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전 민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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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전 민애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무덤으로, 1984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를 통해 규모가 밝혀지고 정비되었다. 무덤 밑부분에는 12개의 구멍이 있었고, 곱돌로 만든 십이지신상을 묻었던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쥐, 소, 닭, 돼지 4개만 확인되었다. 무덤 주변에서 '원화십년(元和十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뼈단지가 발견되어 무덤이 815년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839년에 사망한 민애왕의 사망 시기와 차이가 있어 민애왕의 무덤이 아닐 가능성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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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전 민애왕릉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경주 전 민애왕릉 |
| 영문 이름 | Gyeongju Jeon Min-ae Wangneung |
| 유형 | 사적 |
| 지정 번호 | 190 |
| 지정일 | 1970년 2월 6일 |
| 시대 | 통일신라 |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 산40번지 |
| 면적 | 8,331m² |
| 문화재청 ID | 13,01900000,37 |
2. 발굴 조사
1984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무덤과 주변 지역을 발굴 조사하여 무덤의 규모를 밝히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조사 결과 무덤 밑부분 바깥쪽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12개의 구멍이 발견되었고, 이 구멍에는 곱돌로 만든 십이지신상을 하나씩 묻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무덤 주변에서는 '원화십년(元和十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뼈단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헌덕왕 7년(815)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어 무덤이 815년 이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무덤은 839년에 사망한 민애왕의 무덤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
2. 1. 무덤 구조
경주 전 민애왕릉은 높이 3.8m, 지름 12.5m이다. 1984년 9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무덤과 주변을 발굴 조사하여 규모를 밝히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무덤 밑부분 바깥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12개의 구멍이 있었고, 곱돌로 만든 십이지신상을 하나씩 묻었다. 무덤 주변에서는 '원화십년(元和十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뼈단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헌덕왕 7년(815)에 만들어진 것으로, 무덤이 815년 이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839년에 죽은 민애왕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2. 1. 1. 십이지신상
1984년 9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무덤과 주변을 발굴 조사했을 때 쥐, 소, 닭, 돼지 모양의 십이지신상 4개만 발견되었다. 나머지 십이지신상은 무덤의 외부 받침돌이 만들어질 때 파손되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2. 2. 뼈단지
무덤 주변에서 발견된 뼈단지 뚜껑에는 '원화십년(元和十年)'이란 글자가 있어 헌덕왕 7년(815)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뼈단지는 무덤이 만들어진 후에 묻힌 것으로, 무덤은 815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무덤은 839년에 죽은 민애왕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3. 민애왕릉의 진위 여부
1984년 9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무덤과 주변을 발굴조사하여 규모를 밝히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조사 결과, 무덤 밑부분 바깥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12개의 구멍이 있었고, 구멍에는 곱돌로 만든 십이지신상(12마리 동물의 얼굴에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상)을 하나씩 묻었다. 조사 당시에는 쥐, 소, 닭, 돼지 4개만 발견되었고, 나머지는 무덤의 외부받침석이 만들어질 때 파손되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주변에서 발견된 뼈단지 뚜껑에는 ‘원화십년(元和十年)’이라는 글자가 있어 헌덕왕 7년(815)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뼈단지는 무덤이 만들어진 후에 묻힌 것으로, 무덤은 815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839년에 죽은 민애왕의 무덤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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