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엠파이어 아연 파업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엠파이어 아연 파업은 1950년부터 1952년까지 뉴멕시코주 해노버의 엠파이어 아연 광산에서 발생한 파업이다. 국제 광산, 제련소 노동자 연합(IUMMSW) 제890지부 조합원들은 임금 인상, 근무 시간 단축,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파업은 장기화되었고, 여성 시위대의 활약과 언론의 관심, 법적 공방을 거치며 폭력 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결국 노사 합의를 통해 파업은 종료되었지만, 이 사건은 히스패닉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기록되었으며, 1954년 영화 《대지의 소금》으로 제작되어 널리 알려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51년 분쟁 - 6.25 전쟁
    6.25 전쟁은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휴전 협정으로 종결되었으며, 한반도의 분단과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한 한국 전쟁을 의미한다.
  • 1951년 분쟁 - 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봉기 사태와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 및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남로당 무장봉기와 미군정 및 이승만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되었으며, 현재 진상 규명 노력과 국가의 공식 사과가 이루어졌으나 폭동과 항쟁이라는 시각이 대립하며 논쟁이 진행 중이다.
  • 광업 노동쟁의 - 사북 사건
    사북 사건은 1980년 강원도 사북읍 동원탄좌 광부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과 어용 노조에 반발하여 임금 인상과 노조 지부장 사퇴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가 격화되어 사북읍 시가지를 점거하는 사태로 이어졌으며, 이후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 광업 노동쟁의 - 미쓰이 미이케 쟁의
    미쓰이 미이케 쟁의는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일본 미쓰이 미이케 탄광에서 발생한 대규모 노동 쟁의로, 석탄 산업 쇠퇴와 구조조정에 반발한 노조의 파업이 회사 측의 대응과 정부 개입으로 패배하며 일본 노동운동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엠파이어 아연 파업
분쟁 개요
명칭엠파이어 아연 파업
다른 명칭엠파이어 아연 회사 파업
위치뉴멕시코
시작1950년 10월 17일
종료1952년 1월 25일
관련된 회사엠파이어 아연 회사
국제 광산 제련소
제분소 노동자 조합
주요 인물클린턴 점프
조셉 윌리 야네즈
후안 차콘
비르질리오 로에발
엔리카 플로레스
원인멕시코계 미국인 광부들에 대한 인종 차별적 임금 정책
더 나은 안전 조건 요구
주택 개선 요구
분쟁 결과
결과멕시코계 미국인 광부들의 임금 인상
회사의 주택 개선
조합의 영향력 증가
영화 솔트 오브 디 어스 제작
관련 정보
관련된 영화솔트 오브 디 어스

2. 배경

뉴저지 아연 회사의 자회사인 엠파이어 아연 회사는 뉴멕시코주 해노버 근처, 실버 시티에서 동쪽으로 약 2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연 광산을 소유하고 운영했다. 1950년 엠파이어 아연은 해노버에서 128명을 고용했는데, 이 중 92명은 국제 광산, 제련소 노동자 연합 제890지부의 조합원이었다. 조합원 92명 중 12명은 앵글로 출신이었고 80명은 히스패닉이었다.

엠파이어 아연은 뉴멕시코 남부의 히스패닉에 대한 차별과 인종차별에 참여하고 이를 악용했다. 지하 노동자는 히스패닉이었고, 지상 (제련소 및 수리점 노동자)의 시간제 노동자의 대부분은 앵글로였다. 모든 사무직 및 관리직 직원도 앵글로였다. 히스패닉과 앵글로는 직원 90%가 거주하는 해노버 마을에서도 분리되었다. 주택은 4단계로 나뉘어 있었는데, 관리자, 사무직 및 기술직 노동자, 앵글로 광부, 마지막으로 엠파이어 아연이 소유하고 임대하는 토지에 종종 직접 집을 짓는 히스패닉 노동자 순이었다. 회사 주택에 거주하는 히스패닉은 실내 배관 시설이 없었다. 12명의 앵글로 조합원 모두가 파업에 참여했지만, 파업 활동에는 앵글로 파업 참가자는 없었다(지구의 다른 광산에서 일하는 일부 앵글로는 노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엠파이어 아연의 대부분의 앵글로 노동자는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찾거나 파업 파괴자로 돌아왔다.

