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소제 (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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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소제는 후한의 제7대 황제이다. 125년 안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황후 염씨와 그 일족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염씨 일족의 전횡과 환관들의 쿠데타로 재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다. 염씨 일족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안제의 측근들을 제거하고 독재 정치를 펼쳤다. 소제가 죽자 환관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염씨 일족을 몰아내고 안제의 사촌 유보를 황제로 옹립했다. 소제는 정식 시호를 받지 못했으며, 순제는 그를 정당한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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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소제 (7대) | |
---|---|
기본 정보 | |
![]() | |
존호 | 황제 |
휘 | 유의 (劉懿) |
시호 | 없음 |
묘호 | 없음 |
생년 | 미상 |
몰년 | 125년 12월 10일 |
부황 | 제북혜왕 유수 |
모후 | 미상 |
황후 | 없음 |
능묘 | 없음 |
연호 | 연광 (125년) |
통치 | |
재위 기간 | 125년 5월 18일 - 125년 12월 10일 |
즉위 전 작위 | 북향후 (北鄉侯) |
계승 순서 | 7대 |
전임 | 안제 유호 |
후임 | 순제 유보 |
2. 가계 배경
소제 유의는 언제 태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25년 5월 18일에 즉위했을 때 젊었다는 기록[2]이 있어 안제 치세 후반기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2. 1. 가계
아버지는 제북혜왕 유수로, 장제의 아들이자 안제의 사촌이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20년, 형인 제북절왕 유등의 형제들이 열후에 봉해졌을 때 함께 열후에 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3]3. 짧은 치세
안제가 후사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황후 염씨와 그 일족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유의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그해 말, 어린 황제가 심각하게 병들었고, 황제가 죽자 환관들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데타의 결과로 섭정 염씨를 제외한 염씨 형제는 모두 살해되었지만, 섭정 염씨는 무력하게 되었다.
순제는 전 북향후가 어리고 섭정 염씨의 음모에 연루되지 않았음을 인식하고, 사후에 모욕하거나 가족에게 보복하지는 않았지만, 전임자를 정당한 황제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해 말, 순제는 전 황제를 황태자의 예우로 장례를 치르게 했는데, 이는 이전의 후작 직위보다는 높지만 황제보다는 낮은 예우였다. 이 어린 황제에게는 공식적인 시호가 기록되지 않았다.[1]
3. 1. 염씨 일족의 전횡
염황후의 오빠 염현(閻顯) 등은 환관 강경(江京)과 번풍(樊豐), 유모 왕성(王聖) 등을 모함하여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였다.[1] 이들은 전횡을 일삼으며 낙양의 조정을 장악했다.[1]3. 2. 환관들의 쿠데타와 순제의 즉위
안제의 신임을 받던 환관 강경(江京), 범풍(樊豐) 등은 섭정인 안제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러나 섭정 염씨와 그녀의 오빠 염현(閻顯)은 권력을 장악하려 했고, 범풍 등에게 죄를 덮어씌웠다. 범풍은 처형되었고, 다른 이들은 유배되었다. 염씨 형제는 낙양에서 가장 강력한 관리가 되어 독재적으로 통치했다.그 해 말, 어린 황제가 병들자, 손정(孫程)을 비롯한 환관들은 염씨 형제를 몰아낼 음모를 꾸몄다. 황제가 죽자마자, 환관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염씨 형제를 몰아내고 안제의 사촌인 유보를 황제(순제)로 옹립했다. 염씨 형제는 모두 살해되었지만, 섭정 염씨는 무력하게 되었다.[1]
4. 사후
순제는 소제가 어리고 섭정 염씨의 옹립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여, 그를 사후에 모욕하거나 그의 가족에게 보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순제는 소제를 정식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3] 그 해 말, 소제는 황태자의 예우로 장례를 치렀다. 이는 소제의 이전 직위인 후작보다는 높지만, 황제보다는 낮은 예우였다.[3] 소제에게는 정식 시호가 기록되지 않았다.[3]
참조
[1]
서적
xinhai day of the 10th month of the 4th year of the Yan'guang era
[2]
서적
yiyou day of the 3rd month of the 4th year of the Yan'guang era
[3]
서적
Liu Shou died on the dingyou day of the 3rd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Yong'ning era
1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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