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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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내전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스페인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심화된 정치적 혼란과 지역 자치 운동의 영향으로 발생했다. 좌파와 우파의 이념 대립 속에서, 1936년 총선에서 좌파 연합인 인민전선이 승리하자,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며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공화파는 소련, 멕시코, 국제 여단 등의 지원을 받았고, 프랑코파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았다. 국제 연맹의 불간섭 조약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랑코파를, 소련은 공화파를 지원하며 유럽의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켰다. 내전은 프랑코파의 승리로 끝났으며, 5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고,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독재 정치를 이어갔다. 스페인 내전은 이후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조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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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스페인 총선거는 좌파 연합인 인민 전선이 근소하게 승리했으나 선거 과정의 논란과 함께 스페인 내전의 원인이 되었다.
스페인 내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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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지도 | |
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스페인 내전 |
다른 명칭 | 스페인 내란 스페인 내란 스페인 공민 전쟁 |
일부 명칭 | 십자군 혁명 제4차 카를 전쟁 반란 봉기 |
기간 | 1936년 7월 17일 ~ 1939년 4월 1일 (2년 8개월 2주 2일) |
장소 | 스페인 스페인령 모로코 서사하라 기니 포르투갈 발레아레스 제도 지중해 북해 |
결과 | |
결과 | 국민파의 승리 |
결과 상세 | 스페인 제2공화국의 멸망 스페인국 수립 전후 프랑코주의 대량 학살 및 탄압 스페인 마키스가 1965년까지 간헐적으로 비정규전 지속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인민군 인민전선 UGT CNT-FAI POUM 카탈루냐 자치정부 EG}} 국제여단}} 외국인 자원 봉사자 |
교전 세력 2 | FET y de las JONS}} FE de las JONS}} 레케테/CT CEDA Spanish Renovation}} 아프리카군 |
지휘관 | |
지휘관 1 | 마누엘 아사냐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후안 네그린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비센테 로호 유치 호세 미아하 토리비오 마르티네스 카브레라 세기스문도 카사도 후안 모데스토 후안 에르난데스 사라비아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호아킨 아스카소 류이스 콤파니스 호세 안토니오 아기레 |
지휘관 2 | 호세 산후르호 에밀리오 몰라 프란시스코 프랑코 곤살로 케이포 데 리야노}} 후안 야궤 미겔 카바네야스 호세 엔리케 바렐라 피델 다빌라 아론도 마누엘 고데드 요피스 마누엘 헤딜라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오네시모 레돈도 마누엘 팔 콘데 마리오 로아타 에토레 바스티코 휴고 슈페를레 |
병력 규모 | |
병력 규모 1936 (공화파) | 446,800 전투원 31척의 함선 12척의 잠수함 13,000명의 선원 |
병력 규모 1938 (공화파) | 450,000명의 보병 350대의 항공기 200대의 탱크 |
추가 병력 (공화파) | 59,380명의 국제 자원 봉사자 3,015명의 소련 기술자 772명의 소련 조종사 |
병력 규모 1936 (국민파) | 58,000명의 군인 68,500명의 헌병 16척의 운용 함선 7,000명의 선원 |
병력 규모 1938 (국민파) | 600,000명의 보병 600대의 항공기 290대의 탱크 |
추가 병력 (국민파) | 70,000–75,000명의 이탈리아 자원 봉사자 16,000명의 독일 자원 봉사자 ~10,000명의 포르투갈 자원 봉사자 |
사상자 | |
사상자 1 (공화파) | 110,000명 전사 (처형 포함) 국민파 지역 내 민간인 100,000–200,000명 사망 |
사상자 2 (국민파) | 90,000명 전사 공화파 지역 내 민간인 50,000–72,000명 사망 |
사상자 3 (총계) | 추정치가 크게 다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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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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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스페인에서는 우파와 좌파의 대립이 첨예화된 데다 카탈루냐와 바스크 등의 지역 자치 운동까지 더해져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 때문에 한때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사 독재 정권이 수립되기도 했다.
1931년 좌파가 선거에서 승리하여 왕정에서 공화제로 이행('''스페인 혁명''')하고 스페인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다른 서구 국가들과 달리 스페인의 사회노동당과 좌파 공화주의자들은 폭력혁명을 지향하였고, 가톨릭 교회 시설 파괴와 약탈이 좌파 지도자들의 사주 또는 묵인하에 자행되었기 때문에 좌파의 정권 운영은 혼란을 거듭했다. 많은 국민들이 좌파 정권에 실망하는 가운데 1933년에 실시된 총선거에서는 스페인 자치 우파 연합(CEDA)이 제1당이 되었다. 알칼라 사모라 대통령이 CEDA 당수 힐 로브레스를 싫어했기 때문에 좌파에서 이탈한 중도파인 급진당의 알레한드로 레루가 CEDA의 협력을 얻어 수상에 취임했다. 중도우파 정권이 탄생하자 각지에서 좌파 세력의 폭력 사건이 빈발했고, 1934년에는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이 폭동 진압은 온건했지만, 중도우파 정권은 국내 좌파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비난을 받았다. 1935년, 레루 수상은 부정부패 스캔들로 사퇴하게 되었고, 급진당이 붕괴 상태에 이르자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고, 1936년 2월 총선거가 실시될 것이 결정되었다.[155]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인민전선 전술이 채택되자 좌파 세력의 결속이 강화되었고, 1936년 총선거에서 기존 모든 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기권을 호소했던 무정부주의자들이 자주 투표로 전환했다. 그 결과 다시 좌파가 승리(좌파 200석, 우파 177석, 무소속 5석)했다. 승리한 좌파 지지자들은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기 때문에 2월 17일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156]
마누엘 아사냐(좌익 공화당)를 대통령으로, 를 수상으로 하는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인민전선도 크게 의회주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온건파와 사회주의·무정부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강경파가 존재하여 처음부터 결코 하나로 뭉쳐 있지 않았다.
7월 12일, 공화파 군인으로 유명했던 의 중위가 4명의 파랑히스트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과르디아 시빌의 대위가 이끄는 카스티요의 동지들은 보복으로 이듬날 7월 13일 스페인 보수파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이었던 를 암살했다. 소테로 암살은 경찰에 의한 조직적 범죄라는 점에서 유럽 의회주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157]
키로가 정권은 암살에 대해 비난 성명을 발표했고, 아사냐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내 온건파는 암살이 반란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소테로 암살로 인해 “이제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일으키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그 위기감을 바탕으로 이미 반란을 준비해왔던 우파는 빠르게 결속했다. 한편, 인민전선 내 사회노동당 좌파와 공산당 등은 민병 동원에 나서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파업의 빈발과 지방 의회 타도 등, 혁명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7월 17일, 준장을 주모자로 하여 모로코의 멜리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요주의 인물로 카나리아 제도로 좌천되었던 프랑코 등이 이에 호응하여 7월 19일 멜리야에 혁명 본부를 설치하자, 모로코를 거점으로 스페인 본토로 진격했다.[158] 반란이 일어나자 적색 테러의 위협에 직면한 가톨릭 교회, 지주, 자본가, 군부, 외교관, 과르디아 시빌 내 우파 등 우파 세력은 이를 지지하여 스페인 전역을 휩싸는 내전으로 돌입했다. 정권 측에 남은 것은 공화제 지지자와 좌파 정당, 블루칼라 노동자, 바스크와 카탈루냐 등 자치를 요구하는 세력들이었다.
아사냐는 우파를 달래기 위해 키로가 내각을 총사퇴시키고, 7월 18일, 온건파인 공화통일당의 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바리오는 몰라에게 육군장관 자리를 제안하여 회유하려 했지만, 그는 “당신과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반란군 민병대에게) 말하면 내가 제일 먼저 죽임을 당할 것이다. 마드리드의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둘 다 이미 대중을 제어할 수 없다.”라며 단호히 거부했다. 한편, 인민전선 내 좌파는 반란군과 협상한 바리오를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민중은 퇴진 데모를 일으켰고, 선동가들은 바리오를 죽이자고 선동했다. 결과적으로 바리오 내각은 불과 이틀 만에 총사퇴하게 되었고, 7월 19일, 철저 항전을 내건 내각(좌익 공화당)이 구성되었다. 또한, 히랄 내각은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지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느 세력도 하나로 뭉쳐 있지 않았고, 군부에서는 육군의 대부분이 반란 측에 가담했고, 해군과 공군은 대부분 인민전선 측에 가담했지만, 지리적·신념적 이유로 반대 세력에 가담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프랑코 일가도 프랑코와 그의 형제에 대해 사촌은 인민전선 측에 가담했다. 군부는 수적으로는 똑같이 나뉘었지만, 주력은 반란군 측에 가담했기 때문에 인민전선 측의 군사력은 처음부터 열세였다.
7월 24일, 스페인 정부는 프랑스에 특사를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했지만 긍정적인 답변을 얻지 못했다. 같은 날, 주영국 대사가 영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159]
2. 1. 군주제, 공화국, 독재
레콘키스타와 스페인 종교재판으로 대표되는 스페인의 중세는 강력한 왕정과 특권화된 로마 가톨릭교회를 탄생시켰다. 718년부터 1492년까지 774년에 걸쳐 진행된 레콘키스타[174] 이후, 스페인 왕국은 스스로를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라 자처하며 종교재판을 관할하는 특혜를 얻었다. 1834년 이사벨 2세가 중지할 때까지 스페인 종교 재판은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였다.[175]스페인 제국은 오랜 전쟁과 종교 재판으로 봉건 군국주의적인 성격을 띄었다. 18세기 후반 스페인의 인구는 1,400만명에서 700만 명으로 감소하였다. 20세기 초반에도 로마 가톨릭교회가 토지의 대부분을 독식하는 경제구조로 빈부 격차가 극심했다.[176] 카스티야 - 아라곤 연합왕국에 반발하는 지역주의[177]는 왕정 종식 요구로 이어졌고, 1873년 스페인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176]
스페인 제1공화국은 연방제를 표방하였으나, 각 지역의 분리 독립 운동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쿠바에서 무장 독립 투쟁이 발생하자 스페인 연방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였고, 군부가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1874년 1월 2일, 마드리드의 군사 총독 파비아 장군은 의회를 해산시켜 스페인 제1공화국은 군부 독재로 변질되었다.[178]
1868년, 민중 봉기로 이사벨라 2세 여왕이 이끄는 부르봉 왕가가 실각했다. 도시 폭동과 후안 프림 장군이 이끈 중산층 및 군부 내부의 자유주의 운동이 봉기의 원인이었다. 1873년, 사보이아 왕가 출신 아마데오 1세 국왕이 퇴위하고 스페인 제1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1874년 12월 아르세니오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그 후 알폰소 1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스페인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2. 2. 공산주의 운동
스페인 제1공화국의 집권 여당이었던 사회당은 바쿠닌에서 비롯한 아나키즘에 경도되어 있었다. 공화국이 해체된 이후에도 스페인의 주요 산업도시에 형성된 노동조합은 아나키즘의 영향아래에 있었다. 한편 1897년 마르크스주의를 강령으로하는 스페인 사회노동당이 결성되었다. 이후 러시아 혁명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도 증대하였다.[179]2. 3. 왕정 복고와 계급 갈등
1874년 12월 19일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이 이사벨 2세를 지지하던 각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알폰소 12세를 국왕으로 추대하여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178] 알폰소 12세는 1876년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제를 표방하였다.[180]왕정복고 이후에도 스페인의 내정은 계급간의 극심한 갈등과 상호 보복이 계속되었다. 극좌파들은 당시 스페인 사회의 주요 기득권층 가운데 하나였던 로마 가톨릭을 타도 대상인 지배계급으로 보아 교회를 파괴하였다. 경찰들은 노동자의 파업 투쟁을 무자비한 진압으로 봉쇄하고 가담자들을 고문하였다. 극좌파의 교회 공격은 점점 거칠어져 1909년 7월 알레한드로 레룩스를 지지하는 노동자 중의 일부가 교회를 불태우고 로마 가톨릭교회 수녀의 시신을 파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지배계급들의 보복 역시 가혹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수백명을 체포하였고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처형시켰다.[181]
복고 이후, 카를리스트(Carlist)들과 아나키스트들이 군주제에 반대하며 등장했다.[12] 스페인 정치인이자 급진 공화당(Radical Republican Party) 지도자였던 알레한드로 레룩스는 스페인의 독특한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을 가진 카탈루냐(Catalonia)에서 공화주의를 부각시키는 데 기여했는데, 당시 카탈루냐는 특히 빈곤이 심각한 지역이었다. 징병제는 스페인 정부가 시행한 논란이 많은 정책이었다. 1909년 비극의 주간(Tragic Week)에서 알 수 있듯이, 반감과 저항은 20세기까지도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스페인은 중립을 지켰다. 전쟁 후, 무장 세력을 포함한 스페인 사회의 광범위한 부분이 마드리드(Madrid)에 있는 부패한 중앙 정부를 제거하려는 희망으로 단결했지만, 결국 이러한 시도는 실패했다. 이 기간 동안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주요 위협으로 크게 증가했다.
2. 4. 파업 투쟁
알폰소 13세는 16세가 된 1902년,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모후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는 "착한 정치가"였으나 스페인 내부의 극심한 갈등을 해결할 능력은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스페인은 중립을 지킴으로서 막대한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벌어들인 부의 대부분은 소수의 지배계급에 집중되었다. 이로 인한 갈등은 결국 1917년의 총파업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아나르코생디칼리슴을 내건 전국노동총연맹과 마르크스주의를 내건 노동자총연맹이 주도한 이 파업투쟁은 군대의 진압으로 막을 내렸으며, 이 과정에서 노동자 수백명이 학살되었다.[182]2. 5. 군부 독재
1923년 리베라 장군은 극심한 사회 혼란을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다.[183] 지주, 교회, 부르조아와 같은 기득권층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리베라는 스스로 총리가 되어 군부 독재를 시작하였다.[183] 그러나 1929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으로 경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어 1930년 스스로 사임하였다.[183] 그의 뒤를 이은 다마소 베렌게르 장군과 후안 바우티스타 아스나르-카바냐스 제독은 칙령 통치 정책을 계속했다.주요 도시에서 왕정에 대한 지지가 거의 없자, 알폰소 13세 국왕은 여론에 굴복하여 1931년 4월 12일 지방 자치 선거를 실시했다. 좌파 세력인 사회당과 자유주의 공화당이 거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승리했고, 아스나르 정부의 사임 후 알폰소 13세는 스페인을 떠났다. 이때 스페인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이 공화국은 5년 후 내전이 시작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2. 6. 제2공화국
1930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가 사임한 이후, 스페인은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다. 왕당파와 군부는 반목하고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했다.[184] 군부 쿠데타와 노동조합 총파업이 예고된 가운데, 1931년 알폰소 13세는 총선을 약속했다. 4월 12일 총선에서 공화파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자, 4월 14일 알폰소 13세는 망명했다.[184]공화주의자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같은 좌파뿐만 아니라 온건 가톨릭교도 등 다양한 집단을 포함했다. 이들의 공통 목표는 스페인에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온건 가톨릭교도이자 부르주아였던 니세토 알칼라사모라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마누엘 아사냐 등 사회주의자들이 정부에 참여했다. 제2공화국 헌법은 지방자치, 평화주의, 교회와 국가의 분리, 여성 참정권 명시 등을 담고 있었다.[185] 니세토 알칼라 사모라(Niceto Alcalá-Zamora)가 이끄는 혁명위원회가 알칼라 사모라 자신을 대통령 겸 국가원수로 하는 임시정부가 되었다. 공화국은 사회 전반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1931년 5월, 마드리드(Madrid)와 스페인 남서부 지역에서 반교권 폭력이 발생했다. 정부의 느린 대응은 우익 세력을 실망시켰고, 제2공화국(Second Spanish Republic)이 교회를 박해하려 한다는 그들의 견해를 강화했다. 6월과 7월, 전국노동연맹(CNT)은 여러 차례 파업을 일으켰고, 이는 CNT 회원들과 민병대 간의 폭력 사태로 이어졌다. 민병대와 스페인군은 세비야에서 CNT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은 제2공화국이 군주제만큼이나 억압적이라고 믿게 되었고, CNT는 혁명을 통해 제2공화국을 전복할 의도를 발표했다. 1931년 6월 선거에서 공화당과 사회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대공황이 시작되자 정부는 농촌 스페인을 지원하려고 노력했지만, 당시 농촌 노동자들은 유럽에서 가장 빈곤한 삶을 살았고, 정부는 임금 인상과 근로 조건 개선을 시도했지만, 이는 고용 노동력에 의존하던 중소 지주들을 소외시켰다.
