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바야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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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바야시번은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에게 하사하여 건립된 일본 에도 시대의 번이다. 사카키바라씨, 오규 마쓰다이라씨, 도쿠가와씨, 오치 마쓰다이라씨, 오타씨, 이노우에씨, 아키모토씨 등 여러 가문이 번주를 역임했으며, 번의 규모는 10만 석에서 최대 25만 석까지 변동했다. 다테바야시번은 폐번과 재건을 반복하다가, 아키모토씨 시대에 존왕양이 운동에 참여했으나 금문의 변으로 인해 번주가 교체되었다.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오우 정벌에 참여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어 군마현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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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마쓰번은 에도 시대 도토미국 하마마쓰에 있던 번으로, 여러 후다이 다이묘 가문이 번주를 역임하며 '출세성'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거점이기도 했으며, 폐번치현 이후 시즈오카현에 편입되었다.
| 다테바야시번 | |
|---|---|
| 개요 | |
| 이름 | 다테바야시 번 (館林藩) |
| 로마자 표기 | Tatebayashi-han |
| 위치 | 군마현 다테바야시 |
| 역사 | |
| 성립 | 1590년 |
| 폐지 | 1871년 |
| 시대 | 에도 시대 |
| 정치 | |
| 정치 체제 | 다이묘 |
| 주요 인물 | |
| 번주 | 사카이 시게타다 마쓰다이라 다다나가 오타 스케쓰구 아키모토 다카토모 도쿠가와 쓰나요시 마쓰다이라 기요타케 이노우에 마사미네 마쓰다이라 노리히로 하야시 다다타카 마쓰다이라 다케치카 |
| 성 | |
| 위치 | 다테바야시성 |
2. 번의 역사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 후 간토 지방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에게 다테바야시 10만 고쿠 영지를 주면서 다테바야시번이 시작되었다. 야스마사는 번의 기초를 다졌으나, 그의 사후 사카키바라 가문의 통치는 간에이 20년(1643년)에 끝이 났다.
이후 다테바야시번은 번주의 교체가 매우 잦았다.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이 잠시 통치한 뒤,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동생인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25만 고쿠의 번주가 되었다. 쓰나요시는 실제로 다테바야시에 거주하지 않았으며, 그가 5대 쇼군으로 취임한 후 아들 도쿠가와 도쿠마쓰가 번을 이었으나 요절하면서 다테바야시번은 폐번되고 다테바야시성마저 파괴되었다.
호에이 4년(1707년) 마쓰다이라 기요타케가 번주가 되면서 번이 부활했지만, 이후에도 오치 마쓰다이라가, 오타 가문, 이노우에 가문, 아키모토 가문 등 여러 가문이 짧은 기간 동안 번을 통치했다. 이 과정에서 번주가 오사카 죠다이나 로주 등 막부의 요직에 임명되면서 영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번 자체가 폐지되어 막부 직할령이 되는 경우가 반복되었다.
마지막 번주 가문인 아키모토 가문 시대에는 존왕양이 운동에 관여하기도 했으며, 보신 전쟁을 거쳐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으로 다테바야시번은 최종적으로 폐지되었고, 다테바야시현, 도치기현을 거쳐 메이지 9년(1876년) 군마현에 편입되었다.
이처럼 다테바야시번은 도쿠가와 가문과 깊은 관계를 가진 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가문의 장기적인 지배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잦은 번주 교체와 폐번을 겪는 등 비교적 불안정한 역사를 가졌다.
