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2세 (스코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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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더 2세는 1214년부터 1249년까지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었다. 그는 잉글랜드의 존 왕에 대항하여 잉글랜드 귀족들을 지원하고, 맥윌리엄 가문과 맥헤스 가문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재위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잉글랜드와의 외교적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헨리 3세의 누이인 조앤과 결혼했으며, 요크 조약을 통해 국경을 확정했다. 또한, 아가일 지역을 정복하고 갈로웨이 반란을 진압하는 등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그는 서부 제도(헤브리디스 제도)를 확보하려다 실패하고 1249년 케레라 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알렉산더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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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2세 (스코틀랜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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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이름 | 알렉산더 2세 |
로마자 표기 | Alaxandair mac Uilliam |
게일어 표기 | Alasdair mac Uilleim |
칭호 | 알바의 왕 |
재위 시작 | 1214년 12월 4일 |
재위 종료 | 1249년 7월 6일 |
대관식 | 1214년 12월 6일 |
이전 군주 | 윌리엄 1세 막 안리크 |
다음 군주 | 알렉산더 3세 막 알락산다르 |
결혼 정보 | |
배우자 | 조앤 오브 잉글랜드 (1221년 6월 결혼, 1238년 3월 4일 사망) 마리 드 쿠시 (1239년 5월 15일 결혼) |
자녀 | 알렉산더 3세 마저리 (사생아) |
가문 | |
왕가 | 던켈드 |
아버지 | 윌리엄 1세 |
어머니 | 에르망가르드 드 보몽 |
출생 및 사망 정보 | |
출생일 | 1198년 8월 24일 |
출생지 | 해딩턴, 스코틀랜드 |
사망일 | 1249년 7월 6일 |
사망지 | 케레라, 스코틀랜드 |
매장지 | 멜로즈 수도원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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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알렉산더는 이스터로시안주 헤딩턴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사자왕 윌리엄과 에르망가르드 드 보몽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었다. 그는 팔레즈 조약의 조건에 따라 영국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고, 1213년 클러큰웰 수도원에서 (잉글랜드의 존이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으며)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1214년 12월 4일 아버지가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같은 해 12월 6일 스콘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즉위 당시 그의 누이들인 이사벨라와 마가렛은 잉글랜드 국왕 존에게 인질로 보내졌다.[1] 그는 알렉산더와 그의 가족의 권리를 다룰 것을 약속한 대헌장을 통해 존에게 호소했다.[2]
1214년에 아버지 윌리엄 1세가 77세로 사망한 후, 16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1219년,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여동생인 조앤을 왕비로 맞이하여 잉글랜드와의 우호 관계를 회복했다.[13] 1236년 요크 조약으로 잉글랜드와의 국경선을 확정했다.[14]
알렉산더 2세는 외교적 현안을 해결한 후, 아버지가 확립한 행정 기구를 활용하여 내정을 충실히 다져나갔다. 1238년 왕비 조앤과 사별하고 프랑스 귀족의 딸인 마리 드 쿠시와 재혼했다. 헨리 3세는 이를 잉글랜드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알렉산더 2세에게 계속해서 트집을 잡았다.[14] 1244년, 마침내 뉴캐슬어폰타인에서 화해했다.[15]
2. 1. 출생과 가족
알렉산더는 이스터로시안주 헤딩턴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사자왕 윌리엄과 에르망가르드 드 보몽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었다. 그는 팔레즈 조약의 조건에 따라 영국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고, 1213년 클러큰웰 수도원에서 잉글랜드의 존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1214년 12월 4일 아버지가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같은 해 12월 6일 스콘에서 대관식을 올렸다.즉위 당시 그의 누이들인 이사벨라와 마가렛은 잉글랜드 국왕 존에게 인질로 보내졌다.[1] 그는 알렉산더와 그의 가족의 권리를 다룰 것을 약속한 대헌장을 통해 존에게 호소했다.[2]
1221년 6월 21일, 헨리 3세의 여동생인 조앤과 결혼했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16] 1239년 5월 15일, 프랑스 귀족 앙게랑 3세 드 쿠시의 딸인 마리 드 쿠시와 결혼하여[17] 1남을 두었다.
- 알렉산더 3세 (1241년 - 1286년) - 스코틀랜드 왕 (1249년 - 1286년)
마리 드 쿠시는 알렉산더의 사후, 프랑스 귀족 장 드 브리엔느(1230년경 - 1296년, 예루살렘 왕 장 드 브리엔느의 아들)와 재혼했다.
