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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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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사카단은 815년 일본 육오국에 설치된 군단으로, 다조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6단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시라카와단, 나메가타단과 함께 다조성에 주둔했다. 징병 구역은 아이즈군까지 포함되었으며, 10세기 편찬된 엔기시키에도 아사카단이 언급되어 있다. 아사카단은 11세기까지 존속하다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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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단
지도
개요
국가일본
지방도호쿠 지방
후쿠시마현
고리야마시
인접 자치체고리야마시
미하루마치
오타마무라
가와우치무라
히라타무라 (후쿠시마현)
면적
총 면적84.03km2
인구
추계인구 (2023년 12월 1일)37,910 명
역사
연혁1889년 4월 1일 - 정촌제 시행으로 아사카군에 아사카정, 오쓰키촌, 구와노촌, 와다촌이 성립.
1896년 4월 1일 - 아사카군, 아다치군, 시다군이 합병해 고리야마시가 성립.
1954년 3월 31일 - 아사카정, 오쓰키촌, 구와노촌, 와다촌이 합병해 아사카정이 성립.
1965년 5월 1일 - 고리야마시에 편입해, 아사카정은 폐지.
행정
폐지일1965년 5월 1일
교통
철도도호쿠 본선
반에쓰사이선
도로국도 4호선
국도 49호선

2. 역사

육오국에는 8세기에 여러 군단이 설치되었지만, 아사카단이 그 안에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고닌 2년(811년)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10세기에 편찬된 엔기시키에도 육오국에 7단을 설치하도록 규정되어 있어 군단의 구성은 바뀌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8] 11세기까지 폐지되었다.

2. 1. 설치

고닌 6년(815년) 8월에 육오국에 4개 군단을 증설하면서 아사카단이 설치되었다. 이후 육오국에서는 6단 6000명이 6교대제로 상시 1000명의 병력을 주둔지에 유지했다[1]. 아사카단의 병사는 시라카와단, 나메가타단과 함께 3군단으로 상시 500명을 다조성의 국부에 주둔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때 각 단의 정원은 표준적인 1000명이었을 것이다.

후에 이와키단이 증설되어 7단 7000명이 되었고, 조와 10년(843년)에 1000명을 증원하여 7군단에 할당했다[2]. 아사카단 증원 후의 병력은 불분명하지만, 계속 다조성을 지켰다[3].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다조성 유적의 외곽을 긋는 큰 도랑 안에서 아사카단 아이즈군의 병사가 교대 근무를 마치고 타마사키[4]를 통과하여 아이즈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한 목간이 발견되었다[5]. 이는 보고서를 쓰기 위한 습서로, 다조성에서 쓰여지고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6]. 이 목간은 교대 근무의 실례를 보여주며, 나카도리의 아사카단이 아이즈까지 징병 구역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군단의 배치와 함께 고려하면, 아사카군, 시노부군, 아이즈군의 3군 병사로 아사카단을 만들었을 것이다[7].

10세기에 편찬된 엔기시키에도 육오국에 7단을 설치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군단의 구성은 바뀌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8]. 아사카단은 11세기까지 폐지되었다.

2. 2. 운영

고닌 6년(815년) 8월 육오국에 4개 군단이 증설될 때 아사카단이 설치되었다. 이후 육오국에서는 6단 6000명이 6교대제로 상시 1000명의 병력을 주둔지에 유지했다.[1] 아사카단 병사는 시라카와단, 나메가타단과 함께 3군단으로 상시 500명을 다조성 국부에 주둔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정원은 표준적인 각 단 1000명이었을 것이다.

후에 이와키단이 증설되어 7단 7000명이 되었고, 조와 10년(843년)에 1000명을 증원하여 7군단에 할당했다.[2] 아사카단 증원 후 병력은 불분명하지만, 계속 다조성을 지켰다.[3]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다조성 유적 외곽의 큰 도랑 안에서 아사카단 아이즈군 병사가 교대 근무를 마치고 타마사키[4]를 통과하여 아이즈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한 목간이 발견되었다.[5] 이는 보고서를 쓰기 위한 연습용 글로, 다조성에서 쓰이고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6] 이를 통해 교대 근무의 실례를 확인할 수 있으며, 나카도리의 아사카단이 아이즈까지 징병 구역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군단의 배치와 함께 고려하면, 아사카군, 시노부군, 아이즈군 3군 병사로 아사카단을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7]

10세기에 편찬된 엔기시키에도 육오국에 7단을 설치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군단 구성은 바뀌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8] 아사카단은 11세기까지 폐지되었다.

2. 3. 징병 구역

고닌 6년(815년) 육오국에 4개 군단이 증설될 때 아사카단이 설치되었다. 아사카단 병사는 시라카와단, 나메가타단과 함께 3군단으로 다조성 국부에 상시 500명을 주둔시킨 것으로 보인다.[1]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다조성 유적 외곽의 큰 도랑 안에서 발견된 목간을 통해 나카도리의 아사카단이 아이즈까지 징병 구역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5][6] 다른 군단의 배치와 함께 고려하면, 아사카군·시노부군·아이즈군 3군 병사로 아사카단을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7]

2. 4. 폐지

고닌 2년(811년) 이후 아사카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닌 6년(815년) 8월에 육오국이 4개 군단을 증설했을 때 아사카단이 설치되었으나, 11세기까지 폐지되었다.[1]

참조

[1] 서적 類聚三代格
[2] 서적 続日本後紀 unknown
[3] 서적 漆紙文書の研究 unknown
[4] 문서 玉前剗
[5] 서적 多賀城市史
[6] 서적 多賀城跡木簡
[7] 서적 多賀城市史
[8] 논문 律令軍団一覧
[9] 서적 類聚三代格
[10] 서적 続日本後紀 unknown
[11] 서적 漆紙文書の研究 unknown
[12] 문서 玉前剗
[13] 서적 多賀城市史
[14] 서적 多賀城跡木簡
[15] 서적 多賀城市史
[16] 논문 律令軍団一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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