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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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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인궤는 수나라 말기인 602년에 태어나 당나라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 가난했지만 학문을 좋아했고, 당나라 무덕 연간에 관직에 진출하여 여러 보직을 거쳤다. 특히 백제 정벌과 백강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며, 고구려 정벌에도 참여했다. 이후 나당 전쟁에서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만년에 문창좌상에 이르렀으나 685년에 사망했으며, 사후에는 높은 관직에 추증되고 건릉에 배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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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궤
기본 정보
유인궤의 초상
유인궤의 초상
인궤(仁軌)
정칙(正則)
시호문헌(文憲)
출생602년
사망685년
신분당나라의 장군, 정치가
주요 활동백강 전투 승리
가계
아버지유경선(劉敬宣)
아들유흔(劉忻)
유전(劉佺)
관력
주요 관직대사헌(大司憲)
형부상서(刑部尙書)
문하성(門下省) 시중(侍中)
우상(右相)
봉작낙성현개국공(樂城縣開國公)
백강 전투
전투 참여 시기663년
직책좌우위대장군(左右衛大將軍)
상대왜국 수군
결과당나라의 승리
기타
관련 인물김인문
손인사

2. 약력

현경 5년(660년) 요동 정벌에서 조운(漕運)에 실패한 죄로 59세에 일개 병졸로 강등되었다. 같은 해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공격하여, 부하 유인원[7]의자왕을 사로잡는 공을 세워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용삭 원년(661년) 백제의 유신 귀실복신 등이 사비성을 탈환하려 시도하여, 수장 유인원을 포위했다. 이때 유인궤는 스스로 지원하여 검교대방주자사(検校帯方州刺史)를 제수받고 원군으로 향했다.

인덕 2년(665년) 고종태산에서 봉선을 행했을 때, 신라, 백제, 탐라, 왜 4개국 수령을 이끌고 참가하여 대사헌(大司憲)을 제수받고, 우상 겸 검교태자좌중호(検校太子左中護)에 진입했으며, 낙성현남(楽城県男)에 봉해졌다.

광택 원년(684년)에 낙성군공(楽城郡公)에 봉해졌다. 수공 원년(685년) 정월, 문창좌상(文昌左相) 동봉각난대삼품(同鳳閣鸞台三品)으로 재직 중에 사망했다. 향년 84세.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사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병주대도독(并州大都督)이 추증되었으며, 고종의 능묘인 건릉에 배장되었다.

2. 1. 생애 초기

인수 2년(602년)에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는 가난했지만 학문을 좋아했다고 한다. 당나라 건국 후 무덕 연간에 식주(지금의 신양)참군(息州参軍)이 되었고, 이후 진창현위(陳倉尉)로 전임되었다. 절충도위(折衝都尉) 노녕(魯寧)이라는 자가 횡포를 부리자, 유인궤는 그를 채찍질하여 살해했다. 태종이 심문하자, "폐하의 신하가 수치를 당하였기에 죽였습니다"라고 거리낌 없이 대답하여, 오히려 태종의 마음에 들어 함양현승(咸陽丞)에 임명되었다. 급사중까지 승진했지만, 권신 이의부에게 미움을 받아 청주자사(刺史)로 좌천되었다.[6]

2. 2. 백제 정벌과 백강 전투

663년 9월,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던 왜국(일본)의 가미쓰케누노 와카코(毛野稚子) 등 수군 2만 7천 명이 백강(白江)으로 나아가 당나라의 원병에 맞섰고, 8월에 양측은 백강 어귀에서 맞닥뜨렸다. 유인궤와 손인사가 지휘하는 당나라의 수군은 네 번의 전투에서 400여 척의 왜군 군선을 불사르고[6] 주류성을 함락시켰으며,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나고 백제의 왕자 충승(忠勝) 등은 신라에 항복하였다. 백강 전투에서 승리한 뒤 유인궤는 백제 옛 땅에 둔전(屯田)을 세우고 백제 유민들을 안무하기 위한 정책들을 폈다.

2. 3. 고구려 정벌과 나당 전쟁

668년 이적을 따라 고구려를 평정하고, 웅진도 안무대사 겸 패강도총관에 임명되었다.[6] 674년 계림도대총관으로서 신라를 공격하여(나당전쟁) 이듬해 2월 호로하를 건너 칠중성을 격파했다.[6] 같은 해 좌복야가 되어 조정에 참여했다.

당시 신라문무왕이 백제와 고구려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에 저항하고 있었다. 674년 당 고종은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선포하고 유인궤에게 신라 공격을 명했으나, 675년 문무왕이 사죄하고 조공을 바치자 철수하였다.