노동자, 토사 제거자, 광부(보통 남서부의 히스패닉이 맡는 직업)의 임금은 앵글로가 이 직업을 하는 유타, 네바다 또는 몬타나보다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에서 훨씬 낮았다. 반면에 기술 노동자 및 지상 노동자의 임금은 모든 서부 광산 지구에서 거의 동일했다. 영화 ''대지의 소금''과 달리, 파업과 협상의 주요 초점은 안전 및 차별적인 주택보다는 근무 시간과 임금이었다.

2. 1. 1950년 이전의 상황

엠파이어 아연 회사는 뉴저지 아연 회사(New Jersey Zinc Company)의 자회사로, 뉴멕시코 주 해노버 근처, 실버 시티에서 동쪽으로 약 13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연 광산을 소유 및 운영하였다. 1950년 엠파이어 아연은 해노버에서 128명을 고용했는데, 이 중 92명은 국제 광산, 제련소 노동자 연합(International Union of Mine, Mill and Smelter Workers, IUMMSW) 제890지부의 조합원이었다.

엠파이어 아연은 뉴멕시코 남부의 히스패닉에 대한 차별과 인종차별에 참여하고 이를 악용했다. 지하 노동자는 히스패닉이었고, 지상 (제련소 및 수리점 노동자)의 시간제 노동자의 대부분은 앵글로였다. 모든 사무직 및 관리직 직원도 앵글로였다. 히스패닉과 앵글로는 직원 90%가 거주하는 해노버 마을에서도 분리되었다. 주택은 4단계로 나뉘어 있었는데, 관리자, 사무직 및 기술직 노동자, 앵글로 광부, 마지막으로 엠파이어 아연이 소유하고 임대하는 토지에 종종 직접 집을 짓는 히스패닉 노동자 순이었다. 회사 주택에 거주하는 히스패닉은 실내 배관 시설이 없었다.

노동자, 토사 제거자, 광부(보통 남서부의 히스패닉이 맡는 직업)의 임금은 앵글로가 이 직업을 하는 유타, 네바다 또는 몬타나보다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에서 훨씬 낮았다. 반면에 기술 노동자 및 지상 노동자의 임금은 모든 서부 광산 지구에서 거의 동일했다.

3. 파업의 전개

1950년 7월 18일, 클린턴 젠크스(Clinton Jencks)를 비롯한 국제 광산, 제련소 노동자 연합(IUMMSW) 제890지부 대표단과 찰스 그레이브스로 대표되는 엠파이어 아연 회사 간의 새로운 계약 협상이 시작되었다. 노조는 임금 인상, 유급 휴가, 근무 시간 단축, 차별 철폐 등을 요구했다. 회사는 임금 외에는 어떤 문제도 다루기를 거부했고, 특히 점심시간 급여와 6일의 유급 휴가 지급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9월 29일, 엠파이어 아연은 지역 신문에 시간당 5센트 임금 인상과 주당 근무 시간을 48시간(실제로는 점심시간을 포함하여 51시간)으로 늘린다는 내용의 광고를 게재하고 직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회사는 노조가 교착 상태를 만들었고 합의를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노조는 지속적인 협상을 요청했다. 그러나 회사는 협상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1950년 10월 17일, 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 초기, 엠파이어 아연은 한국 전쟁으로 아연 가격이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조를 와해시키려는 의도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3. 1. 파업의 시작 (1950년 10월)

