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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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리해는 춘추 시대에 태어난 인물로, 재능이 있었으나 가난한 환경에서 30대까지 어려움을 겪었다. 제나라, 주나라 등을 거쳐 우나라 대부로 활동하다가, 진나라의 침략으로 포로가 되어 초나라에서 말을 키웠다. 이후 진 목공에 의해 재상으로 등용되어 덕치와 주변 제국을 위무하는 정책을 펼쳐 진나라의 부국강병에 기여했다. 백리해는 70세에 재상이 되었으며, 100세에 가까운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친구 건숙을 진 목공에게 추천하여 함께 진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으며, 춘추 오패 중 한 명인 진 목공의 치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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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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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중국어 간체 | 百里奚 |
중국어 정체 | 百里奚 |
병음 | Bǎilǐ Xī (바이리 시) |
웨이드-자일스 | Pai3-li3 Hsi1 (파이리 시) |
예일 음역 | Baak3lei5 Hai4 (바클레이 하이) |
인물 정보 | |
직업 | 정치가 |
관련 인물 | |
맹명시 | 관련 인물 |
2. 생애
백리해는 중국 춘추 시대의 인물로, 재능은 있었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30대가 되도록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아내의 격려를 받고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집을 떠났다.
그는 번영하는 제나라로 가서 벼슬을 구하려 했으나, 부패한 관리들에게 뇌물을 줄 돈이 없어 실패하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다. 제나라에서 그는 학자 건숙을 만나 친구가 되었고, 건숙은 백리해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이후 백리해는 우(虞)나라에서 벼슬을 얻었지만, 진나라에 포로로 잡혔다. 그는 진나라를 섬기고 싶지 않아 남쪽 초나라로 갔으나, 초나라 왕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물 사육사로 보냈다.
2. 1. 초기 생애와 방랑
장성한 후 아내 두씨(杜氏)와 아들 백리시(百里視, 맹명)를 두었다. 그러나 계속 가난에 시달렸고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는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집을 떠나 경력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그는 자신의 운을 찾기 위해 번영하는 제나라로 갔다. 그러나 정부는 부패로 가득 차 있었고, 그는 관료에게 뇌물을 줄 돈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가진 돈을 모두 다 써버렸고 거리에서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제나라에 있는 동안, 그는 또 다른 학자인 건숙과 친구가 되었다. 건숙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가 매우 재능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백리해는 제로 향했지만, 입국한 후 굶주림으로 쓰러진 것을 제나라 사람인 蹇叔|건숙중국어에게 구원받는다. 그곳에서 신세를 진 백리해는 당시 제공 (환공의 형인 양공 또는 사촌 공손무지 중 한 명)에게 출사하려 했지만, 건숙에게 제지당한다. 이후 제공은 신하에게 시해당했기에, 백리해는 위기를 잘 모면하게 된 셈이다.
다음으로 백리해는 주 왕조의 王子颓|왕자퇴중국어 (혜왕의 숙부)에게 출사하려 했지만, 여기서도 건숙에게 제지당한다. 왕자퇴는 기원전 675년에 혜왕을 몰아내고 잠시 왕위에 올랐지만, 2년 뒤인 기원전 673년에 패사했기에, 여기에서도 백리해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 다음 백리해는 주 왕실과 연관된 우 (희성, 문왕의 백부 우중 (옹)의 계통)에 출사하려 하지만, 여기서 또다시 건숙에게 제지당한다. 그러나 백리해는 그의 간언을 듣지 않고 우의 대부로 출사하며, 그 이후 건숙과는 연락이 끊기게 된다.
몇 년 후, 백리해는 작은 나라인 우(虞國)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결국 진나라에 있게 되었다. 진나라 정권을 섬기고 싶지 않았던 그는 남쪽으로 가서 또 다른 큰 나라인 초나라로 갔다. 초나라 왕은 그의 재능을 알지 못했고 그를 동물 사육사로 보냈다.
2. 2. 우나라 대부 시절
백리해는 장성한 후 아내 두씨(杜氏)와 아들 백리시(百里視, 맹명)를 두었다. 그러나 계속 가난에 시달렸고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도, 천거해 주지도 않자 우나라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아내의 격려를 받고 제나라로 향했다. 당시 제나라 임금이었던 제양공이 죽고 공손무지가 제나라 임금이 되었지만, 제나라에서 알게 된 건숙(蹇叔)의 조언으로 임관하지 않았고 변란을 피할 수 있었다. 이어 주나라 왕자 퇴를 섬기려 하자 건숙의 만류로 섬기지 않았다. 그 후 다시 우나라로 돌아가 궁지기의 천거로 대부 벼슬을 얻었다.기원전 655년 겨울, 진 헌공이 우나라 군주에게 벽과 명마를 선물하고, 우나라의 친척에 해당하는 곽 (개조는 무왕의 이복 동생인 곽숙처)과 괵 (개조는 문왕의 동생인 괵중)을 토벌할 때 그 길을 지나도 좋겠냐고 우나라 군주에게 요구했다. 이에 백리해는 현신으로 명성이 높은 宫之奇|궁지기중국어와 함께 우나라 군주를 간했지만, 우나라 군주는 두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헌공의 요구에 흔쾌히 응했다.
