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1. 개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망명 정부이다. 1917년 미국 참전과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이 활발해지자,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이 정부 수립을 추진하여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서울 등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 통합 과정을 거쳐 1919년 9월 상하이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고, 이승만, 김구,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하여 활동했다. 주요 활동으로는 군사 조직인 한국 광복군 창설, 대일 선전포고, 외교 활동 등이 있었으며,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등을 거치며 여러 차례 이동했다.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해산되었다.
| 공식 명칭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 원어 명칭 |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어 大韓民國臨時政府한국어 |
| 지위 | 미승인 임시 망명 정부 |
| 존속 기간 | 1919년–1945년 |
| 이전 국가 | 대한제국 조선 |
| 다음 국가 | 미국 육군 군정청 대한민국 제1공화국 |
| 표어 | 대한독립만세한국어 (한글), 大韓獨立萬歲한국어 (한자) "대한 독립 만세" |
|---|---|
| 국가 | 애국가한국어 (애국가) "애국가" |
| 수도 (망명지) | 상하이 (1919년–1932년) 항저우 (1932년–1935년) 자싱 (1935년) 난징 (1935년–1937년) 창사 (1937년–1938년) 광저우 (1938년–1939년) 치장 (1939년–1940년) 충칭 (1940년–1945년) |
|---|---|
| 공용어 | 한국어 |
| 정치 체제 | 대통령제 공화국 (1919년–1925년) 의원내각제 공화국 (1925년–1940년) 반대통령제 공화국 (1940년–1945년) |
|---|---|
| 국가 원수 | 대통령 |
| 초대 대통령 | 이승만 (1919년–1925년) |
| 마지막 대통령 | 김구 (1940년–1945년) |
| 국무총리 | 국무총리 |
| 초대 국무총리 | 이동녕 (1919년–1921년) |
| 마지막 국무총리 | 박은식 (1924년–1925년) |
| 입법부 | 임시 의정원 |
| 독립 선언 | 독립 선언 (1919년 3월 1일) |
|---|---|
| 정부 수립 | 상하이 임시 정부 수립 (1919년 4월 11일) |
| 정부 통합 | 블라디보스토크 임시 정부와 통합 한성 정부와 통합 (1919년 9월 11일) |
| 연합국 선언 | 추축국에 대한 전쟁 선포 (1941년 12월 9일) |
| 연합국 선언 | 카이로 선언 (1943년 11월 27일) |
| 해방 | 국가 해방 (1945년 8월 15일) |
| 미국 군정 | 미국 군정 시작 (1945년 9월 8일) |
| 통화 | 한국 원 |
|---|---|
| 현재 국가 | 중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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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중국 -
5·4 운동
5·4 운동은 1919년 중국에서 발생한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운동으로, 파리 강화 회의의 결정에 반발하여 일본 상품 불매 운동으로 확산되었고, 중국 공산당 창당의 계기가 되는 등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919년 한국 -
3·1 운동
3·1 운동은 1919년 일본의 무단 통치에 저항하여 시작된 한국의 독립운동으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일본의 무력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
1919년 한국 -
2·8 독립 선언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 선언은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며 3·1 운동의 기폭제가 된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
일제강점기 -
광복절
광복절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기념하는 날로서, 대한민국에서는 1945년 8월 15일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여 국경일 및 공휴일로 지정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의 날로 기념한다. -
일제강점기 -
국가총동원법
국가총동원법은 1938년 일본에서 전시 또는 유사시 국방 목표 달성을 위해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할 목적으로 제정되어 국민 징용, 물자 통제 등 광범위한 권한을 정부에 부여했으나, 1945년 폐지되었고 과도한 권한 위임과 자유 침해로 비판받았다.
2. 수립 과정
1919년 3·1 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확대하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이 추진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각료가 선출되고 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 같은 시기, 조선반도와 시베리아 등지에서도 여러 독립운동 조직이 수립되었으나, 이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통합되었다.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수립되었고, 4월 23일에는 경성에서 한성정부가 수립되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통합 문제를 제기했고,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의 협상이 진행되었다. 원세훈이 임시의정원 대표로 상하이에 와서 협상했다. 양측은 정부 중추는 한 곳에 두되, 하부 부서만 양측에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들을 통합하려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을 추진했고, 원세훈이 임시의정원 대표로 상하이에서 협상했다.
1919년 9월 11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성정부, 대한국민의회를 비롯한 국내외 7개 임시정부가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임시정부의 소재지는 상하이로 결정되었다.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정치 체제를 민주공화국으로 확정하였다. 이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제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임시 헌법은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 행정, 사법부를 분리하여 설치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대한'이라는 명칭은 대한제국의 국호에서 유래했으며, 정체를 나타내는 부분을 '제국'에서 공화제를 의미하는 '민국'으로 변경한 것이다.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국가를) 일으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임시 헌법 제8조는 "대한민국은 구 대한제국 황실에 우대 조치를 취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였다.
2.1. 수립 배경
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1910년~1945년)였다. 이 기간 및 그 이전부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단체들이 많이 나타났지만, 식민지 시대가 끝날 때까지 독립을 지지하는 한국인들이 자신들을 대표하는 유일한 조직으로 여기는 단체는 없었다.
