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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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순신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한성에서 출생하여 무과에 급제한 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거북선 건조와 학익진 전술을 통해 옥포 해전,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 등 주요 해전에서 승리하며 일본군의 침략을 막아냈다. 그러나, 모함으로 인해 두 차례 백의종군하기도 했으며, 노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순신은 뛰어난 지략과 리더십, 백성을 위한 헌신으로 오늘날까지도 존경받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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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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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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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순신 |
원어 이름 | 李舜臣 |
로마자 표기 | I Sunsin |
매큔-라이샤워 표기 | I Sunsin |
출생일 | 1545년 4월 28일 |
출생지 | 을지로동, 한성, 조선 |
사망일 | 1598년 12월 16일 |
사망지 | 남해 섬, 경상도, 조선 |
존칭 | 충무공 |
자 | 여해 |
호 | 기계, 덕암 |
본관 | 덕수 |
시호 | 충무 |
신체 | 187cm |
국적 | 조선 |
소속 군대 | 조선 수군 |
복무 기간 | 1576년 ~ 1598년 |
최종 계급 |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 |
작호 | 충무공(忠武公) |
추증 | 좌의정, 영의정 |
사당 | 현충사 |
아버지 | 이정 |
어머니 | 초계 변씨(변수림의 딸) |
배우자 | 방수진 (방진의 딸), 해주 오씨, 부안댁 |
자녀 | 정실: 이회, 이열, 이면, 덕수이씨 첩: 이훈, 이신, 덕수이씨, 덕수이씨 |
군사 경력 | |
소속 | 조선 수군 |
지휘 | 삼도수군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니탕개의 난 녹둔도 사건 임진왜란 옥포 해전 합포 해전 적진포 해전 사천 해전 당포 해전 당항포 해전 율포 해전 한산도 대첩 안골포 해전 장림포 해전 화준구미 해전 다대포 해전 서평포 해전 절영도 해전 초량목 해전 부산포 해전 웅포 해전 제2차 당항포 해전 장문포 해전 정유재란 어란포 해전 벽파진 해전 명량 해전 절이도 해전 왜교성 전투 노량 해전 |
관직 | |
직책 | 전라좌도수군절도사 |
임기 | 1591년 3월 8일 ~ 1597년 4월 12일, 1597년 9월 3일 ~ 1598년 12월 16일 |
겸직 | 삼도수군통제사 |
겸직 임기 | 1593년 8월 26일 ~ 1597년 3월 14일, 1597년 9월 3일 ~ 1598년 12월 16일 |
기타 | |
저작 | 난중일기 |
서훈 |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덕풍부원군 |
기타 이력 | 명 정1품 수군도독 |
지도 |
2. 생애 전반
이순신은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의 한성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덕수 이씨 가문으로, 할아버지 이백록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가 처형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아버지 이정 또한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전쟁 놀이를 통해 지도력을 보였고, 청소년기에는 직접 활과 화살촉을 만들기도 했다. 무과 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 어머니의 친척들이 살던 아산시에서 청소년기와 초기 성년기를 보냈다.
이순신의 초기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임진왜란 당시 군 지휘를 맡았던 류성룡과의 만남이었다. 류성룡은 도체찰사라는 주요 관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순신이 조광조와의 가족적 연관성 때문에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묘사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이순신의 가족은 어떠한 정치적 박해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8][9]
2. 1. 어린 시절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한성 건천동(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1가)에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초계 변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83] 덕수 이씨 가문으로, 증조부 이거는 사헌부장령 등을 지냈고, 조부 이백록은 평시서 봉사를 지냈다. 그러나 조부 이백록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어린 시절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보냈고, 외가가 있는 아산시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어릴 때부터 전쟁놀이를 즐기며 리더십을 보였고, 직접 활과 화살촉을 만들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훗날 영의정이 되는 류성룡과 친분을 쌓았으며,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곤경에서 구하고 전라좌수사로 발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 2. 무과 급제
1565년 이순신은 방씨와 혼인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면서 무과(武科)를 준비하였다. 1572년(선조 5년) 훈련원 별과(訓錬院 別科)에 응시했으나 시험 도중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옆에 있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리를 동여매고 시험을 끝까지 치렀으나 결국 낙방하였다.1576년(선조 9년) 32세에 식년시(式年試) 무과에 병과(丙科) 제4인[85]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당시 무과 합격자 분석에 따르면, 그의 나이는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니었다.[86][87]
2. 3. 녹둔도 전투, 첫 번째 백의종군
1587년(선조 20년), 이순신은 조산보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로 근무하며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해 가을 풍년이 들었으나, 9월 1일 여진족이 기습 침입하여 녹둔도 전투가 벌어졌다.[88] 이 과정에서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말 열다섯 필이 약탈당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경록과 함께 남아서 싸웠고, 그 결과 승리하여 조선인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당시 이순신은 여진족의 침략을 예상하고 북병사 이일에게 여러 차례 추가 병력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전투 후, 북병사 이일은 이순신에게 패전 책임을 덮어씌우려 했고, 이순신은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이일은 장계를 올려 이경록과 이순신을 군율로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모함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일이 이순신을 모함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으나, 신립과의 관계 때문에 이일을 처벌하는 대신 이경록과 이순신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하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했다.[89]
이후 이순신은 북병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1588년 2차 녹둔도 정벌에서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잡아 공을 세워 사면받고 복직되었다.
