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온 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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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온 맥(1902년 3월 1일 ~ 1989년 5월 1일)은 미국의 배우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다. 유타주 매머드에서 조이 마리온 맥크리리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녀는 1920년대 무성 영화 시대에 배우로 활동하며, 특히 1926년 영화 《제너럴》에서 버스터 키튼과 함께 출연한 아나벨 리 역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배우 은퇴 후에는 시나리오 작가로 전향하여 여러 단편 영화의 각본을 썼다. 1940년대 후반에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기도 했으며, 1989년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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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온 맥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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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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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이 매리언 매크리어리 |
다른 이름 | 엘리너 린 |
국적 | 미국 |
출생일 | 1902년 4월 8일 |
출생지 | 미국유타주매머드 |
사망일 | 1989년 5월 1일 |
사망지 | 미국캘리포니아주코스타메사 |
묘지 | Pacific View Memorial Park |
직업 | 배우, 영화 각본가, 부동산 중개인 |
배우자 | 루이스 르윈 (1924년 결혼, 1969년 사별) |
자녀 | 1명 |
주요 작품 | 1926년 영화 《키튼 장군》의 아나벨 역 |
2. 영화 배우로서의 경력
마리온 맥(Marion Mack)은 유타주 매머드에서 조이 마리온 맥크리리(Joey Marion McCreery)로 태어났다.[1] 고등학교 졸업 후, 그녀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담아 사진과 함께 맥 세넷 감독에게 편지를 보냈다. 세넷의 매니저는 맥크리리에게 만약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에 오게 된다면 면접을 보게 해주겠다는 답장을 보냈다.[1] 맥크리리는 아버지와 계모와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할리우드로 가서 세넷의 키스톤 스튜디오에 몰래 들어갔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맥은 세넷에 의해 주당 25달러를 받고 "세넷의 목욕 미녀"로 고용되었다.[1] 그녀의 영화 데뷔작은 1921년작 ''어느 여름날''이었다.[10]
영화에서 맥크리리는 처음에는 본명을 사용했다. 1921년부터 1922년까지 그녀는 잭 화이트가 감독하고 라이지 콘리와 지미 아담스가 공동 출연한 몇 편의 단편 영화에서 엘리노어 린(Elinor Lynn)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2] 1923년경 그녀는 예명인 마리온 맥(Marion Mack)을 채택했다.[2]
세넷을 위해 여러 편의 단편 영화에 출연한 후, 그녀는 키스톤을 떠나 주당 100달러를 받고 머메이드 코미디를 제작하는 계약을 맺었다. 머메이드에서 그녀는 다양한 코미디 단편 영화에 출연했다. 그녀는 또한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여러 편의 서부극에서 배역을 맡았다. 1년 후, 그녀는 머메이드로 돌아왔다.
