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으로, 유럽 열강 간의 복잡한 동맹 관계, 군비 경쟁, 발칸 반도의 불안정한 정세 등이 그 배경이 되었다.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독일의 슐리펜 계획 실패로 서부 전선이 참호전으로 고착화되었다. 동부 전선에서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했고, 미국이 참전하면서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했다. 전쟁 결과,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었고, 4천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베르사유 조약 체결로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제1차 세계 대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주요 정보 | |
![]() | |
분쟁 | 제1차 세계 대전 |
날짜 | 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 (4년 3개월 14일) |
장소 | 유럽, 아프리카, 중동, 태평양 제도, 중국,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해안 등 전 세계 |
결과 | 연합국 승리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유럽 및 중동에서 여러 나라들이 독립 독일의 식민지 및 오스만 제국령 지역이 영국이나 프랑스 등에게 할양 국제 연맹의 설립 기타...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연합국 (1917년까지) (1915년부터) |
교전국 1 (1916년부터) | |
교전국 1 (1917년부터) | 시암 |
교전국 1 (1918년부터) | ...기타 연합국 |
교전국 2 | 동맹국 |
교전국 2 (1915년부터) | 세누시 |
교전국 2 (1916년부터) | 중앙아시아 반군 카자흐인 키르기즈인 |
교전국 2 (1918년부터) | ...기타 동맹국 |
지휘관 | |
연합국 지휘관 | 조지 5세 허버트 키치너 (전사)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조르주 클레망소 레몽 푸앵카레 필리프 페탱 페르디낭 포슈 니콜라이 2세 니콜라이 니콜라이비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비토리오 오를란도 루이지 카도르나 안토니오 사란드라 다이쇼 천황 오쿠마 시게노부 데라우치 마사타케 위안스카이 리위안훙 돤치루이 펑궈장 요르요스 1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우드로 윌슨 토머스 마셜 존 조지프 퍼싱 페르디난드 1세 콘스탄틴 프레잔 ...기타 지휘관 |
동맹국 지휘관 | 빌헬름 2세 파울 폰 힌덴부르크 에리히 루덴도르프 에리히 폰 팔켄하인 헬무트 폰 몰트케 프란츠 요제프 1세† (1914~1916) 카를 1세 (1916~1918) 프란츠 폰 회첸도르프 아르츠 폰 스트라우센부르크 메흐메트 5세 엔베르 파샤 탈라트 파샤 아흐메드 제말 무스타파 케말 페르디난드 1세 니콜라 제코프 ...기타 동맹국 지휘관 |
병력 규모 | |
연합국 총 병력 | 43,231,850명 |
동맹국 총 병력 | 25,248,321명 |
연합국 병력 | 12,000,000명 8,841,541명 8,660,000명 5,615,140명 4,743,826명 1,234,000명 800,000명 707,343명 380,000명 250,000명 |
동맹국 병력 | 13,250,000명 7,800,000명 2,998,321명 1,200,000명 |
사상자 | |
연합국 사상자 | 병사 사망자: 5,525,000명 병사 부상자: 12,831,500명 병사 실종자: 4,121,000명 총 합: 22,477,500명 ...기타 자세한 목록 |
동맹국 사상자 | 병사 사망자: 4,386,000명 병사 부상자: 8,388,000명 병사 실종자: 3,629,000명 총 합: 16,403,000명 ...기타 자세한 목록 |
기타 | |
관련 문서 | 유럽 전구 발칸반도 전선 서부 전선 동부 전선 이탈리아 전선 중동 전구 캅카스 전역 페르시아 전역 갈리폴리 전역 메소포타미아 전역 시나이-팔레스타인 전역 남아라비아 전역 아랍 반란 아프리카 전구 남서아프리카 전역 서아프리카 전역 동아프리카 전역 북아프리카 전역 아시아 태평양 전구 칭다오 전투 독일령 사모아 점령 아메리카 전구 U-보트 전역 지중해 해전 |
2. 명칭
1914년 10월 캐나다 잡지 맥클린스에서는 "어떤 전쟁은 스스로 이름을 붙인다. 그것이 대전(Great War)이다"라고 말했다.[472] 1914년 말 뉴욕에서 발행한 전쟁의 기원 및 초기 역사에 관한 책의 제목은 "세계 대전"(World War)라는 이름으로 붙여졌다.[473] 전간기 기간 동안, 영미권에서는 이 전쟁을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Great war)라고 불렀다.
19세기 유럽 강대국들은 유럽 전역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1900년에는 복잡한 정치 및 군사적 동맹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465] 1815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신성 동맹으로 부터 시작하여,[465] 1873년 10월에는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사이 삼제 동맹(Dreikaiserbund)을 체결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간에 발칸반도에 대한 정책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7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삼제 동맹에 탈퇴하여 독오 동맹을 따로 만들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면서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반대로 증가하게 되었다.[465] 이 독오 동맹은 1882년 이탈리아 왕국이 가입하면서 삼국 동맹으로 변화했다.[476]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에는 세계 대전(World War영어) 또는 대전(The Great War영어)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73] 혹은 유럽 대전(War in Europe영어)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the war to end war영어[174])이라는 표현도 있었다.[174][175] 1914년 8월, ''인디펜던트'' 잡지는 "이것이 대전입니다. 스스로 이름을 붙였습니다."라고 보도했다.[1] 당시 유럽인들은 이 전쟁을 "전쟁을 종식시키는 전쟁"이라고 언급했으며, 전례 없는 규모, 파괴, 그리고 인명 손실 때문에 "모든 전쟁을 종식시키는 전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3]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용어는 1914년 9월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헤켈이 "'유럽 전쟁'의 두려움에 관한 과정이나 성격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중략) 단어의 전체적 의미에서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시작되었다.[474]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은 장교이자 저널리스트인 찰스 아 코르트 레핑턴(Charles à Court Repington)이 지은 1920년대 역사책 제목이기도 했다.[475]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이 보편화되었으며 캐나다와 영국에서는 ‘First World War’이라는 용어를, 미국에서는 ‘World War I’이라는 용어로 사용한다.
“세계 전쟁”(Weltkriegde)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독일 제국이었으며, 이 명칭이 사용된 배경에는 독일의 제국주의 정책인 “세계 정책”(Weltpolitikde)의 존재 등이 있었다고 한다. 1917년 미국 참전 후, 미국 내에서도 “세계 전쟁”이라는 명칭이 기존의 “유럽 전쟁”을 대체했다.
“대전”(Great War영어, la Grande Guerre프랑스어)이라는 용어는 주로 대전 중 영국과 프랑스에서 사용되었다. 캐나다에서도 1914년 10월호의 가 “대전”(Great War영어)이라고 했다.[179] 1930년대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세계 전쟁”이 제1차 세계 대전의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2014년에도 제1차 세계 대전을 가리켜 “대전”이라고 부르는 용법이 양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역사학자 가레스 글로버(Gareth Glover)는 저서 『100의 물건이 말하는 워털루』(Waterloo in 100 Objects영어)에서 “이 서문은 대전이라는 명칭이 항상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제1차 세계 대전을 의미하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1918년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대전이라는 칭호는 영국이 1793년부터 1815년까지 22년 동안 프랑스와 싸운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의미했다.”라고 말했다.[180]
3. 배경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 두 나라간의 양면전선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독일과 러시아간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가 독일의 황제 지위에 오르면서 비스마르크는 퇴위를 강요당했고 비스마르크가 세운 동맹 시스템은 점차 해체되었다. 예를 들어, 빌헬름 2세는 1890년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 갱신을 거부했다. 4년 후인 1894년, 3제 동맹을 막기 위하여 러불 동맹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1904년,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영불 협상(Entente Cordiale)을 맺었으며 1907년에는 영국이 영러 협상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공식적으로 영국-프랑스-러시아 동맹으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프랑스나 러시아가 분쟁을 겪을 경우 영국이 참가하게 된다는 항목이 있었으며, 이러한 양자 연동 협정을 삼국 협상으로 알려졌다.[465]
1871년 이후 프랑스 정책의 주요 목표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패배에 대한 보복이었지만,[4] 1890년대 초에는 프랑스 식민 제국의 확장으로 바뀌었다. 1877-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가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 확장에 대한 우려 때문에 삼황동맹은 해체되었다. 발칸 반도는 오스트리아가 중대한 전략적 이익으로 간주하는 지역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879년 이중동맹을 체결했고, 1882년 이탈리아가 가입하면서 삼국동맹이 되었다.[171] 비스마르크에게 이러한 협정의 목적은 세 제국이 서로 간의 분쟁을 해결하도록 함으로써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1887년 비스마르크는 독일과 러시아 간의 비밀 협정인 재보험 조약을 체결하여, 어느 한 쪽이 프랑스 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의해 공격받는 경우 중립을 유지하기로 했다.[171]
비스마르크에게 러시아와의 평화는 독일 외교 정책의 기반이었지만, 1890년 그는 빌헬름 2세에 의해 은퇴를 강요당했다. 후임자는 새로운 총리인 레오 폰 카프리비의 설득에 따라 재보험 조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이것은 프랑스가 1894년 프랑스-러시아 동맹에 동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그 후 1904년 영국과의 ''앙탕트 코르디알''이 이어졌다. 삼국 협상은 1907년 영국-러시아 협약에 의해 완성되었다. 공식적인 동맹은 아니었지만, 오랜 아시아 및 아프리카 식민지 분쟁을 해결함으로써, 미래의 어떤 분쟁에서도 영국이 프랑스 또는 러시아를 지지할 가능성이 생겼다.[171] 이것은 1911년 아가디르 사건에서 독일을 상대로 프랑스를 지지한 영국과 러시아의 지원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3. 1. 정치 및 군사적 동맹
19세기 유럽 강대국들은 유럽 전역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1900년에는 복잡한 정치 및 군사적 동맹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465] 1815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신성 동맹으로 부터 시작하여,[465] 1873년 10월에는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사이 삼제 동맹(Dreikaiserbund)을 체결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간에 발칸반도에 대한 정책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7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삼제 동맹에 탈퇴하여 독오 동맹을 따로 만들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면서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반대로 증가하게 되었다.[465] 이 독오 동맹은 1882년 이탈리아 왕국이 가입하면서 삼국 동맹으로 변화했다.[476]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 두 나라간의 양면전선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독일과 러시아간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가 독일의 황제 지위에 오르면서 비스마르크는 퇴위를 강요당했고 비스마르크가 세운 동맹 시스템은 점차 해체되었다. 예를 들어, 빌헬름 2세는 1890년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 갱신을 거부했다. 4년 후인 1894년, 3제 동맹을 막기 위하여 러불 동맹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1904년,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영불 협상(Entente Cordiale)을 맺었으며 1907년에는 영국이 영러 협상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공식적으로 영국-프랑스-러시아 동맹으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프랑스나 러시아가 분쟁을 겪을 경우 영국이 참가하게 된다는 항목이 있었으며, 이러한 양자 연동 협정을 삼국 협상으로 알려졌다.[465]
1871년 이후 프랑스 정책의 주요 목표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패배에 대한 보복이었지만,[4] 1890년대 초에는 프랑스 식민 제국의 확장으로 바뀌었다. 1877-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가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 확장에 대한 우려 때문에 삼황동맹은 해체되었다. 발칸 반도는 오스트리아가 중대한 전략적 이익으로 간주하는 지역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879년 이중동맹을 체결했고, 1882년 이탈리아가 가입하면서 삼국동맹이 되었다.[171] 비스마르크에게 이러한 협정의 목적은 세 제국이 서로 간의 분쟁을 해결하도록 함으로써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1887년 비스마르크는 독일과 러시아 간의 비밀 협정인 재보험 조약을 체결하여, 어느 한 쪽이 프랑스 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의해 공격받는 경우 중립을 유지하기로 했다.[171]
비스마르크에게 러시아와의 평화는 독일 외교 정책의 기반이었지만, 1890년 그는 빌헬름 2세에 의해 은퇴를 강요당했다. 후임자는 새로운 총리인 레오 폰 카프리비의 설득에 따라 재보험 조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이것은 프랑스가 1894년 프랑스-러시아 동맹에 동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그 후 1904년 영국과의 ''앙탕트 코르디알''이 이어졌다. 삼국 협상은 1907년 영국-러시아 협약에 의해 완성되었다. 공식적인 동맹은 아니었지만, 오랜 아시아 및 아프리카 식민지 분쟁을 해결함으로써, 미래의 어떤 분쟁에서도 영국이 프랑스 또는 러시아를 지지할 가능성이 생겼다.[171] 이것은 1911년 아가디르 사건에서 독일을 상대로 프랑스를 지지한 영국과 러시아의 지원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3. 2. 군비 경쟁
1871년 보불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고 독일이 통일된 이후, 독일의 산업 및 경제력은 급격히 성장하였다. 1890년대 중반부터 빌헬름 2세는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지휘하는 독일 제국해군에 중요한 경제 자원을 투자하여 영국 해군과 해군 군비 경쟁을 하게 되었다.[477]
1871년 이후 독일의 경제력과 산업력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빌헬름 2세의 지원을 받은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 제독은 이러한 성장을 이용하여 영국의 왕립 해군과 경쟁할 수 있는 제국 해군을 건설하고자 했다. 이 정책은 미국의 해군 전문가 알프레드 테이어 메이헌의 연구에 기반을 두었다. 메이헌은 세계적인 권력 투사를 위해서는 청해군을 보유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으며, 티르피츠는 그의 저서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빌헬름 2세는 그의 고문들과 고위 군 관계자들에게 필독서로 지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빌헬름 2세가 왕립 해군에 대한 동시적인 존경심과 그것을 능가하려는 욕망에 의해 추진된 감정적인 결정이기도 했다. 비스마르크는 영국의 해상 패권이 안전한 한 영국이 유럽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1890년 그의 해임은 정책의 변화를 가져왔고 영국과 독일의 해군 군비 경쟁이 시작되었다. 티르피츠가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1906년에 발사된 드레드노트(HMS Dreadnought)는 영국에 기술적 우위를 제공했다.[477]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인 1871년 독일 통일이 달성되고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독일의 정치 및 경제력이 크게 성장했다. 1890년대 중반 이후 빌헬름 2세가 이끄는 독일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막대한 자원을 투입,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이 이끄는 독일 제국 해군을 설립하여 해군 우위를 놓고 영국 해군과 경쟁했다.[186]
그 결과, 두 나라는 주력함 건조에서 서로를 앞지르려 했다. 1906년 영국의 드레드노트가 취역하여 영국 해군의 우세를 확대했다.[186] 영국과 독일 간의 군비 확장 경쟁은 유럽 전체를 끌어들였고, 열강들은 모두 자국의 산업 기반을 군비 확장에 투입하여 유럽 전쟁에 필요한 장비와 무기를 준비했다.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유럽 국가의 군비 지출은 50% 상승했다.[479]
3. 3. 발칸 반도의 분쟁
발칸반도는 '유럽의 화약고'로 불릴 만큼 정세가 불안했다.[48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87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한 후 1908년 정식으로 합병하면서 보스니아 위기를 야기했다.[480] 이는 세르비아와 범슬라브주의를 지지하는 러시아 제국을 자극했다.[480]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발칸 동맹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런던 조약으로 알바니아 공국이 독립하고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왕국, 그리스 왕국이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1913년 6월 16일 불가리아가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하면서 제2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고, 33일 만에 불가리아가 패배하면서 발칸반도는 더욱 불안정해졌다.[481]
이처럼 발칸 반도에서 발생한 일련의 분쟁은 유럽 전체로 확산될 위험을 안고 있었으며,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5][6][7]
4. 서막
=== 사라예보 사건 ===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다.[484][485] 세르비아의 흑수단이 지원하는 청년 보스니아 민족주의 단체의 암살단 6명 (쳬베코 포포비치(Cvjetko Popović), 가브릴로 프린치프, 무함마드 메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šić), 네델코 차브리노비치(Nedeljko Čabrinović), 트리프코 그라베츠(Trifko Grabež), 바소 쿠브릴로비치(Vaso Čubrilović))은 대공의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서 있었다. 이들은 세르비아 흑수단 정보기관 내 극단주의자들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았으며, 대공의 죽음이 보스니아를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차브리노비치가 차에 수류탄을 던졌지만 빗나갔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다른 암살자들은 차가 빠르게 지나쳐 암살할 수 없었다. 약 한 시간 후,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병원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 그의 차가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프린치프가 서 있던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프린치프는 권총을 발사해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를 암살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내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울 정도로 무관심한 수준이었다. 역사학자 즈비네크 제만(Zbyněk Zeman)은 "이 사건은 거의 어떠한 인상도 주지 못했다. 일요일과 월요일(6월 28일~29일)에 빈의 군중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음악을 듣고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라고 전했다.[484][485]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자의 살해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이를 "9/11 효과, 역사적 의미를 담은 테러 사건으로 비엔나의 정치적 분위기를 바꿔놓았다"고 묘사했다.[8]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폭력 사태의 확대 ===
사라예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는 세르비아인에 대한 폭력 사태가 확산되었다.[486][487]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이 이러한 폭력을 부추겼다는 주장이 존재한다.[9][10] 사라예보에서는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이 세르비아인 두 명을 죽이고 세르비아인 소유의 건물을 불태우는 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이 일어났다.[488]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이 사건을 "사라예보에서 증오의 열풍이 불었다"라고 표현했다.[488]
세르비아인에 대한 폭력 행위는 사라예보뿐만 아니라 현대의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에 위치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도시에서도 조직적으로 일어났다.[489]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약 5,500명의 세르비아인을 수감하고 송환했으며, 그 중 700명에서 2,200명이 감옥에서 사망했다. 세르비아인 460명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490][491][492] 주로 보스니아인으로 구성된 특별 민병대인 슈츠크롭스(Schutzkorps)가 설립되어 세르비아인들을 박해했다.[493][11][12]
=== 7월 위기 ===
사라예보 암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정부, 특히 흑수단(Crna ruka)이 암살에 연루되었다고 판단하고[494]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했다.[495]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7월 최후통첩을 보내 의도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10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495] 세르비아가 10가지 중 8가지를 수락했음에도,[495]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를 거부로 간주하고 7월 28일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194]
세르비아의 오랜 지원국인 러시아 제국은 7월 29일 부분 동원령을 내렸고,[476] 7월 30일에는 총동원령으로 전환했다.[497] 독일 제국은 베트만 홀베크 총리의 지연에도 불구하고 7월 31일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497] 같은 날, 독일은 러시아에 12시간 내에 동원령을 해제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러시아가 거부하자,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497]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프랑스를 먼저 제압하고자 했다. 독일은 프랑스에 중립을 요구했지만, 프랑스는 국경에서 10km 후퇴하며 예비군을 동원하는 등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독일은 8월 2일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8월 3일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497] 8월 4일, 벨기에가 독일군의 통과를 거부하자 독일은 벨기에에도 선전포고했다.[497][498][499] 대영제국은 런던 조약에 따른 벨기에의 중립을 요구하며 독일에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독일이 응답하지 않자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했다.[500]
4. 1.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다.[484][485] 세르비아의 흑수단이 지원하는 청년 보스니아 민족주의 단체의 암살단 6명 (쳬베코 포포비치(Cvjetko Popović), 가브릴로 프린치프, 무함마드 메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šić), 네델코 차브리노비치(Nedeljko Čabrinović), 트리프코 그라베츠(Trifko Grabež), 바소 쿠브릴로비치(Vaso Čubrilović))은 대공의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서 있었다. 이들은 세르비아 흑수단 정보기관 내 극단주의자들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았으며, 대공의 죽음이 보스니아를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차브리노비치가 차에 수류탄을 던졌지만 빗나갔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다른 암살자들은 차가 빠르게 지나쳐 암살할 수 없었다. 약 한 시간 후,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병원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 그의 차가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프린치프가 서 있던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프린치프는 권총을 발사해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를 암살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내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울 정도로 무관심한 수준이었다. 역사학자 즈비네크 제만(Zbyněk Zeman)은 "이 사건은 거의 어떠한 인상도 주지 못했다. 일요일과 월요일(6월 28일~29일)에 빈의 군중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음악을 듣고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라고 전했다.[484][485]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자의 살해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이를 "9/11 효과, 역사적 의미를 담은 테러 사건으로 비엔나의 정치적 분위기를 바꿔놓았다"고 묘사했다.[8]
4. 2.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폭력 사태의 확대
사라예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는 세르비아인에 대한 폭력 사태가 확산되었다.[486][487]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이 이러한 폭력을 부추겼다는 주장이 존재한다.[9][10] 사라예보에서는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이 세르비아인 두 명을 죽이고 세르비아인 소유의 건물을 불태우는 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이 일어났다.[488]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이 사건을 "사라예보에서 증오의 열풍이 불었다"라고 표현했다.[488]세르비아인에 대한 폭력 행위는 사라예보뿐만 아니라 현대의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에 위치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도시에서도 조직적으로 일어났다.[489]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약 5,500명의 세르비아인을 수감하고 송환했으며, 그 중 700명에서 2,200명이 감옥에서 사망했다. 세르비아인 460명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490][491][492] 주로 보스니아인으로 구성된 특별 민병대인 슈츠크롭스(Schutzkorps)가 설립되어 세르비아인들을 박해했다.[493][11][12]
4. 3. 7월 위기
사라예보 암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정부, 특히 흑수단(Crna ruka)이 암살에 연루되었다고 판단하고[494]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했다.[495]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7월 최후통첩을 보내 의도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10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495] 세르비아가 10가지 중 8가지를 수락했음에도,[495]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를 거부로 간주하고 7월 28일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194]세르비아의 오랜 지원국인 러시아 제국은 7월 29일 부분 동원령을 내렸고,[476] 7월 30일에는 총동원령으로 전환했다.[497] 독일 제국은 베트만 홀베크 총리의 지연에도 불구하고 7월 31일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497] 같은 날, 독일은 러시아에 12시간 내에 동원령을 해제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러시아가 거부하자,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497]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프랑스를 먼저 제압하고자 했다. 독일은 프랑스에 중립을 요구했지만, 프랑스는 국경에서 10km 후퇴하며 예비군을 동원하는 등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독일은 8월 2일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8월 3일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497] 8월 4일, 벨기에가 독일군의 통과를 거부하자 독일은 벨기에에도 선전포고했다.[497][498][499] 대영제국은 런던 조약에 따른 벨기에의 중립을 요구하며 독일에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독일이 응답하지 않자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했다.[500]
5. 전쟁의 진행 과정
5. 1. 개전
5. 1. 1. 동맹국 사이의 혼란
동맹국의 전략은 잘못된 의사 소통으로 혼란을 빚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에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해석에 따라 달랐다. 이전의 군사 전개 훈련 계획은 1914년 초 개정되었지만, 개정 이후의 훈련 계획은 진행된 적이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휘관들은 독일이 러시아와 전투하면서 북부 전선을 지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501] 그러나,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하는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군의 대부분을 막을 것이라 구상하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혼란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이 세르비아 전선과 러시아 전선으로 병력이 나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5. 1. 2. 세르비아 전역

