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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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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교각은 신라 왕자로 추정되며, 당나라로 건너가 불교에 귀의한 인물이다. 721년 당나라로 건너가 구화산에서 75년간 수행하다 99세에 입적하였다. 그의 시신은 3년이 지나도 썩지 않아 등신불로 만들어졌으며, 중국과 한국의 기록에 따라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최근 공개된 신라 명문 유물에는 김교각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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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 이름김교각
한자 이름金喬覺
로마자 표기Gim Gyo-gak
문화어 표기김교각
별명지장보살
직업승려
종교불교
생애
출생697년
사망794년 3월 26일
국적신라
법호지장

2. 생애

김교각은 신라 왕족 출신으로, 당나라로 건너가 불교에 귀의한 승려이다. 중국과 한국, 일본의 여러 기록과 전승에 등장하며, 특히 지장보살 신앙과 관련하여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김교각에 대한 중국 측과 한국 측의 사료는 모두 그의 실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5] 김교각 설화는 신라에서 구화산으로 건너간 석지장을 비롯한 신라 출신 승려들의 행적과 지장보살 신앙이 결합하여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5] 현재 구화산의 화성사에는 김교각의 육신불(즉신불)이 모셔져 있다고 전해진다.[5]

2. 1. 출생과 신라에서의 삶

중국 기록에는 김교각이 신라 왕자라는 기록만 있을 뿐, 어느 왕의 자손인지는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한국에서 발견된 비경관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김교각은 697년 신라 제32대 효소왕 4년에 서라벌 궁궐에서 태어난 차남 수충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는 후에 제33대 성덕왕이 된다.

701년 수충이 4세 때 효소왕을 대신하여 섭정하던 신목왕후가 암살되고, 몇 년 후 효소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김흥광(성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수충은 화랑이 되었을 때 친모 성정왕후와 성덕왕 사이에 후궁 문제로 갈등이 빚어져 세속 생활에 환멸을 느꼈다고 전해진다.[5]

2. 2. 당나라 유학과 출가

김교각은 721년, 24세의 나이로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건너가 출가하여 불교에 귀의하였다.[5] 일본 측 자료에서는 김교각이 당나라 유학 시절 불교를 접하고 신라로 귀국 후 왕자로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출가했다고 설명한다.[5]

2. 3. 구화산에서의 수행과 입적

구화산에 자리를 잡은 김교각은 그곳에서 75년 동안 수행에 정진하여 99세에 열반에 들었다. 794년, 제자들을 모아놓고 고별 인사를 한 뒤 입적하였는데, 자신의 시신을 석함에 넣고 3년 후에도 썩지 않으면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5] 열반에 든 후에는 산이 울면서 허물어지고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났다고 전해진다.

김교각의 육신은 사망 후 3년이 지나도 살아있는 듯했기 때문에, 그대로 탑에 안치되어 육신불(즉신불)이 되었다.[5] 이는 『송고승전』의 석지장전에도 유사한 설화로 나타난다.[5]

2. 4. 최근 공개된 신라 명문 유물

최근 한국에서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신라 명문 유물이 공개되었다.[1] 해당 유물에는 '서(西)신라국'이라는 명칭과 함께 김교각의 생애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1]

지장보살은 대철국 산의 서쪽 제일 먼 곳에 있고 이대도장이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시고 억겁의 시간을 타고 천상의 부처가 된 후 1,500년, 인간 세상에 태어났다. 우리 가문의 서 신라국 왕자 성은 김이요, 이름은 교각. 당나라 정관 2년(628년) 7월 30일 생이다. 영휘 4년(653년) 머리를 깎고 배를 타고 왔다. 구화산 꼭대기에서 75년을 단좌하고 개원 16년(728년) 7월 20일 밤에 이르러 나이 99세에 도를 이루고 입정하였으며, 지덕 2년(757년) 7월 30일 현귀한 신령이 되어 나타나 탑을 세우고 그 땅에 도를 크게 일으켰다. 민공이 승복 한 벌만한 땅을 은혜로 베풀었고, 사람의 힘이 아닌 것이 없어 자연히 신통해지고 조용히 솟아 나와 ㅁ이 없었다. 천신이 장차 민공이 세운 승복 한 벌만 한 탑의 땅에 홀로 일어나 보탑을 만들었는데, 9마리 용이 구슬을 가지고 놀던 땅이라 하여 이름이 구룡이다. 지장 천신이 만든 탑이 지금까지 매번 광명을 내고 있다.


3. 김교각 설화의 진위 논란

중국 측, 조선 측의 사료 모두에서 "김교각"이라는 인물의 실존성은 희박하다.[5] 김교각 설화는 신라에서 구화산으로 건너간 석지장을 비롯한 신라 출신 승려들의 사적과 지장보살 신앙이 합성되어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5]

전승에 따르면, 김교각은 신라의 왕자로 태어나 당나라로 유학을 갔을 때 불교에 접하게 되었다. 신라로 귀국한 후 왕자로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그 후, 흰 개를 데리고 당나라로 다시 건너가 방랑과 수행의 나날을 보냈다. 구화산의 화성사에서 12년 동안 수행했다고 하며, 정원 10년(794년) 99세로 입적했다. 그는 생전에 지장보살이 되기를 강하게 희망했다고 한다.

김교각의 육신은 사망 후 3년이 지나도 살아있는 듯했기 때문에, 그대로 탑에 안치되어 육신불(즉신불)로서 본존이 되었다.[5] 이와 유사한 설화는 『송고승전』의 석지장전에 나타나며, 김교각 전설의 근원이 된 사건은 있었던 듯하다.[5] 구화산의 화성사에는 현재도 김교각의 육신불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5]

4. 가계

참조

[1] 웹사이트 지장 http://encykorea.aks[...]
[2] 웹사이트 김교각 https://terms.naver.[...]
[3] 웹사이트 Culture China http://scenery.cultu[...] 2011-10-06
[4] 웹사이트 Show China http://en.showchina.[...]
[5] 서적 安徽九華山における地蔵信仰 https://hdl.handle.n[...] 関西大学アジア文化交流研究センター 2006-03
[6] 웹인용 지장 (地藏)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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