1923년, 그녀는 반자전적인 영화 ''영화의 메리''를 공동 집필하고 출연했다. 그 즈음 그녀는 예명인 "마리온 맥"을 채택했다. ''영화의 메리''는 흥행에 성공했고, 맥은 액션/범죄 드라마 ''가장 용감한 사람 중 하나''(1925)와 드라마 ''카니발 걸''(1926)에서 주연을 맡았다. 1926년 그녀는 미국 남북 전쟁 코미디 영화 ''제너럴''에서 버스터 키튼이 연기한 존니 그레이의 사이가 멀어진 여자친구인 아나벨 리 역으로 출연하여 가장 잘 알려진 배역을 맡았다.[3] 이 영화는 중간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예산이 높아 수익을 내지 못했다. 맥은 1928년 마지막 영화 ''영화랜드의 앨리스''에 출연했다.[4]
맥은 ''영화랜드의 앨리스''에 출연한 후 배우 일을 포기했는데, 오랜 기간 동안 촬영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제너럴''은 오리건주에서 6개월에 걸쳐 촬영되었다).[3] 배우 은퇴 후, 그녀는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여 메트로-골드윈-마이어와 워너 브라더스를 위해 단편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맥의 남편이자 영화 프로듀서인 루이 레윈이 이 영화들을 제작했다.[3][5] 그녀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중 하나는 키튼이 감독한 1938년 단편 ''유선형 스윙''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경력
마리온 맥(본명: 조이 마리온 맥크리리)은 유타주 매머드에서 태어났다.[1] 고등학교 졸업 후, 배우가 되고 싶어 맥 세넷 감독에게 사진과 편지를 보냈고, 그의 매니저로부터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에 오면 면접을 보게 해주겠다는 답장을 받았다.[1] 맥크리리는 아버지와 계모와 함께 할리우드로 가서 세넷의 키스톤 스튜디오에 몰래 들어갔다.[1]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맥은 세넷에게 주당 25달러를 받고 "세넷의 목욕 미녀"로 고용되었다.[1] 그녀의 영화 데뷔작은 1921년작 ''어느 여름날''이었다.[10]영화에서 맥크리리는 처음에는 본명을 사용했다.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잭 화이트가 감독하고 라이지 콘리와 지미 아담스가 공동 출연한 몇 편의 단편 영화에서 엘리노어 린(Elinor Lynn)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2][11] 1923년경 그녀는 예명인 마리온 맥을 채택했다.[2][11]
세넷을 위해 여러 편의 단편 영화에 출연한 후, 그녀는 키스톤을 떠나 주당 100달러를 받고 머메이드 코미디와 계약을 체결했다. 머메이드에서 그녀는 다양한 코미디 단편 영화에 출연했다. 그녀는 또한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여러 편의 서부극에서 배역을 맡았다. 1년 후, 그녀는 머메이드로 돌아왔다.[1]
1923년, 그녀는 반자전적인 영화 ''영화의 메리''를 공동 집필하고 출연했다. 그 즈음 그녀는 예명인 "마리온 맥"을 채택했다. ''영화의 메리''는 흥행에 성공했고, 맥은 액션/범죄 드라마 ''가장 용감한 사람 중 하나''(1925)와 드라마 ''카니발 걸''(1926)에서 주연을 맡았다.[1] 1926년 그녀는 미국 남북 전쟁 코미디 영화 ''제너럴''에서 버스터 키튼이 연기한 존니 그레이의 사이가 멀어진 여자친구인 아나벨 리 역으로 출연했다.[3][12] 이 영화는 중간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예산이 높아 수익을 내지 못했다. 맥은 1928년 마지막 영화 ''영화랜드의 앨리스''에 출연했다.[4][13]
맥은 ''영화랜드의 앨리스''에 출연한 후 배우 일을 포기했는데, 오랜 기간 동안 촬영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제너럴''은 오리건주에서 6개월에 걸쳐 촬영되었다).[3] 배우 은퇴 후, 그녀는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여 메트로-골드윈-마이어와 워너 브라더스를 위해 단편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3][5] 맥의 남편이자 영화 프로듀서인 루이 레윈이 이 영화들을 제작했다.[3][5][12][14] 그녀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중 하나는 키튼이 감독한 1938년 단편 ''유선형 스윙''이었다.
2. 2. 머메이드 코미디와 유니버설 스튜디오
마리온 맥은 유타주 매머드에서 조이 마리온 맥크리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맥 세넷 감독에게 배우가 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고, 세넷의 매니저는 할리우드에 오면 면접을 보게 해주겠다는 답장을 보냈다.[9] 맥은 아버지와 계모와 함께 할리우드로 가서 세넷의 키스톤 스튜디오에 몰래 들어갔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맥은 세넷에게 주당 25달러를 받고 "세넷의 목욕 미녀"로 고용되었다.[1] 그녀의 영화 데뷔작은 1921년작 ''어느 여름날''이었다.[10]영화에서 맥크리리는 처음에는 본명을 사용했다.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잭 화이트가 감독하고 라이지 콘리와 지미 아담스가 공동 출연한 몇 편의 단편 영화에서 엘리노어 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2] 1923년경 그녀는 예명인 마리온 맥을 채택했다.[2][11]
세넷을 위해 여러 편의 단편 영화에 출연한 후, 그녀는 키스톤을 떠나 주당 100달러를 받고 머메이드 코미디를 제작하는 계약을 맺었다. 머메이드에서 그녀는 다양한 코미디 단편 영화에 출연했다. 그녀는 또한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여러 편의 서부극에서 배역을 맡았다. 1년 후, 그녀는 머메이드로 돌아왔다.