2. 4. 무관 생활
1587년 녹둔도 전투에서 패배하여 백의종군하였다.[89] 이후 복직하여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90]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 선전관(宣傳官)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 1월 비변사가 무신들을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고, 같은 해 12월 류성룡의 천거로 정읍현감이 되었다.1591년 2월 선조는 이순신을 정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첨절제사로, 다시 전라좌수사로 연이어 승진시켰다.[91]
1591년 47세에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된 이순신은 부임 후 전쟁에 대비하여 군비를 강화하고 거북선을 건조하였다.
3. 임진왜란
1592년(선조) 음력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일본군 함대 700척이 부산포를 침략하며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순신은 원균의 파발을 받고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휘하 병력을 소집하여 방비를 갖추었다. 이 과정에서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黄玉玄)을 참수하기도 했다.
이순신은 일본 수군이 강할 것이라 판단하여 조정의 수군 육지 배치 명령에 대해 수륙 양면 방어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장계를 올렸다.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북진하자, 조선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선조는 1593년 9월 21일 한성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1593년 10월 1일 도성으로 돌아왔다.
이순신은 임진왜란(1592–1598)에서 일본군과 싸워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명량 해전과 한산도 해전이 가장 유명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조선을 침략하여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삼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일본군이 부산을 공격하자 이순신은 여수에서 해전을 시작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중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30]
한성과 평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 영토로 진입하고, 한반도 서해안 해역을 통해 침략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모든 활동에 대해 계속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1596년 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조선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1597년 1월, 14만 명의 병력을 실은 일본군이 재침략했다. 명나라는 조선을 돕기 위해 수천 명의 증원군을 파병했고, 조선군은 1597년 겨울 일본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이순신은 사후 최고의 훈공을 받아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603년 선조는 그를 선무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으로 추존하고, 그의 위업을 기리는 “세병관”을 통영에 건립하였다. 1659년 효종 때 한국 남해에 충무공 이순신의 비가 세워졌고, 1688년 전라남도 해남군에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다. 1705년 충청남도 아산시에 사당이 세워지고, 숙종이 현충사로 명명하였다. 사후 약 200년이 지난 1793년에는 조정에 의해 정1품 의정부영의정(국무총리 직)에 추증되었다.
3. 1. 옥포 해전
1592년 5월, 이순신은 부산 서쪽의 일본 수군 지배 지역으로 진입하여 거제도 동쪽 해안에 정박하고 있던 도도 다카토라와 호리우치 우지요시 등의 일본 함대를 습격하였다. 또한 귀환하는 길에도 일본 선박을 두 차례 공격하여 전과를 올리고 신속하게 철수하였다.[46]3. 2. 사천 해전
1592년 5월 29일, 이순신 함대는 노량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과 합류하여 사천에서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 함선 13척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30]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지만, 전투를 계속 지휘했다. 특히, 사천 해전은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된 전투로 기록된다.[30]3. 3. 한산도 대첩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은 부산 서쪽의 일본 수군 지배 지역에 진입했고, 거제도 동쪽 해안에 정박하고 있던 후지도우 타카토라와 호리우치 우지요시 등의 함대를 습격했다. 이후 귀환하는 길에도 일본 선박을 두 차례 공격하여 전과를 올리고 신속하게 철수했다.[46]
이에 맞서 일본군은 와키사카 야스하루(동원 정수 1500명[47][48][49]), 쿠키 요리타카(동원 정수 1500명[47][48][49]), 가토 요시아키(동원 정수 750명[47][48][49])를 소집하여 수군을 편성, 이순신에게 대항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유인책을 써서 조류가 빠른 해협에서 단독 행동을 하던 와키사카 부대(동원 정수 1500명)를 한산도 앞바다에서 격파했다. 이어서 와키사카를 지원하기 위해 안골포에 정박해 있던 가토·쿠키 수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이 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대형 선박 36척, 중형 선박 24척, 소형 선박 13척 등 총 73척이 격침되었다.
3. 4. 부산 해전
부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초기 일본군의 주요 거점이었다. 일본군은 부산을 통해 일본 본토에서 보급 물자를 받아 육로로 내륙에 운반했다. 이순신은 "부산은 적(일본군)의 근본이다. 나아가 이를 무너뜨리면 적(일본군)은 반드시 근거지를 잃을 것이다.[50]"라며 부산 탈환을 목표로 삼았다.
1592년 8월 말, 이순신은 조선 수군을 이끌고 부산포로 출정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미 부산포에 왜성과 철포대를 구축하고 대포를 설치하여 방어를 강화한 상태였다.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강력한 방어에 막혀 후퇴해야 했다.[51][52] 이 해전에서 이순신의 휘하 장수 정운이 전사했다.
일부 한국인들은 부산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400여 척 중 100여 척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어 일본군이 수로 보급 계획을 포기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또한, 이 해전이 양력 10월 5일에 벌어졌기 때문에 '부산 시민의 날'로 지정되었다는 주장 역시 허위이다. 실제 해전은 양력 10월 4일(명력 9월 1일)에 벌어졌다.
3. 5. 웅포 해전
1593년 3월 12일(음력 2월 10일) 이순신 함대는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왜성 깊숙이 유인하여 격파하려는 유인책을 썼다. 조선 수군은 이에 유의하며 화포 등을 이용한 공격을 하였으나, 싸움은 지루한 공방전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며 왜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조선 수군의 부산성 방면으로의 진출을 막음으로써 보급선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전라도의 수군은 정병 상하번 외에 보인까지 총동원, 4만여 명(충무공 장계)을 웅포 해전과 전라도 해안선 방어에 투입하였다.3. 6. 삼도수군통제사
1593년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92] 이순신은 한산도에 진을 설치하고 백성을 모아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든든한 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한편, 원균과의 불화는 심각했다.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했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리면서 둘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난중일기에는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대한 이순신의 불만이 자주 기록되어 있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원균은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되면서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였고, 조정은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임명하였다.
