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2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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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요한 20세는 중세 시대의 기록 오류로 인해 실제 존재하지 않는 교황이다. 교황 요한 14세의 기록 오독으로 인해 "요한 14세 bis"가 추가되면서, 요한 15세부터 19세까지가 실제 번호보다 하나씩 더해져 불리기도 했다. 1276년 교황으로 선출된 요한 21세는 이러한 오류를 수정하고자 21세라는 이름을 선택했지만, 19세기에 오류가 밝혀지면서 요한 20세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났다. 서방 분열 시기에는 대립 교황 요한 23세가 있었으며, 20세기 요한 23세가 서수 23을 사용하면서 서방 분열에 대한 해석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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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20세 | |
---|---|
교황 요한 연대 문제 | |
문제 | 교황 요한 20세의 존재 여부 |
교황 요한 21세 | 교황 요한 20세로 오인 |
원인 | 중세 시대 연대기 작가들의 부정확한 계산 교황 요한 15세와 대립 교황 요한 16세 사이의 요한 교황 요한의 연속적인 계승에 대한 혼란 |
역사적 배경 | |
교황 요한 19세 이후 | '교황 요한 20세'는 존재하지 않음 |
교황 요한 21세의 선택 | 자신의 이름을 '요한 21세'로 결정 |
이유 | 연대기 작가들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함 |
논쟁의 지속 | |
후대 역사가와 교황 | 교황 요한 20세의 부재를 인정 |
교황 요한 23세 | 자신의 이름을 '요한 23세'로 결정하며 논쟁 종식 시도 |
영향 | |
교황 요한 21세의 번호 | 그의 후임자들에게 영향 |
교황 요한의 목록 | '교황 요한 20세'는 목록에서 제외 |
2. 요한의 목록과 번호 문제
요한 14세와 요한 15세 사이의 교황 번호에 혼란이 있었다. 이는 11세기 교황 연대기의 기록을 오독했기 때문이다.
원래 기록은 요한 14세의 재위 기간(8개월)과 대립교황 보니파시오 7세에게 투옥된 기간(4개월)을 분리하여 명시했다.
:''Iohannes m. VIII'' (요하네스, 8개월)
:''Iohannes m. IV'' (요하네스, 4개월)
그러나 요한 19세 재위 이후 이 기록은 두 명의 다른 "교황 요한"을 언급하는 것으로 오인되었다. 즉, 8개월간 재위한 요한과 그 뒤를 이어 4개월간 재위한 또 다른 요한으로 해석된 것이다. 이 두 번째 요한은 ''"Iohannes XIV. bis"'' ("요한 14세 두 번째")로 불렸으며, 요한 14세 사후 보니파시오 7세에 반대했던 추기경 부제 요한과 혼동되었다.
이 때문에 요한 15세부터 요한 19세까지는 실제 번호보다 하나씩 더해진 번호로 불리기도 했다. (예: 요한 15세(16세))[1][5] 요한 21세는 이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20세를 건너뛰고 21세를 선택했다.[6]
이러한 혼란은 19세기에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교황들이 재위 기간 동안 사용했던 숫자를 사용하여 열거한다. 따라서 실제 역사에서 요한 20세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방 분열 시기에는 대립교황 요한 23세가 있었으며, 1958년 즉위한 교황 요한 23세는 발다사레 코사를 대립교황으로 재확인하고 자신은 23세를 사용하였다.
2. 1. 요한 1세 ~ 요한 14세
요한 1세부터 요한 14세까지는 번호에 논란이 없다.2. 2. 요한 14세 이후의 혼란
교황 요한 14세(983-984)에 대한 기록은 중세 시대에 잘못 해석되었다. 교황 연대기에서 그의 재위 기간("VIII mens." = 8개월)과 대립교황 보니파시오 7세에게 투옥된 기간("per IV menses" = "4개월 동안")을 আলাদা আলাদাভাবে 명시한 것을, 11세기 요한 19세 재위 이후에 두 명의 다른 "교황 요한"을 언급하는 것으로 오독했다.:''Iohannes m. VIII'' ("요한, 8개월")
:''Iohannes m. IV'' ("요한, 4개월")
이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요한 14세 bis"가 추가되면서 혼란이 시작되었다. 두 요한을 구별하기 위해 두 번째 요한은 ''"Iohannes XIV. bis"'' ("요한 14세 두 번째")로 번호가 매겨졌고, 요한 14세의 죽음 이후 보니파시오 7세에 반대했던 추기경 부제 로베르토의 아들 요한이라는 역사적인 인물과 혼동되었다.
이 때문에 교황 요한 15세(985-996)부터 교황 요한 19세(1024-1032)까지는 실제 번호보다 하나씩 더해진 번호로 불리기도 했다. (예: 요한 15세(16세))[1] [4] [5] 페드루 줄리앙은 요한 21세라는 이름을 취함으로써 이 "오류"를 "수정"했다.