공화국 정부의 가장 큰 현안은 토지 개혁이었으나, 지주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저항으로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대공황으로 양극화가 심화되어 계급 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무정부주의와 파시즘 등의 극단주의가 대두되어 사회는 극도로 불안정하였다. 또한, 아사냐 내각은 지지부진한 토지개혁과 경제 위기로 인해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비난받았으며 1933년에 결국 아사냐 내각은 퇴진하였다. 이후 총선에서는 우파가 집권하였으나, 군대를 동원한 노동 운동 탄압으로 인해 급격히 지지율이 하락하였다.[186]
새로 설립된 노동 중재위원회는 임금, 계약 및 근무 시간을 규제했지만, 고용주보다 노동자들에게 더 유리했다. 토지 소유주들이 반혁명 조직과 지역 과두 정치 세력에 의지하면서 계급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파업, 직장 절도, 방화, 강도 및 상점, 파업 파괴자, 고용주 및 기계에 대한 폭행이 점점 더 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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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oter = 공화파 혁명 세력은 공화국 시대와 내전 중에 교회를 자주 공격했습니다. 내전 중에 혁명가들은 약 2만 개의 교회와 함께 교회 예술품, 묘지, 서적, 기록 보관소 및 궁전을 파괴하거나 불태웠다.[13][14] 피해를 입은 많은 건물들이 현재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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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10월, 공화당의 마누엘 아사냐가 소수 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파시즘은 여전히 반발적인 위협으로 남아 있었고, 군대에 대한 논란이 많은 개혁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12월, 새로운 개혁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민주적인 헌법이 선포되었다. 여기에는 가톨릭 국가의 광범위한 세속화를 강제하는 강력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반대에 부딪혔다. 1932년 예수회가 금지되고 그들의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군대가 축소되었고, 토지 소유주들의 토지가 몰수되었다. 카탈루냐에는 자치권이 부여되어 자체 의회와 대통령을 두게 되었다. 1933년 6월, 비오 11세 교황은 회칙 ''Dilectissima Nobis''("스페인 교회 탄압에 관하여")를 발표하여 스페인에서 가톨릭 교회의 박해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1933년 11월, 우익 정당들이 총선에서 승리했다. 그 원인으로는 토지 개혁을 시행하는 논란이 많은 법령으로 인한 현 정부에 대한 불만 증가, 카사스 비에하스 사건,[15] 그리고 우익 연합인 스페인 자치 우익 단체 연맹(CEDA)의 결성 등이 있었다. 또 다른 요인은 여성의 최근 참정권 확대였는데, 여성 대부분이 중도우익 정당에 투표했다. 스탠리 G. 페인과 헤수스 팔라시오스 타피아스에 따르면, 좌파 공화주의자들은 니세토 알칼라 사모라에게 선거 결과를 취소하도록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CEDA가 선거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알칼라-사모라 대통령은 CEDA의 군주제 지지와 헌법 개정 제안을 우려하여 지도자인 길 로블레스를 총리로 임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급진 공화당의 알레한드로 레루를 초청했다.
1933년 11월 이후 "검은 이년"으로 불리는 시기의 사건들은 내전 가능성을 더욱 높였다. 급진 공화당(RRP)의 알레한드로 레루가 정부를 구성하여 이전 정부가 시행한 변화를 되돌리고, 1932년 8월 호세 산후르호 장군의 실패한 반란에 가담한 자들에게 사면을 부여했다. 일부 군주주의자들은 당시 파시스트-국수주의자였던 파랑헤 에스파뇰라 이 데 라스 혼스("파랑헤")와 손을 잡고 목표 달성을 도왔다. 스페인 도시 거리에서 공공연한 폭력이 발생했고, 급진적인 변혁을 향한 움직임을 반영하여 무력 충돌이 계속 증가했다. 평화적인 민주적 수단보다는 급진적인 변혁을 해결책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CEDA의 승리에 대한 반응으로 1933년 12월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한 소규모 폭동이 발생하여 약 100명이 사망했다.[16] 격렬한 압력이 1년간 지속된 후, 의회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한 CEDA는 마침내 3개의 장관직을 얻는 데 성공했다. 사회당(PSOE)과 공산당은 9개월 동안 준비해온 폭동으로 맞섰다.
이 반란은 1934년 혁명으로 알려진 유혈 폭동으로 발전했다. 상당히 무장한 혁명가들은 아스투리아스 지방 전체를 장악하고, 수많은 경찰, 성직자, 민간인을 살해하고, 교회, 수녀원, 오비에도 대학교 일부를 포함한 종교 건물들을 파괴했다.[17] 점령 지역의 반군들은 노동자를 위한 혁명을 선포하고 기존 통화를 폐지했다. 이 반란은 2주 만에 스페인 해군과 스페인 공화국군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후자는 주로 무어인 식민군을 스페인 모로코에서 사용했다.[18] 아사냐는 그날 바르셀로나에 있었고, 레루-CEDA 정부는 그를 연루시키려 했다. 그는 체포되어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다. 사실 아사냐는 반란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1935년 1월 석방되었다.
무정부주의자가 아닌 사회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자들처럼 봉기하면서 기존 정치 질서가 불법이라는 확신을 보였다. 아사냐 지지자이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망명 중인 강력한 반대자였던 스페인 역사가 살바도르 데 마다리아가는 좌파의 반란 참여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1934년 봉기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길 로블레스가 파시즘을 수립하기 위해 헌법을 파괴하려 했다는 주장은 위선적이고 거짓입니다. 1934년 반란으로 스페인 좌파는 1936년 반란을 비난할 도덕적 권위의 그림자조차 잃었습니다."[19]
1935년 토지 개혁의 역전은 중부와 남부 시골 지역에서 추방, 해고, 그리고 임의적인 근무 조건 변경으로 이어졌고, 토지 소유자들의 행동은 때때로 "진정한 잔혹 행위"에 이르렀으며, 농장 노동자와 사회주의자에 대한 폭력을 포함하여 여러 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한 역사가는 남부 시골 지역 우익의 행동이 내전 중 증오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고, 아마도 내전 자체의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0] 토지 소유자들은 배고픈 노동자들에게 "공화국을 먹어라!"라고 조롱했다.[21][22] 고용주들은 좌파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노동 조합 및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투옥했으며, 임금은 "굶주림 임금"으로 줄었습니다.
1935년, 급진 공화당이 이끄는 정부는 일련의 위기를 겪었다. 여러 부패 스캔들 이후, 이 정부에 적대적이었던 니세토 알칼라 사모라 대통령은 또 다른 선거를 실시했다.
1936년 2월 총선에서 스페인 사회노동당, 좌파 공화파, 스페인 공산당 등으로 구성된 인민전선이 승리하여 473석 중 289석을 확보했다. 의회를 장악한 인민전선은 토지 개혁을 포함한 개혁 정책들을 시행했다. 이에 대해 스페인의 지주ㆍ자본가ㆍ로마 가톨릭교회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심화되어가는 정치적 혼란 또한 맞물려 마침내 1936년 7월 17일에 스페인령 모로코에 머물고 있던 프랑코와 스페인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다.[187]
인민전선이 1936년 총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혁명적인 좌파 대중들은 거리로 나서 수감자들을 석방했다. 선거 후 36시간 동안 16명이 사망했고(대부분 질서 유지 또는 폭력 충돌 개입을 시도하는 경찰관에 의해), 39명이 중상을 입었다. 또한 50개의 교회와 70개의 보수 정당 사무소가 공격당하거나 방화되었다.[23] 선거 과정이 끝나기 전에 마누엘 아사냐가 정부 구성을 요청받았다. 그는 헌법적 허점을 이용하여 곧 사모라를 대통령직에서 교체했다. 좌파가 더 이상 법치주의를 따르려 하지 않고 스페인에 대한 그들의 비전이 위협받고 있다고 확신한 우파는 의회적 선택을 포기하고 공화국을 장악하는 대신 타도하기 시작했다.
PSOE의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훌리오 알바레스 델 바요는 "스페인이 소련과 연합하여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개조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는 "조직된 프롤레타리아가 모든 것을 앞질러 우리의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국가는 급속히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굳건한 사회주의자인 인달레시오 프리에토조차도 1936년 5월 쿠엥카에서 열린 당 집회에서 "우리는 지금 스페인처럼 비극적인 전망이나 큰 붕괴를 본 적이 없다. 해외에서는 스페인이 파산 상태로 분류된다. 이것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 아니라 자유의 이점조차 없는 절망적인 무정부 상태로 가는 길이다"라고 불평했다. 아사냐 정권에 대한 환멸은 공화주의자이자 스페인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식인 중 한 명인 미겔 데 우나무노도 표현했는데, 그는 1936년 6월 《엘 아델란토》에 그의 진술을 발표한 기자에게 마누엘 아사냐 대통령이 "애국적인 행동으로" 자살해야 한다고 말했다.
라이아 발셀스는 쿠데타 직전 스페인의 양극화가 너무 심해 좌파와 우파 간의 물리적 충돌이 대부분의 지역에서 일상적인 일이었고, 쿠데타가 일어나기 6일 전 테루엘 지방에서 양측 간의 폭동이 있었다고 언급한다. 발셀스는 스페인 사회가 좌우 이념으로 너무 분열되어 수도사 힐라리 라구에르가 자신의 본당에서 아이들이 "경찰과 강도" 놀이 대신 "좌파와 우파" 놀이를 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고 지적한다. 인민전선 정부의 첫 달 안에 파업, 불법 토지 점거, 정치적 폭력 및 방화를 막거나 통제하지 못한 데 대해 거의 4분의 1의 지방 주지사가 해임되었다. 인민전선 정부는 유사한 행위를 저지른 좌파보다 우파의 폭력 행위를 기소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2월부터 7월까지 정치적 폭력으로 약 300~400명이 사망했고, 수백 개의 교회, 종교 건물 및 기념물이 파괴되거나 손상되거나 훼손되었다.
아사냐는 많은 폭도나 시위대가 자신의 연정을 지지했기 때문에 군대를 사용하여 그들을 사살하거나 진압하는 것을 주저했다. 반면 그는 극좌의 반란을 막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군대를 무장 해제하는 것을 꺼렸다. 불법 토지 점거가 만연했다. 가난한 소작농들은 정부가 그들을 막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36년 4월까지 거의 10만 명의 농민이 40만 헥타르의 토지를 몰수했고, 내전이 시작될 무렵에는 100만 헥타르에 달했을 것이다. 비교하면 1931년-1933년 토지 개혁은 6,000명의 농민에게 4만 5,000헥타르만을 할당했다. 4월부터 7월 사이에 발생한 파업은 1931년 전체 파업 수만큼 많았다. 노동자들은 점점 더 적은 일을 하고 더 많은 임금을 요구했다. "사회적 범죄"—물품과 임대료 지불 거부—가 점점 더 흔해졌다. 어떤 경우에는 무장한 민병대와 함께 이루어졌다. 보수파, 중산층, 사업가, 지주들은 혁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확신했다.
총리 산티아고 카사레스 키로가는 스페인의 해체를 막기 위해 정부를 교체해야 한다고 결정한 여러 장군들이 연루된 군사 음모에 대한 경고를 무시했다. 양측 모두 상대편이 권력을 장악하면 자기 구성원을 차별하고 정치 조직을 억압하려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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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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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쿠데타의 발생
1936년 쿠데타 징후에도 불구하고, 공화파 정부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특히, 총리였던 키로가의 오판은 쿠데타군에게 초기 군사적 우위를 안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33]
쿠데타 초기,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등 주요 도시에서 시민들과 아나키스트 민병대가 조직되어 쿠데타군에 맞서 싸웠다.[36] 마드리드에서는 몬타나 요새가 점령당하는 등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시민들의 저항으로 도시를 지켜낼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아나키스트 민병대가 쿠데타군을 격퇴하고 고데드 장군을 체포하여 처형했다.[36] 그러나 내전이 진행되면서 국민파가 카탈루냐 전역을 점령하면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고립되었고, 내부 혼란까지 겪게 되었다.
내전 초기, 공화파는 발렌시아와 스페인 동부 대부분을 지켜냈지만, 쿠데타군은 카스티야 일대와 스페인 북부를 장악했다.[35] 공화파는 아스투리아스 지방, 칸타브리아 지방, 바스크 지방 일부만을 간신히 지켜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코파의 점령 지역은 확대되었고, 결국 안달루시아 지방과 수도 세비야까지 함락되었다.
노엄 촘스키는 쿠데타 당시 스페인 공화국이 마비된 상태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무장하여 쿠데타에 맞섰지만, 공화국 정부는 무장한 노동자 민병대를 두려워하여 쿠데타군에게 노동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방관했다고 비판했다.[189]
휴 토마스는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조치를 취했다면 쿠데타를 신속하게 진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33]
공화군은 국가주의자들에 비해 전력상 열세였다. 해군력은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해군 최고 사령관과 가장 현대적인 군함 (카나리아스, 발레아레스)은 국가주의자들의 통제하에 있었다.[37] 공군 전력의 3분의 2는 정부가 유지했지만, 공화국 공군은 매우 구식이었다.[37]
3. 1. 공화파 정부의 대응
공화파 정부는 쿠데타 징후를 포착하고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특히, 총리였던 키로가의 오판은 쿠데타군에게 초기 군사적 우위를 안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33]쿠데타 초기,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등 주요 도시에서 시민들과 아나키스트 민병대가 조직되어 쿠데타군에 맞서 싸웠다.[36] 마드리드에서는 몬타나 요새가 점령당하는 등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시민들의 저항으로 도시를 지켜낼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아나키스트 민병대가 쿠데타군을 격퇴하고 고데드 장군을 체포하여 처형했다.[36] 그러나 내전이 진행되면서 국민파가 카탈루냐 전역을 점령하면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고립되었고, 내부 혼란까지 겪게 되었다.
내전 초기, 공화파는 발렌시아와 스페인 동부 대부분을 지켜냈지만, 쿠데타군은 카스티야 일대와 스페인 북부를 장악했다.[35] 공화파는 아스투리아스 지방, 칸타브리아 지방, 바스크 지방 일부만을 간신히 지켜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코파의 점령 지역은 확대되었고, 결국 안달루시아 지방과 수도 세비야까지 함락되었다.
노엄 촘스키는 쿠데타 당시 스페인 공화국이 마비된 상태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무장하여 쿠데타에 맞섰지만, 공화국 정부는 무장한 노동자 민병대를 두려워하여 쿠데타군에게 노동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방관했다고 비판했다.[189]
휴 토마스는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조치를 취했다면 쿠데타를 신속하게 진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33]
공화군은 국가주의자들에 비해 전력상 열세였다. 해군력은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해군 최고 사령관과 가장 현대적인 군함 (카나리아스, 발레아레스)은 국가주의자들의 통제하에 있었다.[37] 공군 전력의 3분의 2는 정부가 유지했지만, 공화국 공군은 매우 구식이었다.[37]
4. 참여 세력
공화파는 스페인 내전을 "폭정이냐 민주주의냐"를 놓고 벌인 싸움으로 보았다. 공화파 지지자들은 이 전쟁을 폭정과 자유의 투쟁으로 묘사했다. 공화파의 중심 세력은 노동자, 소작농, 도시 시민 등이었으나,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아스투리아스와 카탈루냐의 일부 자본가들 역시 공화파를 지원하였다. 특히 공화국 정부는 자산이 없는 서민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공화파 측에 가담한 세력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바스크와 카탈루냐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들 중 일부는 국민전선 출신이었던 중도 세력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191] 당시 스페인의 정치는 좌파가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좌파는 단결하지 못한 채로 나뉘어 있었는데, 스페인의 대표적 좌익 정당이였던 사회노동당은 코민테른에 대표자를 파견하고 있었고 소련은 이를 이용하여 스페인의 내부 정치에 개입하고자 하였다.[192] 그러나 사회노동당은 이러한 행동들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 5차 대회 및 7차 대회의 참석을 거부하는 등 소련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다. 이후 소련의 코민테른 강령에 따른 스페인 공산당이 결성되었다.[193] 공화파 지지자들은 소련, 멕시코, 그리고 국제 사회주의 운동가들로 구성된 국제여단으로부터 무기와 병력을 지원받았다.[196] 정부군 측은 스스로를 "공화파", "인민전선", "충성파", "정부파" 등으로 지칭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켰던 국민파는 이들 모두를 "빨갱이"[195] 라며 일축하였다.
공화파를 공개적이고 전면적으로 지지한 국가는 멕시코와 소련 두 나라뿐이었다. 특히 소련으로부터 공화파는 외교적 지원, 자원봉사자, 무기 및 차량을 받았다. 다른 국가들은 중립을 유지했는데, 이러한 중립성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과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동정론자들로부터 심각한 반대에 직면했다. 이는 국제여단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모든 국적의 수천 명의 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스페인으로 가서 공화파의 싸움을 도왔다.[196]
스페인 내 공화파 지지자들은 온건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중도파부터 공화국에는 반대하지만 쿠데타 세력에 맞서 공화파 편에 선 혁명적 아나키스트까지 다양했다. 그들의 기반은 주로 세속적이고 도시적이었지만 무지한 농민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아스투리아스, 바스크 지방, 카탈루냐와 같은 공업 지역에서 특히 강력했다. 이 파벌은 지지자들에 의해 ''leales'' "충성스러운 자들", 모든 당파에 의해 "공화파", "인민전선", 또는 "정부"라고 불렸고, 반대파에 의해 ''los rojos'' "붉은 자들"이라고 불렸다. 공화파는 도시 노동자, 농업 노동자 및 중산층 일부의 지지를 받았다.