1950년 7월 18일, 클린턴 젠크스(Clinton Jencks)를 비롯한 국제 광산, 제련소 노동자 연합(IUMMSW) 제890지부 대표단과 찰스 그레이브스로 대표되는 엠파이어 아연 회사 간의 새로운 계약 협상이 시작되었다. 노조는 임금 인상, 유급 휴가, 근무 시간 단축, 차별 철폐 등을 요구했다. 회사는 임금 외에는 어떤 문제도 다루기를 거부했고, 특히 점심시간 급여와 6일의 유급 휴가 지급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9월 29일, 엠파이어 아연은 지역 신문에 시간당 5센트 임금 인상과 주당 근무 시간을 48시간(실제로는 점심시간을 포함하여 51시간)으로 늘린다는 내용의 광고를 게재하고 직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회사는 노조가 교착 상태를 만들었고 합의를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노조는 지속적인 협상을 요청했다. 그러나 회사는 협상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1950년 10월 17일, 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 초기, 엠파이어 아연은 한국 전쟁으로 아연 가격이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조를 와해시키려는 의도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3. 2. 파업의 장기화 (1950년 겨울 - 1951년 봄)

1950년 7월 18일, 새로운 계약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노조와 회사 간의 입장 차이는 컸다. 노조는 임금, 근무 시간, 유급 휴가 등 다양한 요구를 했지만, 회사는 임금 외에는 어떤 문제도 다루기를 거부했다. 협상은 두 달 넘게 교착 상태에 빠졌고, 1950년 10월 17일, 결국 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몇 달 동안 파업이 이어졌지만, 타협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한국 전쟁으로 아연 가격이 폭등했지만, 엠파이어 아연 회사는 노조를 와해시키려는 의도로 파업을 장기화했다. 국제 광산, 제련, 제강 노동자 연합(IUMMSW) 지도부는 파업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클린턴 젠크스를 통해 노조원들에게 회사의 제안을 수용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젠크스와 많은 노조원들은 이에 반대하며 파업을 계속 이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조원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커져갔고, 일부는 일자리를 찾아 파업 대열을 이탈하기도 했다. 엠파이어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노조원들에게 직장 복귀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노조를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1951년 5월 말, 14명의 노조원이 직장 복귀 청원서에 서명했고, 엠파이어는 이를 이용하여 28명의 직원이 파업을 끝내고 싶어한다고 주장하며 여론전을 펼쳤다.

3. 3. 여성 보조 조직의 활약 (1951년 6월)

1951년 6월, 엠파이어 아연 회사가 광산 재개를 시도하자 노조는 여성 보조 조직을 중심으로 피켓 라인을 구축했다. 법원의 가처분 명령은 "노조원"에게만 적용되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가처분 명령을 회피하며 피켓 라인을 지킬 수 있었다. 6월 16일, 레슬리 고포스 카운티 보안관과 그의 부보안관들은 최루탄을 사용하며 여성 피켓 시위대를 공격하고 45명의 여성과 17명의 어린이를 포함, 총 62명을 체포했다. 토마스 포이 지방 검사는 뉴멕시코 주 주지사 에드윈 미첨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미첨 주지사는 피켓 시위자들을 석방하고 주 경찰은 파업 파괴자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포이 지방 검사는 여성들에게 피켓 라인에서 물러날 것을 조건으로 석방을 제안했지만, 여성들은 이를 거부하고 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타임, 라이프, 뉴욕 타임스에 보도되었다.

3. 4. 언론의 관심과 법적 공방

엠파이어 아연 파업은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고, 당시 국가적인 관심사였던 공산주의 전복 문제가 파업의 근본적인 노동 문제를 가리기 시작했다.[1] 산업별 노동조합 회의(CIO)와 IUMMSW 사이의 정치적 정책과 공산주의 침투 혐의에 대한 갈등이 파업 이전부터 있었고, IUMMSW는 CIO에서 축출되었다.[1] IUMMSW의 회장 모리스 트래비스와 IUMMSW의 수석 변호사 네이선 위트는 엠파이어 광산 도로 봉쇄에 대한 금지 명령 연장 청문회에 참석하기 위해 실버 시티로 왔는데, 두 사람 모두 CPUSA의 전직 또는 현직 회원이었다.[1] 특히 위트는 전국 노동 관계 위원회(NLRB)의 비서로 재직했고, 조지프 매카시의 빈번한 표적이 되었으며, 휘태커 챔버스와 리 프레스먼에 의해 미국 정부 내 웨어 그룹의 일원으로 지목되기도 했다.[1]

