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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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사기는 고려 시대에 편찬된 한국의 역사서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김부식이 편찬했으며, 1145년에 완성되었다. 기전체 형식으로, 본기, 연표, 지, 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한국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지만, 신라 중심의 서술, 사대주의적 관점, 특정 사상에 대한 기술 부족 등의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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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부식 - 정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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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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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원제 | 삼국사기 (三國史記) |
저자 | 김부식 |
국가 | 고려 |
언어 | 한문 |
주제 | 한국사 |
장르 | 고대 역사 |
출판일 | 1145년 |
문화재 정보 | |
국가지정문화재 유형 | 대한민국의 국보 |
국가지정문화재 번호 | 322-1 |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일 | 2018년 2월 22일 |
국가지정문화재 소장처 | 옥산서원 |
국가지정문화재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 옥산서원 |
국가지정문화재 수량 | 9책 |
국가지정문화재 문화재청 번호 | 12,05250000,37 |
국가지정문화재 유형 | 대한민국의 국보 |
국가지정문화재 번호 | 322-2 |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일 | 2018년 2월 22일 |
국가지정문화재 소장처 | 조동기, 조성은, 조영기, 조왕기, 성암고서박물관 |
국가지정문화재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성암고서박물관 |
국가지정문화재 수량 | 50권 9책 |
국가지정문화재 문화재청 번호 | 12,07230000,11 |
보물 지정 문화재 유형 | 대한민국의 보물 |
보물 지정 문화재 번호 | 722 |
보물 지정 문화재 지정일 | 1981년 7월 15일 |
보물 지정 문화재 소장처 | 조동기, 조성은, 조영기, 조왕기, 성암고서박물관 |
보물 지정 문화재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성암고서박물관 |
보물 지정 문화재 수량 | 7권 1책 |
보물 지정 문화재 문화재청 번호 | 12,07220000,11 |
시도지정문화재 유형 | 대구광역시의 유형문화재 |
시도지정문화재 번호 | 79 |
시도지정문화재 지정일 | 2017년 1월 31일 |
시도지정문화재 소유 | 계명대학교 |
시도지정문화재 주소 |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 1095 (신당동, 계명대학교) |
시도지정문화재 문화재청 번호 | 21,00790000,22 |
표기 | |
한글 | 삼국사기 |
한자 | 三國史記 |
로마자 표기 | Samguk-sagi |
로마자 표기 | Samkuk-saki |
영어 |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
2. 편찬 과정
監修國史중국어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난 후에 임명된 벼슬에 감수국사(監脩國史)가 있어 이 무렵부터 편찬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설이 있고, 김부식이 정계에서 은퇴한 1142년에 시작했다고 보는 설이 있다.[28] 『삼국사기』가 완성된 시기는 1145년(인종 23년)이다. 1174년에 송나라에 진상되기도 했다.
『삼국사기』 편찬에는 감수국사 김부식을 필두로 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서안정, 박동계, 이황중, 최우보, 김영온등 8명의 참고(參考)와 김충효, 정습명 2명의 관구(管句)등 총 11명의 편수관(編修官)이 참여하였다.[28] 김부식이 편찬의 주역으로 머리말, 논찬, 사료의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의 실질적인 편찬 작업은 10명의 편수관이 수행했다. 10명의 편수관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간(臺諫) 출신들이 많고, 김부식도 대간 계통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는 『삼국사기』가 비판적 성격을 가질 수 있었던 토대로 여겨진다.[28]
지리지의 지명 표기(예: "옛 ○○는 지금의 △△이다"와 같은 기술)에 대한 상세한 검토를 통해, 최소 1143년에는 편찬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사』 인종 세가 23년 조와 같은 책의 김부식전 기사를 통해 1145년 12월에 상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1. 편찬 배경
12세기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된 배경에는 이념적 요인과 정치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서문에서 당시 학자들과 고위 관료들이 중국의 역사에는 밝지만 정작 자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무지한 현실을 개탄하였다.[4]
2. 2. 편찬 시기 및 주체
고려 왕조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귀족 사회의 동요를 수습하고 난 뒤, 전 왕조의 역사를 공식으로 정리한 정사(正史)로서 기전체의 형식으로 편찬되었다. 글의 내용은 고기(古記)·유적(遺蹟) 혹은 중국의 여러 사서에서 뽑아 편찬하고 간행하였다.[28]《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난 후에 임명된 벼슬에 감수국사(監脩國史)가 있어 이 무렵부터 편찬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설이 있고, 김부식이 정계에서 은퇴한 1142년에 시작했다고 보는 설이 있다.[28] 《삼국사기》가 완성된 시기는 1145년(인종 23년)이다. 1174년에 송나라에 진상되기도 했다.
《삼국사기》 편찬에는 감수국사 김부식을 필두로 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서안정, 박동계, 이황중, 최우보, 김영온등 8명의 참고(參考)와 김충효, 정습명 2명의 관구(管句)등 총 11명의 편수관(編修官)이 참여하였다.[28] 김부식이 편찬의 주역으로 머리말, 논찬, 사료의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의 실질적인 편찬 작업은 10명의 편수관이 수행했다. 10명의 편수관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간(臺諫) 출신들이 많고, 김부식도 대간 계통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는 《삼국사기》가 비판적 성격을 가질 수 있었던 토대로 여겨진다.[28]
지리지의 지명 표기(예: "옛 ○○는 지금의 △△이다"와 같은 기술)에 대한 상세한 검토를 통해, 최소 1143년에는 편찬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사』 인종 세가 23년 조와 같은 책의 김부식전 기사를 통해 1145년 12월에 상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구성 및 내용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작성되었으며, 〈본기(本紀)〉, 〈연표(年表)〉, 〈지(志)〉,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 〈본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세 나라의 역사를 각각의 본기로 나누어 편년체로 서술하였으며, 총 28권이다. 신라본기 12권(1~12권), 고구려본기 10권(13~22권), 백제본기 6권(23~28권)으로 구성되었다. 본기에는 먼저 신라를 기록하고, 건국 신화에서의 건국 연차 순서에 따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배열하였다.