2. 1. 사카키바라 가문 통치 시기 (1590년 ~ 1643년)
오다와라 정벌 후 간토 지방에 들어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에게 다테바야시 10만 석 영지를 주었다. 이것이 다테바야시번의 시작이다. 야스마사는 토지 조사(검지)를 실시하고 다테바야시성 확장 공사, 조카마치(성 아랫마을) 정비, 치수 사업, 닛코와키오칸(日光脇往還) 같은 가도 신설 등에 힘써 번 통치의 기초를 다졌다.야스마사는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끄는 군대에 속해 사나다 마사유키 군과 싸웠다. 전투 후 영지를 더 늘려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제안도 있었지만, 야스마사는 다테바야시가 에도와 가까워 여러모로 편리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야스마사가 죽은 뒤 아들 사카키바라 야스카쓰가 뒤를 이었다. 야스카쓰는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전투 직후인 겐나 원년(1615년) 5월 27일에 후사 없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사카키바라 가문은 가계가 끊길 위기에 처했으나, 에도 막부는 유서 깊은 사카키바라 가문의 명맥이 끊기는 것을 아쉬워하여, 야스마사의 손자이자 오스가 가문(大須賀家)을 잇고 있던 사카키바라 다다쓰구를 야스카쓰의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했다.
다다쓰구는 겐나 2년(1616년) 1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평생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아, 마쓰다이라 다다쓰구라고도 불렸다. 간에이 2년(1625년) 12월 11일에는 1만 석의 영지를 추가로 받아 총 11만 석이 되었다.
간에이 20년(1643년) 7월 4일, 사카키바라 다다쓰구가 무쓰의 시라카와번으로 옮겨가면서 사카키바라 가문의 다테바야시 통치는 끝나게 되었다. 다테바야시번은 일시적으로 폐지되고 번의 영지는 에도 막부의 직할령(덴료)이 되었다.
2. 2. 여러 가문의 통치 시기 (1644년 ~ 1845년)
간에이 20년(1643년) 사카키바라 다다쓰구가 무쓰 시라카와번으로 옮겨가면서 다테바야시번은 일시적으로 폐지되고 막부 직할령(공의어료)이 되었다.이듬해 쇼호 원년(1644년) 2월 28일, 도토미 하마마쓰번에서 마쓰다이라 노리나가가 6만 석으로 들어오면서 다시 다테바야시번이 세워졌다. 조오 3년(1654년) 1월 26일, 노리나가가 사망하여 아들 마쓰다이라 노리히사가 뒤를 이었다. 이때 노리히사는 동생 노리마사에게 5천 석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번의 규모는 5만 5천 석이 되었다. 그리고 간분 원년(1661년) 윤8월 3일, 노리히사는 시모우사 사쿠라번으로 옮겨갔다.
노리히사가 떠난 자리에는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셋째 동생인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25만 석으로 다테바야시 번주가 되었다. 하지만 쓰나요시는 실제로 다테바야시에 거주하지 않고 에도의 간다 어전(神田御殿)에 머물며 에도 죠후(江戸城府)에서 번을 관리했다. 엔포 8년(1680년) 이에쓰나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쓰나요시가 그 뒤를 이어 5대 쇼군이 되었다. 이 때문에 쓰나요시의 아들 도쿠마쓰가 쇼군 후계자 신분으로 다테바야시번을 계승했지만, 도쿠마쓰는 덴나 3년(1683년) 윤5월 28일에 4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로 인해 다테바야시번은 다시 폐번되고 번의 영지는 막부 직할령(공의어료)이 되었으며, 이때 다테바야시성은 파괴되었다.
호에이 4년(1707년) 1월 11일, 쓰나요시의 조카이자 쇼군 후계자였던 도쿠가와 쓰나토요(후의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동생 마쓰다이라 기요타케가 2만 4천 석으로 들어오면서 다테바야시번이 부활했다. 그 후, 호에이 7년(1710년) 1월에 1만 석, 쇼토쿠 2년(1712년) 12월에 쇼군 이에노부의 유언으로 2만 석이 추가되어 총 5만 4천 석이 되었다. 기요타케의 손자인 3대 번주 마쓰다이라 다케치카 대인 교호 13년(1728년) 9월, 다케치카는 무쓰 다나구라번으로 옮겨졌다.