이러한 계산은 19세기에 발견되었으므로, 현재 교황들은 재위 기간 동안 사용했던 숫자를 사용하여 열거된다. 실제 요한 20세는 존재하지 않는다.
2. 3. 요한 20세의 부재와 요한 21세
요한 21세는 교황 요한 14세와 관련된 혼란을 "수정"하기 위해 20세를 건너뛰고 21세를 선택했다.[6][14] 이 혼란은 11세기 교황 연대기 기록을 잘못 해석하면서 발생했다. 원래 기록은 요한 14세의 재위 기간(8개월)과 대립교황 보니파시오 7세에 의해 투옥된 기간(4개월)을 분리하여 명시했다.:''Iohannes m. VIII'' ("요한, 8개월")
:''Iohannes m. IV'' ("요한, 4개월")
그러나 요한 19세 재위 이후 이 기록은 두 명의 다른 "교황 요한"을 언급하는 것으로 오인되었다. 즉, 8개월간 재위한 요한과 그 뒤를 이어 4개월간 재위한 또 다른 요한으로 해석된 것이다. 이 두 번째 요한은 ''"Iohannes XIV. bis"'' ("요한 14세 두 번째")로 불렸으며, 요한 14세 사후 보니파시오 7세에 반대했던 추기경 부제 요한과 혼동되었다.
요한 15세부터 요한 19세까지는 이러한 "요한 14세 bis"의 존재를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페드루 줄리아웅이 요한 21세라는 이름을 선택함으로써 이 "오류"를 바로잡고자 했다.
이 오류는 19세기에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교황들이 재위 기간 동안 사용했던 숫자를 사용하여 열거한다. 따라서 실제 역사에서 요한 20세는 존재하지 않는다.
2. 4. 대립교황 요한 16세와 요한 23세
대립교황 요한 16세는 997년부터 998년까지 교황 그레고리오 5세에 대립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그의 재위 번호 16세는 유지되었다.[2]서방 분열 시기인 1410년부터 1415년까지는 대립교황 요한 23세가 교황직을 주장했다. 그는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대립교황 알렉산데르 5세의 뒤를 이은 인물이다. 당시 아비뇽과 로마의 교황 모두 퇴위하지 않아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상황이었고, 요한 23세는 이러한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한 합의의 일환으로 1415년에 퇴위하였다.
20세기 중반까지 교황청 연감에는 대립교황 요한 23세가 정통 교황으로 기록되기도 했다.[7] 그러나 1958년 교황 요한 23세가 즉위하면서 발다사레 코사를 대립교황으로 재확인하고, 자신은 23세를 사용하였다.
2. 5. 요한 23세(1958-1963)의 번호 확정
교황 요한 23세(1958-1963)는 1958년에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발다사레 코사를 대립교황으로 인정하고 자신은 '23세'라는 번호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8] 이는 서방 분열에 대한 재해석을 반영한 결정이었다. 이전까지 교황청 연감에는 1409년까지는 로마 계열의 교황을 정통으로, 1415년까지는 피사 계열의 교황을 정통으로 기록하고, 교황 그레고리오 12세(1406-1415), 대립교황 알렉산데르 5세(1409-1410), 대립교황 요한 23세(1410-1415)를 마지막 세 명의 교황으로 기록했다.[7] 그러나 요한 23세의 결정으로 서방 분열이 재해석되어, 교황청 연감의 현대판에는 그레고리오 12세의 재위 기간이 1415년까지로 연장되었고, 피사 계열의 교황인 알렉산데르 5세와 요한 23세는 대립교황으로 간주되게 되었다.2. 6. 서방 분열의 종식과 한국 가톨릭교회
콘스탄츠 공의회를 통해 서방 분열이 종식되기 전, 1409년 피사 공의회는 알렉산데르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분열을 끝내려 했다.[7] 그러나 아비뇽과 로마의 교황 모두 퇴위를 거부하여 세 명의 교황이 경쟁하는 상황이 되었다.[7] 알렉산데르 5세의 뒤를 이은 요한 23세는 1415년에 퇴위했다.[7]20세기 중반까지 ''교황 연감''은 1409년까지 로마 계열, 그 후 1415년까지 피사 계열을 정통으로 간주했다.[7]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1958–1963)가 서수 XXIII를 다시 사용하면서 서방 분열에 대한 해석이 달라졌다.[8] 현대 ''교황 연감''은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의 재위 기간을 1415년까지로 연장하고, 피사 계열의 알렉산데르 5세와 요한 23세를 대립교황으로 간주한다.[7]
참조
[1]
간행물
[2]
간행물
[3]
간행물
[4]
간행물
[5]
간행물
[6]
간행물
[7]
서적
Annuario pontificio per l'anno 1942
Rome
[8]
뉴스
"I Choose John..."
https://content.time[...]
Time
1958-11-10
[9]
간행물
[10]
간행물
[11]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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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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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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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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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Annuario pontificio per l'anno 1942
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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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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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I Choose John..."
https://content.time[...]
Time
1958-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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