- 〈연표〉는 중국 역대 왕조의 연호를 기준으로 삼국의 왕계를 표로 작성하였으며, 총 3권(29~31권)으로 구성되었다. 간지, 중국의 왕조, 신라, 고구려, 백제 네 가지에 대한 목록 형식을 취하고 있다.
- 〈지(志)〉는 〈잡지〉로서 삼국의 제도, 문화, 지리 등을 분야별로 서술한 것으로 총 9권(32~40권)이다. 1권은 제사(祭祀), 악(樂), 2권은 색복(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3~6권은 지리(地理), 7~9권은 직관(職官)으로 구성되었다. 대부분 신라를 중심으로 통일기의 상태에 관해서 서술하고 있다.
- 〈열전〉은 인물의 전기로 총 69명이 수록되어 있다. 1~3권이 김유신 열전으로 가장 분량이 많으며, 나머지 7권에는 삼국의 충효 · 화랑 · 문인(文人) · 반역인(叛逆人)과 관련 인물 등의 전기를 수록하였다.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김유신은 중국 황제의 아들 소호의 후손이다.[12] 열전의 처음에는 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의 공로자인 김유신에게 3권을 할애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을 배치하고, 마지막 권에는 후고구려의 궁예, 후백제의 견훤 등으로, 시대・국가에 대한 특별한 배치의 정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러 사람을 다루는 열전에 대한 요약적인 명칭(『사기』의 유림열전, 혹리열전 등)은 사용되지 않았다.
《삼국사기》 전 50권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권수 | 제목 | 분류 |
---|---|---|
권1-12 | 신라본기 | 혁거세 거서간부터 경순왕까지 |
권13-22 | 고구려본기 | 동명성왕부터 보장왕까지 |
권23-28 | 백제본기 | 온조왕부터 의자왕까지 |
권29-31 | 연표 | 기원전 57년부터 936년까지 |
권32-40 | 잡지 | 제사, 악, 색복, 거기, 기용, 옥사, 지리, 직관 |
권41-50 | 열전 | 김유신, 을지문덕, 궁예, 견훤 등 |
《삼국사기》는 한반도 지명 연구의 근본 사료이기도 하다.
3. 1. 구성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작성되었으며, 〈본기(本紀)〉, 〈연표(年表)〉, 〈지(志)〉,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세 나라의 역사를 각각의 본기로 나누어 편년체로 서술하였으며, 총 28권이다. 신라본기 12권(1~12권), 고구려본기 10권(13~22권), 백제본기 6권(23~28권)으로 구성되었다. 본기에는 먼저 신라를 기록하고, 건국 신화에서의 건국 연차 순서에 따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배열하였다.
- 〈연표〉는 중국 역대 왕조의 연호를 기준으로 삼국의 왕계를 표로 작성하였으며, 총 3권(29~31권)으로 구성되었다. 간지, 중국의 왕조, 신라, 고구려, 백제 네 가지에 대한 목록 형식을 취하고 있다.
- 〈지(志)〉는 〈잡지〉로서 삼국의 제도, 문화, 지리 등을 분야별로 서술한 것으로 총 9권(32~40권)이다. 1권은 제사(祭祀), 악(樂), 2권은 색복(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3~6권은 지리(地理), 7~9권은 직관(職官)으로 구성되었다. 대부분 신라를 중심으로 통일기의 상태에 관해서 서술하고 있다.
- 〈열전〉은 인물의 전기로 총 69명이 수록되어 있다. 1~3권이 김유신 열전으로 가장 분량이 많으며, 나머지 7권에는 삼국의 충효 · 화랑 · 문인(文人) · 반역인(叛逆人)과 관련 인물 등의 전기를 수록하였다.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김유신은 중국 황제의 아들 소호의 후손이다.[12] 열전의 처음에는 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의 공로자인 김유신에게 3권을 할애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을 배치하고, 마지막 권에는 후고구려의 궁예, 후백제의 견훤 등으로, 시대・국가에 대한 특별한 배치의 정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러 사람을 다루는 열전에 대한 요약적인 명칭(『사기』의 유림열전, 혹리열전 등)은 사용되지 않았다.
《삼국사기》 전 50권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권수 | 제목 | 분류 |
---|---|---|
권1-12 | 신라본기 | 혁거세 거서간부터 경순왕까지 |
권13-22 | 고구려본기 | 동명성왕부터 보장왕까지 |
권23-28 | 백제본기 | 온조왕부터 의자왕까지 |
권29-31 | 연표 | 기원전 57년부터 936년까지 |
권32-40 | 잡지 | 제사, 악, 색복, 거기, 기용, 옥사, 지리, 직관 |
권41-50 | 열전 | 김유신, 을지문덕, 궁예, 견훤 등 |
《삼국사기》는 한반도 지명 연구의 근본 사료이기도 하다.