대신 와카도시요리인 오타 스케하루가 5만 석으로 들어왔으나, 교호 19년(1734년) 9월 오사카 죠다이가 되면서 영지를 오사카 주변으로 옮기게 되어 다테바야시번은 다시 폐번되었다. 겐분 5년(1740년) 5월, 스케하루의 아들 오타 스케토시가 5만 석으로 들어와 다시 다테바야시번이 세워졌지만, 엔쿄 3년(1746년) 9월 25일에 토토미 가케가와번으로 이동하였다.
엔쿄 3년(1746년) 스케토시가 가케가와번으로 옮겨간 대신, 니시노마루 로주가 되었던 마쓰다이라 다케치카가 5만 4천 석으로 다시 다테바야시번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다케치카는 혼마루 로주로 승진하였고, 메이와 6년(1769년) 12월 1일에 7천 석이 가증되어 총 6만 1천 석의 영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후 오치 마쓰다이라가의 3대 번주 마쓰다이라 나리아쓰 대인 덴포 7년(1836년) 3월, 이와미 하마다번으로 이동하였다.
덴포 7년(1836년) 오치 마쓰다이라가가 하마다번으로 옮겨간 대신, 다나구라번에서 이노우에 마사하루가 6만 석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고카 2년(1845년) 11월, 토토미 하마마쓰번으로 이동하였다. 이 시기까지 다테바야시번은 번주의 잦은 교체와 폐번을 겪으며 비교적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했다.
2. 3. 아키모토 가문 통치 시기 (1845년 ~ 1871년)
고카 2년(1845년) 11월, 이노우에 마사하루가 도토미 하마마쓰번으로 이봉되자, 그 후임으로 데와 야마가타번에서 아키모토 유키토모가 6만 석으로 다테바야시번에 들어왔다. 유키토모는 민정에 힘쓰고 문무를 장려하는 등 번정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또한 조슈번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히타치 미토번과 함께 간토 지역에서 존왕양이 운동의 선봉에 섰다.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막부의 의심을 사게 되었고, 겐지 원년(1864년) 7월 금문의 변으로 조슈번이 교토에서 축출되고 조적으로 몰리자, 유키토모는 막부에 의해 강제로 은거당했다. 같은 해 10월 27일, 유키토모의 양자인 아키모토 히로토모가 가독을 이어 번주가 되었다.
메이지 원년(1868년) 시작된 보신 전쟁에서 다테바야시번은 초기에 참전을 주저하여 신정부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그러나 금 2만 료를 헌납하여 용서를 받고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오우 정벌 등에서 군공을 세웠다. 이 공적으로 이듬해(1869년) 1만 석이 추가되어 총 7만 석의 영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같은 해 판적봉환이 이루어지면서 히로토모는 다테바야시 번지사로 임명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으로 다테바야시번은 폐지되었고, 이후 다테바야시현, 도치기현을 거쳐 메이지 9년(1876년) 군마현에 편입되었다.
3. 역대 번주
| 가문 및 문장 | 대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관직 | 석고 | |
|---|---|---|---|---|---|---|---|
| ]]|]]|]] || 사카키바라 가문 (후다이) || 1대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榊原康政|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일본어 || 1590년 ~ 1606년 || 종4위하 || 식부대보(式部大輔) || 10만 석 | |||||||
| -- | 사카키바라 가문 (후다이) | 2대 | 사카키바라 야스카쓰 榊原康勝|사카키바라 야스카쓰일본어 | 1606년 ~ 1615년 | 종5위하 | 도토미노카미(遠江守) | 10만 석 |
| -- | 사카키바라 가문 (후다이) | 3대 | 사카키바라 다다쓰구 榊原忠次|사카키바라 다다쓰구일본어 | 1615년 ~ 1643년 | 종4위하 | 식부대보(式部大輔), 시종 | 10만 석 → 11만 석 |
| ]]|]] ||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 (후다이) || 1대 || 마쓰다이라 노리나가 松平乗寿|마쓰다이라 노리나가일본어 || 1644년 ~ 1654년 || 종5위하 || 이즈미노카미(和泉守) || 6만 석 | |||||||
| -- |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 (후다이) | 2대 | 마쓰다이라 노리히사 松平乗久|마쓰다이라 노리히사일본어 | 1654년 ~ 1661년 | 종5위하 | 이즈미노카미(和泉守) | 6만 석 → 5만 5천 석 |
