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스 에릭손 플레밍 남작
1. 개요
클라스 에릭손 플레밍 남작은 비에른 라그발드손의 손자이자 구스타브 바사 국왕의 총애를 받던 에릭 플레밍의 아들이다. 그는 1569년 스웨덴 추밀원 의원이 되었고, 1571년 스웨덴 해군 제독, 1590년 스웨덴 대집정관을 역임했다.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의 총독으로서 스웨덴 왕국의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최고 권한자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지기스문트 3세 바사를 지지하며 스웨덴의 칼 9세와 대립했다. 1597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들은 1599년 오보 대학살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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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핀란드 사람 -
미카엘 아그리콜라
핀란드의 종교 개혁가 미카엘 아그리콜라는 핀란드어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핀란드어 표준 표기법 개발, 최초의 핀란드어 신약성서 번역, 종교 서적 출판 등의 업적을 남겼고 핀란드 최초의 루터교 주교를 역임했다. -
16세기 스웨덴 사람 -
울라우스 페트리
울라우스 페트리는 스웨덴의 종교 개혁가, 법률가, 작가로서 마르틴 루터의 영향을 받아 스웨덴 루터교 형성에 기여하고 스웨덴어 성경 번역, 찬송가 편찬, 법률 체계에 영향을 미치는 등 스웨덴의 종교와 문화 발전에 공헌했다. -
스웨덴 총독 -
구스타브 호른
구스타브 호른은 스웨덴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 휘하에서 30년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이후 스웨덴군을 이끌었으며, 리보니아 총독과 왕국 원수를 역임하며 스웨덴의 국력 강화에 기여했다.
2. 생애
클라스 에릭손 플레밍은 스웨덴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구스타브 바사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스웨덴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569년 추밀원 의원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으며, 1571년에는 해군 제독, 1590년에는 대집정관에 오르는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총독을 지내며 스웨덴 왕국에서 국왕 다음가는 권한을 행사하기도 했다.
플레밍은 지기스문트 3세 바사 국왕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쇠데르만란드의 칼 공작과는 대립 관계에 있었다. 1596년부터 1597년까지 핀란드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인 몽둥이 전쟁을 진압했다. 그러나 칼과의 내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1597년 4월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
클라스 에릭손 플레밍 남작의 아버지( 비에른 라그발드손의 손자)는 국왕 구스타브 바사의 총애를 받던 에릭 플레밍 (1487–1548) 국무 자문관이었다.
그의 여동생 필리파 플레밍 (1578년 사망)은 오랜 투병 기간 동안 그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유로 그를 상속에서 제외하고, 윌라네 영지를 스웨덴의 요한 3세에게, 스웨덴 본토의 재산을 조카 안나 플레밍에게, 나머지 재산을 약혼자인 크누트 옌손 쿠르크에게 상속하는 유언장을 썼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드문 법적 관행이었다.
2.2. 정치 및 군사 경력
플레밍은 1569년에 추밀원 의원이 되었고, 1571년에 해군 제독이 되었으며, 1590년에는 대집정관이 되었다. 그는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의 총독으로서 국왕 다음으로 스웨덴 왕국의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최고 권한자였다. 그는 지기스문트 바사의 강력한 지지자였고, 쇠데르만란드의 칼 공작의 적이었다. 그는 1596–97년 몽둥이 전쟁의 반란군을 진압했으나, 칼과의 내전이 임박해 있었다.
1597년 4월 시운티오에서 함대가 준비되는 동안, 그는 갑자기 병에 걸렸으나, 페르니외에서 아내를 만나기 위해 이동하던 중 4월 12-13일 밤 포흐야 교회 근처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투르쿠로 옮겨졌고, 칼 9세는 그해 8월에 투르쿠를 정복했다. 플레밍의 아들들은 1599년 오보 대학살에서 처형되었다.
2.3. 몽둥이 전쟁 (1596-1597)
1596년부터 1597년까지 핀란드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인 몽둥이 전쟁에서, 플레밍은 국왕 지기스문트 바사를 지지하며 반란군을 진압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스웨덴 왕위를 주장했던 지기스문트의 삼촌 쇠데르만란드의 칼 공작과 대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