오스트리아가 침공하면서 8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세르비아군 간에 체르 전투와 콜루바라 전투가 발발했다. 이후 2주일 동안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대량의 인명 손실로 그치면서 전쟁 기간 동안 첫 번째 연합군의 주요 승리로 기록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신속한 승리에 대한 희망이 없어지고 말았다.[502]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전선에 대한 방어를 약화시키고 대신 세르비아 전선에 상당한 병력을 유지시켰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 실패는 지난 20세기동안 우월한 적을 상대로 승리한 전쟁 중 하나로 꼽힌다.[503]
이 전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어린 군인이 참전한 전역이다. 츠부스니카에 태어난 몸칠로 가브리치는 1914년 8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그의 부모, 할머니, 형제 7명이 죽은 이후 8살에 세르비아 육군 제6 포병 사단에 입대했다.[504][505][506] 10살때 그는 상병으로 승진했으며,[505][506] 11살에는 하사 대리 병장이 되었다.[506]
5. 1. 3. 벨기에와 프랑스의 독일군
독일군은 개정된 슐리펜 계획에 따라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공하여 프랑스로 진격했다.[468] 이는 보불전쟁과 같이 프랑스로부터 최대한 빨리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계획이었다. 독일군은 벨기에를 통해 영국 해협으로 진군하여 영국의 지원을 저지한 후 파리를 공격하고, 이후 대부분의 군대를 러시아로 보낼 예정이었다.
독일은 벨기에에 자유로운 통행을 요구했으나, 벨기에는 이를 거부하고 침공에 맞섰다. 결국 독일의 벨기에 침공 이후 벨기에는 프랑스군과 협력했지만, 안트베르펜으로 후퇴하여 항복했다.
독일군은 8월 11일부터 24일까지 국경 전투에서 승리하며 프랑스군을 우회하여 파리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9월 5일부터 12일까지 벌어진 1차 마른 전투에서 영국 원정군의 도움을 받은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50km 후퇴시켰다.[468] 이 전투는 서부 전선에서 기동전의 종말을 의미했다.[468]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설계하고,몰케 소장에 의해 수정된 슐리펜 계획에 따라 독일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해 진격하여 파리를 포위하고 프랑스군을 고립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몰케는 네덜란드 침공을 취소하고, 벨기에에서의 지연이 계획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8월 말, 영국 원정군을 포함한 연합군은 완전한 후퇴를 시작했고, 프랑스군 공세는 26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며 실패했다. 폰 클루크는 명령을 어기고 파리로 진격하며 독일군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영국 원정군으로 강화된 프랑스군은 반격하여 독일군을 40~80km 후퇴시켰다.
1914년 말, 독일군은 프랑스 내부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지만, 통신 문제와 의문스러운 지휘 결정으로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마른 전투 직후 황태자 빌헬름은 "우리는 전쟁에서 졌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미 졌습니다."라고 말했다.
1914년 8월 5일, 독일군은 벨기에 리에주 요새를 공격하여(리에주 전투) 8월 7일 리에주 시를 함락시켰지만, 디케 베르타라는 포위 공격용 대포를 동원하여 8월 16일에야 완전히 정복했다.[199]

독일군은 벨기에와 프랑스 민간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으며, 이는 에 의한 게릴라 공격 때문이었다. , , , 아르스호트 등에서 전쟁 범죄가 발생하여 6,500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고,[202] 로 인해 독일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203]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탈환을 목표로 뮐루즈를 일시 점령했지만, 독일군에 의해 탈환당했다.[204]
프랑스군은 로렌 지역으로 진군했지만, 독일군의 반격으로 사르브뤼켄, 롱위, 아르덴 전투, 마스 강, 섬브르 강과 마스 강 사이, 등에서 가 발생하여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군은 8월 20일부터 23일까지 4만 명의 전사자를 냈고, 22일 하루에만 2만 7천 명의 손실을 입었다.
8월 16일 리에주 함락 후, 독일군은 본격적인 공세를 개시했고, 벨기에군 대부분은 앤트워프 요새로 후퇴하여 2개월에 걸친 이 시작되었다.
영불군은 을 시작하여, (8월 26일)와 (8월 29일)를 거치며 후퇴했다.[206] 프랑스 정부는 9월 2일에 파리에서 보르도로 피난했다.
독일 제1군은 8월 20일에 브뤼셀을 점령한 후, 프랑스군과 영국 원정군을 추격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연락선은 길어지고 프랑스군의 연락선은 짧아졌다. 8월 말, 독일군의 전선이 붕괴 직전에 이르렀고, 파리 포위 계획은 8월 30일에 포기되었다.[208]
9월 6일, 제1차 마른 전투가 시작되었다. 독일 제1군은 명령을 위반하고 9월 5일에 마른 강 남쪽으로 진군했지만, 독일 제1군과 제2군 사이에 40km의 틈이 생겼고, 영불군이 9월 8일 정오 무렵에 거기에 쇄도했다. 중령은 후퇴를 결정했다.[210]
9월 9일, 소 몰트케는 신경쇠약을 앓았고,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참모총장이 되었다. 독일군은 에인 강 후방으로 후퇴했고, 9월 13일에 가 발생했지만, 참호전으로 이어졌다. 독일군은 참호를 파고 방어를 준비하여 태세를 회복했다. 독일군의 후퇴는 프랑스에서는 “마른의 기적”이라고 불렸지만, 독일에서는 비판을 받았다.[214]
9월 13일부터 10월 19일까지의 해상 경쟁에서 양군 모두 측면 공격을 시도했지만, 전선이 에인 강에서 북해 연안의 니우포르까지 확장되었다. 10월 초, 독일군은 릴, 겐트, 브뤼헤, 오스텐데를 점령했지만, 전황을 타개하지 못했다. 그 후 전장은 플랑드르로 이동했고, 영불 해협에 면한 칼레와 덩케르크를 경유하는 영국으로부터의 증원은 중단되었다.[215]
10월 20일부터 11월 18일까지 이프르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독일의 예비 부대는 와 이프르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연합군은 브뢰뉴쉬르메르와 칼레, 아미앵을 독일군으로부터 지키는 데 성공했다.[218]
행군 경쟁은 제1차 이프르 전투와 함께 종결되었다.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 참호선을 구축하였고, 전투는 참호전으로 이행하였다.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약 700km에 이르는 전선은 고정되었고, 양군의 참호 사이에는 약 50m의 간격이 생겼다.[219]
5. 1. 4.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동양 유일의 강국인 일본은 영일 동맹을 근거로 1914년 8월 15일 독일에 최후통첩을 보냈다.[508] 일본은 8월 2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11월 7일, 일본 제국 육군과 영국군 연합군은 중화민국 산둥성의 조차지인 칭다오(青島)와 자오저우만 조차지(膠州灣) 요새를 함락시켰다(칭다오 전투).[229]
일본은 독일의 미크로네시아 식민지를 장악하고 칭다오 전투를 통해 중국 산둥반도에 위치한 칭다오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가 칭다오에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순양함 SMS 카이저린 엘리자베스의 철수를 거부하자, 일본은 독일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도 전쟁을 선포했다. [508]
[[파일:Siege_of_Tsingtao,_soldiers_of_IJA_18th_division_took_over_german_trench_Kopie.jpg|thumb|right|1914년, 칭다오 공방전 당시 일본군 병사들이 버려진 독일군 참호를 점령하고 있다.
일본을 비롯한 연합국군은 몇 달 만에 태평양에 있는 독일령을 모두 탈취하고, 독자적인 통상 파괴함이나 뉴기니에서 버틴 거점 몇 곳만 남았다.[509][510]
5. 1. 5. 아프리카 전구
전쟁의 첫 번째 충돌은 아프리카에서 영국, 독일, 프랑스 사이 식민지 세력의 충돌이었다. 8월 6일~7일에 프랑스와 영국군은 토골란드 및 독일령 카메룬 지역을 침공했다. 8월 10일,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독일군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산발적이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파울 폰 레토우보르베크 대령이 이끄는 독일령 동아프리카 식민지군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유격전을 이끌었고 유럽에서 휴전이 이루어진 지 2주가 지나서야 항복하였다.[511]유럽 열강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던 아프리카 각지에서는 전쟁 초기부터 영국, 프랑스, 독일의 식민지 세력이 전투를 벌였다.
5. 1. 6. 인도의 연합국 지원
영국 정부는 인도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인도에서는 영국에 대한 충성심과 전례없는 호의가 나타나게 되었다.[512][513] 인도 국민 회의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인도 정치 지도자들은 영국의 전쟁 노력을 열심히 지원했는데, 이는 영국에 대한 전쟁 지원이 인도 자치 운동을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영국령 인도 제국군은 전쟁 초기 영국군보다 규모가 작았다. 인도 중앙 정부와 인도 토후국은 많은 음식, 돈, 탄약을 지원했고, 130만 명 가량의 인도군 및 노동자가 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지에서 자원했다. 총 14만 명이 유럽의 서부 전선으로, 70만 명이 중동 전선으로 보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인도인 47,746명이 사망했고 65,126명이 부상을 입었다.[514] 전쟁 자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전쟁 이후에도 영국 정부가 인도 자치에 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인도 자치 운동은 마하트마 간디가 주도하는 인도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17]
5. 2. 서부 전선
1914년 9월, 제1차 마른 전투 이후 삼국 협상군과 독일군은 서로의 측면을 포위하려는 기동전을 펼쳤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 결과 독일 제국은 벨기에 해안에서 로렌 지역까지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었다.[468] 독일은 점령 지역을 방어하는 데 집중했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격을 준비하기 전까지 "임시" 방어선에 머물렀다.[517]양측은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이용하여 교착 상태를 타개하려 했다. 1915년 4월 22일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처음으로 (만국 평화 회의의 헤이그 협정을 위반) 염소 가스를 사용했다.[518]
1914년 말, 대립하는 세력들은 영국 해협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이어지는 참호선을 따라 서로 마주하게 되었다.[468] 독일군은 일반적으로 고지대를 점령했고, 그들의 참호는 더 잘 건설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건설한 참호는 독일군 방어 시설을 파괴할 공격이 있기 전까지 "임시적인" 것으로 여겨졌다.[517]
9월 17일, 영국 작가 53명이 런던에서 『영국의 전쟁 옹호』 성명서를 발표.[216] 10월 4일, 독일 대학인들은 『93인의 선언(문화 세계에 호소하는)』 발표.[217] 10월 16일, 독일 대학, 공과대학 53개교 강사, 교수 3천 명은 『독일 제국 대학 선언』을 발표, 대전을 “독일 문화 방위전”으로 정당화.[217] 영국 등 학자들은 10월 21일 『뉴욕 타임즈』에서 독일 대학인에 대한 답변 발표.[217]
10월 20일부터 11월 18일까지 이프르에서 격렬한 전투() 발생. 독일 예비 부대는 와 이프르에서 큰 피해.
제1차 이프르 전투로 행군 경쟁은 종결.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 강력한 참호선 구축, 전투는 참호전으로 이행.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 참조)까지 약 700km 전선은 참호전으로 고정, 양군 참호 사이 간격은 약 50m.[219]
5. 2. 1. 참호전의 시작
1차 마른 전투 이후 협상국 및 독일군은 서로 측면을 포위하기 위해 북부에서 기동전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들은 곧 독일 제국이 벨기에 해안부터 로렌 지역까지 방어선을 구축한 것을 보게 되었다.[468] 독일은 점령 지역을 방어하고, 영국 및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전까지 머무르는 "임시적인" 방어선에만 머물렀다.[517]양측은 과학 기술의 진보를 이용하여 교착 상태를 깨려 시도했다. 1915년 4월 22일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서부 전선에서 처음으로 (만국 평화 회의의 헤이그 협정을 위반하는) 염소 가스를 이용했다.[518]
1914년 9월 마른 전투 제1차 전투 이후 연합군과 독일군은 서로를 포위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이러한 일련의 기동은 나중에 "서쪽으로의 경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14년 말까지, 대립하는 세력들은 해협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이어지는 단절되지 않은 참호진 라인을 따라 서로 마주하게 되었다.[468] 독일군은 일반적으로 어디에 설 곳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고지대를 점령했고, 그들의 참호는 더 잘 건설되는 경향이 있었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건설한 참호는 처음에는 독일군 방어 시설을 파괴할 공세가 일어날 때까지 필요한 "임시적인" 것으로 여겨졌다.[517]
9월 17일,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 53명이 수도 런던에서 성명서 『영국의 전쟁 옹호』를 발표했다.[216] 10월 4일, 독일 대학인에 의한 『93인의 선언(문화 세계에 호소하는)』이 발표되었다.[217] 10월 16일에는 독일의 대학과 공과대학 53개교의 강사, 교수 거의 전원에 해당하는 총 3천 명이 연명으로 『독일 제국 대학 선언』을 발표하여 대전을 “독일 문화의 방위전”으로 정당화했다.[217] 영국 등의 학자들은 10월 21일에 미국 신문 『뉴욕 타임즈』에서 독일 대학인에 대한 답변을 발표하였다.[217]
10월 20일부터 11월 18일까지 이프르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서둘러 투입된 독일의 예비 부대는 와 이프르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행군 경쟁은 제1차 이프르 전투와 함께 종결되었다.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 강력한 참호선을 구축하였고, 전투는 참호전으로 이행하였다.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도 참조)까지 약 700km에 이르는 전선은 참호전으로의 이행에 의해 고정되었고, 양군의 참호 사이에는 약 50m의 간격이 생겼다.[219]
5. 2. 2. 참호전의 지속