1919년 4월 10일 개최된 임시의정원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이 결정되었다. 『대한』은 조선 역사상 마지막 독립국가였던 대한제국의 국호에서 유래하며, 정체를 나타내는 부분을 『제국』에서 공화제 국가를 의미하는 『민국』으로 변경한 것이다.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국가를) 일으켜야 한다. (『대한』은) 일본에 빼앗긴 국호이므로,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라고 주장하여 임시정부의 명칭으로 『대한민국』이 채택되었다.
2.1.1. 민족자결주의와 국제 정세
1910년부터 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국인들의 분노가 커졌다. 이러한 소문은 3월 1일 황제의 장례식에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고, 2천만 명의 한국인 중 310만 명, 즉 전체 인구의 약 10%가 시위에 참여했다. 7,500명이 사망하고 16,00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46,000명이 체포 및 구금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한청년당은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한국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다. 김규식은 언더우드 아카데미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았으며,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뿐만 아니라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신한청년당 명의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 독립 청원서를 전달했고, 1919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의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갔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후 김규식은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를 대표할 자격을 얻기 위해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김규식의 파리 강화 회의 방문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김규식은 파리로 떠나기 전 신한청년당원들에게 독립 시위를 벌일 것을 지시하며, "파리에 가더라도 서양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일본의 지배를 폭로하고 알리려면 한국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의 지시는 1919년 3·1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1919년 4월 10일 개최된 임시의정원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이 결정되었다. 『대한』은 조선 역사상 마지막 독립국가였던 대한제국의 국호에서 유래하며, 정체를 나타내는 부분을 『제국』에서 공화제 국가를 의미하는 『민국』으로 변경한 것이다.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국가를) 일으켜야 한다. (『대한』은) 일본에 빼앗긴 국호이므로,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라고 주장하여 임시정부의 명칭으로 『대한민국』이 채택되었다.
2.1.2. 고종 독살설과 민족적 분노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이 소문은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에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고, 3·1 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2.1.3. 3·1 운동과 독립선언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일본 황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이러한 소문은 1919년 3월 1일 황제의 장례식에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이것이 3·1 운동이다. 당시 2천만 명의 한국인 중 310만 명, 전체 인구의 약 10%가 시위에 참여했다. 사망자는 7,500명, 부상자는 16,000명, 체포 및 구금자는 46,000명에 달했다. 3월에 시작되어 5월까지 지속된 이 항쟁에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도 포함되었지만, 실제로는 일본 경찰에 의해 억류되었다.
일본의 폭력적인 진압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한반도를 탈출했고, 그중에는 나중에 한국 공산당(KPG) 창립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한국 독립을 약속받고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다. 김규식은 언더우드 아카데미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았고, 여러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재였다. 그는 신한청년당 명의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 독립 청원서를 전달했고, 1919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의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갔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다.
김규식은 파리의 신한청년당과 연락하며 로비 자금을 모았다. 김규식의 주장에 고무된 신한청년당은 사람들을 한국으로 보내 함태영과 조만식 등 국내 지도자들과 만났다. 김규식의 독립 시위 지시는 1919년 3월 1일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2.2. 각지의 임시정부 수립 (1919)
3·1 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확대하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이 추진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각료가 선출되고 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 같은 시기, 조선반도와 시베리아 등지에서도 여러 독립운동 조직이 수립되었으나, 이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통합되었다.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수립되었고, 4월 23일에는 경성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통합 문제를 제기했고,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의 협상이 진행되었다.
원세훈이 임시의정원 대표로 상하이에 와서 협상했다. 양측은 정부 중추는 한 곳에 두되, 하부 부서만 양측에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단일 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는 강했고, 결국 1919년 9월 11일, 러시아 연해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경성 한성임시정부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통합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외 각지의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을 대표하는 단일 통합 정부로 발전했다.
2.2.1. 대한국민의회 (노령 임시정부)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수립되었다. 이는 최초의 임시정부로,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었다. 대한국민의회는 재정적으로 초기에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당시 금액으로 200만 루블의 무상 지원을 받는 등 풍부한 자금이 있었다.
2.2.2. 상해 임시정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상하이는 당시 국제도시로서, 독립운동을 위한 외교 활동과 정보 수집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상하이는 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광둥 정부의 지원 중심지이기도 했다. 또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외교관들이 있어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상하이에는 독립운동 사무소들이 몰려들었다.