''실버 시티 데일리 프레스''는 노조에 대해 적대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보도를 했다.[1] 편집인 토드 엘리는 "멕시코는 초기 정착민들이 일반적인 문화 수준을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원주민보다 조금 높은 수준으로 낮춘 메스티소 용광로에서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에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고 썼다.[1]

지방 판사 마샬은 노조에 대한 금지 명령을 영구적으로 내렸고, 노조 협상 위원회는 법정 모독 혐의로 기소되었다.[1] 며칠 동안의 새로운 중재 노력도 결실을 맺지 못했다.[1] 890 지부는 다른 계약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했지만, 엠파이어 아연은 이를 거부했다.[1] 890 지부는 보안관 사무실과 데일리 프레스 사무실에서 시위와 좌석 시위에 나섰고, 엠파이어는 파업 시위를 뚫고 들어가려는 노동자에게 절반의 임금을 제공하여 충돌이 발생했다.[1] 여성 시위대는 특별 보안관과 파업 파괴자들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 돌과 고춧가루를 사용했다.[1]

주 경찰이 법정을 경비하는 동안, 마샬 판사는 지방 및 국제 노조에 각각 4,000달러의 벌금을 부과하고 협상 위원회 위원들에게 90일의 징역형을 선고했다.[1] 마샬은 노조가 길을 정리하면 벌금의 절반과 징역형을 유예하겠다고 했지만, 그랜트 카운티 변호사 협회 회장 찰스 로열과 만나 마샬법 시행을 주지사 메켐에게 요청하는 서한을 작성했다.[1] 메켐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1] 890 지부는 300대 이상의 차량으로 호송대를 조직하여 주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실버 시티의 그랜트 카운티 법원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많은 군중이 노조 지도자들의 연설을 들었다.[1] 지방 관리들은 다시 메켐에게 주 방위군 투입을 요청했지만, 주 경찰청장 조셉 로치와 존 브래드포드 대위는 그들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 메켐은 FBI 요원으로부터 890 지부에 대한 정보를 받고 있었고, 젠크스가 광부들을 파업하도록 선동했다는 FBI의 의견을 받아들였다.[1] 하지만 히스패닉계 노동자들이 반노조로 해석할 입장을 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주 경찰관들에게 특별 보안관을 교체하여 파업 시위를 순찰하도록 명령했지만, 금지 명령을 시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1]

메켐 주지사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카운티 주민들에게 연설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언급하고, 전쟁 노력에 아연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890 지부나 엠파이어 아연을 비판하지 않았으며 분쟁을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1] 엠파이어는 침묵했지만, 890 지부는 즉시 제안을 받아들였다.[1] 뉴멕시코 주 경찰의 로치 청장과 브래드포드 대위는 파업 파괴자를 공장으로 호송하거나 시위대가 길을 점거하는 것을 막지 않겠다고 시위자들을 안심시켰고, 시위자들은 브래드포드의 공정한 접근 방식에 감사했다.[1] 브래드포드는 1977년 인터뷰에서 "여론은 당시나 지금이나 '파업자들을 망해라'였습니다.... 부보안관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고, 우리는 그들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법원 명령을 시행하려고 하지 않았고, 이것을 보안관에게 맡겼습니다.... 우리는 공산주의 연계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간첩 행위나 사보타주가 아니었고, 단지... 지역 사회의 격변일 뿐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1]

메켐 주지사의 협상 촉구로 뉴저지 아연의 직원 관계 부사장이 직접 노조와 만났지만, IUMMSW의 트래비스가 이끄는 집행위원회는 890 지부 대신 협상을 진행했고, 트래비스는 합의를 간절히 원했지만 뉴저지 아연으로부터 협력을 얻을 수 없었다.[1] 젠크스와 벨라스케스는 트래비스의 온건 노선에 반대했지만 거부되었다.[1] 메켐 주지사는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파업 시위에서 주 경찰을 철수시키고 더 이상의 협상을 요구하지 않았다.[1] 주 경찰이 떠나자마자 엠파이어는 파업 시위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1]

