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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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신라는 7세기 후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10세기 초 고려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한 국가이다. '통일신라'라는 명칭은 일본 학자 하야시 다이스케의 저서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북한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의 일부를 정복하지 못했고 발해가 존재했다는 점을 들어 '후기 신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신라인들은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외치며 삼국 통일의 의미를 부여했고, 삼국 통일 이후 신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불교와 유교가 융성했으며, 예술과 과학 기술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9세기 후반에는 호족의 성장과 왕위 쟁탈전으로 인한 사회 혼란, 해상 무역의 발달, 쇠퇴를 겪었고, 결국 후삼국 시대를 거쳐 고려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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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 |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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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삼한일통 (한자) |
다른 표기 | 통일신라 (한글) |
일반 명칭 | 후기 신라 |
시대 | 후고전 시대 |
지위 | 왕국 |
정부 형태 | 군주제 |
건국 | 삼국 통일 |
건국일 | 668년 |
주요 사건 | 나당 전쟁 |
나당전쟁 기간 | 670–676년 |
멸망 원인 | 후삼국 시대 시작 |
멸망일 | 892–936년 |
멸망 | 고려에 항복 |
멸망일 | 935년 |
이전 국가 | 신라 고구려 백제 |
계승 국가 | 고려 후백제 |
국기 유형 | 군사 깃발 |
국기 설명 |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상징은 낮 시간의 반달처럼 푸른 바탕에 흰색 초승달로 그려져 있다. |
상징 | 어보 |
수도 | 서라벌 |
다른 수도 이름 | 금성 (金城), 사로 (斯盧), 사라 (斯羅), 서나벌 (徐那伐), 서야벌 (徐耶伐), 서벌 (徐伐), 왕경 (王京) |
수도 설명 | 여러 수도 체제와 함께; 하나에서 네 개의 부수도와 함께 최고 수도 (514-c.900) |
공용어 | 고대 한국어 한문 (문학) |
종교 | 불교 (국교) 유교 도교 이슬람교 무속 신앙 |
화폐 | (정보 없음) |
국가 지도자 칭호 | 왕 |
국가 지도자 | 문무왕 |
재위 기간 | 661–681년 |
국가 지도자 | 신문왕 |
재위 기간 | 681–692년 |
국가 지도자 | 진성여왕 |
재위 기간 | 887–897년 |
국가 지도자 | 경순왕 (마지막) |
재위 기간 | 927–935년 |
8세기 인구 | 2,000,000명 |
현재 국가 | 북한 남한 |
데모님 | (정보 없음) |
면적 | (정보 없음) |
면적 순위 | (정보 없음) |
GDP (PPP) | (정보 없음) |
GDP (PPP) 기준 연도 | (정보 없음) |
HDI | (정보 없음) |
HDI 기준 연도 | (정보 없음) |
역사적 사건 | |
나당 전쟁 종결 | 676년 |
국학 설치 | 682년 |
보덕국 진압 | 683년 |
김헌창의 난 | 822년 |
원종·애노의 난 | 889년 |
후백제 성립 | 892년 |
후삼국 시대 개막 | 892년 |
고려 귀순 및 멸망 | 935년 10월 |
정치 체제 및 입법 | |
입법부 | 화백 |
국성 | 경주 김씨 밀양 박씨 |
인구 및 경제 | |
면적 어림 년도 | 750년 |
8세기 신라 총 인구 | 450만명 |
8세기 서라벌 인구 | 약 90만명 |
종교 및 문화 | |
국교 | 불교 |
기타 종교 | 유교 도교 회교 무속신앙 |
2. 명칭 논란
'통일신라'라는 명칭은 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이다. 이 명칭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 하야시 다이스케가 쓴 《조선사》에서 처음 사용되었고,[48] 이후 한국 역사 교과서에도 영향을 주었다.[49] 그러나 발해의 존재가 부각되면서, '통일신라'라는 용어 대신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50][51][52]
2. 1. 한국 학계의 논란
