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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교황 요한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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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립교황 요한 23세는 1410년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알렉산데르 5세가 사망한 후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당시 서방 교회의 분열 상황에서 정통 교황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군인, 법학자 경력을 거쳐 교황청에 진출했으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폐위되었다. 이후 메디치 가문의 지원으로 석방되었으나, 프라스카티의 주교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요한 23세는 역사적으로 논란이 많은 인물로, 그의 죄목과 도덕성에 대한 비판이 존재하며, 20세기의 교황 요한 23세가 이 이름을 사용하면서 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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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교황 요한 23세
기본 정보
울리히 폰 리첸탈의 콘스탄츠 공의회 연대기 미니어처
울리히 폰 리첸탈의 콘스탄츠 공의회 연대기 미니어처
존칭 접두사대립교황
이름요한 23세
본명발다사레 코사
출생일약 1365년
출생지프로치다, 나폴리 왕국
사망일1419년
사망지피렌체, 피렌체 공화국
매장지대립교황 요한 23세의 무덤
모교볼로냐 대학교
기타요한
문장C o a Giovanni XXIII (Pisa).svg
직함
선출1410년 5월 17일
즉위1410년 5월 25일
종료1415년 5월 29일
이전 교황 (로마)그레고리오 12세
이전 교황 (대립, 피사)알렉산데르 5세
이전 교황 (대립, 아비뇽)베네딕토 13세
이후 교황 (로마)그레고리오 12세
이후 교황 (대립, 아비뇽)베네딕토 13세
이후 교황 (대립, 피렌체)펠릭스 5세
반대 교황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2세
반대 교황 (대립, 아비뇽)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
서품1410년 5월 24일
서품자장 알라르메 드 브로니
축성1410년 5월 25일
축성자장 알라르메 드 브로니
추기경 임명1402년 2월 27일
추기경 임명자교황 보니파시오 9세
계급추기경 부제

2. 초기 생애

발다사레 코사는 나폴리 왕국프로치다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군인으로 경력을 시작하여 앙주-나폴리 전쟁에 참여했으며, 그의 형제들은 해적질로 인해 처형당했다.[3] 이후 볼로냐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고, 1392년 교황 보니파시오 9세의 시종이 되었다. 1396년 부제, 1402년 추기경, 1403년 교황 사절 등 요직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이고 야심이 크며 부도덕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지역 강도 집단과의 연관설도 있었다.[4] 그의 초기 경력은 해적이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11][12][13]

2. 1. 군인 및 법학자 경력

발다사레 코사는 나폴리 왕국프로치다 섬에서 프로치다 영주 조반니 코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는 군인으로 경력을 시작하여 나폴리 왕국의 앙주-나폴리 전쟁에 참여했다. 그의 두 형제는 해적질로 인해 나폴리의 라디슬라오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3]

그는 볼로냐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민법과 교회법 모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마도 그의 가족의 권유로 1392년에 그는 교황 보니파시오 9세의 시종이 되었으며, 처음에는 볼로냐에서, 그 다음에는 로마에서 일했다. 1386년에 그는 볼로냐 대성당의 참사회원으로 기록되었다. 1396년에 그는 볼로냐의 부제가 되었다. 그는 1402년에 성 에우스타키우스의 추기경 부제가 되었고 1403년에 로마냐의 교황 사절이 되었다. 요한 페터 키르슈는 코사를 "완전히 세속적이고, 야심만만하며, 교활하고, 파렴치하며, 부도덕하고, 훌륭한 군인이지만 성직자는 아니다"라고 묘사한다.[4] 이 시기에 코사는 또한 종종 그의 경쟁자를 위협하고 마차를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던 지역 강도 집단과 관련이 있었다. 이러한 연관성은 그 지역에서 그의 영향력과 권력을 더했다.

그의 경력은 의심스러우며, 볼로냐 대학교에서 배운 후 해적 또는 군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9세 아래에서 로마 교황청에서 일했으며, 1396년에 부제장, 1402년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1403년부터 1408년까지 볼로냐의 교황 사절로도 선출되었다. 행정 수완이 있었지만 출세욕과 허영심도 있었다고 하며, 볼로냐에서 품행이 좋지 않은 귀부인의 정부가 되었다는 소문도 돌았다.[11][12][13]

2. 2. 교황청 진출

발다사레 코사는 나폴리 왕국프로치다 섬에서 프로치다 영주 조반니 코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군인으로 경력을 시작하여 나폴리 왕국의 앙주-나폴리 전쟁에 참여했다. 그의 두 형제는 해적질로 인해 나폴리의 라디슬라오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3]