1919년 여름, 상하이의 독립운동은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서병호, 조승형, 조동호, 박찬익, 손우혁 등은 한국, 만주, 러시아 연해주, 미주 지역의 정부들과 접촉했다. 상하이의 독립 사무소들은 프랑스 조계를 중심으로 해외 인사들의 숙소를 제공하고, 한국인들의 친목 모임을 조직하여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 무렵 이동휘,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조성환, 조상황 등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명망 높은 독립 지부들이 상하이로 와서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1919년 4월 10일, 1,000명의 중국인과 신한청년당원들이 상하이에 있는 프랑스계 거주지 “김신부로(Route Pere Robert)”에서 주요 행동 주체가 되었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채택하여 민주 공화국을 선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참여자는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 여운형, 조성환(국방장관), 김철, 선우혁, 한진교, 장덕수, 조동호, 서병호, 김인전 등이었다. 남형우, 신익희,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조소앙, 김대지 등 30명이 참여했다. 또한 김구, 이동녕이 수립에 참여했고,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은 1919년 4월부터 9월 사이에 임명되어 상하이로 들어왔다. 황기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프랑스 지부의 서기장이 되었다.
이승만을 국무총리 겸 행정 책임자로 임명한 후, 안창호를 내무부장, 김규식을 외무부장, 이동휘를 국방부장, 이시영을 법무부장, 문창범을 교통부장, 최재형을 재무부장 등 6명의 장관을 임명했다. 11월 11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1957년 4월 22일에는 8도 대표와 러시아, 중국, 미국 대표들이 참석한 제2차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이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이동녕을 의장으로, 손정도를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의정원은 의안 심의 및 임시 대통령 선출 등 국회와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
2.2.3. 한성정부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 13도 대표들이 모여 한성정부를 수립했다. 한성정부는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을 대표하는 의미를 가졌다. 이는 3·1 운동 직후 독립운동의 지속과 확대를 위해 국내외 각지에서 정부 수립이 추진되던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당시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1일에 이미 수립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는 국내외의 여러 독립운동 조직들을 통합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고, 1919년 9월 11일에는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경성의 한성임시정부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통합되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외의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을 대표하는 단일 통합 정부로 발전하였다.
2.3. 임시정부 통합 (1919)
3·1 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면서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안창호, 이승만 등 대한국민회 지도자들은 상하이를 독립운동 중심지로 만들고 임시정부 운영을 시작했다. 안창호는 국무총리 서리로서 임시정부 체제를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상하이는 교통 요충지이자 광둥 정부 지원을 받았고,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외교관들이 있어 일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선반도 내 여러 독립파 조직은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에 통합되었다. 1937년 8월, 난징에서 한국국민당(김구), 한국독립당(홍진), 조선혁명당(지청천) 등이 모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다.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는 다음과 같다.
2.3.1. 통합 논의와 한성정부 중심 통합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들을 통합하려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러시아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와의 통합을 추진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의 협상이 이루어졌고, 임시의정원 대표로 선출된 원세훈이 상하이로 와서 협상을 진행했다.
양측은 정부의 핵심 기능을 한 곳에 집중시키고, 하부 부서만 양쪽에 배치해야 한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했다. 이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통합 의지는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구체적인 통합 방식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성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결국 1919년 9월 11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성정부, 대한국민의회를 비롯한 국내외 7개 임시정부가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임시정부의 소재지는 상하이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외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을 대표하는 단일 통합 정부로 발전하게 되었다.
2.3.2. 대한민국 임시 헌법 제정과 민주공화제 채택
1919년 9월 11일,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정치 체제를 민주공화국으로 확정하였다. 이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제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임시 헌법은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과 경성 한성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통합되면서 제정되었다.
임시 헌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제2조: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한다.
* 제3조: 대한민국 국민은 남녀, 빈부 차별 없이 평등하다.
* 제4조: 대한민국 국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이동, 신체 및 재산의 자유를 누린다.
* 제5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격을 갖춘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
* 제6조: 대한민국 국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를 진다.
* 제7조: 대한민국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신의 뜻에 근거한 정신을 세계에 행사하고, 인류 문화와 평화에 더욱 기여한다.
* 제8조: 대한민국은 구 대한제국 황실에 우대 조치를 취한다.
* 제9조: 사형, 태형 및 매춘 제도는 폐지한다.
*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1년 이내에 국회를 소집한다.
이 헌법은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 행정, 사법부를 분리하여 설치하였다.
2.4. 임시정부 수립의 주체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확대하기 위해 국내외 각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추진되었다. 당시 상하이에는 많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들은 임시 의정원을 설립하고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각료를 선출했다. 그리고 임시 헌장을 제정하여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의 주요 인물로는 안창호와 이승만이 있다. 안창호는 상하이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만들고 임시정부 운영을 시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한국 독립을 약속받고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다. 김규식은 언더우드 학원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았으며, 여러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재였다. 그는 신한청년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로 한국 독립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임시정부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후 김규식은 한국 정부를 대표할 자격을 얻기 위해 임시정부 구성을 추진했다.
김규식은 파리의 신한청년당과 연락하며 독립 시위를 지시했고, 이는 3·1 운동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참여자는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 여운형, 조성환(국방장관), 김철, 선우혁, 한진교, 장덕수, 조동호, 서병호, 김인전 등이었다. 남형우, 신익희,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조소앙, 김대지 등 30명이 참여했다. 김구, 이동녕이 수립에 참여했고,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은 1919년 4월부터 9월 사이에 임명되어 상하이로 들어왔다. 황기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프랑스 지부의 서기장이 되었다.
