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하인리히 이자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인리히 이자크는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에 활동한 플랑드르 출신의 작곡가이다. 그는 브라반트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으며, 1484년 인스브루크 궁정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이탈리아로 이동하여 피렌체에서 활동하며 로렌초 데 메디치와 교류했고, 1496년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 작곡가가 되어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활동했다. 이자크는 미사곡, 모테트, 세속 노래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미사 고유문을 위한 방대한 연작인 《콘스탄티누스 합창곡》으로 유명하다. 그의 음악은 독일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안톤 베베른이 이자크의 작품에 관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50년대 출생 - 소피아 팔레올로기나
    소피아 팔레올로기나는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공주로, 러시아의 이반 3세와 결혼하여 모스크바 대공비가 되었고, 남편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비잔틴 제국의 문화를 러시아에 도입하고 몽골에 대한 조공을 중단시키는 데 기여했다.
  • 1450년대 출생 -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은 15-16세기 프랑스의 인문주의자, 신학자, 성경 번역가로, 프랑스어 성경 완역본을 출판하고 종교 개혁에 영향을 미쳤다.
  • 1517년 사망 - 김계행
    김계행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강직한 성품으로 왕실의 병폐에 대해 직언을 하였으며 김종직과 교유하며 영남 유림을 이끌었고, 무오사화에 연루되기도 했으나 청백한 삶으로 후대에 청백리의 표상으로 존경받았다.
  • 1517년 사망 - 아라곤의 마리아
    아라곤의 마리아는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딸이자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의 왕비로, 정치적 역할은 크지 않았으나 남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종교를 후원하며 제로니무스 수도원 공동 설립에 기여했다.
하인리히 이자크
기본 정보
이름하인리히 이자크
다른 이름Henricus Isaac
Henricus Ysaac
Arrigo il Tedesco (독일인 아리고)
출생1450년경
사망1517년 3월 26일 피렌체
국적플랑드르 악파
직업
직업작곡가
합창 지휘자
활동 시기
활동 시기르네상스 시대
장르
장르미사
모테트
샹송
독일 가곡
기악곡

2. 생애

하인리히 이자크는 30년이 넘는 활동 기간 동안 고향인 플랑드르를 떠나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중앙 유럽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활동했다. 그의 삶은 자세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기존 자료와 작품들을 통해 당시 그의 높은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자크는 1484년 인스브루크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 공작의 가수로 활동했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1485년 피렌체로 이주하여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과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의 가수로 활동하며 로렌초 데 메디치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496년에는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 작곡가로 임명되어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1502년 이탈리아로 돌아온 이자크는 페라라의 에스테가 궁정에서 조스캥과 경쟁하기도 했다. 이후 아우크스부르크, 피렌체, 콘스탄츠 등지에서 활동하며 대표작인 "콘스탄티누스 합창곡집(Choralis Constantinus)"을 편찬했다. 1512년 피렌체에 정착한 이자크는 1517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면서 교황 레오 10세의 방문을 받는 등 명성을 이어갔다.

2. 1. 초기 생애 ( ~ 1484)

이자크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브라반트 공국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15세기 후반 당시 이 지역의 음악 교육 수준은 뛰어났으며, 그는 아마도 고향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다만 정확한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1][2]

16세기 스위스 음악 이론가이자 작가인 하인리히 글라레안은 이자크를 "헨리쿠스 이자크 게르마누스(Henricus Isaac Germanus)"라고 부르며 독일 출신으로 칭했지만, 이자크는 자신의 유언장에서 "우고니스 드 플랑드리아(Ugonis de Flandria)", 즉 '플랑드르 출신 우고의 아들'이라는 부계명을 사용했다. 1886년 6월 밀라노의 ''레비스타 크리티카 델라 리테라투라 이탈리아나(Revista critica della letteratura italiana)''의 한 필자는 이 부계명이 '휘헌스(Huygens)'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브뤼헤 시립 기록 보관소에서 "아이작케(Isaacke)"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이자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84년으로, 그해 그는 인스브루크의 궁정 작곡가였다.