볼로냐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민법과 교회법 모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마도 가족의 권유로 1392년에 교황 보니파시오 9세의 시종이 되었으며, 처음에는 볼로냐에서, 그 다음에는 로마에서 일했다. 1386년에 볼로냐 대성당의 참사회원으로 기록되었고, 1396년에는 볼로냐의 부제가 되었다. 1402년에는 성 에우스타키우스의 추기경 부제가 되었고, 1403년에는 로마냐의 교황 사절이 되었다. 서방 교회 대분열은 1378년에 시작되었으며, 당시 프랑스와 스페인의 지지를 받는 아비뇽과 이탈리아, 독일, 잉글랜드 대부분의 지지를 받는 로마에 각각 교황이 있어 두 명의 경쟁 교황이 있었다. 요한 페터 키르슈는 코사를 "완전히 세속적이고, 야심만만하며, 교활하고, 파렴치하며, 부도덕하고, 훌륭한 군인이지만 성직자는 아니다"라고 묘사한다.[4] 이 시기에 코사는 종종 그의 경쟁자를 위협하고 마차를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던 지역 강도 집단과 관련이 있었으며, 이러한 연관성은 그 지역에서 그의 영향력과 권력을 더했다.

그의 초기 경력은 의심스러우며, 볼로냐 대학교에서 배운 후 해적, 군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보니파시오 9세 아래에서 로마 교황청에서 일했으며, 1396년에 부제장, 1402년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1403년부터 1408년까지 볼로냐의 교황 사절로도 선출되었다. 행정 수완이 있었지만 출세욕과 허영심도 있었다고 하며, 볼로냐에서 품행이 좋지 않은 귀부인의 정부가 되었다는 소문도 돌았다.[11][12][13]

3. 서방 교회 대분열과 피사 공의회

코사 추기경은 1408년 5월 교황 그레고리 12세에게서 충성을 철회한 7명의 추기경(가톨릭)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그레고리 12세가 사전에 협의 없이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하지 않겠다는 엄숙한 맹세를 어겼다고 주장했다. 아비뇽의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를 따르던 추기경들과 함께 피사 공의회를 소집했고, 코사는 이 공의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피사 공의회는 분열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그레고리 12세와 베네딕토 13세를 모두 폐위시키고 1409년에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했다.[4] 그러나 그레고리와 베네딕토는 이 결정을 무시했고, 그 결과 세 명의 교황 자칭자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3. 1. 피사 공의회 주도

코사 추기경(가톨릭)은 1408년 5월 교황 그레고리 12세에게서 충성을 철회한 7명의 추기경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그레고리 12세가 사전에 협의 없이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하지 않겠다는 엄숙한 맹세를 어겼다고 주장했다. 아비뇽의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를 따르던 추기경들과 함께, 이들은 피사 공의회를 소집했고, 코사는 이 공의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공의회의 목적은 분열을 끝내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그레고리 12세와 베네딕토 13세 모두를 폐위시키고 1409년에 새로운 교황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했다.[4] 그러나 그레고리와 베네딕토는 이 결정을 무시했고, 그 결과 당시 세 명의 교황 자칭자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3. 2. 대립교황 알렉산데르 5세 선출

코사 추기경은 1408년 5월 교황 그레고리 12세에게서 충성을 철회한 7명의 추기경(가톨릭)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들은 그레고리 12세가 사전에 협의 없이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하지 않겠다는 엄숙한 맹세를 어겼다고 주장했다.[4] 아비뇽의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를 따르던 추기경들과 함께 이들은 피사 공의회를 소집했고, 코사는 이 공의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공의회는 분열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 그레고리 12세와 베네딕토 13세를 모두 폐위하고 1409년에 새로운 교황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했다.[4] 그러나 그레고리와 베네딕토는 이 결정을 무시했고, 그 결과 당시 세 명의 교황 자칭자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4. 대립교황 요한 23세 즉위와 통치

알렉산데르 5세가 1410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발다사레 코사가 요한 23세로 즉위했다. 그는 즉위하기 불과 하루 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5] 요한 23세는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보헤미아 왕국, 포르투갈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일부, 그리고 피렌체, 베네치아 공화국, 아퀼레이아 총대주교구 등 이탈리아 북부 도시 국가들로부터 교황으로 인정받았다. 초기와 1411년부터 1413년까지는 헝가리와 폴란드에서도 그를 지지했다.[5] 그러나 아비뇽의 베네딕토 13세는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 왕국, 시칠리아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는 나폴리의 라디슬라오, 카를로 1세 말라테스타, 바이에른 공작, 팔츠 선제후 루이 3세 등에게서 지지를 받고 있었다.[5]

