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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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독립단은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이다. 박문일, 유인석 계열의 의병 수령, 향약계, 포수단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으며, 독립 쟁취를 목표로 국내외 조직을 갖추고 군자금 모집, 친일 세력 처단 등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광복단 등과 통합하여 광복군총영 또는 광복군사령부로 개편되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많은 한인들이 만주로 이주하였다. 박문일, 유인석 계열의 의병 수령, 향약계, 포수단 등은 "本國에 入하야 血戰을 斷行하기를 期圖하며, 外地에 在하여는 自治를 施行"하려는 목적으로 4월 15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奉天省 柳河縣 三源堡)에서 대한독립단을 결성하였다.[1][2]
1919년 3·1 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많은 동포들이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대한독립단은 박문일, 유인석 계열의 의병 수령, 향약계, 포수단 등을 모아 1919년 4월 15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奉天省 柳河縣 三源堡)에서 조직되었다.[1] 이자해의 회고록에 따르면, 조맹선을 단장으로 하는 대한독립단이 먼저 조직되고, 이후 대한독립단총단으로 발전하였다.[2] 조맹선, 백삼규, 조병준 외에 박장호, 전덕원, 박양섭 등이 독립 쟁취를 위한 단일기관으로 이 단체를 강화하였다.
2. 결성 배경
기존 학설은 1919년 대한독립단이 결성되면서 도총재부와 총단의 전체 조직을 갖춘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자해의 회고록에 따르면, 먼저 조맹선을 단장으로 하는 대한독립단이 조직된 후 대한독립단총단으로 발전하였다. 조맹선, 백삼규, 조병준 외에 박장호, 전덕원, 박양섭 등이 독립 쟁취를 위한 단일기관으로 이 단체를 강화하였다.
3. 조직
대한독립단은 국내외 각지에 100여 개의 지단 및 지부를 설치하였다. 만주 지역에서는 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여 구관(區管)을 두고, 10구에 단장을 두어 자치 행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1]
3. 1. 중앙 조직
박장호가 도총재, 백삼규가 부총재, 조맹선이 총단장을 맡았고, 김원섭과 최영호가 부단장이었다. 군사부장은 전덕원, 참모부장은 조병준, 총무부장은 김평식, 재무부장은 강세헌, 서무는 김일, 고문은 안병찬이 임명되었다. 이 외에도 많은 부서와 간부들이 있었다.[1]
3. 2. 국내 지단 조직
국내 총지단장 홍제업은 평안북도, 평안남도, 경기도, 황해도 등지에 지단을 설치하였다.[1]
이들은 3, 4명씩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남북도의 조선총독부 예하 경찰을 습격하고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대시켜갔다.[1]
3. 3. 만주 지단 조직
만주 지방 조직으로는 장백현 총지단장에 유일우가 임명되었고, 집안현 유수림자(楡樹林子)에는 최남표, 집안현 외차구(外岔溝)에는 홍승국 등이 활동하였다.[1] 이들은 맹헌규·유일우 등과 함께 집안현·장백현 등지에서 지단 설치에 힘썼다.[1]| 지역 | 지단장 |
|---|---|
| 장백현 | 유일우 |
| 집안현 유수림자(楡樹林子) | 최남표 |
| 집안현 외차구(外岔溝) | 홍승국 |
4. 주요 활동
대한독립단은 3, 4명씩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남북도 조선총독부 예하 경찰을 습격하고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대시켜갔다.[1] 1919년 8월 최고 1,500명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그 중 700명의 독립군을 하얼빈 주둔 백계 러시아부대에 파견해 군사훈련을 받게 하고, 9월경 노령(露領)으로도 2개 소대를 보냈다.[1] 이들은 시베리아에서 훈련과 무기 구입에 주력하였다.[1]
1919년 12월 본부 밑에 4개 중대를 편성해 남만주 제1사단이라 하고, 무송현(撫松縣)에 사단본부를 설치하였다.[1] 같은 해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실시에 따라 조병준이 평안북도 독판(督辦)이 되어 공채를 모집하기도 하였다.[1]
1920년 3, 4월 결사대들이 평안도 신의주, 의주 등에서 친일세력 처단에 주력하였다.[1] 또한, 남만주와 국내의 기맥을 상통해 독립을 이루고자 전국적으로 모군·모금사업을 추진하였다.[1] 태천 지단에서는 유림 김인수 등의 활동으로 다수 단원을 포섭해, 의용대를 조직하였다.[1] 그리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폭약을 구입, 관공서 파괴를 계획하던 중 다수의 단원이 붙잡혔다.[1]
유일우, 김병연, 박기연 등은 장백현 일대에서 많은 자금을 모금했으며, 안도, 무송현 등지와 연락하면서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1]
5. 노선 갈등
1920년 대한독립단은 연호 문제로 노년층과 청년층이 대립하였다. 박장호, 백삼규, 전덕원, 이웅해, 김평식 등은 단군기원 또는 융희 연호 사용을 주장하였고, 조병준, 신우현, 변창근, 김승학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연호 사용을 주장하였다. 결국 같은 해 4월, 전자는 기원독립단, 후자는 민국독립단으로 분리되었지만, 독립운동에는 서로 협력하였다.[1]
5. 1. 기원독립단
1920년 4월 박장호, 백삼규, 전덕원, 이웅해, 김평식 등은 단군기원 또는 융희 연호 사용을 주장하며 기원독립단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대한독립단이 연호 문제로 노년층과 청년층이 대립하면서 분리된 조직 중 하나였다. 기원독립단은 대한민국 연호 사용을 주장한 조병준, 신우현, 변창근, 김승학 등의 민국독립단과 대립했지만, 독립운동에는 상호 협력하였다.[1]5. 2. 민국독립단
1920년 4월, 조병준, 신우현, 변창근, 김승학 등은 대한민국 연호 사용을 주장하며 민국독립단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기원독립단과 분리되어 대립했지만, 독립운동에는 서로 협력하였다.[1]6. 개편
1920년 7월, 광복단(1920년 4월 이탁)을 중심으로 광복단, 민국독립단, 대한청년단연합회를 통합해 광복군총영(오동진)으로 개편하였다.
1920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한독립단, 대한청년단연합회, 의용단을 통합해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사령부(조맹선)로 조직하였다.[3][4]
하지만 산하 무장독립군과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광복군총영은 임시정부 조직개편안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광복군사령부는 명목상 조직이다.
참조
[1]
서적
이자해 자전
국가보훈처
2007
[2]
논문
평안도 화서학파의 항일독립운동: 광복회ㆍ대한독립단 결성을 중심으로
화서학회
2012
[3]
서적
한국독립사
독립문화사
1965
[4]
서적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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