2. 2. 잉글랜드에서의 유년 시절
알렉산더는 이스터로시안주 헤딩턴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사자왕 윌리엄과 에르망가르드 드 보몽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었다. 그는 팔레즈 조약의 조건에 따라 영국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1213년 클러큰웰 수도원에서 잉글랜드의 존이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그의 누이들인 이사벨라와 마가렛은 잉글랜드 국왕 존에게 인질로 보내졌다.[1] 그는 알렉산더와 그의 가족의 권리를 다룰 것을 약속한 대헌장을 통해 존에게 호소했다.[2]
3. 스코틀랜드 왕 즉위
1215년, 알렉산더 2세는 즉위 직후 스코틀랜드 왕권에 오랫동안 적대적이었던 맥윌리엄 가문과 맥헤스 가문의 반란에 직면했으나, 왕당파 군대는 이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다.[3] 같은 해, 알렉산더 2세는 잉글랜드의 존 왕에 대항하는 잉글랜드 귀족들의 투쟁에 가담하여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왕국으로 진입했다.[3] 이로 인해 존 왕의 군대는 북부 지역을 약탈했고, 버윅어폰트위드가 약탈당했다.
1216년 9월, 스코틀랜드 군대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도버 항에 도착했고, 알렉산더 2세는 존 왕을 대신하여 귀족들이 선택한 프랑스의 루이 8세에게 잉글랜드 내 자신의 영지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 존 왕이 사망한 후 교황과 잉글랜드 귀족들은 존의 아들인 헨리 3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군대는 귀국했다.[4] 1217년 9월 12일, 킹스턴 조약으로 헨리 3세, 루이 8세, 알렉산더 2세 사이에 평화가 맺어졌다. 1221년 알렉산더 2세와 헨리 3세의 누이인 조앤의 결혼으로 외교적 화해가 더욱 공고해졌다.
1222년, 오크니 백작이었던 마지막 스칸디나비아 출신 원주민인 존 하랄드손은 케이쓰네스 지역 농부들이 멜로즈의 아담을 불태운 사건에 연루되었다. 알렉산더 2세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오크니 백작령 본토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케이쓰네스를 직접 방문하여 농부들을 처형하고 잔혹하게 고문했다. 그의 행동은 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칭찬을 받았다.
같은 시기에 알렉산더 2세는 반독립적인 아가일 지역을 정복했다. 1235년 왕실 군대는 갈로웨이의 반란을 진압했고,[4] 망명한 지도자들의 침공 시도도 좌절시켰다. 이후 헨리 3세의 충성 맹세 요구에 알렉산더 2세는 북부 잉글랜드 카운티에 대한 반대 주장을 제기했으나, 1237년 요크 조약을 통해 두 왕국은 솔웨이 만과 트위드 강 어귀 사이로 경계를 확정하며 분쟁을 해결했다.[3]
3. 1. 즉위와 대관식
1215년, 알렉산더 2세는 즉위 직후 스코틀랜드 왕권에 오랫동안 적대적이었던 맥윌리엄(MacWilliam) 가문과 맥헤스(MacHeths) 가문의 반란에 직면했으나, 왕당파 세력이 신속하게 진압하였다.[3] 같은 해, 알렉산더 2세는 잉글랜드의 존 왕에 맞서 싸우던 잉글랜드 귀족들의 편에 서서 잉글랜드 왕국으로 군대를 이끌었다.[3] 이로 인해 존 왕의 군대가 북부 지역을 유린하고 버윅어폰트위드(Berwick-upon-Tweed)를 약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스코틀랜드 군대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도버(Dover) 항에 도착했고, 1216년 9월 알렉산더 2세는 존 왕의 후계자로 귀족들이 지목한 프랑스의 루이 8세(Louis VIII of France)에게 잉글랜드 내 자신의 영지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4] 그러나 존 왕이 사망하자 교황과 잉글랜드 귀족들은 존 왕의 아들인 헨리 3세(Henry III of England)에게 충성을 바쳤고,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군대는 귀국해야 했다.[4] 1217년 9월 12일 킹스턴 조약(Treaty of Kingston)을 통해 헨리 3세, 루이 8세, 알렉산더 2세 사이에 평화가 성립되었다.[4] 1221년 알렉산더 2세와 헨리 3세의 누이인 조앤(Joan of England, Queen of Scotland)의 결혼으로 외교적 화해가 더욱 강화되었다.