2. 4. 만년과 죽음

수나라 인수 2년(602년)에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는 가난했지만 학문을 좋아했다고 한다.[6] 당나라 건국 후 무덕 연간에 식주 참군이 되었고, 이후 진창현위로 전임되었다. 절충도위 노녕이라는 자가 횡포를 부렸기 때문에, 그를 채찍질하여 살해했다. 태종이 심문하자, "신(臣)이 모욕을 당했기에 죽였습니다"라고 거리낌 없이 대답한 까닭에, 오히려 태종에게 마음에 들어 함양현승에 임명되었다. 급사중에까지 승진하지만, 권신 이의부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 청주자사로 좌천된다.

현경 5년(660년) 요동 정벌에서 조운에 실패한 죄를 뒤집어쓰고, 59세에 일개 병졸로 강등되었다. 이 해,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공격하여, 부하 유인원[7]의자왕을 사로잡는 공을 세워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용삭 원년(661년)에 백제의 유신 귀실복신 등이 사비성을 탈환하려 시도하여, 수장 유인원을 포위했다. 이때, 유인궤는 스스로 지원하여 검교대방주자사를 제수받고 원군으로 향했다.

용삭 3년(663년) 9월, 백제 잔당을 지원하는 (일본)의 수군을 백강구에서 요격하여, 400여 척의 군선을 불태우는 대승을 거둔다(백강구 전투).[6] 더 나아가 백제 옛 땅의 여러 성을 평정하고, 둔전을 설치하여 서민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린덕 2년(665년) 고종태산에서 봉선을 행했을 때, 신라·백제·탐라·왜 4개국의 수령을 이끌고 참가하여, 대사헌을 제수받고, 우상 겸 검교태자좌중호에 진입했으며, 낙성현남에 봉해졌다.

총장 원년(668년)에는 웅진도 안무대사 겸 패강도총관이 되어, 이적을 따라 고구려를 평정했다. 금자광록대부를 제수받고, 태자좌서자 동중서문하삼품에 진입했다. 상원 원년(674년)에는 계림도대총관에 임명되어, 신라의 문무왕을 공격하여(나당 전쟁) 대승을 거두었고, 상원 2년(675년)에는 좌복야가 되어 조정의 정사에 참여했다. 광택 원년(684년)에 낙성군공에 봉해졌다. 수공 원년(685년) 정월, 문창좌상 동봉각난대삼품으로 재직 중에 사망했다. 향년 84세. 시호는 문헌이다. 사후, 개부의동삼사·병주대도독이 증직되었으며, 고종의 능묘인 건릉에 배장되었다.

3. 평가

유인궤는 당 고종 시기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백성을 다스리는 지혜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권력을 얻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모습도 보여준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도침과 복신 등이 주도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유인궤는 신라군과 협력하여 백제 저항군을 진압하고 사비성 포위를 푸는 데 성공했다.[1] 663년,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은 백강 전투에서 백제와 일본 연합군을 격파하고 백제 부흥 운동을 종식시켰다.[1] 유인궤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백제 지역을 안정시키고, 흑치상지와 사택상여 등 백제 장수들을 포용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등 뛰어난 행정 능력을 발휘했다.[1]

하지만, 유인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다른 인물들을 모함하거나 배신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특히, 이의부와의 갈등, 이경현을 함정에 빠뜨린 사건, 배염의 죽음에 대한 방관, 그리고 강사종을 모함하여 죽게 만든 사건 등은 그의 부정적인 면모를 드러낸다.[2][3]

677년, 토번의 위협이 증가하자, 고종은 유인궤에게 청해성 해동주에 있는 도하군(洮河軍)에 주둔하는 군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그러나 유인궤는 재상 이경현의 군사적 재능이 없음을 알면서도, 고종에게 이경현이 토번에 대한 군사 행동에 가장 적합한 장군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경현이 거절하자 고종은 이경현에게 유인궤의 지휘권을 넘겨주었고, 678년 이경현의 군대는 토번군에게 전멸당했다.

