] 룸 셀주크는 페르시아 미술, 건축, 문학을 후원했다. 셀주크 제국과는 달리, 룸 셀주크 술탄들은 카이 코스로(Kay Khosrow), 카이 카우드(Kay Kawad/Qobad), 카이 카우스(Kay Kāvus)와 같은 페르시아 이름을 사용했다. 그들 영토의 관료와 종교 엘리트는 대체로 페르시아인이었다. 13세기에는 아나톨리아 주요 도시 중심지의 대부분의 무슬림 주민들이 페르시아어를 주요 언어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행정, 종교, 문화 측면에서 이란을 모방하는 경향이 절정에 달했는데, 몽골 침략을 피해 도망친 페르시아 난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페르시아 문화를 가져와 아나톨리아에 "제2의 이란"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55][56] 이란의 문화, 정치, 문학 전통은 13세기 초 아나톨리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저명한 역사가 이븐 비비(Ibn Bibi)는 샤흐나메(Shahnamah)를 본떠 셀주크 술탄들을 중심으로 한 6권짜리 페르시아어 시집인 셀주크나메(Selçukname)를 짓기도 했다.

투르크계 기원에도 불구하고 셀주크는 행정 목적으로 페르시아어를 사용했으며, 아랍어를 대체한 그들의 역사조차도 페르시아어로 쓰였다. 투르크어 사용은 거의 장려되지 않았다. 심지어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2세(Kilij Arslan II)도 어린 시절 신하들과 페르시아어로 대화했다. 칸바기(Khanbaghi)는 아나톨리아 셀주크가 이란 고원을 지배했던 셀주크보다 더 페르시아화되었다고 평가한다. 술탄 술레이만 2세(Suleiman II of Rûm), 알라에딘 1세(Kayqubad I), 카이쿠스로 2세(Kaykhusraw II)는 페르시아 시를 썼다.

라하트 알-수두르(Rahat al-sudur)는 무함마드 빈 알리 라완디(Muhammad bin Ali Rawandi)가 페르시아어로 쓴 대 셀주크 제국과 그 붕괴에 대한 역사로, 술탄 카이쿠스로 1세(Kaykhusraw I)에게 헌정되었다. 익명의 룸 술탄국 역사인 타리크-이 알-이 살주크(Tārikh-i Āl-i Saldjūq)조차도 페르시아어로 쓰였다. 룸의 술탄들은 대체로 아랍어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이는 아랍의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작은 정도로 제한했다. 반대로, 대부분의 술탄과 상당수의 도시 주민들이 페르시아어를 알았기 때문에 페르시아 문학과 이란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가장 유명한 페르시아 작가 중 한 명인 루미(Rumi)는 국가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비잔틴 귀족이 셀주크 귀족의 일부로 남았고, 토착 비잔틴(룸) 농민들이 그 지역에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술탄국에서 비잔틴의 영향도 상당했다.[57][58] 셀주크 술탄들은 초기 오스만 술탄들처럼 기독교 여성들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이며, 셀주크 왕실에서는 그리스 여성이 가장 지배적이었다.[59] 아나톨리아의 문화적 튀르크화는 14세기에, 특히 오스만 제국의 점진적인 부상 동안 시작되었다. 비잔틴 그리스인(Byzantine Greeks), 아르메니아인(Armenians), 쿠르드인(Kurds), 투르크인, 페르시아인을 포함한 인구를 가진 셀주크는 1220년부터 1250년 사이에 매우 성공적이었고, 이후 아나톨리아의 이슬람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룸 셀주크 제국 건립 이전 아나톨리아 반도 주민들은 대부분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하고 정교회를 믿는 사람들이었다.[127] 말라즈기르트 전투 이후, 아나톨리아에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투르크만족이 이슬람교를 믿고 진출하자,[127] 술레이만 1세를 따라 아나톨리아로 이주한 투르크만족은 토지를 부여받았고, 과거 비잔티움 제국에 속했던 기독교도 주민들은 투르크만족의 지배하에 놓였다.[70] 현지 그리스인 귀족들은 영지를 버리고 서쪽으로 이주하거나, 아나톨리아에 남아 룸 셀주크에 봉사하는 길을 선택했다.[128] 룸 셀주크의 역대 술탄들 중에는 기독교를 믿는 그리스인을 아내로 맞이하거나 그들의 피를 이은 자도 많았다.[128]