1222년, 당시 스칸디나비아 스코틀랜드(Scandinavian Scotland)의 일부였던 케이쓰네스(Caithness) 지역에서 농부들이 멜로즈의 아담(Adam of Melrose)을 화형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오크니 백작(Earl of Orkney) 존 하랄드손(Jon Haraldsson)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알렉산더 2세는 이 기회를 틈타 오크니(Orkney) 백작령 본토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케이쓰네스를 직접 방문하여 농부들을 처형하고 잔혹하게 고문했으며, 이러한 행동은 교황 호노리우스 3세(Pope Honorius III)의 칭찬을 받았다.
알렉산더 2세는 1235년 갈로웨이(Galloway)의 반란을 진압하고,[4] 망명한 지도자들의 침공 시도 또한 저지했다. 이후 헨리 3세의 충성 맹세 요구에 맞서 북부 잉글랜드 카운티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으나, 1237년 요크 조약(Treaty of York)을 통해 두 왕국은 타협을 이루었다.[3][4] 이 조약으로 두 왕국의 경계는 솔웨이 만(Solway Firth)과 트위드 강(River Tweed) 어귀 사이로 확정되었다.
1238년 첫 번째 부인 조앤이 사망하자, 알렉산더 2세는 1239년 마리 드 쿠시(Marie de Coucy)와 재혼하여 1241년 아들 알렉산더 3세(Alexander III of Scotland)를 얻었다.
1243년 헨리 3세의 침략 위협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으나, 알렉산더 2세의 신속한 대응과 잉글랜드 귀족들의 전쟁 반대로 1244년 뉴캐슬 조약(Treaty of Newcastle (1244))이 체결되었다.[4]
이후 알렉산더 2세는 노르웨이(Norway) 영토였던 서부 제도(Western Isles) 확보에 주력하며 협상과 매수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3][4] 결국 알렉산더 2세는 서부 제도를 정복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1249년 원정 도중 사망했다.[5] 서부 제도(헤브리디스 제도(Hebrides)) 분쟁은 1266년 마그누스 6세(Magnus VI of Norway)가 맨섬(Isle of Man)과 함께 스코틀랜드에 할양하면서 해결되었다.[6]
잉글랜드의 연대기 작가 매슈 패리스(Matthew Paris)는 ''대연대기(Chronica Majora)''에서 알렉산더 2세를 붉은 머리로 묘사하며, 존 왕이 그를 "붉은 여우 새끼"라고 조롱했다고 기록했다.[7]
3. 2. 초기 반란 진압
1215년, 알렉산더 2세는 즉위 직후 스코틀랜드 왕권에 오랫동안 적대적이었던 맥윌리엄 가문과 맥헤스 가문의 반란에 직면했으나, 왕당파 군대는 이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다.[3] 같은 해, 알렉산더 2세는 잉글랜드의 존 왕에 대항하는 잉글랜드 귀족들의 투쟁에 가담하여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왕국으로 진입했다.[3] 이로 인해 존 왕의 군대는 북부 지역을 약탈했고, 버윅어폰트위드가 약탈당했다.1216년 9월, 스코틀랜드 군대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도버 항에 도착했고, 알렉산더 2세는 존 왕을 대신하여 귀족들이 선택한 프랑스의 루이 8세에게 잉글랜드 내 자신의 영지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 존 왕이 사망한 후 교황과 잉글랜드 귀족들은 존의 아들인 헨리 3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군대는 귀국했다.[4] 1217년 9월 12일, 킹스턴 조약으로 헨리 3세, 루이 8세, 알렉산더 2세 사이에 평화가 맺어졌다. 1221년 알렉산더 2세와 헨리 3세의 누이인 조앤의 결혼으로 외교적 화해가 더욱 공고해졌다.
1222년, 오크니 백작이었던 마지막 스칸디나비아 출신 원주민인 존 하랄드손은 케이쓰네스 지역 농부들이 멜로즈의 아담을 불태운 사건에 연루되었다. 알렉산더 2세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오크니 백작령 본토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케이쓰네스를 직접 방문하여 농부들을 처형하고 잔혹하게 고문했다. 그의 행동은 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칭찬을 받았다.
같은 시기에 알렉산더 2세는 반독립적인 아가일 지역을 정복했다. 1235년 왕실 군대는 갈로웨이의 반란을 진압했고,[4] 망명한 지도자들의 침공 시도도 좌절시켰다. 이후 헨리 3세의 충성 맹세 요구에 알렉산더 2세는 북부 잉글랜드 카운티에 대한 반대 주장을 제기했으나, 1237년 요크 조약을 통해 두 왕국은 솔웨이 만과 트위드 강 어귀 사이로 경계를 확정하며 분쟁을 해결했다.[3]
4. 잉글랜드와의 관계
1215년, 알렉산더 2세는 즉위 후 왕위에 대한 오랜 숙적이었던 맥윌리엄 가문(MacWilliam)과 맥헤스 가문(MacHeths)의 반란을 왕당파 군대를 통해 신속 진압하였다. 같은 해, 잉글랜드 왕국의 존 왕에 맞선 잉글랜드 귀족들의 투쟁에 가담하여 잉글랜드 왕국으로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다.[3] 이로 인하여 존 왕의 군대가 북부를 유린하면서 버윅어폰트위드가 약탈당했다.