구한말 인물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김가진은 3·1 운동 이후 대동단이라는 비밀 독립 단체를 결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고문으로 활동했다.
고종의 아들 의화군은 임시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고 망명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에 체포되어 귀국당했다. 의화군은 로아노크 대학교에서 김규식과 관계를 맺으며 대한민국 독립 운동을 생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려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5. 대한제국의 계승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대한'이라는 명칭은 조선의 마지막 독립국가였던 대한제국의 국호에서 유래했으며, 정체를 나타내는 부분을 '제국'에서 공화제를 의미하는 '민국'으로 변경한 것이다. 임시정부의 명칭 결정 과정에서 이운형은 "조선 망국 시의 국호를 감히 부활시킬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국가를) 일으켜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대립했다. 결국 임시의정원 참가자 대다수가 신석우의 의견에 동의하여 '대한민국'이 국호로 결정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헌법에는 대한제국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임시 헌법 제8조는 "대한민국은 구 대한제국 황실에 우대 조치를 취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였다.
3. 주요 활동
신한청년당은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청원했다. 김규식은 언더우드 아카데미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아 영어, 프랑스어 등 여러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신한청년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임시정부 수립 전이라는 이유로 회의 참석은 좌절되었다. 이후 김규식은 한국 정부 대표 자격을 얻기 위해 임시정부 구성에 힘썼으며, 그의 파리 강화 회의 참가는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김규식은 출발 전 신한청년당원들에게 독립 시위를 벌일 것을 지시하며, 파리에서 자신이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파리의 신한청년당과 무선 연락을 통해 로비 자금을 모으고, 국내에서는 함태영, 조만식 등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의 독립 시위 지시는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는 김규식, 여운형, 조성환(국방장관), 김철, 선우혁, 한진교, 장덕수, 조동호, 서병호, 김인전, 남형우, 신익희,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조소앙, 김대지 등 30여 명이 참여했다. 김구, 이동녕도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은 1919년 4월에서 9월 사이에 상하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황기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프랑스 지부 서기장을 맡았다.
1919년 6월, 내무총장 안창호는 연통제(조선 내지와의 비밀 연락망)를 조직하고 기관지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등 각종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1922년 1월부터 다음 달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에 여운형 등 간부들이 참가하여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독립 운동 지원을 얻어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시베리아파와 상하이파의 대립, 안창호 등의 “민력양성론”파와 이동휘 등의 “즉전즉결론”파의 대립, 이승만과 안창호의 대립 등 지도자 간의 갈등으로 혼란을 겪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급속히 세력이 약화되었다.
1925년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이후, 김구가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김구는 김원봉과 연명으로 “동지 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 통신”을 발표하고 중국 국민정부 장제스의 보호를 받는 데 성공한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우리 민족 운동사 위에 파벌 항쟁으로 인한 참담한 실패의 경험과, 눈앞에 중국 민족의 마지막 필승을 향해 매진하고 있는 민족적 총단결의 교훈으로부터, 종전에 범한 여러 가지 오류와 잘못을 통감하고, 여기에 두 사람은 신성한 조선 민족 해방의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 장래 동심협력할 것을 동지 동포 제군 앞에 고백한다.
김구는 활동 거점을 난징에서 후난성 장사로 옮기고, 1938년부터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매월 2000원의 자금 지원을 받는 동시에 국민정부의 개입을 이용하여 주도권을 강화했다. 1940년, 중국 국민정부는 김구의 요청에 따라 충칭시 교외의 토교 지역에 한국인 거주구를 마련하고, 한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거점을 이동했다.
1941년 12월 9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지만, 이는 일본 정부에 포고 문서가 전달되지 않았고, 실효성은 전혀 없었다. 1942년,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독립 운동 분파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군부의 통일이 실현되었다. 이후, 미국의 전략사무국(OSS)과 협약을 맺고, 광복군의 특무 공작 훈련 “(Eagle Project, 독수리 작전)”을 시작하여 3월에 앨버트 웨데마이어 중국 전구 사령관의 최종 승인을 얻었다. 클라이드 사전트(Clyde Sargent) 대위 지휘하에 5월 1일부터 8월 4일까지 시안 비행장에서 본격적인 훈련을 실시했다. 8월 9일에는 김구와 윌리엄 도노반의 방문을 받고, 침투 부대를 이끌 윌리엄 버드(William Bird) 중국 전구 OSS 부사령관은 대원들에게 출격 대기 명령을 내렸으나, 8월 10일에 갑자기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 소식을 접하게 되어 OSS와 광복군은 작전 변경을 강요받았다.
한반도가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된 1945년 직후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파 간부들은 한국민주당 등 국내 민족주의 지도자들과의 회합에서 “국외에서 독립 운동에 헌신한 자들을 제외하고, 특히 일제 치하 한반도에서 살았던 자들은 모두 친일파다”라고 욕했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수립을 1948년으로 보고 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은 김구의 민족주의 세력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미군정 하에서도 많이 기용하고, 임시정부 계열이지만 김구의 정적이었던 이승만의 정권이 수립되도록 조장했다.
