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에드거 (스코틀랜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에드거는 1097년부터 1107년까지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다. 그는 말콤 3세와 성 마가렛의 아들로, 부친이 사망하고 숙부 도널드 3세가 왕위를 찬탈하자 잉글랜드로 망명하여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에드거는 친 잉글랜드 정책을 펼쳤으며, 노르웨이 왕 마그누스 3세에게 서부 영토를 양도하는 등 평화적인 외교를 추구했다. 그는 에든버러 성을 왕궁으로 사용했고, 독신으로 지내며 차남 알렉산더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1107년 사망 후 알렉산더 1세가 왕위를 계승했고, 동생 데이비드는 남부 지역을 통치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074년 출생 - 콘스탄티누스 두카스 (공동 황제)
    콘스탄티누스 두카스는 비잔티움 황제 미카엘 7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였으며, 로베르토 기스카르의 딸과 약혼했으나 파혼 후 기스카르의 침공을 받았고,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에 의해 부황으로 추대되었으나 요안니스 2세 콤네노스의 출생으로 후계자에서 밀려나 사망했다.
  • 1074년 출생 - 알무스타으리
    알무스타으리는 파티마 칼리파조의 제9대 칼리파로서 1094년부터 1101년까지 통치했으며, 니자르와의 분쟁, 십자군 원정, 이스마일파의 분열을 겪었다.
  • 12세기 스코틀랜드의 군주 - 알렉산더 1세 (스코틀랜드)
    맬컴 3세와 웨식스의 마가렛의 아들인 알렉산더 1세는 1107년부터 1124년까지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며 남부 스코틀랜드를 분봉하고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정책을 펼치는 한편, 모레이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고 기독교를 후원했다.
  • 12세기 스코틀랜드의 군주 - 윌리엄 1세 (스코틀랜드)
    윌리엄 1세는 1165년부터 1214년까지 스코틀랜드를 통치한 국왕으로, 노섬브리아 백작령 회복 노력, 잉글랜드군 포로, 스코틀랜드 독립 회복, 교회 독립, 왕권 강화 등의 업적을 남기고 알렉산더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 1107년 사망 - 킬리지 아르슬란 1세
    킬리지 아르슬란 1세는 룸 셀주크 왕조의 술탄으로, 말리크샤 1세 사망 후 왕조를 재건하고 십자군 전쟁에 맞서 싸우며 영토를 확장했으나, 카부르 강 전투에서 패배 후 익사했다.
  • 1107년 사망 - 호리카와 천황
    호리카와 천황은 시라카와 천황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시라카와 상황의 원정 정치 하에서 학문과 예술에 심취했으며, 그의 아들이 도바 천황으로 즉위했다.
에드거 (스코틀랜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드거의 인장, 스코트인의 군주 에드거
에드거 왕의 인장, 스코트인의 군주 에드거 "바실레우스" 양식
칭호알바의 왕
통치 기간1097년–1107년
선임자도날 3세
후임자알렉산더 1세
왕가던켈드 가문
아버지맬컴 3세
어머니마거릿 오브 웨식스
출생일1074년경
사망일1107년 1월 8일
사망 장소에든버러
매장지던펌린 수도원
별칭용맹왕
이름
스코트어Edgar
중세 아일랜드어Edgar mac Maíl Choluim
스코틀랜드 게일어Eagar mac Mhaoil Chaluim
라틴어Probus
영어 별칭the Valiant

2. 생애

에드거는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093년 아버지가 전사하고 숙부인 도널드 3세가 왕위를 찬탈하자 잉글랜드로 피신하여 윌리엄 2세의 보호를 받았다. 1094년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숙부를 몰아내고 이복형 던컨 2세를 왕위에 앉혔지만, 숙부가 던컨 2세를 암살하고 다시 왕위에 오르자 재차 잉글랜드로 망명해야 했다. 1097년, 윌리엄 2세의 지원과 외삼촌 에드거 애설링의 도움을 받아 군사를 일으켜 도널드 3세를 사로잡아 두 눈을 멀게 하고 폐위시켰다. 또한 도널드 3세와 공동 통치자였던 동복형 에드먼드 역시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뒤 왕위에 올랐다.[18]

알렉산더와 데이비드 등 형제들의 지지를 받았다.[4]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은 장자 상속제가 아니었기에, 던컨 2세에게는 윌리엄 피츠 던컨이라는 적법한 아들이자 상속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널드와 에드먼드가 제거되자 에드거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될 수 있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큰 위기는 없었으며, 권력을 잡는 과정에 비해 에드거의 통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