1216년 9월, 스코틀랜드 군대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도버 항에 도착했고, 알렉산더 2세는 존 왕을 대신하도록 귀족들이 선택한 프랑스의 루이 8세에게 잉글랜드 내 자신의 영지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 존 왕이 사망하자 교황과 잉글랜드 귀족들은 존 왕의 아홉 살 난 아들 헨리 3세에게 충성을 돌렸고,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군대는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4] 1217년 9월 12일, 킹스턴 조약으로 헨리 3세, 루이 8세, 그리고 알렉산더 2세 사이에 평화가 맺어졌다. 이후, 1221년 6월 18일 또는 25일에 알렉산더 2세와 헨리 3세의 누이인 조앤의 결혼으로 외교적 화해가 더욱 공고해졌다.
1235년, 왕실 군대는 갈로웨이의 반란을 어렵지 않게 진압했고,[4] 망명한 지도자들의 침공 시도 역시 좌절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 3세의 충성 맹세 요구에 알렉산더 2세는 잉글랜드 북부 카운티에 대한 반대 주장을 제기했지만, 1237년 요크 조약을 통해 두 왕국은 타협하고 분쟁을 해결했다.[3]
1243년, 헨리 3세의 침략 위협은 한때 두 나라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를 방해했지만, 알렉산더 2세의 신속한 조치와 잉글랜드 귀족들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1244년 뉴캐슬에서 평화 조약을 맺게 되었다.[4]
잉글랜드의 연대기 작가 매슈 패리스는 그의 ''대연대기''(Chronica Majora)에서 알렉산더 2세를 붉은 머리로 묘사하며, 존 왕이 알렉산더 2세를 조롱하며 "우리는 그의 굴에서 붉은 여우 새끼를 사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7]
4. 1. 제1차 남작 전쟁 참전
1215년, 알렉산더 2세는 즉위 후 왕위에 대한 오랜 숙적이었던 맥윌리엄 가문과 맥헤스 가문의 반란을 왕당파 군대를 통해 신속 진압하였다. 같은 해, 잉글랜드의 존 왕에 맞선 잉글랜드 귀족들의 투쟁에 가담하여 잉글랜드 왕국으로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다.[3] 이로 인하여 존 왕의 군대가 북부를 유린하면서 버윅어폰트위드가 약탈당했다.1216년 9월, 스코틀랜드 군대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도버 항에 도착했고, 알렉산더 2세는 존 왕을 대신하도록 귀족들이 선택한 프랑스의 루이 8세에게 잉글랜드 내 자신의 영지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 존 왕이 사망하자 교황과 잉글랜드 귀족들은 존 왕의 아홉 살 난 아들 헨리 3세에게 충성을 돌렸고,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군대는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4] 1217년 9월 12일, 킹스턴 조약으로 헨리 3세, 루이 8세, 그리고 알렉산더 2세 사이에 평화가 맺어졌다. 이후, 1221년 6월 18일 또는 25일에 알렉산더 2세와 헨리 3세의 누이인 조앤의 결혼으로 외교적 화해가 더욱 공고해졌다.