| ]]|]]|]]|]]|]]|]]|]]|]]|]]|]] || 도쿠가와 가문 (신판) || 1대 || 도쿠가와 쓰나요시 徳川綱吉|도쿠가와 쓰나요시일본어 || 1661년 ~ 1680년 || 정3위 || 산기 || 25만 석 | |||||||
| -- | 도쿠가와 가문 (신판) | 2대 | 도쿠가와 도쿠마쓰 徳川徳松|도쿠가와 도쿠마쓰일본어 | 1680년 ~ 1683년 | - | - | 25만 석 |
| -- 막부 직할령 | 1683년 ~ 1707년 | ||||||
| -- |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 1대 | 마쓰다이라 기요타케 松平清武|마쓰다이라 기요타케일본어 | 1707년 ~ 1724년 | 종4위하 | 우콘노조(右近将監) | 2만 4천 석 → 3만 4천 석 → 5만 4천 석 |
| -- |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 2대 | 마쓰다이라 다케마사 松平武雅|마쓰다이라 다케마사일본어 | 1724년 ~ 1728년 | 종5위하 | 히고노카미(肥後守) | 5만 4천 석 |
| -- |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 3대 | 마쓰다이라 다케치카 松平武元|마쓰다이라 다케치카일본어 | 1728년 | 종4위하 | 우콘노조(右近将監), 시종 | 5만 4천 석 |
| ]]|]] || 오타 가문 (후다이) || 1대 || 오타 스케하루 太田資晴|오타 스케하루일본어 || 1728년 ~ 1734년 || 종4위하 || 빗추노카미(備中守) || 5만 석 | |||||||
| -- 막부 직할령 | 1734년 ~ 1740년 | ||||||
| -- | 오타 가문 (후다이) | 1대 | 오타 스케토시 太田資俊|오타 스케토시일본어 | 1740년 ~ 1746년 | 종5위하 | 셋쓰노카미(摂津守) | 5만 석 |
| -- |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 4대(복귀) | 마쓰다이라 다케치카 松平武元|마쓰다이라 다케치카일본어 | 1746년 ~ 1779년 | 종4위하 | 우콘노조(右近将監), 시종 | 5만 4천 석 → 6만 1천 석 |
| -- |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 5대 | 마쓰다이라 다케히로 松平武寛|마쓰다이라 다케히로일본어 | 1779년 ~ 1784년 | 종5위하 | 우콘노조(右近将監) | 6만 1천 석 |
| -- |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 6대 | 마쓰다이라 나리아쓰 松平斉厚|마쓰다이라 나리아쓰일본어 | 1784년 ~ 1836년 | 종4위상 | 우콘노조(右近将監) | 6만 1천 석 |
| ]] || 이노우에 가문 (후다이) || 1대 || 이노우에 마사하루 井上正春|이노우에 마사하루일본어 || 1836년 ~ 1845년 || 종4위하 || 가와치노카미(河内守), 시종 || 6만 석 | |||||||
| ]]|]] || 아키모토 가문 (후다이) || 1대 || 아키모토 유키토모 秋元志朝|아키모토 유키토모일본어 || 1845년 ~ 1864년 || 종4위하 || 다지마노카미(但馬守) || 6만 석 | |||||||
| -- | 아키모토 가문 (후다이) | 2대 | 아키모토 히로토모 秋元礼朝|아키모토 히로토모일본어 | 1864년 ~ 1871년 | 종5위하 | 다지마노카미(但馬守) | 6만 석 → 7만 석 |
3. 1. 사카키바라 가문 (후다이, 10만 석 → 11만 석)
오다와라 정벌 후 간토 지방으로 이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90년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에게 고즈케국 다테바야시에 10만 석 영지를 주어 다테바야시번이 성립되었다. 야스마사는 토지 조사(검지)를 실시하고 다테바야시성 확장 공사, 조카마치(성하마을) 정비, 치수 사업, 닛코와키오칸 등 가도 정비에 힘써 번 통치의 기반을 다졌다.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야스마사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에 속해 우에다성에서 사나다 마사유키 군대와 싸웠다. 전투 후 영지 증가와 함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라는 제안도 있었으나, 야스마사는 다테바야시가 에도와 가깝다는 이점을 들어 이를 거절했다. 야스마사 사후 아들 사카키바라 야스카쓰가 번주 자리를 계승했다. 야스카쓰는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1615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사카키바라 가문은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막부는 유서 깊은 사카키바라 가문의 단절을 안타까워하여, 오스카 가문(大須賀家)을 계승하고 있던 야스마사의 손자 사카키바라 다다쓰구를 야스카쓰의 양자로 삼아 가문을 잇게 했다.