3. 2. 내용
삼국의 역사를 모두 〈본기〉로 구성하였다. 기전체에서 〈본기〉는 정통성을 가진 중심 국가의 역사를 기록하는 부분이며, 이와 상반되는 부분으로 〈세가(世家)〉와 〈열전〉이 있다. 〈세가〉는 제후국의 역사를 다루는 부분으로, 중국에 대해서 제후국으로 자처했던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는 각 왕대의 역사를 〈세가〉로 구성하였던 것과 비교된다. 이는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적인 역사서로 비판받는 것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삼국은 모두 대등하게 다루어졌다. 삼국 모두 각각의 〈본기〉로 구성되어 있고 각국의 〈본기〉에서는 해당 국가를 ‘我 (우리)'라고 칭하며 나머지 2개 나라 및 기타 나라는 타국으로 다루었다. 삼국을 제외한 부여, 가야, 발해 등의 역사는 직접 다루고 있지 않다. 이는 《삼국사기》가 정사(正史)를 표방하고 있으며, 단대사(單代史)임을 명백하게 밝힌 점으로 볼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29]12권, 나기/신라본기(羅紀/新羅本紀).[6]
- 제1권. '''거서간''' 혁거세(Hyeokgeose), '''차차웅''' 남해(Namhae), '''이사금''' 유리(Yuri), 탈해(Talhae), 파사(Pasa), 지마(Jima), 일성(Ilseong)
- 제2권. '''이사금''' 아달라(Adalla), 벌휴(Beolhyu), 내해(Naehae), 조분(Jobun), 첨해(Cheomhae), 미추(Michu), 유례(Yurye), 기림(Girim), 흘해(Heulhae)
- 제3권. '''이사금''' 내물(Naemul), 실성(Silseong), '''마립간''' 눌지(Nulji), 자비(Jabi), 소지(Soji)
- 제4권. '''마립간''' 지증(Jijeung), '''왕''' 법흥(Beopheung), 진흥(Jinheung), 진지(Jinji), 진평(Jinpyeong)
- 제5권. '''왕후''' 선덕(Seondeok), 진덕(Jindeok), '''왕''' 무열(Taejong Muyeol)
- 제6권. '''왕''' 문무(Munmu) - 전편
- 제7권. 왕 문무 - 후편
- 제8권. '''왕''' 신문(Sinmun), 효소(Hyoso), 성덕(Seongdeok)
- 제9권. '''왕''' 혜성(Hyoseong), 경덕(Gyeongdeok), 혜공(Hyegong), 선덕(Seondeok)
- 제10권. '''왕''' 원성(Wonseong), 소성(Soseong), 애장(Aejang), 헌덕(Heondeok), 흥덕(Heungdeok), 희강(Huigang), 민애(Minae), 신무(Sinmu)
- 제11권. '''왕''' 문성(Munseong), 헌안(Heonan), 경문(Gyeongmun), 헌강(Heongang), 정강(Jeonggang), '''왕후''' 진성(Jinseong)
- 제12권. '''왕''' 효공(Hyogong), 신덕(Sindeok), 경명(Gyeongmyeong), 경애(Gyeongae), 경순(Gyeongsun)
10권, 여기(麗紀)/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7]
- 권13. 태왕(太王) 동명왕, 광개토왕(廣開土王) 유리왕
- 권14. 왕(王) 대무신왕, 민중왕, 모본왕
- 권15. 태조왕(太祖王) 태조왕, 왕(王) 차대왕
- 권16. 왕(王) 신대왕, 고국천왕, 산상왕
- 권17. 왕(王)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 권18. 왕(王)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왕, 장수왕
- 권19. 문자왕(文慈王) 문자왕, 왕(王)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 권20. 왕(王) 영양왕, 영류왕
- 권21. 왕(王) 보장왕 - 전편
- 권22. 왕(王) 보장왕 - 후편
6권, 제기/백제본기, 濟紀/百濟本紀.[8]
- 권23. '''왕''' 온조(건국), 다루, 기루, 가루, 초고
- 권24. '''왕''' 구수, 사반, 고이, 책계, 분서, 비류, 계, 근초고, 궁수, 침류
- 권25. '''왕''' 진사, 아신, 전지, 구이신, 비유, 개로
- 권26. '''왕''' 문주, 삼근, 동성, 무령, 성
- 권27. '''왕''' 위덕, 혜, 법, 무
- 권28. '''왕''' 의자
3. 2. 1. 본기
삼국의 역사를 모두 〈본기〉로 구성하였다. 기전체에서 〈본기〉는 정통성을 가진 중심 국가의 역사를 기록하는 부분이며, 이와 상반되는 부분으로 〈세가(世家)〉와 〈열전〉이 있다. 〈세가〉는 제후국의 역사를 다루는 부분으로, 중국에 대해서 제후국으로 자처했던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는 각 왕대의 역사를 〈세가〉로 구성하였던 것과 비교된다. 이는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적인 역사서로 비판받는 것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삼국은 모두 대등하게 다루어졌다. 삼국 모두 각각의 〈본기〉로 구성되어 있고 각국의 〈본기〉에서는 해당 국가를 ‘我 (우리)'라고 칭하며 나머지 2개 나라 및 기타 나라는 타국으로 다루었다. 삼국을 제외한 부여, 가야, 발해 등의 역사는 직접 다루고 있지 않다. 이는 《삼국사기》가 정사(正史)를 표방하고 있으며, 단대사(單代史)임을 명백하게 밝힌 점으로 볼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29]12권, 나기/신라본기(羅紀/新羅本紀).[6]
- 제1권. '''거서간''' 혁거세(Hyeokgeose), '''차차웅''' 남해(Namhae), '''이사금''' 유리(Yuri), 탈해(Talhae), 파사(Pasa), 지마(Jima), 일성(Ilseong)
- 제2권. '''이사금''' 아달라(Adalla), 벌휴(Beolhyu), 내해(Naehae), 조분(Jobun), 첨해(Cheomhae), 미추(Michu), 유례(Yurye), 기림(Girim), 흘해(Heulhae)
- 제3권. '''이사금''' 내물(Naemul), 실성(Silseong), '''마립간''' 눌지(Nulji), 자비(Jabi), 소지(Soji)