한국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일반적으로 제29대 태종무열왕 이전을 삼국 시대, 그 이후를 통일신라 시대로 구분짓는다. 나당전쟁 이후 '통일신라'라는 개념은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가 쓴 《조선사朝鮮史》(1892)에서 처음 나타난다.[48] 1902년에 대한제국에서 김택영, 현채 등이 발간한 역사교과서 《동사집략》이나 《동국사략》 역시 하야시 다이스케의 《조선사》를 거의 그대로 번역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통일신라'라는 개념이 한국인들의 한국사 인식에 들어오게 되었다.[49]그러나 발해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일부 민족주의 사학자를 중심으로 '통일신라'라는 표현에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50] '통일신라 시대'는 분명한 한국의 역사이지만, 발해가 세워진 698년부터를 남북국 시대라고 하여 발해의 역사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51] 발해를 한국의 역사로 연구하고, 신라의 삼국통일 또한 온전한 통일로 보기 어렵다는 관점이 생기기 시작하여, 이름을 '대신라' 등으로 대체하기도 한다.[52]
북한의 역사학자들은 “통일 신라”라는 용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 이유는 신라가 고구려의 대부분을 정복하지 못했고, 발해는 “통일 신라” 건국 이후에도 존속했으며 한반도 북부 지역을 차지했으므로 고려가 한국 민족을 최초로 통일한 국가였다고 보기 때문이다.[4][5] 북한 역사학자들은 “후기 신라”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후기”라는 단어가 신라가 한국 민족 전체를 통일하지 못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한편,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통일된 한국의 왕국이라고 생각하고 “三韓一統”(현대 한글: 삼한일통|삼한일통한국어)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삼국의 통일을 의미한다. 주요 장군 중 한 명인 김유신은 죽음을 앞두고 문무왕에게 보낸 편지에 “三韓一統”이라는 용어를 적었다. 이로부터 신라의 왕들은 이러한 인식을 계속 유지했으며, 신문왕의 “9주(州)”와 “9서당(9군)” 설치에서도 볼 수 있다. 고대 아시아에서 숫자 9는 위대한 것을 의미하며, 9주는 ‘천하(天下)’를 의미한다. 더욱이 신라는 통일의 표시로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들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따라서 이 시대에 대한 역사적으로 더 정확한 용어는 '통일 신라'일 것이다.[6]
2. 2. 북한 학계의 관점
북한의 역사학자들은 “통일신라”라는 용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전통적으로 “통일 신라”는 한국 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북한의 관점에 따르면, 신라는 고구려의 대부분을 정복하지 못했고, 발해는 “통일 신라” 건국 이후에도 존속했으며 한반도 북부 지역을 차지했으므로 고려가 한국 민족을 최초로 통일한 국가였다.[4][5] 북한 역사학자들은 신라가 한국 민족 전체를 통일하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후기 신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북한은 고려를 한국 민족을 통일한 최초의 국가로 인정한다.2. 3. 신라인들의 인식
신라인들은 스스로를 삼국을 통일한 한국의 왕국이라고 생각하고 “三韓一統”(삼한일통|삼한일통한국어)이라고 불렀다.[6] 김유신은 죽음을 앞두고 문무왕에게 보낸 편지에 “三韓一統”이라는 용어를 적었다.[6] 신라의 왕들은 이러한 인식을 계속 유지했으며, 신문왕의 “9주(州)”와 “9서당(9군)” 설치에서도 볼 수 있다.[6] 고대 아시아에서 숫자 9는 위대한 것을 의미하며, 9주는 ‘천하(天下)’를 의미한다.[6] 신라는 통일의 표시로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들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6]3. 역사
신라는 진흥왕(재위 540년 ~ 576년) 때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나제 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년).[53]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고구려·백제 양국은 신라의 팽창에 위협을 느껴 반격을 시작하였다.[55] 선덕여왕 대에는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을 함락(642)하여 위기 상황에 몰리기도 하였다.