양측 모두 2년 동안 서로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공격을 하지 못했다. 1915~1917년 동안, 대영제국 및 프랑스는 전략, 전술적 방향의 측면의 선택 때문에 독일보다 더 많은 사상자로 고통받았다. 독일은 오직 하나의 주요 공세만 시도했지만 연합군은 독일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였다.
1916년 2월 독일은 프랑스의 베르됭에서 프랑스 진지를 공격하면서 베르됭 전투가 시작되었다. 1916년 12월 프랑스의 반격으로 공세 시작 지점 이전까지 독일군을 퇴각시키기 전까지 전투는 독일군이 많은 이익을 보았다.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엄청났지만, 독일군의 사상자 또한 이에 못지 않게 높아서 양 측 교전국의 사상자는 70만명[520]에서 97만 5천명[521] 가까이 된다. 베르됭은 프랑스의 의지 및 희생의 상징이 되었다.[522]
1916년 7월부터 11월까지 영국-프랑스군은 솜 전투를 통해 독일군을 공격했다. 이 공격이 시작한 7월 1일 당시 영국 육군은 역사상 가장 큰 사상자가 발생해, 첫날 전투에만 19,240명이 사망하는 등 총 사상자가 75,470명이나 되었다. 솜 공세 전체 기간 동안 영국군의 사상자는 약 42만명이었다. 프랑스군 또한 대략 20만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독일군은 50만명의 사상자가 나왔다.[523]
1916년 전체 기간 동안 베르됭에서의 오래된 공격은[524] 솜 전투의 심각한 사상자와 합쳐져 프랑스군이 지쳐 붕괴 위기까지 달했다. 1917년 4월 5일 니벨 공세가 연합국의 실패로 끝난 이후 영국 및 프랑스군의 헛된 정면 공격 시도는 프랑스 병사(poilu)의 프랑스군 반란으로 이어졌다.[525] 동시에 일어난 영국의 아라스 전투는 제한된 범위에서 이루어져 궁극적으로 전략적 가치는 떨어졌지만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526][527] 아라스 공세의 일부분으로 캐나다 군단이 비미 리지를 점령했고, 이는 해당 국가에게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캐나다의 국가정체성이 전투로 탄생되었다는 생각은 이후 캐나다의 군사 및 일반 사학계에서 널리 퍼지게 되는 의견이 되었다.[528][529]
1917년 7월부터 11월까지 이루어진 파스샹달 전투는 이 기간 벌어진 영국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프랑스의 지원)가 되었다. 이 공세는 10월 전장이 진흙탕으로 되기 전까지 연합국 사이의 약속으로 진행되었다. 사상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존재하지만 거의 20만명에서 40만명 사이로 추측한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은 몇 년 동안 많은 지역의 점령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이 전선은 종종 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전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영국, 프랑스, 독일은 끊임없는 전술의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전장으로 나타났다.

제2차 이프르 전투 첫날인 4월 22일에 독가스가 사용된 것은 “전쟁 역사의 새로운 장”, “현대의 대량 살상 무기의 탄생”으로 여겨진다.[246]
5. 3. 해전
영국 해군은 전쟁 발발 직후 독일의 봉쇄를 시작하여[531] 독일의 주요 군사적, 민간적 자원 공급을 차단했다.[531] 이는 지난 2세기 동안 여러 국제법에 의해 성문화된 원칙을 어기는 것이었지만, 효과적인 전략으로 입증되었다.[531] 영국은 중립국 선박에 피해를 막기 위해 공해에서 바다로 들어오는 모든 함선의 이동을 막았다.[532] 독일 제국의 순양함은 전 세계에 흩어져 연합국 상선을 공격했지만, 영국 해군은 체계적으로 이들을 격파했다.[530] 예를 들어, 칭다오에 주둔한 독일 동아시아 함대 소속 경순양함 SMS 엠덴은 15척의 상선을 포획하거나 침몰시켰지만,[530] 주력 함대는 코로넬 해전에서 승리한 후 포클랜드 해전에서 대부분 파괴되었다.[530]
1916년 유틀란트 해전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가장 큰 해전이었으며, 전쟁 중 유일한 전함 간의 전투였다.[534] 북해의 윌란반도 부근에서 벌어진 이 해전에서 라인하드 세어가 지휘하는 독일 대양함대는 존 젤리코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대함대와 격돌했다.[534] 독일 함대는 더 큰 피해를 입혔지만, 영국 함대를 피해 탈출했고, 전략적으로는 영국이 여전히 제해권을 유지했다.[534]

독일의 유보트는 북아메리카와 영국 사이의 보급선을 차단하려 시도했다.[535] 잠수함전의 성격상 공격은 자주 경고 없이 왔으며, 상선 승무원들의 생존률은 희박했다.[535][536] 1915년 여객선 RMS 루시타니아 침몰 이후, 독일은 여객선 공격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1917년 초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하면서 미국의 참전을 야기했다.[535][538]
호송선단 전술과 하이드로폰, 폭뢰 등 대잠 무기의 발달로 유보트의 피해는 점차 감소했다.[539] 유보트는 5,000척 이상의 연합군 함선을 침몰시켰지만, 199척의 유보트를 잃었다.[540] 제1차 세계 대전은 항공모함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HMS 푸리어스는 1918년 7월 톤데른 기습에서 소프위드 카멜을 발진시켜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를 공격했다.[541]
5. 4. 남부 전구
의 는 1915년 1월 5일에 오스만 제국의 대패로 끝났다.[264] 에서는 이 이끄는 오스만 군이 1월 말에 수에즈 운하를 향해 공세를 취했으나 실패했다 ()[265]。
1915년 7월에는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식민지 수비대(Schutztruppe)가 항복하여 이 종결되었다.
에서는 영국군의 진군이 11월 22일부터 25일까지의 에서 (실질적으로는 콜마르 폰 데어 골츠가 이끄는) 오스만 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또한, 영국령 인도군의 해외 파병 부대가 12월 7일에 쿠트에서 포위되었다[266]。
1917년 초, 영국군은 메소포타미아 전역(en:Mesopotamian campaign)을 재개하여 바그다드 진격을 시도하여 2월 23일 쿠트에 도착했다(쿠트 전투(en:Second Battle of Kut)). 우기가 시작되기 전인 3월 11일 바그다드를 점령하고(바그다드 함락(en:Fall of Baghdad (1917))), 오스만 군은 모술로 후퇴했다. 바그다드 함락으로 바그다드 철도 등 동방 계획이 위태로워지면서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중앙 연합국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독일군은 팔켄하인을 임명하여 엔베르 파샤와 함께 질데림(en:Jilderim)을 코드네임으로 하는 바그다드 재점령 계획을 준비했다.[323]
1917년 6월 29일, 그리스 왕국이 연합국측에 참전했다. 연합군이 1915년 말 그리스에 상륙한 이후, 그리스 정계는 연합국을 지지하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혁명 임시정부와 독일을 지지하는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를 중심으로 양분되었다. 영불의 개입이 심화되면서 베니젤로스 측이 우세해졌고,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 전역의 모든 전략 요지가 연합군에 점령당하자, 프랑스의 샤를 조나르(en:Charles Jonnart)로부터 최후통첩이 전달됨에 따라, 콘스탄티노스 1세는 1917년 6월 퇴위하고 망명했다. 베니젤로스는 테살로니키에서 아테네로 귀환하여 1915년에 선출된 의회를 소집하고, 정부를 구성하자마자 중앙 연합국에 선전포고했다. 콘스탄티노스 1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1세가 국왕에 즉위했다.[324]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8월 17일부터 9월 12일까지 제11차 이존초 전투가 벌어져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간신히 대패를 면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 카를 1세는 이탈리아의 다음 공세를 견딜 수 없을 것을 우려하여 오스트리아 군 최고 사령부와 함께 독일에 지원을 요청했다. 독일은 제14군(en:14th Army (German Empire)) (알펜 군단(en:Alpenkorps (German Empire)) 포함)을 재편성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파병했다. 이렇게 중앙 연합국은 선제공격을 가하여 10월 24일 카포레토 전투에서 공세에 나섰다. 중앙 연합국은 돌파에 성공하여 11일 만에 130km를 진격하여 베네치아까지 30km 앞까지 진군했다. 이탈리아군은 3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그중 26만 5천 명은 포로), 중앙 연합국은 7만 명의 손실을 입었다. 중앙 연합국의 성공은 주로 독일의 에르빈 롬멜과 침투 전술의 공로였다. 이탈리아군 전선이 안정된 것은 피아베 강과 몬테 그라파까지 후퇴했을 때였으며, 연합군으로부터 영국군 5개 사단과 프랑스군 6개 사단이 원군으로 파견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파업과 병사들의 대규모 탈영이 발생했지만, “침략 전쟁이 방어 전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으로 혁명 직전과 같은 상황은 해소되었다.[325] 카포레토 패배로 연합국은 11월 7일 라팔로에서 라팔로 회의(en:Rapallo Conference)를 열었고, 이탈리아에서는 총사령관 루이지 카드르나가 경질되고 아르만도 디아즈가 임명되었다.[326]
1917년 마지막 대규모 공세는 시나이 반도-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이루어졌으며, 군사 역사상 마지막 대규모 기병 돌격이었다. 1917년 10월 31일, 에드먼드 앨런비가 이끄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제4경기병여단(en:4th Light Horse Brigade)과 영국의 제13기병여단(en:13th Cavalry Brigade (British Indian Army))은 오스만 군과 독일 군이 점령하고 있던 베에르셰바를 공격하여 점령에 성공했다(베에르셰바 전투(en:Battle of Beersheba (1917))). 팔켄하인은 11월 5일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여 사수하려 했지만, 최고 사령부는 성지 예루살렘이 파괴될 경우 여론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T.E. 로렌스가 이끄는 아랍 반란군의 진격은 12월 9일에 종결되었고, 영국군에 의한 예루살렘의 무혈 점령으로 끝났다.[327]
5. 4. 1. 발칸반도의 전쟁
러시아와 직면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를 공격한 군대의 3분의 1만 러시아 전선으로 보낼 수 있었다. 큰 손실을 입은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그러나, 콜루바라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의 반격이 성공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4년 말까지 원래 전선으로 후퇴해야 했다. 1915년의 첫 10개월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대부분의 군사를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외교관은 불가리아를 설득하여 세르비아를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지방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사는 세르비아 뿐 아니라 이탈리아와 러시아 전선 등지로도 향해졌다.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었다.[543]
불가리아는 1915년 10월 14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미 진행 중이던 마켄젠 장군의 25만 명 규모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공격에 합류했다. 불가리아를 포함한 중앙국들이 총 60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면서, 세르비아는 한 달 남짓 만에 정복당했다. 세르비아군은 2개 전선에서 패배에 직면하면서 전쟁 초기에 침공했던 알바니아 공국 북부로 후퇴했다. 이후, 세르비아군은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했다. 몬테네그로는 1916년 1월 6~7일에 있었던 모이코바츠 전투에서 아드리아 해안에서 후퇴하던 세르비아군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몬테네그로도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점령당했다. 살아남은 세르비아 병사들은 배를 통해 그리스로 철수했다.[544] 정복 이후,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불가리아 왕국이 나눠 점령했다.
1915년 말, 프랑스와 영국군이 테살로니키에 상륙하면서 그리스 정부에게 동맹국에게 전쟁을 선포하라고 압박하였다. 그러나, 친독일 성향의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은 연합국 원정군이 상륙하고 친연합국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이런 요구를 거부했다.[545]

처음에는 마케도니아 전선이 정적이었다. 프랑스군 및 영국군은 1916년 11월 19일 모나스티르 공세에서 큰 손실을 겪고 비톨라 주변의 마케도니아 영토 일부를 점령했으며, 전선의 안정을 가져왔다.
세르비아 및 프랑스군은 1918년 9월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대부분이 후퇴한 이후에야 전진할 수 있었다. 불가리아군은 전쟁에서 도브로 폴 전투에 큰 패배를 겪었다. 결국, 불가리아는 2주 후인 1918년 9월 29일 항복했다.[546] 독일 최고 사령부는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이 군대는 전선을 유지하기에 너무 약했다.[547]
마케도니아 전선 자체가 붕괴되면서 연합군은 부다페스트 및 빈으로 향하는 도로를 확보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드로프는 확실히 전략 및 작전상 균형이 확실히 무너졌다고 결론내리고 불가리아의 붕괴 이후 하루만에 즉각적인 평화를 요구했다.[548]
5. 4. 2.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은 1914년 8월 비밀 조약인 오스만-독일 동맹을 맺은 이후 동맹국에 합류했다.[549] 오스만 제국의 참전은 러시아의 코카서스 영토 위협과 수에즈 운하를 통한 영국-인도 간 연결을 끊을 수 있는 위협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아나톨리아 자체에 살고 있던 오스만 터키인은 그리스인, 아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등의 민족을 그리스인 집단 학살,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아시리아인 집단 학살 등의 대량학살을 자행하여 러시아 및 영국 측에서 참전할 명분을 주었다.[550]이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여 메소포타미아 전역(1914)과 갈리폴리 전역(1915년)을 개전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은 영국군, 프랑스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군단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대조적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쿠트 공방전(1915~1916년)에서 패배한 이후 영국군이 1917년 3월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오스만 제국은 쿠르드족 및 투르크맨족과 연합하여 전투한 데 반해 영국군은 아랍인 및 아시리아인과 연합하여 전투했다.

또한, 서쪽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수에즈 운하에 대한 공격을 1915년, 1916년 두차례 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8월에는 독일 제국-오스만 제국 연합군이 로마니 전투에서 ANZAC 산악 사단과 52 (로우랜드) 보병 사단에게 패배했다. 이 승리에 이어, 영국 육군과 이집트 원정군은 시나이반도를 횡단하여 12월에 마그드하바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을 후퇴시키고 1917년 1월 라파 전투에 승리하면서 이집트 시나이와 오스만령 팔레스타인 경계까지 진격했다.

러시아군은 코카서스에서 일방적인 전투를 치렀다. 오스만 군대의 최고 사령관인 엔베르 파샤는 러시아가 정복했던 중앙아시아 지역을 다시 점령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다. 이에 1914년 12월 10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코카서스에서 러시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겨울에 러시아군에 대한 정면공격을 하자고 주장했지만, 사리카미스 전투에서 86%의 병력을 잃고 오스만군이 패배했다.[551] 엔베르 파샤의 지휘관으로써의 역량 부족이 그 원인으로 손꼽힌다.[552]

1914년 12월, 독일 아시아 군단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군은 영국군과 러시아군 간의 연결을 끊고 카스피해의 유층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페르시아를 침공했다.[553] 페르시아는 표면상 중립국이었지만 실제로는 영국군과 러시아군의 영향 하에 있었다. 오스만군과 독일군은 쿠르드족 및 아제르바이잔인의 대규모 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카슈카이인, 탕기스탄인, 루르인, 캄세흐인의 지원을 받았으며, 프랑스군 및 영국군은 그리스인과 아시리아인과 아르메니아인의 지원을 받았다. 페르시아 전역은 1918년까지 지속되어 오스만 제국 및 동맹국의 패배로 끝났지만, 1917년 아르메니아와 아시리아인을 이끌며 오스만 제국에 대해 가장 강하게 공세를 하던 러시아가 휴전하면서 보급선이 끊기고, 무기 및 양에서 열세가 되면서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영국군이 후퇴해야 했다.[554]
1915년부터 1916년까지 러시아군의 지휘관이었던 니콜라이 유데니치는 남부 코카서스에서 대부분의 터키군을 몰아내면서 승리자로 자리잡았다.[551]

