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신전선 상유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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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신전선 상유십이는 1597년 이순신이 명량 해전을 앞두고 선조에게 올린 장계로, "지금 신에게는 아직 전선이 12척이 남아 있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 장계는 《난중일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여러 문헌에 언급되어 있으며, 기록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장계의 시기와 장소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영화 <명량>의 다큐멘터리에서 제시된 시점은 역사적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역사적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이순신은 음력 9월 7일 진도 벽파진에서 이 장계를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금신전선 상유십이는 1597년(선조 30)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선조에게 올린 장계(狀啓)이다. 이 장계는 《난중일기》에는 언급되지 않고, 《이충무공 행록(李忠武公 行錄)》, 《이충무공 행장(李忠武公 行狀)》, 《시장(諡狀)》,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 《신도비(神道碑)》 등에 전해진다.
이순신은 조정에서 수군이 약하다는 이유로 육지에서 싸우라는 명령을 받자, "적이 곧바로 전라도, 충청도로 쳐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수군이 그 길목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다고 할지라도 신이 죽지 않은 이상 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장계를 올렸다.[5]
2. 장계의 내용 및 기록
기록에 따라 장계의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신도비(神道碑)》를 제외한 나머지 기록에는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즉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까닭에 일반적으로 "금신전선 상유십이 장계"라고 불린다.
2. 1. 《이충무공행장》의 기록
이순신이 배설에게 계책을 물으니, 배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육전을 도와서 공을 세우자고 하였다. 또 조정에서도 육전에 병력을 합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임진년 이후로 적이 감히 남쪽 지방을 겁탈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적의 세력을 막았기 때문인데, 이제 만일 수군을 없앤다면 적들은 반드시 호남을 거쳐 한강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다만 순풍에 돛 한 번만 달면 될 것이니, 신이 두려워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이 12척이 남아 있으니, 신이 죽지 않은 한 적도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2]
2. 2. 《시장》의 기록
公중국어은 10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말을 달려 순천부 경내로 들어가 병선 10여 척을 얻고, 또 도망병 수백 명을 겨우 거두어 어란도 해전에서 적병을 물리쳤다. 조정에서는 公중국어의 군사가 약하다고 생각하여 육지로 올라와서 육군과 합세하여 싸우도록 지시했으나, 公중국어은 “신이 만일 육지로 올라가면 적선이 서해로 바로 올라가 서울이 곧 위태해질 것입니다.(臣一登陸 則賊船由西海直上 京師危矣)”하고 장계하니, 조정에서도 그대로 좇았다.[4]
2. 3. 《신도비》의 기록
공은 10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말을 달려 순천으로 가서 남은 배 10여 척을 얻고 흩어진 군사 수백 명을 모아 어란도 해전에서 적을 깨뜨렸다. 이때 조정에서는 수군이 약하다고 하여 공에게 육지로 올라와서 싸우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공은 "적이 곧바로 전라도, 충청도로 쳐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수군이 그 길목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다고 할지라도 신이 죽지 않은 이상 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하고 아뢰었다.[5]
3. 장계 작성 시기와 장소에 대한 논란
다큐멘터리 <명량: 회오리 바다를 향하여>에서는 이 장계가 1597년 음력 8월 15일 보성 열선루에서 작성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여러 역사적 기록과 맞지 않아 논란이 있다. 하위 섹션에서는 이 주장에 대한 비판과 함께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장계 작성 시기와 장소를 추론하고 있다.
3. 1. 역사적 기록과의 불일치
李忠武公行錄중국어, 李忠武公行狀중국어, 宣廟中興誌중국어에서는 위 장계를 배설을 만난 다음에 올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5] 《시장》과 《신도비》에는 장계를 올린 시기를 어란도 해전 이후로 기록하고 있는데, 어란도 해전은 《난중일기》에 음력 9월 7일로 기록되어 있다.[5]
다큐멘터리 <명량 : 회오리 바다를 향하여>에서는 위 장계를 1597년 음력 8월 15일 보성 열선루에서 올렸다고 했으나, 이는 역사적 기록과 배치된다.[5]
결론적으로 음력 9월 7일에 이순신은 진도 벽파진에 머물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위 장계를 올렸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5]
3. 2. 타당한 추론
賊不敢直突兩湖者 以舟師之扼其路也중국어 전선이 비록 적다고 할지라도 신이 죽지 않은 이상 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戰船雖寡 微臣不死 則賊必不敢侮我矣)"하고 아뢰었다.[5]
'명량'의 프리퀄 다큐멘터리 <명량 : 회오리 바다를 향하여>는 위 장계를 1597년 음력 8월 15일 보성 열선루에서 올렸다고 했으나 이는 역사적 기록과 배치된다.
결론적으로 음력 9월 7일에 이순신은 진도 벽파진에 머물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위 장계를 올렸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참조
[1]
서적
충무공이순신전서
비봉출판사
2006
[2]
서적
충무공이순신전서
비봉출판사
2006
[3]
서적
충무공이순신전서
비봉출판사
2006
[4]
서적
충무공이순신전서
비봉출판사
2006
[5]
서적
충무공이순신전서
비봉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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