요한 23세의 주된 적은 로마에서 그레고리오 12세를 보호하던 나폴리의 라디슬라오였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 요한 23세는 볼로냐에서 1년을 보낸 뒤 앙주 공작 루이 2세와 연합하여 라디슬라오에 대항했다. 초반에는 승리했지만, 1413년 5월 라디슬라오가 로마를 다시 점령하면서 요한 23세는 피렌체로 피신해야 했다.[4]

피렌체에서 요한 2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를 만났다. 교회의 분열을 끝내고자 했던 지기스문트는 요한 23세에게 공의회 소집을 촉구했다. 요한 23세는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공의회를 열려고 했으나, 결국 지기스문트의 뜻대로 1414년 10월 30일 독일의 콘스탄츠에서 콘스탄츠 공의회가 소집되었다.[7] 공의회에서는 세 명의 교황 모두 퇴위하고 새 교황을 선출하기로 결정했다.[7]

4. 1. 대립교황 선출 배경

1409년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알렉산데르 5세가 이듬해 1410년에 급사하자, 메디치 가문 당주 조반니 디 비치의 지원으로 코사가 교황위에 올랐다.[14] 알렉산데르 5세는 코사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도 있었다.[14] 메디치 은행은 교황청과의 거래로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14] 같은 해, 로마왕루프레히트의 죽음으로 치러진 신성 로마 제국의 로마왕 선거에 개입하여 지기스문트를 지지, 이듬해 1411년의 선출에 힘을 보태 로마파의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에 대항했다.[14]

1410년 5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 알렉산데르 5세가 볼로냐에서 추기경 발다사레 코사와 함께 있다가 갑자기 사망했다. 1410년 5월 25일, 코사는 교황으로 서임되어 요한 23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불과 하루 전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5] 요한 23세는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보헤미아 왕국, 포르투갈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 그리고 피렌체와 베네치아 공화국 및 아퀼레이아 총대주교구를 포함한 수많은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에 의해 교황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초기와 1411년부터 1413년까지 헝가리와 폴란드에서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 왕국, 시칠리아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에 의해 교황으로 여겨졌다. 그레고리오 12세는 여전히 나폴리의 라디슬라오, 카를로 1세 말라테스타, 바이에른 공작, 팔츠 선제후 루이 3세, 팔츠 선제후, 그리고 독일과 폴란드의 일부 지역에서 지지를 받았다.[5]

4. 2. 메디치 가문과의 관계

요한 23세는 메디치 은행을 교황청의 은행으로 지정하여 메디치 가문의 부와 명성에 크게 기여했다.[6] 1409년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알렉산데르 5세가 이듬해 1410년에 급사하자, 메디치 가문 당주 조반니 디 비치의 지원으로 코사가 교황위에 올랐다. 이때 알렉산데르 5세는 코사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도 있었다.[14] 메디치 은행은 교황청과의 거래로 막대한 이익을 올렸고, 교황청의 재무 관리를 맡아 15세기 말까지 이 지위를 유지했다.

4년간 구금되었던 요한 23세는 1419년 조반니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17] 그해 6월 마르티노 5세로부터 투스콜로 주교로 임명되었지만, 같은 해 12월 22일 피렌체에서 사망했다. 사후 산 조반니 세례당(피렌체 대성당에 인접)에 조반니의 의뢰로 도나텔로와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가 제작한 요한 23세의 묘비가 세워졌다.[18]

4. 3. 얀 후스 파문과 종교 개혁의 불씨

1409년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알렉산데르 5세가 이듬해 1410년에 급사하자, 메디치 가문의 당주 조반니 디 비치의 지원으로 코사가 교황위에 올랐다. 이때 알렉산데르 5세는 코사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도 있었다.[14] 메디치 은행은 교황청과의 거래로 막대한 이익을 올렸으며, 교황청의 재무 관리를 맡아 15세기 말까지 이 지위를 유지했다.

보헤미아에서는 프라하 대주교 즈비네크 자이츠가 프라하 대학교 학장 얀 후스이단으로 고발했고, 이를 받아들인 요한 23세는 1410년 8월에 후스의 저서를 소각하라고 명령했다. 이듬해인 1411년 2월에는 후스를 파문했다. 같은 해 9월, 로마를 점령하고 있던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를 토벌하기 위해 십자군을 계획하고, 이듬해 1412년 5월에 보헤미아에 면죄부를 판매했다. 이는 후스를 비롯한 프라하 대학교 교수진의 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7월에 후스는 다시 파문당했다. 프라하에는 성무 정지 명령이 공포되어 후스는 프라하에서 퇴거당했다.[15]

5. 콘스탄츠 공의회와 폐위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이자, 요한 23세는 1415년 3월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4세의 도움을 받아 도주했다. 이후 체포되어 폐위되었고, 이단, 성직 매매, 분열, 부도덕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에드워드 기번은 요한 23세가 해적질, 강간, 소돔, 살인, 근친상간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고 기록했다.[9]

요한 23세는 팔츠 선제후 루드비히 3세에게 넘겨져 하이델베르크만하임 등지에서 수감되었다. 아비뇽의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사임을 거부해 파문당했고, 1417년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선출되어 교회 대분열이 종식되었다.

