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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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비천 전투는 669년 당나라가 토번을 공격하기 위해 벌인 전투이다. 당 고종은 설인귀에게 토번 공격을 명했으나, 곽대봉이 설인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기습 작전을 거부했다. 이 틈을 타 가르친링이 설인귀와 곽대봉의 군대를 격파했고, 설인귀, 곽대봉, 아사나도진은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났다. 이 전투의 패배로 당나라는 토번 공격을 자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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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천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교전 | 대비천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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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670년 |
장소 | 칭하이호 근처 |
결과 | 토번의 투유후(吐谷渾) 합병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토번 |
교전국 2 | 당나라 |
지휘관 및 병력 | |
토번 지휘관 | 가르 트린링 첸드로 |
토번 병력 | 50,000명 |
당나라 지휘관 | 설인귀, 아시나 도자이, 곽대봉 |
당나라 병력 | 400,000명 |
사상자 규모 | |
토번 사상자 | 20,000명 |
당나라 사상자 | 100,000명 |
2. 배경
663년, 가르통첸이 토욕혼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히자 당은 위협을 느꼈다. 669년, 당 고종은 설인귀에게 토번을 치도록 명령했다.
가르친링은 곽대봉이 설인귀의 명령을 듣는 것에 불만이 있어 기습 명령을 무시하는 상황을 이용해 곽대봉과 설인귀의 군대를 궤멸시켰다.[2] 그 후 설인귀, 곽대봉, 아사나도진은 생포되어 가르친링에게 끌려갔고, 다시는 토번을 공격하지 말라는 훈계를 듣고 풀려났다.[2]
가르친링은 곽대봉과 설인귀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그 후 설인귀, 곽대봉, 아사나도진은 생포되어 가르친링에게 끌려갔고, 다시는 토번을 공격하지 말라는 훈계를 듣고 풀려났다.[2]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당나라는 토번 공격을 자제하게 되었다.
[1]
웹인용
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靑海省을 가다 (1)
https://www.chogabje[...]
3. 전투 과정
4. 전투 결과 및 영향
참조
[2]
서적
자치통감
삼화
2009
[3]
서적
전쟁으로 보는 중국사
수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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