영국 외무부가 아랍인을 선동하면서 일어난 아랍 반란은 1916년 영국의 지원을 받은 메카의 후세인 빈 알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메카 전투서부터 시작했으며, 다마스쿠스에서 오스만군이 항복하면서 끝났다. 메디나의 오스만군의 지휘관인 파흐리 파샤는 메디나 공방전에서 약 2년 반동안 저항했다.[555]
이탈리아령 리비아와 영국령 이집트 국경의 세누시족은 터키의 선동에 힘입어 무장하여 연합군과 소규모 게릴라전을 벌였다. 영국은 세누시 전역에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12,000명이나 투입해야 했다. 이 반란은 1916년 중순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556]
오스만 전선에서 연합국의 총 사상자는 65만명이다. 오스만군의 총 사상자는 75만명(325,000명 사망, 425,000명 부상)이다.[557]
5. 4. 3. 이탈리아의 참전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의 일환으로 1882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가 가지고 있던 트렌티노,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 피우메 (현 리예카), 달마티아 지역을 확보하고 싶었다. 이탈리아는 1902년 프랑스와 비밀 조약을 맺어 삼국 동맹을 무효화시켰다.[558] 전쟁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은 방어적 조약이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공격자라는 이유로 참전을 거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프랑스령 튀니지를 대가로 이탈리아의 중립을 유지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연합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패배할 경우 남부 티롤,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 달마티아 연안 지대를 주는 조건으로 참전하게 했다. 연합국과의 이 협상은 1915년 런던 조약으로 공식화되었다. 1915년 4월 연합국의 터키 침공에 자극받아 이탈리아는 삼국 협상에 가입하고 5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했다. 다섯 달 후, 이탈리아는 독일에게도 선전포고했다.이탈리아의 참전은 국무총리 안토니오 사란드라, 외무부 장관 시드니 소니노,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비밀리에 추진했다.
군사적으로 이탈리아는 우월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점은 전투가 일어나는 지형이 험하고 전략 및 전술의 부적절한 사용으로 인해 사라져버렸다. 정면 공격의 철저한 지지자였던 육군 원수 루이지 카도르나는 슬로베니아 고원으로 침입해 류블랴나를 점령하고 빈을 위협할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카도르나의 계획은 견고한 율리안알프스산맥와 크라스의 험난한 지형, 참호전과 같은 기술적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계획이었으며 그 결과 엄청난 인명을 희생하고 교착 상태로 멈춰 버렸다.
5월 23일, 이탈리아 왕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를 했다. 1월 이후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요청하여 트렌티노(Trentino) 등의 할양에 동의하여 이탈리아를 최소한 중립으로 유지하려고 했다. 5월 4일 삼국 동맹이 해체된 후에도 이탈리아에 대한 제안은 점점 확대되어, 10일에는 트렌티노, 이존초 강(Isonzo) 연안의 할양, 알바니아 공국(Albania)에서의 자유 행동권 등이 제안되었다.[253] 한편, 이탈리아는 연합국과 협상하여 4월 26일 런던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서는 이탈리아가 연합국측에서 참전할 경우, 미수복 이탈리아의 획득을 약속했다. 이탈리아 총리 안토니오 살란드라와 외무장관 시드니 소니노/Sidney Sonnino영어는 수개월에 걸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Vittorio Emanuele III) 국왕의 동의를 얻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결정했다. 선전포고를 지지한 것은 국민들 사이에서도 의회에서도 다수파는 아니었지만, 오스트리아 주전파가 훨씬 더 활동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정치 노선의 여론 주도자들을 결합시킬 수 있었고, 선전포고의 결정은 이 여론에 밀린 결과였다.
트렌티노 전선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수비하기 유리한 산악 지형을 이용했다. 개전 초 전략적인 후퇴 이후 전선은 큰 변화가 없었으며 오스트리아의 카이저쉬젠(Kaiserschützen)과 스텐드쉬젠(Standschützen)이 이탈리아의 알피니의 여름에 걸친 백병전을 막아냈다. 1916년 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아시아고 알토피아노에서 베로나와 파두아를 향해 공세를 시작했으나(트렌티노 공세), 별 소득이 없었다.
1915년 초, 이탈리아는 트리에스테 북동부의 소카 강(이손초 강)을 따라 11번의 공세를 진행했다. 11번의 공세는 모두 고지대에 위치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격퇴했다. 1916년 여름 도베르도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이 승리하여 고리치아를 점령했다.

5. 4. 4. 루마니아의 참전

루마니아는 1882년부터 동맹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루마니아가 참전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며 중립을 선언했다. 협상국이 루마니아가 동맹국에게 선전포고하는 대가로 트란실바니아와 바나트 등 루마니아인이 많이 사는 영토를 보장해주자, 1916년 8월 27일 루마니아 정부는 협상국에 가입하여 트란실바니아를 공격하며 참전했다.[564] 루마니아의 공세는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동맹국의 반격으로 루마니아-러시아 국경으로 후퇴해야 했다.[564] 부쿠레슈티 전투에서 동맹국이 승리하면서 1916년 12월 6일 루마니아의 수도가 함락되었다. 1917년에는 몰도바 지역에서 전투가 계속되었고, 동맹국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565][566] 1917년 말 10월 혁명으로 러시아가 항복하자, 루마니아는 1917년 12월 9일 동맹국과 휴전해야 했다.

1918년 1월, 루마니아군은 러시아군이 포기한 베사라비아 지역을 점령했다. 1918년 3월 27일, 루마니아 통합 지역 의회가 루마니아로 합병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베사라비아를 자국 영토로 병합했다. 1918년 5월 7일에는 부쿠레슈티 조약을 맺어 동맹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루마니아는 동맹국과 종전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영토를 할양하고 카르파티아산맥에 대한 통행권을 주었으며, 독일에게 석유 채굴권을 부여했다. 그 대신 동맹국은 루마니아가 베사라비아를 장악하는 것을 인정했다. 이 조약은 1918년 10월 알렉산드루 마르힐로만 정부가 무효화하면서 1918년 11월 10일 명목상 전쟁이 재개되었다. 다음 날, 부쿠레슈티 조약은 콩피에뉴에서 휴전이 이루어지면서 무효화되었다.[567][568]
5. 5. 동부 전선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은 새로 도착한 의 지원을 받아 2월 7일부터 22일까지 제2차 마주리 호 공세에서 승리하여 러시아군을 동프로이센에서 격퇴시켰다.[241]
1914년 11월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폰 루덴도르프가 동부 전선 독일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이후, 두 사람은 동부 전선의 결판을 목표로 했다. 독일의 목적은 러시아를 약화시켜 연합국의 동맹 해체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당시 동부 전선은 러시아가 갈리치아 전체를 점령하고 있는 상태였고, 단독 강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군사적 압력을 가함으로써 러시아에 대한 압력을 증대시키고, 중립국, 특히 발칸 국가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242] 더욱이, 이탈리아가 참전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략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러시아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의 동계 전투를 유리하게 진행하고 있었고, 이탈리아가 참전하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이존초 강과 카르파티아 산맥 사이에서 포위될 형태가 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멸망을 의미하는 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서갈리치아에서 산 강 방면으로 돌파하여 러시아군에게 카르파티아 산맥에서의 철수를 강요하는 (철수하지 않으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포위를 받게 된다) 것이었다. 이 전략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1915년 봄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이 이끄는 이 서부 전선에서 동부 전선으로 전배되었다. 5월 1일부터 10일까지, 크라쿠프 동쪽에서 고를리츠-타르누프 공세가 실시되었다. 이 공세에서 독일과 은 예상외로 선전하여 러시아 진지에 깊숙이 침입하였고, 5월 중순에는 산 강까지 도달했다. 이 전투는 동부 전선의 전환점이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개전부터 1915년 3월까지 약 200만 명의 손실을 입었고, 독일의 원조에 점점 의존하게 되었다.[243]
6월, 중앙 동맹국은 고를리츠-타르누프 공세에 이어 를 개시했다. 6월 4일에 프셰미실을, 22일에 렘베르크를 재점령한 후, 러시아령 폴란드에 를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남쪽과 북쪽에서 공동으로 공격을 가하여 러시아군을 포위한다는 계획이 독일 최고 사령부(실제로 계획을 세운 것은 루덴도르프였다)에서 제시되었지만, 팔켄하인과 마켄젠은 마른 전투의 참상을 보고 루덴도르프의 계획을 지나치게 야심적인 것으로 여겨 축소시켰다. 6월 29일부터 9월 30일까지의 부크 공세와 7월 13일부터 8월 24일까지의 는 러시아 대부대를 포위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러시아군에게 폴란드, 리투아니아, 그리고 쿠를란트의 대부분으로부터의 대퇴각을 강요할 수 있었다.
대퇴각의 결과, 러시아군의 전선이 1,600km에서 1,000km로 단축되었다. 중앙 동맹국은 9월까지 바르샤바(8월 4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빌뉴스 등 중요 도시를 속속 점령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에서는 루블린을 수도로 하는 오스트리아의 과 바르샤바를 수도로 하는 독일의 가 성립되었고, 특히 독일의 에서는 경제적 착취를 행하는 점령 정책이 취해졌다. 9월 말, 루덴도르프가 이끄는 이 민스크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리우네로 진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손실은 러시아군이 더 많았지만, 1915년 9월 대퇴각이 종결된 후에도 수적 우위를 유지했기 때문에, 독일군의 대부분을 서부 전선으로 이동시킨다는 계획은 실행할 수 없었다.[244]
5. 5. 1. 초기 전투
러시아군의 초기 계획은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과 독일의 동프로이센을 동시에 침공하는 것이었다. 갈리시아를 향한 러시아군의 초기 공세는 성공적이었으나, 동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는 1914년 8~9월에 일어난 타넨베르크 전투와 마수리아 호 전투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분전으로 저지되었다.[570][571]
개전 2주 만에 동프로이센 침공을 개시했기에, 동부 전선의 상황은 독일에게 매우 어려웠다. 독일 제8군은 후퇴했고 동프로이센 일부가 러시아에 점령되었다. 그 결과, 동부 전선의 독일군은 증원되었고, 파울 폰 히덴부르크 대장이 사령관, 에리히 루덴도르프 소장이 참모총장에 취임했다. 두 사람은 8월 말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승리하여 알렉산드르 삼소노프가 이끄는 을 거의 전멸시키고 동프로이센을 확보했다. 이어 9월의 제1차 마주리 호 공세에서도 파벨 레넨캄프가 이끄는 이 패배했기에 러시아군은 동프로이센 대부분에서 철수했다.[223]
8월 24일부터 9월 11일까지의 이후,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령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을 점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갈리치아의 수도 렘베르크를 공격한 후, 러시아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에 퇴각을 강요받았다(, 8월 26일 - 9월 1일). 러시아에 의한 제1차 프셰미실 포위전은 9월 24일부터 10월 11일까지 계속된 후 일단 해제되었다.

5. 5. 2. 러시아 혁명
1916년 러시아군이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동부를 향한 브루실로프 공세에 성공했지만,[573] 러시아 정부의 전쟁 수행에 대한 불만은 커져갔다.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전쟁을 계속하면서 러시아 내 불안은 고조되었다. 알렉산드라 황후의 무능한 통치는 시위를 촉발했고, 1916년 말 황후의 총애를 받던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살해당했다.
1. 오토카르 폰 체르닌 백작
2. 리하르트 폰 퀼만
3. 바실리 라도슬라프


1917년 3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시위가 일어나 니콜라이 2세는 퇴위하고 러시아 임시 정부가 뒤를 이었으나, 이 정부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사회주의자와 연대하여 겨우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전선과 후방 모두에서 혼란을 야기했고, 육군은 점점 비효율적으로 변해갔다.[572]
임시 정부에 대한 불만과 취약함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의 인기가 높아졌고, 이들은 전쟁 중단을 요구했다. 1917년 11월 볼셰비키의 무장 봉기가 성공하여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했고, 12월에는 독일과 휴전 협상을 맺었다. 처음에 볼셰비키는 독일의 요구를 거절했으나, 독일군이 무저항으로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하자 1918년 3월 8일 러시아와 동맹국 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는 핀란드, 발트 3국,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을 동맹국에게 할양하는 등 광대한 영토가 넘겨졌다.[574]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협상국은 해체되었다. 이후 연합국은 독일이 러시아의 자원으로 팽창하는 것을 저지하고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로의 소규모 침공을 단행했다.[575] 연합군은 러시아 북부 개입의 일환으로 아르한겔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는 군대에 페트로그라드의 파업을 강제로 진압할 것을 명령했지만 군대는 군중에게 발포하기를 거부했다. 혁명가들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수립했고, 좌익의 장악을 우려한 국가 두마는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강요하여 러시아 임시 정부를 수립했으며, 이 정부는 러시아가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해산을 거부하고 경쟁하는 권력 중심을 만들어 혼란을 야기했으며, 전선 병사들의 사기는 점점 더 저하되었다.
차르의 퇴위 후, 블라디미르 레닌은 독일 정부의 도움으로 1917년 4월 16일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왔다.
러시아 제국이 전쟁에서 빠져나감에 따라 루마니아는 동부 전선에서 홀로 남게 되었고, 1918년 5월 중앙 열강과 부쿠레슈티 조약을 체결했다.
산업력이 중시된 이 전쟁은, 산업화가 시작 단계에 불과했고 아직 농업이 주였던 러시아 제국의 힘을 크게 넘어섰으며, 이미 심각한 사회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더욱이, 발트 해와 다르다넬스 해협이 해상 봉쇄를 받으면서, 전쟁 전에는 7할의 수입이 발트 해를 통해, 3할이 흑해를 통해 이루어졌던 러시아는 크게 피폐해졌다. 전쟁의 압박, 인플레이션 상승, 그리고 심각한 식량 부족으로 인해, 노동자들과 병사의 아내들, 여성 농민들이 2월 23일( 율리우스력)/3월 8일( 그레고리력)에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시위 행진을 벌였다.[305]
1905년 혁명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를 결성하여, 시위 참가자들의 요구를 대변하여 그것을 정치적으로 실행하려 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주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으로 구성되었다. 3월 1일(율리우스력)/3월 14일(그레고리력), 는 를 발령하여, 정부 명령 중 소비에트의 명령과 모순되지 않는 것만 준수하도록 명령했다. 두마에서 대표를 가진 부르주아들은 게오르기 리보프 총리가 이끄는 러시아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틀 후 니콜라이 2세를 설득하여 퇴위시켰다. 이로써 러시아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라는 ""이 성립했다. 러시아 민중 대부분이 바랐던 것과 달리, 임시정부는 전쟁 지속을 결정했고, 당시 소비에트도 계속 전쟁을 지지했다.
독일은 3월 21일(율리우스력)/4월 3일(그레고리력)에 블라디미르 레닌 등 볼셰비키 약 30명을 스위스에서 핀란드를 경유하여 러시아로 귀국시켰다(일부는 독일의 철도를 이용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일부였던 볼셰비키("다수파"의 뜻)는 1905년 혁명 이후, 그 지도층 대부분이 망명해 있었다. 개전부터 러시아 정부의 전쟁 정책에 반대하며, "현재의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306] 전환하려 했지만, 전쟁 초기에는 실패했다. 독일 정부는 알렉산드르 파르부스를 중개인으로 하여 당시 스위스에 살고 있던 레닌과 접촉했다. 이어서 많은 자금(수백만 마르크로 추정됨)을 러시아 혁명가들에게 제공하여 러시아를 불안정하게 만들려 했다.[307] 레닌은 귀국 직후인 4월 7일(율리우스력)/4월 20일(그레고리력)에 4월 테제를 발표했다. 혁명의 진전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전쟁의 즉각적인 종결을 요구하여, 厭戰(연전) 분위기에 찬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패배 없는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 리비우, 빌뉴스를 목표로 하는, 후에 케렌스키 공세라고 불리게 된 공세를 명령했다. 공세는 6월 29일에 시작되어, 먼저 스타니슬라우에 대해 동부 전선에서 그때까지 없었던 격렬한 포화를 퍼부은 후, 러시아군은 7월 11일에 까지 진군했지만, 곧 패주했다.
9월 말, 러시아의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이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실패하자 (), 케렌스키는 혁명을 지키기 위해 볼셰비키에게 의존해야 했고, 볼셰비키는 명실상부하게 명예 회복을 했다. 그리고 핀란드에서 귀국한 레닌이 10월 24일(율리우스력)/11월 6일(그레고리력)에 10월 혁명을 일으켜, 다음 날에는 임시정부가 전복되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했다. 그 이후 다음 날에는 볼셰비키가 평화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여 중앙 연합군을 동부 전선에서 해방시키는 결과가 되었다.[312]
12월 5일, 중앙 연합군과 러시아 사이에 10일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후 휴전은 몇 차례 연장되었고, 12월 22일에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최종적으로 1918년 3월 3일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되었다.[313]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의 강화협상에서 독일은 1월 19일 최종 요구로 러시아에 폴란드, 리투아니아, 서 라트비아를 포기하도록 요구했고, 러시아 대표 레프 트로츠키는 강화협상의 일시 중단을 요구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협상 지연을 제안한 트로츠키에 대해 정부와 중앙위원회는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 봉기를 기대하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중앙 연합국은 우크라이나 서부 영토에 대해 대폭 양보하는 대가로 우크라이나로부터 곡물을 대량으로 요구했다. 또한 동시에 러시아에 평화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최후 통첩을 발했지만, 트로츠키는 독일에서의 혁명을 기대하며 조약에는 서명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동원 해제를 선언했다. 그 결과, 독일은 2월 18일 파우스트슈락 작전을 발동하여 수 주 만에 러시아의 발트 해안 서부 국경, 우크라이나 서부, 크림 반도, 돈네츠 강과 벨라루스의 공업 지대를 점령했다.
5. 5. 3.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위해 연합국에 동참하여 전쟁에 참여한 군단이다. 러시아 내의 군단은 1917년 만들어졌으며, 1917년 12월에는 프랑스(미국인 자원군 포함), 1918년 4월에는 이탈리아에서도 만들어졌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1917년 7월 현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일어난 즈보로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이겼다. 이 승리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자원군 수가 늘어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 군사가 되었다. 바흐마흐 전투에서는 독일 제국군에게 승리하면서 휴전 협정을 맺도록 강요했다.
러시아 지역에서는 볼셰비키에 대한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장악하고 시베리아의 모든 주요 도시를 점거했다. 이 군단이 예카테린부르크 근처까지 나타나면서 1918년 7월 볼셰비키는 로마노프 왕가의 처형을 단행하게 된다. 이 군단은 이 사건이 일어난 지 7일도 되지 않아 도시를 장악한다.
러시아의 유럽 지역 항구가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로의 긴 우회로를 통해 대피했다. 1920년 9월 미국 선박 헤프론을 통해 마지막으로 군단이 떠나게 되었다.
5. 6. 동맹국의 평화 협상 제안 시작
1916년 12월, 베르됭 전투가 10달 동안 지속되고 루마니아에 대한 공세를 성공적으로 끝낸 독일은 연합국에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42] 그러나 이 시도는 "기만적인 전쟁 책략"으로 일축되어 거부되었다.[42]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조정자로 개입하여 양측에 요구사항을 밝힐 것을 요청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전시 내각은 독일의 제안이 연합국을 분열시키려는 책략이라고 판단했다.[576] 연합국은 윌슨의 제안에 대한 답변을 논의하는 동안, 독일은 "직접적인 의견 교환"을 선호하며 이를 거부했다. 독일의 반응을 본 연합국 정부는 1917년 1월 14일, 피해 복구, 점령 지역 철수, 프랑스, 러시아, 루마니아에 대한 배상 및 민족자결주의 원칙 인정을 요구했다.[576] 또한, 연합국은 미래의 전쟁을 예방하거나 제한할 보장을 추구했다.[577]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는데, 협상국은 독일이 구체적인 제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독일의 제안을 거부했다.[42]
5. 7. 미국의 참전
미국은 전쟁 초기 중립을 표방했으나, 1917년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재개와 치머만 전보 사건을 계기로 연합국 측에 참전하게 되었다.[301]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고해왔고, 독일은 이에 대해 공격 중단을 약속하기도 했다.[235] 그러나 1917년 1월 16일, 독일 외무 장관 아서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에게 보낸 치머만 전보는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할 경우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도록 지원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미국의 참전 여론을 자극했다.[301] 1915년 2월 4일, 독일은 영국과 아일랜드 주변 해역을 교전 지역으로 설정했지만, 영국을 해상 봉쇄하기에는 잠수함(U보트)가 부족했다.[235] 잠수함을 대상선 작전에 사용함으로써 독일은 군사적, 국제법적으로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235] 영국 상선이 무장을 강화했기 때문에 U보트는 안전이 위협받았고, 전시 국제법을 완전히 준수할 수 없었다.[235] 더욱이 잠수함 지휘관에 대한 지시가 불명확하여, 해군은 중립국 선박의 항행을 방해하기 위해 무경고로 공격하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라고 가정했다.[235]
1917년 5월 7일에는 독일 잠수함 U-20/U-20영어이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격침시켜 국제적인 비난을 야기했다.[238] "전쟁 물자와 탄약을 싣고 있었다"는 루시타니아호가 격침되자, 어린이 100명 가까이와 미국인 127명을 포함한 총 1,198명이 사망했다.[237][238] 미국의 여론은 분노했고, 미·독 간에 각서가 교환되었다.[238]
결국 1917년 4월 6일, 윌슨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미국 의회는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승인했다.[300] 하원 결의안은 373:50, 상원은 82:6으로 가결되었다.[300] 12월 6일에는 오스트리아에도 선전 포고를 하여, 그 범위가 이탈리아 전선까지 확대되었다.[300]