7세기 후반, 삼국 통일 전쟁에서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당나라의 야심으로 인해 나당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결국 신라는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완수하였다(676년).
8세기, 통일신라는 신문왕 대에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 확립을 통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8세기 후반부터 9세기까지, 통일신라는 중앙 귀족 간 권력 투쟁, 지방 호족 세력 성장, 왕위 쟁탈전, 농민 부담 가중 등 혼란을 겪었다. 장보고를 중심으로 해상 무역이 발달하기도 했다.
9세기 이후, 통일신라는 견훤과 궁예가 독자적인 국가를 수립하면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고, 고려 태조의 우호 정책과 경순왕의 항복으로 멸망하였다(935년).
3. 1. 삼국 통일 전쟁과 신라의 승리 (7세기 후반)
신라는 진흥왕(재위 540년 ~ 576년) 때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며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함경도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에서 수·당과 직접 소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었다.[54]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나·당 동맹 이후, 신라는 660년 사비성을 함락하여 백제를 정복하였다. 또한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되었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지역간 갈등이 악화되어, 668년에 신라는 당과 연합군을 구성해 고구려를 정복하고 고구려 귀족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나라의 최종 목표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의 문무대왕은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크게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676년).[7] 하지만 옛 고구려의 북부 영토인 대동강 이북과 만주 일대는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3. 2. 통일신라의 전성기 (8세기)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면서 왕권을 강화했고, 이후 그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영토 확장과 인구 증가를 겪었으며,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면서 생산력이 증대되었다.신문왕은 김흠돌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재편했다.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와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화백회의를 주도하며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했다. 또한 녹읍을 폐지하고 수조권만 인정한 관료전을 지급하는 등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 전제화의 바탕을 마련했다. 5묘제를 설치하여 태종무열왕계의 정통성을 강화하였다.[56]
이후 685년에는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 제도를 완성했고, 같은 해에 지방 제도인 9주 5소경을 확립하고, 군사제도로 9서당 10정을 마련했다.
통일 신라는 전성기에 북쪽의 발해와 지역 패권을 다투었다. 그러나 새롭게 정복한 북쪽 영토에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반란 세력과 여러 당파들로 인해 끊임없는 음모와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고, 결국 9세기 후반 후삼국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통일 신라는 번영을 누렸다.[9] 수도 서라벌(현재의 경주)[10]는 당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11][12][13][14] 당나라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불교와 유교가 엘리트들의 주요 철학 사상이 되었으며, 당시 건축과 미술의 주류를 이루었다.
3. 3. 호족의 성장과 정치 변동 (8세기 후반 ~ 9세기)
8세기 후반, 통일신라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중앙에서는 귀족들 간의 권력 다툼이 치열해졌고,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했다.진골 귀족들은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며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투쟁을 벌였다. 혜공왕 사후, 선덕왕 즉위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이로 인해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고, 왕권은 약화되었으며 귀족 중심의 정치가 운영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 확대로 농민들의 부담은 커졌다. 자연재해와 왕족, 귀족의 사치로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백성들은 강압적인 수취에 시달렸다.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으며,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은 높아져 지방 반란이 잦아졌다.
9세기 중엽, 문성대왕 이후 중앙 귀족들은 지방 세력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왕위 쟁탈전을 완화하고 타협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골품제로 인해 중앙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없었던 지방 세력은 해상무역에서 활로를 찾았다. 이들은 당나라, 일본과 활발히 교역했으며, 산둥반도와 장쑤성 등에는 신라방, 신라소, 신라원과 같은 신라인 거주 지역이 생겨났다. 장보고가 청해진에 세운 법화원은 대표적인 신라원이었다.
지방 세력가들의 민간 무역이 성행하고 당나라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해적이 자주 출몰했다. 이는 해상 무역에 큰 타격을 주었고, 신라는 해안 요지에 군진을 설치하여 대응했다. 청해진, 당성진, 혈구진 등이 설치되었으며, 그 중 828년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장보고는 해적 방비와 국제 무역을 통해 황해의 왕자로 불렸으며, 중앙 정치에도 관여했다. 이 시기에는 장보고와 같이 지방에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많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스스로 성주라 칭했다.