제프리 가이마르는 에드거가 윌리엄 루퍼스에게 봉건적 의무를 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루퍼스가 잉글랜드 궁정에 참석했을 때 에드거에게 하루 40 또는 60실링의 유지비를 지불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보아 이는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몇 차례 궁정에 참석했는데, 1099년 5월 29일 웨스트민스터 홀 개관을 위한 성대한 연회에서 검을 든 시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윌리엄 루퍼스의 죽음 이후, 에드거는 더 이상 잉글랜드 궁정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헨리 1세의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6]

1098년, 에드거는 노르웨이의 마그누스 3세와 조약을 맺어 서부 스코틀랜드와 노르웨이의 경계를 정했다. 에드거는 헤브리디스 제도와 킨타이어에 대한 권리를 마그누스에게 양도함으로써 기존 상황을 인정했다.[9] 이러한 그의 외교 정책 때문에 에드거는 "평화 애호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9]

에드거는 종교 관련 업적으로는 1098년 더럼의 수도원과 관련된 콜딩엄의 수도원을 세운 것이 있다. 또한 던펌린 수도원에서 그는 어머니의 재단에서 캔터베리 대성당의 수도승들이 도날 반에 의해 추방되었을지도 모르는 캔터베리의 안셀름의 지원을 구했다.[10]

주목할 만한 행위로는 제1차 십자군의 "기념품"으로 추정되는 낙타 (또는 코끼리)를 게일족 아일랜드의 무이르체르타흐 우아 브리안 아일랜드 최고 왕에게 선물한 것이 있다.[8]

에드거는 1100년 여동생 마틸다가 윌리엄 2세의 동생 헨리 1세와 결혼한 것을 배경으로 잉글랜드에 대해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에든버러 성을 스코틀랜드 왕의 왕궁으로 사용한 최초의 왕으로도 알려져 있다.[19]

에드거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1107년 1월 8일 에든버러에서 사망하여 던펌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자녀가 없었던 그는 그의 형제 알렉산더를 후계자로 인정했다. 에드거의 유언은 또한 데이비드에게 "컴브리아" (구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영토)와 아마도 로디언 남부 지역의 분봉령을 부여했다.[11] 데이비드는 훗날 컴브리아 공으로 불리게 된다.[20]

2. 1. 초기 생애와 왕위 계승 분쟁

에드거는 1094년 말 그의 이복형 던컨 2세가 메언즈의 마엘 페테르에 의해 살해된 후, 1095년 초 왕위를 주장했다. 마엘 페테르는 에드거의 삼촌 도널드 3세의 지지자였다. 그의 형 에드먼드는 도널드 편에 섰는데, 아마도 분봉령을 받고 아들이 없는 늙은 도널드의 상속자로 인정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다.[2]

에드거는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로부터 던컨이 그랬던 것처럼 제한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은 노섬브리아 백작 로버트 드 모브레이가 이끄는 반란으로 바빴고, 그는 도널드와 에드먼드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에드거는 로디언만을 장악했고, 당시 더럼에서 발행된 헌장에는 그를 "... 스코틀랜드 왕 매일 콜룸의 아들... 내 주 잉글랜드 왕 윌리엄의 선물과 아버지의 상속으로 로디언 전체와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소유"라고 명시했다.[3]

에드거의 주장은 그의 형제 알렉산더와 데이비드의 지지를 받았고, 에델레드는 덩켈드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었으며, 에드먼드는 도널드를 지지하면서 그의 형제들과 갈라졌다. 그의 삼촌 에드거 아셀링 또한 더럼에서 이 헌장에 증인으로 참여했다.[4]

1097년이 되어서야 에드거는 에드거 아셀링이 이끄는 어려운 전투 끝에 도널드와 에드먼드를 패배시켰다.[5]

1093년 부친이 전사하고 숙부인 도널드 3세가 왕위를 찬탈하자 잉글랜드로 도망쳐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의 보호를 받았다. 이듬해 1094년 잉글랜드의 지원으로 숙부를 추방하고 이복형 던컨 2세를 즉위시켰지만, 숙부가 던컨 2세를 암살하고 왕위에 복귀했기 때문에 다시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1097년 다시 윌리엄 2세의 지원을 받아 외숙부 에드거 애설링과 함께 도널드 3세를 폐위를 위한 군사를 일으켜 도널드 3세를 사로잡아 양 눈을 멀게 하고 폐위시켰으며, 도널드 3세의 공동 통치자였던 동복형 에드먼드 역시 물러나게 한 뒤 왕위에 올랐다.[18]

