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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딘 (모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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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로딘은 카탈란 그리말디의 딸이자 모나코의 상속녀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람베르토 그리말디 디 안티베스와 결혼하여 그리말디 가문의 모나코 왕위 계승을 유지했다. 6세에 아버지의 사후 할머니 포멜리나가 섭정이 되었으나, 람베르와의 권력 다툼 끝에 섭정 자리를 잃고 람베르와 결혼했다. 람베르가 사망한 후 아들 장 2세가 영주가 되었고, 클로딘은 1515년 사망하기 전까지 상속에 대한 권리를 유언으로 남겼다. 그녀는 최소 6명에서 최대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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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딘 (모나코)
기본 정보
작위모나코 공녀
가문그리말디 가문
아버지카탈란 그리말디
어머니블랑슈 델 카레토
배우자람베르토
자녀장 2세 그리말디
루이 그리말디
비앙카 그리말디
오귀스티노, 그라스 주교
프랑수아즈 그리말디
뤼시앵 그리말디
출생 추정1451년경
사망일1515년 11월 19일
계승모나코 여공
통치 기간1457년 - 1458년
이전카탈란
이후람베르토

2. 생애

클로딘은 카탈란 그리말디의 딸이자 상속자였으나, 아버지 사후 포멜리나 프레고소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약혼자 람베르토 그리말디 디 안티베스와 권력 다툼을 벌였다. 1465년 람베르와 결혼했고, 1483년 람베르는 클로딘에게 상속 관련 동의를 얻었는데, 이는 클로딘의 권리 포기이자 람베르가 그 권리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동의였다.[1]

1494년 람베르 사후 아들 장 2세가 영주가 되었으나, 1505년 동생 뤼시앙에게 살해당했다. 클로딘은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며 뤼시앙에게 항의했다고 한다.[1] 1515년 사망 전 유언으로 여성 상속권을 보장하고 손녀를 상속에 복귀시켰다.[1]

클로딘과 람베르 사이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3]

이름생몰년비고
장 2세1468년 ~ 1505년 10월 11일모나코 영주
루이정신 이상으로 상속 제외
블랑슈 그리말디오노레 1세의 공동 섭정(1532년)
아우구스티노1482년 ~ 1532년 4월 14일그라스 주교
프란체스카? ~ 1523년 이전아들 바르톨로뮤 도리아는 뤼시앙을 살해함.
뤼시앙1487년 ~ 1523년 8월 22일모나코 영주


2. 1. 초기 생애

클로딘은 블랑쉬 델 카레토와 카탈란 그리말디의 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유일한 자녀였고, 그의 상속자였다.

모나코의 계승은 그녀의 아버지인 장 1세에 의해 규정되었는데, 그는 여성 상속인이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성인 그리말디를 유지하고 자녀에게 물려주며, 남편은 아내의 성과 문장을 따라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1]

장 1세는 자신의 유언에서 딸 클로딘이 뒤를 잇도록 명시했으며, (여성 통치자가 왕조의 변화를 초래하지 않도록 하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그녀는 7촌인 람베르토 그리말디 디 안티베스와 결혼하여 그리말디 가문이 모나코의 왕위를 유지하고 왕조의 변화를 피하도록 했다.[1] 그는 또한 어머니 포멜리나 프레고소를 딸이 성년이 될 때까지 모나코의 섭정으로 임명했으며, 포멜리나가 사망할 경우 매형 피에르 프레고소가 딸이 성년이 될 때까지 그녀의 섭정으로 그녀의 뒤를 잇도록 했다.[1]

2. 2. 모나코 여영주 (Lady regnant)

1457년 7월, 클로딘이 6세였을 때 아버지 카탈란이 사망했고, 할머니 포멜리나 프레고소가 아들의 유언에 따라 모나코의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클로딘의 약혼자 람베르는 유언에 반대하며 섭정의 일부를 요구했고, 주민들의 지지를 받았다.[1] 그해 10월 20일, 포멜리나는 람베르와 섭정 권력을 공유하는 성명서에 서명해야 했다.[1] 이후 포멜리나는 피에르 프레고소, 베이유 영주 피에르 그리말디와 협력하여 람베르를 몰아내고 살해하려는 쿠데타를 준비했고, 피에르 그리말디를 클로딘의 장인으로 만들 것을 약속했다.[1]