3.1. 상하이 시기 (1919~1932)
신한청년당은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한국 독립을 청원했다. 김규식은 언더우드 아카데미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고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신한청년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임시정부 수립 전이라는 이유로 회의 참석은 좌절되었다. 이후 김규식은 한국 정부 대표 자격을 얻기 위해 임시정부 구성에 힘썼다. 김규식의 파리 강화 회의 참가는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김규식은 파리에서 신한청년당과 무선 연락을 통해 로비 자금을 모으고, 국내에서는 함태영, 조만식 등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독립운동을 다방면으로 지원했다. 그의 독립 시위 지시는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는 김규식, 여운형, 조성환(국방장관), 김철, 선우혁, 한진교, 장덕수, 조동호, 서병호, 김인전, 남형우, 신익희,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조소앙, 김대지 등 30여 명이 참여했다. 김구, 이동녕도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은 1919년 4월에서 9월 사이에 상하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황기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프랑스 지부 서기장을 맡았다.
3.1.1. 초기 활동과 조직 정비
1919년 6월, 내무총장 안창호가 취임하여 국내와의 비밀 연락망인 연통제를 조직하였다. 또한 기관지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여론을 조성하는 등 각종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3.1.2. 한성정부 승인-개조 논란과 파벌 갈등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합 직후, 이동휘, 안창호, 이동녕 등 각 파벌 간의 주도권 경쟁이 심화되었다. 특히, 1925년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이후, 김구가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지도자 간의 갈등은 임시정부의 혼란을 야기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임시정부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임시정부는 시베리아파와 상하이파의 대립, 안창호 등의 “민력양성론”파와 이동휘 등의 “즉전즉결론”파의 대립, 그리고 이승만과 안창호의 대립 등 지도자 간의 갈등으로 혼란을 겪었다.
3.1.3.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 논란
1919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자, 이승만은 미국에서 국제연맹 위임통치를 청원했다.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은 신채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비판을 받았으며, 이는 임시정부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시베리아파와 상하이파의 대립, 안창호 등의 “민력양성론”파와 이동휘 등의 “즉전즉결론”파의 대립, 그리고 이승만과 안창호의 대립 등 지도자 간의 갈등으로 혼란을 겪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급속히 세력이 약화되었다.
3.1.4. 이승만 탄핵과 임시정부 지도 체제의 변화
1919년 9월 통합된 임시정부는 국무총리에 이동휘를 선출하였고, 1920년 이동휘가 임시정부를 떠나자 이동녕, 신규식, 노백린이 국무총리 대리를 맡았다. 국무총리 대리 체제는 1922년 이승만의 대통령제로 개편되었고, 1925년에는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925년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이후, 김구가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1926년 말에 구성된 김구 내각은 1927년 집단 지도 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되었다.
3.1.5. 국민대표회의 개최와 창조파, 개조파 갈등
1919년 6월, 안창호가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연통제(조선 내지와의 비밀 연락망)를 조직하고 기관지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등 각종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1922년 1월부터 다음 달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에 여운형 등 간부들이 참가하여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독립 운동 지원을 얻어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시베리아파와 상하이파의 대립, 안창호 등의 “민력양성론”파와 이동휘 등의 “즉전즉결론”파의 대립, 그리고 이승만과 안창호의 대립 등 지도자 간의 갈등으로 혼란을 겪었다. 결국,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 임시정부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3.1.6. 무장독립운동단체 간의 갈등과 3부 통합 시도
1920년대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은 이념과 노선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갈등은 독립운동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요인이었다.
임시정부는 시베리아파와 상하이파의 대립, 안창호 등의 “민력양성론”파와 이동휘 등의 “즉전즉결론”파의 대립, 그리고 이승만과 안창호의 대립 등 지도자 간의 갈등으로 혼란을 겪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급속히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 지역에서는 3부 통합 시도가 있었다. 3부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말한다. 이들 단체는 통합을 통해 독립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과 내부 분열로 인해 실패하였다.
3.1.7. 한국독립당 결성과 임시정부 강화 노력
1930년, 이동녕, 안창호 등은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는 임시정부가 시베리아파와 상하이파의 대립, 안창호 등의 “민력양성론”파와 이동휘 등의 “즉전즉결론”파의 대립, 그리고 이승만과 안창호의 대립 등 지도자 간의 갈등으로 혼란을 겪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급속히 세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3.2. 임시정부 이동 시기 (1932~1940)
1925년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이후, 김구가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김구는 김원봉과 연명으로 “동지 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 통신”을 발표하고 중국 국민정부 장제스의 보호를 받는 데 성공한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우리 민족 운동사 위에 파벌 항쟁으로 인한 참담한 실패의 경험과, 눈앞에 중국 민족의 마지막 필승을 향해 매진하고 있는 민족적 총단결의 교훈으로부터, 종전에 범한 여러 가지 오류와 잘못을 통감하고, 여기에 두 사람은 신성한 조선 민족 해방의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 장래 동심협력할 것을 동지 동포 제군 앞에 고백한다.
