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스베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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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로스베렌 전투는 1813년 8월, 나폴레옹의 베를린 점령 시도를 막기 위해 프로이센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이다. 바우첸 전투 이후 정전 기간 동안 프랑스는 베를린 공략을 준비했고, 이에 맞서 연합군은 트라첸베르크 작전에 따라 프랑스군을 각개격파하려 했다. 프랑스군은 악천후와 지형적 어려움 속에서 진격을 시도했으나, 그로스베렌에서 프로이센군의 반격을 받아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베를린 점령에 실패했고, 나폴레옹의 동맹군 지휘관인 우디노는 지휘 능력을 의심받아 강등되었다. 그로스베렌 전투는 트라첸베르크 작전의 유효성을 입증하고, 나폴레옹의 몰락에 기여한 중요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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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스베렌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개요 | |
| 전투명 | 그로스베렌 전투 | 
| 일부 | 독일 전역의 제6차 대프랑스 동맹 | 
![]()  | |
| 날짜 | 1813년 8월 23일 | 
| 장소 | 프로이센 브란덴부르크의 그로스베렌 (현재 독일 베를린 남쪽) | 
| 지도 유형 | 유럽 | 
| 지도 부조 | 1 | 
| 지도 크기 | 300 | 
| 결과 | 연합군 승리 | 
| 관할 영역 | 해당 사항 없음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프로이센 왕국 ([[File: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803-1892).svg|18px]]) 러시아 제국 ([[File:Flag_of_Russia.svg|20px]]) 스웨덴 ([[File:Flag_of_Sweden.svg|20px]])  | 
| 교전국 2 | 프랑스 제1제정 ([[File:Flag of France.svg|18px]]) 작센 왕국 ([[File:State flag of Saxony before 1815.svg|20px]])  | 
| 지휘관 | |
| 지휘관 1 | 장 바티스트 쥘 베르나도트 ([[File:Flag_of_Sweden.svg|18px]])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뷜로 ([[File: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803-1892).svg|18px]])  | 
| 지휘관 2 | 장 레니에 ([[File:Flag of France.svg|20px]]) 니콜라 우디노 ([[File:Flag of France.svg|20px]])  | 
| 부대 정보 | |
| 부대 1 | 제3군단 | 
| 부대 2 | 제7군단 | 
| 병력 규모 | |
| 병력 1 | 32,000명 | 
| 병력 2 | 18,000명 | 
| 피해 규모 | |
| 피해 1 | 1,800명, 대포 6문 | 
| 피해 2 | 3,200명, 대포 14문 | 
2. 서막
1813년 5월, 바우첸 전투 이후 제6차 대프랑스 동맹과 프랑스군은 7주간의 정전에 합의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여 동맹의 한 축을 무너뜨리려 했다. 이를 위해 니콜라 우디노 원수에게 3개 군단, 약 65,000명에서 70,000명의 병력을 주어 베를린 공격을 맡겼다. 우디노는 프랑스의 러시아 원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황제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했다.
한편, 연합군은 트라첸베르크 작전에 따라 나폴레옹 주력 부대와의 교전을 피하고, 각개격파 전략을 채택했다. 이들은 나폴레옹 휘하의 원수들을 소규모 전투로 각개격파하여 프랑스군을 약화시킨 후 나폴레옹을 격파하려 했다.
2. 1. 프랑스군의 열악한 진군 상황
1813년 8월 19일, 프랑스군의 베를린 공세는 시작부터 폭우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쏟아진 비로 도로는 진흙탕이 되어 포병대의 이동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베를린 남쪽 지역은 원래부터 작은 호수와 늪지대가 많아 진군을 더욱 방해했다.[2] 날씨가 좋을 때도 베를린으로 접근할 수 있는 도로는 몇 개 없었는데, 폭우로 인해 프로이센군의 방어 거점들은 요새화된 섬과 같이 되었다.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니콜라 우디노 원수는 휘하의 군단을 셋으로 나누어 진군할 수밖에 없었다. 각 부대는 날씨와 도로 사정으로 인해 서로 제대로 연락을 취하기 어려웠다. 베르트랑 장군 휘하의 제4군단은 13,000명의 병력과 32문의 포를 가지고 우익을 맡았고, 좌익은 귈레미노 장군 휘하의 제12군단이 담당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경험이 부족한 신병 20,000명으로 구성되어 마리 루이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중앙에는 장 레니에르 장군 휘하의 제7군단 27,000명의 병력이 주력을 담당했는데, 이들은 대다수가 프랑스의 동맹국인 작센 출신이었다.[2]
우디노는 기병대가 부족하여 적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적의 강력한 저항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군의 진군에 불리하게 작용했다.[2]
2. 2. 연합군의 방어 전략
스웨덴 왕세자 카를 요한 (베르나도트)이 지휘하는 북방군은 프리드리히 폰 뷜로우 휘하의 프로이센 군단을 주축으로 베를린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들은 스웨덴 군의 지원을 받아 병력이 38,000명에 달했다.[2]베를린 남부는 진창과 호수들이 널려 있어 진군을 방해했다. 날씨가 좋을 때에도 남쪽에서 베를린으로 접근할 수 있는 도로는 두 개밖에 없었다. 그러나 8월 19일 내린 비로 인해 프로이센의 방어 거점들은 요새화된 섬과 같이 되었다.