- 제4권. '''마립간''' 지증(Jijeung), '''왕''' 법흥(Beopheung), 진흥(Jinheung), 진지(Jinji), 진평(Jinpyeong)
- 제5권. '''왕후''' 선덕(Seondeok), 진덕(Jindeok), '''왕''' 무열(Taejong Muyeol)
- 제6권. '''왕''' 문무(Munmu) - 전편
- 제7권. 왕 문무 - 후편
- 제8권. '''왕''' 신문(Sinmun), 효소(Hyoso), 성덕(Seongdeok)
- 제9권. '''왕''' 혜성(Hyoseong), 경덕(Gyeongdeok), 혜공(Hyegong), 선덕(Seondeok)
- 제10권. '''왕''' 원성(Wonseong), 소성(Soseong), 애장(Aejang), 헌덕(Heondeok), 흥덕(Heungdeok), 희강(Huigang), 민애(Minae), 신무(Sinmu)
- 제11권. '''왕''' 문성(Munseong), 헌안(Heonan), 경문(Gyeongmun), 헌강(Heongang), 정강(Jeonggang), '''왕후''' 진성(Jinseong)
- 제12권. '''왕''' 효공(Hyogong), 신덕(Sindeok), 경명(Gyeongmyeong), 경애(Gyeongae), 경순(Gyeongsun)
10권, 여기(麗紀)/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7]
- 권13. 태왕(太王) 동명왕, 광개토왕(廣開土王) 유리왕
- 권14. 왕(王) 대무신왕, 민중왕, 모본왕
- 권15. 태조왕(太祖王) 태조왕, 왕(王) 차대왕
- 권16. 왕(王) 신대왕, 고국천왕, 산상왕
- 권17. 왕(王)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 권18. 왕(王)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왕, 장수왕
- 권19. 문자왕(文慈王) 문자왕, 왕(王)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 권20. 왕(王) 영양왕, 영류왕
- 권21. 왕(王) 보장왕 - 전편
- 권22. 왕(王) 보장왕 - 후편
6권, 제기/백제본기, 濟紀/百濟本紀.[8]
- 권23. '''왕''' 온조(건국), 다루, 기루, 가루, 초고
- 권24. '''왕''' 구수, 사반, 고이, 책계, 분서, 비류, 계, 근초고, 궁수, 침류
- 권25. '''왕''' 진사, 아신, 전지, 구이신, 비유, 개로
- 권26. '''왕''' 문주, 삼근, 동성, 무령, 성
- 권27. '''왕''' 위덕, 혜, 법, 무
- 권28. '''왕''' 의자
3. 2. 2. 잡지
〈잡지〉는 삼국의 제도, 문화 등을 체계적으로 전하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내용이 신라의 기록이며 고구려, 백제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지리지와 직관지가 가장 분량이 많다. 특히 지리지는 총 4권으로, 앞의 3권은 신라의 지리로서 통일신라의 9주를 다루고 있다. 각권마다 3개 주씩 총 9주의 연혁을 다루고 있는데, 1권은 신라, 2권은 고구려, 3권은 백제의 영역에 해당하는 주로 구성하였다. 4권은 고구려와 백제의 지리를 기록하였는데, 앞의 세 권의 연혁에 등장하지 않았거나 위치를 알지 못하는 지명도 다루고 있다.[9]권32 | 제사와 음악 | |
---|---|---|
권33 | 색복, 수레와 기병, 기용, 집 | |
권34 | 지리 | 상주, 양주, 강주 |
권35 | 한주, 삭주, 명주 | |
권36 | 웅주, 전주, 무주 | |
권37 | 고구려·백제·삼국 유명하지 않은 지역 분포 | |
권38 | 직관 | |
권39 | ||
권40 |
3. 2. 3. 열전
〈열전〉에는 김유신을 비롯한 69명의 전기가 실려있다. 특정한 편명으로 구분하지는 않았으나 각 권별로 일정한 기준에 의해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1~3권은 김유신 열전, 4~5권은 무장 및 명신들의 열전, 6권은 학자 열전, 7권은 순국열사 열전, 8권은 효자 및 열녀 등 일반인 열전, 9권은 반신(叛臣) 열전, 10권은 역신(逆臣) 열전으로 볼 수 있다. 단, 중국의 정사에서 흔히 보이는 왕실 종친이나 후비 등의 열전은 수록되지 않았다.[10]열전(列傳)은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10]
- 권41: 김유신 (1)
- 권42: 김유신 (2)
- 권43: 김유신 (3)
- 권44: 을지문덕, 김거칠부, 거도, 이사부, 김인문, 김양, 흑치상지, 장보고, 정년, 사다함
- 권45: 을파소, 김후직, 녹진, 밀우, 유유, 명림답부, 석우로, 박제상, 귀산, 온달
- 권46: '''학자들'''. 강수, 최치원, 설총
- 권47: '''화랑들'''. 해론, 소나, 취도(驟徒), 눌최, 설계두, 김영윤(金令胤), 관창, 김흠운, 열기(裂起), 비령자(丕寧子), 죽죽, 필부(匹夫), 계백
- 권48: '''공신들'''. 향덕(아들), 성각(아들), 실혜(實兮)(시인), 물계자(군인), 백결 선생, 검군(김씨 왕족), 김생(서예가), 요국길, 솔거(화가), 치운(딸), 설씨(딸), 도미(처).[11]
- 권49: '''반란 및 난을 일으킨 인물들'''. 창조리, 연개소문
- 권50: '''후대의 왕들'''. 궁예, 견훤
3. 2. 4. 사론
《삼국사기》에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기사들과 별도로 총 31편의 사론(史論), 일부 항목의 서문(序文), 기타 주석이 실려 있다. 특히 사론은 김부식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평가를 내린 것으로서 이를 통해 김부식의 역사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본기〉에 23편, 〈열전〉에 8편의 사론이 실려 있으며 이 사론은 성격에 따라 포폄적(褒貶的) 사론과 역사학적 사론으로 나눌 수 있다.[28] 포폄적 사론은 역사적 사실의 잘잘못을 비판한 것으로 전체 분량의 2/3 가량을 차지한다. 포폄적 사론을 통해서 역사를 비판적 안목으로 바라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역사학적 사론은 사실의 규명이나 출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삼국사기》를 저술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원칙, 서술한 이유, 역사적 사건의 원인 및 결과, 사료의 부족, 역사의 해석 등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4. 사료