1235년, 왕실 군대는 갈로웨이의 반란을 어렵지 않게 진압했고,[4] 망명한 지도자들의 침공 시도 역시 좌절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 3세의 충성 맹세 요구에 알렉산더 2세는 잉글랜드 북부 카운티에 대한 반대 주장을 제기했지만, 1237년 요크 조약을 통해 두 왕국은 타협하고 분쟁을 해결했다.[3]
1243년, 헨리 3세의 침략 위협은 한때 두 나라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를 방해했지만, 알렉산더 2세의 신속한 조치와 잉글랜드 귀족들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1244년 뉴캐슬에서 평화 조약을 맺게 되었다.(Treaty of Newcastle (1244))[4]
잉글랜드의 연대기 작가 매슈 패리스는 그의 ''대연대기''에서 알렉산더 2세를 붉은 머리로 묘사하며, 존 왕이 알렉산더 2세를 조롱하며 "우리는 그의 굴에서 붉은 여우 새끼를 사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7]
4. 2. 잉글랜드와의 외교적 화해
알렉산더 2세는 즉위 직후 스코틀랜드 왕권에 대항하던 맥윌리엄 가문과 맥헤스 가문의 반란을 진압했다.[3] 같은 해, 잉글랜드의 존 왕에 맞서 잉글랜드 귀족들을 지원하여 잉글랜드 왕국으로 군대를 이끌었으며, 이로 인해 존 왕의 군대가 버윅어폰트위드를 약탈했다.[3] 스코틀랜드 군대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도버 항에 도착했고, 1216년 9월 알렉산더 2세는 프랑스의 루이 8세에게 잉글랜드 내 자신의 영지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4]1217년 9월 12일 킹스턴 조약으로 헨리 3세, 루이 8세, 알렉산더 2세 사이에 평화가 맺어졌다.[4] 1221년 알렉산더 2세는 헨리 3세의 누이인 조앤과 결혼하여 외교적 화해가 더욱 공고해졌다.[4]
1235년 왕실 군대는 갈로웨이의 반란을 진압했고,[4] 헨리 3세의 충성 맹세 요구에 알렉산더 2세는 북부 잉글랜드 카운티에 대한 반대 주장을 제기했다. 그러나 두 왕국은 1237년 요크 조약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고 솔웨이 만과 트위드 강 어귀 사이를 두 왕국의 경계로 정의했다.[3][4]
1243년 헨리 3세의 침략 위협은 양국 관계를 방해했지만, 알렉산더 2세의 신속한 조치와 잉글랜드 귀족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1244년 뉴캐슬 조약이 체결되었다.[4]
4. 3. 요크 조약 체결
알렉산더 2세는 즉위 직후 스코틀랜드 왕권에 반기를 든 맥윌리엄 가문과 맥헤스 가문의 반란을 진압했다.[3] 같은 해, 잉글랜드의 존 왕에 맞서 잉글랜드 귀족들을 지원하며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왕국으로 진군했다.[3] 이로 인해 존 왕의 군대가 북부를 유린하고 버윅어폰트위드가 약탈당했다.1216년 9월, 스코틀랜드 군대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도버 항에 도착했고, 알렉산더 2세는 프랑스의 루이 8세에게 잉글랜드 내 자신의 영지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 존 왕이 사망한 후, 교황과 잉글랜드 귀족들은 헨리 3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군대는 귀국했다.[4] 1217년 9월 12일 킹스턴 조약으로 헨리 3세, 루이 8세, 알렉산더 2세 사이에 평화가 맺어졌다. 1221년 알렉산더 2세와 헨리 3세의 누이인 조앤의 결혼으로 외교적 화해가 더욱 공고해졌다.[4]
1235년 왕실 군대는 갈로웨이의 반란을 진압했고,[4]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 3세의 충성 맹세 요구에 알렉산더 2세는 잉글랜드 북부 카운티에 대한 반대 주장을 제기했다. 그러나 두 왕국은 1237년 요크 조약을 체결하여 분쟁을 해결했다.[3] 이 조약은 두 왕국의 경계를 솔웨이 만(서쪽)과 트위드 강 어귀(동쪽) 사이로 확정했다.[3]
4. 4. 뉴캐슬 조약 체결
알렉산더 2세는 1215년 잉글랜드의 존 왕에 맞선 잉글랜드 귀족들의 투쟁에 가담하여 잉글랜드 왕국으로 군대를 이끌었다.[3] 스코틀랜드 군대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도버 항에 도착했고, 1216년 9월 알렉산더 2세는 프랑스의 루이 8세에게 잉글랜드 내 자신의 영지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 그러나 존 왕이 사망하자 잉글랜드 귀족들은 그의 아들 헨리 3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군대는 귀국했다.[4] 1217년 9월 12일 킹스턴 조약으로 헨리 3세, 루이 8세, 알렉산더 2세 사이에 평화가 맺어졌다.1237년에는 요크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와의 분쟁을 해결하고 두 왕국 간의 경계를 확정지었다.[3] 1243년 헨리 3세의 침략 위협이 있었으나, 알렉산더 2세의 신속한 조치와 잉글랜드 귀족들의 전쟁 반대로 1244년 뉴캐슬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4]
5. 국내 정책
알렉산더 2세는 즉위 직후 스코틀랜드 왕권에 대항하던 맥윌리엄 가문(MacWilliam)과 맥헤스 가문(MacHeths)의 반란을 진압했다.[3] 같은 해, 잉글랜드의 존 왕에 맞서 잉글랜드 귀족들과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왕국으로 군대를 이끌었다.[3] 1216년 9월,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도버(Dover) 항에 도착한 스코틀랜드 군대를 이끌고, 알렉산더 2세는 존 왕의 후임으로 잉글랜드 귀족들이 내세운 프랑스의 루이 8세에게 잉글랜드 내 자신의 영지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4] 그러나 존 왕이 사망하자 교황과 잉글랜드 귀족들은 존 왕의 아들인 헨리 3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군대는 귀국해야 했다.[4]
1217년 9월 12일 킹스턴 조약으로 헨리 3세, 루이 8세, 알렉산더 2세 사이에 평화가 맺어졌다.[4] 1221년 알렉산더 2세가 헨리 3세의 누이 조앤과 결혼하면서 외교적 화해는 더욱 진전되었다.