이후 원균은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나, 이원익이 체찰사로서 조사한 결과 이순신의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되었다.[92] 원균과의 대립은 정파적인 입장과 맞물려 더욱 심화되었으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조차도 두 인물에 대한 입장 차이가 심하게 나타난다.
3. 7. 두 번째 백의종군
강화 회담이 결렬되고 전세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 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1597년 4월 11일(음력 2월 25일)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통제사직에서 해임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4월 19일(음력 3월 4일) 투옥되었다. 우의정 정탁의 상소로 5월 16일(음력 4월 1일) 사형을 면하고,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백의종군 중 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으로 가던 길에 가족을 만나기 위해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올라오던 중 5월 26일(음력 4월 11일) 배 위에서 별세하였다. 이순신은 어머니의 부음을 뒤늦게 알고 큰 슬픔에 빠졌다.
3. 7. 1. 칠천량 해전의 패배와 복직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94] 조선 수군은 거의 전멸했고, 배설 장군이 지휘하는 13척의 전함만이 전투가 본격화되기 전에 도망쳐 생존했다. 조선 수군이 궤멸된 후, 원균과 이억기는 생존자들과 함께 섬으로 피신했으나 근처 요새의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조정은 김명원, 이항복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94]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정비했을 때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하기 어렵다 하여 수군 폐지 명령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제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10월 9일(음력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3. 8. 임진왜란 종전과 전사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일본군의 기습으로 크게 패하면서, 조선 조정은 김명원, 이항복의 건의[94]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수군을 정비했을 때는 함선이 12척밖에 남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수군 폐지 명령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12척의 배가 남아있고 자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했다. 이후 10월 9일(음력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겨 전열을 재정비했다.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6년 협상이 결렬되자 다시 조선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고, 같은 해 1월, 일본군은 재침략했다. 명나라의 지원을 받은 조선군은 1597년 겨울, 일본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후임인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크게 패했다. 조선 수군은 거의 전멸했고, 배설 장군이 지휘하는 13척의 전함만이 살아남았다. 선조와 조정은 이 참혹한 패배 소식을 듣고 이순신 장군을 사면하고 복귀시켰다.
이순신 장군은 백성들에게 큰 신뢰를 받았으나,[37] 선조(임금)와 조정은 이순신 장군의 명성을 두려워하여 그를 반역자로 몰았다.[38] 이순신 장군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지만, 유성룡의 변호로 사형을 면했다.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은 막을 내렸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전투 중, 명나라의 진린과 이순신은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진린이 이순신에게 감사를 표하려 할 때,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 나타나 이순신의 죽음을 알렸다.[27] 진린은 큰 충격을 받아 통곡했다고 한다.[28] 이순신의 죽음은 연합 함대 전체에 빠르게 퍼져 모두가 슬픔에 잠겼다.[27]
이후 진린은 만력제에게 이순신의 죽음을 보고했고, 만력제는 진린과 이순신에게 선물과 찬사를 내렸다. 이순신과 진린은 한국의 국민 영웅으로 기념되었으며, 진린의 후손들은 훗날 한국으로 돌아와 광동 진씨를 세웠다.
이순신의 시신은 고향인 아산으로 옮겨져 아버지 이정 옆에 묻혔다. 전국 각지에는 그의 명예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다.[29]
3. 8. 1. 명량 해전
1597년 10월 26일(음력 9월 16일),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하고 13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는데, 폭이 294m 밖에 되지 않아 바다 표층의 유속이 6.5m/s정도로 굉장히 빠르고,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울돌목의 조류가 싸움에 불리함을 깨닫고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인 임하도(林下島)로 진을 옮겨 일본 함대를 그곳으로 유인해 최소 130척 이상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에는 약 30여 척을 격침했다고 기록하였으나 이것은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공격부대의 전과일 뿐 임하도의 좁은 목을 막고 있던 수비 부대의 전과나 피해 사항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난중잡록과 선묘중흥지을 통해서 조선 수군은 중.후반부터 화전(火戰)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통제사가 적의 선봉대중 30여척을 격파하였지만 해남 명량대첩비에는 500척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실제 격파된 왜선은 30여척보다 많을것으로 파악된다.[20]"破賊船五百艘 斬其將馬多時" "적군의 배를 쳐부순것이 오백척이며 그 장수 마다시를 베었다"
명량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이듬해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병사하고, 사망 직전 철군하라는 유언을 남기며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칠천량 해전에서의 승리에 고무된 일본 수군 제독 구루시마 미치후사,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부산항에서 300척이 넘는 함대를 이끌고 출항하여 이순신 장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조선 수군을 제압하면 한성을 넘어 내륙으로의 공세에 필요한 일본군의 보급과 증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것이었다.
1597년 10월, 이순신 장군은 여러 전장 후보지를 신중하게 검토한 후,[20] 빠른 전선을 일본 해군 기지 근처로 보내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명량 해협으로 유인했다. 일본군은 이것이 조선군의 정찰선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추격하면 이순신 장군의 위치를 알아내어 조선 수군의 잔여 세력을 파괴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은, 그들이 교묘하게 설계된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 해협을 전장으로 선택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명량 해협에는 배가 몇 척씩밖에 안전하게 진입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조류, 소용돌이, 급류가 있었다. 남북으로 흐르는 조류는 3시간마다 방향이 바뀌어 일본군의 공세 시간을 제한했다. 해협이 충분히 좁았기 때문에 일본군이 수적으로 열세인 조선 수군을 측면에서 공격하거나 포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변 언덕의 짙은 그림자는 조선 수군에게 은폐를 제공했다. 그날은 또한 짙은 안개가 껴서 조선 수군에게 유리하게 시야가 크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은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형적 제약을 이용하여 일본 수군의 막대한 수적 우세를 무력화했다.