헌공은 괵과 곽을 멸망시킨 귀로에 갑자기 우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키고, 우나라 군주를 비롯해 백리해 등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삼았다 (소위 가도벌괵의 고사). 이는 건숙이 우려했던 사태였다.
2. 3. 진나라 재상 등용
진 목공은 신하의 조언에 따라 백리해를 다섯 조각의 염소 가죽으로 몸값을 치러 데려왔다. 초나라 왕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하급 관리를 보내 왕을 만났고 백리해를 죄수의 수레에 태워 진나라로 이송했다.[1] 진나라에 도착한 후, 진 목공은 백리해를 극진히 존경하며 그를 자신의 오른팔로 임명했다.[1] 백리해는 당시 이미 70대였다.[1] 그는 그의 오랜 친구인 건숙을 진 목공에게 추천했다.[1]진 목공은 백리해와 국사에 관해 사흘 밤낮을 이야기 나누며 그에게 국정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백리해는 "저는 망국의 신하일 뿐입니다. 재상은 사양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목공은 "우나라가 멸망한 것은 당신의 죄가 아니라 당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어리석은 우후의 책임이다"라며 백리해를 재상으로 삼았다. 이때 백리해는 70여 세였다.
백리해는 건숙을 진 목공에게 추천했고, 목공은 건숙을 진나라로 초빙하여 상대부로 삼았다. 백리해와 건숙은 각각 좌서장과 우서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백리해는 빨래하고 있던 아내와 상봉하였는데, 아내는 백리해를 만나기 위해 단상에서 노래를 불렀다.
百里奚,五羊皮。憶別時,烹伏雌,炊黃齏,扊扅 অগ্নি。今富貴,忘我為。|백리해, 양 가죽 다섯 장. 이별하던 그 날을 기억하는가? 알 밴 암탉을 잡고 노란 좁쌀밥 짓고 문짝으로 불 때던 그 때를. 이제 부귀하니 나를 잊었구나.중국어
이 노래를 들은 백리해는 아내와 상봉하였고 아들과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2. 4. 진나라 부국강병과 업적
백리해는 진나라에 임관된 후, 그의 오랜 친구인 건숙을 진 목공에게 추천했다.[1] 이 두 사람은 진나라가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백리해는 당시 이미 70세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1] 진 목공은 백리해를 국정을 맡겼다.[1]백리해는 덕치를 펼치고 주변 제국을 위무하는 정책을 펼쳐 주변 10개국이 진(秦)나라에 복속할 것을 청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업적은 훗날 진시황 시대에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백리해는 청렴하여 겨울에도 외투를 입지 않았으며, 국내를 순찰할 때는 위병에게 무기를 들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목공 32년, 진 목공이 정(鄭)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 백리해는 원정을 반대했지만, 목공은 출격했고 결국 패배했다. 백리해가 죽었을 때 진나라 백성들은 모두 슬퍼했으며, 아이들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맹명시와 친구 건숙은 백리해 사후에도 재상이 되어 목공을 보좌했다.
2. 5. 만년과 죽음
진나라에 임관된 이후 건숙을 진목공에게 천거하였고, 백리해와 건숙은 각각 좌서장과 우서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빨래하고 있던 아내와 상봉하였는데, 아내는 백리해를 만나기 위해 단상에서 노래를 불렀다.[1]百里奚,五羊皮。憶別時,烹伏雌,炊黃粱,折門柝。割衿續,何(如)忘許?|백리해, 양 가죽 다섯 장. 이별하던 그 날을 기억하는가? 알 밴 암탉을 잡고 노란 좁쌀밥 짓고 문짝으로 불 때던 그 때를. 이제 부귀하니 나를 잊었구나.중국어
이 노래를 들은 백리해는 아내와 상봉하였고, 아들과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1]
이후 진목공이 정(鄭)나라를 치려 하자 만류하였지만, 진목공은 듣지 않고 정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진(晉)나라에 의해 대패하였고, 그 후 백리해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백리해가 죽은 뒤 수많은 백성들이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통곡하였다.[1]
3. 기타
미야자키 마사미츠의 저서 「사여진 재상」은 고단샤에서 1991년에 출판된 『협골기』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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