2. 2. 이탈리아에서의 활동 (1484 ~ 1496)

이자크는 1485년 7월 이탈리아 피렌체로 이주하여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가수가 되었고, 1491년 중반에는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의 가수가 되어 1493년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3] 여러 문서는 이자크가 이 두 성당에서 오랫동안 가수로 활동하며 로렌초 데 메디치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1484년 인스브루크에서 피렌체로 이자크를 불러들인 사람이 메디치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4]

1484년부터 1496년 말까지 피렌체에서 활동하는 동안 이자크는 미사곡 "J'ay pris amours"와 사육제 노래 "Hora è di Maggio"를 포함하여 여러 미사곡, 모테트, 세속적인 노래를 작곡했을 가능성이 높다. 1487년에는 사르차넬로 성을 놓고 제노아와 피렌체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A la battaglia"를 작곡했지만, 이 작품의 정확한 날짜와 목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5] 1488년에서 1489년 사이에는 메디치 자신이 쓴 희곡 "산 조반니 에 산 파올로"의 음악을 작곡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492년 4월 로렌초가 사망하자 이자크는 그의 추모곡으로 두 개의 모테트를 작곡했다.

1492년 9월,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대관식을 위해 음악가들을 로마로 데려갔다. 기록에 따르면 이자크는 여행을 위해 옷을 지급받은 세 명의 가수 중 한 명이었고, 따라서 교황 앞에서 공연했을 가능성이 높다.[6]

피렌체에 처음 머물 당시 이자크는 피에로 벨로라는 피렌체 사람과도 관계를 맺었는데, 그의 딸 바르톨로메아가 이자크의 아내였다. 1495년 1월 피에로 벨로가 이자크에게 딸의 지참금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2. 3. 막시밀리안 1세 궁정 작곡가 시절 (1496 ~ 1512)

1496년 11월, 이자크와 그의 아내 바르톨로메아는 피사를 떠나 비엔나로 가서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에서 일하게 되었다.[3] 그해 겨울, 이자크 부부는 피사에서 비엔나를 거쳐 인스브루크로 이동했고, 1497년 4월 3일 이자크는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 작곡가로 임명되었다.[3] 이자크는 죽을 때까지 막시밀리안 1세를 섬겼지만,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유럽 전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막시밀리안 궁정의 지불 문서에 따르면, 이자크는 1497년부터 1501년 사이에 궁정과 함께 토르가우, 아우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벨스를 거쳐 인스브루크로 돌아왔다.

1502년, 이자크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과 거래를 했다. 그는 건강과 식량 지원을 받는 대가로 병원에 지불을 했다. 최근 발견된 문서는 이자크가 상호 지원을 위해 산타 바르바라 수도회에 매년 기부를 시작했다는 증거를 제공한다.[7] 같은 해 8월 15일, 이자크는 첫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여기에는 그의 고용주들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어 그가 아내와 재산을 돌볼 만큼 충분한 수입을 얻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페라라의 에스테가 궁정으로 가서 단 이틀 만에 모테트 "La mi la sol la sol la mi"를 작곡했고, 조스캥과 일자리 경쟁을 벌였다. 에스테 가문의 대리인이 보낸 유명한 편지에는 두 작곡가를 비교하며 "이자크는 동료들 사이에서 더 좋은 성품을 지녔고, 더 자주 새로운 작품을 작곡할 것이다. 조스캥이 더 잘 작곡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자신이 원할 때 작곡을 하고, 다른 사람이 원할 때 작곡하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다.[8]

1505년부터 1512년 사이에 이자크가 아우크스부르크, 피렌체, 콘스탄츠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콘스탄츠에서는 그의 가장 큰 작품집인 "콘스탄티누스 합창곡집(Choralis Constantinus)"을 편찬했다. 이 방대한 미사곡집은 1508년 4월 14일 콘스탄츠 대성당에서 위촉되었고, 이자크와 그의 제자인 루트비히 젠플에 의해 1509년 겨울에 완성되었다.[3] "콘스탄티누스 합창곡집"이 대성당으로 보내져야 했기 때문에, 이자크와 바르톨로메아는 이 무렵 거의 확실히 피렌체로 돌아왔다.

2. 4. 콘스탄티누스 합창곡집과 만년 (1508 ~ 1517)

이자크는 1497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를 섬겼고, 황제를 따라 독일 각지를 순방하며 당시 독일 작곡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1514년에 피렌체로 돌아와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자크는 미사 통상문에 의해서도 40곡 정도를 남겼다. 《콘스탄티누스 합창곡집(Choralis Constantinus)》은 미완성으로 남겼는데, 이는 미사 통상문 전년도를 완전히 작곡(다성화)한 최초의 시도로 알려져 있으며 약 100곡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집은 이자크의 제자 루트비히 젠플이 완성했지만, 그의 사후인 1555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3. 작품