임시정부는 시베리아파와 상하이파의 대립, 안창호 등의 “민력양성론”파와 이동휘 등의 “즉전즉결론”파의 대립, 그리고 이승만과 안창호의 대립 등 지도자 간의 갈등으로 혼란을 겪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급속히 세력이 약화되었다.
1941년 12월 9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지만, 이는 일본 정부에 포고 문서가 전달되지 않았고, 실효성은 전혀 없었다. 1942년,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독립 운동 분파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군부의 통일이 실현되었다. 이후, 미국의 전략사무국(OSS)과 협약을 맺고, 광복군의 특무 공작 훈련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을 시작하여 3월에 앨버트 웨데마이어 중국 전구 사령관의 최종 승인을 얻었다. 클라이드 사전트(Clyde Sargent) 대위 지휘하에 5월 1일부터 8월 4일까지 시안 비행장에서 본격적인 훈련을 실시했다. 8월 9일에는 김구와 윌리엄 도노반의 방문을 받고, 침투 부대를 이끌 윌리엄 버드(William Bird) 중국 전구 OSS 부사령관은 대원들에게 출격 대기 명령을 내렸으나, 8월 10일에 갑자기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 소식을 접하게 되어 OSS와 광복군은 작전 변경을 강요받았다.
3.2.1. 임시정부 피난과 중일 전쟁 발발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항저우,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충칭으로 이동하였다.
3.2.2. 중화민국과의 협력 강화
1938년부터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매월 2000원의 자금 지원을 받았으며, 국민정부의 개입을 통해 주도권을 강화했다. 1940년에는 중국 국민정부의 요청으로 충칭시 교외의 토교 지역에 한국인 거주구가 마련되어,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거점을 이동했다.
3.2.3.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과 좌우 합작 시도
1937년 중일 전쟁 발발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좌우 합작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1937년 8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에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대한독립당 등 여러 단체가 참여했다.
그러나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과의 갈등으로 인해 좌우 합작은 난항을 겪었다.
3.2.4. 남목청 사건과 임시정부의 위기
1938년, 김구가 활동 거점을 난징에서 후난성 장사로 옮긴 후,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통합 회의가 남목청에서 열렸다. 이 회의 도중 이운한의 저격 사건이 발생하여 김구, 현익철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임시정부의 통합 노력을 저해하고, 내부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2.5. 전국연합진선협회 결성과 좌우 합작 실패
1925년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이후, 김구가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김구는 김원봉과 연명으로 “동지 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 통신”을 발표하고 중국 국민정부 장제스의 보호를 받는 데 성공한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우리 민족 운동사 위에 파벌 항쟁으로 인한 참담한 실패의 경험과, 눈앞에 중국 민족의 마지막 필승을 향해 매진하고 있는 민족적 총단결의 교훈으로부터, 종전에 범한 여러 가지 오류와 잘못을 통감하고, 여기에 두 사람은 신성한 조선 민족 해방의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 장래 동심협력할 것을 동지 동포 제군 앞에 고백한다.
1939년, 김구와 김원봉은 좌우 합작을 위해 전국연합진선협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각 당파가 합류하여 설립된 경위로 인해 의견 통일이 어려웠다. 특히 민족주의파와 공산주의파의 대립은 심각하였고, 장제스의 개입으로 김구가 주도권을 잡자, 1940년 5월에 다음과 같은 당의를 발표하였다.
우리 한국은 5천 년의 자주 독립 국가이다. 일본의 강점 하에 놓여 적의 정치적 압제, 경제의 파멸, 문화의 말살을 당하며 멸망의 길을 걸어왔다. 내부에서는 민족의 자립을 실현하지 못했고, 외부에서는 세계의 공영을 도모할 수 없었다. 본당은 여기에 혁명적 수단을 통해 일본의 침략 세력을 섬멸하고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다. 정치·경제·교육의 평등 아래 새로운 민주 국가를 건설한다. 내부에서는 국민 개인의 평등한 삶을 보장하고, 외부에서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사이의 평등을 실현하며, 더 나아가 세계는 하나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국 각 정당 간의 이념 차이와 주도권 다툼으로 인해 전국연합진선협회는 실패하였다.
3.2.6. 한국독립당 통합과 임시정부 여당 체제 구축
1940년,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이 통합되어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체제가 구축되었다.
3.3. 충칭 시기 (1940~1945)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9일 일본 제국과 독일을 포함한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한국광복군은 중국 전선과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연합군 작전에 참여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중국, 미국, 영국은 카이로 회담에서 한반도 해방을 보장했으며, 이는 포츠담 회담에서 재확인되었다.
1945년 8월, 소련의 대일 참전으로 소련군은 한반도로 진격했지만,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소련군은 8월 24일에 38선에 도달했고, 미군은 9월 8일에 부산에 상륙했다. 조선총독부는 소련이 아닌 미국에 한반도 통치를 이양하기 위해 여운형에게 협력을 요청했고,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거쳐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신정부에 참여했지만, 조선공산당 등 각 파벌과의 대립으로 신정부는 단기간에 붕괴되었다. 이후, 한반도를 통치하는 주한미군사령부 군정청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체되었다.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에게 국가 승인을 받지 못했다. 전후에도 한반도의 정부로 귀국하지 못했고, 국제연합의 창설 회원국이 될 수도 없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등 여러 강화회의에 참가할 수 없었다.