1222년, 오크니 백작(Earl of Orkney) 존 하랄드손(Jon Haraldsson)이 멜로즈의 아담 주교를 화형한 사건에 연루되자, 알렉산더 2세는 이 기회를 틈타 오크니 백작령 본토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케이쓰네스(Caithness)를 직접 방문하여 농부들을 처벌하고, 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칭찬을 받았다.[4]
동시에, 알렉산더 2세는 반독립적인 아가일(Argyll) 지역을 정복했다.[4] 1235년에는 갈로웨이(Galloway)의 반란을 진압하고,[4] 망명한 지도자들의 침공 시도도 막아냈다. 같은 시기, 헨리 3세의 충성 맹세 요구에 알렉산더 2세는 잉글랜드 북부 카운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맞섰다. 그러나 두 왕국은 1237년 요크 조약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고, 솔웨이 만(Solway Firth)과 트위드 강(River Tweed) 사이를 국경으로 확정했다.[3]
1243년 헨리 3세의 침략 위협으로 잠시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알렉산더 2세의 신속한 대응과 잉글랜드 귀족들의 전쟁 반대로 이듬해 뉴캐슬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4]
5. 1. 아가일 정복
알렉산더 2세는 즉위 직후 왕권에 도전하는 맥윌리엄 가문과 맥헤스 가문의 반란을 진압했다.[3] 1215년에는 잉글랜드의 존 왕에게 대항하는 잉글랜드 귀족들을 지원하여 잉글랜드로 진군하기도 했다.[3] 이로 인해 존 왕의 군대가 북부를 유린하면서 버윅어폰트위드가 약탈당했다.1222년, 알렉산더 2세는 오크니 백작 존 하랄드손이 연루된 멜로즈의 아담 주교 방화 사건을 계기로 케이쓰네스 지역을 평정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알렉산더 2세는 케이쓰네스 지역 농부들을 잔혹하게 처벌했고, 이는 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칭찬을 받았다.[4]
같은 시기에 알렉산더 2세는 반독립적인 아가일 지역을 정복하였다.[4] 1235년에는 갈로웨이의 반란을 진압하고,[4] 잉글랜드와의 분쟁은 1237년 요크 조약을 통해 해결되었다.[3] 이후 서부 제도(헤브리디스 제도)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나, 1249년 원정 도중 사망했다.[5][6]
5. 2. 갈로웨이 반란 진압
1215년, 알렉산더 2세는 즉위 직후 스코틀랜드 왕권에 오랫동안 적대적이었던 맥윌리엄 가문(MacWilliam)과 맥헤스 가문(MacHeths)의 반란에 직면했으나, 왕당파 군대는 이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다.[3] 같은 해, 알렉산더 2세는 잉글랜드의 존 왕에게 반기를 든 잉글랜드 귀족들의 편에 서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왕국으로 진격했다.[3] 이로 인해 존 왕의 군대가 북부 지역을 약탈하고 버윅어폰트위드(Berwick-upon-Tweed)를 함락시켰다.1235년, 왕실 군대는 갈로웨이(Galloway)에서 일어난 반란을 손쉽게 진압했으며,[4] 얼마 지나지 않아 망명한 반란 지도자들의 침공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5. 3. 행정 제도 정비
알렉산더 2세는 즉위 직후 스코틀랜드 왕권에 대항하던 맥윌리엄 가문과 맥헤스 가문의 반란을 진압했다.[3] 같은 해, 잉글랜드의 존 왕에 맞서 잉글랜드 귀족들과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왕국으로 군대를 이끌었다.[3] 1216년 9월,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도버 항에 도착한 스코틀랜드 군대를 이끌고, 알렉산더 2세는 존 왕의 후임으로 잉글랜드 귀족들이 내세운 프랑스의 루이 8세에게 잉글랜드 내 자신의 영지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4] 그러나 존 왕이 사망하자 교황과 잉글랜드 귀족들은 존 왕의 아들인 헨리 3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군대는 귀국해야 했다.[4]1217년 9월 12일 킹스턴 조약으로 헨리 3세, 루이 8세, 알렉산더 2세 사이에 평화가 맺어졌다.[4] 1221년 알렉산더 2세가 헨리 3세의 누이 조앤과 결혼하면서 외교적 화해는 더욱 진전되었다.