13세기에 접어들면서 동방의 몽골 제국의 확장에 따라 중앙 유라시아와 이란의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동하는 현상이 발생했고, 그들은 변방에 거주했다.[116] 유목민과 정착 생활을 하는 원주민들은 서로의 생활 공간이 달랐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공존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2세기 투르크만족의 생활 방식에 대해서는, 그들이 유목 생활을 보냈고, 농경민족으로부터의 약탈 행위가 일상생활의 일부였다는 것이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요하네스 키나모스(John Kinnamos)에 의해 기록되었다. 유목 생활을 하던 투르크만족의 정착화가 진행됨에 따라 아나톨리아 원주민들 사이에도 투르크어가 퍼지면서 아나톨리아의 튀르키예화가 진행되었다.[72] 투르크만족 여러 부족에는 부족의 크기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었지만, 우지와 같은 변방 지역에 주둔하는 부족은 면세되는 경우가 많았다.[119] 변방 지역의 투르크만족은 독립성이 강했고,[122] 룸 셀주크는 투르크만족을 지배하기 위해 정착화 추진, 부족장에 대한 칭호 수여 등의 정책을 채택했다.[119]

카이쿠바드 1세의 치세에 실시된 인사 개혁에서는, 튀르키예계 이외에도 현지 그리스계 주민, 서유럽 출신 프랑크인(Frank), 몽골군의 침입을 피해 중앙아시아나 이란에서 아나톨리아로 피난 온 이란계 인물들도 많이 등용되었다.[93] 이 시기에 아나톨리아로 이주한 이란계 인물로는 시 작품과 종교 활동으로 이름을 남긴 자랄루딘 루미(Jalal ad-Din Rumi)와 역사가 이븐 비비(Ibn Bibi)의 부모 등이 있다.[90]

룸 셀주크 왕조가 성립되기 이전 아나톨리아 반도의 이슬람 문화는 거의 그 모습을 남기지 못했다.[136] 룸 셀주크의 지배하에서 아나톨리아의 도시에는 모스크, 마드라사(학원)가 많이 건설되었고, 이 시대에 아나톨리아의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72]

5. 3. 페르시아 문화의 부흥

셀주크 가문의 소아시아 통치는 이 지역에 페르시아 문화가 확산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오스만 제국의 문화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182] 페르시아어는 당시 관료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클르츠 아르슬란 2세 이후 룸 셀주크 왕국에서 작성된 문학 작품 대부분은 페르시아어로 쓰였다. 12세기 룸 셀주크 왕족들의 이름이 페르시아 문화권 이름으로 바뀐 것도 이러한 경향을 보여준다.[150] 14세기 소아시아의 튀르크 무슬림 공국들에서는 종교 용어 대부분이 페르시아어를 통해 들어왔다.[183]

룸 셀주크 왕조는 대 셀주크 왕조를 계승하여 투르크-페르시아 전통과 그리스-로마 세계에 기반한 정치, 종교, 문화적 유산을 가졌다.[52] 룸 셀주크는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페르시아식 통치 방식을 물려받아 오스만 제국에 전수했다.

투르크-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으로, 룸 셀주크는 페르시아 미술, 건축, 문학을 후원했다. 셀주크 제국과 달리 룸 셀주크 술탄들은 카이 코스로(Kay Khosrow), 카이 카우드(Kay Kawad/Qobad), 카이 카우스(Kay Kāvus)와 같은 페르시아 이름을 사용했다. 13세기에는 아나톨리아 주요 도시 대부분의 무슬림 주민들이 페르시아어를 주요 언어로 사용했다. 몽골 침략을 피해 도망친 페르시아 난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페르시아 문화가 더욱 확산되어 아나톨리아에 "제2의 이란"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5][56]

셀주크는 행정 목적으로 페르시아어를 사용했으며, 역사 기록조차도 페르시아어로 작성되었다. 킬리지 아르슬란 2세(Kilij Arslan II)는 어린 시절 신하들과 페르시아어로 대화했다. 술탄 술레이만 2세(Suleiman II of Rûm), 알라에딘 1세(Kayqubad I), 카이쿠스로 2세(Kaykhusraw II)는 페르시아 시를 썼다.

