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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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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명(文明)은 684년 당 예종이 즉위한 후 사용된 연호이다. 684년 2월에 사성에서 문명으로 개원되었으며, 같은 해 9월에 광택으로 다시 개원되었다. 문명 연호 사용 기간 동안 무측천은 칭제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했고, 밀고를 장려하여 정국을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폐태자 현을 죽이는 등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했다.

2. 연호 사용 배경

684년 2월 27일, 태후 무씨는 중종을 폐하고 여릉왕으로 삼았으며, 중종의 형제인 예왕 단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였다(당 예종).[11] 태후가 모든 정치를 결정하였고, 예종은 조정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다.[12] 같은 날, 천하에 크게 사면하고 연호를 '''문명'''으로 고쳤다.[3][4][5][6][7][8]

2. 1. 개원

사성 원년 음력 2월 7일(684년 2월 27일)에 연호를 '''문명'''으로 개원하였다.[3][4][5][6][7][8]

2. 2. 연호의 반포

684년 2월 27일, 태후 무씨는 중종을 폐하고 여릉왕(庐陵王)으로 삼았으며, 중종의 형제인 예왕(豫王) 단(旦)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였다(당 예종).[11] 태후가 모든 정치를 결정하였고, 예종은 조정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다.[12] 같은 날, 천하에 크게 사면하고 연호를 '''문명(文明)'''으로 고쳤다.

3. 주요 사건

684년 2월 27일, 당 예종 즉위 직후 당 중종 폐위에 가담했던 비기(飛騎)[13] 병사들이 포상을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술자리에서 "여릉왕을 섬기던 때만 못하다"고 말한 것이 밀고되었다. 이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밀고자는 5품 관직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밀고 풍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13]

예종 즉위 다음날(2월 28일), 태후 무씨는 폐제(중종)의 맏아들 황태손[14] 중조(重照)를 폐서인하고, 폐제의 장인 위현정(韋玄貞)을 흠주(钦州)[15]로 유배했다. 4월 22일에는 폐제 여릉왕을 방주(房州)[16]로, 4월 26일에는 균주(均州)[17]로 옮겨 연금했다. 이로써 폐제 세력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684년 2월 12일, 태후 무씨는 무성전(武成殿)에 거하며 황태후 존호를 받았다. 2월 15일, 예종을 황제로 책봉하고 자신전(紫宸殿)에서 주렴을 치고 칭제를 시작했다. 이는 사실상 '여성 황제'와 다름없는 지위였다.[18]

684년 2월 29일, 태후는 폐태자 현을 파주(巴州)[20]에서 자결하게 했다. 4월 6일, 현의 죽음을 애도하고 구신적에게 책임을 물어 첩주자사(叠州刺史)로 내쳤으나, 곧 복직시켰다. 4월 7일, 현을 옹왕(雍王)으로 추봉했다.[21]

3. 1. 밀고 장려

684년 2월 27일, 당 예종이 즉위한 날 당 중종의 폐위에 가담했던 비기(飛騎)[13] 열 명 정도가 모여 술을 마시던 중, 한 명이 "일찍이 우리가 세운 공에 대한 포상이 주어지지 않으니, 여릉왕을 섬기던 때만 못하구나(向知别无勳賞,不若奉廬陵)"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벗어나 동도(낙양)의 황궁 북쪽 궁문에 있는 우림군(羽林軍) 주둔지에 알렸다. 술자리에 있던 병사들은 체포되어 우림군 감옥에 갇혔다. 말을 처음 꺼낸 병사는 참수되었고, 나머지는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는 책임을 물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우림군에 알린 사람만이 5품 관직을 받았다. 이후 밀고 풍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13]

3. 2. 폐제 세력 숙청

예종이 즉위한 다음날인 문명 원년 2월 초파일 경신(양력 2월 28일) 태후 무씨는 폐제의 맏아들이었던 황태손[14] 중조(重照)를 폐서인시켰다. 이는 폐제 일가에 대한 신하와 백성들의 희망을 제거해버린 것이었다.

같은 날 측천무후는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 유인궤에게 서경(西京) 장안의 유수 업무를 전담할 것을 명하면서, 전임 서경유수로 폐제 여릉왕의 둘째 아들 중복(重福)에게 유인궤의 원래 임무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때 태후가 유인궤에게 보낸 편지에는 "한 고조 유방이 관중을 장악하고 소하에게 그곳의 관리 업무를 위임했던 전례에 따라 나 역시 그대에게 위임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유인궤는 태후에 상소를 올려 자신이 나이가 많고 기력도 쇠해서 유수직을 감당할 수 없다며 물러날 것을 청하면서, 한의 여태후가 정치를 그르쳐 패망을 초래한 일을 들어 무후에게 간언을 올렸다. 이에 무후는 조카인 비서감(秘書監) 무승사를 보내 태후의 옥새가 찍힌 밀지를 가지고 가서 다시금 유인궤를 달랬다고 한다(《자치통감》).