5. 1. 공의회 소집과 도주

1414년 11월, 요한 23세는 독일에서 콘스탄츠 공의회를 소집했다.[16] 이 공의회는 교회 대분열을 끝내기 위한 지기스문트의 압력과 협상으로 이루어졌다. 요한 23세는 다수의 이탈리아인 참석자들을 통해 자신의 입장이 재인정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공의회가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자, 1415년 3월 20일오스트리아 공 프리드리히 4세의 도움을 받아 콘스탄츠에서 도망쳤다.[16] 요한은 우체부로 변장하여 콘스탄츠를 탈출했다.[7]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4세의 귀족 고객이 쓴 클링겐베르거 연대기에 따르면, 요한 23세는 라인 강을 따라 보트를 타고 샤프하우젠으로 갔고, 프리드리히는 소수의 기병과 함께 그를 따랐다. 요한이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콘스탄츠에는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고, 지기스문트는 분열을 종식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분노했다.

그 동안, 대립교황 요한 23세와 프리드리히는 라인 강을 따라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로 더 멀리 도망쳤는데, 이곳은 오스트리아 공작을 영주로 인정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지기스문트의 부관인 팔라티네 선제후 루트비히 3세가 그들을 따라잡았다. 루트비히 3세는 프리드리히에게 도망친 교황을 숨겨두면 너무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고 설득했고, 오스트리아 공작은 자신과 요한을 넘겨주고 콘스탄츠로 돌아가기로 동의했다.[8]

5. 2. 체포와 폐위

1415년 5월 17일, 요한 23세는 콘스탄츠에서 도망쳤으나 체포되어 5월 29일에 폐위 선고를 받았다.[16] 공의회는 요한 23세가 부재한 동안 그를 폐위시켰고, 복귀 후 이단, 시모니아, 분열, 부도덕 혐의로 재판하여 유죄 판결을 내렸다.[9] 18세기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더욱 충격적인 혐의는 억제되었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해적질, 강간, 소돔, 살인 및 근친상간 혐의로만 기소되었다."라고 기록했다.[9] 요한 23세는 팔츠 선제후 루드비히 3세에게 넘겨져 하이델베르크만하임에서 여러 달 동안 투옥되었다.

아비뇽에 마지막으로 남은 자칭 교황인 베네딕토 13세는 사임을 거부하여 파문당했다. 1417년에는 마르티노 5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16]

요한 23세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 성직 매매, 해적 행위, 살인, 강간, 남색, 근친상간 등 다양한 죄목으로 고발당했다.[16] 4년간 구금되었으나, 1419년 조반니 디 비치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이러한 죄목은 날조된 것으로 추정된다.[17]

6. 석방, 죽음, 그리고 유산

요한 23세는 세속적이고 야심적인 인물로, 그의 도덕적 삶은 비난을 면치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 한 역사가는 그를 "세속적인 일에는 훌륭했지만, 영적인 일에는 완전한 실패자이자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3] 그의 경력은 의심스러운데, 볼로냐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해적과 군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9세 아래에서 로마 교황청에서 일했으며, 1396년 부제, 1402년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1403년부터 1408년까지 볼로냐의 교황 사절로도 선출되었다. 행정 능력은 뛰어났지만, 출세욕과 허영심이 강했고, 볼로냐에서는 품행이 좋지 않은 귀부인의 정부였다는 소문도 있었다.[11][12][13]

6. 1. 메디치 가문의 도움과 죽음

대립교황 요한 23세의 묘.


코사는 메디치 가문이 거액의 몸값을 지불한 후 1418년에 풀려났다.[6] 그는 피렌체로 가서 마르티노 5세에게 복종했고, 마르티노 5세는 그를 프라스카티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했다. 코사는 불과 몇 달 후에 사망했다.

메디치 가문은 도나텔로미켈로초에게 의뢰하여 피렌체의 산 조반니 세례당에 그의 웅장한 묘를 건설하도록 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석관에 새겨진 "전 교황 요한"이라는 비문에 대해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09년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알렉산데르 5세가 이듬해 1410년에 급사하자, 메디치 가문 당주 조반니 디 비치의 지원으로 코사가 교황위에 올랐다. 이때 알렉산데르 5세는 코사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메디치 은행은 교황청과의 거래로 막대한 이익을 올렸고, 15세기 말까지 교황청의 재무 관리를 맡았다.