로마 가톨릭이 강세인 바스크, 카탈루냐와, 급진적 좌파가 우세하였던 갈리시아는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들의 분리 독립 청원은 중앙 정부에 의해 기각되었다. 내전 도중에는 이러한 모든 세력들이 연합하여 "인민공화군"(''Ejército Popular Republicano''es)을 구성하고 있었다.[196] 공화정부는 두 지역(바스크,카탈루냐)에 대한 자치 가능성을 허용했고, 그들의 병력은 인민공화군(''Ejército Popular Republicano'', 또는 EPR) 하에 모였으며, 1936년 10월 이후 혼성 여단으로 재편성되었다.[54]
몇몇 유명한 인물들이 공화파 편에서 싸웠는데,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전쟁 경험에 대한 기록인 ''카탈루냐 찬가''(1938)를 썼다)와 최전방 작전을 위한 이동식 수혈 서비스를 개발한 캐나다의 흉부외과 의사 노먼 베쑨이 있다. 시몬 베이유는 부엔벤투라 두루티의 아나키스트 부대에서 잠시 싸웠다.[56]
전쟁 초기에 공화파는 아라곤 전선에서 국민군보다 10대 1의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1937년 1월까지 그 우세는 4대 1로 떨어졌다.[57] 초기 소련에서 지원받은 전투기(I-15, I-16 계열)와 폭격기(SB 계열)는 반군은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기를 성능 면에서 압도했고, 전장의 제공권은 스페인 공화국 정부 측에 있었다. 소련제 전차와 장갑차 또한 기동성, 공격력, 방어력 모든 면에서 반군 측 장갑 전투 차량을 압도하여 마드리드 공방전에서는 이탈리아군 전차 부대를 일방적으로 궤멸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공화파 내부의 불화와 비효율적인 군대 운영으로 인해 충분한 우위를 활용하지 못했다. 더욱이 민병들은 당파별로 지휘 계통이 제각각이었다. 급진적인 노동조합이자 노동자 자치(아나르코 신디칼리즘) 혁명을 지향하는 전국노동연합(CNT)과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FAI)은 반스탈린주의 입장을 취하는 좌익 정당인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POUM)과 협력하여 지배 지역에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도입하려 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노동자들에 의한 공장 등의 몰수도 발생했다. 초기 패배 이후, 공화군은 드디어 군대 재건에 착수했지만, 그 과정에서 스페인 공산당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공화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당시 스페인은행은 외환보유고로 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보유량은 약 710톤으로 당시 세계 3위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반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적절한 보관 장소로 옮길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의 불개입 정책으로 무기 구매를 위한 신용 거래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현금 구매 자금으로 외화를 조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래서 두 가지 목적을 위해 공화국 측이 장악하고 있던 유일한 해군 기지인 카르타헤나의 동굴로 옮겨졌다. 초기에는 카르타헤나에서 프랑스은행으로 금을 수송하여 외화를 조달했다. 수송량은 200톤에 달했지만, 수송 지연과 프랑스은행의 자금 지급 승인에 어려움을 겪어 무기 조달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영국의 은행들은 이 거래를 "환영할 수 없는 목적"으로 간주하고 자금 인출을 지연시켰다.[163] 또한 반군은 자금 수령을 "마르크스주의자 일당과의 끔찍한 공동 범죄"이자 "약탈" 행위이며 은행법에 위반된다고 선전하며 소송 등을 통해 각국의 은행을 압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소련파를 중심으로 소련으로의 금 이송이 제기되었고, 소련도 이에 응했다. 소련으로 수송된 금은 약 510.08톤에 달했고, 당시 가치로 5억 달러를 넘었다. 공화국 지원국인 소련은 무기와 인력을 지원했지만, 그 지원은 유상이었고, 금의 일부로 미국과 체코에서 자동차를 조달하여 스페인으로 보냈다. 전후, 프라우다는 1957년 4월 5일자에서 스페인은 금을 다 써버렸을 뿐만 아니라 소련에 5000만 달러의 차관이 남았다고 주장했지만, 소련 측은 거래 내역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받지 못했고, 오히려 소련이 금을 횡령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64] 어찌 되었든 공화국은 자금을 전부 소련에 넘겨준 꼴이 되었고, 소련은 물론이고 제3국의 무기 금수 해제를 위한 협상력도 상실했다.
소련은 또한 내부 항쟁에 질려 인민전선의 지휘권을 장악하려 했고, 군사고문 등으로 위장한 NKVD 요원들이 현지에 파견되어 소련과 스페인 공산당의 방침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잇달아 체포하고 처형했다. 최대 지원국인 소련의 의향에 따라 내전의 진전과 함께 공산당은 점차 세력을 확장해 갔다. 아나키즘의 CNT·FAI와 트로츠키스트의 POUM은 코민테른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민테른의 통제 하에 있던 스페인 공산당은 그들을 비판하며 내부 갈등을 심화시켰다.
제4인터내셔널의 스페인 지부는 스탈린주의 공산당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과 CNT·FAI의 기회주의도 비판했지만, 그 세력은 수십 명(거의 외국인)을 넘지 못했고, 혁명에 현실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다.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마침내 공산당을 비롯한 인민전선 정부와 아나키스트·트로츠키스트가 충돌하여 (), 5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는 참사가 발생했다. 공산당은 반대파를 암살로 위협했지만, 잇따른 내분으로 국내외의 반발을 샀을 뿐만 아니라 지역 정당과도 공동 보조를 맞추기 어려웠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이 불개입 정책을 계속했기 때문에 소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국제 정세는 더욱 프랑코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가톨릭 교회를 옹호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로마 교회는 프랑코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1938년 6월 바티칸이 프랑코 정권을 인정했다. 공화국 측에 남은 희망은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파시즘 대 반파시즘의 대립 구도가 유럽 전체로 확산되어 국제적 지원을 얻는 것이었지만, 9월의 뮌헨 협정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파시즘 세력에 대한 유화 정책을 계속할 것이 명백해지면서 이 기대도 무산되었다.
4. 1. 공화파
공화파는 소련, 멕시코, 그리고 국제 사회주의 운동가들로 구성된 국제여단으로부터 무기와 병력을 지원받았다.[196] 공화파의 중심 세력은 노동자, 소작농, 도시 시민 등이었으나,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아스투리아스와 카탈루냐의 일부 자본가들 역시 공화파를 지원하였다. 정부군 측은 스스로를 "공화파", "인민전선", "충성파", "정부파" 등으로 지칭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켰던 국민파는 이들 모두를 "빨갱이"[195] 라며 일축하였다.공화파를 공개적이고 전면적으로 지지한 국가는 멕시코와 소련 두 나라뿐이었다. 특히 소련으로부터 공화파는 외교적 지원, 자원봉사자, 무기 및 차량을 받았다. 다른 국가들은 중립을 유지했는데, 이러한 중립성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과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동정론자들로부터 심각한 반대에 직면했다. 이는 국제여단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모든 국적의 수천 명의 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스페인으로 가서 공화파의 싸움을 도왔다.[196]
스페인 내 공화파 지지자들은 온건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중도파부터 공화국에는 반대하지만 쿠데타 세력에 맞서 공화파 편에 선 혁명적 아나키스트까지 다양했다. 그들의 기반은 주로 세속적이고 도시적이었지만 무지한 농민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아스투리아스, 바스크 지방, 카탈루냐와 같은 공업 지역에서 특히 강력했다. 이 파벌은 지지자들에 의해 ''leales'' "충성스러운 자들", 모든 당파에 의해 "공화파", "인민전선", 또는 "정부"라고 불렸고, 반대파에 의해 ''los rojos'' "붉은 자들"이라고 불렸다. 공화파는 도시 노동자, 농업 노동자 및 중산층 일부의 지지를 받았다.
로마 가톨릭이 강세인 바스크, 카탈루냐와, 급진적 좌파가 우세하였던 갈리시아는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들의 분리 독립 청원은 중앙 정부에 의해 기각되었다. 내전 도중에는 이러한 모든 세력들이 연합하여 "인민공화군"(''Ejército Popular Republicano''es)을 구성하고 있었다.[196] 공화정부는 두 지역(바스크,카탈루냐)에 대한 자치 가능성을 허용했고, 그들의 병력은 인민공화군(''Ejército Popular Republicano'', 또는 EPR) 하에 모였으며, 1936년 10월 이후 혼성 여단으로 재편성되었다.[54]
몇몇 유명한 인물들이 공화파 편에서 싸웠는데,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전쟁 경험에 대한 기록인 ''카탈루냐 찬가''(1938)를 썼다)와 최전방 작전을 위한 이동식 수혈 서비스를 개발한 캐나다의 흉부외과 의사 노먼 베쑨이 있다. 시몬 베이유는 부엔벤투라 두루티의 아나키스트 부대에서 잠시 싸웠다.[56]
전쟁 초기에 공화파는 아라곤 전선에서 국민군보다 10대 1의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1937년 1월까지 그 우세는 4대 1로 떨어졌다.[57] 초기 소련에서 지원받은 전투기(I-15, I-16 계열)와 폭격기(SB 계열)는 반군은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기를 성능 면에서 압도했고, 전장의 제공권은 스페인 공화국 정부 측에 있었다. 소련제 전차와 장갑차 또한 기동성, 공격력, 방어력 모든 면에서 반군 측 장갑 전투 차량을 압도하여 마드리드 공방전에서는 이탈리아군 전차 부대를 일방적으로 궤멸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공화파 내부의 불화와 비효율적인 군대 운영으로 인해 충분한 우위를 활용하지 못했다. 더욱이 민병들은 당파별로 지휘 계통이 제각각이었다. 급진적인 노동조합이자 노동자 자치(아나르코 신디칼리즘) 혁명을 지향하는 전국노동연합(CNT)과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FAI)은 반스탈린주의 입장을 취하는 좌익 정당인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POUM)과 협력하여 지배 지역에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도입하려 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노동자들에 의한 공장 등의 몰수도 발생했다. 초기 패배 이후, 공화군은 드디어 군대 재건에 착수했지만, 그 과정에서 스페인 공산당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공화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당시 스페인은행은 외환보유고로 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보유량은 약 710톤으로 당시 세계 3위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반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적절한 보관 장소로 옮길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의 불개입 정책으로 무기 구매를 위한 신용 거래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현금 구매 자금으로 외화를 조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래서 두 가지 목적을 위해 공화국 측이 장악하고 있던 유일한 해군 기지인 카르타헤나의 동굴로 옮겨졌다. 초기에는 카르타헤나에서 프랑스은행으로 금을 수송하여 외화를 조달했다. 수송량은 200톤에 달했지만, 수송 지연과 프랑스은행의 자금 지급 승인에 어려움을 겪어 무기 조달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영국의 은행들은 이 거래를 "환영할 수 없는 목적"으로 간주하고 자금 인출을 지연시켰다.[163] 또한 반군은 자금 수령을 "마르크스주의자 일당과의 끔찍한 공동 범죄"이자 "약탈" 행위이며 은행법에 위반된다고 선전하며 소송 등을 통해 각국의 은행을 압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소련파를 중심으로 소련으로의 금 이송이 제기되었고, 소련도 이에 응했다. 소련으로 수송된 금은 약 510.08톤에 달했고, 당시 가치로 5억 달러를 넘었다. 공화국 지원국인 소련은 무기와 인력을 지원했지만, 그 지원은 유상이었고, 금의 일부로 미국과 체코에서 자동차를 조달하여 스페인으로 보냈다. 전후, 프라우다는 1957년 4월 5일자에서 스페인은 금을 다 써버렸을 뿐만 아니라 소련에 5000만 달러의 차관이 남았다고 주장했지만, 소련 측은 거래 내역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받지 못했고, 오히려 소련이 금을 횡령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64] 어찌 되었든 공화국은 자금을 전부 소련에 넘겨준 꼴이 되었고, 소련은 물론이고 제3국의 무기 금수 해제를 위한 협상력도 상실했다.
소련은 또한 내부 항쟁에 질려 인민전선의 지휘권을 장악하려 했고, 군사고문 등으로 위장한 NKVD 요원들이 현지에 파견되어 소련과 스페인 공산당의 방침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잇달아 체포하고 처형했다. 최대 지원국인 소련의 의향에 따라 내전의 진전과 함께 공산당은 점차 세력을 확장해 갔다. 아나키즘의 CNT·FAI와 트로츠키스트의 POUM은 코민테른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민테른의 통제 하에 있던 스페인 공산당은 그들을 비판하며 내부 갈등을 심화시켰다.
제4인터내셔널의 스페인 지부는 스탈린주의 공산당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과 CNT·FAI의 기회주의도 비판했지만, 그 세력은 수십 명(거의 외국인)을 넘지 못했고, 혁명에 현실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다.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마침내 공산당을 비롯한 인민전선 정부와 아나키스트·트로츠키스트가 충돌하여 (), 5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는 참사가 발생했다. 공산당은 반대파를 암살로 위협했지만, 잇따른 내분으로 국내외의 반발을 샀을 뿐만 아니라 지역 정당과도 공동 보조를 맞추기 어려웠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이 불개입 정책을 계속했기 때문에 소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국제 정세는 더욱 프랑코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가톨릭 교회를 옹호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로마 교회는 프랑코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1938년 6월 바티칸이 프랑코 정권을 인정했다. 공화국 측에 남은 희망은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파시즘 대 반파시즘의 대립 구도가 유럽 전체로 확산되어 국제적 지원을 얻는 것이었지만, 9월의 뮌헨 협정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파시즘 세력에 대한 유화 정책을 계속할 것이 명백해지면서 이 기대도 무산되었다.
4. 2. 국민파
국민파는 제2공화국 정부에 의해 "반란군", "역적", "파시스트" 등으로 불렸으며, 권력의 중앙집중과 반공주의를 공통 분모로 하는 여러 세력의 연합이었다.[197] 이들은 왕당파, 지주, 유산가, 보수주의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스페인이 분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국민파는 단순히 반공을 외치는 것 외에도 정부의 반교권주의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조직되었다. 당시 스페인 내에서는 급진적인 공화파에 의해 교회 파괴와 반 기독교 운동이 극심하였다. 국민파는 공화파의 가톨릭 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한 만행이 극에 달해 전쟁 전에 이미 7,000여 명 이상의 성직자가 학살당하였다고 주장하였다.[197]
내전 초, 쿠데타군은 프랑코가 전권을 쥐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호세 산후르호가 리스본 인근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부사령관으로서 프랑코와 비슷한 세력을 구축했던 에밀리오 몰라는 1937년 6월에 사고사했다. 또한 국민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팔랑헤당의 당수 프리모 데 리베라가 내전 전부터 알리칸테 감옥에 투옥되어, 프랑코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프랑코는 팔랑헤당을 비롯한 다른 정당을 통합, 개편한 통합 팔랑헤의 당수로 취임하고, 이후 다른 정당들의 활동을 금지하는 등 굳건한 군사독재 체제를 굳혔다.

국민파는 국가 분열을 우려했고 분리주의 운동에 반대했으며, 주로 반공주의에 의해 정의되었다. 파랑주의자, 군주주의자와 같이 다양하거나 상반된 운동을 결집시켰고, 지도자들은 일반적으로 더 부유하고 보수적이며, 군주주의적이고 토지 소유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국민파에는 카를로스당과 알폰소주의자, 스페인 민족주의자, 파시스트 파랑주의자, 그리고 대부분의 보수주의자와 군주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이 포함되었다. 사실상 모든 국민파 단체는 강한 가톨릭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스페인 토착 성직자를 지지했다. 국민파에는 (바스크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톨릭 성직자와 신자, 군대의 중요한 요소들, 대부분의 대지주, 그리고 많은 사업가들이 포함되었다. 국민파의 기반은 주로 중산층, 북부의 보수적인 소작농, 그리고 일반적인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되었다. 전쟁 초기 6개월 동안 대부분의 좌파 지역에서 교회 방화와 사제 살해가 발생하면서 가톨릭의 지지가 특히 두드러졌다. 1937년 중반까지 가톨릭 교회는 프랑코 정권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를 표명했으며, 종교적 열정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국민파에 대한 정서적 지지의 주요 원천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 종종 자원 입대하여 전쟁에서 불균형적으로 많은 수가 사망했다는 보고도 있다. 가톨릭 고해성사는 군인들의 도덕적 의심을 없애고 전투 능력을 향상시켰으며, 공화당 신문은 국민파 사제들을 전투에서 맹렬하다고 묘사했고 인달레시오 프레토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적은 "막 성체를 받은 레케테"라고 말했다.
우익들의 주요 동기 중 하나는 공화국 정권의 반교권주의에 맞서고, 가톨릭 교회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1931년 스페인 헌법에 의해 강화된 공화당의 많은 개혁에 반대했다. 1931년 헌법 제24조와 제26조는 예수회를 금지했는데, 이러한 금지령은 보수파 내부의 많은 사람들을 깊이 불쾌하게 했다. 전쟁 초 공화당 지역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7,000명의 성직자와 수천 명의 평신도가 살해되면서 가톨릭의 국민파 지지가 심화되었다.[58] 전쟁 전 1934년 아스투리아스 광부 파업 당시 종교 건물이 불타고 최소 100명의 성직자, 종교인 민간인, 친가톨릭 경찰이 혁명가들에게 살해되었다. 프랑코는 스페인의 식민지 아프리카 군대를 투입하여 대규모 포병 공격과 폭격으로 광부들을 제압했다. 스페인 외인부대는 잔혹 행위를 저질렀고 군대는 좌파에 대한 즉결 처형을 자행했다. 그 후의 탄압은 잔혹했고, 포로들은 고문을 당했다. 모로코의 Fuerzas Regulares Indígenas이 반란에 가담하여 스페인 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59]
국민파가 대다수의 군 장교들을 끌어들였다고 가정하는 것은 다소 단순화된 분석이다. 스페인 군대는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오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쿠데타를 지지하는 장교들은 1909년부터 1923년까지 북아프리카에서 싸운 "아프리카니스타스"(africanistas) 경향이 있었고, 충성을 지킨 장교들은 이 기간 동안 스페인에 남아 있던 "페닌술라레스"(peninsulares) 경향이 있었다. "페닌술라레스"는 "아프리카니스타스"가 빠르게 계급을 뛰어넘는 것을 분개했고, "아프리카니스타스" 자신은 거만하고 오만하게 여겨져 불만을 더욱 부추겼다. 따라서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특히 프랑코의 계급부터 하급 장교들은 종종 "아프리카니스타스"였고, 고위 장교와 최전선이 아닌 위치의 장교들은 반대하는 경향이 있었다(소수의 고위 "아프리카니스타스"도 쿠데타에 반대했다).[33] 공화국에 충성을 지킨 장교들은 공화국 정권의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고 주장되기도 한다.[60] 18명의 사단장 중 4명만이 반란을 일으켰고 56명의 여단장 중 14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하급 장교들로부터 모집하는 경향이 있었다. 약 15,301명의 장교 중 절반 조금 넘는 수가 반란을 일으켰다.