2. 2. 왕위 등극과 통치

에드거는 1094년 말 이복형제 던컨 2세가 메언즈의 마엘 페테르에 의해 살해된 후, 1095년 초 왕위를 주장했다. 마엘 페테르는 에드거의 삼촌 도널드 3세의 지지자였다. 그의 형 에드먼드는 도널드 편에 섰는데, 아마도 분봉령을 받고 아들이 없는 늙은 도널드의 상속자로 인정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다.[2]

에드거는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로부터 던컨이 그랬던 것처럼 제한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은 노섬브리아 백작 로버트 드 모브레이가 이끄는 반란으로 바빴고, 그는 도널드와 에드먼드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2세는 1095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잉글랜드 북부에서 군사 활동을 벌였고, 이 기간 동안 에드거는 로디언만을 장악했다. 당시 더럼에서 발행된 헌장에는 그를 "... 스코틀랜드 왕 매일 콜룸의 아들... 내 주 잉글랜드 왕 윌리엄의 선물과 아버지의 상속으로 로디언 전체와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소유"라고 명시했다.[3]

에드거의 주장은 그의 형제 알렉산더와 데이비드의 지지를 받았고, 에델레드는 덩켈드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었으며, 에드먼드는 도널드를 지지하면서 그의 형제들과 갈라졌다. 그의 삼촌 에드거 아셀링 또한 더럼에서 이 헌장에 증인으로 참여했다.[4]

윌리엄 2세는 1096년을 그의 형제 로버트 커토즈로부터 구입한 노르망디에서 보냈고, 1097년이 되어서야 에드거는 추가적인 지원을 받아 에드거 아셀링이 이끄는 어려운 전투 끝에 도널드와 에드먼드를 패배시켰다.[5]

1093년 부친이 전사하고 숙부인 도널드 3세가 왕위를 찬탈하자 잉글랜드로 도망쳐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의 보호를 받았다. 이듬해 1094년 잉글랜드의 지원으로 숙부를 추방하고 이복 형 던컨 2세를 즉위시켰지만, 숙부가 던컨 2세를 암살하고 왕위에 복귀했기 때문에 다시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1097년 다시 윌리엄 2세의 지원을 받아 외숙부 에드거 애설링과 함께 도널드 3세 폐위를 위한 군사를 일으켜 도널드 3세를 사로잡아 양 눈을 멀게 하고 폐위시켰으며, 도널드 3세의 공동 통치자였던 동복 형 에드먼드 역시 물러나게 한 뒤 왕위에 올랐다.[18]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은 장자 상속이 아니었다. 던컨 2세에게는 윌리엄 피츠 던컨이라는 적법한 아들과 상속자가 있었다.[7] 그러나 도널드와 에드먼드가 제거되면서 에드거는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큰 위기는 없었다. 권력 장악 과정에 비해 에드거의 통치는 알려진 바가 적다.

1098년, 에드거는 노르웨이의 마그누스 3세와 조약을 맺어 서부에서 스코틀랜드와 노르웨이의 경계를 정했다. 에드거는 헤브리디스 제도와 킨타이어에 대한 권리를 마그누스에게 양도함으로써 기존 상황의 현실을 인정했다.[9] 이러한 미온적인 외교 때문에 에드거는 "평화 애호가"라고 불렸다.[19]

에드거의 종교 재단에는 1098년 더럼의 수도원과 관련된 콜딩엄의 수도원이 포함되었다. 던펌린 수도원에서 그는 어머니의 재단에서 캔터베리 대성당의 수도승들이 도날 반에 의해 추방되었을지도 모르는 캔터베리의 안셀름의 지원을 구했다.[10]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행위는 제1차 십자군의 "기념품"으로 추정되는 낙타 (또는 코끼리)를 그의 동족 게일족 아일랜드의 무이르체르타흐 우아 브리안, 아일랜드 최고 왕에게 선물한 것이다.[8]

친 잉글랜드 정책을 취한 배경에는 1100년 여동생 마틸다가 윌리엄 2세의 동생 헨리 1세와 결혼한 것이 있다. 그는 에든버러 성을 스코틀랜드 왕의 왕궁으로 사용한 최초의 왕으로 알려져 있다.[19]

에드거는 1107년 1월 8일 에든버러에서 사망하여 던펌린 수도원에 묻혔다. 미혼이었고 자녀가 없었던 그는 그의 형제 알렉산더를 후계자로 인정했다. 에드거의 유언은 또한 데이비드에게 "컴브리아" (구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영토)와 아마도 로디언 남부 지역의 분봉령을 부여했다.[11] 데이비드는 나중에 컴브리아 공으로 알려지게 된다.[20]

2. 3. 죽음과 유산

에드거는 1107년 1월 8일 에든버러에서 사망하여 던펌린 수도원에 묻혔다. 미혼이고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형제 알렉산더를 후계자로 인정했다. 에드거의 유언은 또한 데이비드에게 "컴브리아" (구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영토)와 아마도 로디언 남부 지역의 분봉령을 부여했다.[11] 데이비드는 나중에 컴브리아 공으로 알려지게 된다.