3. 5. 8월 23일 사건

1951년 8월 23일, 엠파이어 아연 파업 역사상 가장 심각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전날, 회사의 경리 담당자가 피켓 라인을 통과하면서 차로 노조 대표 밥 할로우와를 들이받는 사건이 발생했다.[1] 이에 격분한 피켓 시위대는 경리 담당자의 차를 거의 파괴했다.[1] 그날 저녁, 15명의 엠파이어 직원들은 고포스 보안관과 만나 다음 날 아침 남쪽 피켓 라인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고포스는 최소 20명의 부보안관을 동원하여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1] 그러나 실제로는 10명의 부보안관만이 대결에 참여했다.[1]

엠파이어 직원 대부분은 무장한 상태였고, 반대편에는 75명의 여성, 남성, 어린이가 있었다.[1] 고포스는 피켓 시위대에게 도로가 공공의 것이며 피켓 라인을 통과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이에 피켓 시위대는 선두 차량의 보닛을 열고 스파크 플러그 와이어를 뜯어냈다.[1] 다른 두 대의 차량이 시동을 걸었지만, 피켓 시위대는 인간 방벽을 형성하여 차를 뒤로 밀어냈다.[1]

돌이 쏟아지는 가운데, 트럭 운전사 오델 하트리스는 트럭을 몰아 피켓 라인을 뚫고 나아갔고, 이 과정에서 여성 3명이 부상을 당했다.[1] 멈춰선 차에 타고 있던 마빈 마시는 쇄도하는 돌에 의해 앞 유리와 측면 유리가 깨지자 경찰차로 황급히 돌아갔다.[1] 피켓 시위대가 부상당한 여성을 보호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파업 파괴자들의 트럭이 주차된 광산을 향해 달려갔다.[1] 트럭 안에서 누군가가 멈추라고 소리쳤고, 운전수의 아들 칼리언 하트리스는 .45 구경 권총으로 파업 시위대를 향해 다섯 발을 발사했다.[1] 빗나간 총알에 한국 전쟁에서 휴가를 나온 전 노조원이 맞아 쓰러졌고, 이를 본 파업 파괴자들은 보안관의 부하와 함께 광산 안으로 후퇴했다.[1]

이 소식이 퍼지면서 오전 10시까지 지역의 모든 노조 광산이 폐쇄되는 총파업이 촉발되었고,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엠파이어 재산 주변에 경계선을 형성했다.[1] 고포스는 주지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주지사는 주 경찰 로치 서장의 보고서를 기다리겠다고 답했다.[1] 자정이 조금 지나 실버 시티의 한 사업가가 노조 대표 할로우와와 로치 서장 간의 회동을 주선했고, 할로우와는 광산을 포위하고 있던 사람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엠파이어 직원을 재산에서 밖으로 호송하려는 로치의 계획에 동의했다.[1]

엠파이어 아연의 경영진은 공격 계획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 뉴저지 아연의 노사 관계 매니저인 데이비드 페이퍼가 공격 직전 광산에 도착했고, 엠파이어 아연의 제련소장인 클라렌스 스넬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1] 이 사진들은 지방 법원 기록에 보존되어 있다.[1] 다음 날, 엠파이어는 "폭도가 난동을 부리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제목으로 데일리 프레스에 전면 광고를 게재했다.[1]

로치 서장은 주 경찰의 통제를 재확립하고 엠파이어 아연 직원들에게 피켓 라인에 접근하지 말라고 조언했다.[1] 태프트-하틀리 법에 따른 긴급 금지 명령으로 전국 파업이 엠파이어 아연 파업을 압도했고, 미국 철강 노조가 조직한 광산을 포함한 전국 파업은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1] IUMMSW는 철강 노조의 전국 파업에도 불구하고 파업 동기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비난을 받았고, 데일리 프레스는 IUMMSW와 지역 890을 "모스크바가 조종하는" 파괴 행위로 비난하는 기사와 사설을 게재했다.[1] 엠파이어는 자경단 "법과 질서" 단체를 조직한 노동자들에게 급여를 전액 지급했고, 고포스 보안관은 파업 단속을 위한 보안관 민병대를 조직하겠다고 제안했다.[1] 지역 라디오 방송국은 지역 890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취소했고, 젠크스와 그의 아내는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1] 엠파이어는 노조에 대한 불호감이 커지는 것을 이용하여 업무 복귀를 명령했고, 주 경찰은 비노조원들이 피켓 라인을 통과하도록 허용했다.[1]

