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다 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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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다 타다오는 일본의 국어학자이자 사전 편찬자이다. 1936년 도쿄 제국 대학 국문과에 입학하여 1939년 졸업 후 이와테현 사범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1943년에는 켄보 히데토시와 함께 『메이카이국어사전』을 편찬했고, 1972년에는 『신메이카이국어사전』의 편집 주간을 맡아 기존 사전의 틀을 깨는 편집 방침으로 호평을 받았다. 아버지 야마다 다카오 또한 문화훈장을 받은 국어학자이며, 장남 야마다 아키오, 동생 야마다 토시오도 국어학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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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타다오 | |
---|---|
기본 정보 | |
이름 | 야마다 다다오 |
로마자 표기 | Yamada Tadao |
출생 | 1916년 8월 10일 |
출생지 | 일본 도쿄도 |
사망 | 1996년 2월 6일 (향년 79세)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
국적 | 일본 |
학력 |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국문학과 |
부모 | 아버지: 야마다 요시오 |
시대 | 쇼와 시대 |
학문 분야 | |
연구 분야 | 일본어학 사전학 |
연구 기관 | 이와테현 사범학교 육군예과사관학교 일본대학 |
주요 업적 | 『곤자쿠모노가타리슈』에 의한 중세 일본어의 발굴 근대 국어 사전사의 해명 국어 사전의 새로운 어석의 기술 방법 |
주요 작품 |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3대의 사전』 『근대 국어 사전의 발걸음』 『본방 사전사 논총』 등 |
학회 | 국어학회 |
2. 생애
1936년 도쿄 제국 대학 문학부 국문과에 입학했고 켄보 히데토시와 동기였다.[1] 1939년 졸업 후 이와테현 사범학교에 부임했다. 재직 중 켄보와 메이카이국어사전(『明解国語辞典』)을 편찬했다. 출간은 1943년이었다.[2]
야마다 타다오는 1972년 신명해 국어 사전의 편집 주간을 맡아, 이전까지의 사전들이 이전 사전들을 참고하여 베끼는 수준에 가까운 관행에서 벗어나[4] 단어가 갖는 분위기를 주의 깊고 상세하게 설명하여 본질적인 의미를 추구한다는 편집 방침을 세웠다.[3]
야마다 다다오는 국어학자로서, 고금물어집에서 오용, 희용, 기례로 여겨지는 것들로부터 중세 일본어의 여러 양상을 발굴하는 등, 주로 고전 분야에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했다.[1].[2] 한편으로 사전사 연구를 라이프워크처럼 지속했으며,[3],[4] 그전까지의 사전의 어석 측면에서 "선행 사전의 베껴 쓰기" 등을 문제시했다.[5] 야마다는 "문제로 하는 말이 가지는 분위기를, 정중하고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써, 본래 의미의 핵심에 다가간다"라는 방침을 채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아버지 야마다 다카오는 문화 훈장 수훈자이자 국어학자이다. 남동생 야마다 토시오도 국어학자로, 신초국어사전(『新潮国語辞典』) 편찬에 참여했다. 장남 야마다 아키오는 수학자로 도쿄 대학에서 근무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메이카이국어사전(『新明解国語辞典』) 편집자가 되었다.[1]
야마다 타다오는 여러 사전과 단행본을 저술했다. 주요 사전으로는 킨다이치 쿄스케 등과 함께 작업한 명해 국어사전(1943년, 산세이도), 음훈 양끌기 국한사전(1955년, 산세이도), 신명해 국어사전(1972년, 산세이도)이 있다. 단행본으로는 『당용 한자의 신자체 제정의 기반을 찾아서』[5], 『삼대의 사전 국어 사전 백년 소사』, 『세츠요슈 덴쇼 18년본 류의 연구』, 『근대 국어 사전의 발자취 그 모방과 창의』, 『수장록』 등이 있다.
1941년 육군 예과사관학교를 거쳐 1946년 니혼 대학 국문학과 조교수로 취임 후 교수가 되었다. 1959년 사직한 뒤 공직을 맡지 않고 학문 외길로 생을 보냈다.