에드거의 죽음에 대한 상반된 기록이 오데릭 비탈리스 (12세기)에 의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에드거는 삼촌인 도널드 3세에게 살해당했으며, 도널드 3세는 알렉산더 1세에게 살해당했다.[12] 그러나 벤자민 허드슨은 이 이야기를 "완전히 거짓"이라고 일축한다.[14]

에드거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1107년 에든버러 성에서 사망했다. 유언에 따라 알렉산더 1세가 즉위했지만, 스코틀랜드 북부는 알렉산더 1세가, 남부는 막내 동생 데이비드(후의 데이비드 1세)가 통치하게 되었다.[20]

3. 평가

오데릭 비탈리스는 에드거가 삼촌인 도널드 3세에게 살해당했고, 도널드 3세는 알렉산더 1세에게 살해당했다는 상반된 기록을 남겼다.[12] 그러나 벤자민 허드슨은 이 이야기가 "완전히 거짓"이라고 일축하며, 11세기 말 군주들에 대한 "잘못된" 이야기가 유포되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14]

''베르칸의 예언''에는 "잉글랜드 여인의 아들... 그의 형제가 그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비참하구나."라는 구절이 있어 또 다른 스코틀랜드 왕의 살해를 암시한다.[15] 여기서 잉글랜드 여인은 성 마가렛을 가리키지만, 그녀의 자녀 중 형제자매에게 살해된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말콤 3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잉기비요르그 핀스도티르 사이에서 태어난 스코틀랜드의 던컨 2세의 살해에서 비롯된 혼란으로 보인다.[16] 얼스터 연대기는 던컨 2세가 그의 형제인 돈말 [도널드]과 에드먼드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했지만, 던컨에게는 그런 이름의 형제가 없었으므로, 이는 도널드 3세와 스코틀랜드의 에드먼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기 텍스트에서는 미언스의 마엘 페테르라는 귀족을 실제 살인자로 지목한다.[17]

3. 1. 상반된 기록

오데릭 비탈리스는 에드거의 죽음에 대한 상반된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에 따르면, 에드거는 삼촌인 도널드 3세에게 살해당했으며, 도널드 3세는 알렉산더 1세에게 살해당했다.[12] 이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말콤 [3세], 스코틀랜드 왕이 죽자 왕위 계승을 두고 그들 사이에 큰 분열이 일어났다. 왕의 장남인 에드거는 자신의 합법적인 권리라고 주장했지만, 말콤 왕의 동생인 도널드는 권력을 찬탈하여 잔혹하게 그를 반대했고, 결국 용감한 청년 [에드거]는 삼촌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의 형제인 알렉산더 [1세]는 도널드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형제의 복수자이자 계승자가 된 것이다..."[13]

벤자민 허드슨은 이 이야기를 "완전히 거짓"이라고 일축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존재는 11세기 말 군주들에 대한 "잘못된" 이야기가 유포되었음을 보여준다.[14] ''베르칸의 예언''의 구절은 또 다른 스코틀랜드 왕의 살해를 암시한다. "아, 왕이 4일 밤과 1달 동안 주권을 잡을 것이다. 게일족이 자랑할 것이 슬프다고 생각한다. 그를 축하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 잉글랜드 여인의 아들... 그의 형제가 그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비참하구나."[15] 잉글랜드 여인은 분명히 성 마가렛으로, 말콤 3세의 부인이다. 그러나 그녀의 자녀 중 남녀를 불문하고 형제자매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없다. 이 혼란은 아마도 말콤 3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잉기비요르그 핀스도티르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형제 스코틀랜드의 던컨 2세의 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16] 얼스터 연대기의 주석에 따르면 던컨 2세는 그의 형제인 돈말 [도널드]과 에드먼드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던컨에게는 그런 이름의 형제가 없었으므로, 이 텍스트는 아마도 그의 삼촌인 도널드 3세와 이복형제 스코틀랜드의 에드먼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기의 텍스트에서는 미언스의 마엘 페테르라는 귀족을 실제 살인자로 지목한다.[17]

참조

[1] 서적 Early Sources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간행물 Annals of Innisfallen 1105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sovereignty https://books.google[...]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Scottish Annals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28] 서적
[29] 간행물 Annals of Innisfallen 1105
[30] 서적
[31]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