1616년 다다쓰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평생 마쓰다이라 성씨를 사용할 것을 허락받아, 마쓰다이라 다다쓰구라고도 불렸다. 1625년에는 1만 석이 추가되어 총 11만 석의 영지를 다스리게 되었다. 1643년 다다쓰구가 무쓰 시라카와번으로 전봉(轉封)되면서 사카키바라 가문의 다테바야시 지배는 끝나고, 다테바야시번은 일시적으로 폐지되어 막부 직할령(公儀御料)이 되었다.
| 대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관직 | 고쿠다카 |
|---|---|---|---|---|---|
| 1대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榊原 康政) | 1590년 ~ 1606년 | 종4위하 | 식부대보(式部大輔) | 10만 석 |
| 2대 | 사카키바라 야스카쓰 (榊原 康勝) | 1606년 ~ 1615년 | 종5위하 | 도토미노카미(遠江守) | 10만 석 |
| 3대 | 사카키바라 다다쓰구 (榊原 忠次) | 1615년 ~ 1643년 | 종4위하 | 식부대보(式部大輔), 시종(侍従) | 10만 석 → 11만 석 |
3. 2.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 (후다이, 6만 석 → 5만 5천 석)
간에이 20년(1643년) 사카키바라 다다쓰구가 무쓰국 시라카와번으로 옮겨간 뒤, 다테바야시번은 잠시 폐번되어 막부 직할령이 되었다. 이듬해인 쇼호 원년(1644년) 2월 28일, 도토미국 하마마쓰번에서 마쓰다이라 노리나가가 6만 석으로 들어오면서 다테바야시번은 다시 세워졌다. 노리나가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아래에서 로주를 지낸 인물이다.조오 3년(1654년) 1월 26일, 노리나가가 사망하자 아들 마쓰다이라 노리히사가 뒤를 이었다. 이때 노리히사는 동생 마쓰다이라 노리마사에게 5천 석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번의 석고는 5만 5천 석이 되었다.
간분 원년(1661년) 윤8월 3일, 노리히사는 시모우사국 사쿠라번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역대 번주'''
| 대 | 이름 | 관위 | 재임 기간 | 비고 |
|---|---|---|---|---|
| 1대 | 松平乗寿|마쓰다이라 노리나가일본어 | 종5위하, 이즈미노카미 | 1644년 ~ 1654년 | 도토미국 하마마쓰번에서 전봉 (6만 석) |
| 2대 | 松平乗久|마쓰다이라 노리히사일본어 | 종5위하, 이즈미노카미 | 1654년 ~ 1661년 | 동생에게 5천 석 분봉 (5만 5천 석), 시모우사국 사쿠라번으로 전봉 |
3. 3. 도쿠가와 가문 (신판, 25만 석)
간분 원년(1661년) 윤8월 3일, 마쓰다이라 노리히사가 시모우사 사쿠라번으로 옮겨가자,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동생인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25만 석으로 다테바야시 번주가 되었다. 당시 쓰나요시는 에도 죠후(江戸城付) 신분이었으며, 실제로는 에도의 칸다 어전(神田御殿)에 거주하며 다테바야시에 부임하지는 않았다.엔호 8년(1680년), 형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사망하자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그 뒤를 이어 제5대 쇼군으로 즉위했다. 이에 따라 쓰나요시의 아들인 도쿠가와 도쿠마쓰가 쇼군 후계자 신분으로 다테바야시번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도쿠마쓰는 덴나 3년(1683년) 윤5월 28일, 4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로 인해 다테바야시번은 다시 폐번되었고, 번의 영지는 막부 직할령인 공의어료(公儀御料)가 되었으며, 이때 다테바야시성도 파각(破却, 성곽 파괴)되었다.