『삼국사기』는 현재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舊三國史)와 『화랑세기』(花郞世記) 등 한국의 초기 역사 기록들을 바탕으로 편찬되었다.[5]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같은 일본의 편년사는 인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김부식이 이들을 몰랐거나 일본 자료를 경시했을 가능성이 있다.[5] 반면, 『위서』(魏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 중국 왕조의 편년사와 비공식 중국 기록은 많이 인용되었다.[5]
『삼국사기』에는 중국(중국) 역사서(역사서)의 이름을 명기하여 인용하는 부분이 많으며, 백제(백제), 고구려(고구려), 신라(신라)와 중국 왕조(중국 왕조) 간 교류 기사 대부분은 중국 역사서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13] 그러나 중국 역사서에 있으면서도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기사도 많다.[13] 이마니시 타츠루(今西龍)는 『삼국사기』 편찬자가 중국 역사서 기사를 "상당한 연대 아래 아무런 고려 없이 삽입"했다고 보았고,[13]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는 기사 전인용의 조잡함을 지적하며, 이를 『삼국사기』의 사료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근거로 삼았다.[13] 반면, 사카모토 요시타네(坂元義種)와 타나카 토시아키(田中俊明)는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 검토를 통해 기사 전인용 누락이 『삼국사기』 편찬자의 의식적인 사료 조작 결과라고 지적했다.[13]
조선 측 사료로는 『구기』, 『해동구기』, 『삼한구기』, 『본국구기』, 『신라구기』, 김대문의 『고승전』, 『화랑세기』 등을 1차 사료로 인용했지만, 모두 현존하지 않아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14] 중국 사료와 조선 사료가 충돌하는 경우 조선 사료를 우선하기도 했지만, 해당 사료들의 신빙성에 의문이 있어 신중한 취급이 필요하다.[14] 일본에서는 3세기경까지의 기사는 믿기 어렵다는 생각이 주류이다.[14] 천변 기사(혜성 등)는 중국 역사서와 연월을 같이하는 기록이 많다.
고구려(고구려)에는 『유기』, 『신집』, 백제(백제)에는 『일본서기』에 이름이 확인되는 백제삼서(『백제본기』, 『백제기』, 『백제신찬』), 신라(신라)에도 국사 편찬 기록이 있지만, 모두 일실서(逸失書)로 기록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인종이 김부식에게 명한 『삼국사기』 편찬 조칙이 김부식의 상소문 "진삼국사표"에 인용되어 있는데, 조칙에서 『신당서』 열전이 명시되어 있어 『삼국사기』 편찬에 참고되었음을 알 수 있다.[15] 조칙에는 "삼국의 고기는 문자가 혼란스럽고 조잡하며, 게다가 사적이 부족하다"는 내용이 있어 당시의 사료 상황을 보여준다.[15]
5. 진삼국사표
1145년 김부식이 인종에게 《삼국사기》 편찬을 완료하고 올린 표(表)이다. 이 글은 《삼국사기》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동문선》 권44에 수록되어 있다.
김부식은 옛 열국들이 사관을 두어 역사를 기록한 것처럼, 해동 삼국도 역사가 오래되었기에 역사책에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고 하였다. 맹자는 "진(晉)나라의 『승(乘)』과 초(楚)나라의 『도올(檮杌)』과 노(魯)나라의 『춘추』는 같은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김부식은 인종이 전고(前古)를 두루 살펴보고, 학사(學士)와 대부(大夫)들이 중국 역사에는 통달했으나, 정작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아득하여 그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하는 것을 한탄스럽게 여겼다고 전한다.
신라, 고구려, 백제가 솥발처럼 대립하면서 중국과 교통하였기에, 범엽의 『한서』나 송기의 『당서』에는 모두 열전(列傳)이 있었으나, 중국의 일만을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히 하여 싣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또한 그 고기(古記)라는 것은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事跡)이 누락되어 있어, 임금과 신하의 행적, 국가의 안위, 백성들의 다스려짐과 혼란스러움 등을 드러내어 경계로 삼지 못하였다고 평가했다.
김부식은 재주와 학문, 식견을 갖춘 인재를 얻어 일가(一家)의 역사를 이루어 만세에 빛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재주와 학식이 부족하고, 늙어서 정신이 흐릿해져서 글을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책을 완성하였지만, 볼만한 것이 되지 못하여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겸손해 했다. 소홀하고 거친 솜씨를 이해해주시고 멋대로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청하며, 명산(名山)에 보관하기엔 부족하더라도 간장 단지를 덮는데 쓰이지는 않았으면 한다고 하였다.
김부식은 삼가 본기(本紀) 28권, 연표(年表) 3권, 지(志) 9권, 열전(列傳) 10권을 찬술하고, 표(表)와 함께 아뢰어 임금님의 눈을 더럽힌다고 마무리했다.