플레세비츠 휴전 협정 체결 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약화된 군대를 작센에 집결시킨 후 베를린 재점령을 계획했다. 니콜라 우디노 원수의 '베를린 군'은 남쪽에서, 다부 원수의 북독일군은 북쪽에서 동시에 공격할 예정이었으나, 아직 휴전은 유효했다.
나폴레옹 군대는 루카우에서 프로이센 국경을 넘어 8월 21일 베를린 남쪽 22km 지점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뷔로 중장과 타우엔친 백작 대장이 이끄는 프로이센 제4군단, 미하일 세묘노비치 보론초프 중장, 빈친게로데 중장과 체르니쇼프 소장이 이끄는 러시아군 3개 군단 및 스웨덴군 22,000명이 총 10만 명의 병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후 프랑스군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트레빈을 점령하고, 블랑켄펠데와 윤스도르프에서 소규모 충돌이 발생했다. 뷔로 중장은 프랑스군이 누테 강의 저습지를 따라 북진하는 동안 그로스베렌에 포진하기로 결정했다.
연합군은 프로이센군이 좌익, 러시아군이 우익, 스웨덴군이 중앙에 배치되었다. 블랑켄펠데에서 전투가 발생했지만, 프랑스 제7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을 감안하여 앙리 가티앙 베르트랑 사단장은 전투를 중단했다.
3. 전투
8월 19일,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은 프랑스군의 베를린 공세는 시작부터 거센 비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도로는 진창이 되었고, 포병대의 진군은 불가능했다. 베를린 남부 지역은 원래 진창과 호수가 많아 진군을 방해하는 요소가 많았으며, 맑은 날에도 베를린으로 접근 가능한 도로는 두 개뿐이었다. 게다가 이 비로 인해 프로이센의 방어 거점들은 요새화된 섬과 같이 되었다. 니콜라 우디노 원수는 휘하의 군단을 셋으로 나누어 진군할 수밖에 없었고, 각 부대는 날씨와 도로 사정으로 인해 제대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베르트랑 장군 휘하의 제4군단은 우익, 귈레미노 휘하의 제12군단은 좌익, 장 레니에르(Jean Reynier) 장군 휘하의 제7군단은 중앙을 맡았다. 우디노는 기병대가 없어 적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적의 강력한 저항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베를린은 이전에 프랑스 원수였던 스웨덴의 왕세자 샤를 요한이 지휘하는 북방 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장 레니에의 군단이 그로스베렌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전투를 위해 배치된 샤를 왕세자 휘하의 군대와 마주쳤다. 레니에는 명령이나 지원도 없이 프리드리히 폰 뷜로우 휘하의 군단을 공격했다. 뷜로프의 군단은 막 스웨덴 군의 지원을 받아 병력이 38,000명 정도였다. 레니에르는 뷜로프 군단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병력을 집결시키지 못한 우디노가 늦게 전장에 도착했을 때, 레니에르 휘하의 작센 부대는 적의 파상공세로 인해 재집결에 실패하고 궤주하기 시작했다. 우디노는 자신들의 움직임이 적에게 포착되었고 부대가 적의 공격에 노출되었다고 판단, 워터보크(Jüterbog)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레니에르 부대에서만 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1,5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13문의 포가 탈취당했다.[2]
3. 1. 전투의 경과 (일본어 위키 상세 내용)
16시경, 폭우 속에서 장 레니에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제7군단이 그로스베렌 근처에 나타났다. 이들은 프로이센군이 그로스베렌을 점령하고 있는 것을 보고 포격을 시작했고, 약 1시간 만에 프로이센군을 마을에서 몰아냈다.[2] 프로이센군은 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Heinersdorf|하이네르스도르프de에 진을 쳤고, 프랑스군은 그로스베렌에 야영했다.[2]뷜로 중장은 프랑스군 전체와 대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북군 상급 지휘관인 스웨덴 왕태자 요한의 뜻에 반하여 공격을 결심했다.[2] 64문의 프로이센군 포병대가 포격을 시작하자, 프랑스군은 작센군의 더 강력한 44문 대포로 응사했다.[2] 동시에 프로이센군은 그로스베렌 동쪽에 위치한 Kleinbeeren|클라인베렌de에서도 공격했다.[2]
장 레니에 장군은 프로이센군의 총공세를 인식하고, 지휘 하의 좌익을 제2 집단의 작센군 6개 대대로 보강했다.[2] 이에 맞서 프로이센군은 오후 6시경, 총 35,000명에 의한 총검 돌격을 명령했다.[2] 포열 뒤에서 편성된 여러 대대는 척탄병 단위로 황폐화된 마을로 전진하여, 프랑스군을 퇴각시켰다.[2] 작센군의 제2 사단도 열세가 되어 후퇴했다.[2]
같은 시각, 낮 동안 레니에 군단의 후방에 있던 니콜라 우디노 원수의 부대가 인근의 Ahrensdorf (Ludwigsfelde)|아렌스도르프de에 도착했다.[2] 그는 즉시 기병 2,000명을 지원하기 위해 그로스베렌으로 보냈고 야습을 시작했지만, 프로이센군에게 격퇴당했다.[2]
4. 전투 결과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베를린 점령에 실패했다. 니콜라 우디노 원수는 패배와 건강 악화로 자신감을 잃고 비텐베르크로 퇴각했다.[2] 나폴레옹은 우디노가 루카우로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하지 않고 비텐베르크로 퇴각한 것에 분노하여, 미셸 네 원수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우디노를 네의 부관으로 강등시킨 후 다시 베를린 공격을 명령했다. 이 결과 데네비츠 전투가 발발했다.[2]
4. 1. 인명 및 물자 피해
장 레니에르 부대에서 프랑스군은 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1,5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대포 13문을 잃었다.[1]5. 전투의 영향 및 의의