국민파에는 다음과 같은 세력들이 참여했다.
- 파랑헤당
- 카를로스주의파 (1936년 - 37년)
- CEDA (스페인 우익 자치파 연맹) (1936년 - 37년)
- 알폰소주의파 (1936년 - 37년)
국민파를 지원한 외국 세력은 다음과 같다.
4. 3. 기타 세력
카탈루냐 민족주의와 바스크 민족주의 세력들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주장했다. 이들은 반(反)스페인적 민족주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제2공화국 공화파 정부를 지지했는데, 이는 국민파가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반교권주의적 성향도 지니고 있었으며, 카탈루냐 지역에서 발생한 성직자 살해 사건 상당수는 이들의 소행이었다.카탈루냐와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은 분열되었다. 좌익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공화파 편에 섰지만, 보수적인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공화정부 장악 지역에서 일어난 반성직자주의와 몰수 때문에 정부 지지에 소극적이었다.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은 대체로 공화정부를 지지했지만, 나바라 일부는 보수적인 카탈루냐인들과 비슷한 이유로 반란에 가담했다. 종교 문제와는 별개로,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던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공화파 편에 섰지만, 바스크 민족주의 정당인 바스크 민족주의당/Euzko Alderdi Jeltzaleaeu(PNV)은 포위 공격 기간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빌바오 방어 계획을 국민군에게 전달했다고 전해진다.
5. 국제 사회의 개입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각국은 스페인 내전이 또 다른 세계 대전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국제 연맹을 통해 불간섭 조약을 체결, 군사 개입을 금지했다. 그러나 공화파와 프랑코파 모두 국제적 지원을 받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중립을 표방했으나 공화파에 물자를 지원했고, 프랑코파는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로부터 지원을 받았다.[198]
스페인 내전은 유럽의 정치적 분열을 드러냈다. 우익과 가톨릭은 볼셰비즘 확산을 막기 위해 국민군을 지지했고, 좌파는 파시즘 확산을 막기 위해 이 전쟁을 필수적 전투로 여겼다. 많은 국가에서 반전, 평화주의 정서가 강했고, 내전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경고가 있었다.[61]
영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은 27개국의 정치 동맹을 이끌어 스페인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를 포함한 비개입을 약속했다. 미국은 정치적 고립 정책 때문에 동맹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비공식적으로 비개입 입장을 취했다. 독일, 이탈리아, 소련은 공식 서명했지만 금수 조치를 무시했다. 프랑스는 공화파 군대에 대량의 물자를 공급한 것으로 비난받았다.[63]
국제 연맹의 전쟁에 대한 반응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의 영향을 받았으며, 대규모 무기 수입을 억제하기에는 불충분했다. 비개입 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그 정책은 거의 효과가 없었다.
스페인 내전의 정치적, 정서적 여파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조가 되었다.
=== 프랑코파에 대한 지원 ===
==== 독일과 이탈리아 ====
프랑코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히틀러는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세 차례의 주요 작전을 수행하였다. 1936년 1월 말 "불의 마법" 작전을 통해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52척의 군함과 20여 기의 수송기, 6대의 전투기를 동원했다. 9월 "오토" 작전을 통해 24대 이상의 1호 전차를 제공했다. 10월에는 600~800명의 독일군이 직접 참전했다. 히틀러의 가장 큰 지원은 콘도르 군단 투입이었다. 나치 자원병으로 구성된 콘도르 사단은 1936년 3,500여 명이 참전한 이래 내전 기간 동안 19,000여 명이 투입되었다.[201]
무솔리니는 스페인 내전의 공을 히틀러가 독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아 히틀러보다 많은 군사를 투입하기로 결정, 내전 기간 동안 50,000명 이상의 군대를 참전시켰다.[202] 베니토 무솔리니는 지중해에 대한 파시스트 지배 확보를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승리로 이탈리아는 군사력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국민군에 기관총, 포병, 항공기, 소형전차, 레지오네 아리아, 자원병단(CTV)을 공급하고 지중해 봉쇄를 지원했다. 이탈리아 CTV는 국민군에 5만 명의 병력을 제공했다. 이탈리아 군함은 공화파 해군의 봉쇄를 깨고, 말라가, 발렌시아, 바르셀로나에 대한 해상 폭격에 참여했다.[65] 이탈리아의 공습은 주로 도시와 민간인을 목표로 했다.[66] 이탈리아의 개입은 이탈리아에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66]
1936년 9월 비개입 협정에도 불구, 나치 독일은 콘도르 군단을 육군과 공군으로 편성하는 등 국민군에 다양한 지원을 제공했다. 독일은 전쟁 초기 아프리카 군단을 스페인 본토로 수송했다. 1937년 4월 26일 게르니카 폭격은 200~300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독일 개입의 가장 논란이 많은 사건이었다.[67] 독일의 개입에는 U보트 작전인 우르술라 작전과 크리그스마리네의 기여도 포함되었다. 전략적으로 나치의 프랑코 지원은 히틀러의 중유럽 전략에서 주의를 끌고 프랑스를 위협하는 친스페인 국가를 만들었다. 히틀러는 프랑코를 감사하게 만들고 소련 지원 세력의 승리를 막을 만큼만 도와주고 싶었다.
독일 콘도르 군단은 1937년 이후 공중 우세를 통해 많은 국민군 승리를 이끌었다. 스페인은 독일 전차와 항공기 전술의 시험장이었다. 독일은 5만 6천 명의 국민군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약 1만 6천 명의 독일 시민들이 참전했다. 최고조에 달했을 때 약 1만 명의 독일인이 스페인에 있었다. 1939년 가격으로 국민군에 대한 독일 지원은 콘도르 군단을 위해 대략 4천 3백만 파운드(2억 1천 5백만 달러)에 달했다.
=== 공화파에 대한 지원 ===
==== 국제 여단 ====
세계 각국에서 스페인 '민주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아나키즘,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 극좌파, 자유주의 등 다양한 이념을 가진 의용병들이 국제 여단으로 모였다. 이들은 스페인 내전을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한 최전방으로 여겼다.[203] 53개 국가에서 모인 약 30,000명의 국제 여단은 헌신적으로 전투에 참가, 마드리드 공방전에서 파시스트 군대를 저지했다. 미국인 의용병 부대는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 캐나다 의용군은 메켄지-파피뉴 여단으로 불렸다. 코민테른에 의해 모집된 국제 여단에는 루마니아 공산당에서 5백 명의 공산당원이 참전했다. 윈스턴 처칠의 조카 에스먼드 로밀리, 헤밍웨이, 조지 오웰 같은 지식인도 있었다.[203]
영국과 프랑스의 불간섭 조약으로 국제 여단의 참전은 공화파에게 사실상 유일한 병력 지원이었다.[204]
약 3만 2천 명이 국제여단에서, 3천 명 정도가 전국노동조합(CNT)(Confederación Nacional del Trabajo)과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POUM) 민병대원으로 싸웠다. POUM과 함께 싸운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조지 오웰과 ILP 대표단이었다. 약 2천 명의 포르투갈 좌파 인사들이 공화파를 위해 싸웠다.[69] 많은 비스페인인들은 급진적인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단체와 연계, 스페인 공화국이 파시즘에 대한 전쟁의 최전선이라고 믿었다. 약 4만 명의 외국인이 여단에서 싸웠지만, 특정 시점에는 1만 8천 명을 넘지 않았다. 프랑스(1만 명), 나치 독일과 오스트리아(5천 명), 이탈리아(3,350명) 출신이 많았다. 소련, 미국, 영국,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캐나다 각각 1천 명 이상이 있었다. 탈만 대대와 가리발디 대대는 마드리드 포위전에서 그들의 부대를 구별했다. 미국인들은 제15국제여단("아브라함 링컨 여단")에서, 캐나다인들은 맥켄지-파피노 대대에 합류했다.
국제여단은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지원되었는데, 7월 봉기 직후 여단을 모으기 위한 프라하 회의를 시작으로 인민전선을 위한 대대적인 선전 캠페인이 이어졌다. 전 세계 공산당들은 인민전선을 위한 대대적인 선전 캠페인을 시작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들이 스페인으로 갔다.
==== 소련 ====
소련은 스페인 공화국 정부에 비행기 806기, 전차 362대, 야포 1,555문 등의 군사물자를 지원했다.[205] 국제 연맹의 불간섭 조약을 무시하고 소수의 군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히틀러와 비밀리에 불가침 조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직접 지원은 제한적이었다.[206] 대신 군자금으로 상당량의 금을 스페인 은행으로 보냈다. 이때 보내진 510톤의 금은 모스크바 황금으로 알려져 있다.[207]
소련은 약 700명의 군인을 파견했다. "의용군"이라 불린 이들은 전차와 전투기를 운용했다. 이들의 참전은 "X 작전"이라 불렸다.[208]
소련 서기장 요셉 스탈린은 비간섭 협정과 국제 연맹의 금수 조치를 어기고 공화파에 물질적 지원을 제공, 유일한 주요 무기 공급원이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달리 스탈린은 은밀히 지원했다. 소련이 공화파에게 제공한 물자에 대한 추산은 다양하다. 스탈린은 작전 X라고 불리는 무기 선적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소련군 10과를 창설했다. 스탈린이 공화파를 돕는 데 관심이 있었음에도 불구, 무기 품질은 일관되지 않았다. T-26과 BT-5 탱크는 현대적이고 효과적이었지만, 제공된 많은 소총과 야포는 오래되거나 쓸모없었다. 소련이 공급한 항공기는 최신이었지만, 국민당을 위한 독일 항공기는 전쟁이 끝날 무렵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36년 8월부터 매일 한 척 이상의 배가 러시아 지원 물품을 싣고 스페인의 지중해 항구에 도착했다. 탄약, 소총, 기관총, 수류탄, 포병, 트럭, 소련 요원, 기술자, 교관, 선전가들이었다. 러시아에서 스페인으로의 무기 이동은 매우 느렸다. 많은 선적이 손실되거나 불완전했다.
소련은 스페인에 2,000~3,000명의 군사 고문을 파견했다. 소련 병력 투입은 한때 500명 미만이었지만, 소련 자원병들은 특히 전쟁 초기에 소련제 탱크와 항공기를 운용했다. 공화파 측 모든 군사 부대 스페인 사령관 옆에는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정치위원"이 있었다. 소련은 공화파 후방에 인민 내무 인민위원회(NKVD)를 운영, 공산주의 인물들은 좌파 인물들을 살해하는 작전을 이끌었다.[70][71]
==== 멕시코 ====
멕시코는 공식적으로 스페인 공화국 정부를 지원, 2백만 달러 규모의 지원과 벨랑카 CH-300 등의 전투기를 지원하였다.[72]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이 공화파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멕시코군에서 사용되던 구형 항공기를 제공하는 등 후방 지원을 했다. 내전 종결 후에는 많은 공화파 병사들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카르데나스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공화파에 이해를 보였다. 노동자를 중심으로 공화파에 동조하는 계층도 존재, 일부는 의용병이 되었다.[72]
그러나 멕시코 내부 여론은 다수가 프랑코파의 승리를 원했다. 전통적 보수층이나 파시즘 단체인 "Revolutionary Mexicanist Action"(금셔츠단)을 중심으로 프랑코파 지지자들도 다수 존재했다.[72]
5. 1. 프랑코파에 대한 지원
프랑코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히틀러는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세 차례의 주요 작전을 수행하였다. 첫 작전 "불의 마법"은 1936년 1월 말에 진행되었으며 프랑코에게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하여 52척의 군함과 20여기의 수송기 및 6대의 전투기를 동원하였다. 같은 해 9월 두 번째 작전 "오토"를 통해 히틀러는 프랑코에게 24대 이상의 1호 전차를 제공하였다. 10월에는 세 번째 작전을 통해 600~800명의 독일군이 직접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였다. 히틀러의 가장 큰 지원은 콘도르 군단을 스페인 내전에 투입한 것이었다. 나치 자원병으로 구성된 콘도르 사단은 1936년 3,500여 명이 참전한 이래 내전 기간 동안 19,000여 명이 투입되었다.[201]
무솔리니는 스페인 내전의 공을 히틀러가 독차지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히틀러 보다 많은 군사를 스페인 내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무솔리니는 내전 기간 동안 50,000명 이상의 군대를 스페인 내전에 참전시켰다.[202]
베니토 무솔리니는 지중해에 대한 파시스트의 지배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는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 정복으로 이탈리아 정부는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국민군의 더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국민군에 기관총, 포병, 항공기, 소형전차, 레지오네 아리아, 자원병단(CTV)을 공급하고 지중해 봉쇄를 지원했다. 이탈리아 CTV는 국민군에 5만 명의 병력을 제공했다. 이탈리아 군함은 공화파 해군의 국민군 점령지인 스페인 모로코에 대한 봉쇄를 깨는 데 참여했고, 공화파가 장악한 말라가, 발렌시아, 바르셀로나에 대한 해상 폭격에도 참여했다.[65] 이탈리아의 공습은 주로 도시와 민간인을 목표로 했다.[66] 이러한 이탈리아의 개입은 이탈리아에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고 파시스트의 자랑거리가 되었다.[66]
1936년 9월 비개입 협정에 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은 콘도르 군단을 육군과 공군으로 편성하는 것을 포함하여 국민군에 다양한 지원과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독일은 전쟁 초기 단계에서 아프리카 군단을 스페인 본토로 성공적으로 수송했다. 1937년 4월 26일 게르니카 폭격은 아마도 200~300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독일 개입의 가장 논란이 많은 사건이었다.[67] 독일의 개입에는 U보트 작전인 우르술라 작전과 크리그스마리네의 기여도 포함되었다. 전략적으로 나치의 프랑코 지원은 히틀러의 중유럽 전략에서 주의를 끌고 프랑스를 위협하는 친스페인 국가를 만들었다. 히틀러는 프랑코를 감사하게 만들고 소련이 지원하는 세력의 승리를 막을 만큼만 도와주고 싶었지, 카우딜로에게 빠른 승리를 안겨줄 만큼은 원치 않았다.
독일의 콘도르 군단은 특히 1937년 이후 공중 우세를 통해 많은 국민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스페인은 독일 전차와 항공기 전술의 시험장이었고, 후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독일은 기술적으로 능숙하고 보병, 전차, 대전차 부대, 공군 및 대공군, 해전 훈련을 받은 5만 6천 명의 국민군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약 1만 6천 명의 독일 시민들이 주로 조종사, 지상 승무원, 포병 및 전차 승무원, 군사 고문 및 교관으로서 이 갈등에 참전했다. 최고조에 달했을 때 약 1만 명의 독일인이 스페인에 있었다. 1939년 가격으로 국민군에 대한 독일의 지원은 콘도르 군단을 위해 대략 4천 3백만 파운드(2억 1천 5백만 달러)에 달했다. 스페인에 제공된 독일 물자에 대한 상세한 목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5. 1. 1.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코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히틀러는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세 차례의 주요 작전을 수행하였다. 첫 작전 "불의 마법"은 1936년 1월 말에 진행되었으며 프랑코에게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하여 52척의 군함과 20여기의 수송기 및 6대의 전투기를 동원하였다. 같은 해 9월 두 번째 작전 "오토"를 통해 히틀러는 프랑코에게 24대 이상의 1호 전차를 제공하였다. 10월에는 세 번째 작전을 통해 600~800명의 독일군이 직접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였다. 히틀러의 가장 큰 지원은 콘도르 군단을 스페인 내전에 투입한 것이었다. 나치 자원병으로 구성된 콘도르 사단은 1936년 3,500여 명이 참전한 이래 내전 기간 동안 19,000여 명이 투입되었다.[201]
무솔리니는 스페인 내전의 공을 히틀러가 독차지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히틀러 보다 많은 군사를 스페인 내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무솔리니는 내전 기간 동안 50,000명 이상의 군대를 스페인 내전에 참전시켰다.[202]
베니토 무솔리니는 지중해에 대한 파시스트의 지배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는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 정복으로 이탈리아 정부는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국민군의 더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국민군에 기관총, 포병, 항공기, 소형전차, 레지오네 아리아, 자원병단(CTV)을 공급하고 지중해 봉쇄를 지원했다. 이탈리아 CTV는 국민군에 5만 명의 병력을 제공했다. 이탈리아 군함은 공화파 해군의 국민군 점령지인 스페인 모로코에 대한 봉쇄를 깨는 데 참여했고, 공화파가 장악한 말라가, 발렌시아, 바르셀로나에 대한 해상 폭격에도 참여했다.[65] 이탈리아의 공습은 주로 도시와 민간인을 목표로 했다.[66] 이러한 이탈리아의 개입은 이탈리아에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고 파시스트의 자랑거리가 되었다.[66]
1936년 9월 비개입 협정에 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은 콘도르 군단을 육군과 공군으로 편성하는 것을 포함하여 국민군에 다양한 지원과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독일은 전쟁 초기 단계에서 아프리카 군단을 스페인 본토로 성공적으로 수송했다. 1937년 4월 26일 게르니카 폭격은 아마도 200~300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독일 개입의 가장 논란이 많은 사건이었다.[67] 독일의 개입에는 U보트 작전인 우르술라 작전과 크리그스마리네의 기여도 포함되었다. 전략적으로 나치의 프랑코 지원은 히틀러의 중유럽 전략에서 주의를 끌고 프랑스를 위협하는 친스페인 국가를 만들었다. 히틀러는 프랑코를 감사하게 만들고 소련이 지원하는 세력의 승리를 막을 만큼만 도와주고 싶었지, 카우딜로에게 빠른 승리를 안겨줄 만큼은 원치 않았다.
