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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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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지 궁전은 1888년 10월 7일에 낙성된 일본의 궁전으로, 도쿄 천도 후 황거로 사용되었던 옛 에도성 서쪽 마루에 건설되었다. 조시아 콘도르의 설계가 변경되어 교토 어소를 본뜬 화양 절충 양식의 목조 건축으로 지어졌다. 1889년 대일본 제국 헌법 발포식이 거행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쇼와 천황은 궁전 재건을 보류하고, 1968년 메이지 궁전 터에 현재의 황거 궁전이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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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궁전
개요
명칭궁궐 (메이지 궁궐)
구 명칭없음
용도천황의 공무, 국가적 행사, 거처
과거 용도없음
설계자없음
구조 설계자없음
설비 설계자없음
시공없음
건축주없음
사업 주체없음
관리 운영없음
구조 형식목조
부지 면적없음
건축 면적없음
연면적없음
상태소실
층수없음
높이없음
엘리베이터 수없음
호수없음
주차 대수없음
착공없음
준공1888년 (메이지 21년) 10월 7일
개관/개소없음
개축없음
해체1945년 (쇼와 20년) 5월 25일, 공습으로 소실
우편 번호없음
소재지없음
위도없음
경도없음
지도 국가 코드없음
문화재 지정없음
지정일없음
비고없음
관련 정보
관련 용어황거 (고쿄)
궁성 (규조)
니시노마루 어전
세이난 전쟁
기슈 번
아오야마 어소
야마자토마루
일본식 서양 절충
황거 신궁전
쇼와 궁전
이미지
메이지 궁전 중정. 뒤에 보이는 것이 호메이덴, 왼쪽에 지구사의 방
메이지 궁전 중정. 뒤에 보이는 것이 호메이덴, 왼쪽에 지구사의 방

2. 건설의 경위

1868년(메이지 원년)부터 1869년(메이지 2년)에 걸쳐 진행된 도쿄 천도로 옛 에도성 서쪽 마루 어전이 황거가 되었으나, 1873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곧바로 새 궁전 조영이 정부에 의해 상주되었으나, 서남 전쟁 전비 등 재정 부담이 커서 국내 정비가 우선이라는 메이지 천황의 뜻에 따라 보류되었다. 이 때문에 옛 기슈 번에도 번저였던 아오야마 어소가 임시 황거가 되었다. 그러나 아오야마 어소에서는 의식과 전례를 치르기에 어려움이 있어, 마침내 궁전 조영이 칙허되었다.

새로운 궁전(메이지 궁전)은 옛 에도성 서쪽 마루에 건설되었으며, 1888년 10월 7일에 완공되었다. 당초에는 조시아 콘도르의 설계에 의한 석조 건축으로 계획되었지만, 궁내성내공료와의 갈등 및 예산 문제로 교토 어소를 본뜬 와풍 외관에 의자와 샹들리에가 있는 양풍 내장을 갖춘 화양 절충 양식의 목조 건축이 되었다.[1] 바닥은 쪽매 마루, 천장은 접어 올린 칠 격자 천장, 모란 당초 무늬 외에 다채로운 채소와 과일 등으로 장식된 벽과 난간이 있었다. 다카무라 고운, 이시카와 미쓰아키, 쓰카다 슈쿄 등이 창작 및 지휘에 관여했다.

당초 사업 예산은 총액 250만이었지만, 건설 과정에서 사업 규모가 확대되어 최종적인 총 사업비는 4153067.064JPY에 달했다.

메이지 궁전에서는 천황이 일상 업무를 보는 어좌소나 의식 장소인 정전, 봉황의 간, 호메이덴 등의 '''표궁전'''과 산리마루에 세워진 천황의 거처인 '''오쿠궁전'''이 연결되어 하나의 건물을 구성하고 있었다. 또한 궁내성 청사도 신축되어 궁전과 복도로 이어져 있었다.

완공 다음 해인 1889년 대일본 제국 헌법 발포식은 메이지 궁전 정전에서 거행되었다.

3. 전재로 인한 소실

소실 후(1947년)의 메이지 궁전 터


1945년 5월 25일 도쿄 대공습(야마노테 대공습)으로 참모본부가 폭격되어 불탔을 때, 불티가 메이지 궁전에 옮겨 붙어 전소되었다. 궁전 소화 작업에 나섰던 경시청 특별 소방대 19명이 순직했지만, 쇼와 천황 등은 후키아게 어원 내의 어문고로 피난하여 무사했다[2]

메이지 궁전 소실 후, 천황은 어문고를 임시 어소로 하고 궁내청 청사 3층을 임시 궁전으로 했다. 쇼와 천황은 "국민이 전재로 인해 살 집도 없고, 생활도 제대로 되지 않는 때에 새로운 궁전을 짓는 것은 할 수 없다"라며 국민 생활 안정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궁전 재건에 제동을 걸었다.

메이지 궁전 터에는 1968년 현재의 궁전(신궁전)이 건설되었다.

2019년 10월 18일 발매된 천황 즉위 기념 우표에는 잃어버린 메이지 궁전의 정전 천장 그림과 정면 옥좌 상부 장막 그림이 사용되었다.

1945년 12월 미야기현구리하라군 청년단이 메이지 궁전 잿더미를 정리한 것이 황거 근로 봉사의 시초로 여겨진다.[3][4]

4. 메이지 궁전의 사진

정전


호메이덴


치구사의 방


치구사의 방, 오른쪽은 호메이덴


표어좌소

참조

[1] 간행물 皇室の名品 日本経済新聞社 2013-11-09
[2] 문서 御文庫は鉄筋コンクリート造りの堅固な建物で、東京への空襲が激しくなってからは天皇はここに避難していた。
[3] 뉴스 (ニュースQ3)陛下にお会いできるかも…期待を胸に勤労奉仕団 朝日新聞 2012-11-29
[4] 뉴스 終戦直後に始まった皇居清掃奉仕団、延べ100万人突破 読売新聞 1990-04-04
[5] 문서 차를 즐기거나 노(연극), 달맞이 등 기예를 즐기는 장소
[6] 문서 일본풍과 서양풍이 혼재된 일본의 문화 양식 가운데 하나. 양식과 일본식 음식이 같이 나왔을 때도 이 용어를 사용.
[7] 문서 단 메이지 궁전 자체는 연합군의 폭격 목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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