무함마드 빈 알리 라완디(Muhammad bin Ali Rawandi)는 페르시아어로 대 셀주크 제국과 그 붕괴에 대한 역사서인 라하트 알-수두르(Rahat al-sudur)를 써서 술탄 카이쿠스로 1세(Kaykhusraw I)에게 바쳤다. 룸 술탄국의 익명 역사서인 타리크-이 알-이 살주크(Tārikh-i Āl-i Saldjūq)도 페르시아어로 쓰였다. 룸의 술탄들은 대부분 아랍어 교육을 받지 못해 아랍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반면, 대부분의 술탄과 도시 주민들이 페르시아어를 알았기 때문에 페르시아 문학과 이란의 영향력이 커졌다.

가장 유명한 페르시아 작가 중 한 명인 루미(Rumi)는 룸 술탄국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궁정과 관청에서는 페르시아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문서 작성에는 주로 아랍어가 사용되었다.[112] 역사서와 문학 작품은 대부분 페르시아어나 아랍어로 쓰였고, 튀르크계 언어로 쓰인 서적은 적었다.[129] 자랄 알딘 루미(Jalal ad-Din Rumi)는 코냐를 중심으로 문학, 종교 활동을 했고, 페르시아어로 시집 『샴스 타브리지 시집』, 『정신적 마스나위』를 저술했다.[139]

카이호스로 1세의 치세 때, 역사가 라완디(Ravandi)가 페르시아어로 셀주크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가슴의 평안과 기쁨의 증거』가 궁정에 헌정되었다.[88]

5. 4. 건축 문화

셀주크 시대에는 이슬람 세계의 건축 유형과 설계 구조에 혁신이 일어났다. 룸 셀주크인들은 돌을 주요 건축 재료로 사용했으며, 특히 조각 기술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돋보인다. 소아시아식 변혁의 핵심은 돔을 떠받치기 위해 돔 밑바닥 네 귀퉁이에 쌓아올리는 구면 삼각 궁륭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나중의 룸 셀주크 모스크에는 안뜰의 일부를 돔으로 덮음으로써 혹독한 기후에 대비했다. 이 형식은 오스만 제국기 단일 돔 모스크 양식의 바탕이 되었다.[186]

룸 셀주크족은 카라반사라이, 마드라사, 모스크 건설에 있어 이란 셀주크 건축의 벽돌과 회반죽 공법을 돌을 사용하는 공법으로 변형시켰다.[60] 특히 오아시스, 무역 기착지, 카라반 방어 시설로 사용되었던 카라반사라이(혹은 한스)는 아나톨리아 셀주크 시대에 약 100개의 구조물이 건설될 만큼 주목할 만하다. 셀주크 건축은 시바스의 천상 모스크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 비잔틴 건축가들과 아르메니아 건축에서 영감을 받았다.[62] 아나톨리아 건축은 이슬람 건축 전체 역사에서 가장 독특하고 인상적인 건축물 중 일부를 보여준다. 나중에 이 아나톨리아 건축은 인도 술탄국에 의해 계승되었다.[63]

가장 큰 카라반사라이는 코냐와 악사라이 도시 사이 도로, 술탄하너 마을에 있는 술탄 한(1229년 건설)이다. 두 개의 카라반사라이가 '술탄 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하나는 카이세리와 시바스 사이에 있다. 또한 술탄하너 외에도 터키 전역의 5개 마을( 캉갈의 알라차한, 두라간, 헤킴한, 카드너너, 데니즐리 대도시 지역 내 아칸 마을)이 그곳에 건설된 카라반사라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헤킴한의 카라반사라이는 탑과 관련된 정보가 담긴 일반적인 아랍어 비문 아래에 아르메니아어와 시리아어로 된 두 개의 추가 비문이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62]

룸 셀주크 시대에는 코냐, 카이세리, 시바스 등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성벽 건설이 이루어졌고, 아나톨리아 무역로 보호를 위해 카라반사라이와 교량 건설 및 정비가 진행되었다.[90] 도시 내부에는 술탄과 고관들에 의해 모스크, 공중목욕탕(함맘), 병원이 건설되었으며, 이러한 시설의 유지비는 와끄프에 의해 충당되었다.[141][142]