684년, 이적의 손자 이경업이 반란을 일으킨 후, 배염이 측천무후에게 황제의 권한을 예종에게 돌려줄 것을 조언하자 무후는 배염을 반역죄로 죽였다. 유인궤는 배염의 죽음 이후, 하급 관리인 강사종(姜嗣宗|강사종중국어)을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

3. 1. 긍정적 평가

유인궤는 당 고종 시기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백성을 다스리는 지혜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하고 황폐해진 백제 지역의 사회 질서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1]

660년, 고구려 원정 당시 해상 운송을 담당했던 유인궤는 폭풍으로 인해 많은 배를 잃었으나, 고종은 그의 책임을 묻지 않고 평민으로 강등시켜 군에 복귀시켰다.[1] 이는 고종이 유인궤의 능력과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도침과 복신 등이 주도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유인궤는 신라군과 협력하여 백제 저항군을 진압하고 사비성 포위를 푸는 데 성공했다.[1]

663년,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은 백강 전투에서 백제와 일본 연합군을 격파하고 백제 부흥 운동을 종식시켰다.[1] 유인궤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백제 지역을 안정시키고, 흑치상지와 사택상여 등 백제 장수들을 포용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등 뛰어난 행정 능력을 발휘했다.[1] 이러한 그의 업적은 고종의 신임을 더욱 두텁게 했으며, 백성들에게도 칭송받았다.[1]

3. 2. 부정적 평가

유인궤는 이전의 원수였던 원이시와 관련하여 몇 가지 행동을 취했는데, 이는 칭찬과 동시에 그의 진정성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유인궤가 어사대부로 승진했을 때, 이후 그의 부하가 된 원이시는 유인궤가 보복할까 두려워했다. 하지만 한 회의에서 유인궤는 술잔을 땅에 쏟으며 "만약 내가 과거의 일을 아직 생각한다면, 이 술과 같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유인궤가 재상으로 승진했을 때, 그는 원이시를 이홍의 가신단의 비서감으로 승진시켰다. 이로 인해 많은 관리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았고, 유인궤는 사람들이 그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듣고는 원이시를 재무부의 최고 재무관으로 다시 승진시켰다. 유인궤의 부하 중 한 명인 두간의는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은 의도적인 과잉 보상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송나라 역사가 구양수신당서에서 유인궤의 전기를 쓰면서 일반적으로 그를 칭찬했지만, "유인궤의 경력이 지방 관리에서 재상으로 승진하면서 그는 어떻게 명성을 얻고 부하들을 기쁘게 하는지 알게 되었다"라고 언급했다.[2] 현대 중국 역사가 보양은 훨씬 더 비판적이었다.[3]

677년, 토번의 위협이 증가하자, 고종은 유인궤에게 청해성 해동주에 있는 도하군(洮河軍)에 주둔하는 군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곧 수도에 남아 있던 또 다른 재상인 이경현과 갈등을 겪었는데, 고종에게 그의 제안이 종종 이경현에 의해 막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인궤는 이경현에게 군사적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종에게 이경현이 토번에 대한 앞으로의 군사 행동에 가장 적합한 장군이 될 것이라는 제안을 제출했다. 이경현이 거절하자 고종은 "만약 유인궤가 ''나''에게 가라고 했다면, 나는 갈 것이다. 어떻게 너는 가지 않을 수 있느냐?"라고 대답했다. 고종은 이경현에게 유인궤의 도하군 지휘권을 넘겨주었고, 678년 가을 이경현의 군대는 토번군에게 전멸당했으며, 심지어 이경현의 부관인 유심례(劉審禮)마저 토번에게 포로로 잡혀 억류되어 사망했다. 이경현은 결국 고종에 의해 그의 직위에서 해임될 것이다.

684년, 이적의 손자 이경업이 반란을 일으켜 측천무후를 여러 범죄로 고발한 후, 배염은 이를 이용하여 무후에게 황제의 권한을 예종에게 돌려줄 것을 조언하려고 했다. 대신 무후는 배염의 배신 행위에 분노하여 그를 반역죄로 고발하고 죽였다. 배염의 죽음 이후, 하급 관리인 강사종(姜嗣宗|강사종중국어)이 장안에 있었는데, 유인궤가 그에게 낙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묻자, 강사종은 "나는 오래 전부터 배염에게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유인궤는 그 후 탄원서를 써서 강사종에게 낙양으로 돌아갈 때 무후에게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강사종은 그렇게 했고, 무후가 탄원서를 열어보자 그 안에는 "강사종은 배염이 반역을 모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보고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무후는 즉시 강사종의 사지를 부러뜨린 후 목 졸라 죽였다. (구양수와 백양은 모두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며 유인궤를 비판했는데, 백양이 구양수보다 더 심했으며, 특히 유인궤의 좋은 평판이 그의 배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었다.)

4. 저서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New Book of Tang
[3] 서적 Zizhi Tongjian 666
[4] 서적 Zizhi Tongjian
[5] 문서 名前は劉仁軌と似ているが、血縁関係はない。
[6] 서적 구당서
[7] 문서 유인원과 유인궤는 이름이 비슷하지만 혈연관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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