1972년 출간된 신메이카이국어사전(『新明解国語辞典』)의 편집주간이 되어 켄보의 산세이도국어사전(『三省堂国語辞典』)과는 구분되는 사전을 편찬하였다.[3] 이전까지의 사전은 앞선 사전들을 참고하다못해 베끼는 지경에 가까운 관행이 있었다.[4] 야마다는 단어가 갖는 분위기를 주의깊고 상세하게 설명하여 본질적인 의미를 추구한다는 편집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야마다 개인의 힘으로 가능한 선에서 이 정책을 관철하여 편찬한 신메이카이국어사전은 기존의 국어사전 개념을 넘는 신선함과 예리함, 재미를 가질 수 있었다. 야마다 사후 간행된 赤瀬川原平의 신카이씨의 수수께끼(『新解さんの謎』)가 인기를 얻어 이후의 팬들은 야마다를 신카이씨라는 애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아버지는 문화 훈장 수상자인 국어학자 야마다 타카오(山田孝雄)이다. 장남 야마다 아키오(山田明雄)는 수학자로 도쿄 대학 근무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메이카이국어사전 편집자가 되었다. 동생 야마다 토시오(山田俊雄)도 국어학자로 신초국어사전(『新潮国語辞典』) 편찬에 참여했다.
3. 업적
야마다는 개인적인 노력으로 이 방침을 최대한 관철하여 『신명해 국어 사전』을 편찬했고, 이 사전은 기존 국어사전의 개념을 뛰어넘는 신선함, 예리함, 그리고 재미를 갖춘 것으로 평가받았다. 야마다 사후에 출간된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신해 씨의 수수께끼』가 인기를 얻으면서, 이후 팬들은 야마다를 '신카이 씨'라는 애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또한, 야마다는 『고금물어집』 속에서 오용, 희용, 기례로 여겨지는 것들로부터 중세 일본어의 여러 양상을 발굴하는 등, 고전 분야에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한 국어학자였다. 그는 사전사 연구를 라이프워크처럼 지속하며, "선행 사전의 베껴 쓰기"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문제로 하는 말이 가지는 분위기를, 정중하고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써, 본래 의미의 핵심에 다가간다"라는 방침을 채용하여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4. 평가
1972년 신명해 국어 사전의 편집 주간을 맡았지만, 같은 출판사이면서 미보의 산세이도 국어 사전과 결별했다. 결과적으로 야마다는 『신명국』, 미보는 『삼국』을 담당하게 된다. 야마다의 독자적인 노력으로 가능한 한 방침을 철저히 하여 편찬된 『신명국』은, 종래의 국어 사전의 개념을 넘어선 "신선함"과 "날카로움"과 "재미"가 지적되었다. 특히 유명한 것은, 야마다가 사망한 후에 출판된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신해 씨의 수수께끼에 의한 것으로, 이후 일부 팬들로부터 "신해 씨"라는 애칭으로 친근하게 불리게 된다.
5. 가족 관계
6. 저서
6. 1. 사전
6. 2. 단행본
6. 3. 공저 및 기타
참조
[1]
문서
実際は見坊の方が2年ほど早く生まれているが、高校の時に結核を患って療養のため休学し、同期入学となったという。
[2]
문서
山田の主な仕事は、見坊が起筆した原稿を校閲することで、それ以外の作業には携わらなかった。
[3]
서적
2人と2つの辞書の性格については佐々木健一『辞書になった男』が詳しいが、辞書を「かがみ」と考える見坊と、「文明批評」と考える山田には大きな隔たりがあった。
[4]
간행물
たとえば『暮らしの手帖』(1971年2月号)に「国語の辞書をテストする」という特集記事がある。当時の出版各社の主要国語辞典を比較検討し、どの出版社の辞書も文章を変換した程度の語釈であることを述べる(佐々木健一『辞書になった男 ケンボー先生と山田先生』p.170-172)
暮らしの手帖
1971-02
[5]
문서
名義は「日本大学文学部国語研究室単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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