룸 셀주크 시대의 건축물은 중앙아시아, 호라산, 이란, 이라크 건축물과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141] 비잔티움,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 주변 지역 건축 양식의 영향도 받았다.[129] 또한, 한랭하고 산악 지대가 많은 지리적 요인을 반영하여 독특한 작품들이 많이 나타났다.[129] 직선적인 구도를 특징으로 하며, 모스크, 메드레세는 석조의 초목과 기하학 무늬로 장식되었고, 청색, 백색, 흑색 타일이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카이카우스 2세가 건립한 코냐의 인제 미나레 메드레세, 시바스의 괵 메드레세 등이 있다.

케이쿠바드 1세의 치세에 세워진 술탄하느 카라반사라이(1229년 경; 튀르키예, 아크사라이)


사히브 아타 파흐렛딘 알리의 후원으로 지어진 인제 미나렐리 메드레세 (1270년 경; 튀르키예, 콘야)


일칸국의 관료, 호자 야쿠트가 지은 야쿠티예 메드레세(1310년; 튀르키예, 아크사라이)


괴크 메드레세(천상의 마드라사) 시바스, 룸 술탄국의 정기 수도에서 그리스인(룸) 신하가 건설함


인제 미나레

6. 역대 술탄

1077년 ~ 1086년 대셀주크의 말릭 샤 1세에 의해 의 술탄으로 인정받음이즈니크를 수도로 하는 아나톨리아 셀주크 술탄국의 창시자클르츠 아르슬란 1세1092년 ~ 1107년콘야의 첫 번째 술탄, 제1차 십자군과 전쟁말릭 샤1107년 ~ 1116년메수드 1세1116년 ~ 1156년클르츠 아르슬란 2세1156년 ~ 1192년케이휘스레브 1세1192년 ~ 1196년 (첫 번째 재위)술레이만 2세1196년 ~ 1204년클르츠 아르슬란 3세1204년 ~ 1205년케이휘스레브 1세1205년 ~ 1211년 (두 번째 재위)케이카부스 1세1211년 ~ 1220년케이쿠바드 1세1220년 ~ 1237년케이휘스레브 2세1237년 ~ 1246년그의 죽음 후, 1260년 클르츠 아르슬란 4세가 유일한 통치자가 될 때까지 술탄국이 분열되었다.케이카부스 2세1246년 ~ 1262년클르츠 아르슬란 4세1249년 ~ 1266년케이쿠바드 2세1249년 ~ 1254년케이휘스레브 3세1266년 ~ 1284년메수드 2세1282년 ~ 1296년 (첫 번째 재위)케이쿠바드 3세1298년 ~ 1302년메수드 2세1303년 ~ 1308년 (두 번째 재위)



코세다르 전투 이후 룸 술탄국은 몽골 제국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매년 금화, 비단, 낙타, 양 등을 몽골 궁정에 바치는 것이었다.[101] 몽골의 속국이 된 상황에서 카이카우스 2세는 영토의 절반을 양보하는 조건으로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109] 카이호스로 3세 이후의 술탄들은 일 칸국의 의향에 따라 폐위되었고, 정무를 처리하는 대신들도 일 칸국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115]

6. 1. 가계

1077년 ~ 1086년 대셀주크의 말릭 샤 1세에 의해 의 술탄으로 인정받음이즈니크를 수도로 하는 아나톨리아 셀주크 술탄국의 창시자클르츠 아르슬란 1세1092년 ~ 1107년코니아의 첫 번째 술탄말릭 샤1107년 ~ 1116년메수드 1세1116년 ~ 1156년클르츠 아르슬란 2세1156년 ~ 1192년케이휘스레브 1세1192년 ~ 1196년첫 번째 재위술레이만 2세1196년 ~ 1204년클르츠 아르슬란 3세1204년 ~ 1205년케이휘스레브 1세1205년 ~ 1211년두 번째 재위케이카부스 1세1211년 ~ 1220년케이쿠바드 1세1220년 ~ 1237년케이휘스레브 2세1237년 ~ 1246년그의 죽음 후, 1260년 클르츠 아르슬란 4세가 유일한 통치자가 될 때까지 술탄국이 분열되었다.케이카부스 2세1246년 ~ 1262년클르츠 아르슬란 4세1249년 ~ 1266년케이쿠바드 2세1249년 ~ 1254년케이휘스레브 3세1266년 ~ 1284년메수드 2세1282년 ~ 1296년첫 번째 재위케이쿠바드 3세1298년 ~ 1302년메수드 2세1303년 ~ 1308년두 번째 재위