3. 6. 파업의 약화와 협상 재개 (1951년 말 - 1952년 초)

메켐 주지사의 협상 촉구로 뉴저지 아연의 직원 관계 부사장이 직접 노조와 만났으나, IUMMSW의 트래비스가 이끄는 집행위원회는 890 지부 대신 협상을 진행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1] 젠크스와 벨라스케스는 트래비스의 온건 노선에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많은 890 지부 조합원들은 IUMMSW의 패배주의적인 파업 태도와 젠크스의 소외에 불만을 품었다.[1] 메켐 주지사는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파업 시위에서 주 경찰을 철수시키고 더 이상의 협상을 요구하지 않았다.[1]

주 경찰이 철수하자마자 엠파이어 아연은 파업 시위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고, 특별 보안관들을 고용하여 여성 시위대와 충돌을 일으켰다.[1] 10월 초, 철강 노동자 연합은 그랜트 카운티에 조직자들을 투입하여 890 지부를 압박했다.[1] 철강 노동자 연합은 더 나은 임금과 근로 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인종 문제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히스패닉 광부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1]

1951년 말, 890 지부는 법원의 압력, 재정적 어려움, 내부 갈등으로 인해 약화되었다.[1] 1951년 12월 중순, 메쳄 주지사는 주 경찰에 엠파이어 아연 재산으로 들어가는 도로 봉쇄에 대한 금지 명령을 완전히 통제하고 시행하도록 명령했다.[1] 이는 파업에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엠파이어 아연은 추가적인 법정 모독 혐의를 요청했고, IUMMSW에 벌금을 부과할 계획이었다.[1] 동시에 엠파이어 아연은 텍사스, 네브래스카, 미주리, 오클라호마에서 노동자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1]

이러한 상황에서 엠파이어 아연은 조정 서비스의 중재 요청에 응답하여 새로운 협상에 참여하기로 동의했다.[1] 뉴저지 아연의 부사장 리처드 베레스포드는 "우리는 이 노조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노조에게 적절한 리더십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언급하며, 엠파이어 아연이 약화된 IUMMSW와 거래하는 것을 선호했음을 시사했다.[1]

4. 파업의 결과

4. 1. 합의 내용

1952년 1월 21일, 텍사스주 엘파소의 힐튼 호텔에서 노조 890지부와 엠파이어 아연 간의 제25차 협상 회의가 열렸다. 노조 890지부는 모든 지하 근무 시간에 대한 임금과 유급 휴일을 포기했지만, 엠파이어는 이 지역의 다른 광산 회사들과의 임금 격차를 줄이기 위해 임금을 인상했다. 40시간제 근무와 같은 혜택 대신 시간당 임금 인상을 통해, 엠파이어는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임금을 지급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고, 이는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고 경쟁 노조인 철강노조를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수 있다.

엠파이어는 또한 새로운 직업에 대한 임금 협상, 질병 및 상해 보험 프로그램, 소규모 연금 계획, 회사 부담 생명 보험(2,500달러), 25년 이상 근속 직원에 대한 3주간의 휴가, 신규 직원의 고충 처리 절차 사용 권한에 합의했다. 엠파이어 아연은 여전히 주택 조건에 대한 협상을 거부했으며, 파업 참가자들이 회사가 연체된 모든 임대료를 회수할 때까지 주택 임대료를 두 배로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엠파이어는 노동자들이 복귀한 직후, 히스패닉계 주택에 실내 배관, 온수, 목욕 시설을 제공하겠다고 통보했다. 이는 양보가 아닌 선물이라는 메시지였다.

협상에서 노조가 겪은 가장 심각한 손실은 엠파이어가 법적 절차를 철회하는 것을 거부했을 때 발생했다. 1952년 9월, 마샬은 노조 지도자들에게 90일 징역형을 선고하고(고포스는 젠크스를 독방에 감금했다), 노조 890지부와 IUMMSW에 총 38,00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트래비스는 노조 890지부 조합원들에게 계약서를 제시하면서 이 계약이 승리라고 말했다. 위트는 조합원들이 만들어낸 만큼 좋다고 말했다. 파블로 몬토야는 더 신중하게, 모든 파업 참가자들이 "맑은 마음과 양심으로 명예롭게 느낄 수 있는" 가난한 히스패닉 마을로 순례를 가자고 제안했다.