그로스베렌 전투는 나폴레옹의 베를린 점령 계획을 좌절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제6차 대프랑스 동맹군은 사기가 크게 올랐으며, 트라첸베르크 작전의 유효성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2]
나폴레옹은 플레세비츠 휴전 협정 이후 약화된 군대를 작센에 집결시키고, 프로이센의 저항 거점인 베를린을 재점령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니콜라 우디노 원수가 이끄는 '베를린 군'이 다부 원수의 부대와 연락을 취하며 베를린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스웨덴의 왕세자 샤를 요한(이전 프랑스 원수 베르나도트)이 지휘하는 북부군이 베를린을 방어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폰 뷜로 군단은 증원을 받아 38,000명으로 강화되었고, 이들은 그로스베렌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폰 뷜로 군단은 경미한 사상자를 냈고, 프로이센군은 용맹하게 싸웠다.
트라헨베르크 계획은 플래스비츠 휴전 동안 연합군이 수립한 작전 전략으로, 나폴레옹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로스베렌 전투는 이 계획에 따라 나폴레옹이 없는 프랑스군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였다.
우디노는 자신의 군대가 노출된 위치에 있다고 판단하여 위터보크로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베르나도트는 프랑스군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추격을 명령하지 않았는데, 이는 나폴레옹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는 북부 연합군을 베를린 근처의 방어 위치에 유지하며 프랑스군의 추가 공격을 기다렸다.
그로스베렌 전투에서의 패배는 우디노의 자신감을 흔들었고, 그는 비텐베르크로 퇴각했다. 나폴레옹은 우디노의 패배와 비텐베르크로의 후퇴에 분노하며 미셸 네 원수를 임명하여 베를린으로의 두 번째 공세를 이끌게 했다. 그 결과는 데네비츠 전투로 이어졌다.
6. 기념