참조

[1] 서적 The Seljuks of Anatolia: Court and Society in the Medieval Middle East I. B. Tauris
[2]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A History of Central Asia Rutgers University Press
[3] 서적 Istanbul and the Civilization of the Ottoman Empire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4] 서적 The Seljuks of Anatolia: Court and Society in the Medieval Middle East I. B. Tauris
[5] 서적 Early Mystics in Turkish Literature
[6] 서적 Byzantium and the Emergence of Muslim-Turkish Anatolia, ca. 1040–1130 Routledge
[7]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Byzantium, Rise of the Ottoman Empire, Christianity in Persia and the Status of Non-muslims in Ira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Royal Asiatic Society Books, Routledge
[8] 서적 The History of the Mongol Conquests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9] 서적 The Seljuks of Anatolia: Court and Society in the Medieval Middle East I.B. Tauris
[10] 서적 The Islamic world in ascendancy: from the Arab conquests to the siege of Vienna Greenwood Publishing Group
[11] 서적 The Seljuks of Anatolia: Court and Society in the Medieval Middle East I.B. Tauris
[12] 서적 The Islamic world in ascendancy: from the Arab conquests to the siege of Vienna Greenwood Publishing Group
[13] 서적 The Seljuks of Anatolia: Court and Society in the Medieval Middle East I.B. Tauris
[14] 서적 Anatolia in the period of the Seljuks and the "beylik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5] 서적 The Seljuks of Anatolia: Court and Society in the Medieval Middle East I.B. Tauris
[16]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Georgia Rowman & Littlefield
[17] 서적 The Formation of Turkey: The Seljukid Sultanate of Rum: Eleventh to Fourteenth Pearson Education Limited
[18] 간행물 The Saliūq Campaign against the Crimea and the Expansionist Policy of the Early Reign of'Alā' al-Dīn Kayqubād https://www.jstor.or[...] Journal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19] 서적 Râhatü’s-sudûr Ateş Publications
[20] 서적 Târîḫ-i Güzîde Nevâî Publications
[21] 서적 Selcûḳnâme Muhammed Ramazânî Publications
[22] 서적 Câmiʿu’t-tevârîḫ Ahmed Ateş Publications
[23] 웹사이트 MÛSÂ YABGU https://islamansiklo[...] TDV İslâm Ansiklopedisi
[24] 서적 Târîḫ Behmenyâr
[25] 웹사이트 MÛSÂ YABGU https://islamansiklo[...] TDV İslâm Ansiklopedisi
[26] 웹사이트 KUTALMIŞ https://cdn.islamans[...] TDV İslâm Ansiklopedisi
[27] 웹사이트 SÜLEYMAN ŞAH I https://cdn.islamans[...] TDV İslâm Ansiklopedisi
[28] 웹사이트 ANADOLU SELÇUKLULARI https://cdn.islamans[...] TDV İslâm Ansiklopedisi
[29] 웹사이트 KAVURD BEY https://cdn.islamans[...] TDV İslâm Ansiklopedisi
[30] 웹사이트 ÇAĞRI BEY https://cdn.islamans[...] TDV İslâm Ansiklopedisi
[31] 웹사이트 SELÇUKLULAR https://cdn.islamans[...] TDV İslâm Ansiklopedisi
[32] 웹사이트 Kirman Selçuks https://cdn.islamans[...] TDV İslâm Ansiklopedisi
[33] 웹사이트 SELÇUKLULAR https://cdn.islamans[...] TDV İslâm Ansiklopedisi
[34] 웹사이트 TERKEN HATUN, the mother of MAHMÛD I https://cdn.islamans[...] TDV İslâm Ansiklopedisi
[35] 웹사이트 MELİKŞAH https://cdn.islamans[...] TDV İslâm Ansiklopedisi
[36] 백과사전 BERKYARUK https://cdn.islamans[...]
[37] 서적 Düstûrnâme-i Enverî 1464
[38] 백과사전 MAHMÛD b. MUHAMMED TAPAR https://cdn.islamans[...]
[39] 백과사전 TUĞRUL I https://cdn.islamans[...]
[40] 백과사전 MES‘ÛD b. MUHAMMED TAPAR https://cdn.islamans[...]
[41] 백과사전 Ebû Tâlib TUĞRUL b. ARSLANŞAH b. TUĞRUL https://cdn.islamans[...]
[42] 백과사전 ARSLANŞAH b. TUĞRUL https://cdn.islamans[...]
[43] 백과사전 IRAK SELÇUKLULARI https://cdn.islamans[...]
[44] 문서 Grand Vizier Sāhīp Shams ad-Dīn Īsfahānī ruled the country on behalf of ʿIzz ad-Dīn Kay Kāwus II between 1246 and 1249
[45] 문서 Grand Vizier Parwāna Mu‘in al-Din Suleyman ruled the country on behalf of Ghiyāth ad-Dīn Kay Khusraw III between 1266 and 2 August 1277 (1 Rabi' al-awwal 676)
[46] 문서 Between 1262 and 1266 Rukn ad-Dīn Kilij Arslan IV reigned alone
[47] 문서 Between 1246 and 1249 ʿIzz ad-Dīn Kay Kāwus II reigned alone