약 333척(전선 133척, 보급선 200척 이상)의 일본 함대가 여러 무리로 명량 해협에 진입했다. 해협을 통과한 일본 함선들은 주변 언덕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13척의 조선 전선과 마주쳤다. 조선 전선은 활과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고, 근접전에 능한 일본군은 효과적으로 싸우고 조선군의 우세한 원거리 사격을 돌파할 수 없었다. 예측 불가능한 조류는 결국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조류가 바뀌면서 일본 함선들은 기동이 불가능해지고 서로 충돌했으며, 동시에 조선 수군의 포격에 완벽한 표적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놀랍게도 자기 함선 수의 25배가 넘는 적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명량 해협에 진입한 일본 함선 333척 중 약 31척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21] 반면 조선군의 손실은 사상자 약 10명, 전선 손실은 없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조선군의 활에 맞아 기함에서 전사했고, 그의 화려한 갑옷을 입은 시체는 물에서 건져 올려졌으며, 그의 잘린 머리는 일본군의 사기를 더욱 저하시키기 위해 전시되었다.
3. 8. 2. 노량 해전과 전사
1598년 음력 11월 18일, 조선 수군 70여 척과 명나라 수군 400척, 총 1만 6천 명의 군사가 노량으로 진군했다. 명나라 부총병 진린(陳璘)과 이순신은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부터 노량해협에 집결한 일본군을 공격했다. 일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왜군 선단 500여 척 중 200여 척을 격파하고 150여 척을 파손시키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95]
전투는 정오까지 계속되었으며, 관음포로 도망치는 왜군을 추격하던 이순신은 안타깝게도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는 죽기 직전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이 전투에서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男)과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도 함께 전사했다.[95]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은 막을 내렸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전투 중, 진린(陳璘)과 이순신은 여러 차례 서로 돕고 구출하며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진린이 이순신에게 감사를 표하려 할 때, 이순신의 조카 이완(李完)이 나타나 이순신의 죽음을 알렸다.[27] 진린은 큰 충격을 받아 세 번이나 땅에 엎어지며 가슴을 치고 통곡했다고 한다.[28] 이순신의 죽음은 연합 함대 전체에 빠르게 퍼져 조선과 명나라의 모든 이들이 슬픔에 잠겨 통곡했다.[27]
이후 진린은 만력제(萬曆帝)에게 이순신의 죽음을 보고했고, 만력제는 진린과 이순신에게 선물과 찬사를 내렸다. 이순신과 진린은 한국의 국민 영웅으로 기념되었으며, 진린의 후손들은 훗날 한국으로 돌아와 광동진씨를 세웠다.
이순신의 시신은 고향인 아산으로 옮겨져 아버지 이정(李貞) 옆에 묻혔다. 전국 각지에는 그의 명예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다.[29]
3. 9. 사후 관직
1598년 전사 직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95] 1604년 선조는 권율, 원균과 함께 이순신을 선무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으로 추봉하고, 좌의정을 가증했다.[96] 1643년 인조는 '충무(忠武)'[96]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793년 정조는 의정부영의정을 가증했다.[97]4. 가계
이순신은 덕수 이씨 가문으로, 고려 시대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의 12대손이다. 증조부 이거는 사헌부장령, 순천부사 등을 역임했고, 조부 이백록은 평시서 봉사를 지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아버지 이정은 관직에 나가지 않아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묘사된 것처럼 심각한 정치적 박해를 받지는 않았다. 어머니 초계 변씨가 남긴 기록을 보면, 이순신의 집안은 상당한 수의 노비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98][99][100]
어린 시절 서울특별시 중구 건천동에서 태어났으며, 아산시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4. 1. 본가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한성 건천동(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8길 19 신도빌딩)에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초계 변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때 정5품 중랑장을 지낸 덕수 이씨 시조 이돈수의 12대손이다. 증조부 이거는 사헌부장령, 순천부사, 병조참의 등을 지냈다. 조부 이백록은 평시서봉사를 지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83] 아버지 이정은 관직에 나가지 않아 집안이 넉넉하지 못했다.[83]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집안이 역적 및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는 줄거리는 허구다. 어머니 초계 변씨가 1588년에 작성한 별급문기에 따르면, 전국에 노비 21명과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98][99][100]
이순신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이거(李琚) | 사헌부장령, 순천부사, 병조참의 |
조부 | 이백록(李百祿) | 선교랑 평시서 봉사, 기묘사화 연루 |
조모 | 초계 변씨(草溪卞氏) | 변성(卞誠)의 딸 |
부 | 이정(李貞) | 증 좌의정 덕연부원군 |
모 | 초계 변씨(草溪卞氏) | 증 정경부인, 변수림(卞守琳)의 딸 |
형 | 이희신(李羲臣) | 증 병조참판 |
형수 | 진주 강씨(晉州姜氏) | 증 정부인, 강세온(姜世溫)의 딸 |
형 | 이요신(李堯臣) | 증 호조참판동의금부사 |
형수 | 청풍김씨(清風金氏) | 증 정부인, 김대신(大頣)의 딸 |
동생 | 이우신(李禹臣) | 참봉 |
제수 | 온양 조씨(溫陽鄭氏) |
4. 2. 처가
이순신의 처가는 온양 방씨이다. 장인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이다. 방진의 할아버지는 평창군수를 지낸 방홍(方弘)이고, 아버지는 영동현감을 지낸 방중규(方中規)이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이준경(1499년~1572년)이 중매를 섰다.[101] 1565년(명종 20) 이순신은 21세의 나이에 방씨에게 청혼하고 결혼하였다. 이순신은 장인의 격려와 경제적 후원으로 무과 시험을 준비하게 되며, 그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배우면서 병학을 익혀 11년만인 1576년 2월에 치러진 무과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했다.방씨 부인은 슬기롭기로 유명하였고, 친정 집에 들어온 도둑들을 지혜를 이용해 물리치기도 했다. 이순신의 무술 연습을 위해 자신의 패물로 말을 사게 할 만큼 내조도 잘했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1567년 출생), 이예(1571년 출생), 이면(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1598년 (선조 31)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에게 우의정이 증직된 후 그 처인 방씨를 정경부인으로 봉하면서 내린 이순신처 방씨 고신교지(李舜臣妻方氏告身教旨)는 보물 제1564-8호이다. 정경부인은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정·종 1품 문무관의 처에게 내리는 명호(名號)로 외명부 부인으로서는 최상급의 품계이다.