독일의 콘도르 군단은 특히 1937년 이후 공중 우세를 통해 많은 국민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스페인은 독일 전차와 항공기 전술의 시험장이었고, 후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독일은 기술적으로 능숙하고 보병, 전차, 대전차 부대, 공군 및 대공군, 해전 훈련을 받은 5만 6천 명의 국민군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약 1만 6천 명의 독일 시민들이 주로 조종사, 지상 승무원, 포병 및 전차 승무원, 군사 고문 및 교관으로서 이 갈등에 참전했다. 최고조에 달했을 때 약 1만 명의 독일인이 스페인에 있었다. 1939년 가격으로 국민군에 대한 독일의 지원은 콘도르 군단을 위해 대략 4천 3백만 파운드(2억 1천 5백만 달러)에 달했다. 스페인에 제공된 독일 물자에 대한 상세한 목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5. 2. 공화파에 대한 지원
세계 각국에서 스페인 '민주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의용병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아나키즘,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 극좌파, 자유주의등 다양한 이념을 가졌으며, 국제 여단이라 불렸다. 이들은 스페인 내전을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한 최전방으로 여겼다.[203] 53개 국가에서 모인 약 30,000명의 국제 여단은 헌신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마드리드 공방전에서 파시스트 군대를 저지하는 업적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미국인 의용병으로 구성된 부대는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으로, 캐나다 의용군은 메켄지-파피뉴 여단으로 불렸다. 국제 여단의 상당수는 코민테른에 의해 모집되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에서는 5백명의 공산당원이 참전하였다. 윈스턴 처칠의 조카 에스먼드 로밀리와 같은 자유주의자들 역시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 여단에 합류하였다.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같은 지식인도 상당수 있었다.[203]
영국과 프랑스가 불간섭 조약을 체결하여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 여단의 참전은 공화파에게 사실상 유일한 병력 지원이었다.[204]
많은 국가 출신의 자원병들이 스페인에서 싸웠는데, 대부분은 공화파를 위해 싸웠다. 약 3만 2천 명이 국제여단에서 싸웠고, 추가로 3천 명 정도가 전국노동조합(CNT)(Confederación Nacional del Trabajo)과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POUM) 민병대원으로 싸웠다. POUM과 함께 싸운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조지 오웰과 소규모의 ILP 대표단이었다. 약 2천 명의 포르투갈 좌파 인사들이 공화파를 위해 싸웠고, 여러 부대에 배치되었다.[69] 많은 비스페인인들은 급진적인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단체와 연계되어 있었고, 스페인 공화국이 파시즘에 대한 전쟁의 최전선이라고 믿었다. 약 4만 명의 외국인이 여단에서 싸웠지만, 어느 특정 시점에도 1만 8천 명을 넘지 않았다. 그들은 53개국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상당수는 프랑스(1만 명), 나치 독일과 오스트리아(5천 명), 이탈리아(3,350명) 출신이었다. 소련, 미국, 영국,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및 캐나다 각각 1천 명 이상이 있었다. 독일인들로 구성된 탈만 대대와 이탈리아인들로 구성된 가리발디 대대는 마드리드 포위전 중에 그들의 부대를 구별했다. 미국인들은 제15국제여단("아브라함 링컨 여단")과 같은 부대에서 싸웠고, 캐나다인들은 맥켄지-파피노 대대에 합류했다.
국제여단은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지원되었는데, 7월 봉기 직후 여단을 모으기 위한 프라하 회의를 시작으로 인민전선을 위한 대대적인 선전 캠페인이 이어졌다. 전 세계 공산당들은 인민전선을 위한 대대적인 선전 캠페인을 시작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스페인으로 갔다.
많은 국제 사회주의 조직을 비롯한 반파시즘 운동이 이 전쟁에 맞서 결속했다. 국제여단이 조직되어 어니스트 헤밍웨이, 후에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된 앙드레 말로 등이 참가했고, 일본인으로는 잭 시로이(ジャック白井)라는 인물이 1937년 7월 브루네테 전투(Batalla de Brunete)에서 전사했다(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일본인 참가자도 몇 명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성에는 코민테른이 깊이 관여했으며, 구성원은 지식인과 학생 20%, 노동자 80%였고, 전체 구성원의 60~85%는 공산당원이었다. 더욱이, 전투에서 소모를 거듭한 결과, 말기에는 국제여단이라고 하면서도 병사의 대다수가 스페인인으로 교체된 부대도 있었다고 한다.[170]
최초의 국제여단은 1936년 10월에 결성된 제11국제여단이다. 그 후 제12~15국제여단이 결성되었다.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국제여단에는 11 이후의 번호가 할당되어 있다.
전쟁 종결 직전 국제여단은 영국 외무성의 "외국군을 양측 모두 동일한 수준으로 철수시킨다"는 제안에 따라 해산했다. 인민전선에게는 엄혹한 전황 속에서의 이 결단은 국제여단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고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소련은 스페인 공화국 정부에게 군사물자를 지원하였다. 내전 기간 동안 지원된 군수 물자는 비행기 806기, 전차 362대, 야포 1,555문 등이었다.[205] 또한 소련은 국제 연맹의 불간섭 조약을 무시하고 소수의 군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히틀러와 비밀리에 불가침 조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직접적인 지원은 제한적이었다.[206] 대신에 군자금으로 상당한 양의 금을 스페인 은행으로 보냈다. 이때 보내진 510톤의 금은 모스크바 황금으로 알려져 있다.[207]
소련은 약 700명의 군인을 파견하였다. 독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의용군"이라 불린 이들은 전차와 전투기를 운용하였다. 이들의 참전은 "X 작전"이라 불렸다.[208]
소련 서기장 요셉 스탈린은 비간섭 협정과 국제 연맹의 금수 조치를 어기고 공화파 세력에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여 그들의 유일한 주요 무기 공급원이 되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달리 스탈린은 은밀히 이렇게 하려고 했다. 소련이 공화파에게 제공한 물자에 대한 추산은 항공기 634~806대, 탱크 331~362대, 포병 1,034~1,895문으로 다양하다. 스탈린은 또한 작전 X라고 불리는 무기 선적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소련군의 10과를 창설했다. 스탈린이 공화파를 돕는 데 관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의 품질은 일관되지 않았다. 제공된 많은 소총과 야포는 오래되거나 쓸모없었지만, T-26과 BT-5 탱크는 현대적이고 효과적이었다. 그들이 공급한 항공기는 그들 자신의 부대와 최신이었지만, 국민당을 위한 독일 항공기는 전쟁이 끝날 무렵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36년 8월부터 매일 한 척 이상의 배가 러시아의 지원 물품을 싣고 스페인의 지중해 항구에 도착했다. 탄약, 소총, 기관총, 수류탄, 포병, 트럭, 소련 요원, 기술자, 교관 및 선전가들이었다. 러시아에서 스페인으로의 무기 이동은 매우 느렸다. 많은 선적이 손실되거나 불완전했다. 배들은 가짜 갑판 아래에 무기를 숨겼다. 바다에서 소련 선장들은 기만적인 깃발과 도색 계획을 사용하여 국민당의 탐지를 피했다.
소련은 스페인에 2,000~3,000명의 군사 고문을 파견했다. 소련의 병력 투입은 한때 500명 미만이었지만, 소련 자원병들은 특히 전쟁 초기에 소련제 탱크와 항공기를 운용했다. 공화파 측의 모든 군사 부대의 스페인 사령관 옆에는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동등한 계급의 "정치위원"이 있었다. 소련은 또한 공화파 후방에 인민 내무 인민위원회(NKVD)를 운영했다. 공산주의 인물들은 좌파 인물들을 살해하는 작전을 이끌었다.[70][71]
멕시코는 멕시코는 공식적으로 스페인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였으며, 2백만 달러 규모의 지원과 벨랑카 CH-300 등의 전투기를 지원하였다.[72] 멕시코는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이 공화파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멕시코군에서 사용되던 구형 항공기를 공화파에 제공하는 등 후방 지원을 했다. 또한 내전 종결 후에는 많은 공화파 병사들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카르데나스 자신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고 중남미에 많은 포퓰리즘 정치가였지만, 공화파에 이해를 보였다. 또한 노동자를 중심으로 공화파에 동조하는 계층도 존재했고, 일부는 의용병이 된 사람도 있었다.[72]
그러나 멕시코 내부 여론은 다수가 프랑코파의 승리를 원하는 것이었다. 멕시코 전체가 공화파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고, 전통적 보수층이나 파시즘 단체인 "Revolutionary Mexicanist Action"(일명: 금셔츠단)을 중심으로 프랑코파 지지자들도 다수 존재했다.[72]
5. 2. 1. 국제 여단
세계 각국에서 스페인 '민주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의용병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아나키즘,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 극좌파, 자유주의등 다양한 이념을 가졌으며, 국제 여단이라 불렸다. 이들은 스페인 내전을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한 최전방으로 여겼다.[203] 53개 국가에서 모인 약 30,000명의 국제 여단은 헌신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마드리드 공방전에서 파시스트 군대를 저지하는 업적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미국인 의용병으로 구성된 부대는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으로, 캐나다 의용군은 메켄지-파피뉴 여단으로 불렸다. 국제 여단의 상당수는 코민테른에 의해 모집되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에서는 5백명의 공산당원이 참전하였다. 윈스턴 처칠의 조카 에스먼드 로밀리와 같은 자유주의자들 역시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 여단에 합류하였다.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같은 지식인도 상당수 있었다.[203]
영국과 프랑스가 불간섭 조약을 체결하여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 여단의 참전은 공화파에게 사실상 유일한 병력 지원이었다.[204]
많은 국가 출신의 자원병들이 스페인에서 싸웠는데, 대부분은 공화파를 위해 싸웠다. 약 3만 2천 명이 국제여단에서 싸웠고, 추가로 3천 명 정도가 전국노동조합(CNT)(Confederación Nacional del Trabajo)과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POUM) 민병대원으로 싸웠다. POUM과 함께 싸운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조지 오웰과 소규모의 ILP 대표단이었다. 약 2천 명의 포르투갈 좌파 인사들이 공화파를 위해 싸웠고, 여러 부대에 배치되었다.[69] 많은 비스페인인들은 급진적인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단체와 연계되어 있었고, 스페인 공화국이 파시즘에 대한 전쟁의 최전선이라고 믿었다. 약 4만 명의 외국인이 여단에서 싸웠지만, 어느 특정 시점에도 1만 8천 명을 넘지 않았다. 그들은 53개국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상당수는 프랑스(1만 명), 나치 독일과 오스트리아(5천 명), 이탈리아(3,350명) 출신이었다. 소련, 미국, 영국,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및 캐나다 각각 1천 명 이상이 있었다. 독일인들로 구성된 탈만 대대와 이탈리아인들로 구성된 가리발디 대대는 마드리드 포위전 중에 그들의 부대를 구별했다. 미국인들은 제15국제여단("아브라함 링컨 여단")과 같은 부대에서 싸웠고, 캐나다인들은 맥켄지-파피노 대대에 합류했다.
국제여단은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지원되었는데, 7월 봉기 직후 여단을 모으기 위한 프라하 회의를 시작으로 인민전선을 위한 대대적인 선전 캠페인이 이어졌다. 전 세계 공산당들은 인민전선을 위한 대대적인 선전 캠페인을 시작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스페인으로 갔다.
소련 서기장 요셉 스탈린은 비간섭 협정과 국제 연맹의 금수 조치를 어기고 공화파 세력에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여 그들의 유일한 주요 무기 공급원이 되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달리 스탈린은 은밀히 이렇게 하려고 했다. 소련이 공화파에게 제공한 물자에 대한 추산은 항공기 634~806대, 탱크 331~362대, 포병 1,034~1,895문으로 다양하다. 스탈린은 또한 작전 X라고 불리는 무기 선적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소련군의 10과를 창설했다. 스탈린이 공화파를 돕는 데 관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의 품질은 일관되지 않았다. 제공된 많은 소총과 야포는 오래되거나 쓸모없었지만, T-26과 BT-5 탱크는 현대적이고 효과적이었다. 그들이 공급한 항공기는 그들 자신의 부대와 최신이었지만, 국민당을 위한 독일 항공기는 전쟁이 끝날 무렵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36년 8월부터 매일 한 척 이상의 배가 러시아의 지원 물품을 싣고 스페인의 지중해 항구에 도착했다. 탄약, 소총, 기관총, 수류탄, 포병, 트럭, 소련 요원, 기술자, 교관 및 선전가들이었다. 러시아에서 스페인으로의 무기 이동은 매우 느렸다. 많은 선적이 손실되거나 불완전했다. 배들은 가짜 갑판 아래에 무기를 숨겼다. 바다에서 소련 선장들은 기만적인 깃발과 도색 계획을 사용하여 국민당의 탐지를 피했다.
소련은 스페인에 2,000~3,000명의 군사 고문을 파견했다. 소련의 병력 투입은 한때 500명 미만이었지만, 소련 자원병들은 특히 전쟁 초기에 소련제 탱크와 항공기를 운용했다. 공화파 측의 모든 군사 부대의 스페인 사령관 옆에는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동등한 계급의 "정치위원"이 있었다. 소련은 또한 공화파 후방에 인민 내무 인민위원회(NKVD)를 운영했다. 공산주의 인물들은 좌파 인물들을 살해하는 작전을 이끌었다.[70][71]
소련 다음으로 폴란드는 공화국에 대한 두 번째로 큰 무기 공급국이었고, 이탈리아와 독일을 고려할 때 네 번째로 큰 무기 공급국이었다. 폴란드는 전쟁 내내 공화파 스페인에 무기를 판매했는데, 그들의 정부가 국민당을 지지했기 때문에 순전히 경제적 이익에 의한 것이었다. 폴란드는 비간섭 의무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 정부 관리들과 군부는 판매를 상업 거래로 위장했다. 무기는 낡고, 이류였으며, 값이 비쌌다. 판매액이 4천만 달러에 달하고 전체 공화파 군사 지출의 최대 7%를 차지했지만, 기관총과 같은 일부 품목에서는 전달된 모든 무기의 50%를 차지했을 수도 있다.[72]
미국과 ABC 국가 및 페루와 같은 주요 라틴 아메리카 정부와 달리 멕시코 정부는 공화파를 지원했다. 멕시코는 프랑스-영국의 비간섭 제안을 따르는 것을 삼가하고, 2만 정의 소총과 2천만 발의 탄약을 포함한 200만 달러의 원조와 물질적 지원을 제공했다. 멕시코는 외교적 지원을 제공하고 스페인 지식인과 공화파 가족의 고아들을 포함한 약 5만 명의 난민을 위한 피난처를 마련했다.
프랑스 총리 레옹 블룸은 스페인에서 국민당 세력의 성공이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의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포위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공화국에 동정적이었다. 처음에는 공화파를 돕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비간섭 협정에 서명한 후, 프랑스는 공화파에게 항공기를 제공했다.[73] 그리고 공화파를 돕기 위해 전투기 조종사와 기술자들을 파견했다. 은밀한 지원은 1936년 12월에 끝났지만, 국민당에 대한 프랑스의 개입 가능성은 전쟁 내내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었다.
많은 국제 사회주의 조직을 비롯한 반파시즘 운동이 이 전쟁에 맞서 결속했다. 국제여단이 조직되어 어니스트 헤밍웨이, 후에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된 앙드레 말로 등이 참가했고, 일본인으로는 잭 시로이(ジャック白井)라는 인물이 1937년 7월 브루네테 전투(Batalla de Brunete)에서 전사했다(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일본인 참가자도 몇 명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성에는 코민테른이 깊이 관여했으며, 구성원은 지식인과 학생 20%, 노동자 80%였고, 전체 구성원의 60~85%는 공산당원이었다. 더욱이, 전투에서 소모를 거듭한 결과, 말기에는 국제여단이라고 하면서도 병사의 대다수가 스페인인으로 교체된 부대도 있었다고 한다.[170]
최초의 국제여단은 1936년 10월에 결성된 제11국제여단이다. 그 후 제12~15국제여단이 결성되었다.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국제여단에는 11 이후의 번호가 할당되어 있다.