미국은 1914년 연합국에 대한 주요 군수품 공급국이었지만, 국내 반대 여론으로 인해 중립을 유지했다. 윌슨 대통령이 필요로 하는 지지를 얻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독일의 잠수함 공격이었는데, 이는 미국인의 목숨을 앗아갈 뿐만 아니라 배들이 바다로 나가기를 꺼리게 만들어 무역을 마비시켰다.
1917년 4월 6일, 미국 의회는 연합국의 "제휴국"으로서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미국 해군은 그랜드 함대에 합류하기 위해 전함 부대를 스카파 플로로 파견했고, 호송 호위를 제공했다.
윌슨 대통령은 독일이 패배해야 한다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평화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했는데, 이는 그의 동맹국들이 원했던 것처럼 AEF를 영국이나 프랑스 부대에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군사력으로 유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 미국의 첫 번째 중요한 개입은 1918년 9월 말 뫼즈-아르곤 공세였다.
1916년 1월부터 빌헬름 2세를 설득해 온 독일 최고 사령부는 1917년 1월 8일부터 9일까지 빌헬름 2세의 허가를 얻어 2월 1일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297] 2월 3일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재개로 미국이 독일과 단교했다.[299]
윌슨은 미국 의회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주의자들이 전 세계의 "군사적 침략적인" 독재자들에 맞서 십자군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그로부터 4일 후인 1917년 4월 6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했다.[300]
5. 8. 종전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후, 연합국은 반격을 시작했다.[57] 1918년 8월 8일, "백일 공세"로 알려진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아미앵 전투에서 연합군은 독일군 전선에 24km 길이의 틈을 만들었다.[346] 이후 연합군은 측면 공격을 반복하는 전술을 통해 독일군을 압박했다. 동맹국 군대는 차례로 항복했는데, 1918년 9월 29일 불가리아가 살로니카 휴전협정에 서명하며 가장 먼저 휴전했다.[57] 1918년 10월 30일, 오스만 제국이 항복하고 무드로스 휴전협정에 서명했다.[57] 10월 24일, 이탈리아는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격파했고, 이는 제국의 붕괴를 촉진했다. 11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빌라 지우스티 휴전협정을 수락했다.[60]
독일에서는 혁명이 발생하여 1918년 11월 9일 공화정이 수립되었고, 빌헬름 2세는 제위를 포기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1918년 11월 11일 새벽 5시, 프랑스 북부 콩피에뉴의 숲속 열차 안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되어 연합국과 독일 간의 휴전이 성립되었다.[61] 이 협정은 6시간 후 발효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전쟁 상태는 공식적으로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7개월간 지속되었다.
6. 결과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었다.[65][354] 로마노프 가, 호엔촐레른 가, 합스부르크 가, 오스만 가는 각각 군주 자리를 잃었다.[65] 4개 제국의 멸망과 해체 결과, 에스토니아,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많은 국가들이 독립을 되찾거나 새롭게 탄생했다.[65][354] 1914년 개전 당시 유럽의 공화제 국가는 프랑스, 포르투갈, 스위스, 산마리노 4개국에 불과했지만, 전쟁 이후 독일, 오스트리아, 핀란드,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알바니아 등으로 증가했다(오스만 제국이 폐지되고 튀르키예 공화국이 건국된 것을 포함).[354] 또한 러시아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타도되었고, 1922년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건국된다.[354]
동맹국이 연합국에게 패전하면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 오스트리아는 생제르맹 조약,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 오스만 제국은 세브르 조약, 불가리아는 뇌이 조약을 맺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고 많은 영토와 인구를 잃었으며, 이로 인해 발칸 반도와 중동 지방에서 많은 독립국들이 생겨났다.[80][81][82]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여러 후계 국가로 분할되었는데, 대부분은 민족적 경계를 따랐지만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았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외에도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는 이중 군주국으로부터 영토를 받았다(이전에 별도의 자치권을 가진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은 유고슬라비아에 편입되었다).[80]
파리 강화 회의는 중앙 연합국에 일련의 평화 조약을 강요하여 공식적으로 전쟁을 종식시켰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을 다루었고, 윌슨의 14번째 조항을 바탕으로 1919년 6월 28일 국제 연맹을 설립했다. 중앙 연합국은 "그들의 침략으로 인해 연합국 및 관련 정부와 그 국민들이 입은 모든 손실과 피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해야 했다.[76]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독재령"이라고 부르는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부당하게 대우받았다고 느꼈다.[77] 독일 역사가 하겐 슐체는 이 조약이 독일을 "법적 제재를 받고, 군사력을 박탈당하고, 경제적으로 파산하고, 정치적으로 굴욕을 당했다"고 말했다.[77]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포기하였고, 본토 손실은 알자스와 로렌을 프랑스에 넘겨주고 폴란드 지역을 독립시키는 등 적잖은 영토를 잃었다. 장기간 전쟁 수행으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실직자가 속출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과다한 배상금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78] 독일 국민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베르사유 조약을 승인하지 않았다.[76] 이 조약은 아돌프 히틀러 집권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이 외부로부터 강요된 체제라는 이유로 민주 정부에 대한 애정과 의지를 갖지 못하게 하여 공화국의 생명력을 위태롭게 만들었다.[78]
이탈리아의 좌절감과 배신감은 파시즘의 발전과 베니토 무솔리니의 집권을 가능케 하였다. 미국은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랐으나, 자신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연맹 참여를 거부하고 다시 고립주의에 빠짐으로써 강대국으로서 국제 역할에 괴리를 가져왔다. 결국 경제 공황이 생겨났다.
양측 간의 공식적인 전쟁 상태는 1919년 6월 28일 독일과의 베르사유 조약 서명까지 7개월 더 지속되었다. 미국 상원은 여론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으며,[67][68] 1921년 7월 2일 워렌 G. 하딩 대통령이 녹스-포터 결의안에 서명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전쟁 참여를 종식시키지 않았다.[69]
일본은 영·일 동맹을 근거로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1차 대전 기간 동안 여러 이득을 보았고, 경제 호황기를 누림으로써 대체로 만족하였다.[578][579]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한 후, 중국에 있던 독일의 조차지 산둥반도의 자오저우만(칭다오 포함)을 점령하고, 태평양의 독일령 남양군도를 점령했다.[580][581] 일본은 중국에 대해 만주와 산동반도 등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등 21가지 특혜조건을 요구(1915년 1월)하였고, 중국은 이를 수용(5월)할 수 밖에 없었다. (→21개조 요구)[583]
중국은 1917년에 연합국으로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산둥반도를 차지한 것에 불만을 품었고, 사인도 하지 않고 국제 회의장에서 철수한다. 이것은 5․4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민족자결주의로 민족주의가 상승하여 20세기 정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인도, 조선 등에서 독립 운동이 활발해졌다. 국제 정치는 이제 유럽에만 힘을 기울일 수 없게 되었고, 전 세계가 국제 정치의 무대가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맥심기관총(영국), 독가스(독일), 탱크(영국), 전투기(영국, 프랑스, 독일), 유보트(독일), 곡사포(오스트리아) 등의 신무기가 생겨났다. 벨기에와 세르비아는 심하게 피해를 입었고, 프랑스도 140만 명의 군인이 사망했다.[65] 독일과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66] 여성의 사회적 참여가 늘어났고, 민주주의가 발달하였으며, 사회구성원간의 평등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높아지게 되었다.
7. 전쟁 이후의 세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일본은 오세아니아의 군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가혹한 조건을 강요받았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영토 보장을 받지 못해 1922년에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한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되었다. 중국은 연합국임에도 불구하고 산둥반도에 대한 이권을 돌려받지 못해 5.4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중앙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독립했지만, 인도와 같은 식민지에서는 독립 운동이 더욱 격화되었다. 조선 등에서도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국제 연맹이 창설되었지만, 정작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가입에 실패하고 다시 고립의 길을 걸었다. 강대국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국제연맹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국제 정치는 이제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여성의 사회적 참여가 늘어났고, 민주주의가 발달했으며, 사회 구성원 간의 평등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높아졌다. 독일, 러시아 등의 전제 국가들이 무너지거나 해체되었고, 유럽 국가들의 절반에 가까운 국가에서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일본은 영일 동맹을 근거로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1차 대전 기간 동안 여러 이득을 보았고, 경제 호황기를 누렸다.[578][579] 1914년 8월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한 후, 일본 육군은 중국에 있던 독일의 조차지 산둥반도의 자오저우만(칭다오 포함)을, 일본 해군은 태평양의 독일령 남양군도를 점령하고,[580][581] 이 지역에서의 이권을 할양받는 것을 영국과 프랑스가 승인했다.[582] 그러나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21개조 요구)는 5·4 운동과 같은 격렬한 배일(排日) 여론에 밀려 실패하였다.[583]
8. 동맹국과 러시아의 전후 결과
8. 0. 1.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탄생- 막대한 배상금 지불
- 독일의 일부 영토였던 폴란드 땅이 독립하게 됨
- 알자스-로렌: 프랑스에 병합
- 아프리카 식민지
- 르완다, 부룬디(벨기에 위임 통치령)
- 탄자니아(영국 위임통치령)
- 카메룬, 토고: 영국과 프랑스의 분할
- 산둥반도는 일본에 조차
- 독일 제국의 태평양 식민지는 미국과 일본이 분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즘과 파시즘의 확산에는 민족주의의 부활과 전후 변혁(민주화)에 대한 거부가 포함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돌격대의 찌르기 전설이 지지를 얻은 배경에는 패전국인 독일의 심리 상태 및 전쟁 책임의 거부가 있었다. 이 음모론은 널리 받아들여졌고, 독일 국민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겼다. 또한 같은 이유로 바이마르 공화국은 정통성이 흔들리고 정국은 항상 불안정해져 좌우 양익의 흥기를 허용했다.
유럽의 공산주의와 파시즘 운동은 이 음모론을 이용하여 인기를 얻었으며, 특히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은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나치 당수 아돌프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독일의 불만을 이용하여 인기를 얻었다.[393]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해결되지 않은 권력 투쟁의 연속이라는 측면이 있다. 더욱이 1930년대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승전국으로부터 불공정하게 대우받았다는 이유로 침략을 정당화했다.[394][395]
미국의 역사가 윌리엄 루빈스타인/William Rubinstein영어은 “‘전체주의 시대’는 현대사상 악명 높은 대량 학살을 모두 포함하며,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가 그 선두였지만, 공산주의 국가들에 의한 대량 학살과 추방, 독일 나치당과 그 동맹국들에 의한 다른 대량 학살, 그리고 1915년 아르메니아인 학살도 포함한다.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학살의 원인이 모두 같으며, 그 원인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엘리트 계층의 구조와 중앙, 동유럽, 남유럽 정부의 상황이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공산주의도 파시즘도 무명의 선동가나 별난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남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396]
8. 0. 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왕국 등 여러 국가들이 독립했다. 폴란드와 이탈리아에 일부 영토가 할양되었다. 헝가리는 루마니아에 일부 영토를 할양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크로아티아, 체코슬로바키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가 연합 왕국으로 독립한 후 건설되었다.8. 0. 3. 러시아 제국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이 수립되었고, 발트 3국,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등이 독립했다. 루마니아에 일부 영토를 할양했다.8. 0. 4. 오스만 제국
9. 사상자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발생한 군인 및 민간인 사상자는 약 4천만 명에 달한다.[92][93] 사망자는 1,500만 명에서 2,200만 명 사이로 추산되며, 부상자는 약 2,300만 명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분쟁 중 하나로 기록된다.[92][93] 사망자 중에는 900만 명에서 1,100만 명의 군인이 포함되었고, 민간인 사망자는 600만 명에서 1,300만 명으로 추산된다.[92][93]
전쟁에 동원된 6천만 명의 유럽 군인 중 약 800만 명이 사망했고, 700만 명이 영구 장애를 입었으며, 1,500만 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독일은 전체 남성 인구의 15.1%,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7.1%, 프랑스는 10.5%를 잃었다. 국가별 전사자는 독일 제국 203만 명, 러시아 제국 170만 명, 프랑스 140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20만 명, 대영 제국 90만 명 순으로 많았다. 반면 일본 제국의 전사자는 300명으로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다.
전쟁 중에는 열악한 위생 환경과 스페인 독감의 확산으로 인해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도 많았다. 1914년 세르비아에서는 발진티푸스로 20만 명이 사망했다. 1918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스페인 독감은 최소 1,700만 명에서 2,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중에는 약 264만 명의 유럽인과 최대 67만 5천 명의 미국인이 포함된다.[95]
전쟁은 군인들의 정신 건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끔찍한 안면 부상을 입은 병사들은 'gueules cassées'(깨진 얼굴)이라고 불리며 사회적 낙인과 소외를 경험했다. 독일에서는 식량 부족과 영양실조로 인해 민간인 사망자가 평시보다 47만 4천 명 더 많았다.[384] 레바논에서는 기근으로 약 10만 명이 사망했다. 1921년 러시아 기근으로 500만 명에서 1,000만 명이 사망했다.[385] 러시아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그리고 기근으로 1922년까지 450만 명에서 700만 명의 어린이가 고아가 되었다.
1918년에는 스페인 독감(인플루엔자)가 대유행하여 유럽에서 최소 2,000만 명이 사망했다.[388] 「스페인 독감」이라는 속칭은 각국이 전시하에 정보 통제를 하고 있던 중 중립국인 스페인에서 감염 정보가 일찍 전해진 데서 유래한다.[389]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유대인 병사는 총 1,172,000명 이상이며, 그중 27만 5천 명이 오스트리아-헝가리군, 45만 명이 러시아 제국군에 복무했다.[392]
10. 기술
제1차 세계 대전은 과학 기술 발전을 가속화했지만, 독가스와 같은 치명적인 무기들도 개발되어 사용되었다.[100][101][102] 기관총, 철조망, 참호선으로 고착화된 전선을 뚫기 위해 독가스가 사용되었고, 탱크와 대구경 대포, 열차포도 개발되었다.[416] 독일군은 프리츠 하버가 이끄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서 개발한 염소를 무기화하여 1915년 4월~5월 이프르 제2차 전투에서 처음으로 화학 무기를 성공적으로 사용했다.[99][100] 전쟁 기간 동안 모든 주요 참전국이 화학 무기를 사용하여 약 13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그중 약 9만 명이 사망했다.[100]
전쟁 초기에는 20세기 기술과 19세기 전술이 혼재되어 큰 피해가 발생했지만, 1917년 말에는 주요 군대가 현대화되어 전화, 무선 통신, 장갑차, 전차, 항공기를 사용했다.[148] 보병의 편제도 변경되어 하사관이 지휘하는 10명 정도의 분대 단위로 바뀌었다.
대포 기술도 혁신을 겪었다. 1914년에는 대포가 전선에 배치되어 직접 사격했지만, 1917년에는 간접 사격이 일반화되었고, 항공기와 야전 전화를 이용한 새로운 관측 및 거리 측정 기술이 사용되었다.[149] 포병 음향 측정과 대포병 사격도 일반화되었다. 독일군은 하버-보슈법에 의한 질소 고정을 활용하여 영국의 해상 봉쇄에도 불구하고 화약을 끊임없이 공급할 수 있었다.[414]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전차를 개발했다. 마크 I 전차는 1916년 9월 솜므 전투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1917년 11월 캉브레 전투에서는 힌덴부르크 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는 회전 포탑을 가진 르노 FT-17 경전차를 개발하여 승리에 기여했다. 루이스 경기관총, 브라우닝 M1918 자동소총, MP18 등 경기관총과 권총탄 기관단총도 도입되었다. 화염방사기는 독일군이 먼저 사용한 후 여러 나라에서 채용되었는데, 전술적 가치는 높지 않았지만 적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효과가 있었다.[417]
U보트는 독일 해군에 의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통해 영국의 보급을 차단하려 했다. 이에 대응하여 폭뢰(1916년), 수중청음기(패시브 소나의 일종, 1917년), 비행선 등이 개발되었다.[419][420]
고정익기는 1911년 이탈리아-튀르키예 전쟁에서 처음 군사적으로 사용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정찰과 근접 항공 지원에 사용되었다. 적기를 격추하기 위해 대공포와 전투기가 개발되었고, 전략 폭격기도 개발되어 주로 독일과 영국이 사용했다. 독일은 체펠린과 대형 복엽기를 이용해 영국 본토를 공습했다.
전쟁 후반에는 항공모함이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1918년 영국의 퓨리어스함이 톤데른에 있던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를 파괴하기 위해 을 감행, 소피위스 캐멀을 발진시켰다.[423]
유인 관측 기구는 고정된 정찰 기지로 사용되어 적군의 움직임을 보고하거나 포병에게 지시를 내렸다. 기구 승무원은 낙하산을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는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안전하게 탈출하기 위한 것이었다.[424]
11. 명언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벌어진 전쟁의 참상은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586] 독일의 화가 오토 딕스(Otto Dixde, 1891년 ~ 1969년)는 참호전의 참상을 그린 〈전쟁〉(1929년 작)에서 참호 속에 흩어진 사지와 흙더미에 거꾸로 박힌 시체, 피범벅이 된 진흙탕을 묘사하였다. 왜 끔찍하게 묘사하였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딕스는 "바로 저랬다. 나는 보았다."라고 대답했다.[586]
영국의 시인 윌프레드 오언(Wilfred Owen영어, 1893년-1918년)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반전시 《고귀한 영예》를 발표하였다.[586]
만일 불타는 꿈속에서
그가 실려가는 마차 뒤를 따라 걸을 수 있다면
……
독가스 찬 폐 속에서 쿨렁쿨렁 쏟아져 나오는 피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
친구여 영광의 이야기를 졸라대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진심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못할 테지
그 오래된 거짓말 말일세
"조국을 위해 몸바치는 것은 고귀한 영예라고."
— 윌프레드 오언, 《고귀한 영예》, 인류이야기 현대편 1에서 재인용[585]
12. 모병 포스터
12. 1. 미국