[48] 문서 ʿIzz ad-Dīn Kay Kāwus II was defeated on October 14, 1256 in Sultanhanı (Sultan Han, Aksaray) and he acceded to the throne on May 1, 1257 again after the departure of Baiju Noyan from Anatolia
[49] 문서 Between 1249 and 1254 triple reign of three brothers
[50] 서적 el-Evâmirü’l-ʿAlâʾiyye
[51] 서적 Tevârih-i Âl-i Selçuk
[52] 서적 Saljuqs: Saljuqs of Anatolia Macmillan Publishers Limited 1996
[53] 서적 Explorations in Ottoman Prehistory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03
[54] 서적 Istanbul and the Civilization of the Ottoman Empire
[55] 서적 (Unspecified) 2021
[56] 서적 The Turks in World Histor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USA 2005
[57] 서적 Identities and Allegiances in the Eastern Mediterranean After 1204 https://books.google[...] Ashgate Publishing, Ltd. 2011
[58] 서적 Eat, Drink, and be Merry (Luke 12:19): Food and Wine in Byzantium https://books.google[...] Ashgate Publishing, Ltd. 2007
[59] 서적 The Seljuks of Anatolia: Court and Society in the Medieval Middle East I.B. Tauris 2015
[60] 서적 Atlas of World Art Laurence King Publishing 2004
[61] 서적 Architecture (Muhammadan) Charles Scribner's son 1908
[62] 서적 Armenia during the Seljuk and Mongol Periods St. Martin's Press 1999
[63] 서적 Lost in Translation: Architecture, Taxonomy, and the "Eastern Turks"
[64] 서적 The Historical Encyclopedia of World Slavery https://archive.org/[...] ABC-CLIO 1997
[65]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Activities of the Turkish people and the Mongol rule in West Asia) 2002
[66]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Activities of the Turkish people and the Mongol rule in West Asia) 2002
[67]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Activities of the Turkish people and the Mongol rule in West Asia) 2002
[68]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Activities of the Turkish people and the Mongol rule in West Asia) 2002
[69] 서적 イラン世界の変容 (Transformation of the Iranian World) 山川出版社 (Yamakawa Publishers) 2002-08
[70] 서적
[71] 서적
[72] 서적 オスマン帝国 イスラム世界の「柔らかい専制」
[73] 서적
[74] 서적
[75] 서적
[76] 서적
[77] 서적
[78]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79]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80]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81] 서적
[82] 서적
[83] 서적
[84] 서적
[85]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86]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87]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88]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89] 서적
[90]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91]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92] 서적 イラン世界の変容 山川出版社
[93]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94]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95] 문서 現在では「アラーイーヤ」が転訛してアランヤと呼ばれている
[96] 서적
[97]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98] 서적
[99] 서적
[100]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101]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102]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平凡社
[103] 서적
[104] 서적
[105]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106]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107] 서적
[108] 서적
[109] 서적
[110]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111]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112]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113]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114]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115] 서적
[116]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117] 서적
[118] 서적 The Formation of Turkey
[119] 서적
[120] 서적
[121] 서적
[122] 서적
[123]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124] 서적
[125]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126] 서적
[127] 서적 オスマン帝国 イスラム世界の「柔らかい専制」
[128] 서적
[129] 서적
[130] 서적
[131] 서적
[132] 서적
[133] 서적
[134] 서적
[135] 서적
[136]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137] 서적
[138] 서적
[139]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140]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141] 서적 (제목 없음) (출판사 없음) 1981