6. 특징
《삼국사기》는 《고기》, 《신라고기》, 《해동고기》, 《삼한고기》, 《본국고기》 등 한국의 고유 기록을 1차 사료로 삼았으며, 중국 사료와 한국 사료가 충돌하는 경우는 한국의 사료를 우선적으로 사용했다.
고조선, 가야, 동예, 옥저, 삼한, 발해 등의 역사는 빠져 있는데, 이것은 《삼국사기》가 먼저 출간된 《구삼국사》를 보다 간결하게 다듬은 형태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관계와 유사한 것으로 보이나, 《구삼국사》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관계는 알 수 없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삼국사기》 표지에는 약칭인 《'''삼국사'''》로 적혀 있다.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 모두를 “우리”라고 기록함으로써 최대한 중립적으로 서술했다고 여겨지지만, 내용 면에서 신라의 비중이 크다. 남북국 시대(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신라인들이 기록한 사료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이다. 또한 편찬자인 김부식이 신라 왕실과 연관된 문벌 귀족이었고, 고려가 신라로부터 정통을 계승했다는 것을 칭송하기 위해 신라에 치우친 서술이 많다. 중국 사서에서 더 일찍 등장하는 고구려 건국(기원전 37년)을 신라 건국(기원전 57년)보다 뒤에 두는 것도 그러한 표현이다.
삼국 이전의 고조선, 삼한, 삼국 시대의 가야, 동예, 옥저, 신라 통일 후 발해 등에 대한 서술이 없는 이유는, 이미 존재했던 칙선의 『구삼국사』를 더 간결하게 정리한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구삼국사』에 고조선 등의 기사가 있었는지는 『구삼국사』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확인이 불가능하다. 완성 후 100년 가까이 지난 고려의 대문인 이규보가 “동명왕편” 서문에서 의아해했듯이, 칙선의 『구삼국사』가 있었던 곳에 중편이 된 『삼국사기』의 편찬이 필요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의 왜곡을 포함하여 여러 설이 있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7. 평가 및 비판
《삼국사기》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이후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편찬 등에 영향을 주었다.
《삼국사기》에 대해 신라 위주로 서술되었다는 점, 백제의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 고조선을 비롯한 가야, 동예, 옥저, 삼한(마한, 변한, 진한), 발해 등의 역사가 빠져 있다는 점, 불교 및 전통사상을 기술하지 않았다는 점 등의 비판이 있다.
항목 | 비판 | 반론 |
---|---|---|
신라 위주의 서술 | ||
사대주의적 사서 | ||
불교 및 전통 사상 관련 |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 모두를 “우리”라고 기록함으로써 최대한 중립적으로 서술했다고 여겨지지만, 내용 면에서 신라의 비중이 크다. 남북국 시대(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신라인들이 기록한 사료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신라에 대한 편중이 있다. 또한 편찬자인 김부식이 신라 왕실과 연관된 문벌 귀족이었고, 고려가 신라로부터 정통을 계승했다는 것을 칭송하기 위해 신라에 치우친 서술이 많다. 중국 사서에서 더 일찍 등장하는 고구려 건국(기원전 37년)을 신라 건국(기원전 57년)보다 뒤에 두는 것도 그러한 표현이다.
삼국 이전의 고조선, 삼한, 삼국 시대의 가야, 동예, 옥저, 신라 통일 후 발해 등에 대한 서술이 없는데, 이는 이미 존재했던 칙선의 『구삼국사』를 더 간결하게 정리한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구삼국사』에 고조선 등의 기사가 있었는지는 『구삼국사』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확인이 불가능하다. 애초에, 완성 후 100년 가까이 지난 고려의 대문인 이규보가 “동명왕편” 서문에서 의아해했듯이, 칙선의 『구삼국사』가 있었던 곳에 중편이 된 『삼국사기』의 편찬이 필요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의 왜곡을 포함하여 여러 설이 있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삼국 시대(朝鮮반도)에 편찬된 한국의 역사서는 여러 권이 있었으나 (고흥(百済)이 저술한 『서기(역사서)』 등), 모두 전해지지 않고, 逸書(일서)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의 역사서는 고려 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이며,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자료이지만, 『삼국사기』는 중국 역사서의 내용을 많이 차용하여 중국 중심의 역사관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으며, 근대 이후 한국의 국가주의·민족주의적인 역사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17]
栗原薫(쿠리하라 카오루)는 “『삼국사기』는 헤이안 시대 말, 『삼국유사』는 가마쿠라 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우리나라 상대(上代)로부터 700년 이상 떨어진 저술이며, 한사(漢史)에 의거한 편집이라는 점도 있어 원래부터 경시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18]
이종욱(李鍾旭, 서강대학교)은 “대한민국의 주류 역사학계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허위로 보았던 쓰다 사유키치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신라 제17대 왕인 奈勿尼師今(내물니사금) 이전의 기록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는 등 식민사관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19] 이에 대해 노태돈(盧泰敦, 서울대학교)은 “奈勿尼師今 이전의 기록은 신화적인 부분이 있는 등,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왜, 객관적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 식민사관인가”라고 반론하고 있다.[19]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백제의 건국에 대해, 온조왕을 비롯한 건국 세력이 기병에 능한 북방 기마 민족 집단(=부여)이었기 때문에 맹렬한 속도로 정복지를 확대하여 한강 지역을 확보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백제가 기원전 18년에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기원전 6년에 이미 북쪽으로는 浿河(패하), 남쪽으로는 熊津(웅진, 공주)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고, 백제가 기원전후에 건국하여 건국 후 불과 13년 만에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까지 병합했다고 기록하면서, 온조왕 26년(8년)이 되어서야 마한을 병합했다는 기사처럼, 맹렬한 속도로 정복지를 확대하여 한강 지역을 확보한 북방 기마 민족 집단이 훨씬 좁은 마한을 병합하는 것이 이렇게 늦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순된 기사를 설명할 수 없다.