미국을 상징하는 캐릭터인 엉클 샘이 그려진 포스터는 미국의 역대 신병 모집 포스터 중 가장 유명한 것이다. 포스터에는 “샘 아저씨는 네가 육군에 지원하기를 원한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미국 해군에서도 육군 못지않게 모병 포스터를 많이 발행했다.
12. 2. 영국
영국은 독일보다 인구가 부족하여 미성년자들까지 징집할 정도로 모병에 힘썼다. 실제로 유틀란트 해전에 참전한 어떤 수병의 나이는 만 15세였다고 한다. 영국의 모병 포스터는 "누가 빠졌습니까? 당신입니까?"와 같이 참전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에서는 1916년 병역법(Military Service Act 1916)으로 징병이 시작되었다.[447] 병역법은 18세부터 40세까지의 독신 남성의 징병을 규정했으며, 이후 기혼 남성도 포함되었고 연령 상한선도 51세로 상향 조정되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 등을 심사하는 병역 재판소도 있었지만, 심사는 점차 엄격해졌다.[447] 징병은 1919년 중까지 계속되었으며, 정세 불안으로 아일랜드에서는 시행되지 않았다.[447] 병역에 적합한 남성 1천만 명 중 600만 명이 징집되었고, 그중 75만 명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447]
13. 미디어
해리 폰 틸저와 피어레스 4중주단이 연주. 1918년 3월 컬럼비아 레코드의 빈센트 브라이언이 녹음.
아서 필즈와 피어레스 4중주단이 연주. 1918년 5월 에디슨 레코드의 제임스 A. 브레넌이 녹음.
- [http://www.the-map-as-history.com/demos/tome06/ An animated map "Europe plunges into war"]
- [http://www.the-map-as-history.com/demos/tome03/ An animated map of Europe at the end of the war]
14. 둘러보기 상자
참조
[1]
간행물
The Great War
https://archive.org/[...]
2022-05-17
[2]
웹사이트
great, adj., adv., and n
http://www.oed.com/v[...]
2012-03-19
[3]
뉴스
The war to end all wars
http://news.bbc.co.u[...]
1998-11-10
[4]
간행물
La France et la Revanche (1871–1914)
https://www.persee.f[...]
1999
[5]
논문
Eastern Europe: Cordon Sanitaire or Powder-Keg?
https://doi.org/10.1[...]
Palgrave Macmillan UK
1995
[6]
논문
Balkan Clutter: American and European Handling of a Powder Keg
https://www.taylorfr[...]
Routledge
2001
[7]
논문
South-Eastern Europe After Tito: A Powder-Keg for the 1980s? Edited by David Carlton and Carlo Schaerf. New York: St. Martin's Press, 1983. xviii, 211 pp. Map. $22.50.
http://dx.doi.org/10[...]
1984
[8]
방송
Month of Madness
http://www.bbc.co.uk[...]
BBC Radio 4
2014-06-25
[9]
서적
Scholar, patriot, mentor: historical essays in honour of Dimitrije Djordjević
https://books.google[...]
East European Monographs
[10]
서적
Reports Service: Southeast Europe series
https://books.google[...]
American Universities Field Staff.
[11]
서적
Austrian-Greek encounters over the centuries: history, diplomacy, politics, arts, economics
https://books.google[...]
Studienverlag
[12]
서적
Unholy Terror: Bosnia, Al-Qa'ida, and the Rise of Global Jihad
https://books.google[...]
Zenith Imprint
[13]
웹사이트
Veliki rat – Avijacija
http://www.rts.rs/pa[...]
RTS, Radio televizija Srbije, Radio Television of Serbia
[14]
간행물
How was the first military airplane shot down
http://www.nationalg[...]
[15]
웹사이트
India and WWI: Piecing together the impact of the Great War on the subcontinent
https://blogs.lse.ac[...]
2014-09-24
[16]
웹사이트
Participants from the Indian subcontinent in the First World War
http://www.mgtrust.o[...]
Memorial Gates Trust
[17]
서적
British administration and the Amritsar massacre
Mittal Publications
1984
[18]
웹사이트
Weapons of War: Poison Gas
http://www.firstworl[...]
Firstworldwar.com
2009-08-22
[19]
뉴스
Verdun: myths and memories of the 'lost villages' of France
https://www.independ[...]
2006-02-21
[20]
논문
Trench Conflict with Combatants and Infectious Disease
https://doi.org/10.3[...]
CDC
2018-11
[21]
간행물
Jutland's Place in History
2016-06
[22]
웹사이트
The First Battle of the Atlantic
http://www.bbc.co.uk[...]
BBC
[23]
웹사이트
Committee Hansard
http://nslegislature[...]
2006-11-09
[24]
서적
A world at total war: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5]
참고자료
[26]
서적
Balkan Breakthrough: The Battle of Dobro Pole 1918
Indiana University Press
[27]
백과사전
The Balkan Wars and World War I
https://archive.org/[...]
Library of Congress Country Studies
[28]
웹사이트
The Balkan Front of the World War
http://militera.lib.[...]
militera.lib.ru
[29]
서적
The Middle East and Islamic world reader
https://books.google[...]
Grove Press
2003
[30]
서적
Genocide: modern crimes against humanity
https://books.google[...]
Twenty-First Century Books
2007
[31]
서적
The Holocaust and Genocides in Europe
https://books.google[...]
Continuum Publishing Corporation
2013
[32]
서적
The Neglected War: Mesopotamia, 1914–1918
Faber
[33]
서적
New Zealand's Great War: New Zealand, the Allies and the First World War
https://books.google[...]
Exisle Publishing
[34]
참고자료
[35]
백과사전
The Encyclopedia Americana
[36]
뉴스
Saving Forty Thousand Armenians
https://books.google[...]
New York Times Co.
2021-09-09
[37]
서적
A Brief History of the Late Ottoman Empire
Princeton University Press
[38]
harvnb
[39]
서적
Cultural Studies
https://books.google[...]
Jones & Bartlett Learning
2023-07-30
[40]
간행물
România în anii primului război mondial, vol.2
[41]
서적
Rumania 1866–1947
Clarendon Press
[42]
뉴스
Why the First War lasted so long
https://www.washingt[...]
2018-11-11
[43]
조약
Treaty of Bucharest with the Central Powers
1918-05
[44]
서적
Eastern Europe in the twentieth century
Routledge
[45]
서적
The Mounted Riflemen in Sinai & Palestine: The Story of New Zealand's Crusaders
Whitcombe & Tombs
[46]
서적
Military Operations. Part I Egypt & Palestine: Volume 2 From June 1917 to the End of the War
HM Stationery Office
[47]
서적
A Short History of the British Army
Constable & Co.
[48]
웹사이트
Text of the Decree of the Surrender of Jerusalem into British Control
http://www.firstworl[...]
First World War.com
2015-05-13
[49]
서적
The Last Crusade: The Palestine Campaign in the First World War
John Murray
[50]
웹사이트
Who's Who – Kress von Kressenstein
http://www.firstworl[...]
First World War.com
2015-05-13
[51]
웹사이트
Who's Who – Otto Liman von Sanders
http://www.firstworl[...]
First World War.com
2015-05-13
[52]
서적
Shock Army of the British Empire: The Canadian Corps in the Last 100 Days of the Great War
https://archive.org/[...]
Vanwell
[53]
서적
1918: Year of Victory
Pan
[54]
harvnb
[55]
웹사이트
The Battle of Dobro Polje – The Forgotten Balkan Skirmish That Ended WW1
https://web.archive.[...]
2019-11-21
[56]
웹사이트
The Germans Could no Longer Keep up the Fight
https://historycolle[...]
2017-02-22
[57]
웹사이트
1918 Timeline
http://www.indiana.e[...]
2009-11-20
[58]
웹사이트
The Battle of Dobro Polje – The Forgotten Balkan Skirmish That Ended WW1
https://web.archive.[...]
2017-09-21
[59]
웹사이트
The Germans Could no Longer Keep up the Fight
https://historycolle[...]
2017-02-22
[60]
저널
Trento, Bolzano e Innsbruck: l'occupazione militare italiana del Tirolo (1918–1920)
https://web.archive.[...]
[61]
웹사이트
Clairière de l'Armistice
https://web.archive.[...]
Ville de Compiègne
[62]
웹사이트
Die 14 Kieler Punkte
http://www.kurkuhl.d[...]
[63]
서적
Revolution in Kiel
Karl Wachholtz Verlag
[64]
서적
Kieler Erinnerungsorte
Boyens
[65]
뉴스
France's oldest WWI veteran dies
http://news.bbc.co.u[...]
2008-01-20
[66]
harvnb
[67]
서적
Encyclopedia of American Foreign Policy
Infobase Publishing
2009
[68]
서적
Liberty, Equality, Power: A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Cengage Learning
2010
[69]
뉴스
Harding Ends War; Signs Peace Decree at Senator's Home. Thirty Persons Witness Momentous Act in Frelinghuysen Living Room at Raritan
https://query.nytime[...]
1921-07-03
[70]
London Gazette
1920-02-10
[71]
간행물
London Gazette
1920-07-23
[72]
간행물
London Gazette
1920-08-27
[73]
간행물
London Gazette
1921-08-12
[74]
간행물
London Gazette
1924-08-12
[75]
웹사이트
Dates on war memorials
http://www.warmemori[...]
War Memorials Trust
2021-01-04
[76]
서적
The Great War: An Imperial History
Routledge
[77]
서적
Germany: A New History
https://books.google[...]
Harvard U.P.
[78]
서적
A Companion to World War I
https://books.google[...]
Wiley
[79]
웹사이트
The Surrogate Hegemon in Polish Postcolonial Discourse Ewa Thompson, Rice University
http://www.owlnet.ri[...]
2013-10-27
[80]
웹사이트
Open-Site:Hungary
http://open-site.org[...]
2022-01-11
[81]
서적
[82]
서적
Ethnic Geography of the Hungarian Minorities in the Carpathian Basin
Geographical Research Institute, Research Centre and Earth Sciences
[83]
뉴스
Appeals to Americans to Pray for Serbians
https://timesmachine[...]
1918-07-27
[84]
뉴스
Serbia Restored
https://timesmachine[...]
1918-11-05
[85]
웹사이트
The Minor Powers During World War One – Serbia
http://www.firstworl[...]
firstworldwar.com
2009-08-22
[86]
서적
Racist Extremism in Central and Eastern Europe
https://books.google[...]
[87]
뉴스
'ANZAC Day' in London; King, Queen, and General Birdwood at Services in Abbey
https://www.nytimes.[...]
1916-04-26
[88]
웹사이트
The ANZAC Day tradition
https://web.archive.[...]
Australian War Memorial
[89]
뉴스
The Diaspora Welcomes the Pope
http://www.spiegel.d[...]
Der Spiegel
2006-11-28
[90]
논문
The Holocaust in Comparative and Historical Perspective
[91]
뉴스
A Few Words in Greek Tell of a Homeland Lost
https://www.nytimes.[...]
2000-09-17
[92]
백과사전
World War I: Killed, wounded, and missing
https://www.britanni[...]
[93]
백과사전
War Losses
https://encyclopedia[...]
[94]
서적
Histoire Passionnée de la France
[95]
논문
Mortality burden of the 1918–1919 influenza pandemic in Europe
Wiley
2009-05
[96]
논문
Die Encephalitis lethargica
Leipzig and Vienna, Franz Deuticke
1917-05-10
[97]
논문
Experimenting on the Past: The Enigma of von Economo's Encephalitis Lethargica
[98]
웹사이트
War Horse: The True Story
https://www.albertaa[...]
2020-11-10
[99]
웹사이트
History of United States' Involvement in Chemical Warfare
https://www.denix.os[...]
[100]
논문
Chemical Warfare and Medical Response During World War I
2008-04
[101]
서적
The Anatomy of the Nuremberg Trials: A Personal Memoir
https://archive.org/[...]
Little, Brown and Company
[102]
서적
Cornerstones of Security: Arms Control Treaties in the Nuclear Er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3
[103]
서적
Ambassador Mogenthau's story
Brigham Young University
[104]
웹사이트
Open Letter to the Prime Minister of Turkey Recep Tayyip Erdoğan
https://web.archive.[...]
2005-06-13
[105]
서적
A German officer during the Armenian genocide: a biography of Max von Scheubner-Richter
https://books.google[...]
Taderon Press for the Gomidas Institute
[106]
웹사이트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Genocide Scholars
http://www.genocides[...]
2013-03-12
[107]
웹사이트
Resolution on genocides committed by the Ottoman empire
http://www.genocides[...]
[108]
서적
Massacres, Resistance, Protectors: Muslim-Christian Relations in Eastern Anatolia during World War I
https://books.google[...]
Gorgias Press
[109]
논문
Late Ottoman genocides: the dissolution of the Ottoman Empire and Young Turkish population and extermination policies – introduction
[110]
서적
The Armenian Genocide: The Essential Reference Guide: The Essential Reference Guide
https://books.google[...]
ABC-CLIO
2018-11-11
[111]
논문
Lloyd George and the 1918 Irish conscription crisis
[112]
웹사이트
Conscription: the Australian debate, 1901–1970
http://espace.librar[...]
2015-07-07
[113]
뉴스
Commonwealth Parliament from 1901 to World War I
https://www.aph.gov.[...]
Parliament of Australia
2015-05-04
[114]
뉴스
The Conscription Crisis
http://www.cbc.ca/hi[...]
CBC
2001-00-00
[115]
뉴스
Clergy and Man-Power
The Times
1918-04-15
[116]
서적
To Raise an Army: The Draft Comes to Modern America
https://archive.org/[...]
The Free Press
[117]
서적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Harper Collins
[118]
논문
A Surfeit of Socks? The Impact of the First World War on Women Correspondents to Daily Newspapers
https://www.euppubli[...]
2002-05-01
[119]
논문
The Service Attachés and Military Plenipotentiaries of Imperial Germany, 1871–1918
http://www.tandfonli[...]
1987-11-04
[120]
논문
Military Diplomats in the Prussian and German Service: The Attachés, 1816- 1914
https://www.jstor.or[...]
1949-00-00
[121]
서적
Women in the British Army: War and the Gentle Sex, 1907–1948
Routledge
[122]
뉴스
UK finally finishes paying for World War I
https://www.cnbc.com[...]
2015-03-10
[123]
서적
The Weimar Republic Sourcebook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24]
harvard
[125]
harvard
[126]
harvard
[127]
서적
World War One: A Short History
Penguin
[128]
harvard
[129]
뉴스
First World War officially ends
https://www.telegrap[...]
2010-09-28
[130]
뉴스
Why Did World War I Just End?
http://www.time.com/[...]
2010-10-04
[131]
뉴스
World War I to finally end for Germany this weekend
http://news.blogs.cn[...]
2010-09-30
[132]
뉴스
Ending the War to End All Wars
https://www.nytimes.[...]
2010-12-25
[133]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Somalia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134]
뉴스
How Ethiopian prince scuppered Germany's WW1 plans
https://www.bbc.com/[...]
2016-09-25
[135]
harvard
[136]
harvard
[137]
서적
Modern Italy: A Political History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38]
웹사이트
No Immediate Need. Te Awamutu Courier
https://paperspast.n[...]
1939-09-22
[139]
웹사이트
Chapter 4 – Response from the Home Front
https://nzetc.victor[...]
1986-00-00
[140]
웹사이트
5.2: Provincial patriotic councils
https://oag.parliame[...]
2005-00-00
[141]
harvnb
[142]
서적
A Kingdom United: Popular Responses to the Outbreak of the First World War in Britain and Ireland
Oxford University Press
[143]
서적
The Decline of the Union: British Government in Ireland, 1892–1920
[144]
서적
These Strange Criminals: An Anthology of Prison Memoirs by Conscientious Objectors to Military Service from the Great War to the Cold War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45]
웹사이트
Winchester Whisperer: The secret newspaper made by jailed pacifists
https://www.bbc.com/[...]
2022-02-07
[146]
웹사이트
The Russian Revolution
https://books.google[...]
Knopf Doubleday
2019-07-30
[147]
서적
Italy from Liberalism to Fascism: 1870 to 1925
Methuen & Co. Ltd
[148]
서적
The First Air Campaign: August 1914 – November 1918
https://books.google[...]
Da Capo Press
[149]
서적
Military Communications: From Ancient Times to the 21st Century
ABC-CLIO
[150]
harvnb
[151]
서적
Diplomatic History of the First World War
https://archive.org/[...]
Weidenfeld and Nicolson
[152]
서적
Official Statements of War Aims and Peace Proposals: December 1916 to November 1918
https://archive.org/[...]
Washington, D.C., The Endowment
[153]
웹사이트
Memorials to the Missing of the First and Second World Wars
https://www.dva.gov.[...]
Commonwealth of Australia
2024-03-01
[154]
웹사이트
Thiepval Anglo-French Cemetery
https://www.cwgc.org[...]
2024-03-01
[155]
학술지
John McCrae
Historica
[156]
학술지
John McCrae
https://www.thecanad[...]
2014-06-08
[157]
웹사이트
Monumental Undertaking
http://www.kclibrary[...]
2015-05-23
[158]
웹사이트
Commemoration website
https://web.archive.[...]
1914.org
2014-02-28
[159]
뉴스
French, German Presidents Mark World War I Anniversary
https://www.francene[...]
France News.Net
2014-08-03
[160]
뉴스
Armistice Day: Macron and Merkel mark end of World War One
https://www.bbc.com/[...]
BBC News
2021-03-30
[161]
서적
Wilfred Owen: poems
Faber and Faber
[162]
서적
The World War I Reader
2007
[163]
학술지
As the centenary approaches: the regeneration of First World War historiography
