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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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더 뢰어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에서 복무한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공군으로 전속되어 폴란드 바르샤바,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폭격을 지휘했으며,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진압 작전을 수행했다.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1947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뢰어를 기리는 추모 명판이 설치되었으나 논란 끝에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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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더 뢰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출생일 | 1885년 5월 20일 |
| 출생지 | 드로베타-투르누 세베린, 메헤딘치 주, 루마니아 왕국 |
| 사망일 | 1947년 2월 26일 |
| 사망지 | 베오그라드, 세르비아 인민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
| 사망 원인 | 총살형 |
![]() | |
| 소속 | |
| 국가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906년–1918년) 오스트리아 (1918년–1938년) 나치 독일 (1938년–1945년) |
| 군 |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오스트리아 연방군 오스트리아 공군 (1927년–1938년) (1927년–1938년) 독일 국방군 공군 (1938년–1945년) |
| 복무 기간 | 1906년–1945년 |
| 최종 계급 | 상급대장 |
| 지휘 | |
| 지휘한 부대 | 제4 공군 함대 E 집단군 남동부 최고사령부 |
| 참전 | |
| 주요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크레타 전투 응징 작전 (1941년) 유고슬라비아 전역 (제2차 세계 대전) 아드리아 해 전역 (제2차 세계 대전) 도데카네세 제도 전역 |
| 훈장 | |
| 주요 훈장 | 기사 철십자 훈장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 |
2. 초기 생애 및 경력
1900년 1월, 뢰어는 루마니아 티미쇼아라(Temeswar)에 있는 보병 사관학교로 전학했다.[1] 1903년 비엔나로 배치되어 1906년까지 부르크비너노이슈타트(Burg Wiener Neustadt)에 있는 테레지안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1]
2. 1. 출생 및 가족 배경
알렉산더 뢰어는 1885년 5월 20일 루마니아 왕국 투르누세베린(Drobeta-Turnu Severi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요한 뢰어는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1878년) 당시 흑해에서 병원선의 2등 대위로 복무했으며, 이때 우크라이나 출신 간호사였던 어머니 카타리나 하이만을 만났다. 그의 어머니는 오데사 출신 군의관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하이만의 딸이었다.[1]1879년 결혼 후, 두 사람은 루마니아 투르누세베린으로 이주하여 세 아들을 낳았다. 뢰어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동방 정교회 신자였으며, 독일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루마니아어를 구사하며 자랐다. 1900년까지 슬로바키아 코시체(Kaschau)에 있는 군사 중등 학교에 다녔다.[1]
2. 2. 군 경력
뢰어는 1906년 8월 18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테레지안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날 소위로 예편된 후 즉시 현역 복무를 자원했다.[1]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 제85보병연대의 공병대대 소대장으로 복무했다.[2] 1921년까지 중령으로 진급했고, 1921년부터 1934년까지 연방군부 장관실 공군국장 등 여러 군 참모직을 역임했다. 1934년 소규모 오스트리아 공군 사령관이 되었고, 1938년 합병될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3. 제2차 세계 대전
1938년 3월 15일, 뢰어는 독일 공군으로 전속되어 오스트리아 주둔 독일 공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 당시 그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1941년 5월 3일, 뢰어는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1942년 7월 12일부터 12월까지 제12군을 지휘했다.
1942년 8월 1일 동남유럽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942년 12월 28일 이 직책은 동남유럽 최고 사령관(OB Südost, Commander-in-chief in southeast Europe)으로 변경되었다. 그의 지휘하에 있는 병력은 또한 E군집단(Army Group E)으로 지정되었으며, 그는 그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8월 26일, 연합군이 3개 전선에서 독일을 공격하자 히틀러는 뢰어에게 그리스에서 E군집단을 철수하여 북쪽으로 이동하여 조국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럽 전쟁이 끝날 무렵, 뢰어는 무조건 항복 명령을 받았지만, 대신 자신의 부대에게 오스트리아로 돌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역사가 요조 토마세비치(Jozo Tomasevich)에 따르면, 뢰어는 1945년 5월 9일 슬로베니아에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제14슬로베니아 사단에 의해 체포되었고, 자신의 부대가 오스트리아로 이동할 수 있도록 협상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거부되었고, 뢰어는 전투 중지를 명령하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부대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탈출하여 항복 명령을 취소하고 돌파 시도를 계속했다. 치열한 추격 끝에 뢰어는 5월 13일 재체포되었다.