이순신은 본부인 상주 방씨(尙州 方氏) 외에 첩으로 해주 오씨(海州 吳氏)를 두었다.
4. 3. 자녀
이순신은 슬하에 3남 1녀와 서자 2남 2녀를 두었다. 정실 부인 상주 방씨에게서 3남 1녀를 두었고, 첩에게서 서자 2남 2녀를 두었다.구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장남 | 이회(李薈) | 1567~1625 | 선무1등공훈, 훈련원 첨정, 증 승정원 좌승지, 며느리는 증 숙부인 광산 김씨 |
차남 | 이예(李䓲) | 1571~1631 | 형조정랑, 증 승정원 좌승지, 며느리는 증 숙부인 신창 맹씨 |
삼남 | 이면(李葂) | 1577~1597 | 증 이조 참의, 정유재란시 전사 |
딸 | 홍비(洪棐) | 홍가신의 아들에게 출가 | |
서자 | 이훈(李薰) | 1574~1624 | 무과, 증 병조참의, 이괄의 난 진압 중 전사, 서며느리는 숙부인 순천 김씨 김춘여의 딸 |
서자 | 이신(李藎) | 미상~1627 | 무과, 증 병조참의, 정묘호란시 전사 |
서녀 | 임진(任振) | ||
서녀 | 윤효전(尹孝全) |
5. 인물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의 어린 시절과 사후 그의 능력 및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107] 선조는 《졸서후사제문(卒逝後賜祭文)》에서 이순신을 추모하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효종, 정조 등 조선의 왕들과 김육, 오윤겸, 홍석주 등도 이순신의 충절과 능력을 기렸다.
근현대에 이르러 천관우는 이순신을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자 "성자",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5. 1. 성격 및 리더십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에 대해,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곤 했으며, 그의 성격을 거슬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눈을 쏘려고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이순신은 완벽주의자로 뭐든지 철저함을 추구했다. 한산도 대첩 하루 전 군무이탈을 감행한 부하 수졸 황옥현을 붙잡자마자 바로 참수하여 효수해 군기를 보존했으며,[104] 부하들에게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면 무조건 이긴다는 것과 도망치려 하면 죽는다는 점(必死則生必生則死)을 강조하여 부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부하들이 잘하면 포상에 아낌이 없었다. 군영 순시 중에 자신이 담당하던 업무에 소홀하였던 일선 지휘관은 곤장을 쳤다는 기록이 몇 번 있다. 또한 자신의 군공보다는 아군의 승리에 더 관심이 깊었으며, 이 때문에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권율에게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의 일부를 제공했으며 권율은 이순신에게 제공받은 이 무기들로 행주대첩을 이룩하게 되었다.
녹둔도 사건으로 알 수 있듯 이순신은 무예가 매우 뛰어났다. 고작 수십 명의 보병으로 1천 기에 달하는 여진족 기병을 상대로 이경록과 단둘이 지휘해서 이겼는데, 휘하 병력이 100명 이하인 상황이라면 개인 무예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승리를 거둔 이순신은 무예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2. 외모
이순신의 용모에 대해서는 이순신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가 없고 그의 얼굴을 묘사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제독의 복식이나 갑옷, 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의 이순신 초상화는 영의정 예우를 갖춰 그려졌고, 실제로 이순신이 살아생전 그 복장을 입은 적은 없다.5. 3. 무예
이순신은 무예가 매우 뛰어났다. 녹둔도 사건에서 알 수 있듯, 고작 수십 명의 보병으로 1천 기에 달하는 여진족 기병을 상대로 이경록과 단둘이 지휘해서 이겼는데, 휘하 병력이 100명 이하인 상황이라면 개인 무예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무예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89]6. 평가
이순신은 사후부터 대한민국 수립 이후까지 신분과 시대를 초월하여 존경받는 인물이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꼽힌다.[105][106]
이순신은 난중일기, 임진장초 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충무공이순신전서는 정조의 명으로 유득공이 주도하여 1795년에 간행한 유고 전집이다.[119]
6. 1. 국내 평가
사후부터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 걸쳐 이순신은 신분과 시대를 막론하고 존경과 숭모의 대상이 되었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꼽힌다.[105][106]- 선조: 《졸서후사제문(卒逝後賜祭文)》에서 "인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라고 추켜세웠다.
- 류성룡: 《징비록》에서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평하였다.