1222년, 오크니 백작 존 하랄드손이 멜로즈의 아담 주교를 화형한 사건에 연루되자, 알렉산더 2세는 이 기회를 틈타 오크니 백작령 본토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케이쓰네스를 직접 방문하여 농부들을 처벌하고, 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칭찬을 받았다.[4]
동시에, 알렉산더 2세는 반독립적인 아가일 지역을 정복했다.[4] 1235년에는 갈로웨이의 반란을 진압하고,[4] 망명한 지도자들의 침공 시도도 막아냈다. 같은 시기, 헨리 3세의 충성 맹세 요구에 알렉산더 2세는 잉글랜드 북부 카운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맞섰다. 그러나 두 왕국은 1237년 요크 조약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고, 솔웨이 만과 트위드 강 사이를 국경으로 확정했다.[3]
1243년 헨리 3세의 침략 위협으로 잠시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알렉산더 2세의 신속한 대응과 잉글랜드 귀족들의 전쟁 반대로 이듬해 뉴캐슬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4]
6. 서부 제도 (헤브리디스 제도) 원정과 죽음
알렉산더 2세는 아가일 영주(그리고 헤브리디스 제도의 왕)인 던컨의 아들 이웬에게 하콘 4세에 대한 충성을 끊으라고 설득하려 했다.[3] 이웬이 이러한 시도를 거부하자 알렉산더 2세는 그를 강제로 복종시키기 위해 항해를 시작했지만, 내해브리디스 제도의 케레라 섬에서 열병에 걸렸다.[3] 그는 1249년 그곳에서 사망하여 멜로즈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하코나르 사가 하코나르소나르''에 따르면, 알렉산더 2세는 이웬이 권력을 쥐고 있던 섬들을 침략하려고 시도하기 전에 성 콜룸바, 성 올라프, 그리고 성 마그누스가 꿈에 나타나 그만두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헤브리디스 제도의 이웬 왕의 군주 지위는 하콘 4세에 의해 확인되었고 알렉산더 2세에 의해 분쟁의 대상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알렉산더 2세가 헤브리디스 제도의 왕국을 스코틀랜드 왕국의 권력 아래 완전히 두려는 더 광범위한 욕망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어쨌든, 그는 결국 꿈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계획을 계속하기로 결정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이 사건은 사가에서 신의 벌로 묘사되었다. 그의 시신은 그 후 본토로 이송되었다.[9][10]
그는 그의 아들인 7살의 알렉산더 3세 (스코틀랜드)에게 계승되었다.
6. 1. 서부 제도 원정
알렉산더 2세는 아가일 영주(그리고 헤브리디스 제도의 왕)인 던컨의 아들 이웬에게 하콘 4세에 대한 충성을 끊으라고 설득하려 했다.[3] 이웬이 이러한 시도를 거부하자 알렉산더 2세는 그를 강제로 복종시키기 위해 항해를 시작했지만, 내해브리디스 제도의 케레라 섬에서 열병에 걸렸다.[3] 그는 1249년 그곳에서 사망하여 멜로즈 수도원에 매장되었다.''하코나르 사가 하코나르소나르''에 따르면, 알렉산더 2세는 이웬이 권력을 쥐고 있던 섬들을 침략하려고 시도하기 전에 성 콜룸바, 성 올라프, 그리고 성 마그누스가 꿈에 나타나 그만두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헤브리디스 제도의 이웬 왕의 군주 지위는 하콘 4세에 의해 확인되었고 알렉산더 2세에 의해 분쟁의 대상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알렉산더 2세가 헤브리디스 제도의 왕국을 스코틀랜드 왕국의 권력 아래 완전히 두려는 더 광범위한 욕망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어쨌든, 그는 결국 꿈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계획을 계속하기로 결정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이 사건은 사가에서 신의 벌로 묘사되었다. 그의 시신은 그 후 본토로 이송되었다.[9][10]
그는 그의 아들인 7살의 알렉산더 3세 (스코틀랜드)에게 계승되었다.