3. 1. 주요 참전 작전
뢰어는 1939년 5월부터 1942년 6월까지 동부전선에서 제4항공함대(Luftflotte 4) 사령관을 역임했다. 제4항공함대는 1939년 9월 폴란드 제2공화국의 바르샤바를 폭격했고, 1941년 4월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베오그라드를 폭격했다(1941년 보복 작전 참조).[1] 뢰어는 베오그라드를 소이탄으로 먼저 폭격하여 화재가 야간 공격의 표적 식별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2][3]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3. 2.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진압 작전
뢰어는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베오그라드를 폭격하는 작전(보복 작전)을 지휘했다. 뢰어는 베오그라드를 소이탄으로 먼저 폭격하여 화재가 야간 공격의 표적 식별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3]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뢰어는 1941년 5월 3일을 기해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1942년 7월 12일부터 12월까지 제12군을 지휘했다.
뢰어는 1943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대한 제4차(바이스 작전, Case White영어) 및 제5차(슈바르츠 작전, Case Black영어) 공세를 지휘했으며, 이 기간 동안 부상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포로들이 현장에서 학살되었다.
3. 3. 도데카네소스 전역
뢰어는 1939년 5월부터 1942년 6월까지 동부전선에서 제4항공함대(Luftflotte 4) 사령관을 역임했다.제4항공함대는 1939년 9월 폴란드 제2공화국의 바르샤바를 폭격했고, 1941년 4월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베오그라드를 폭격했다(1941년 보복 작전 참조). 뢰어는 베오그라드를 소이탄으로 먼저 폭격하여 화재가 야간 공격의 표적 식별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1][2]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1941년 5월 3일, 뢰어는 대장(colonel general)으로 진급했다. 그는 1942년 7월 12일부터 12월까지 제12군을 지휘했다.
4. 전쟁 이후
1955년, 비엔나 항공 클럽 회원들이 비엔나의 슈티프트키르헤 교회에 뢰어를 기리는 추모 명판을 설치했다. 이 교회는 군종교구에 속해 있었다. 명판에는 "잊혀지지 않은 동지 알렉산더 뢰어 대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군종교구는 "추모 명판은 [...] 전쟁 범죄를 미화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라고 해명했다.[2] 일부 항의가 제기된 후, 명판은 1986년 발트하임 사건 당시 제거되었지만 몇 년 후 다시 나타났다. 마침내 2015년에 완전히 제거되었다.[3]
4. 1. 체포 및 재판

뢰어는 1945년 5월 15일부터 1947년 2월 26일까지 유고슬라비아에 투옥되었다. 그는 1943년 반파르티잔 작전 중 인질 살해와 마을 방화, 그리고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무시한 행위를 포함한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 1947년 2월 16일, 법원은 국가 및 국가에 대한 범죄 행위에 관한 법률 제3조 제3항에 따라 뢰어에게 사형(총살)을 선고했으며, 공동 피고인인 요제프 퀴블러(Josef Kübler) 중장, 프리츠 나이트홀트(Fritz Neidholdt), 요한 포트너(Johann Fortner), 아달베르트 론차르(Adalbert Lontschar) 소장, 귄터 트리부카이트(Günther Tribukait) 대령, 아우구스트 슈미트후버(August Schmidhuber) SS-여단 지휘관에게는 교수형을 선고했다.[1]
4. 2. 처형
뢰어는 1945년 5월 15일부터 1947년 2월 26일까지 유고슬라비아에 투옥되었다. 1943년 반파르티잔 작전 중 인질 살해, 마을 방화, 독일의 무조건 항복 무시 등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 1947년 2월 16일, 법원은 국가 및 국가에 대한 범죄 행위에 관한 법률 제3조 제3항에 따라 뢰어에게 사형(총살)을 선고했다. 공동 피고인인 요제프 퀴블러(Josef Kübler) 중장, 프리츠 나이트홀트(Fritz Neidholdt), 요한 포트너(Johann Fortner), 아달베르트 론차르(Adalbert Lontschar) 소장, 귄터 트리부카이트(Günther Tribukait) 대령, 아우구스트 슈미트후버(August Schmidhuber) SS-여단 지휘관은 교수형을 선고받았다.[1]참조
[1]
웹사이트
Ljudska pravica
http://www.dlib.si/l[...]
1947-02-17
[2]
웹사이트
Empörung über Gedenktafel für NS-Kriegsverbrecher in Wiener Stiftskirche
https://www.derstand[...]
2023-11-12
[3]
웹사이트
Stiftskirche: Nazi-Ehrentafel entfernt
https://wien.orf.at/[...]
202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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