9세기 이후 통일신라 사회의 변화는 상업 발달과 대토지 소유 확대로 구체화되었다. 중앙 집권 체제가 약화되면서 지방 토호와 귀족들은 농장을 확대하여 대지주로 성장했다. 촌주 역시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했고,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을 규제할 수 없었다. 사원 또한 면세 특권을 이용하여 토지를 겸병하고 농장을 확대했다.
한편, 당나라 유학 후 귀국한 6두품 출신 유학생과 선종 승려들은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며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진골 귀족에 의해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했다.
3. 4. 해상 무역의 발달과 장보고
통일신라는 백제의 해상력을 계승하여,[15] 8세기와 9세기 동안 장보고 시대를 비롯하여 동아시아의 바다와 중국, 한국, 일본 간의 무역을 지배하였다. 신라인들은 산둥 반도와 양쯔 강 하구 등 중국에 신라방, 신라소, 신라원 등의 해외 공동체를 형성했다.[16][17][18][19]3. 5. 쇠퇴와 멸망 (9세기 ~ 10세기 초)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국가를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축소되면서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대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고려 태조는 후고구려의 궁예를 실각시키고 고려를 건국한후,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고려 태조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과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아내어 신라를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이후 고려 태조는 신라 계승을 표방하였다.
통일 신라 전 기간 동안, 새롭게 정복한 북쪽 영토에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반란 세력과 여러 당파들로 인해 끊임없는 음모와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고, 결국 9세기 후반 후삼국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치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통일 신라는 번영을 누렸다.[9] 수도 서라벌(현재의 경주)[10]는 당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11][12][13][14] 당나라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불교와 유교가 엘리트들의 주요한 철학 사상이 되었으며, 당시 건축과 미술의 주류를 이루었다.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명목상의 통치자에 불과했으며, 935년 떠오르는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여 신라 왕조는 막을 내렸다.
4. 정치
통일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중앙에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하는 14개의 행정 관청을 두어 국가의 주요 업무를 분담하게 했다.
4. 1. 지방 행정
통일신라는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자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하였다. 신문왕 5년(685년)에는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요 지역에 5소경을 설치하여 지방 통치의 효율성을 높였다.[1]9주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옛 땅에 각각 3주씩 설치하여 각 지역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고 민족 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1] 5소경은 수도 금성(경주)이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설치한 작은 수도였다.[1]
주 (州) | 위치 | 비고 |
---|---|---|
상주 (尙州) | 경상북도 | 신라의 옛 땅 |
양주 (良州) | 경상남도 | 신라의 옛 땅 |
강주 (康州) | 경상남도 | 신라의 옛 땅 |
웅주 (熊州) | 충청남도 | 백제의 옛 땅 |
전주 (全州) | 전라북도 | 백제의 옛 땅 |
무주 (武州) | 광주광역시 및 전라남도 | 백제의 옛 땅 |
한주 (漢州) | 경기도 및 서울특별시 | 고구려의 옛 땅 |
삭주 (朔州) | 강원도 | 고구려의 옛 땅 |
명주 (溟州) | 강원도 | 고구려의 옛 땅 |
9주 아래에는 군(郡), 현(縣)을 두었고, 촌(村) 단위까지 행정 체계를 갖추었다. 각 촌에는 촌주(村主)가 있어 지방 행정을 담당했다.[1] 이러한 촌락 단위의 행정 체제는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방 세력이 성장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진성여왕 시기에는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 세력의 성장이 두드러졌고, 이는 후삼국 시대 개막의 한 요인이 되었다.[1]
5. 경제
통일신라 때에는 토지, 인구, 가축, 특산물 등을 조사하여 민정문서를 작성하였다.[57] 이 문서의 일부는 일본에서 발견되어 현재까지 전해진다.
