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노 다다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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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즈노 다다토모는 1731년에 태어나 1802년에 사망한 에도 시대의 다이묘이자 막부 관료였다. 그는 미즈노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아버지의 사망으로 12세에 가독을 상속받았다. 도쿠가와 막부에서 와카도시요리, 소바요닌, 로주 등을 역임하며 다누마 오키츠구의 중상주의 정책을 지지했으나, 오키츠구 실각과 함께 로주에서 면직되었다. 이후 다시 로주로 복귀하여 활동했으며, 최종적으로 3만 석의 영지를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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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다다아키라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이자 다이묘로, 누마즈 번의 번주를 지냈으며 와카도시요리와 소바요닌을 거쳐 로주로서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측근으로 막부 정치에 참여하여 막정의 책임자가 되었고 분세이 코반 개주를 통해 이익을 얻었으나 뇌물 정치에 대한 비판도 받았다. - 에도 막부 오소바고요토리쓰기 - 다누마 오키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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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누마 오키마사는 에도 시대 인물로 다누마 오키쓰구의 아들이자 미즈노 다다토모의 양자이며, 아버지 실각 후 가문 재건을 위해 노력하여 옛 영지로 복귀했고 막부에서 오반가시라와 와카도시요리를 역임했다. - 미즈노 데와노카미가 - 기쿠마번
기쿠마번은 1868년 미즈노 다다노리에게 하사된 영지로 세워져 번청 건설과 번교 창설을 추진했으나 1871년 폐지되어 기사라즈 현에 통합되었다.
미즈노 다다토모 | |
---|---|
기본 정보 | |
씨족 | 미즈노 씨 |
인물 정보 |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후기 |
출생 | 교호 16년 2월 3일 (1731년3월 10일) |
사망 | 교와 2년 9월 19일 (1802년10월 15일) |
관위 | 종5위하 |
주군 | 도쿠가와 이에하루 → 도쿠가와 이에나리 |
가문 | 미즈노 씨 |
아버지 | 미즈노 다다타카 |
형제 | 다다토모, 마쓰다이라 노부시 |
배우자 | 정실: 마키노 야스치카의 딸 |
자녀 | 딸 (아오야마 유키미쓰 정실), 딸 (미즈노 다다노리 정실, 후의 미즈노 다다아키라 계실), 양자: 다다노리, 다다아키라 |
경력 | |
막부 | 에도 막부 |
번 | 미카와오하마 번 번주 → 스루가누마즈 번 번주 |
전임 번주 | 막부령 (오쿠보 다다스케) |
후임 번주 | 미즈노 다다아키라 |
누마즈 번주 대수 | 초대 |
소바요닌 | 에도 막부 소바요닌 |
소바요닌 전임 | 다누마 오키쓰구 |
소바요닌 후임 | 공석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 |
2. 생애
미즈노 다다토모는 1731년 2월 3일 하타모토 미즈노 타다요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미즈노 가문은 본래 시나노 마쓰모토에서 7만 석을 다스렸으나, 사촌 형인 미즈노 타다츠네가 에도성 안에서 칼부림 사건을 일으켜 개역(改易)되었다. 가독은 다다츠네의 숙부였던 미즈노 타다요시에게 상속되었지만, 다이묘 신분은 박탈당하고 시나노 사쿠군 7000석(고야마치 지행소)의 하타모토로 명맥을 유지했다.
1742년(간포 2년), 아버지 미즈노 타다요시가 사망하면서 12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았다.[1] 이후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고쇼(小姓)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쳤다.[1] 1768년(메이와 5년) 와카도시요리가 되었고, 미카와국에서 6000석을 추가로 받아 총 1만 3000석으로 다이묘로 복귀했다.[1] 이후 스루가국 누마즈번으로 이봉되어 두 번의 가증을 거쳐 최종적으로 3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1]
도쿠가와 막부 내에서 다누마 오키쓰구의 중상주의 정책을 지지했으며, 와카도시요리, 소바요닌, 로주카쿠를 거쳐 로주가 되었다.[3] 1786년 오키쓰구가 실각하자 양자였던 오키쓰구의 아들 타누마 오키마사를 폐적하고 미즈노 타다나리를 대신 양자로 삼았다.[1] 그러나 다누마 일파였다는 세평 때문에 덴메이 시대의 타치코와시(打ちこわし, 폭동)를 계기로 실각하여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해 로주에서 면직되었다.[4]
1797년 다시 로주(니시마루 부속)로 복귀하였고, 1802년 재직 중 사망했다.[2]
미즈노 다다토모의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사건 |
---|---|
1731년 | 출생 |
1742년 | 가독 상속 (시나노국 사쿠군 7000석) |
1747년 | 종5위하 분고노카미 서임 |
1758년 | 코쇼구미 반토가쿠 오쿠츠토메 겸 오소바고요토리츠기 미나라이 |
1760년 | 오소바고요토리츠기소바슈 |
1765년 | 가증 (가즈사국 이수미군・나가라군 1000석, 총 8000석) |
1768년 | 와카도시요리, 캇테가카리(재정 담당), 가증 (미카와국 헤키카이군 6000석, 총 1만 3000석, 다이묘 복귀), 미카와 오하마에 진야 구축 |