이자크는 당대 가장 다작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미사곡, 모테트,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노래뿐만 아니라 기악곡 등 당시 유행하던 거의 모든 형식과 스타일의 음악을 작곡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인스브루크, 나는 너를 떠나야 한다〉인데, 이 곡은 최소 두 가지 버전으로 편곡되었다. 하지만 이 곡의 멜로디는 이자크가 직접 작곡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곡을 편곡한 것으로 추정된다.[11] 이 멜로디는 훗날 루터교 찬송가 〈오 세상아, 나는 너를 떠나야 한다〉의 주제로 사용되었으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마태 수난곡[12][13]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자크는 미사 통상문 설정을 36개 남겼으며, 그 외 많은 곡들은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미사 고유문을 위한 방대한 양의 모테트 연작인 《콘스탄티누스 합창곡》을 남겼는데, 이는 1년 중 100일 동안의 음악을 제공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이 작품은 이자크가 1508년 독일 콘스탄츠 대성당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막시밀리안 1세와 이자크 사후 그의 제자 루트비히 젠플에 의해 완성되어 1555년에 출판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모테트로는 만성절을 위해 작곡한 6성부 모테트 《안젤리 아르칸젤리》[14]와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레오 10세의 즉위를 기념하여 작곡한 《옵티메 파스토르》[15]가 있다. 또한,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를 위해 봉사하던 중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죽음을 애도하며 《키스 다비트 카피티 메오 아쿠암》(1492)을 작곡하기도 했다.

3. 1. 미사곡

이자크는 당대 가장 다작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당대 유행하던 거의 모든 형식과 스타일을 포함한 엄청나게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16세기 말의 라수스만이 그보다 더 넓은 전반적인 범위를 가지고 있었다.[10] 이자크가 작곡한 음악에는 미사, 모테트,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노래뿐만 아니라 기악곡도 포함된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인스브루크, 나는 너를 떠나야 한다"라는 노래일 수 있으며, 그는 적어도 두 가지 버전을 만들었다. 그러나 멜로디 자체가 이자크의 작품이 아니고 설정만이 독창적인 것일 가능성이 있다.[11] 같은 멜로디는 나중에 루터교 찬송가 "오 세상아, 나는 너를 떠나야 한다"의 주제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작품, 그의 ''마태 수난곡''[12][13]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미사 통상문 설정 중 36개가 남아 있으며, 다른 것들은 분실된 것으로 여겨진다. 수많은 미사의 개별 악장들도 남아 있다.

3. 2. 모테트

이자크는 당시 가장 다작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당시 유행하던 거의 모든 형식과 스타일을 포함한 엄청나게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16세기 말의 라수스만이 그보다 더 넓은 전반적인 범위를 가지고 있었다.[10] 이자크가 작곡한 음악에는 모테트 외에도 미사곡,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노래뿐만 아니라 기악곡도 포함된다.

그의 미사 통상문 설정 중 36개가 남아 있으며, 다른 것들은 분실된 것으로 여겨진다. 수많은 미사의 개별 악장들도 남아 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큰 명성을 안겨준 것은 미사 고유문을 위한 음악 작곡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미완성으로 남긴 미사 고유문을 위한 모테트의 방대한 연작인 ''콘스탄티누스 합창곡''은 1년 중 100일 동안의 음악을 제공했을 것이다.

이자크는 그의 ''콘스탄티누스 합창곡''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것은 미사 고유문을 위한 450개 이상의 성가 기반 다성 모테트의 방대한 선집이다. 이것은 이자크가 1508년 4월 독일 콘스탄츠 대성당으로부터 지역 전례에 고유한 많은 고유문을 설정하라는 의뢰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이자크는 막시밀리안이 라이히스타크(귀족들의 독일 의회)를 소집했기 때문에 콘스탄츠에 있었고, 황실 궁정 합창단을 위해 음악을 제공했다. 막시밀리안과 이자크가 모두 사망한 후, 황실 궁정 합창단의 일원으로 이자크의 제자였던 루트비히 젠플은 고유문의 모든 이자크 설정을 모아 교회력에 따라 배열했다. 그러나 이 선집은 젠플 사후인 1555년까지 출판되지 않았고, 그때까지 트렌토 공의회의 개혁으로 많은 텍스트가 쓸모없게 되었다. 이 모테트들은 기존의 성가 기반 르네상스 다성음악의 가장 훌륭한 예 중 일부이다.

이자크는 만성절을 위해 천사, 대천사, 그리고 다른 모든 성인들을 기리는 6성부 모테트 ''안젤리 아르칸젤리''를 작곡했다.[14] 이자크의 또 다른 유명한 모테트는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레오 10세의 교황 즉위를 위해 작곡된 ''옵티메 파스토르''(''옵티메 디비노'')이다.[15] 이 모테트는 교황을 그의 모든 무리를 달래고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목자에 비유한다.

