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모토 오키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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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키모토 오키토모는 일본의 자작이자 외교관, 정치인이며, 교토의 지지인 『구도 순유기고』의 저자이다. 도다 타다시의 차남으로 태어나 아키모토 레이토모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상속받았다. 외무성 서기생으로 프랑스 주재 공사관에서 근무하다 사임 후 유럽 유학을 다녀왔으며, 자작 작위를 받았다. 홋카이도 개척 사업에 참여했으나 실패했고,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건강 문제로 사임한 후 입헌정우회에 가입하여 도쿄 지부장을 역임했다. 또한, 스모 발전에 기여하고, 도요 상업학교 교장, 『구도 순유기고』 저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다 1917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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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모토 오키토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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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이름 | 아키모토 오키마사 |
본명 | 아키모토 요시토키 (秋元 礼朝) |
별명 | 도토미노카미 (遠江守) |
생년월일 | 간세이 12년 10월 27일 (1800년 12월 12일) |
사망일 | 메이지 4년 11월 15일 (1871년 12월 26일) |
묘소 | 도쿄도 스기나미구 에이후쿠사의 아키모토 가문 묘소 |
신분 | 다이묘, 자작 |
관위 | 종4위하, 도토미노카미 |
작위 | 자작 |
영지 | 다테바야시 번 6만 석 → 야마가타 번 6만 석 |
가족 | |
아버지 | 아키모토 쓰네토모 |
어머니 |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딸 |
정실 |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의 딸 |
측실 | 이노우에 씨 |
자녀 | 아키모토 히로토모 아키모토 무네토모 아키모토 모토토모 |
양자 | 아키모토 데루토모 (아키모토 무네토모의 아들) |
관직 경력 | |
분카 4년 (1807년) | 쇼군 오히로메 |
분카 5년 (1808년) | 소자반 종5위하, 도토미노카미 |
분세이 3년 (1820년) | 소자반 겸 지샤부교 |
덴포 11년 (1840년) | 서임 해제 |
고카 2년 (1845년) | 서임 |
고카 3년 (1846년) | 교토쇼시다이 |
가에이 원년 (1848년) | 서임 해제 |
안세이 5년 (1858년) | 다시 교토쇼시다이 |
만엔 원년 (1860년) | 서임 해제 |
분큐 3년 (1863년) | 다시 교토쇼시다이 |
겐지 원년 (1864년) | 서임 해제 |
게이오 4년 (1868년) | 야마가타 번 지사 |
메이지 2년 (1869년) | 야마가타 번 지사 면직 |
메이지 4년 (1871년) | 자작 |
2. 생애
도다 다다시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이름은 와사부로였다. 1917년 61세로 사망했으며, 사위 하루토모가 유업을 계승했다. 도쿄 스루가다이의 저택 외에도, 구 영지 다테바야시에 별저를 소유하고, 시로누마의 신전 개간 사업 등에 진력했다.