또한 태후 무씨는 폐제의 부인인 위씨의 아버지인 전 예주자사(豫州刺史) 위현정(韋玄貞)을 흠주(钦州)[15]로 유배해버렸다. 이로써 폐제의 외척 세력은 일소되었다. 같은 해 4월 22일 계유(양력 5월 11일) 태후는 폐제인 여릉왕을 동도에서 내쫓고 방주(房州)[16]로 보내버렸으며, 4월 26일 정축(양력 5월 15일) 다시 균주(均州)[17]로 옮기고, 예전 당 태종이 복왕(濮王) 태(泰)를 연금했던 저택에 가두어 버렸다. 이로써 폐제의 세력도 완전히 일소된다.

3. 3. 무후의 칭제(稱制)

684년 2월 12일 갑자(양력 3월 3일) 태후 무씨는 동도 황궁의 동쪽 편전인 무성전(武成殿)에 거하였고, 예종이 친왕과 국공 이하 대소 신료들을 거느리고 정식으로 태후 무씨에게 황태후(皇太后)라는 존호를 올렸다. 2월 15일 정묘(양력 3월 5일) 태후 무씨는 무성전 앞의 평대(平台) 위에서 조카인 예부상서 무승사를 보내 정식으로 예종을 황제로 책봉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태후는 늘 자신전(紫宸殿)으로 와서 황제의 자리 위에 앉아 자리 앞에 주렴과 자색의 휘장을 치고 정식으로 조정에 임해 칭제를 행하였다. 이는 태후 무씨 자신이 당 고종 재위 시절 황후(당시에는 천후라 불렸다)의 자격으로 조정에 참예하던 것을 계승한 것이었지만, 이미 사실상의 '여성 황제'나 다름이 없었다.[18]

2월 25일 정축(양력 3월 16일) 태후 무씨는 태상경(太常卿) 겸 검교예왕부장사(檢校豫王府長史) 왕덕진(王德眞)을 시중(侍中)으로, 중서시랑 검교예왕부사마(檢校豫王府司馬) 유의지(劉祎之)를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삼았다. 이들 두 사람은 예종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인 예왕 시절 왕부(王府)의 막료들을 통솔하던 자들이었고, 우선적으로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19]

3월 초닷새 정해(양력 3월 26일) 태후는 기왕(杞王) 상금(上金)을 필왕(毕王), 파양왕(鄱陽王) 소절(素節)을 갈왕(葛王)으로 고쳐 봉했다. 4월 초열흘 신유(양력 4월 29일) 다시 필왕 상금을 택왕(澤王)으로 고쳐 봉하고 그를 소주자사(蘇州刺史)로 제수했으며,[18] 갈왕 소절은 허왕(許王)으로 고쳐 봉하고 강주자사(绛州刺史)로 제수하였다.[19]

3. 4. 폐태자 현의 죽음

684년 2월 29일, 태후는 좌금오장군(左金吾將軍) 구신적(丘神勣)을 시켜 파주(巴州)[20]에 유배 중이던 자신의 둘째 아들 폐태자 현의 저택을 급습, 포위했다. 구신적은 현을 파주 공관 별실에 가두고 3월 28일 그를 겁박해 자결하게 했다. 《자치통감》은 이 사건을 3월의 일로 기록했는데, 이는 현의 죽음이 동도에 보고된 시점일 가능성이 있다.[21]

4월 6일, 태후 무씨는 백관들을 거느리고 현복문(顯福門)에 나와 현의 죽음을 애도하는 예를 거행하고, 구신적에게 책임을 씌워 첩주자사(叠州刺史)로 내쳤다. 다음 날인 4월 7일, 태후 무씨는 조서를 내려 죽은 황자 현을 옹왕(雍王)으로 추봉했고, 구신적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동도로 복귀해 좌금오장군으로 복직했다.

4. 연대 대조표

문명원년
서기684년
간지갑신


참조

[1] 문서
[2] 문서
[3] 문서
[4] 서적 구당서 https://zh.wikisourc[...]
[5] 서적 신당서 https://zh.wikisourc[...]
[6]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7] 웹사이트 천문우주지식정보 음양력변환 https://astro.kasi.r[...]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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