메디치 가의 봉사 중 피렌체에서 이자크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죽음에 대한 애가 ''키스 다비트 카피티 메오 아쿠암''(1492)을 작곡했는데, 이는 로렌초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작품에 음악을 붙인 것이다.

3. 3. 세속 노래

이자크는 당대 유행하던 거의 모든 형식과 스타일을 포함한 매우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16세기 말 라수스만이 그보다 더 넓은 전반적인 범위를 가지고 있었다.[10] 이자크는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노래뿐만 아니라 기악곡도 작곡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인스브루크, 나는 너를 떠나야 한다"일 수 있으며, 그는 적어도 두 가지 버전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멜로디 자체는 이자크의 작품이 아니고, 설정만이 독창적인 것일 가능성이 있다.[11] 이 멜로디는 나중에 루터교 찬송가 "오 세상아, 나는 너를 떠나야 한다"의 주제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작품, 그의 ''마태 수난곡''[12][13]요하네스 브람스 작품의 기초가 되었다.

3. 4. 기악곡

이자크는 당시에 유행하던 거의 모든 형식과 스타일을 포함한 매우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미사, 모테트,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노래뿐만 아니라 기악곡도 작곡했다.[10]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인스브루크, 나는 너를 떠나야 한다"라는 노래일 수 있으며, 그는 적어도 두 가지 버전을 만들었다. 그러나 멜로디 자체는 이자크의 작품이 아니고 설정만이 독창적인 것일 가능성이 있다.[11]

4. 영향

하인리히 이자크는 합스부르크 궁정과의 관계 덕분에 독일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다. 그는 독일어권 지역에서 활동하며 그의 음악을 널리 알린 최초의 중요한 프랑코-플랑드르 다성 음악의 거장이었다. 이자크를 통해 네덜란드의 다성 양식이 독일에 널리 퍼졌고, 이는 독일에서 대위법 음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안톤 베베른은 과이도 아들러 교수에게서 이자크의 《코랄리스 콘스탄티누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5. 평가

이자크는 미사곡, 모테트, 독일어 가곡, 이탈리아어 가곡, 기악곡 등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음악 작품들을 남겼다. 당대 가장 다작한 작곡가 중 한 명이었지만, 오랫동안 요스캥 데 프레에 대한 호평에 가려져 왔다 (참고로 안톤 베베른은 이자크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마도 독일 리트 《인스브루크여, 나 떠나야 하네(Innsbruck, ich muß dich lassen)》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곡의 선율 자체는 이자크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민요의) 편곡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선율은 후에 루터파의 코랄 《오 세상아, 나는 너를 떠나야 하네(O Welt, ich muß dich lassen)》에도 사용되었고, 바흐 작품과 브람스오르간곡의 기초가 되었다.

이자크는 《콘스탄티누스 성가집(Choralis Constantinus)》을 미완성으로 남겼다. 이것은 미사 통상문 전년도를 완전히 작곡(다성화)한 최초의 시도로 알려져 있으며, 약 100곡이 포함되어 있다. 이자크의 제자 루트비히 젠플이 이 작품집을 완성했지만, 그의 사후인 1555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이자크는 미사 통상문에 의해서도 40곡 정도를 남겼다.

6. 미디어



참조

[1] 서적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 Stanley Sadie 2001-12-00
[2] 서적 Isaac in Flanders: The Early Works of Henricus Isaac
[3] 서적 Picker, Henricus Isaac
[4] 웹사이트 Strohm, Grove online
[5] 서적 Wilson, Heinrich Isaac Among the Florentines
[6] 서적 Staehelin, Die Messen Heinrich Isaacs
[7] 논문 Master Arigo Ysach, Our Brother The Oxford University Press 2008-06-00
[8] 서적 Josquin at Ferrara: New Documents and Letters
[9] 편지 Letter from Baldassare Turini in Rome to Lorenzo de' Medici in Florence 1514-05-12
[10] 웹사이트 Low Countries, I.1: Art music, Netherlands to 1600 1980-00-00
[11] 웹사이트 Heinrich Isaac
[12] 서적 Die Kantaten von Johann Sebastian Bach Bärenreiter-Verlag
[13] 웹사이트 Chorale Melodies used in Bach's Vocal Works / O Welt, ich muss dich lassen http://www.bach-cant[...] bach-cantatas.com 2012-01-09
[14] 논문 Angels, Archangels, and a Woman in Distress: The Meaning of Isaac’s Angeli archangeli 2004-09-00
[15] 웹사이트 Medici
[16]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2-12
[17] 편지 Letter from Baldassare Turini in Rome to Lorenzo de’ Medici in Florence 1514-05-12
[18] 서적 Staehelin, Die Messen Heinrich Isaac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