1458년 3월, 음모가 실행되었지만 람베르는 탈출했다. 멘톤과 로크브룬 주민들의 지지를 받은 그는 포멜리나의 섭정 정부를 폐위시키고, 그녀를 멘톤의 집에 가두었으며, 클로딘의 권리를 가진 섭정이자 주권자로 선포되었다.[1]

2. 3. 모나코 여영주 (Lady consort)

클로딘의 권리는 다소 불분명했다. 람베르는 자신이 모나코의 왕위를 정복했다고 여겼고, 공공의 승인을 받아 클로딘의 권리를 법적으로 차지했으며, 클로딘은 더 이상 자신의 권리로 통치자로 여겨지지 않고 본질적으로 폐위되었다.[1] 클로딘과 람베르의 왕실 결혼은 예정되어 있었지만, 신부의 어린 나이 때문에 연기되었다.

1460년 1월, 포멜리나, 피에르 드 베이유, 텐드 백작(다시 클로딘과 그녀의 왕위 계승권을 중심으로)이 꾸민 음모는 모나코와 람베르의 통치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으나 실패했다.[1]

클로딘과 람베르의 결혼은 1465년 8월 29일 벤티밀리아에서 거행되었다. 클로딘과 람베르의 결혼은 전통적으로 행복한 결혼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녀가 안주인으로서 재임하는 동안 정치에 참여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그러나 1483년 람베르는 자신의 사후 상속 의지를 통치하고 규제하기 위해 클로딘의 동의를 얻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사실상 그녀의 권리 포기이자 람베르가 그 권리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그녀의 동의였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람베르는 반역적인 멘톤 지방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선포할 때 그녀의 이름을 포함시켰으며, 이 지역은 1491년까지 완전히 진압되지 않았다.[1]

2. 4. 말년

람베르트가 1494년에 사망하자 그들의 아들 장 2세가 모나코의 영주가 되었다. 클로딘은 1505년 그의 형제 뤼시앙에게 살해된 장보다 오래 살았으며, 뤼시앙이 그 다음 영주가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클로딘은 다른 아들에 의해 아들이 살해되는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1] 그녀는 장이 죽은 후 공개적으로 슬퍼하며 살해자인 자신의 아들 뤼시앙에게 그의 살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명했다고 전해진다.[1] 아들 장에 대한 헌신은 잘 알려져 있었는데, 특히 그의 옆에 묻히기를 고집했던 점을 보면 알 수 있으며, 뤼시앙이 정당방위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헌신했다.[2]

클로딘은 뤼시앙 통치 시기인 1515년에 사망했다. 그녀는 유언장에서 모나코 영지의 세 지방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유언에 명시된 상속 순서에 따라 자녀에게 넘겨 왕조의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여성 상속을 보장했다. 또한 뤼시앙이 결혼을 강요하여 권리를 포기하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손녀 마리 그리말디(장의 딸)를 상속에 복귀시켰다.[1] 클로딘은 1458년 이후 통치자로 여겨지지 않았으므로, 상속을 규정하는 왕위에 대한 권리에 대한 유언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법적 지위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이다.

3. 자녀

클로딘은 최소 6명에서 최대 14명의 자녀를 두었다.[3]

이름출생-사망비고
장 2세1468년 ~ 1505년 10월 11일
루이정신 이상으로 상속에서 제외됨
블랑슈 그리말디1501년 투레트 남작 오노레 드 빌뇌브 데스피누스와 결혼, 1532년 니콜라 그리말디와 함께 루시앙의 아들 오노레 1세의 공동 섭정.[1]
아우구스티노1482년 ~ 1532년 4월 14일
프란체스카? ~ 1523년 이전도리아 가문의 루크와 결혼. 그녀의 아들 바르톨로뮤 도리아는 형제 루시앙을 살해함.
루시앙1487년 ~ 1523년 8월 22일


참조

[1] 서적 Monaco: Ses Origines et Son Histoire https://archive.org/[...] Imprimerie de Monaco 1897
[2] 서적 The Princes of Monaco Arthur Barker Ltd 1961
[3] 서적 The Princes of Monaco Archives du Palais de Monaco/Arthur Barker Ltd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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