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도 타발레스
1. 개요
페르난도 타발레스는 스페인의 축구 선수로, 골키퍼로 활약했다. 1939년 아비아시온 나시오날에 입단하여 중부 선수권 대회 우승을 거두었으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팀이 개편된 후 1939-40, 1940-41 시즌 라 리가 우승을 이끌었다. 1939-40 시즌에는 트로페오 리카르도 사모라를 수상했으며, 알바세테, UD 살라망카, RCD 에스파뇰을 거쳐 UE 산트 안드레우에서 선수 경력을 마쳤다.
| 본명 | 페르난도 타발레스 프리에토 |
|---|---|
| 로마자 표기 | Fernando Tabales |
| 출생일 | 1914년 9월 24일 |
| 출생지 | 세비야 |
| 사망일 | 1983년 5월 29일 |
| 포지션 | GK (은퇴) |
|---|
| 유소년 클럽 1 | 에스파르타 세비야 |
|---|
| 연도 1 | 1932-1933 |
|---|---|
| 클럽 1 | 코르도바 |
| 연도 2 | 1933-1936 |
| 클럽 2 | 그라나다 |
| 출장 2 | 16 |
| 득점 2 | 0 |
| 연도 3 | 1936-1937 |
| 클럽 3 | 베티스 |
| 연도 4 | 1938-1939 |
| 클럽 4 | 아비아시온 나시오날 |
| 연도 5 | 1939-1944 |
| 클럽 5 |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 |
| 출장 5 | 79 |
| 득점 5 | 0 |
| 연도 6 | 1944-1945 |
| 클럽 6 | 알바세테 |
| 연도 7 | 1945 |
| 클럽 7 | 살라망카 |
| 출장 7 | 7 |
| 득점 7 | 0 |
| 연도 8 | 1945-1946 |
| 클럽 8 | 에스파뇰 |
| 출장 8 | 2 |
| 득점 8 | 0 |
| 연도 9 | 1946-1947 |
| 클럽 9 | 바이스 |
| 연도 10 | 1947-1950 |
| 클럽 10 | 산트 안드레우 |
| 연도 11 | 1950-1951 |
| 클럽 11 | 산토보이아 |
| 연도 12 | 1951-1952 |
| 클럽 12 | CF 마르토레이 |
| 통산 출장 | 104 |
|---|---|
| 통산 득점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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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 산트 안드레우의 축구 선수 -
페르난도 세레나
페르난도 세레나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하며 4번의 라리가 우승과 유러피언컵 우승을 경험하고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했으며, 스페인 국가대표팀으로 한 경기에 출전한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이다. -
UE 산트 안드레우의 축구 선수 -
일데폰스 리마
일데폰스 리마는 안도라의 축구 선수로서 센터백으로 활약하며 안도라 축구 국가대표팀 A매치 최다 출전 기록과 남자 축구 역사상 최장 국가대표 경력을 보유하고 있고, FC 안도라를 포함한 여러 유럽 클럽과 FC 산타 콜로마, 인테르 클럽 데스칼데스에서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
스페인의 남자 축구 선수 -
마누엘 사가르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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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남자 축구 선수 -
마누엘 프라스트
마누엘 프라스트는 스페인 축구 선수로서 레알 마드리드 CF의 초창기 주요 선수였으며, 은퇴 후에는 중앙 지역 연맹의 심판 위원회 초대 회장을 맡아 스페인 축구 심판 제도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
1919년 출생 -
에드먼드 힐러리
에드먼드 힐러리는 1953년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등정하고, 남극과 북극을 모두 정복했으며, 히말라야 지역 셰르파족을 위한 자선 활동에도 헌신한 뉴질랜드의 등반가, 탐험가, 자선가이다. -
1919년 출생 -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의 제15대 총리인 피에르 트뤼도는 자유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을 거쳐 법무장관을 역임하며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고, 총리 재임 시절에는 외교 정책을 펼치고 헌법 개정을 통해 캐나다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했으며, 그의 장남 쥐스탱 트뤼도 또한 캐나다의 총리를 역임했다.
2. 경력
페르난도 타발레스는 스페인 내전 종전 후 프로 무대에 입문했다. 1939년 아비아시온 나시오날에 입단하여 중부 선수권 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 참가했다. 이후 아틀레틱 마드리드와 통합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리카르도 사모라 감독의 신뢰를 받으며 라리가 1939-40 우승에 기여했다. 계약 문제로 잠시 팀을 떠났으나 1940-41 시즌 중 복귀하여 다시 한번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1943-44 시즌까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활약한 후 알바세테, 살라망카, 에스파뇰을 거쳐 산트 안드레우에서 은퇴했다.
2.1. 클럽 경력
타발레스는 스페인 내전 종전 후에 프로 무대에 입문했다. 1939년, 그는 20세의 나이로 아비아시온 나시오날에 입단하여 중부 선수권 대회 우승을 거두었다. 그에 따라 소속 구단은 종전 이후 스페인에서 열린 첫 대회이자 나중에 코파 델 레이로 개칭되는 대회의 제35회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타발레스는 베티스와의 16강 1차전에 출전했는데, 이 경기에서 안달루시아 연고 구단에 패하였다.
몇 달 후, 아비아시온 나시오날은 아틀레틱 마드리드와 통합되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개편되었고, 타발레스는 라리가 1939-40에 참가했다.
새 구단의 감독은 전설적인 전 수문장 리카르도 사모라로, 타발레스를 신뢰한 그는 노련한 기예르모를 대신해 그를 기용했다. 사모라의 선택은 적중했는데, 타발레스는 최소 실점율을 기록하며 소속 구단의 우승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시즌 후 타발레스는 항명으로 계약 연장에 실패했는데, 은퇴 협박을 받은 그는 고향 세비야로 떠났다. 결국 수뇌부는 백기를 들고 1940-41 시즌이 진행되는 가운데 복귀했다. 같은 해,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은 구단 역사상 두 번째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타발레스는 적백 군단 소속으로 1943-44 시즌까지 2년을 더 보냈는데, 그의 다음 행선지는 알바세테였다. 말년에 그는 살라망카를 거쳐 또다른 1부 리그 구단인 에스파뇰 소속으로 1945-46 시즌을 보냈다. 그는 산트 안드레우에서 은퇴하였다.
3. 수상
페르난도 타발레스스페인어는 라리가 1939-40 시즌에 트로페오 리카르도 사모라를 수상하였다.
3.2. 개인
페르난도 타발레스스페인어는 라리가 1939-40 시즌에 트로페오 리카르도 사모라를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