2. 3. 《제너럴》과 전성기
마리온 맥은 유타주 매머드에서 조이 마리온 맥크리리(Joey Marion McCreery)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맥 세넷 감독에게 배우가 되고 싶다는 편지와 사진을 보냈고, 세넷의 매니저는 할리우드로 오면 면접 기회를 주겠다는 답신을 보냈다.[1] 맥은 아버지와 계모와 함께 할리우드로 가서 세넷의 키스톤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맥은 "세넷의 목욕 미녀"로 주당 25달러를 받고 고용되었다.[1] 그녀의 영화 데뷔작은 1921년작 ''어느 여름날''이었다.
영화를 시작할 당시에는 본명을 사용했다.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잭 화이트 감독의 몇몇 단편 작품에서 라이지 콘리와 지미 아담스와 공연했을 때는 엘리너 린(Elinor Lynn)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다.[2] 1923년경 그녀는 마리온 맥(Marion Mack)이라는 예명을 채택했다.[2]
세넷을 위해 여러 편의 단편 영화에 출연한 후, 그녀는 키스톤을 떠나 주당 100달러를 받고 머메이드 코미디와 계약을 맺고, 다양한 코미디 단편 영화에 출연했다. 그녀는 또한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여러 편의 서부극에서 배역을 맡았다. 1년 후, 그녀는 머메이드로 돌아왔다.
1923년, 그녀는 반자전적인 영화 ''영화의 메리''를 공동 집필하고 출연했다. ''영화의 메리''는 흥행에 성공했고, 맥은 액션/범죄 드라마 ''가장 용감한 사람 중 하나''(1925)와 드라마 ''카니발 걸''(1926)에서 주연을 맡았다. 1926년 그녀는 미국 남북 전쟁 코미디 영화 ''제너럴''에서 버스터 키튼이 연기한 존니 그레이의 사이가 멀어진 여자친구인 아나벨 리 역으로 출연했다.[3] 이 영화는 중간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예산이 높아 수익을 내지 못했다. 맥은 1928년 마지막 영화 ''영화랜드의 앨리스''에 출연했다.[4]
맥은 ''영화랜드의 앨리스''에 출연한 후 배우 일을 포기했는데, 오랜 기간 동안 촬영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제너럴''은 오리건주에서 6개월에 걸쳐 촬영되었다). 배우 은퇴 후, 그녀는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여 메트로-골드윈-마이어와 워너 브라더스를 위해 단편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맥의 남편이자 제작자인 루이 레윈이 이 영화들을 제작했다.[3][5] 그녀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중 하나는 키튼이 감독한 1938년 단편 ''유선형 스윙''이었다.