- 효종: 경연 자리에서 "이순신의 재능은 악비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고 하였다.[107]
- 정조: 신하들에게 "이순신은 무인(武人)이지만 또한 '선정(先正)'[108]으로 일컬었고 보면 선정을 꼭 유현에게만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109]
- 김육: 효종에게 "우리나라에서 충신으로 드러나 칭송할 만한 이는 고 통제사 이순신만한 이가 없는데도, 묘소에 아직까지 조그만 표석(表石)조차도 없으니, 이는 자손들이 미약한 소치입니다."고 아뢰었다.[110]
- 오윤겸: 제문에서 이순신의 죽음을 두고 "황천에서 다시 일으켜올 수 없음을 생각하고 백 명을 대신 바치고도 몰려올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고 평하였다.
- 홍석주: 이순신을 중국의 제갈량에 빗대어 칭송하고, 이순신의 공적 덕분에 사직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 천관우: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명나라의 진린은 이순신과 친구이자 동맹으로 여러 차례 서로 돕고 구출했다. 진린이 이순신에게 감사를 표하려 했을 때, 이완이 나타나 그의 삼촌이 죽었다고 알렸다.[27] 진린은 너무 충격을 받아 세 번이나 땅에 엎어지며 가슴을 치고 통곡했다고 한다.[28] 이순신의 죽음 소식은 연합 함대 전체에 빠르게 퍼져 조선과 명나라 선원과 군인들이 모두 슬픔에 잠겨 통곡했다.[27] 진린은 나중에 만력제에게 이순신의 죽음 소식을 보고했고, 만력제는 진린과 이순신에게 선물과 찬사를 내렸다. 진린의 후손들은 한국으로 돌아와 광동 진씨를 세웠다.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는 이순신을 넬슨 제독과 동등한 수준으로 평가하며,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장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언급했다.[32] 일본 제국 해군의 동고 제독은 이순신을 자신의 상관으로 여겼으며, 사토 데쓰타로 제독은 이순신을 "진정으로 위대한 사령관이었고 300년 전 해군 전술의 대가"라고 평가했다.
조선 왕실은 생전 이순신의 공을 종종 무시했지만, 사후에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칭호를 비롯하여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에 책봉되었고, 영의정과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이라는 두 개의 추증 관직을 받았다. 그의 직책이었던 삼도수군통제사는 1896년까지 조선 수군의 지휘관 직책으로 사용되었다. 이순신의 시호인 충무공은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로 높은 군사 훈장인 충무무공훈장으로 사용된다. 그는 또한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이순신은 수많은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며 장병들의 목숨을 보존하고 그들의 가족을 존중했다. 승리뿐 아니라 전쟁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보여준 친절과 감사함으로 조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백성들은 이순신을 단순한 장군 이상으로 존경하며 그에게 큰 신뢰를 보냈다.[37]
반면, 선조는 조선을 지키지 못했고, 의주로 도피하여 명성이 땅에 떨어졌다. 조선 정부는 당파 싸움에 시달렸고, 신하들은 이순신을 시기하여 선조를 조종해 그를 반역자로 몰았다. 선조와 그의 신하들이 이순신의 승리와 백성들 사이에서의 명성을 반란의 근거로 여겨 두려워했을 가능성이 크다.[38] 이순신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지만, 류성룡의 변호 덕분에 두 차례나 사형을 면했다. 이순신과 그의 업적에 대한 대부분의 상은 사후에 추서되었다.[39]
오늘날 북한에서도 이순신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애국자이자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이순신이 양반 가문 출신이었던 점 때문에 그의 행위는 조선과 조선 시대의 신분제도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남한에 비해 그의 업적은 "봉건적인 왕좌"와 양반 지주 계급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으로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된다.[41]
6. 2. 국외 평가
명나라 장수 진린은 1598년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평가했다.[111][112][113][114][115][116]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 G. A. 발라드(George Alexander Ballard)는 자신의 저서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에서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라고 언급했다.
1905년 쓰시마 해전 승전 후 축하 자리에서 도고 헤이하치로는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조선의 실업가 이영개에게 "당신 나라의 이순신 제독은 나의 스승입니다. 실로 존경할 만한 인물입니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일본어 위키백과 이순신 문서에 따르면, 이 발언은 일본에 직접적인 사료가 남아있지 않으며, 이영개가 도고 헤이하치로에게 들었다고 퍼뜨린 이야기라고 기술되어 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회고록에서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며칠 몇 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라며 이순신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했다.
일본 제국 해군의 사토 데쓰타로 제독은 1908년에 출판된 자신의 책에서 "이순신은 진정으로 위대한 사령관이었고 300년 전 해군 전술의 대가였다."라고 평가했다.
7. 유산
대한민국에는 이순신과 관련된 문화유산과 사적이 14개가 있다.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옛집은 이순신 제독이 혼인 후 살고 그 후 종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덕수 이씨 충무공파의 종가집이다.
- 이순신 유물 일괄 (보물 제326호)
- 아산 이충무공묘 (사적 제112호)
-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사적 제113호)
-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사적 제114호)
-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 (사적 제232호)
- 아산 이충무공 유허 (사적 제155호, 현충사 포함)
- 남해 충렬사 (사적 제233호)
- 통영 충렬사 (사적 제236호)
- 여수 충민사 (사적 제381호)
- 여수 석천사[117][118]
- 정읍 충렬사
- 순천 충무사
- 여수 진남관 (국보 제304호)
7. 1. 유적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직접 작성한 전쟁 일기이다.[119]7. 2. 저작물
8. 대중 문화
대중 문화에서 이순신은 다양한 형태로 묘사되고 기념되고 있다.
문학
- 1923년 박은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에서 편저하여 발행한 《이순신전》이 있다.
- 1992년 최석남이 쓴 이순신의 전기 《구국의 명장 이순신》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이순신의 자살설을 주장하고 있다.