[142] 서적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출판사 없음) 2002
[143] 서적 ルーム・セルジューク朝 平凡社 1959
[144]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A History of Central Asia Rutgers University Press 2002
[145] 서적 Istanbul and the Civilization of the Ottoman Empire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963
[146] 웹사이트 Old Anatolian Turkish language http://global.britan[...]
[147] 저널 룸ㆍ살죽조 https://terms.naver.[...] 학문사 2002
[148] 저널 Introduction I.B.Tauris 2013
[149] 웹인용 Selçuk Ⅲ. Anadolu Selçukluları (1075-1308) A) Tarih https://islamansiklo[...] Türkiye Diyanet Vakfı 2019-01-20
[150] 웹인용 Saljuqs ⅲ. Saljuqs of Rum http://www.iranicaon[...] Encyclopædia Iranica Foundation 2019-01-20
[151] 저널 Social, cultural and intellectual life,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52] 저널 Social, cultural and intellectual life,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53] 저널 Social, cultural and intellectual life,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54] 저널 Social, cultural and intellectual life,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55] 저널 Social, cultural and intellectual life,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56] 서적 The Ottoman Empire, 1300-1650: The Structure of Power, Second Edition Palgrave MacMillan 2009
[157] 웹인용 Selçuk Ⅵ. Selçuklular’da devlet teşkilâtı https://islamansiklo[...] Türkiye Diyanet Vakfı 2019-01-21
[158] 저널 Sald̲j̲ūḳid Ⅴ. Administrative, social and economic history Brill 1995
[159] 저널 The Great Age of the Seljuqs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6
[160] 서적 The King of the East and West: The Seljuk Dynastic Concept and Titles in the Muslam and Christian Sources I. B. Tauris 2013
[161] 저널 The Great Age of the Seljuqs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6
[162] 저널 The Great Age of the Seljuqs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6
[163] 저널 The Turkish economy,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64] 저널 The Turkish economy,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65] 저널 The Turkish economy,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66] 저널 The Turkish economy,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67] 저널 The Turkish economy,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68] 저널 The Turkish economy,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69] 저널 Introduction I.B.Tauris 2013
[170] 저널 The Turkish economy,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71] 저널 The Turkish economy, 1071–1453 2009 2009
[172] 웹인용 Selçuk Ⅲ. Anadolu Selçukluları (1075-1308) B) Sosyoekonomik ve Kültürel Hayat https://islamansiklo[...] Türkiye Diyanet Vakfı 2019-01-21
[173] 저널 The Turkish economy,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74] 저널 The Turkish economy,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75] 저널 The Turkish economy,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76] 저널 The Great Age of the Seljuqs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6
[177] 저널 The Great Age of the Seljuqs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6
[178] 저널 Social, cultural and intellectual life,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79] 저널 Court and Nomadic Life in Saljuq Anatolia Brill 2013
[180] 저널 Social, cultural and intellectual life,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81] 서적 The Ottoman Empire, 1300-1650: The Structure of Power, Second Edition Palgrave MacMillan 2009
[182] 웹인용 Saljuqids v. Saljuqid literature http://www.iranicaon[...] 2010-01-21
[183] 서적 The Ottoman Empire, 1300-1650: The Structure of Power, Second Edition Palgrave Macmillan 2009
[184] 저널 Social, cultural and intellectual life, 107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85] 서적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이슬람사 시공사 2002
[186] 서적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이슬람사 시공사 2002
[187] 문서 알프 아르슬란과 셀주크 제국의 후계를 놓고 경쟁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