5. 1.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모든 지역의 크기와 인구, 가축의 수, 특산물 등을 조사하는 양전을 실시하여 민정문서를 작성했다.[57] 이 민정문서의 일부가 일본에서 발견되어 현재까지 전해진다.6. 사회
통일신라는 고대 한국 사회의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겪었다.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귀족 중심의 사회 질서를 확립했다.
골품제도골품제도는 신라 사회의 독특한 신분 제도였다. 개인의 혈통에 따라 정치적 지위와 사회적 권리가 결정되었다. 골품은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등으로 나뉘었으며, 특히 성골과 진골은 왕족으로서 정치 권력을 독점했다. 이러한 폐쇄적인 신분 제도는 신라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신분제도신분제도는 크게 귀족, 평민, 천민으로 나뉜다. 귀족은 골품제도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서 특권을 누렸다. 평민은 농업, 수공업, 상업 등에 종사하며 국가 재정의 기반을 담당했다. 천민은 노비, 공장, 역졸 등으로 구성되며, 가장 낮은 계층으로 차별받았다.
경제통일신라의 경제는 농업이 중심이었다. 수리 시설 확충과 농업 기술 발달로 생산량이 증가했다. 상업도 발달하여 시장이 활성화되고, 국제 무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당나라와의 무역이 활발했으며, 일본, 아라비아 상인들과도 교류했다.
문화불교는 통일신라의 지배적인 종교이자 사상이었다. 불국사, 석굴암 등 많은 사찰과 불상이 건립되었다. 유학도 장려되어 국학이 설치되고, 유교 경전 교육이 이루어졌다. 최치원과 같은 뛰어난 유학자들이 등장했다.
사회 변화통일 이후, 신라 사회는 점차 변화를 겪었다. 지방 세력이 성장하면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농민 봉기가 빈번하게 발생하며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다. 이는 결국 신라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7. 문화
통일신라는 백제의 해상력을 계승하여[15] 8세기와 9세기 동안 장보고 시대를 비롯하여 동아시아의 바다와 중국, 한국, 일본 간의 무역을 지배했다. 신라인들은 중국의 산둥반도와 양쯔강 하구에 해외 공동체를 형성했다.[16][17][18][19]
각 고을의 크기와 인구, 말, 소 및 특산품을 조사하여 '민정문서'에 기록하는 등, 통일신라는 행정 체제를 정비하였다. 보고는 각 고을의 수장이 했다.[36]
7. 1. 불교

통일신라는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중국 문화의 큰 영향을 받았다. 많은 신라 승려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교를 배워 왔고, 혜초는 인도까지 가서 그 여행기를 왕오천축국전으로 남겼다.[58] 선종, 정토종 등의 불교 종파가 수입된 것도 이 때이다.[58]
이 시기 불교는 번영했고, 많은 한국 불교 승려들이 중국 불교도들 사이에서 큰 명성을 얻었으며[24] 중국 불교에 기여했다.[25] 여기에는 원측, 원효, 의상, 김화상(Musang, Kim Hwasang),[26][27][28][29] 그리고 신라 왕족으로 그의 영향력으로 중국 불교의 4대 명산 중 하나인 지주산을 만들었던 김교각이 포함된다.[30][31][32][33][34]
해외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에 의해 선과 정토불교와 같은 새로운 불교 종파가 소개되었다.[35]
불교의 수트라 및 유교 경전을 찍어내기 위한 목판 인쇄도 발달했다. 석가탑 안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751년경의 물건이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목판인쇄물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58]
7. 2. 유교
682년 신문왕은 유교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인 국학을 설치했고, 750년 경덕왕 때 태학감으로 개칭했다.[58] 국학의 교육 혜택은 귀족 엘리트들만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 사회에서는 유교에서 사용되는 과거제가 아니라 골품제가 관리 선발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국립 유학교는 신라 귀족 계급에게 큰 매력이 없었다.[37]불교의 경전 및 유교 경전을 찍어내기 위한 목판 인쇄 기술도 발달했다. 석가탑 안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751년경의 유물이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목판인쇄물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58]
7. 3. 예술
통일신라는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중국 문화의 큰 영향을 받았다. 많은 신라 승려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교를 배웠고, 혜초는 인도까지 가서 그 여행기를 왕오천축국전으로 남겼다.[58] 선종, 정토종 등의 불교 종파가 수입된 것도 이 때이다.[58]
682년에는 유교를 가르치는 국학을 설치했고 750년 태학감으로 개칭했다.[58] 국학의 교육은 귀족 엘리트들만 받을 수 있었다.