[164]
서적
Writing the Great War – The Historiography of World War I from 1918 to the Present
https://www.berghahn[...]
[165]
웹사이트
第1次世界大戦とは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22-12-07
[166]
웹사이트
British Army statistics of the Great War
http://www.1914-1918[...]
1914-1918.net
2011-12-13
[167]
기타
[168]
기타
[169]
harvnb
[170]
서적
Teach yourself, the First World War
Hodder Arnold
[171]
harvnb
[172]
뉴스
第1次大戦終結から100年/平和を願う ベルギー「平和の鐘」
https://www.nishinip[...]
西日本新聞
[173]
기타
[174]
뉴스
The war to end all wars
http://news.bbc.co.u[...]
BBC News
1998-11-10
[175]
서적
複合戦争と総力戦の断層』―日本にとっての第一次世界大戦(レクチャー第一次世界大戦を考える)
人文書院
[176]
웹사이트
Were they always called World War I and World War II?
http://www.history.c[...]
2013-10-24
[177]
텍스트
[178]
서적
Guide to Canadian English Usage
오스코드 대학 Press
[179]
웹사이트
Maclean’s named the Great War
http://www.macleans.[...]
마클린즈
2014-08-02
[180]
웹사이트
Waterloo: The Great War
http://www.thehistor[...]
The History Press
2017-10-14
[181]
harvnb
[182]
서적
'팔월의 포성'
[183]
harvnb
[184]
웹사이트
What new countries were created after World War I? - Updated
https://www.quora.co[...]
2017-12-15
[185]
뉴스
<第1次世界大戦終結100年>戦場の理屈 大量殺害
http://www.tokyo-np.[...]
도쿄신문
2018-11-18
[186]
harvnb
[187]
서적
The last courts of Europe
https://books.google[...]
Dent
[188]
웹사이트
European powers maintain focus despite killings in Sarajevo — History.com This Day in History
http://www.history.c[...]
History.com
1914-06-30
[189]
오디오비주얼 미디어
Month of Madness
http://www.bbc.co.uk[...]
BBC Radio 4
2014-06-25
[190]
서적
Scholar, patriot, mentor: historical essays in honor of Dimitrije Djordjević
https://books.google[...]
East European Monographs
[191]
서적
Reports Service: Southeast Europe series
https://books.google[...]
American Universities Field Staff.
[192]
서적
Austrian-Greek encounters over the centuries: history, diplomacy, politics, arts, economics
https://books.google[...]
Studienverlag
2008-02-28
[193]
서적
Unholy Terror: Bosnia, Al-Qa'ida, and the Rise of Global Jihad
https://books.google[...]
Zenith Imprint
[194]
서적
Europe's Last Summer: Why the World Went to War in 1914
Heinemann
[195]
뉴스
First World War centenary: how the events of August 1 1914 unfolded
http://www.telegraph[...]
2014-08-01
[196]
서적
July 1914: Countdown to War
Basic Books
[197]
서적
A World War I Timeline (Smithsonian War Timelines Series)
Capstone
[198]
웹사이트
Daily Mirror Headlines: The Declaration of War, Published 4 August 1914
http://www.bbc.co.uk[...]
BBC
[199]
서적
Der Erste Weltkrieg. 1914-1918.
Böhlau
[200]
서적
Deutsche Kriegsgreuel 1914. Die umstrittene Wahrheit.
Hamburger Edition
[201]
서적
Deutsche Kriegsgreuel 1914. Die umstrittene Wahrheit., Schuldfragen: Belgischer Untergrundkrieg und deutsche Vergeltung im August 1914
Hamburger Edition, Schöningh
[202]
서적
The Encyclopedia of World War I. A Political, Social and Military History
ABC-Clio
[203]
서적
Deutsche Kriegsgreuel 1914. Die umstrittene Wahrheit., Schuldfragen: Belgischer Untergrundkrieg und deutsche Vergeltung im August 1914
Hamburger Edition, Schöningh
[204]
서적
Der große Krieg. Deutschland und Frankreich 1914-1918.,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205]
서적
Der große Krieg. Deutschland und Frankreich 1914-1918.,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206]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207]
서적
Der große Krieg. Deutschland und Frankreich 1914-1918.
[208]
서적
Der Erste Weltkrieg., Der große Krieg. Deutschland und Frankreich 1914-1918.
[209]
서적
Der Erste Weltkrieg.
[210]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Die militärische Planung im Deutschen Reich.
[211]
서적
Die Schlacht vor Paris. Das Marnedrama 1914
Gerhard Stalling Verlag
1928
[212]
서적
Die militärische Planung im Deutschen Reich
1997
[213]
서적
Krieg der Illusionen. Die Deutsche Politik von 1911-1914
1970
[214]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2001
[215]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2001
[216]
간행물
NYTimes Current History
[217]
간행물
NYTimes Current History
[218]
서적
Der große Krieg. Deutschland und Frankreich 1914-1918
2010
[219]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2001
[220]
서적
Kurt Riezler. Tagebücher-Aufsätze-Dokumente. Eingeleitet und herausgegeben von Karl Dietrich Erdmann
Vandenhoeck & Ruprecht
1972
[221]
서적
Die militärische Planung im Deutschen Reich
1997
[222]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Patmos Verlag
2014
[223]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2001
[224]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2001
[225]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neue illustrierte Geschichte
2006
[226]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2001
[227]
서적
Der Erste Weltkrieg
1988
[228]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014
[229]
서적
A Brief History of the Austrian Navy
epubli GmbH
2012
[230]
서적
「どこにいようとそこがドイツだ」
鳴門市ドイツ館
2000
[231]
서적
「どこにいようとそこがドイツだ」
鳴門市ドイツ館
2000
[232]
서적
『北欧の外交』
[233]
서적
『北欧史』
[234]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C. Bertelsmann Verlag
2014
[235]
백과사전
Uボート (U-Boot)
[236]
서적
Strategische Probleme der deutschen Seekriegführung 1914-1918
Musterschmidt
1997
[237]
서적
Die Lusitania - Mythos und Wirklichkeit
Verlag E. S. Mittler & Sohn
1999
[238]
서적
Wurden torpediert, schickt Hilfe - Der Untergang der Lusitania 1915
DVA
2004
[239]
서적
Nothing Less Than War: A New History of America's Entry into World War I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11
[240]
서적
Tagebücher 1914-1919. Der Erste Weltkrieg und die Entstehung der Weimarer Republik in Tagebüchern, Leitartikeln und Briefen des Chefredakteurs am „Berliner Tageblatt“ und Mitbegründer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Partei“
Boppard am Rhein
1984
[241]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2001
[242]
서적
Der Große Krieg
2013
[243]
서적
Der Erste Weltkrieg
1988
[244]
서적
Der Erste Weltkrieg
1988
[245]
서적
Der Erste Weltkrieg
1988
[246]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Hirschfeld u. a. (Hrsg.)
[247]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Hirschfeld u. a. (Hrsg.)
[248]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Hirschfeld u. a. (Hrsg.)
[249]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neue illustrierte Geschichte
Strachan
[250]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neue illustrierte Geschichte
Strachan
[251]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Hirschfeld u. a. (Hrsg.)
[252]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neue illustrierte Geschichte
Strachan
[253]
서적
Kurt Riezler. Tagebücher-Aufsätze-Dokumente. Eingeleitet und herausgegeben von Karl Dietrich Erdmann
Karl Dietrich Erdmann (Hrsg.)
[254]
서적
Kurt Riezler. Tagebücher-Aufsätze-Dokumente. Eingeleitet und herausgegeben von Karl Dietrich Erdmann
Karl Dietrich Erdmann (Hrsg.)
[255]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Hirschfeld u. a. (Hrsg.)
[256]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Hirschfeld u. a. (Hrsg.)
[257]
웹사이트
알메니아인 학살 기념일
[258]
서적
Der Völkermord an den Armeniern 1915/16. Dokumente aus dem Politischen Archiv des deutschen Auswärtigen Amtes
http://www.armenocid[...]
Wolfgang Gust (Hrsg.)
[259]
서적
Der Völkermord an den Armeniern 1915/16. Dokumente aus dem Politischen Archiv des deutschen Auswärtigen Amtes
http://www.armenocid[...]
Wolfgang Gust (Hrsg.)
[260]
서적
Der Völkermord an den Armeniern 1915/16. Dokumente aus dem Politischen Archiv des deutschen Auswärtigen Amtes
http://www.armenocid[...]
Wolfgang Gust (Hrsg.)
[261]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Hirschfeld u. a. (Hrsg.)
[262]
서적
The Balkan Wars, 1912-1913: Prelude to the First World War
Richard C. Hall
[263]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Hirschfeld u. a. (Hrsg.)
[264]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Keegan
[265]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Hirschfeld u. a. (Hrsg.)
[266]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Hirschfeld u. a. (Hrsg.)
[267]
웹사이트
프랑스군 참모본부
[268]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http://rha.revues.or[...]
Hirschfeld u. a. (Hrsg.)
[269]
기타
[270]
서적
Tagebücher 1914-1919. Der Erste Weltkrieg und die Entstehung der Weimarer Republik in Tagebüchern, Leitartikeln und Briefen des Chefredakteurs am „Berliner Tageblatt“ und Mitbegründer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Partei“
Theodor Wolff
[271]
서적
Fürth 1911-1914. Krieg der Illusionen - die lokale Sicht
Alexander Mayer
[272]
서적
Tagebücher 1914-1919. Der Erste Weltkrieg und die Entstehung der Weimarer Republik in Tagebüchern, Leitartikeln und Briefen des Chefredakteurs am „Berliner Tageblatt“ und Mitbegründer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Partei“
Theodor Wolff
[273]
서적
Der große Krieg. Deutschland und Frankreich 1914-1918
Becker, Krumeich
[274]
서적
Tagebücher 1914-1919. Der Erste Weltkrieg und die Entstehung der Weimarer Republik in Tagebüchern, Leitartikeln und Briefen des Chefredakteurs am „Berliner Tageblatt“ und Mitbegründer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Partei“
Theodor Wolff
[275]
웹사이트
The Asinara Island
http://www.stintino.[...]
2018-05-19
[276]
서적
Weltwirtschafts & Finanzcrash 2015 - I
https://books.google[...]
[277]
서적
The First World War and the End of the Habsburg Monarchy, 1914-1918
https://books.google[...]
[278]
서적
Die Oberste Heeresleitung 1914-1916 in ihren wichtigsten Entscheidungen
Erich von Falkenhayn
[279]
서적
Der große Krieg. Deutschland und Frankreich 1914-1918
Becker, Krumeich
[280]
서적
Falkenhayn. Politisches Denken und Handeln im Kaiserreich
Holger Afflerbach
[281]
설명
[282]
서적
Die Deutsche Marinepolitik, 1916-1918
Duncker & Humblot
[283]
서적
Kurt Riezler. Tagebücher-Aufsätze-Dokumente. Eingeleitet und herausgegeben von Karl Dietrich Erdmann
Vandenhoeck & Ruprecht
[284]
서적
Skagerrakschlacht - Vorgeschichte - Ereignis - Verarbeitung
Oldenbourg
[285]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86]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287]
서적
Die Deutschen an der Somme 1914-1918. Krieg, Besatzung, Verbrannte Erde
Klartext Verlag
[288]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289]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90]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291]
서적
Wilhelm II. - Der Weg in den Abgrund, 1900-1941
C.H. Beck
[292]
서적
Der Erste Weltkrieg
[293]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neue illustrierte Geschichte
[294]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95]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96]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97]
서적
Der große Krieg. Deutschland und Frankreich 1914-1918
[298]
서적
Tagebücher 1914-1919. Der Erste Weltkrieg und die Entstehung der Weimarer Republik in Tagebüchern, Leitartikeln und Briefen des Chefredakteurs am „Berliner Tageblatt“ und Mitbegründer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Partei“
Boppard am Rhein
[299]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300]
서적
War Messages, 65th Cong., 1st Sess. Senate Doc. No. 5, Serial No. 7264
[301]
서적
Der Anfang vom Ende des Krieges: Deutschland, die USA und die Hintergründe des amerikanischen Kriegseintritts am 6. April
[302]
뉴스
「地中海で戦ったこと忘れないで」甦る日本艦隊への評価 地中海の小国マルタ 第一次大戦開戦100年
http://www.sankei.co[...]
2014-08-03
[303]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neue illustrierte Geschichte
[304]
웹사이트
Ein verhängnisvolles Jahr
http://bazonline.ch/[...]
2016-08-17
[305]
설명
[306]
서적
Geschichte des Westens: Von den Anfängen in der Antike bis zum 20. Jahrhundert
C.H. Beck
[307]
서적
Lenin. Utopie und Terror
Econ
[308]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309]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310]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311]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312]
서적
Lenin. Eine Biographie
Beck
[313]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314]
서적
Die Deutschen an der Somme 1914-1918. Krieg, Besatzung, Verbrannte Erde
Klartext Verlag
[315]
서적
La carrière Wellington. Mémorial de la Bataille d´Arras. 9 Avril 1917
[316]
서적
Tunnelstadt unter der Hölle
http://www.spiegel.d[...]
Der Spiegel
2008-04-16
[317]
서적
Der Erste Weltkrieg.
1988
[318]
서적
Der große Krieg. Deutschland und Frankreich 1914-1918.
2010
[319]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neue illustrierte Geschichte.
2006
[320]
서적
Der Erste Weltkrieg.
1988
[321]
서적
Kriegsgeschichte: Weltgeschichte der Schlachten und Kriegszüge
Komet
1999
[322]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014
[323]
서적
Der Erste Weltkrieg.
1988
[324]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014
[325]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neue illustrierte Geschichte.
2006
[326]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2001
[327]
서적
Bratpfanne des Teufels. Wie ein preußischer General für die Türken Bagdad zurückerobern sollte und dabei Jerusalem verlor.
Goldmann Verlag
2011
[328]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014
[329]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014
[330]
서적
Tagebücher 1914-1919. Der Erste Weltkrieg und die Entstehung der Weimarer Republik in Tagebüchern, Leitartikeln und Briefen des Chefredakteurs am „Berliner Tageblatt“ und Mitbegründer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Partei“.
Boppard am Rhein
1984
[331]
서적
Tagebücher 1914-1919. Der Erste Weltkrieg und die Entstehung der Weimarer Republik in Tagebüchern, Leitartikeln und Briefen des Chefredakteurs am „Berliner Tageblatt“ und Mitbegründer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Partei“.
Boppard am Rhein
1984
[332]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014
[333]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014
[334]
서적
Benedikt XV. - Papst zwischen den Fronten.
2016
[335]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014
[336]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014
[337]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014
[338]
서적
Politik im deutschen Kaiserreich 1871-1918
R. Oldenbourg Verlag
2005
[339]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2014
[340]
간행물
カイザーシュラハト
[341]
서적
1914-1918. Der Erste Weltkrieg.
Patmos Verlag
2010
[342]
서적
Der Erste Weltkrieg. Eine europäische Tragödie.
2001
[343]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Patmos Verlag
2014
[344]
서적
Schicksalswende. Von Marne bis zur Vesle 1918.
Gerhard Stalling Verlag
1930
[345]
서적
Shock Army of the British Empire: The Canadian Corps in the Last 100 Days of the Great War
Vanwell
2004
[346]
서적
1918: Year of Victory
Pan
1999
[347]
서적
1990
[348]
서적