단절 후 공의어료.
3. 4.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2만 4천 석 → 3만 4천 석 → 5만 4천 석)
호에이 4년(1707년) 1월 11일, 5대 쇼군 쓰나요시 사후 쇼군 후계자가 된 츠나토요(후의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동생인 마쓰다이라 기요타케가 2만 4천 석으로 다테바야시번에 들어오면서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 가문은 신판(고카몬)으로 분류된다.기요타케의 입봉 당시 고쿠다카는 2만 4천 석이었으나, 호에이 7년(1710년)에 1만 석이 추가되어 3만 4천 석이 되었고, 쇼토쿠 2년(1712년)에 다시 2만 석이 추가되어 총 5만 4천 석으로 늘어났다.
3대 번주 다케치카 시기인 교호 13년(1728년) 9월,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은 무쓰 타나구라번으로 전봉되었다. 이후 오타 가문이 잠시 번을 다스렸으나, 엔쿄 3년(1746년) 9월 25일, 니시노마루 노중이었던 다케치카가 다시 5만 4천 석으로 다테바야시번에 복귀하였다. 다케치카는 복귀 후 메이와 6년(1769년) 12월 1일에 혼마루 노중으로 승진하며 7천 석의 가증을 받아 고쿠다카는 6만 1천 석이 되었다.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의 다테바야시 통치는 다케치카의 손자인 나리아츠 대인 덴포 7년(1836년) 3월, 이와미 하마다번으로 전봉되면서 종료되었다.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의 역대 번주는 다음과 같다.
| 대 | 이름 | 관위 | 재임 기간 | 비고 |
|---|---|---|---|---|
| 1대 | 마쓰다이라 기요타케 | 종4위하, 우콘노쇼겐(右近将監) | 1707년 ~ 1724년 |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동생. 고쿠다카 2만 4천 석 → 3만 4천 석 → 5만 4천 석 |
| 2대 | 마쓰다이라 다케마사 | 종5위하, 히고노카미(肥後守) | 1724년 ~ 1728년 | 기요타케의 아들. 고쿠다카 5만 4천 석 |
| 3대 | 마쓰다이라 다케치카 | 종4위하, 우콘노쇼겐(右近将監) 겸 시종 | 1728년 | 기요타케의 5남, 다케마사의 양자. 무쓰 타나구라번으로 전봉. |
| 4대 | 마쓰다이라 다케치카 | 종4위하, 우콘노쇼겐(右近将監) 겸 시종 | 1746년 ~ | 3대 번주. 무쓰 타나구라번에서 복귀. 고쿠다카 5만 4천 석 → 6만 1천 석 (1769년 가증) |
3. 5. 오타 가문 (후다이, 5만 석)
교호 13년 (1728년) 9월, 와카도시요리였던 오타 스케하루(종4위하, 빗추노카미)가 5만 석으로 다테바야시번에 들어왔다. 그러나 교호 19년 (1734년) 9월에 오사카 죠다이로 임명되면서 오사카 주변 지역으로 이봉되었고, 다테바야시번은 일시적으로 폐번되어 막부 직할령(공의어료)이 되었다.겐분 5년 (1740년) 5월, 스케하루의 아들인 오타 스케토시(종5위하, 셋쓰노카미)가 다시 5만 석으로 다테바야시번주가 되었다. 하지만 엔쿄 3년 (1746년) 9월 25일, 도토미국 가케가와번으로 옮겨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