목판 인쇄 기술도 발달하여 불교 수트라 및 유교 경전을 인쇄했다. 석가탑 안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751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다.[58]
황룡사, 석굴암, 성덕대왕 신종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신라는 예술과 문화의 황금기였다.[20][21][22][23] 이 시기 불교는 번성했고, 많은 한국 불교 승려들이 중국 불교에 기여하며 큰 명성을 얻었다.[24][25] 원측, 원효, 의상, 김화상,[26][27][28][29] 김교각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김교각은 신라 왕족 출신으로, 그의 영향력으로 중국 불교의 4대 명산 중 하나인 지주산이 만들어졌다.[30][31][32][33][34]
682년 국립 유교 대학을 설립하고 750년경 국립 유학교로 개명했다.[35] 이 대학은 엘리트 귀족에게만 제한되었다. 신라 사회에서는 과거제가 아닌 골품제를 통해 관리를 선발했기 때문에 국립 유학교는 신라 귀족에게 큰 매력이 없었다.[37]
7. 4. 과학 기술
통일신라는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과학 기술이 발전하였다. 특히 불교 경전과 유교 서적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 인쇄 기술이 발달하였다. 석가탑 안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751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58]신라는 농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점성술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를 통해 일식과 월식 같은 천문 현상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38]
8. 대외 관계
9세기 초, 다자이후 등 규슈 지역으로 신라 상인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통일 신라 해적들이 규슈 지역을 습격하는 일이 발생했다.[59] 869년(경문왕 9년)에는 신라 해적선 2척이 조세 운반선의 비단을 약탈했고,[59] 894년(진성 여왕 8년)에는 100척, 2,500명 규모의 해적선단이 대마도를 습격하기도 했다.[59] 이는 통일 신라 말기 신라 사람들의 어려운 상황으로 인한 해적 활동으로 여겨진다.[59]
8. 1. 당나라
통일 신라와 당나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중국 문화의 지속적인 수입에서 알 수 있다. 많은 한국 승려들이 당나라로 가서 불교를 공부했다. 혜초 승려는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인도로 가서 그의 여행기를 기록했다.[35] 해외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에 의해 선과 정토불교와 같은 불교의 여러 새로운 종파가 소개되었다.[35]통일 신라는 당나라와 활발한 무역을 전개했다. 백제의 해상력을 계승하여,[15] 장보고 시대를 비롯하여 8세기와 9세기 동안 동아시아의 바다와 중국, 한국, 일본 간의 무역을 지배했다. 또한 신라인들은 산둥반도와 양쯔강 하구에 해외 공동체를 형성했다.[16][17][18][19]
8. 2. 일본
다자이후를 비롯한 규슈 지역으로 신라 상인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9세기 초반부터 통일 신라의 해적이 규슈 지역을 습격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59] 869년 (경문왕 9년) 신라의 해적선 2척이 조세 운반선에 실려 있던 비단을 약탈하여 달아났고,[59] 894년 (진성 여왕 8년)에는 100척, 2,500명에 달하는 대선단이 대마도의 사스우라(佐須浦)를 습격하였다.[59] 이는 통일 신라 말기에 극심하게 어려워진 신라 사람들의 해적 활동으로 여겨진다.[59]9. 현대적 의의
통일신라는 현대 한국 사회에 여러 가지 중요한 유산과 의미를 남겼지만, 주어진 원본 자료가 없어 구체적인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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