1769년 | 데와노카미 전임 |
1777년 | 소바요닌, 종4위하 승서, 데와노카미 유임, 가증 (7000석, 스루가국 누마즈로 이봉, 총 2만 석) |
1780년 | 누마즈성 축성 |
1781년 | 로주카쿠, 가증 (5000석), 캇테가카리(재정 담당), 시지주 겸임 |
1785년 | 로주, 오쿠츠토메 겸대, 가증 (5000석) |
1787년 | 캇테가카리(재정 담당) 사임 |
1788년 | 로주 면직, 간마즈메 |
1796년 | 니시마루(도쿠가와 이에요시 측근) 로주 |
1802년 | 사망 (향년 72세) |
2. 1. 가문 배경
미즈노 가문은 본래 시나노 마쓰모토에서 7만 석을 영유했으나, 미즈노 다다토모의 사촌 형인 미즈노 타다츠네가 에도성 안에서 칼부림 사건을 일으켜 개역(改易)되었다. 가독은 다다츠네의 숙부였던 미즈노 타다요시에게 상속이 허락되었지만, 다이묘 신분은 박탈당하고 시나노 사쿠 군 7000석(고야마치 지행소)의 대신 하타모토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1731년(교호 16년) 2월 3일, 미즈노 다다토모는 대신 하타모토 미즈노 타다요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2. 2. 경력
1742년(간포 2년), 아버지 미즈노 타다요시가 사망하면서 12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아 시나노국사쿠군 7000석을 영유했다.[1] 이후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고쇼(小姓)로 시작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1] 1768년(메이와 5년)에는 와카도시요리가 되었고, 미카와국에서 6000석을 추가로 받아 총 1만 3000석을 다스리게 되면서 다이묘로 복귀했다.[1] 이후 스루가국 누마즈번으로 이봉되어 두 번의 가증을 거쳐 최종적으로 3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1]도쿠가와 막부 내에서는 다누마 오키쓰구의 중상주의 정책을 지지하며, 와카도시요리, 소바요닌, 로주카쿠를 거쳐 로주가 되었다.[3] 1786년 오키쓰구가 실각하자, 양자였던 오키쓰구의 아들 타누마 오키마사를 폐적하고 미즈노 타다나리를 대신 양자로 삼았다.[1] 그러나 다누마 일파였다는 세평 때문에 덴메이 시대의 타치코와시(打ちこわし, 폭동)를 계기로 실각하여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해 로주에서 면직되었다.[4]
1797년에는 다시 로주(니시마루 부속)로 복귀하였고, 1802년 재직 중 사망했다.[2]
미즈노 다다토모의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사건 |
---|---|
1731년 | 출생 |
1742년 | 가독 상속 (시나노국 사쿠군 7000석) |
1747년 | 종5위하 분고노카미 서임 |
1758년 | 코쇼구미 반토가쿠 오쿠츠토메 겸 오소바고요토리츠기 미나라이 |
1760년 | 오소바고요토리츠기소바슈 |
1765년 | 가증 (가즈사국 이수미군・나가라군 1000석, 총 8000석) |
1768년 | 와카도시요리, 캇테가카리(재정 담당), 가증 (미카와국 헤키카이군 6000석, 총 1만 3000석, 다이묘 복귀), 미카와 오하마에 진야 구축 |
1769년 | 데와노카미 전임 |
1777년 | 소바요닌, 종4위하 승서, 데와노카미 유임, 가증 (7000석, 스루가국 누마즈로 이봉, 총 2만 석) |
1780년 | 누마즈성 축성 |
1781년 | 로주카쿠, 가증 (5000석), 캇테가카리(재정 담당), 시지주 겸임 |
1785년 | 로주, 오쿠츠토메 겸대, 가증 (5000석) |
1787년 | 캇테가카리(재정 담당) 사임 |
1788년 | 로주 면직, 간마즈메 |
1796년 | 니시마루(도쿠가와 이에요시 측근) 로주 |
1802년 | 사망 (향년 72세) |
2. 3. 다누마 오키쓰구와의 관계
미즈노 다다토모는 막부에서 다누마 오키쓰구의 중상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파벌의 일원이었다.[3] 그는 와카도시요리, 소바요닌, 캇테가카리(맡은) 로주카쿠(노중격)를 거쳐 정식 로주가 되는 등 막부 내에서 오키쓰구를 지지했다.[3]덴메이 6년(1786년), 오키쓰구가 실각하자 다다토모는 자신의 양자이자 오키쓰구의 아들인 다누마 오키마사를 서둘러 폐적하고, 대신 분가 하타모토인 미즈노 타다나리를 양자로 들였다.[3] 그러나 다누마 파벌이었다는 세간의 평판을 뒤집지는 못해, 결국 덴메이의 다치코와시(폭동)를 계기로 실각하여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지시로 로주에서 면직되었다.[3] 이는 오키쓰구 실각 이후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2. 4.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와의 관계
다누마 오키쓰구 실각 이후, 다다토모는 한동안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와 함께 일했다.[4] 하지만 다누마 파벌이었다는 세평 때문에 결국 사다노부의 지령으로 로주에서 면직되었다.[2]참조
[1]
서적
Japan Extolled and Decried: Carl Peter Thunberg's Travels in Japan 1775–1776
https://books.google[...]
2012
[2]
서적
James Mitose and the Path of Kenpo
https://books.google[...]
2006
[3]
서적
Edo and Paris: Urban Life and the State in the Early Modern Era
https://books.google[...]
1997
[4]
서적
Thinking like a man: Tadano Makuzu (1763–1825)
https://books.google[...]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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