전쟁 종결 직전 국제여단은 영국 외무성의 "외국군을 양측 모두 동일한 수준으로 철수시킨다"는 제안에 따라 해산했다. 인민전선에게는 엄혹한 전황 속에서의 이 결단은 국제여단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고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5. 2. 2. 소련
소련은 스페인 공화국 정부에게 군사물자를 지원하였다. 내전 기간 동안 지원된 군수 물자는 비행기 806기, 전차 362대, 야포 1,555문 등이었다.[205] 또한 소련은 국제 연맹의 불간섭 조약을 무시하고 소수의 군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히틀러와 비밀리에 불가침 조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직접적인 지원은 제한적이었다.[206] 대신에 군자금으로 상당한 양의 금을 스페인 은행으로 보냈다. 이때 보내진 510톤의 금은 모스크바 황금으로 알려져 있다.[207]소련은 약 700명의 군인을 파견하였다. 독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의용군"이라 불린 이들은 전차와 전투기를 운용하였다. 이들의 참전은 "X 작전"이라 불렸다.[208]
소련 서기장 요셉 스탈린은 비간섭 협정과 국제 연맹의 금수 조치를 어기고 공화파 세력에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여 그들의 유일한 주요 무기 공급원이 되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달리 스탈린은 은밀히 이렇게 하려고 했다. 소련이 공화파에게 제공한 물자에 대한 추산은 항공기 634~806대, 탱크 331~362대, 포병 1,034~1,895문으로 다양하다. 스탈린은 또한 작전 X라고 불리는 무기 선적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소련군의 10과를 창설했다. 스탈린이 공화파를 돕는 데 관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의 품질은 일관되지 않았다. 제공된 많은 소총과 야포는 오래되거나 쓸모없었지만, T-26과 BT-5 탱크는 현대적이고 효과적이었다. 그들이 공급한 항공기는 그들 자신의 부대와 최신이었지만, 국민당을 위한 독일 항공기는 전쟁이 끝날 무렵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36년 8월부터 매일 한 척 이상의 배가 러시아의 지원 물품을 싣고 스페인의 지중해 항구에 도착했다. 탄약, 소총, 기관총, 수류탄, 포병, 트럭, 소련 요원, 기술자, 교관 및 선전가들이었다. 러시아에서 스페인으로의 무기 이동은 매우 느렸다. 많은 선적이 손실되거나 불완전했다. 배들은 가짜 갑판 아래에 무기를 숨겼다. 바다에서 소련 선장들은 기만적인 깃발과 도색 계획을 사용하여 국민당의 탐지를 피했다.
소련은 스페인에 2,000~3,000명의 군사 고문을 파견했다. 소련의 병력 투입은 한때 500명 미만이었지만, 소련 자원병들은 특히 전쟁 초기에 소련제 탱크와 항공기를 운용했다. 공화파 측의 모든 군사 부대의 스페인 사령관 옆에는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동등한 계급의 "정치위원"이 있었다. 소련은 또한 공화파 후방에 인민 내무 인민위원회(NKVD)를 운영했다. 공산주의 인물들은 좌파 인물들을 살해하는 작전을 이끌었다.[70][71]
5. 2. 3. 멕시코
멕시코는 멕시코는 공식적으로 스페인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였으며, 2백만 달러 규모의 지원과 벨랑카 CH-300 등의 전투기를 지원하였다.[72] 멕시코는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이 공화파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멕시코군에서 사용되던 구형 항공기를 공화파에 제공하는 등 후방 지원을 했다. 또한 내전 종결 후에는 많은 공화파 병사들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카르데나스 자신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고 중남미에 많은 포퓰리즘 정치가였지만, 공화파에 이해를 보였다. 또한 노동자를 중심으로 공화파에 동조하는 계층도 존재했고, 일부는 의용병이 된 사람도 있었다.[72]그러나 멕시코 내부 여론은 다수가 프랑코파의 승리를 원하는 것이었다. 멕시코 전체가 공화파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고, 전통적 보수층이나 파시즘 단체인 "Revolutionary Mexicanist Action"(일명: 금셔츠단)을 중심으로 프랑코파 지지자들도 다수 존재했다.[72]
6. 경과
청색 - 프랑코파 반군
적색 - 제2공화국 정부]]
내란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파 반란군의 우세로 진행되었다. 1937년 바스크 북부지방과 아스투리아스 지방이 반란군에 점령되었고, 1938년 12월 카탈루냐 지방이 반란군의 공격을 받아 1939년 3월 5일 공화파 정부는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3월 7일에는 마드리드에서 공화파 내의 비 공산당 세력이 공산당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또다른 내란이 발생하였고 3월 28일 반란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하였다.[209]
초기 반란 지도자는 모라였으나, 톨레도 함락 등의 전공을 세우며 군 내부에서 명성을 높인 프랑코가 9월 29일 반란군 총사령관 겸 수반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10월 1일에는 총통에 취임했다. 혁명 정부의 정강에서 유럽 문명을 적화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해 결기했다고 언급하며, 국민 복지를 목표로 전체주의에 기반한 권위 국가를 건설할 방침을 제시했다.[160] 프랑코는 파시즘 정권을 수립했던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모로코의 프랑코 군은 양국의 수송기 협력으로 본토 각지로 공수되어 조기 군사 전개를 달성했다. 이웃 국가 포르투갈에 성립되어 있던 살라자르의 독재 정권도 프랑코를 도왔고, 일본도 소량이나마 반란군에 무기를 지원했다, 아일랜드도 에오인 오더피/Eoin O'Duffy영어가 이끄는 의용군이 반란군에 참전했다.
독일에서는 공군의 "콘도르 군단"과 그 지휘하에 행동하는 전차 부대, 수척의 함정, 군사 고문이 파견되었다. 이탈리아는 프랑코에게 최대의 원조국이었으며, 4개 사단으로 구성된 스페인 원정군(CTV)과 항공 부대, 해군 부대가 파견되었고, 물자 지원을 포함하면 원조액은 당시 금액으로 14조 리라에 달한다. 포르투갈은 최대 2만 명 규모의 군대를 파견했다.
당시 파시즘에 대해 유화 정책을 취하고 있던 영국, 미국은 내전이 세계 대전을 유발할 것을 우려하여 중립을 선택했다. 이웃 국가 프랑스에서는 레옹 블룸을 총리로 하는 인민전선 내각이 성립되어, 초기에는 공군을 중심으로 지원을 했으나, 정권이 붕괴되고, 결국 영국,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립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 때문에 인민전선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는 소련과 멕시코로부터만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소련의 군사 지원은 막대했으나 유상이었고, 멕시코의 군사적 지원은 전체적으로 보면 아주 적었다. 그러나 국제 여단에 각국에서 의용병이 달려온 것은 반파시즘의 결속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또한 프랑코의 반란과 동시에, 공장 노동자와 농민 등에 의한 혁명이 발발하여 지방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 혁명은 주로 무정부주의자와 사노당 좌파의 지지자들에 의해 일어났으나, 소련에게 이 혁명은 불편한 것이었기에, 실태를 은폐하여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혁명" 단계라고 주장했다. 또한 인민전선 정부에게도 혁명은 영국과 프랑스의 감정을 해칠 수 있었기에, 역시 언급을 피했다.
내전 초기, 인민전선 측은 바스크, 카탈루냐, 발렌시아, 마드리드, 라 만차, 안달루시아 등 국토의 대부분을 확보한 반면, 반란군은 갈리시아와 레온만 확보하고 있었다.
반란군은 처음 마드리드를 함락시키려 했으나, 인민전선 측은 국제여단 등에 의해 병력이 증강되었고, 시민들의 협력으로 참호가 구축되었으며, 소련으로부터 지원 무기가 도착하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결국 마드리드는 내전 종전까지 인민전선 측이 장악한 채였다. 이 때문에 내전은 장기화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프랑코 장군은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항만 지역과 공업 지대 장악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반란군은 초기부터 프랑코가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프랑코가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얻어냈고, 지도자였던 모라의 비행기 사고사(1937년 6월) 등이 겹쳐 권력 집중이 진행되어, 파랑헤당과 다른 정당을 통합·개편하여 당수에 취임하고, 다른 정당의 활동을 금지시켜 파시즘 체제를 공고히 했다.
반란군의 북부 제압은 확실하게 진행되어, 1937년 봄에는 북부 바스크 지방이 다른 인민전선 지역으로부터 단절되어 고립되었고, 빌바오(6월), 산탄데르(8월), 히혼(10월) 등 주요 도시가 함락되어 아스투리아스부터 바스크까지 완전히 반란군에 점령되었다. 그 사이 4월 26일에는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가 독일에서 파견된 의용군 항공 부대 콘도르 군단의 Ju 52 수송기를 개조한 폭격기를 중심으로 한 24대의 공습(게르니카 폭격)을 받았다. 이는 전선으로 통하는 철도와 도로 등 교통의 요충지였던 게르니카를 파괴하여 공화국군의 보급을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부수적으로 약 300명의 시민 사상자가 발생했다.
더욱이, 1938년에 들어서면서 남부에서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대부분이 프랑코 측에 점령되었고, 중부에서도 에브로 강 남안 지역의 제압으로 반란군은 발렌시아 지방 북부에서 지중해 연안에까지 도달했다. 이로 인해 공화국 측의 세력은 카탈루냐와 마드리드, 라 만차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카탈루냐의 고립화가 진행되었다.
초기 소련에서 지원받은 전투기(I-15(항공기) 및 I-16(항공기) 계열)와 폭격기(SB(항공기))는 반군은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기를 성능 면에서 압도했고, 전장의 제공권은 스페인 공화국 정부 측에 있었다. 소련제 전차와 장갑차 또한 기동성, 공격력, 방어력 모든 면에서 반군 측 장갑 전투 차량을 압도하여 마드리드 공방전에서는 이탈리아군 전차 부대를 일방적으로 궤멸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공화파 내부의 불화와 비효율적인 군대 운영으로 인해 충분한 우위를 활용하지 못했다. 애초에 노동자들은 군대를 적대시했기 때문에 전장에서도 공화군 군인들의 건의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반면 반군은 군대 조직의 질서를 유지했기에, 종종 병력과 물자에서 우세한 공화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더욱이 민병들은 당파별로 지휘 계통이 제각각이었고, 다른 당파의 군세가 패배하면 서로 기뻐하는 지경이었다. 급진적인 노동조합이자 노동자 자치(아나르코 신디칼리즘) 혁명을 지향하는 전국노동연합(CNT)과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FAI)은 반스타린주의 입장을 취하는 좌익 정당인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POUM)과 협력하여 지배 지역에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도입하려 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노동자들에 의한 공장 등의 몰수도 발생했다. 초기 패배 이후, 공화군은 드디어 군대 재건에 착수했지만, 그 과정에서 스페인 공산당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공화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당시 스페인은행은 외환보유고로 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보유량은 약 710톤으로 당시 세계 3위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반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적절한 보관 장소로 옮길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의 불개입 정책으로 무기 구매를 위한 신용 거래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현금 구매 자금으로 외화를 조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래서 두 가지 목적을 위해 공화국 측이 장악하고 있던 유일한 해군 기지인 카르타헤나의 동굴로 옮겨졌다.
초기에는 카르타헤나에서 프랑스은행으로 금을 수송하여 외화를 조달했다. 수송량은 200톤에 달했지만, 수송 지연과 프랑스은행의 자금 지급 승인에 어려움을 겪어 무기 조달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영국의 은행들은 이 거래를 "환영할 수 없는 목적"으로 간주하고 자금 인출을 지연시켰다.[163] 또한 반군은 자금 수령을 "마르크스주의자 일당과의 끔찍한 공동 범죄"이자 "약탈" 행위이며 은행법에 위반된다고 선전하며 소송 등을 통해 각국의 은행을 압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소련파를 중심으로 소련으로의 금 이송이 제기되었고, 소련도 이에 응했다.
소련으로 수송된 금은 약 510.08톤에 달했고, 당시 가치로 5억 달러를 넘었다. 그 대부분은 금괴가 아니라 각국의 금화였다. 또한 골동품 가치가 있는 금화도 적지 않았다. 공화국 지원국인 소련은 무기와 인력을 지원했지만, 그 지원은 유상이었고, 금의 일부로 미국과 체코에서 자동차를 조달하여 스페인으로 보냈다. 전후, 프라우다는 1957년 4월 5일자에서 스페인은 금을 다 써버렸을 뿐만 아니라 소련에 5000만 달러의 차관이 남았다고 주장했지만, 소련 측은 거래 내역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받지 못했고, 오히려 소련이 금을 횡령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64] 현재는 소련에서 직접 보낸 물자, 각종 무기는 4700만 루블분이라고 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소련이 해외에서 조달한 물자는 포함되어 있지 않고, 수송 도중 반군 해군에 의해 저지된 부분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165] 어찌 되었든 공화국은 자금을 전부 소련에 넘겨준 꼴이 되었고, 소련은 물론이고 제3국의 무기 금수 해제를 위한 협상력도 상실했다. 또한 인민전선 내각 붕괴 직전에도, 아마도 프랑코 정권에 대한 앙갚음으로 금괴가 반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File:19361228_soviet_vessel_spanish_port_alicante_military_supplies_spanish_republic.jpg|thumb|left|250px|지원 물자를 알리칸테 항에 하역 중인 소련 화물선 "쿠르스크"(1936년 12월)
소련은 또한 내부 항쟁에 질려 인민전선의 지휘권을 장악하려 했고, 군사고문 등으로 위장한 NKVD 요원들이 현지에 파견되어 소련과 스페인 공산당의 방침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잇달아 체포하고 처형했다. 최대 지원국인 소련의 의향에 따라 내전의 진전과 함께 공산당은 점차 세력을 확장해 갔다. 아나키즘의 CNT·FAI와 트로츠키스트의 POUM은 코민테른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민테른의 통제 하에 있던 스페인 공산당은 그들을 비판하며 내부 갈등을 심화시켰다.
제4인터내셔널의 스페인 지부는 스탈린주의 공산당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과 CNT·FAI의 기회주의도 비판했지만, 그 세력은 수십 명(거의 외국인)을 넘지 못했고, 혁명에 현실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다.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마침내 공산당을 비롯한 인민전선 정부와 아나키스트·트로츠키스트가 충돌하여 (바르셀로나 5월 사건/Jornadas de Mayo de 1937es), 5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는 참사가 발생했다. 공산당은 반대파를 암살로 위협했지만, 잇따른 내분으로 국내외의 반발을 샀을 뿐만 아니라 지역 정당과도 공동 보조를 맞추기 어려웠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이 불개입 정책을 계속했기 때문에 소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국제 정세는 더욱 프랑코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가톨릭교회를 옹호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로마 교회는 프랑코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1938년 6월 바티칸이 프랑코 정권을 인정했다. 공화국 측에 남은 희망은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파시즘 대 반파시즘의 대립 구도가 유럽 전체로 확산되어 국제적 지원을 얻는 것이었지만, 9월의 뮌헨 협정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파시즘 세력에 대한 유화 정책을 계속할 것이 명백해지면서 이 기대도 무산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파시즘 세력이 소련 등 공산주의 세력과 대립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소련의 지원을 받은 인민전선을 편들면 소련이라는 적에게 염을 보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938년 7월 25일, 공화파는 남북으로 분단된 지배 지역을 회복하려 에브로 강 주변에서 대공세를 펼쳤다(에브로 전투). 내전의 결전이 된 이 전투에서 공화군은 약 10만 명을 동원하여 총력을 기울였기에 초기에는 크게 전진했으나, 반군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포함한 증원을 받으면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결국 공화군은 점차 후퇴하여 11월 16일 붕괴되었다. 약 3개월간 계속된 전투에서 양측 모두 막대한 타격을 입었지만, 공화군은 반군의 약 2배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전력을 소모하여 사실상 조직적인 전투는 종료되었고, 반군의 승리가 결정적이 되었다.
1938년 12월부터 프랑코는 30만의 군세로 카탈루냐를 공격하여, 이듬해인 1939년 1월 말 주도 바르셀로나를 함락시켰다. 인민전선을 지지하는 많은 시민들이 겨울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탈출했다. 2월 말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프랑코 정권을 국가 승인했고, 아사냐는 대통령직에서 사퇴했으며, 인민전선 정부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프랑코 측은 3월에 내전의 최종 승리를 목표로 마드리드로 진격을 시작했고, 이에 맞서 공화파는 격렬한 항전을 목표로 하는 공산당과 이미 전의를 상실한 아나키스트 간의 내분이 발생하는 등 붕괴 직전의 상태에 놓였다. 3월 28일 마드리드가 함락되었고, 프랑코군이 시내에 진주했다.[166] 3월 29일 프랑코는 "내전이 종결되었다"는 내용의 라디오 방송을 했다. 이 방송 직후 카르타헤나도 프랑코군에 점령되었다.[167]
3월 31일 스페인 전역이 반군에 의해 제압되었고, 4월 1일 프랑코에 의해 내전의 종결과 승리가 선포되었다.