1919년 6월, 내무총장에 안창호가 취임하여 연통제(조선 내지와 비밀 연락망)를 조직하고 기관지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등 각종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1922년 1월부터 다음 달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에 여운형 등 간부들이 참가하여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독립 운동 지원을 얻어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했고, 한국은 몇 주 후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여 35년간의 일본 식민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독립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재확인되었다. 따라서 한국 임시정부의 한국에서 일본 통치 종식이라는 목표는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최종적으로 달성되었다.
이영훈은 한국의 역사 교과서와 연구서에서 1920년대부터 만주·중국에서 독립전쟁이 전개되었고,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에서 광복군으로 통합 재편되어 연합군과 합동으로 조선 진격을 준비하던 중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기회를 놓쳤다는 서술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만주·중국에서 일본군과 독자적인 전투를 벌인 것은 3·1 운동 이후 1920년 1년뿐이며, “모두 과대평가이며 실태와 동떨어진 서술”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3·1 운동 이후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의 서로군정서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지만, 이후 자유시 사변이 발생하여 독자적인 전선을 형성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1930년대 중국 공산당 통제하의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 소속 조선인의 투쟁은 일본과 중국의 전쟁의 일환이었으며, 미국·소련·중국 등 연합국의 어떤 정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고,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수립을 1948년으로 보고 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은 김구의 민족주의 세력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미군정 하에서도 많이 기용하고, 임시정부 계열이지만 김구의 정적이었던 이승만의 정권이 수립되도록 조장했다.
3.3.1. 충칭 정착과 김구 주석 체제 확립
1940년, 중국 국민정부는 김구의 요청에 따라 충칭시 교외의 토교 지역에 한국인 거주구를 마련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충칭으로 거점을 이동했다. 김구는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매월 2000원의 자금 지원을 받았으며, 국민정부의 개입을 이용하여 주도권을 강화했다. 임시정부는 주석 중심제를 채택하여 지도 체제를 강화하였고, 김구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3.3.2. 한국 광복군 창설과 대일 항전
1940년,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다. 총사령에는 지청천, 참모장에는 이범석이 임명되었다. 광복군은 1941년 12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중일전쟁과 동남아시아 전선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1942년에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하면서 전력이 강화되었다. 광복군은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협력하여 국내 진공 작전(일명 독수리 작전)을 준비했다. 1945년 5월부터 8월까지 시안 비행장에서 특수 훈련을 받았고, OSS의 윌리엄 버드 부사령관은 대원들에게 출격 대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8월 10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면서 작전은 변경되었다.
3.3.3.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합류와 좌우 합작
1942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에 합류하면서, 임시정부는 좌우 합작을 통해 독립운동 역량을 강화했다. 이는 장제스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조선민족혁명당의 군사 조직이었던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군부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3.3.4. 임시정부 승인 외교와 국제적 노력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 중국, 소련 등 연합국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고, 외교적 노력을 전개하였다. 김규식은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되어 한국 독립을 청원하였으나, 임시정부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후 김규식은 공식적인 한국 정부 대표 자격을 얻기 위해 임시정부 구성에 힘썼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국제연맹 위임통치를 추진했고, 김규식은 파리에서 전승국의 승인 하에 독립을 추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중국과 폴란드의 승인을 얻었다. 1944년에는 소련의 승인을 받았다.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은 1945년 4월 프랑스 정부가 임시정부를 비공식적으로 승인할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미국, 영국 등 세계 열강으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지는 못했다.
1919년 6월, 내무총장에 안창호가 취임하여 연통제(조선 내지와의 비밀 연락망)를 조직하고 기관지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등 각종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1922년 1월부터 다음 달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에 여운형 등 간부들이 참가하여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독립 운동 지원을 얻어냈다.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 제국과 독일을 포함한 추축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고, 한국광복군은 중국 전선과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연합군 작전에 참여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중국, 미국, 영국은 카이로 회담에서 미래의 한반도 해방을 보장했으며, 이는 포츠담 회담에서 재확인되었다.
4. 광복 이후
1945년 8월, 소련의 대일 참전으로 소련군은 한반도로 진격했지만,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소련군은 8월 24일 38선에 도달했고, 미군이 부산에 상륙한 것은 9월 8일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소련이 아닌 미국에 한반도 통치를 이양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원등류작이 여운형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여운형은 송진우, 안재홍 등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거쳐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신정부에 참여했지만, 조선공산당 등 각 파벌과의 대립으로 신정부는 단기간에 붕괴되었다. 이후, 한반도를 통치하는 주한미군사령부 군정청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체되었다.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은 1948년 헌법(제1공화국 헌법) 전문에서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밝히며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명시하였고, 이후 개정 헌법에서도 계승되어 현재의 제6공화국 헌법 전문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수립에 대해 국내 교육기관에서는 1919년으로 가르치지만, 국제법 및 외교적으로는 1948년으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이영훈은 한국의 역사 교과서와 연구서에서 1920년대부터 만주·중국에서 독립전쟁이 전개되었고,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에서 광복군(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 부문)으로 통합 재편되어 연합군과 합동으로 조선 진격을 준비하던 중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기회를 놓쳤다는 서술이 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만주·중국에서 일본군과 독자적인 전투를 벌인 것은 3·1 운동 이후 1920년 1년뿐이며, “모두 과대평가이며 실태와 동떨어진 서술”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 민족은 미국이 일본 제국주의를 강제로 해체하는 과정에서 해방되었다. 스스로 해방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했다.