2. 1. 가문 상속과 외교관 경력
도다 다다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도다 다다쓰나이다. 어린 시절 이름은 와사부로였다. 출생 당시, 친부는 마세 와사부로라고 칭하며 우쓰노미야번 가로로서 도다 가문 본가에 모시고 있었다.[1]1871년(메이지 4년) 9월 9일, 구 다테바야시번주 아키모토 레이토모의 양자가 되어 종5위에 서임되었으며, 다음 날 원복하여 오키토모라고 칭했다. 같은 해 9월 23일, 레이토모의 은거로 인해 가문을 상속했다. 1883년(메이지 16년) 1월, 외무성 서기생(전문직)으로서 프랑스 주 파리 공사관에 근무하게 되었지만, 얼마 안 가 직을 사임하고 유럽 각지를 유학했다. 1885년(메이지 18년)12월에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 기간 중, 1884년(메이지 17년)7월 8일에 자작 작위를 받았다.[2]
1889년(메이지 22년)10월, "홋카이도 토지 불하 규칙"에 따라, 산조 사네토미를 중심으로 오키토모 등 화족 조합에서 홋카이도청의 토지 5만 정보의 대여를 신청하여, 화족 조합 우류 농장을 창설했다.(미국식 대농장 경영에 의한 개간을 했지만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1891년(메이지 24년)에 산조가 사망하자 구심력을 잃어, 1893년(메이지 26년)에 해산)[3]
1892년(메이지 25년)12월부터 변리공사, 1895년(메이지 28년)3월에는 특명전권공사로 승진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부임지에 가지 않고 직을 사임하고, 1900년(메이지 33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입헌정우회가 결성되자 이에 가입하여, 도쿄 지부장을 맡았다. 도요 상업학교의 교장이 되었다.[4]
2. 2. 정치 활동과 홋카이도 개척
1871년(메이지 4년) 9월 9일, 구 다테바야시번주 아키모토 레이토모의 양자가 되어[1] 종5위에 서임되었고, 다음 날 원복하여 오키토모라 칭했다. 같은 해 9월 23일, 레이토모가 은거하여 가문을 상속했다. 1883년 1월, 외무성 서기생(전문직)으로서 프랑스 주 파리 공사관에 근무하게 되었지만, 얼마 안 가 직을 사임하고 유럽 각지를 유학했다. 1885년 12월에 일본으로 귀국했다. 1884년 7월 8일에는 자작 작위를 받았다[2].1889년 10월, "홋카이도 토지 불하 규칙"에 따라, 산조 사네토미를 중심으로 오키토모 등 화족 조합에서 홋카이도청의 토지 5만 정보의 대여를 신청하여 화족 조합 우류 농장을 창설했다. 그러나 미국식 대농장 경영에 의한 개간은 궤도에 오르지 못했고, 1891년에 산조가 사망하자 구심력을 잃어 1893년에 해산되었다[3]。
1892년 12월부터 외무 관료로서 변리공사, 1895년 3월에는 특명전권공사로 승진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부임지에 가지 않고 직을 사임했다. 1900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입헌정우회가 결성되자 이에 가입하여 도쿄 지부장을 맡았다. 도요 상업학교의 교장이 되었다[4]。
2. 3. 교육 및 문화 활동
메이지 35년 히노시타회를 창설하여 스모 발전에 기여했으며, 지쿠시야마의 후원회 "지쿠시야마회" 회장도 맡았다.[4]교토의 지지(地誌) 『구도 순유기고』의 필자로도 알려져 있다. 오키토모는 메이지 28년 교토를 방문하여 깊은 감명을 받아, 이후 빈번하게 교토를 방문, 락중락외(洛中洛外)의 신사, 불각, 명소, 고적을 방문・조사하여 한 권으로 정리했다. 생전에 출판되지는 못했지만, 사망 다음 해인 다이쇼 7년 후계자 하루토모에 의해 간행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보고 들은 귀중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으며, 교토의 역사를 배우는 데 빠질 수 없는 자료가 되고 있다. 『구도 순유기고』는 『신선 교토 총서』 제4권(1985년 린센 서점)에 수록되어 있다.
2. 4. 『구도 순유기고』 저술
메이지 28년(1895년) 교토를 방문하여 깊은 감명을 받은 아키모토 오키토모는 이후 빈번하게 교토를 방문하여 락중락외의 신사, 불각, 명소, 고적을 방문 및 조사하여 한 권으로 정리하였다. 이것이 『구도 순유기고』이다.[1]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했지만, 사망 다음 해인 다이쇼 7년(1918년)에 후계자 하루토모에 의해 간행되었다.[1] 『구도 순유기고』는 메이지 시대에 보고 들은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어 교토의 역사를 배우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신선 교토 총서』 제4권(1985년 린센 서점)에 수록되어 있다.[1]3. 사망
참조
[1]
문서
先祖の戸田忠昌の正室が秋元富朝の娘であった関係で、戸田家一族からしばしば秋元家へ養子入りする者が出ていた。
[2]
간행물
官報
1884-07-09
[3]
웹사이트
北空知河川事業所・洪水と治水の歴史
http://www.sp.hkd.ml[...]
[4]
서적
最近調査男子東京遊学案内
博文館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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