[20] 참고로, 3세기 말에 편찬된 중국 역사서 『삼국지』 한전(韓傳)에서는 당시 伯済国(백제)는 마한 50여 개 나라 중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에,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는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20] 예를 들어, 『삼국사기』 온조왕 34년조(16년)에 우곡성에서 마한의 周勤(주근)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있고, 『삼국사기』 다루왕 29년조(56년)에는 2월에 왕이 우곡성을 축성하도록 명령했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에, 온조왕 때에는 축성되지도 않은 성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 된다.[20]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불합리한 기사가 적지 않기 때문에, 『삼국사기』 다루왕 6년조의 주·군의 설치, 구이왕 27년조(260년) 및 구이왕 28년조의 육조평과 15계의 관제 설치 등의 기사도 후대의 사실을 거슬러 올라가 기록한 가능성이 높다.[20]
김부식은 발해를 한국 역사에서 제외하고 있으며, 『삼국사기』는 발해 관련 기사가 거의 수록되어 있지 않고, 겨우 당나라·신라와 발해의 분쟁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고려는 남쪽의 신라, 북쪽의 발해을 합쳐 남북국사를 편찬해야 했는데, 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해의 고지를 얻을 근거를 잃고 약소국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박지원은 발해를 한국 역사에서 제외한 김부식을 비판하고, 발해는 고구려의 “자손”이었다고 주장했다.[21] 이규경은 발해를 한국 역사에서 제외한 것은 “그것이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대한 오류”라고 비판했다.[22] 신채호는 발해를 한국 역사에서 제외하고 있다고 『삼국사기』를 비판하고,[23] “우리 조상 단군의 고대 땅의 절반을…900년 이상 잃어버렸다”고 주장했다.[24]
대한민국에서는 한사군이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허위로 보는 학설을 비판하는 의견이 있으며, 이도길(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식민사관은 1945년 8월 15일에 종식되어야 했지만, 조선사편수회에 소속된 한국인 학자가 해방 후 역사학계의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식민사관을 일소하지 못하고, 한사군이 한반도에 존재했던 것이 정설이 되어, “이병도는 해방 후 한국 사학계의 태두로 군림하면서 자신의 두 스승의 식민사관을 한국사의 주류 이론으로 만들었다. 이나바 이와키치의 한사군의 한반도 존재설을 한국 고대사의 정설로 자리 잡게 하고, 쓰다 사유키치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따라 고조선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허위로 단정 지었다”고 하여, 한사군의 한반도 존재설은 한사군이 요동반도에 존재했던 것을 증명하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허위로 함으로써 한국사를 1500년 단축시킨 일제의 조직적인 음모이며, “현재 한국 고대사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하고 있는 이병도의 이론은 쓰다 등의 이론을 그대로 계승하거나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에 불과하다. 쓰다의 한국 고대사관은 간단하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의뢰를 받고 쓴 『조선역사지리』 등의 저서에서 쓰다는 한반도 북부에는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이 있고, 한강 이남에는 총 78개의 작은 나라들이 우글거렸다고 서술했다. 문제는 『삼국사기』가 한강 이남에 일찍부터 신라와 백제라는 강력한 고대 국가가 존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임나일본부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쓰다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조작되었다고 하는 소위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창안했다. 혼자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주장하면서도 ‘『삼국사기』상대 부분을 역사적 사실의 기재라고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삼국사기』의 신라왕본기 대해서」, 1919년)라고 마치 많은 학자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강변했다. 그 후, 이병도는 임나일본부설은 부인하면서도 쓰다의 『삼국사기』 불신론은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받아들였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현재 정설이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25][26]
7. 1. 긍정적 평가
《삼국사기》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이며, 이후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편찬에 영향을 주었다.하지만, 《삼국사기》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이 존재한다. 신라 위주로 서술되었다는 점,[30] 백제의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 고조선, 가야, 동예, 옥저, 삼한(마한, 변한, 진한), 발해 등의 역사가 빠져 있다는 점, 불교 및 전통사상을 기술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 비판받는다.[34]
이러한 비판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사료의 한계상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과, 〈본기〉에 한정했을 때 통일신라를 제외하면 오히려 고구려가 신라보다 분량이 더 많다는 점,[31] 신라 계승 의식보다는 삼국 모두를 계승했다는 삼한일통 의식[32]이 더 잘 나타나 있다는 점을 들어 신라 중심 서술 비판에 반박한다.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의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묘청의 난)에서 서경파와 개경파의 대립을 자주와 사대의 대립으로 보아, 개경파의 김부식이 승리함으로써 사대주의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며 《삼국사기》를 사대주의적 사서로 비판했다. 그러나 내용과 당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상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집필했다는 반론도 있다.[33]
김부식은 술이부작(述而不作, 있는 그대로 기술할 뿐 새로 지어내지 않는다)과 이실직서(以實直書, 사실은 사실대로 올바르게 쓴다)의 원칙에 따라 내용을 수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7. 2. 비판적 평가