2. 4. 배우 은퇴와 시나리오 작가 활동
마리온 맥은 유타주 매머드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 후 맥 세넷 감독에게 배우가 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1] 할리우드로 오라는 답장을 받은 맥은 키스톤 스튜디오에 들어가 세넷에게 "세넷의 목욕 미녀"로 고용되어 영화계에 데뷔했다.[1] 초기에는 본명과 엘리노어 린(Elinor Lynn)이라는 예명을 사용했으나, 1923년경부터 마리온 맥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다.[2]세넷의 스튜디오를 떠나 머메이드 코미디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여러 단편 영화와 서부극에 출연했다.[2] 1923년, 자전적 영화 ''영화의 메리''를 공동 집필하고 출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2] 이후 ''가장 용감한 사람 중 하나''(1925), ''카니발 걸''(1926) 등에서 주연을 맡았다. 1926년 버스터 키튼과 함께 출연한 미국 남북 전쟁 배경의 코미디 영화 ''제너럴''은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3]
1928년 ''영화랜드의 앨리스''를 마지막으로 배우 생활을 은퇴한 맥은, 오리건주에서 6개월간 촬영된 ''제너럴'' 등의 장기 촬영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4] 이후 시나리오 작가로 전향하여 메트로-골드윈-마이어와 워너 브라더스에서 단편 영화 시나리오를 썼으며, 남편인 제작자 루이 레윈이 이 영화들을 제작했다.[3][5] 1938년에는 키튼이 감독한 단편 ''유선형 스윙''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3. 이후의 삶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단편 영화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맥의 남편 건강도 좋지 않아졌다.[4] 1949년 그녀는 캘리포니아주오렌지 카운티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했다.[4] 맥은 남편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코스타메사에 정착했다.[6] 두 사람은 비벌리힐스에도 저택을 마련하고, 루디 밸리, 클라라 보우를 비롯해 부부가 영화계에 있던 시절의 동료들과 교류를 이어갔다.[4]
1970년 영화사가 레이먼드 로하우어가 코스타메사의 자택에 맥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는데, 이는 《키튼 장군》의 재평가가 배경에 있었다.[7] 이 작품은 처음 공개되었을 때는 흥행이나 평론 면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후년에 재평가가 진행되어 버스터 키튼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되었다.[4] 이 작품의 상영을 돕는 형태로 맥은 다양한 영화제에서 작품 상영에 참석했으며, 이는 심장 질환으로 여행이 어려워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1978년 맥은 두 번의 심근 경색을 겪었다.[7] 맥은 1980년 제작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시리즈 《''할리우드''》에 출연하여 《키튼 장군》 촬영 당시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4]
3. 1. 부동산 중개업과 《제너럴》 재조명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단편 영화의 인기가 시들해졌고, 맥의 남편 건강도 악화되었다.[4] 1949년, 그녀는 캘리포니아주오렌지 카운티에서 부동산 중개업이라는 또 다른 직업을 시작했다.[4] 맥과 그녀의 남편은 캘리포니아주 코스타메사에 정착했다.[6] 부부는 또한 비벌리힐스에 저택을 소유했으며, 루디 밸리와 클라라 보우를 포함하여 영화 산업에서 일할 때 만났던 사람들과 계속 교류했다.[4]1970년, 영화 《제너럴》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면서, 영화 역사가 레이먼드 로하우어는 코스타 메사에 있는 맥의 집을 찾아냈다.[7] 이 영화는 처음 개봉했을 때는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후 관객을 찾았으며, 버스터 키튼의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인용되고 있다.[4] 맥은 영화를 지원하기 위해 심장 문제로 여행이 어려워질 때까지 여러 영화제에서 《제너럴》 상영에 참석했다. 1978년, 맥은 두 번의 심근 경색을 겪었다.[7] 그녀는 다큐멘터리 시리즈 《할리우드》(1980)에 출연하여 《제너럴》 촬영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4]
3. 2. 개인적인 삶과 사망
맥은 토머스 H. 잉스 스튜디오에서 미인대회에서 우승한 후 프로듀서 루이스 르윈을 만났다.[1][8] 그들은 1923년에 결혼하여 아들 라니를 낳았다.[1][8][9][17] 맥과 르윈은 르윈이 1969년에 사망할 때까지 결혼 관계를 유지했다.[4][13]1989년 5월 1일, 맥은 캘리포니아주 코스타메사에서 87세의 나이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6][15] 비공개 장례식을 치른 후, 맥은 코로나델마의 퍼시픽 뷰 메모리얼 파크에 묻혔다.
4. 작품 목록
유실된 영화
조이 맥크리리(Joey McCreery)로 출연
각본가
각본가
각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