6. 1. 1936년
1936년 7월 20일, 반란군의 사령관이었던 산후르호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면서, 반란군의 지휘 체계는 북쪽의 에밀리오 몰라와 남쪽의 프란시스코 프랑코로 양분되었다.[187] 7월 21일, 반란군은 스페인 해군의 기항지인 페롤을 점령하였다.[73][74] 7월부터 9월까지 몰라의 지휘 아래 베오르레기 카네 대령은 기푸스코아 주를 점령해 나갔다.[116] 9월 5일에는 이룬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스와의 국경을 봉쇄했고,[116] 9월 13일에는 산 세바스티안을 점령하였다.[116]9월 21일, 살라망카에서 열린 회의에서 반란군은 프랑코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187] 9월 27일에는 톨레도의 알카사르 포위전에서 승리하여[77]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10월 1일, 프랑코는 부르고스에서 국가 원수이자 군대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10월, 프랑코 군대는 마드리드를 향해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150] 11월 6일, 공화국 정부는 발렌시아로 이전했고,[171] 11월 8일 마드리드에 대한 주요 공격이 시작되었다.[177] 11월 27일까지 3,000여 명의 국제여단이 참여했으나,[177] 마드리드 함락에는 실패했다.[177] 이후 프랑코는 마드리드를 포위하고 폭격을 가했다.[191]
6. 2. 1937년
1937년 1월과 2월에 걸쳐 프랑코는 마드리드를 함락하고자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월 8일 말라가가 프랑코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2월 21일 국제 연맹의 불간섭 조약이 발효되어 파시스트 측의 외국 병력 참전은 불법 교전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3월 7일 나치 독일은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콘도르 군단을 파병하면서 하인켈 He 51 전폭기를 스페인에 투입하였다. 4월 26일 독일의 전폭기는 게르니카를 폭격하여 수백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이틀 뒤 프랑코는 게르니카를 함락하였다.게르니카 함락 이후 공화군은 반격에 나섰다. 프랑코가 마드리드 함락을 위해 전력을 쏟는 사이 공화군은 세고비아를 탈환하였다. 7월 3일 공화군은 반란군의 부사령관이었던 에밀리오 몰라를 사살하였다. 공화군은 마드리드를 포위하고 있던 프랑코군에 대적하기 위해 브루네테 전투에서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고, 그 결과 마드리드 포위를 분쇄할 수 있었다.


8월에 프랑코는 아라곤 지방을 공격하여 산탄데르를 점령하였다. 이후 두 달간 벌어진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전투에서 바스크 지방의 공화군은 항복하였다. 프랑코의 군대는 스페인 북부지역을 점령해 나갔으며 11월에는 발렌시아로 진격해 오기 시작하였다. 결국 공화파 정부는 바르셀로나로 이동하였다.
6. 3. 1938년
테루엘 전투에서 반란군이 승리하면서 내전의 상황은 반란군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1938년 1월, 공화군은 테루엘을 점령하였으나, 프랑코는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의 지원을 받아 2월 22일 테루엘을 재탈환하였다.[210]3월 7일 프랑코 측은 아라곤 공격을 감행, 4월 17일 지중해 연안까지 진격하여 정부 진영을 남북으로 양분하였다. 5월, 정부는 강화 조약을 요청하였으나,[211]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 협상은 결렬되었고 프랑코군은 발렌시아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7월까지 계속된 공방 끝에 공화군은 XYZ 방어전을 사수할 수 있었다.
7월 24일부터 11월 26일까지 공화국 정부는 에브로 전투를 통해 대대적인 지원을 호소하였으나, 영국이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히틀러의 야심을 포기하게 하는 대가로 프랑코와 뮌헨 협정을 준비하면서 실패하였다.[212] 아프리카 군단이 주축이 된 4만 명의 프랑코파 군대에 맞서 공화군은 에브로 전투에서 분투하였으나 병력과 무기 열세로 패배하였다. 신년을 이틀 앞둔 세밑에 프랑코는 군대를 카탈루냐 지방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6. 4. 1939년
1939년 초, 반란군은 신년이 시작된 두 달 동안 카탈루냐 지방을 빠르게 점령해 나갔다. 1월 15일 타라고나가 함락되었고, 1월 26일에는 바르셀로나가 함락되었으며, 2월 2일에는 지로나가 함락되었다. 2월 27일, 영국과 프랑스는 프랑코 체제를 인정하였다.마드리드를 비롯한 몇몇 지역만이 공화군 최후의 보루로 남았다. 그러나 인민전선파 내부에서도 철저한 항전을 목표로 한 스페인 공산당과 전의(戰意)를 상실한 아나키스트 사이에 내분이 발생했다. 1939년 3월 5일, 세히스문도 카사도(Segismundo Casado) 대령과 후안 네그린(Juan Negrín) 총리에 맞서 훌리안 베스테이로(Julián Besteiro) 정치인이 이끄는 공화군은 국방위원회(Consejo Nacional de Defensa, CND)를 결성하여 평화 협상을 시작했고, 네그린은 3월 6일에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나 마드리드 주변의 공산당 군대가 군사정부에 맞서 봉기하며 내전 속의 또 다른 짧은 내전이 시작되었다. 카사도는 그들을 물리치고 국민군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지만,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하였다.
3월 28일 마드리드가 점령되었고, 그 다음날에는 발렌시아 역시 점령되었다. 3월 31일에는 스페인 전역이 반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4월 1일, 프랑코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스페인 공화국 정부가 항복하였음을 선언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프랑코가 집권하자 잔혹한 보복이 뒤따랐다. 수천 명의 공화군이 투옥되었고 최소 30,000명이 처형되었다. 이때의 희생자 수가 50,000명에 달한다는 기록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노역을 해야만 하였다.
전쟁 후 공화파의 상당수가 망명하였다. 프랑스로 피신한 사람의 수는 50만 명에 달한다. 1944년 프랑코에 대항하는 게릴라인 스페인 마퀴스가 결성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와 연대하여 나치에 맞섰다. 스페인 마퀴스는 1950년대까지 활약하였다.

7. 결과
내란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의 수는 5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또한 내전 후에도 승리한 반란군 측은 반대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및 보복을 시작했다. 심지어는 영아를 조직적으로 유괴해 인신 매매까지 자행하였다.[218]
스페인의 총통이 된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일인독재정치를 계속하였다. 또한 프랑코의 사후(死後)에 부르봉 왕조가 복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스페인 내전의 사망자 수는 명확하지 않으며, 특히 전쟁과 전후 탄압과 관련된 부분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스페인에서 특히 많은 일반적인 역사 서술 작품은 어떤 수치도 제시하지 않거나, 최선의 경우 일반적인 설명만 제시한다.[105][106][107] 특히 영어권 역사가들은 일부 일반적인 추정치를 제시하려는 의지가 더 강하지만, 일부는 추정치를 수정했으며, 일반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그리고 그 수치는 100만 명에서 25만 명까지 다양하다.
제시된 총계에는 일반적으로 다양한 범주가 포함되거나 제외된다. 살인 또는 "폭력 사망"에 중점을 둔 학자들은 가장 일반적으로 다음을 열거한다. (1) 전투 및 전투 관련 사망 (2) 내전이 끝날 때까지 기록된 사법 및 초법적 후방 테러 (3) 군사 작전, 일반적으로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
사망자 수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영국의 역사가인 안토니 비보어(Antony Beevor)는 내전에 관한 그의 저서에서 프랑코의 그 후 "백색 테러(White Terror (Spain))"로 인해 20만 명이 사망했고, "적색 테러(Red Terror (Spain))"로 3만 8천 명이 사망했다고 썼다.[119] 훌리오 루이스(Julius Ruiz)는 "수치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공화파 지역에서는 최소 3만 7843건의 처형이, 국민파 스페인(Nationalist Spain)에서는 최대 15만 건의 처형(전쟁 후 5만 건 포함)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120] 역사가 마이클 세이드먼(Michael Seidman)은 국민군이 약 13만 명, 공화파가 약 5만 명을 살해했다고 밝혔다.
2008년 스페인 판사 발타사르 가르손(Baltasar Garzón)은 1936년 7월 17일부터 1951년 12월까지 11만 4266명의 처형 및 실종 사건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조사된 처형 중에는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시인이자 극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의 처형도 포함되어 있다.[121] 프랑코 정권 시대에는 가르시아 로르카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금지되었다.
2016년 이후 증인 증언, 원격 감지 및 법의학 지구물리학(forensic geophysics) 기술을 결합하여 집단 매장지(mass grave)를 찾는 연구가 시작되었다.[122]
헬렌 그레이엄, 폴 프레스턴, 안토니 비보어, 가브리엘 잭슨 및 휴 토머스와 같은 역사가들은 국민군 진영 뒤에서의 집단 처형은 국민군 반란 당국에 의해 조직되고 승인된 반면, 공화파 진영 뒤에서의 처형은 공화국 국가의 붕괴와 혼란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반대로 스탠리 페인, 훌리오 루이스[123] 및 호세 산체스와 같은 역사가들은 공화파 지역의 정치적 폭력이 사실상 좌익에 의해 조직되었다고 주장한다.
국민군의 잔혹 행위는 흔히 스페인에서 "좌익"의 흔적을 말살하기 위해 당국이 자주 명령한 것이었다. "청소"(limpieza)라는 개념은 반군 전략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했으며, 어떤 지역이 점령된 직후 즉시 시작되었다. 사망자 수에 대한 추산은 다양하다. 역사가 폴 프레스턴은 반군에 의해 처형된 최소 인원을 13만 명으로 추산하는 반면,[125] 앤서니 비버는 그 수치를 훨씬 더 높은 약 20만 명으로 추산한다. 이 폭력은 정권의 이름으로 군대, 민간경찰, 팔랑헤가 반군 지역에서 자행했다. 훌리오 루이스는 국민군이 전쟁 중 10만 명을 살해했고, 그 직후 최소 2만 8천 명을 처형했다고 보고한다. 전쟁 초기 3개월이 가장 유혈이 낭자했으며, 1936년부터 1975년까지 프랑코 정권에 의해 자행된 모든 처형의 50~70%가 이 기간에 발생했다.[126] 초기 살해는 중앙 집권화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 지역 사령관의 손에 달려 있었다. 스탠리 페인과 헤수스 팔라시오스에 따르면, 몰라(Mola) 장군은 자신의 계획에서 폭력의 필요성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위에 놀랐다고 한다. 분쟁 초기에 그는 좌익 민병대원들을 즉각 처형하라고 명령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꿔 명령을 철회했다.
전쟁 초기 몇 주 동안 반동 집단에 의해 이러한 행위가 많이 저질러졌다. 여기에는 교사 처형도 포함되었다. 제2 스페인 공화국이 세속주의를 증진하고 종교 교육 기관을 폐쇄하여 학교에서 교회의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노력은 국민군에 의해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국민군이 점령한 도시에서는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고, 원치 않는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여기에는 비전투원인 노동조합원, 인민전선 정치인, 프리메이슨으로 의심되는 사람들, 바스크,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갈리시아 민족주의자, 공화파 지식인, 공화파로 알려진 사람들의 친척, 그리고 인민전선에 투표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국민군은 쿠데타 초기 그들을 지지하기를 거부한 군 장교들도 자주 살해했다. 초기 몇 달 동안의 많은 살해는 종종 자경단과 민간인 처형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국민군 지도부는 종종 그들의 행동을 묵인하거나 심지어 지원하기도 했다. 전후 처형은 군사 재판에 의해 수행되었지만, 피고는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었다. 처형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전쟁 중 공화국 하에서 수행했던 정치 활동이나 직책 때문에 처형되었지만, 공화국 시절에 스스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도 처형 대상에 포함되었다. 카탈루냐에 대한 2010년 분석에 따르면, 국민군의 처형은 이전에 더 큰 폭력을 경험한 지역을 점령했을 때 더 많이 발생했는데, 이는 국민군 친화적인 민간인이 이전 행동에 대한 복수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국민군에 고발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마이클 자이드먼은 국민군의 사망자 수가 더 많은 것은 부분적으로 군사적 성공으로 인한 영토 확장과 적에 대한 폭력을 행사할 기회 증가 때문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쟁 중 프랑코 국가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처형은 감소했다.
국민군은 세비야에서 민간인을 학살하여 약 8,000명이 사살되었고, 코르도바에서는 1만 명이 사망했으며, 혁명가들에 의해 1,000명 이상의 지주와 보수주의자들이 살해된 후 바다호스에서는 6,000~1만 2,000명이 사망했다. 그라나다에서는 노동자 계급 지역이 포격을 당했고 우익 부대가 정부 지지자들을 자유롭게 살해했으며, 최소 2,000명이 살해되었다.[127] 1937년 2월 말라가 함락 후 7,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빌바오가 함락되었을 때 수천 명이 투옥되었지만, 게르니카 사건이 국제적으로 국민군의 평판에 미친 영향으로 인해 평소보다 처형은 적었다. 아프리카 군대의 부대가 세비야와 마드리드 사이를 황폐화하고 약탈하면서 살해된 사람들의 수는 특히 계산하기 어렵다. 남부 스페인의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은 아프리카 군대와 함께 무력으로 토지를 되찾았는데, 공화정부가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나눠준 토지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농촌 노동자들이 처형되었고, 조롱조로 그들이 매장지라는 형태로 "토지 개혁"을 받았다고 농담을 했다.
국민군은 가톨릭 성직자들도 살해했다. 특히 빌바오 함락 후, 공화군의 군목으로 일했던 16명의 사제를 포함한 수백 명을 시골이나 묘지로 데려가 살해했다.
프랑코의 군대는 또한 20명의 개신교 목사를 살해하는 등 개신교도를 박해했다. 프랑코의 군대는 스페인에서 "개신교 이단"을 제거하려고 했다. 국민군은 또한 바스크 문화를 말살하려고 바스크인을 박해했다. 바스크 출처에 따르면, 약 2만 2천 명의 바스크인이 내전 직후 국민군에 의해 살해되었다.[128]
국민군 측은 공화파 지역에서 도시 공습을 실시했는데, 주로 콘도르 레기온의 독일 공군 자원봉사자들과 이탈리아 공군 자원봉사자들인 코르포 트루페 볼론타리에(Corpo Truppe Volontarie)에 의해 이루어졌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게르니카, 두랑고 등 여러 도시가 공격을 받았다. 게르니카 폭격이 가장 논란이 되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38년 초 바르셀로나에 특히 집중적인 폭격을 가했다. 일부 국민군 지도자들은 도시 폭격에 반대했는데, 예를 들어 비순응주의자로 유명한 야궤(Yagüe)와 모스카르도(Moscardó) 장군은 무차별적인 파괴에 항의했지만, 다른 국민군 지도자들, 특히 파시스트 성향의 지도자들은 폭격을 바르셀로나를 "청소"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마이클 자이드먼은 국민군의 테러가 국민군의 승리에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후방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지적한다. 러시아 백군은 내전에서 후방의 농민 반란, 산적, 군벌주의를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중국 국민당이 중국 내전 중 산적을 막지 못한 것은 정권의 정통성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반면 스페인 국민군은 자국 영토의 주민들에게 청교도적인 테러 질서를 부과했다. 그들은 후방에서 심각한 게릴라 활동을 겪지 않았고, 산악 지형에서 쉽게 발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산적이 스페인에서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지 않은 사실은 설명이 필요하다. 자이드먼은 심각한 테러와 식량 공급 통제가 국민군 후방에서 게릴라전이 거의 발생하지 않은 것을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2009년 국민군 폭력에 대한 분석에 따르면, 미래의 반란을 조장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겨지는 개인과 집단을 표적으로 함으로써 살해가 국민군에 의해 전략적으로 사용되어 잠재적인 반대를 선제적으로 막았다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는 국민군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129]
학자들은 공화파가 장악한 지역에서 3만 8천 명에서 7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하며, 가장 일반적인 추정치는 약 5만 명이다.
정확한 수치에 관계없이 사망자 수는 선전 목적으로 양측 모두 과장하여 "백만 명의 죽음"이라는 전설을 만들어냈습니다. 프랑코 정부는 나중에 적색 테러 희생자 6만 1천 명의 이름을 제시했지만,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사망은 게르니카 폭격까지 공화국에 대한 외부의 지배적인 의견을 형성했습니다.
전쟁에 앞서 일어난 좌파 1936년 혁명은 처음 몇 달 동안 좌파 반교권주의 테러의 확대와 함께 진행되었으며, 7월 18일부터 31일 사이에만 839명의 종교인이 사망했고, 8월에는 10명의 주교 사망을 포함하여 2055명의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여 그 해 등록된 전체 희생자 수의 42%에 달했다.[132] 특히 주목할 만한 탄압은 전쟁 중 마드리드에서 자행되었습니다.
공화국 정부는 반교권주의적이었고, 전쟁이 시작되자 지지자들은 군사 반란 소식에 반응하여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을 공격하고 살해했습니다. 1961년 저서에서 당시 ''Ecclesia''지의 편집장이었던 스페인의 안토니오 몬테로 모레노 대주교는 전쟁 중 6,832명이 사망했으며, 그중 4,184명이 사제, 2,365명이 수도사와 수도원, 283명이 수녀(많은 수녀들은 죽기 전에 먼저 강간당했습니다.)였고, 13명의 주교도 포함된다고 썼는데, 비버를 포함한 역사가들은 이 수치를 받아들였습니다. 일부 살인은 극도의 잔혹함으로 자행되었고, 일부는 불에 타 죽었으며, 거세와 내장 제거에 대한 보고도 있습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갈등이 끝날 무렵 전국 성직자의 20%가 사망했습니다. 마드리드 근처 세로 데 로스 안헬레스(Cerro de los Ángeles)에서 1936년 8월 7일 공산주의 민병대에 의해 자행된 예수 성심(Sacred Heart of Jesus)의 "처형"은 종교 재산의 광범위한 파괴 중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이었습니다. 공화파가 일반적으로 통제하는 교구에서는 많은 비율, 종종 대다수의 세속적 사제들이 살해되었습니다. 마이클 세이드먼은 공화파가 성직자에 대한 증오가 다른 어떤 것보다 과도했다고 주장합니다. 지역 혁명가들이 부유하고 우익인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줄 수도 있었지만, 사제들에게는 거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직자와 마찬가지로 민간인도 공화국 지역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일부 민간인은 의심되는 파랑주의자로 처형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국민주의 지역에서 자행된 학살 소식을 듣고 공화파의 복수 행위로 사망했습니다. 단순히 가톨릭 미사에 참석한 가족들도 어린이를 포함하여 사냥당했습니다. 공화국 도시에 대한 공습도 또 다른 원인이었습니다. 상인과 기업가들은 공화파에 동정하지 않으면 총에 맞았고, 동정하면 대개 살아남았습니다. 위원회를 통해 가짜 정의가 추구되었는데, 소비에트 비밀 경찰 조직을 본떠 ''체카''라고 불렸습니다.