The Canadians at Cambrai and the Canal du Nord, August-September 1918
CEF Books
1997
[349]
웹사이트
Clairière de l'Armistice
http://www.compiegne[...]
Ville de Compiègne
2018-01-20
[351]
웹사이트
1918 Timeline
http://www.indiana.e[...]
2009-11-20
[352]
논문
Trento, Bolzano E Innsbruck: L'occupazione Militare Italiana Del Tirolo (1918-1920)
http://www.agiati.it[...]
Accademia Roveretana degli Agiati
[353]
서적
The First World War, 1914-1918
[354]
뉴스
France's oldest WWI veteran dies
http://news.bbc.co.u[...]
BBC News
2008-01-20
[355]
서적
Encyclopedia of World War I
https://books.google[...]
ABC-CLIO
[356]
서적
Encyclopedia of American Foreign Policy
Infobase Publishing
[357]
서적
Liberty, Equality, Power: A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Cengage Learning
[358]
뉴스
Harding Ends War; Signs Peace Decree at Senator's Home. Thirty Persons Witness Momentous Act in Frelinghuysen Living Room at Raritan.
https://query.nytime[...]
1921-07-03
[359]
간행물
London Gazette
1920-02-10
[360]
간행물
London Gazette
1920-07-23
[361]
간행물
London Gazette
1920-08-27
[362]
간행물
London Gazette
1921-08-12
[363]
간행물
London Gazette
1924-08-12
[364]
서적
The Great War: An Imperial History
Routledge
[365]
서적
Germany: A New History
https://books.google[...]
Harvard U.P.
[366]
서적
Mourning and Memory, 1919 - 45
https://books.google[...]
Wiley
[367]
웹사이트
The Surrogate Hegemon in Polish Postcolonial Discourse Ewa Thompson, Rice University
http://www.owlnet.ri[...]
2018-01-21
[368]
서적
Ethnic Geography of the Hungarian Minorities in the Carpathian Basin
[369]
뉴스
Appeals to Americans to Pray for Serbians
https://query.nytime[...]
1918-07-27
[370]
뉴스
Serbia Restored
https://query.nytime[...]
1918-11-05
[371]
웹사이트
The Minor Powers During World War One - Serbia
http://www.firstworl[...]
firstworldwar.com
2009-08-22
[372]
뉴스
'ANZAC Day' in London; King, Queen, and General Birdwood at Services in Abbey
https://query.nytime[...]
1916-04-26
[373]
웹사이트
The ANZAC Day tradition
http://www.awm.gov.a[...]
Australian War Memorial
2008-05-02
[374]
웹사이트
Vimy Ridge
http://www.warmuseum[...]
Canadian War Museum
2008-10-22
[375]
웹사이트
The War's Impact on Canada
http://www.warmuseum[...]
Canadian War Museum
2008-10-22
[376]
뉴스
Canada's last WW1 vet gets his citizenship back
http://www.cbc.ca/ca[...]
CBC News
2008-05-09
[377]
웹사이트
Documenting Democracy
http://foundingdocs.[...]
2012-03-31
[378]
뉴스
Middle East turmoil is fuelling Ottoman nostalgia. But it's a dead end
https://www.theguard[...]
2013-10-06
[379]
웹사이트
Pogroms
https://www.jewishvi[...]
American-Israeli Cooperative Enterprise
2009-11-17
[380]
웹사이트
Jewish Modern and Contemporary Periods (ca. 1700-1917)
https://www.jewishvi[...]
American-Israeli Cooperative Enterprise
2009-11-17
[381]
뉴스
The Diaspora Welcomes the Pope
http://www.spiegel.d[...]
Der Spiegel
2006-11-28
[382]
논문
The Holocaust in Comparative and Historical Perspective
[383]
뉴스
A Few Words in Greek Tell of a Homeland Lost
https://www.nytimes.[...]
2000-09-17
[384]
논문
The Social and Political Consequences of the Allied Food Blockade of Germany, 1918-19
http://libcom.org/fi[...]
[385]
웹사이트
Food as a Weapon
http://www.hoover.or[...]
Hoover Institution
2007-01-30
[386]
뉴스
The Russians are coming (Russian influence in Harbin, Manchuria, China; economic relations)
http://www.highbeam.[...]
1995-01-14
[387]
서적
Medicine and the War
https://books.google[...]
[388]
서적
Influenza
http://www.influenza[...]
Flying Publisher
2009-11-17
[389]
웹사이트
1918-19スペイン風邪の流行状況(労研図書館資料から)
https://www.isl.or.j[...]
財団法人 労働科学研究所
2020-02-09
[390]
웹사이트
20世紀のパンデミック(スペインかぜ)
http://influenza.ela[...]
中外製薬
[391]
백과사전
Balfour Declaration (United Kingdom 1917)
http://www.britannic[...]
[392]
웹사이트
Timeline of The Jewish Agency for Israel:1917-1919
http://www.jewishage[...]
The Jewish Agency for Israel
2013-08-29
[393]
웹사이트
The Ending of World War One, and the Legacy of Peace
http://www.bbc.co.uk[...]
BBC
2018-01-23
[394]
백과사전
World War II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09-11-12
[395]
학술지
Stabbed in the Back! The past and future of a right-wing myth
http://www.harpers.o[...]
2006-06
[396]
서적
Genocide: a history
https://books.google[...]
Pearson Education
[397]
뉴스
Britain FINALLY pays off last of First World War debt as George Osborne redeems £1.9bn
https://www.express.[...]
2015-03-09
[398]
서적
Women in the British Army: War and the Gentle Sex, 1907-1948
Routledge
[399]
서적
Encyclopedia of World War I
https://books.google[...]
ABC-CLIO
2010-05-07
[400]
서적
The Weimar Republic Sourcebook
https://books.google[...]
캘리포니아대학교 Press
[401]
서적
World War One: A Short History
Penguin Adult
[402]
웹사이트
First World War officially ends
http://www.telegraph[...]
2010-09-28
[403]
뉴스
Why Did World War I Just End?
http://www.time.com/[...]
2010-10-04
[404]
뉴스
World War I to finally end for Germany this weekend
http://news.blogs.cn[...]
2010-09-30
[405]
뉴스
Ending the War to End All Wars
https://www.nytimes.[...]
2010-10-25
[406]
웹사이트
From Wristwatches To Radio, How World War I Ushered In The Modern World
http://www.npr.org/t[...]
NPR
[407]
웹사이트
第一次世界大戦:不発弾1億発、処理に700年…フランス
http://mainichi.jp/g[...]
『毎日新聞』
2014-08-01
[408]
뉴스
<第一次世界大戦終結100年>毒ガス弾 世紀超え汚染
http://www.tokyo-np.[...]
東京新聞
2018-12-07
[409]
뉴스
「第一次大戦から1世紀 激戦地・仏ベルダン/祖父の遺骨と対面 戦争は終わらない」
https://special.sank[...]
産経新聞
2019-01-11
[410]
뉴스
「クロード・チョールズ氏死去、第1次世界大戦で戦闘に参加した最後の生存者 110歳」
https://www.afpbb.co[...]
フランス通信社
2018-11-18
[411]
뉴스
第1次大戦100年式典/仏大統領演説 排他主義に警鐘
読売新聞
2018-11-12
[412]
뉴스
第1次大戦終結から100年 マクロン氏「悪魔再び」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8-11-18
[413]
서적
Military Communications: From Ancient Times to the 21st Century
ABC-CLIO
[414]
서적
German Artillery of World War One
Crowood Press
[415]
기타
[416]
Youtube
Heavy Railroad Artillery
https://www.youtube.[...]
[417]
백과사전
Flamethrower
https://encyclopedia[...]
[418]
서적
Proceedings of the Annual Convention of the International Railway Fuel Association
https://books.google[...]
[419]
서적
Depth Charge!: Mines, Depth Charges and Underwater Weapons, 1914-1945
[420]
서적
From the Dreadnought to Scapa Flow: Volume IV 1917, Year of Crisis
Seaforth
[421]
서적
Encyclopedia of British Submarines 1901-1955
Periscope
[422]
서적
The First Air Campaign: August 1914- November 1918
https://books.google[...]
Da Capo Press
[423]
서적
Zeppelin Nights: London in the First World War
Random House
[424]
harvnb
[425]
웹사이트
暗号の歴史 STAGE3 第一次世界大戦
http://www.mitsubish[...]
三菱電機
2018-02-12
[426]
웹사이트
Максим Оськин - Неизвестные трагедии Первой мировой Пленные Дезертиры Беженцы - стр 24 - Читаем онлайн
http://profismart.ru[...]
Profismart.ru
2013-03-13
[427]
웹사이트
The Mesopotamia campaign
http://www.nationala[...]
British National Archives
2007-03-10
[428]
웹사이트
Prisoners of Turkey: Men of Kut ''Driven along like beasts''
http://www.awm.gov.a[...]
Australian War Memorial
2008-12-10
[429]
웹사이트
ICRC in WWI: overview of activities
http://www.icrc.org/[...]
Icrc.org
2010-06-15
[430]
뉴스
GERMANY: Notes, Sep. 1, 1924
http://www.time.com/[...]
2010-06-15
[43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Somalia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2017-02-28
[432]
뉴스
How Ethiopian prince scuppered Germany's WW1 plans
http://www.bbc.com/n[...]
2016-09-25
[433]
harvnb
[434]
harvnb
[435]
서적
Modern Italy; A Political History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436]
서적
History of the Church
Burns & Oates
[437]
웹사이트
Who's Who — Pope Benedict XV
http://www.firstworl[...]
firstworldwar.com
2018-02-10
[438]
서적
"Merely For the Record": The Memoirs of Donald Christopher Smith 1894-1980
[439]
서적
A Kingdom United: Popular Responses to the Outbreak of the First World War in Britain and Ireland
Oxford University Press
[440]
서적
The Decline of the Union: British Government in Ireland, 1892-1920
[441]
서적
These Strange Criminals: An Anthology of Prison Memoirs by Conscientious Objectors to Military Service from the Great War to the Cold War
University of Toronto Press
[442]
웹사이트
Soviet Union - Uzbeks
http://www.country-d[...]
Country-data.com
2013-03-13
[443]
서적
Italy from Liberalism to Fascism: 1870 to 1925
Methuen & Co. Ltd
[444]
간행물
Lloyd George and the 1918 Irish conscription crisis
[445]
웹사이트
The Conscription Crisis
http://www.cbc.ca/hi[...]
CBC
2018-02-10
[446]
간행물
Conscription: the Australian debate, 1901-1970
http://espace.librar[...]
[447]
뉴스
Clergy and Man-Power
1918-04-15
[448]
서적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Harper Collins
[449]
서적
To raise an army: The draft comes to modern America
[450]
서적
Catastrophe: Europe goes to War 1914
Collins
[451]
서적
The First World War and International Politics
[452]
서적
Diplomatic History of the First World War
[453]
서적
Official Statements of War Aims and Peace Proposals: December 1916 to November 1918
https://archive.org/[...]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454]
서적
Soviet Nation-Building in Central Asia: The Making of the Kazakh and Uzbek Nation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5
[455]
웹인용
British Army statistics of the Great War
http://www.1914-1918[...]
1914-1918.net
2011-12-13
[456]
일반
[457]
일반
[458]
harvard
[459]
서적
Tomb of the Unknowns
http://books.google.[...]
Lorenz Educational Press
2013-07-18
[460]
서적
Those Extraordinary Women of World War 1
http://books.google.[...]
Twenty-First Century Books
[461]
서적
Winston S. Churchill: 1874–1965 ; a Comprehensive Historiography and Annotated Bibliography
http://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462]
웹인용
Were they always called World War I and World War II?
http://www.history.c[...]
2013-10-24
[463]
harvard
[464]
harvard
[465]
harvard
[466]
harvard
[467]
harvard
[468]
harvard
[469]
harvard
[470]
harvard
[471]
harvard
[472]
웹인용
Oxford English Dictionary
http://www.oed.com/v[...]
2012-03
[473]
서적
The World War: How It Looks to the Nations Involved and What It Means to Us
https://archive.org/[...]
MacMillan Company
[474]
harvard
[475]
harvard
[476]
harvard
[477]
harvard
[478]
harvard
[479]
harvard
[480]
harvard
[481]
harvard
[482]
서적
The last courts of Europe
http://books.google.[...]
Dent
[483]
서적
One Morning In Sarajevo
http://books.google.[...]
Hachette UK
[484]
웹인용
European powers maintain focus despite killings in Sarajevo — History.com This Day in History — 6/30/1914
http://www.history.c[...]
History.com
2013-12-26
[485]
harvard
[486]
서적
Scholar, patriot, mentor: historical essays in honor of Dimitrije Djordjević
http://books.google.[...]
East European Monographs
[487]
서적
Reports Service: Southeast Europe series
http://books.google.[...]
American Universities Field Staff.
2013-12-07
[488]
서적
On Prejudice: A Global Perspective
http://books.google.[...]
Anchor Books
2013-09-02
[489]
서적
Serbia's Great War, 1914–1918
http://books.google.[...]
Purdue University Press
2013-12-07
[490]
harvard
[491]
서적
Unholy Terror: Bosnia, Al-Qa'ida, and the Rise of Global Jihad
http://books.google.[...]
Zenith Imprint
[492]
harvnb
[493]
서적
Austrian-Greek encounters over the centuries: history, diplomacy, politics, arts, economics
http://books.google.[...]
Studienverlag
2008-02-28
[494]
harvnb
[495]
harvnb
[496]
harvnb
[497]
서적
The Essentials of European History: 1914 to 1935, World War I and Europe in Crisis
Research & Education Assoc.
[498]
서적
A World War I Timeline (Smithsonian War Timelines Series)
Capstone
[499]
harvnb
[500]
웹인용
Daily Mirror Headlines: The Declaration of War, Published 4 August 1914
http://www.bbc.co.uk[...]
BBC
2010-02-09
[501]
harvnb
[502]
harvnb
[503]
웹인용
Disaster on the Drina: The Austro-Hungarian Army in Serbia, 1914
http://wih.sagepub.c[...]
Wih.sagepub.com
2002-04-01
[504]
뉴스
Momčilo Gavrić - najmlađi vojnik Prvog svetskog rata
http://www.novosti.r[...]
Večernje novosti
2013-08-31
[505]
서적
Auntie Mabel's war: an account of her part in the hostilities of 1914–18
Allen Lane
[506]
서적
Srpski biografski rečnik, vol II
Budućnost
[507]
harvnb
[508]
서적
A Brief History of the Austrian Navy
epubli GmbH
[509]
harvnb
[510]
harvnb
[511]
harvnb
[512]
harvnb
[513]
harvnb
[514]
웹인용
Participants from the Indian subcontinent in the First World War
http://www.mgtrust.o[...]
Memorial Gates Trust
2008-12-12
[515]
harvnb
[516]
harvnb
[517]
harvnb
[518]
웹인용
Weapons of War: Poison Gas
http://www.firstworl[...]
Firstworldwar.com
2009-08-22
[519]
harvnb
[520]
harvnb
[521]
harvnb
[522]
뉴스
Verdun: myths and memories of the 'lost villages' of France
http://www.independe[...]
2006-02-21
[523]
harvnb
[524]
harvnb
[525]
harvnb
[526]
논문
[527]
논문
[528]
논문
[529]
논문
[530]
논문
[531]
논문
[532]
논문
[533]
논문
[534]
논문
[535]
웹사이트
The First Battle of the Atlantic
http://www.bbc.co.uk[...]
BBC
2009-11-11
[536]
논문
[537]
논문
[538]
논문
[539]
간행물
Committee Hansard
http://nslegislature[...]
Hansard
2006-11-09
[540]
서적
A world at total war: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
Cambridge University Press
[541]
논문
[542]
웹사이트
The Balkan Wars and World War I
http://international[...]
Library of Congress Country Studies
[543]
논문
[544]
논문
[545]
논문
[546]
논문
[547]
웹사이트
The Balkan Front of the World War (in Russian)
http://militera.lib.[...]
miltera.lib.ru
2010-09-27
[548]
논문
[549]
웹사이트
The Treaty of Alliance Between Germany and Turkey
http://avalon.law.ya[...]
Yale University
[550]
서적
Shall This Nation Die?
http://books.google.[...]
[551]
논문
[552]
논문
[553]
백과사전
The Encyclopedia Americana
[554]
논문
[555]
논문
[556]
논문
[557]
서적
A Brief History of the Late Ottoman Empire
Princeton University Press
[558]
논문
[559]
서적
Modern Italy: A Political History
Univ. of Michigan Press
[560]
서적
History of Dalmatia
Giardini
[561]
서적
Mussolini in the First World War: the Journalist, the Soldier, the Fascist
Berg
[562]
harvnb
[563]
harvnb
[564]
서적
Prelude to Blitzkrieg: The 1916 Austro-German Campaign in Romania
[565]
웹사이트
The Battle of Marasti (July 1917)
http://www.worldwar2[...]
WorldWar2.ro
1917-07-22
[566]
서적
The Great War
[567]
웹사이트
Erdély története
http://mek.oszk.hu/0[...]
Akadémiai Kiadó
[568]
웹사이트
History of Transylvania
http://mek.niif.hu/0[...]
Akadémiai Kiadó
[569]
서적
Poteri narodonaseleniia v XX veke : spravochnik
[570]
harvnb
[571]
harvnb
[572]
harvnb
[573]
harvnb
[574]
harvnb
[575]
harvnb
[576]
harvnb
[577]
서적
[578]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579]
서적
일본역사
보고사
[580]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581]
서적
일본역사
보고사
[582]
서적
일본역사
보고사
[583]
서적
일본역사
보고사
[584]
서적
일본역사
보고사
[585]
서적
인류이야기 현대편 1
아이필드
[586]
서적
춤추는 죽음 2
세종서적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창작 뮤지컬 '르 마스크', 오늘(12일) 본 공연 돌입
기득권에게 도둑맞은 ‘피해자성’, 역차별을 말하는 이들[플랫]
[Column] Is the world order collapsing?
빨간 양귀비꽃 가슴에 달고 경기 나선 이정후와 김혜성
강대국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세상읽기]
붓그림에 압축한 ‘로마의 휴일’…이게 다 포스터라고?
[케이블·위성 하이라이트]2025년 3월 4일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