- 1998년 소설가 김탁환이 이순신의 생애를 다룬 소설 《불멸》을 발표하였다. 이 소설은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묘사, 역사 왜곡 등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 2001년 소설가 김훈은 이순신의 생애를 다룬 소설 《칼의 노래》를 발표하였으며, 동인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미국의 만화작가 온리 콤판은 텔레비전에서 이순신을 접한 후 감명받아 《이순신 : 폴른 어벤져(Yi Soon Shin : Fallen Avenger)》라는 만화를 만들었다. 이 만화는 총 12권의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
영상
- 1985년 MBC에서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 중 하나인 《임진왜란》(5회)이 방영되었다.[19]
- 2004년 9월 4일부터 2005년 8월 28일까지 KBS 1TV에서 이순신의 생애와 인간적인 면모를 다룬 《불멸의 이순신》이 방영되었다.[19] 이 드라마는 가족사, 인물 묘사, 역사 고증 등 여러 면에서 논란이 있었다.
- 2005년에는 남북한 군인들이 시간 여행을 통해 이순신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천군》이 개봉되었다.[19]
- 2008년 4월 26일 KBS 1TV 《한국사 전》에서 '난중일기 인간 이순신의 기록 (3부작)'이 방영되었다.[19]
- 2009년 4월 18일 KBS 1TV 《역사추적》에서 '최강 수군의 비밀 - 이순신의 사람들'이 방영되었다.[19]
- 2009년 6월 14일 SBS 《SBS 스페셜》에서 '1592 침묵의 거북선'이 방영되었다.[19]
- 2010년 7월 10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잃어버린 쌍룡검을 찾아서 - (아델리아 홀 레코드의 진실)'이 방영되었다.[19]
- 2013년 MBC 퓨전 사극 《구가의 서》에서 유동근이 이순신 역을 맡았다.[19]
- 2014년 명량 해전을 다룬 김한민 감독의 영화 《명량》이 개봉되어 한국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경신했다.[19]
- 2022년 김한민 감독의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은 한산도 대첩을 소재로 하였다.[19]
- 2023년 김한민 감독의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는 노량해전과 이순신의 죽음을 다루었다.[19]
게임
- 2000년 발매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더 컨커러스에는 이순신의 지시로 건조된 거북선이 한국의 고유 유닛으로 등장한다.[42] 플레이어가 이순신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게임 시나리오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스 II'' 확장팩 ''정복자''에 등장한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조선의 유력 인물은 이순신이다.
- 2010년 10월에 발매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문명 Ⅴ에서는 2011년 8월에 대한민국이 DLC로 추가되었는데, 여기서 대한민국의 고유 유닛으로 이순신의 지시로 건조된 거북선이 르네상스 시대 초기에 등장한다.
- 2012년 6월에 발매된 문명 Ⅴ의 확장판 《문명 Ⅴ신들과 왕들》에서는 '위대한 제독' 중 한 명으로 이순신이 등장한다.
- 남코에서 개발한 대전 검술 격투게임 소울칼리버에서 이순신은 등장인물인 성미나의 아버지의 친구로 설정되어 있다.
- 이순신은 비디오 게임 ''모바일 레전드: 뱅뱅''의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이다.[42]
- 이순신은 모바일/PC 게임 라이즈 오브 킹덤즈의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이다.
- 플레이어가 이순신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게임 캠페인은 ''엠파이어스: 현대 세계의 여명''에 등장한다.
기타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에서 여러 배우들이 이순신 역을 맡았다.
공연 연도 | 배우 이름 |
---|---|
2008년 ~ 2013년 | 민영기 |
2009년 | 박호산, 임기홍 |
배성우, 최성원, 이필승 | |
2010년 | 박호산, 이건영, 김대종 |
2012년 | 손광업, 조휘 |
2013년 | 박호산, 임기홍, 원종환 |
2015년 | 임기홍, 원종환 |
2016년 | 정동진, 김민건 |
8. 1. 명명
- 1970년부터 대한민국의 100원 동전에는 이순신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40]
-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로, 이순신의 생일을 기리는 날이다.
- 대한민국 해군의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충무공 이순신함은 그 급의 제1번함이다.[120][121][122][123]
-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에는 1968년 세워진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있고, 부산 부산타워에도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

- 서울 중구에는 충무로라는 번화가가 있으며, 그곳을 지나는 지하철역은 충무로역이다.
- 전라남도 여수시 충무로도 이순신을 기념하여 지은 도로명이다.
- 서울 중구 흥인동에는 충무아트홀이 있다.
- 경상남도 통영시는 한때 충무시였다.
- 충청남도 아산시에는 이순신종합운동장이 있다.
- 전라남도 여수시 묘도와 광양시 금호동을 연결하는 이순신대교가 있다.
8. 2. 문학
- 1923년 박은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에서 편저하여 발행한 《이순신전》이 있다.
- 1992년 최석남이 쓴 이순신의 전기 《구국의 명장 이순신》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이순신의 자살설을 주장하고 있다.
- 1998년 소설가 김탁환이 이순신의 생애를 다룬 소설 《불멸》을 발표하였다. 이 소설은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묘사, 역사 왜곡 등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 2001년 소설가 김훈은 이순신의 생애를 다룬 소설 《칼의 노래》를 발표하였으며, 동인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미국의 만화작가 온리 콤판은 텔레비전에서 이순신을 접한 후 감명받아 《이순신 : 폴른 어벤져(Yi Soon Shin : Fallen Avenger)》라는 만화를 만들었다. 이 만화는 총 12권의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
8. 3. 영상
- 1985년 MBC에서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 중 하나인 《임진왜란》(5회)이 방영되었다.[19]
- 2004년 9월 4일부터 2005년 8월 28일까지 KBS 1TV에서 이순신의 생애와 인간적인 면모를 다룬 《불멸의 이순신》이 방영되었다.[19] 이 드라마는 가족사, 인물 묘사, 역사 고증 등 여러 면에서 논란이 있었다.