공화파 세력 간에 내분이 있었고, 스탈린주의를 따르는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POUM) (스탈린 반대 공산주의 정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을 불법 조직으로 선언했습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고문과 대량 처형과 같은 다른 공화파 세력에 대해 배신과 대량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조지 오웰은 그의 ''카탈루냐 찬가''에서 이를 기록했으며, 스탈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1984''와 ''동물농장''을 썼습니다.
국민주의자들의 성공이 증가하면서 압력이 높아짐에 따라 많은 민간인들이 경쟁하는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집단이 통제하는 위원회와 법정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후자의 일부 구성원은 카탈루냐에서 소련의 조언을 받는 공산주의 관리들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조지 오웰이 1937년 바르셀로나의 숙청에 대한 묘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카탈루냐 정치계의 경쟁 요소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가 이어졌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친선 대사관으로 피신했는데, 이곳은 전쟁 중 최대 8,500명의 사람들을 수용했습니다.
안달루시아의 론다(Ronda) 마을에서는 전쟁 첫 달에 512명의 의심되는 국민주의자들이 처형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 산티아고 카리요 솔라레스(Santiago Carrillo Solares)는 파라쿠엘로스 데 하라마(Paracuellos de Jarama) 근처에서 일어난 파라쿠엘로스 학살(Paracuellos massacre)에서 국민주의자들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습니다. 소련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포함하여 동료 공화파에 대해 수많은 잔혹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알바세테(Albacete)의 도살자로 알려진 안드레 마르티(André Marty)는 국제 여단 회원 약 500명의 사망에 책임이 있었습니다. POUM(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의 지도자였던 안드레스 닌과 다른 많은 저명한 POUM 구성원들은 소련 NKVD의 도움으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공화파는 카브라 폭격(bombing of Cabra)과 같은 도시에 대한 자체 폭격 공격도 수행했습니다. 스탠리 페인과 헤수스 팔라시오스에 따르면, 공화파는 국민주의자보다 도시와 민간인 목표물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습을 더 많이 수행했지만, 그들의 공격은 종종 약하고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마이클 세이드먼은 훈련이 더 잘 된 국민주의 공군이 사상자를 입히는 데 더 효과적이었으며, 공화파 공군의 약 4,000명에 비해 약 1만 1,000명의 민간인을 사망하게 했다고 주장합니다.
전쟁 중 공화국 지역에서 3만 8천 명이 사망했으며, 그중 1만 7천 명은 쿠데타 한 달 안에 마드리드 또는 카탈루냐에서 사망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사법 외 살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지만, 공화파의 많은 사람들은 살인에 경악했습니다. 아사냐는 사임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는 의회 의원과 많은 다른 지역 관리들과 함께 국민주의자 지지자들이 린치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시도했습니다. 권력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살인을 막기 위해 개인적으로 개입했습니다.
양측의 전쟁 비용은 매우 높았다. 공화파 측은 무기 구매로 인해 재정 자원이 완전히 고갈되었다. 반면 국민당 측은 분쟁 이후 독일에 국가의 광산 자원을 개발하도록 허용해야 했을 때 가장 큰 손실을 입었고,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거의 이익을 낼 기회가 없었다.[151]
1939년 2월 27일, 영국과 프랑스가 프랑코 정권을 승인했다.[168] 같은 해 4월 1일, 미국도 프랑코 정권을 승인하고 군수물자 금수 조치를 해제했다.[169]
1936년 8월-9월, 스페인 내전 초기,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반란군(국민군)의 파시스트에 의한 공화주의자 학살. 이 24명의 집단묘는 스페인 북부 에스테파르라는 작은 마을에 있다. 2014년 7월-8월에 발굴됨.]]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측은 인민전선파 잔당에 대해 격렬한 탄압을 가했다. 군사재판소는 인민전선파 약 5만 명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고, 그 중 절반을 실제로 처형했다. 특히 자치권을 요구하며 인민전선 측에 가담했던 바스크와 카탈루냐에 대해서는 바스크어, 카탈루냐어의 공식적인 사용을 금지하는 등 자치 요구를 압살했다. 따라서 인민전선 측 잔당 중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망명했고, ETA와 같은 반정부 테러 조직의 결성을 초래했다.
카탈루냐에서는 겨울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망명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직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프랑스가 독일의 점령을 받게 되면서 그들의 운명은 혹독했다. 또한 국가적으로 인민전선 측을 지원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인 멕시코는 라사로 카르데나스 정권 하에 지식인과 기술자를 중심으로 총 1만 명에 달하는 망명자를 받아들였다. 망명자들이 주로 지식 계층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멕시코에서 수행한 문화적 역할은 매우 컸다. 예를 들어 멕시코 출판업계의 거물인 는 망명 스페인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인민전선파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다. 프랑코의 측근으로 후계자로 예정되었던 루이스 카예로 블랑코는 미소의 동서 냉전을 보고, 인민전선 잔당을 탄압하더라도 공산주의의 도래를 우려하는 서구 국가들은 비난은 하겠지만 실질적인 압력을 받지는 않을 것이므로 탄압해도 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후에 블랑코는 ETA에 의해 암살당했다).
공화국 정부는 "스페인 공화국 망명 정부"로서 멕시코, 그리고 파리에서 존속했다. 1975년 프랑코 사후 국왕이 된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독재 정치를 계승하지 않고, 1977년 6월 15일 스페인 의회 총선거에서 정치 민주화 노선이 결정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같은 해 6월 21일, 망명 정부는 총선 결과를 승인하고, 대통령 가 정부 해산을 선언했다. 7월 1일,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마드리드에서 망명 정부 수반 계승식을 거행하여 형식적으로 두 갈래로 나뉘었던 스페인 정부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내전 양측의 전몰자들은 마드리드 주에 있는 국립 추모 시설인 "전몰자의 계곡"에 매장되어 있지만, 프랑코 시대에 정치범들을 동원하여 건설되었고, 기념비 등이 현재까지도 프랑코 시대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스페인 국내에서는 아직도 시설 성격의 재검토를 둘러싸고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내전에 참여함으로써 나치 독일(Nazi Germany)은 귀중한 실전 경험을 얻게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베르사유 협정)에 따라 여러 가지 군사적 제약을 받고 있던 독일에게는 얻기 어려운 경험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
7. 1. 프랑코 정권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추축국과의 지나친 동맹을 우려한 미국에 의해 무역이 봉쇄되어 자급자족적 경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마셜 플랜에 따른 지원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농촌의 상황은 매우 열악하였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또다시 25만명 이상의 대규모 이민이 있었으며,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프랑스로 향하였다. 이로 인하여 스페인 출신 프랑스인은 오늘날에도 외국 출신 프랑스인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219] 1955년부터 스페인은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 유엔에도 가입하였다.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측은 인민전선파 잔당에 대해 격렬한 탄압을 가했다. 군사재판소는 인민전선파 약 5만 명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고, 그 중 절반을 실제로 처형했다. 특히 자치권을 요구하며 인민전선 측에 가담했던 바스크와 카탈루냐에 대해서는 바스크어, 카탈루냐어의 공식적인 사용을 금지하는 등 자치 요구를 압살했다. 따라서 인민전선 측 잔당 중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망명했고, ETA와 같은 반정부 테러 조직의 결성을 초래했다. 카탈루냐에서는 겨울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망명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직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프랑스가 독일의 점령을 받게 되면서 그들의 운명은 혹독했다. 또한 국가적으로 인민전선 측을 지원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인 멕시코는 라사로 카르데나스 정권 하에 지식인과 기술자를 중심으로 총 1만 명에 달하는 망명자를 받아들였다. 망명자들이 주로 지식 계층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멕시코에서 수행한 문화적 역할은 매우 컸다.
right가 이끄는 반란군(국민군)의 파시스트에 의한 공화주의자 학살. 이 24명의 집단묘는 스페인 북부 에스테파르라는 작은 마을에 있다. 2014년 7월-8월에 발굴됨.]]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 스페인은 높은 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인민전선파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고, 아울러 공화파를 지원했던 바스크어와 카탈루냐어는 공공장소에서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인민전선파의 스페인 망명 정부는 멕시코에서 1976년까지 존속했다. 공화국 정부는 "스페인 공화국 망명 정부"로서 멕시코, 그리고 파리에서 존속했다. 1975년 프랑코 사후 국왕이 된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독재 정치를 계승하지 않고, 1977년 6월 15일 스페인 의회 총선거에서 정치 민주화 노선이 결정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같은 해 6월 21일, 망명 정부는 총선 결과를 승인하고, 대통령 호세 말도나도 곤살레스/José Maldonado Gonzálezes가 정부 해산을 선언했다.
내전 양측의 전몰자들은 마드리드 주에 있는 국립 추모 시설인 "전몰자의 계곡"에 매장되어 있지만, 프랑코 시대에 정치범들을 동원하여 건설되었고, 기념비 등이 현재까지도 프랑코 시대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스페인 국내에서는 아직도 시설 성격의 재검토를 둘러싸고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8. 관련 작품
스페인 내전은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었다.[142][143][144][145]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 등은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내전에 직접 참전한 사람들의 기록으로서 의미가 있다.[144][145]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도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판의 미로》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영화이다.[146][147]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전 세계 사람들은 표준 예술뿐만 아니라 선전을 통해 내전의 진행 상황과 국민들에게 미친 영향을 접했다. 영화, 포스터, 책, 라디오 프로그램, 전단 등은 전쟁 중 매우 영향력 있었던 이러한 미디어 예술의 몇 가지 예이다. 국민군과 공화군 모두가 제작한 선전은 스페인 사람들이 전 세계에 전쟁에 대한 인식을 널리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다. 20세기 초 유명 작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릴리안 헬먼이 공동 제작한 영화는 스페인의 군사 및 재정 지원 필요성을 알리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 영화, ''스페인의 땅''은 1937년 7월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1938년에는 조르주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가 영국에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그가 전쟁에서 경험하고 관찰한 내용을 개인적으로 적은 것이다. 1939년에는 장-폴 사르트르가 프랑스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은 포로들의 마지막 밤을 묘사한 단편 소설 "벽"을 발표했다.[144]
주요 조각 작품으로는 알베르토 산체스 페레스의 ''엘 푸에블로 에스파뇰 티에네 운 카미노 케 콘두세 아 우나 에스트렐라''("스페인 국민은 별로 이끄는 길을 가지고 있다")가 있다. 이 작품은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위한 투쟁을 보여주는 12.5m 높이의 석고 모놀리트이다.[142] 훌리오 곤잘레스의 ''라 몬세라트''는 바르셀로나 근처 산과 같은 이름을 가진 반전 작품으로, 두들겨서 용접한 철판으로 만들어졌으며, 어린아이를 한 팔에 안고 다른 팔에는 낫을 든 농부 어머니를 묘사하고 있다. 알렉산더 칼더의 ''푸엔테 데 메르쿠리오''(수은 분수)는 미국인이 국민군의 알마덴과 그곳의 수은 광산에 대한 강제 통제에 항의하는 작품이다.[143]
파블로 피카소는 1937년 게르니카 폭격에서 영감을 받아 ''게르니카''를 그렸다.[146] 이 작품의 크기(3.35m x 7.82m)는 많은 주목을 받았고, 고조되는 스페인 내전의 공포를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했다.[146] 이 그림은 그 이후로 반전 작품이자 20세기 평화의 상징으로 칭송받고 있다.[147]
살바도르 달리는 1936년 고향의 갈등에 대해 ''삶은 강낭콩이 있는 부드러운 구조: 내전의 예감''(필라델피아 미술관)과 ''가을의 식인 풍습''(테이트 모던, 런던) 두 점의 강력한 유화를 그렸다. 전자에 대해 미술사가 로버트 휴즈는 "살바도르 달리는 고야의 웅크린 사투르누스의 수평적인 허벅지를 ''삶은 강낭콩이 있는 부드러운 구조, 내전의 예감''이라는 그림 속의 잡종 괴물에 적용했는데, 이 작품은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아니라 스페인 내전에서 영감을 받은 최고의 단일 시각 예술 작품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144] 후자에 대해 달리는 "서로를 먹어치우는 이 이베리아 존재들은 피카소가 정치적 현상으로 간주한 것과는 달리 순수한 자연사 현상으로 간주되는 내전의 비애에 해당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145]
조안 미로는 1937년 ''엘 세가도르''(사신)을 만들었는데, 공식 명칭은 ''엘 캄페시노 카탈란 엔 레벨디아''(반란을 일으킨 카탈루냐 농민)이다.[148] 이 그림은 낫을 공중으로 휘두르는 농민을 묘사하고 있는데, 미로는 "낫은 공산주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신의 상징이자 그의 일의 도구이며, 그의 자유가 위협받을 때 그의 무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149]
아프리카 군대는 아프리카 군대의 복잡한 역사와 스페인의 북아프리카 식민지 때문 양측 선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150]
'''소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어니스트 헤밍웨이)
- 카탈루냐 찬가 (조지 오웰)
- 희망 (앙드레 말로)
- 《늑대들의 달》(《Los lobos de la luna》) (후리오 랴마사레스) - 내전 중과 내전 후를 배경으로 공화군 패잔병 청년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 《살라미나의 병사들》(《Soldados de Salamina》) (하비에르 세르카스) - 공화국 측 집단 총살에서 벗어난 파랑헤당 작가의 에피소드를 계기로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의 진실에 다가간다.
- 《카탈루냐 전선에서 작별》(《Farewell to the Catalan Front》) (스티븐 헌터) - 영국 정보부의 의뢰로 국제여단에 잠입한 전직 경찰 청년의 시각에서, 말로나 헤밍웨이가 그리지 못한 공화군 측의 참혹한 내부 항쟁을 묘사한다.
- 드뤼 라 로셸의 소설 《질》(《Gilles》)과 로베르 브라지야크의 소설 《칠채》(《Sept Couleurs》)의 주인공은 최종적으로 스페인 내전에 프랑코 반란군 측 파랑헤당 의용병으로 참가한다.
- 《태양의 문》(아카가미 료)(일본경제신문출판사, 2021년 5월)-일본경제신문 조간에 연재된 영화 카사블랑카의 프리퀄.
'''영화'''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1943년 미국 영화. 헤밍웨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게리 쿠퍼,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
- 희망 테루엘의 산맥 - 1945년 프랑스 영화. 앙드레 말로의 소설 《희망》을 말로 자신이 공동 감독했다. 전비 조달의 의미도 있었다.
- 목숨 있는 한 - 1955년 서독 영화. 게르니카 폭격을 가했다고 알려진 독일 의용군 "콘도르 군단" 청년들의 청춘 군상을 그렸다.
- 일요일에는 쥐를 잡아라 - 1964년 미국 영화. 에메릭 프레스버거의 동명 소설을 J. P. 밀러가 각색하고 프레드 지네만이 제작·감독했다.
- 전쟁은 끝났다 - 1965년 프랑스 영화. 알랭 레네 감독.
- 죽음, 만세 - 1971년 프랑스 영화. 페르난도 아라발 감독.
- 벌의 속삭임 - 1973년 스페인 영화. 빅토르 에리세 감독.
- 거울 - 1975년 소련 영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 게르니카의 나무 - 1975년 프랑스·이탈리아 합작 영화. 페르난도 아라발 감독.
- 가수 카르멜라 - 1990년 스페인 영화.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
- 벨 에포크 - 1992년 스페인 영화. 페르난도 트루에바 감독.
- 대지와 자유 - 1995년 영국·스페인·독일 합작 영화. 프랑코파뿐 아니라 좌익 세력 간의 싸움을 그리는 등 공산당에도 비판적이며 무정부주의자 진영에는 동정적인 시선으로 그려져 있다.
- 나비의 혀 - 1999년 스페인 영화. 마누엘 리바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 2006년 멕시코·스페인·미국 합작 영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 내가 사랑했던 헤밍웨이 - 2012년 HBO 제작 미국 TV 영화. 헤밍웨이와 그의 세 번째 아내가 된 종군 기자 마사 겔혼과의 연애를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그린 작품.
- 게르니카 - 2016년 스페인 영화. 코르도 세라 감독.
'''宝塚歌劇'''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봉란, 하루 쿠라라 주연.
- NEVER SAY GOODBYE -어떤 사랑의 궤적- - 2006년 츠키구미 공연. 와오 요카, 하나소 마리 주연.
'''게임'''
- 《Hearts of Iron IV》 - 1936년 이벤트로 "국수주의 스페인(반란군)" 대 "공화 스페인(인민전선)"의 "스페인 내전"이 등장한다.
분류: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작품 문서도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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