포츠담, 브레멘, 베를린의 "그로스베렌 거리"(Großbeerenstraße)는 이 전투를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다.[3]
1817년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이 설계한 주철 오벨리스크가 그로스베렌에 세워졌다. 첨탑 장식은 크로이츠베르크의 국립 해방 전쟁 기념비를 연상시킨다.
1913년 세워진 기념탑에는 "1813년 8월 23일, 뷔로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베를린을 점령 위기에서 구했다"는 내용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전장 뒤편에는 규장암으로 만든 높이 10m의 피라미드가 있으며, "우리 뼈는 베를린 앞에서 희게 하라. 물러서지 말라!"라는 뷔로 중장의 말이 새겨져 있다.
매년 그로스베렌에서는 전승 기념 축제와 전투 재연 행사가 열린다.
베스트팔렌 병사들은 전투 중 총기 문제에도 불구하고 "하케・타우"("돌격하라")라는 구호와 함께 전진하여 "하케토이어"(Hacketäuer)라는 별칭을 얻었다.[4]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많은 거리와 주택지는 이 보병 연대를 기념하여 "하케토이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6. 1. 문학적 언급
테오도어 폰타네는 1833년 14세의 나이로 그로스베렌 전투 현장을 방문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 전투에 관한 학교 에세이를 썼다. 이는 훗날 독일의 주요 작가가 될 폰타네가 쓴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폰타네는 노년에 쓴 에세이(1894년)에서 이 경험을 회고했다. 그는 또한 당시 젊은 베를린 여성이었던 그의 어머니가 전투 직후 독일군과 프랑스군 부상병들을 돌보았다고 언급했다. 그의 어머니는 위그노 가문 출신으로 여전히 프랑스어를 사용했기에, 죽어가는 프랑스 군인들과 그들의 언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폰타네의 Wanderungen durch die Mark Brandenburg|브란덴부르크 행진곡 순례de 제4권 "슈프레란트"의 주요 부분인 ''슈프레 강 좌안''에는 "그로스베렌"과 "그로스베렌 전투" 챕터가 포함되어 있다.[1]
참조
[1] 
서적
 
Geschichte der preußischen Landwehr. Historische Darstellung und Beleuchtung ihrer Vorgeschichte und späteren Organisation
 
https://books.google[...] 
Berlin
 
1863
 
[2] 
서적
 
Geschichte der preußischen Landwehr. Historische Darstellung und Beleuchtung ihrer Vorgeschichte und späteren Organisation
 
https://books.google[...] 
Berlin
 
1863
 
[3] 
웹사이트
 
クロイツベルクのグロースベーレン通り
 
https://berlin.kaupe[...] 
カウパート出版社
 
[4] 
서적
 
Historische Kurzgeschichten aus Westfalen. Von Mord, Hexen, Feme, Fehden und Kriegen
 
Menden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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