《삼국사기》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이며,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편찬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대한 여러 비판이 존재한다.신라 위주의 서술, 백제 기록 부족, 고조선, 가야, 동예, 옥저, 삼한(마한, 변한, 진한), 발해 등의 역사 누락, 불교 및 전통 사상 기술 부족 등이 비판받는다.[30]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것과 관련하여, 신라계 문벌 귀족의 신라 계승 의식을 표출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30] 그러나 당시 사료의 한계상 어쩔 수 없었다는 반론과 〈본기〉에 한정하면 고구려가 신라보다 분량이 많고,[31] 삼국 모두를 계승했다는 삼한일통 의식[32]이 더 잘 나타난다는 반론도 있다.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에서 묘청의 난을 자주와 사대의 대립으로 보고, 김부식의 승리가 사대주의를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현실적인 관점에서 집필했다는 반론이 있다.[33]
《삼국유사》, 〈동명왕편〉과 비교하면 내용이 다르다는 비판이 있지만,[34] 김부식은 술이부작(述而不作)과 이실직서(以實直書)의 원칙에 따라 수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삼국 시대에 편찬된 한국 역사서는 여럿 있었으나(고흥(百済)의 『서기(역사서)』 등)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서는 『삼국사기』이지만, 중국 역사서를 많이 차용하여 중국 중심 역사관으로 서술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17] 栗原薫(쿠리하라 카오루)는 『삼국사기』가 한사(漢史)에 의거하여 편집되었기 때문에 경시되었다고 지적한다.[18]
이종욱(李鍾旭, 서강대학교)은 한국 주류 역사학계가 쓰다 사유키치의 영향을 받아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허위로 보고, 내물니사금 이전 기록을 은폐하는 등 식민사관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19] 반면, 노태돈(盧泰敦, 서울대학교)은 내물니사금 이전 기록은 신화적인 부분이 있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반박한다.[19]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긍정하는 측은 백제 건국 세력이 기병에 능한 북방 기마 민족(=부여)이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정복지를 확대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기원전 18년) 및 초기 영토 확장 기록과, 온조왕 26년(8년)에 마한을 병합했다는 기사 사이의 모순을 설명하지 못한다.[20] 3세기 말 중국 역사서 『삼국지(역사서)』에 따르면, 당시 伯済国(백제)는 마한 50여 개국 중 하나였기 때문에,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합리적으로 해석하기 어렵다.[20] 『삼국사기』 온조왕 34년조(16년)와 다루왕 29년조(56년)의 우곡성 관련 기사처럼, 『삼국사기』에는 불합리한 기사가 많아, 다루왕 6년조의 주·군 설치, 구이왕 27년조(260년) 및 28년조의 육조평과 15계 관제 설치 기사도 후대의 사실을 소급하여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20]
김부식은 발해를 한국사에서 제외했으며, 『삼국사기』에는 발해 관련 기사가 거의 없다.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고려가 남북국사를 편찬하지 않아 발해의 고지를 잃었다고 비판했다. 박지원은 발해를 한국사에서 제외한 김부식을 비판하며, 발해는 고구려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다.[21] 이규경은 발해를 한국사에서 제외한 것은 “중대한 오류”라고 비판했다.[22] 신채호는 발해를 한국사에서 제외한 『삼국사기』를 비판하며,[23] “우리 조상 단군의 고대 땅 절반을…900년 이상 잃어버렸다”고 주장했다.[24]
한국에서는 한사군이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허위로 보는 학설을 비판하는 의견이 있다. 이도길(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조선사편수회에 소속됐던 한국인 학자들이 해방 후 역사학계의 권력을 장악하여 식민사관을 청산하지 못하고, 한사군이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것이 정설이 되었다고 비판한다.[25][26] 이병도는 이나바 이와키치의 한사군 한반도 존재설과 쓰다 사유키치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한국 고대사의 주류 이론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25][26] 한사군의 한반도 존재설은 한사군이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허위로 만들어 한국사를 1500년 단축시킨 일제의 음모이며, 현재 한국 고대사 학계의 정설은 쓰다 사유키치의 이론을 계승하거나 수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25][26]
8. 현대적 의의
9. 번역
고려 시대의 간행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1393년부터 1394년 사이에 진의귀과 김거두가 고쳐 펴냈고, 1512년(중종 7년)에 이계복이 다시 고쳤으며 이후 목판 또는 활자로 수차례 간행되었다.
삼국사기의 일부는 다양한 영어 서적과 논문에 실렸는데, 특히 다음과 같다:
- 에드워드 J. 슐츠 (Edward J. Shultz) 등 4인, ''삼국사기 신라본기'' (2012), 한국학중앙연구원
- 에드워드 J. 슐츠 (Edward J. Shultz) 등 5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011), 한국학중앙연구원
- 조너선 베스트 (Jonathan Best), ''백제 초기 왕국사와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석 번역'' (2007), 하버드 대학교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 마크 E. 빙턴 (Mark E. Byington), "삼국사기 권48 열전 제8" (1992), 한국왕립아시아학회 회보
- 케네스 H.J. 가디너 (Kenneth H.J. Gardiner), "고구려 전설 (I-II):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982), ''Korea Journal''
- 존 찰스 제이미슨 (John Charles Jamieson), "삼국사기와 통일 전쟁" (1969),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박사학위 논문
- 이소연, 신정수, "삼국사기 제44, 45권: 을지문덕 등 열전 주석 번역" (2018), ''The Review of Korean Studies''
- 나상훈, 유진숙, 신정수, "삼국사기 제41, 42, 43권: 김유신 열전 주석 번역" (2018), ''The Review of Korean Studies''
- 크리스토퍼 벡위드 (Christopher Beckwith), ''고구려: 일본 대륙 친척의 언어 (Koguryo: The Language of Japan's Continental Relatives)'' (2007), Brill
- 김기중 (Kichung Kim), ''고전 한국 문학 소개 (An Introduction to Classical Korean Literature)'' (1996),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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