요한 23세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 성직 매매를 비롯해 해적, 살인, 강간, 남색, 근친상간 등 다양한 죄목으로 고발당했고, 4년간 구금되었지만, 1419년에 조반니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이러한 죄목은 아마도 날조된 것이라고 생각된다.[17]

석방 후 1419년 6월, 마르티노 5세는 그를 투스콜로 주교로 임명했지만, 같은 해 12월 22일 피렌체에서 사망했다. 사망 후, 산 조반니 세례당(피렌체 대성당에 인접)에 조반니의 의뢰로 도나텔로와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가 제작한 요한 23세의 묘비가 세워졌다. 비문에는 "과거 교황이었던 요한 23세"라고 쓰여 있어, 마치 정규 교황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모호한 인상을 주었다. 마르티노 5세는 비문 수정을 명령했지만 피렌체는 따르지 않았고, 현재도 묘비와 함께 남아 있다.[18]

6. 2. 도나텔로와 미켈로초의 묘비



메디치 가문은 도나텔로미켈로초피렌체산 조반니 세례당에서 그의 웅장한 묘를 건설하는 것을 감독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석관에 새겨진 "전 교황 요한"이라는 비문에 대해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

조반니 디 비치의 의뢰로 도나텔로와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가 제작한 요한 23세의 묘비는 피렌체 대성당에 인접한 산 조반니 세례당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과거 교황이었던 요한 23세"라고 쓰여 있어, 정규 교황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모호한 인상을 준다. 마르티노 5세는 비문 변경을 명령했지만 피렌체는 따르지 않았고, 현재도 묘비와 함께 남아 있다.[18]

7. 요한이라는 교황 이름의 문제

기독교 역사상 20세기의 교황 요한 23세와는 다른 사람이며 로마 교황청도 대립교황 요한 23세를 인정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밝혔다.[1]

20세기의 요한 23세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안젤로 론칼리가 1958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가 ''요한 23세''가 될지 ''요한 24세''가 될지를 두고 약간의 혼란이 있었고,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요한 23세라고 선언했다. 요한 20세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중세 시대의 교황 요한 21세의 실수로 그 번호가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번이 대립 교황 요한을 요한 22세라고 언급하는 이유이다.[2]

대립교황 요한 23세가 사망한 지 500년 이상이 지난 동안, 역대 최다 인원이 사용했던 교황 요한의 이름은 사용되지 않았다.[3] 이 이름들 중, 16세는 이 요한 23세와 같은 대립교황으로 간주되지만, 다음 요한이 17세를 칭했기 때문에 역대 서수에 그대로 포함되었다. 또한 15·17·18·19세 및 16세는 14세와 15세 사이에 또 한 명의 교황 요한이 존재했다는 11세기 당시의 인식에 근거하여, 이 요한 23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씩 밀려서 서수가 계산되었다.[3] 따라서 요한 20세라는 교황은 존재하지 않은 채,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잘못된 서수 계산이 계속되었다.[3]

1958년, 정식 교황으로 요한 23세가 선출되었다. 이때도 서수 수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4]

참조

[1] 서적 Annuario pontificio per l'anno 1942 1942
[2] 간행물 I Choose John ... http://content.time.[...] 1958-11-10
[3] 서적 Crises in the History of the Papacy G.P. Putnam's Sons
[4] 웹사이트 John XXIII." The Catholic Encyclopedia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1910
[5] 문서 Donatello & Michelozzo Harvey Miller 1980
[6] 웹사이트 Popes and Prelates http://www.palazzo-m[...]
[7] 웹사이트 Cossa, Baldassare http://www2.fiu.edu/[...]
[8] 문서 Das Konzil von Konstanz 1414–1418
[9] 서적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The Heritage Press 1946
[10] 웹사이트 Medici: Masters of Florence https://www.imdb.com[...] 2016-12-09
[11] 문서 スチュアート、P183。
[12] 문서 バンソン、P133。
[13] 문서 新カトリック大事典編纂委員会、P1116。
[14] 문서 鈴本、P139、森田、P71 - P72、瀬原、P242 - P243。
[15] 문서 鈴本、P163 - P167、瀬原、P248、P261 - P265。
[16] 문서 鈴本、P141 - P147、瀬原、P248 - P254。
[17] 문서 森田、P72 - P73。
[18] 문서 森田、P73、P77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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