* 3·1 운동 이후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의 서로군정서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지만, 자유시 사변 이후 독립군은 독자적인 전선을 형성하지 못했다.
* 1930년대 중국 공산당 통제하의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 소속 조선인의 투쟁은 일본과 중국의 전쟁의 일환이었다.
* 미국·소련·중국 등 연합국의 어떤 정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고,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중국 국민당은 광복군을 중국군 참모총장 통제하에 두었고, 조소앙 외무부장은 주화 미국 대사에게 “중국이 일본의 항복 후 다시 한국을 중국의 종주권 아래 두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설명을 하였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수립을 1948년으로 보고 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은 김구의 민족주의 세력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미군정 하에서도 많이 기용하고, 임시정부 계열이지만 김구의 정적이었던 이승만의 정권이 수립되도록 조장했다.
4.1. 광복 직후 혼란과 임시정부의 노력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여운형, 김규식 등 좌우합작 세력과 함께 자주적인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47년 3월,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선포하면서 냉전이 가속화되었고, 이는 한반도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4.2. 좌우 대립과 임시정부의 분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서는 신탁통치 문제(찬탁, 반탁)를 둘러싸고 좌우 세력 간의 분열이 일어났다. 이승만,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은 반탁 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반면, 김원봉, 김성숙 등의 좌익 세력은 찬탁 입장을 취하며 우익 세력과 대립하였다. 이러한 좌우 대립은 임시정부의 통합을 저해하고, 결국 임시정부의 분열로 이어지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4.3. 남북 협상과 단독 정부 수립 논쟁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은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소련은 북한에 소련 민정청을, 미국은 남한에 미군정을 수립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은 신탁통치에 반대했다. 중도좌파 정치인 여운형과 중도우파 정치인 김규식은 이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협력하기로 했다.
1947년 3월,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트루먼 독트린을 선포하여 냉전을 가속화했고, 이는 한반도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에 대해 국내 교육기관에서는 1919년으로 가르치지만, 국제법 및 외교적으로는 1948년으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좌파는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되었고, 주권 국가의 수립은 1948년에 해당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수립을 1948년으로 보고 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은 김구의 민족주의 세력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미군정 하에서도 많이 기용하고, 임시정부 계열이지만 김구의 정적이었던 이승만의 정권이 수립되도록 조장했다.
4.4.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임시정부 해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후, 김구와 이승만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헌법 (제1공화국 헌법) 전문에서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밝히며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명시하였다.
1987년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을 통해서도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치를 계승했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수정주의로 비판하고 있다.
대한민국 수립에 대해 국내 교육기관에서는 1919년으로 가르치지만, 국제법 및 외교적으로는 1948년으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진보·좌파는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되었고, 주권 국가의 수립은 1948년에 해당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5. 논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초기에는 재정적으로 풍족했으나, 점차 어려움을 겪었다. 1920년에는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 강도 행위 등에 의존하기도 했다. 1938년 이후에는 중국 정부의 지원금이 주요 재원이었다.
이영훈은 한국 역사 교과서와 연구서에서 독립전쟁에 대한 서술이 과장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는 3·1 운동 이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성과를 거두었지만, 자유시 사변 이후 독립군이 독자적인 전선을 형성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 소속 조선인들의 투쟁은 중국의 항일 투쟁의 일환이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고, 독립운동은 이념과 노선 갈등으로 분열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우리 민족은 미국이 일본 제국주의를 강제로 해체하는 과정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중국 국민당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될 조선에서의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여 광복군을 중국군 통제하에 두었다고 말한다. 조소앙 외무부장은 미국 대사에게 "중국이 일본의 항복 후 다시 한국을 중국의 종주권 아래 두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설명을 하기도 했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수립을 1948년으로 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김구의 민족주의 세력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미군정 하에서도 많이 기용하고, 임시정부 계열이지만 김구의 정적이었던 이승만의 정권이 수립되도록 조장했다.
5.1. 임정법통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 문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었다. 대한민국은 1948년에 수립된 이후, 1948년 헌법(제1공화국 헌법) 전문에서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밝히며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명시하였다. 이후 개정 헌법에서도 계승되어 현재의 제6공화국 헌법 전문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수립에 대해 국내 교육기관에서는 1919년으로 가르치지만, 국제법 및 외교적으로는 1948년으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진보·좌파는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되었고, 주권 국가의 수립은 1948년에 해당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임정법통론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명시되어 있지만, 그 해석과 적용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후 개정된 현행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명확히 명시함으로써, 임정법통론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