- 2005년에는 남북한 군인들이 시간 여행을 통해 이순신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천군》이 개봉되었다.[19]
- 2008년 4월 26일 KBS 1TV 《한국사 전》에서 '난중일기 인간 이순신의 기록 (3부작)'이 방영되었다.[19]
- 2009년 4월 18일 KBS 1TV 《역사추적》에서 '최강 수군의 비밀 - 이순신의 사람들'이 방영되었다.[19]
- 2009년 6월 14일 SBS 《SBS 스페셜》에서 '1592 침묵의 거북선'이 방영되었다.[19]
- 2010년 7월 10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잃어버린 쌍룡검을 찾아서 - (아델리아 홀 레코드의 진실)'이 방영되었다.[19]
- 2013년 MBC 퓨전 사극 《구가의 서》에서 유동근이 이순신 역을 맡았다.[19]
- 2014년 명량 해전을 다룬 김한민 감독의 영화 《명량》이 개봉되어 한국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경신했다.[19]
- 2022년 김한민 감독의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은 한산도 대첩을 소재로 하였다.[19]
- 2023년 김한민 감독의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는 노량해전과 이순신의 죽음을 다루었다.[19]
8. 4. 게임
- 2000년 발매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더 컨커러스에는 이순신의 지시로 건조된 거북선이 한국의 고유 유닛으로 등장한다.[42] 플레이어가 이순신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게임 시나리오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스 II'' 확장팩 ''정복자''에 등장한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조선의 유력 인물은 이순신이다.
- 2010년 10월에 발매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문명 Ⅴ에서는 2011년 8월에 대한민국이 DLC로 추가되었는데, 여기서 대한민국의 고유 유닛으로 이순신의 지시로 건조된 거북선이 르네상스 시대 초기에 등장한다.
- 2012년 6월에 발매된 문명 Ⅴ의 확장판 《문명 Ⅴ신들과 왕들》에서는 '위대한 제독' 중 한 명으로 이순신이 등장한다.
- 남코에서 개발한 대전 검술 격투게임 소울칼리버에서 이순신은 등장인물인 성미나의 아버지의 친구로 설정되어 있다.
- 이순신은 비디오 게임 ''모바일 레전드: 뱅뱅''의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이다.[42]
- 이순신은 모바일/PC 게임 라이즈 오브 킹덤즈의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이다.
- 플레이어가 이순신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게임 캠페인은 ''엠파이어스: 현대 세계의 여명''에 등장한다.
8. 5. 기타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에서 여러 배우들이 이순신 역을 맡았다.공연 연도 | 배우 이름 |
---|---|
2008년 ~ 2013년 | 민영기 |
2009년 | 박호산, 임기홍 |
배성우, 최성원, 이필승 | |
2010년 | 박호산, 이건영, 김대종 |
2012년 | 손광업, 조휘 |
2013년 | 박호산, 임기홍, 원종환 |
2015년 | 임기홍, 원종환 |
2016년 | 정동진, 김민건 |
9. 이순신을 연기한 배우
이순신을 연기한 배우는 다음과 같다.
연도 | 작품명 | 배역 | 비고 |
---|---|---|---|
1962년 | 《성웅 이순신》 | 김승길 감독의 흑백 영화 | |
1971년 | 《성웅 이순신》 | 김진규 | 컬러 영화 |
1978년 | 《난중일기》 | 김진규 | |
2005년 | 《천군》 | 박중훈 | 젊은 이순신 묘사 |
2014년 | 《명량》 | 최민식 | 김한민 감독의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 |
2022년 | 《한산: 용의 출현》 | 박해일 | 김한민 감독의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 |
2023년 | 《노량: 죽음의 바다》 | 김윤석 | 김한민 감독의 3부작 중 세 번째 작품 |
9. 1. 드라마
- 2004년~2005년 KBS 1TV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김명민이 이순신 역을 맡았다.[8][9]
- 2013년 MBC 드라마 《구가의 서》에서 유동근이 이순신 역을 맡았다.[8][9]
9. 2. 영화
이순신 장군의 삶은 여러 영화에서 다뤄졌다. 1962년에는 김승길 감독의 흑백 영화 《성웅 이순신》이 제작되었고, 1971년에는 김진규 주연의 컬러 영화 《성웅 이순신》이 제작되었다. 1978년에는 김진규가 다시 주연을 맡은 《난중일기》가 개봉했다.2005년에는 박중훈 주연의 영화 《천군》이 개봉했다. 이 영화는 젊은 이순신이 여진족과 싸우는 모습을 묘사했는데, 임진왜란 수십 년 전의 이순신을 엄격한 영웅이 아닌 교활하고 약간 기이한 젊은이로 묘사하여 화제가 되었다. 또한 700만달러~800만달러의 상당한 제작비가 투입되어 흥행에도 성공했으며, 한국 통일을 호소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1]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전투를 다룬 영화 3부작을 제작했다. 2014년에는 명량 해전을 다룬 《명량》이 개봉하여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최다 관객수를 기록했다. 이 영화에서 이순신 역은 최민식이 맡았다. 2022년에는 한산 해전을 다룬 《한산: 용의 출현》이 개봉했고, 박해일이 이순신 역을 맡았다. 2023년에는 노량 해전을 다룬 《노량: 죽음의 바다》가 개봉했으며, 김윤석이 이순신 역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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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뉴스
"23전23승 해전 영웅 충무공 만나러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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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2007-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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