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츠 히틀러
1. 개요
하인츠 히틀러는 알로이스 히틀러 유니오어의 아들이자 아돌프 히틀러의 조카로, 나치와 아돌프 히틀러를 열렬히 지지했다. 1939년 육군에 입대하여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전,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나, 1942년 1월 소련군에 포로로 잡혔다. 이후 모스크바의 부티르카 감옥에서 고문을 받다 1942년 2월 사망했으며,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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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하인리히 히틀러 |
|---|---|
| 별칭 | 하인츠 |
| 출생 | 1920년 3월 14일 |
| 출생지 | 마그데부르크, 바이마르 공화국 |
| 사망 | 1942년 2월 21일 |
| 사망지 | 부티르카 교도소, 모스크바, 소비에트 연방 |
| 소속 | 나치 독일 |
|---|---|
| 군종 | 육군 |
| 복무 기간 | 1939년–1942년 |
| 계급 | 하사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바르바로사 작전 모스크바 전투 |
| 훈장 | 철십자 훈장 2급 |
| 형제자매 | 윌리엄 패트릭 히틀러 (이복형) |
|---|---|
| 삼촌 | 아돌프 히틀러 (이부 삼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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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고문 피해자 -
카를 리프크네히트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독일의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정치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쟁 반대 운동을 이끌고 독일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을 시도했으며 스파르타쿠스 봉기 진압 과정에서 살해당해 독일 좌파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독일의 고문 피해자 -
빌헬름 카나리스
빌헬름 카나리스는 독일 해군 제독이자 아프베어 수장으로, 나치 정권에 가담했다가 반나치 운동에 참여하여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인물이며, 그의 행적은 논쟁의 대상이다. -
2급 1939년형 철십자장 수훈자 -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슈미트는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서독의 연방총리를 지낸 독일 정치인으로, 동서독 화해 정책을 계승하면서 서방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유럽 통합에 기여했으며, 경제 위기와 테러에 단호하게 대처하여 서독의 안정을 유지했으나 연정 파트너와의 갈등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독일 정치사에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
2급 1939년형 철십자장 수훈자 -
쿠르트 발트하임
오스트리아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인 쿠르트 발트하임은 제4대 유엔 사무총장과 오스트리아 대통령을 역임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복무 이력으로 인해 나치 범죄 연루 의혹인 "발트하임 사건"에 휘말려 국제적인 논란을 야기했다. -
20세기 오스트리아 사람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 중요한 철학자 중 한 명으로, 『논리철학논고』를 통해 초기 논리실증주의를 대표하고 『철학적 탐구』로 후기 일상언어철학의 기초를 세웠으며, 언어 게임 개념을 제시하여 현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20세기 오스트리아 사람 -
프란츠 슈레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지휘자, 음악 교육자였던 프란츠 슈레커는 후기 낭만주의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음악 어법을 구축하고 오페라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나치즘의 부상으로 잊혀졌다가 21세기에 재조명받고 있다.
2. 생애
알로이스 히틀러 유니오어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헤트비히 하이데만(Hedwig Heidemann독일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돌프 히틀러를 저주한 이복형 빌헬름 파트리크 히틀러와는 달리 하인츠는 히틀러와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아돌프도 그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1933년 NSDAP에 의한 권력 장악이 완료되자, 13세였던 하인츠는 총통이 된 숙부 아돌프를 경외하게 되었다. 다른 친족들과 달리 하인츠는 "총통의 친척"이라는 입장을 이용하거나, 반대로 "독재자의 친척"이라는 입장에 대한 속죄를 시도하지 않았다. 아돌프도 하인츠를 자신의 보호 아래 두고 특별 대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친족으로서 받은 "배려"는 국가정치교육학교(나폴라) 입학이 거의 유일했다. 아돌프 히틀러에게는 여러 조카가 있었지만, 대부분과의 관계는 다소 긴장된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드는 조카"였던 하인츠는 레오 라우발 (아돌프의 이복 누이 안젤라의 아들)과 함께 몇 안 되는 예외였다.
2.1. 군 복무
알로이스 히틀러 유니오어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하인츠는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독일 국방군의 엘리트 군사학교인 국가정치연구학회(NAPOLA)에 다녔으며, 장교의 꿈을 안고 1941년 제23 포츠담 포병여단에서 통신 부사관으로 군 복무를 시작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가했으며, 1942년 1월 10일 전방 통신시설 복구를 위해 파견되었다.
그러나 하인츠는 임무 중 붉은 군대에 포로로 붙잡혔고, 모스크바의 부츠카 수용소로 이송되어 심문과 고문을 받다가 1942년 사망했다. 어린 시절부터 군인을 동경했던 하인츠는 나폴라 졸업 후 장교가 되기를 원했지만, 숙부 아돌프 히틀러는 '히틀러'라는 이름이 다른 병사들에게 불필요한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1939년 말 나폴라를 졸업한 하인츠는 육군에 입대하여 통신병으로 포츠담의 제23 포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전하여 실전을 통해 2급 철십자 훈장을 받고 하사관(Unteroffizier)까지 진급했으며, 사관학교 추천 후보에도 올랐다.
1942년 1월 10일, 부대의 통신 책임자였던 하인츠는 포기된 진지에서 무선 설비를 회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붉은 군대의 기습을 받아 포로가 되었다. 곧 아돌프의 친족임이 밝혀진 후, 부티르카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소련 측은 하인츠에게 군사적 가치가 있는 정보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히틀러 가문이나 아돌프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고문을 반복했다. 1942년 2월 21일, 하인츠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했다.
2.2. 소련군 포로와 사망
1941년 제23 포츠담 포병여단에서 통신 부사관으로 근무를 시작했고, 바르바로사 작전에도 참가하였다.
1942년 1월 10일, 하인츠는 전방 위치의 통신시설을 복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가 좋아하던 조카 하인츠가 위험한 전방에서 복무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 임무에 대해 상당히 걱정하였다.
결국 하인츠는 붉은 군대의 기습을 받아 포로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돌프의 친족임이 밝혀졌다. 모스크바의 부티르카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소련 측은 하인츠가 군사적 가치가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지만, 히틀러 가문이나 아돌프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집요한 고문을 반복했다. 1942년 2월 21일, 하인리히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했다. 유해가 어디에 매장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