4. 2. 파업의 의의

엠파이어 아연 파업은 히스패닉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투쟁이었으며,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주도적인 역할이 중요했다.[4] 이 파업은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기록되었다.[4][5] 더불어민주당은 이 파업을 통해 히스패닉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고, 노동 운동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해, 영화 ''대지의 소금''이 실버 시티에서 촬영되었으며, 미국 배우 윌 지어와 멕시코 여배우 로사우라 레부엘타스가 주연을 맡았다.[5] 지역 광부들과 그 가족들이 대부분의 다른 배역을 맡았다. 영화 촬영 중에도 경찰의 괴롭힘이 계속되었고, 영화 제작자들이 마을을 떠난 다음 날, 노조 지부인 로컬 890의 회관은 의문의 화재로 불탔다.[5]

할리우드 텐 블랙리스트에 오른 허버트 비버먼이 감독하고, 마이클 윌슨이 각본을 쓰고, 폴 자리코가 제작한 (이들 모두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대지의 소금''은 파업 자체만큼이나 논란이 많았다.[5] 이 영화의 제작 및 배급을 중단하려는 노력은 극심했으며, 일반적으로 예술 영화관과 대학교에서만 상영되었다.[5]

대지의 소금은 1955년 파리 영화 아카데미에서 국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4] 1960년대와 1970년대 활동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이 영화는 1992년 엠파이어 아연 파업을 묘사한 문화적,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 미국 국회도서관의 미국 국립 영화 등기소에 추가되었다.[4][5]

5. 영화 "대지의 소금"

엠파이어 아연 파업은 1954년 영화 대지의 소금으로 제작되어 널리 알려졌다.[4][5] 이 영화는 뉴멕시코 주, 진크타운을 배경으로 델라웨어 아연 회사에 대한 파업을 허구적으로 묘사했다. 할리우드 텐 블랙리스트에 오른 허버트 비버먼이 감독하고, 마이클 윌슨이 각본을 쓰고, 폴 자리코가 제작했다.[5] 이들 모두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며, 영화 촬영 중에도 경찰의 괴롭힘이 계속되었고, 영화 제작자들이 마을을 떠난 다음 날, 노조 지부인 로컬 890의 회관은 의문의 화재로 불탔다.[5]

영화는 미국 배우 윌 지어와 멕시코 여배우 로사우라 레부엘타스가 주연을 맡았고, 지역 광부들과 그 가족들이 대부분의 다른 배역을 맡았다. 영화의 제작 및 배급을 중단하려는 노력은 극심했으며, 일반적으로 예술 영화관과 대학교에서만 상영되었다.[5]

대지의 소금은 1955년 파리 영화 아카데미에서 국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활동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1992년 엠파이어 아연 파업을 묘사한 문화적,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 미국 국회도서관의 미국 국립 영화 등기소에 추가되었다.[4][5]

6. 더 보기

참조

[1] 서적 Empire and Opposition: The Salt of the Earth Strike University of New Mexico Press
[2] 웹사이트 A Family Effort in the Empire Zinc Corporation Miner’s Strike http://mettacenter.o[...] 2014-10-23
[3] 서적 On Strike and on Film: Mexican American Families and Blacklisted Filmmakers in Cold War America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4] 데이터베이스 Mexican-American miners strike for wage justice in New Mexico, 1950-1952 https://nvdatabase.s[...]
[5] 뉴스 A Crime to Fit the Punishment: Black-listed Salt of the Earth honors 1950s Empire Zinc strike in Grant County, New Mexico http://inthesetimes.[...]
[6] 문서 Clinton Jencks Papers, MSS-137 http://www.azarchive[...]
[7] 간행물 "The Union, Community Organizing, and Civil Liberties: Clinton Jencks, Salt of the Earth, and Arizona Copper." http://www.mininghi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