6. 2. 케레라 섬에서의 죽음
알렉산더 2세는 아가일 영주(그리고 헤브리디스 제도의 왕)인 던컨의 아들 이웬에게 하콘 4세에 대한 충성을 끊으라고 설득하려 했다.[3] 이웬이 이러한 시도를 거부하자 알렉산더 2세는 그를 강제로 복종시키기 위해 항해를 시작했지만, 내해브리디스 제도의 케레라 섬에서 열병에 걸렸다.[3] 그는 1249년 그곳에서 사망하여 멜로즈 수도원에 매장되었다.''하코나르 사가 하코나르소나르''에 따르면, 알렉산더 2세가 이웬이 권력을 쥐고 있던 섬들을 침략하려고 시도하기 전에 성 콜룸바, 성 올라프, 그리고 성 마그누스가 꿈에 나타나 그만두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헤브리디스 제도의 이웬 왕의 군주 지위는 하콘 4세에 의해 확인되었고 알렉산더 2세에 의해 분쟁의 대상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알렉산더 2세가 헤브리디스 제도의 왕국을 스코틀랜드 왕관의 권력 아래 완전히 두려는 더 광범위한 욕망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어쨌든, 그는 결국 꿈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계획을 계속하기로 결정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이 사건은 사가에서 신의 벌로 묘사되었다. 그의 시신은 그 후 본토로 이송되었다.[9][10]
그는 그의 아들인 7살의 알렉산더 3세 (스코틀랜드)에게 계승되었다.
7. 가족
알렉산더 2세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16][17]
1. 잉글랜드의 조앤: 1221년 6월 21일 요크 대성당에서 23세의 알렉산더 2세와 11세의 조앤이 결혼했다. 조앤은 잉글랜드의 존과 앙굴렘의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이자 세 번째 자녀였으며, 잉글랜드의 헨리 3세의 여동생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조앤은 1238년 에식스에서 사망하여 도싯의 타란트 크로포드 수도원에 매장되었다.[16]
2. 마리 드 쿠시: 1239년 5월 15일 프랑스 귀족 앙게랑 3세 드 쿠시의 딸인 마리 드 쿠시와 결혼하여 1남을 두었다. 마리 드 쿠시는 알렉산더 2세 사후, 프랑스 귀족이자 예루살렘 왕 장 드 브리엔느의 아들인 장 드 브리엔느와 재혼했다.[17]
- 알렉산더 3세 (1241년 - 1286년) - 스코틀랜드 왕 (1249년 - 1286년)
알렉산더 2세는 또한 사생녀 마조리(Marjorie)를 두었는데, 그녀는 앨런 더워드와 결혼했다.
8. 평가와 영향
8. 1. 긍정적 평가
8. 2. 부정적 평가
8. 3. 더불어민주당 관점
9. 대중 문화
알렉산더 2세는 여러 역사 소설에서 등장한다.
참조
[1]
웹사이트
Isabella (Isabella Bigod)
https://www.oxforddn[...]
2024-05-05
[2]
웹사이트
Isabella, countess of Norfolk
https://magnacarta80[...]
2024-05-05
[3]
백과사전
Alexander II (king of Scotland)
[4]
웹사이트
Alexander II, King of Scots 1214–1249
http://www.bbc.co.uk[...]
[5]
서적
Scotland A Concise History, Fourth Edition
Thames & Hudson
[6]
웹사이트
Alexander III King of Scotland
https://www.britanni[...]
2017-11-28
[7]
서적
Scottish annals from English chroniclers A.D. 500 to 1286
[8]
서적
Armies of Feudal Europe 1066–1300
https://books.google[...]
Lulu.com
2017-10-11
[9]
구텐베르크
[10]
웹사이트
Alexander II (1198–1249), king of Scots
https://www.oxforddn[...]
2021-12-29
[11]
웹사이트
Tranter First Edition Books, Publication Timeline
http://cunninghamh.t[...]
[12]
웹사이트
Alexander II king of Scotland
https://www.britanni[...]
[13]
서적
(저자명칭 생략)
[14]
서적
(저자명칭 생략)
[15]
서적
(저자명칭 생략)
[16]
서적
(저자명칭 생략)
[17]
서적
(저자명칭 생략)
[18]
백과사전
Alexander II. (king of Scotland)
[19]
웹사이트
Alexander II, King of Scots 1214 – 1249
http://www.bbc.co.uk[...]
[20]
서적
Scottish annals from English chroniclers A.D.500 to 1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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