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이 미이케 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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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쓰이 미이케 쟁의는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일본 미쓰이 미이케 탄광에서 발생한 대규모 노동 쟁의이다. 석탄 산업의 쇠퇴와 구조조정에 반발한 노동조합은 무기한 파업을 벌였으나, 회사 측의 직장 폐쇄와 제2노조 결성, 그리고 정부의 개입으로 인해 결국 패배했다. 이 쟁의는 일본 노동운동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노사 협력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3년 발생한 미이케 탄광 탄진 폭발 사고는 쟁의 과정에서 노사 간의 불협화음이 구조 지연으로 이어져 피해를 키운 사례로, 노사 협력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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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이 미이케 쟁의 | |
---|---|
개요 | |
명칭 | 미이케 투쟁 |
로마자 표기 | Miike tōsō |
한자 표기 | 三池闘争 |
관련 문서 일본어 표기 | 三井三池争議 |
사건 요약 | |
발생 시기 | 1960년 |
장소 | 일본 규슈 서부 미이케 탄광 |
성격 | 폭력적인 노동 분쟁 |
배경 | |
원인 | 탄광 합리화 정책과 그로 인한 대량 해고 |
주요 쟁점 | 고용 안정, 노동 조건 개선, 노조 활동 보장 |
경과 | |
주요 사건 | 노조 파괴 시도, 폭력 충돌, 장기 파업 |
결과 | 노조의 패배, 대량 해고 감행 |
영향 | |
사회적 영향 | 일본 노동 운동의 쇠퇴, 기업의 노조 탄압 강화 |
참고 | |
관련 서적 |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
2. 사건의 배경
1946년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민주화 정책에 따라 미쓰이 광산 계열의 탄광에도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미이케 탄광 노조는 초기에는 노사 협조적인 성향이 강하여 노동 쟁의에 소극적이었다.
1947년경부터 규슈대학 교수 사키사카 이츠로가 오무타시를 자주 방문하여 '사키사카 교실'이라는 노동자 학교를 열고 《자본론》 등을 강의하면서 노조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키사카 이츠로는 미이케 탄광을 사회주의 혁명의 거점으로 보고, 전투적인 활동가를 육성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전후 일본 사회는 석탄에서 석유로 에너지원이 전환되는 "에너지 혁명"을 겪고 있었다.[1] 이와 더불어 1959년에 처음으로 구상되어 1960년에 공식적으로 도입된 소득 배증 계획은 석탄 채굴과 같은 "쇠퇴" 산업에서 석유 정제 및 석유 화학 제조업과 같은 "성장" 산업으로 정부 지원을 전환할 것을 명시적으로 요구했다. 이는 미쓰이 미이케 탄광을 포함한 탄광 산업 전반에 위기를 가져왔고, 미쓰이 미이케 쟁의가 발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2. 1. 미쓰이 미이케 탄광
미쓰이 미이케 탄광은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에서 구마모토현 아라오시에 걸쳐 있던 미쓰이 광산 계열의 탄광이다. 1700년대 초 에도 시대에 다치바나 사무라이 씨족에 의해 처음 개발된 이래 일본 최대이자 가장 생산성이 높은 탄광 중 하나였다.[2] 1873년 메이지 시대 정부에 의해 국유화되었고, 1889년에는 민영화되어 미쓰이 재벌에 매각되었다.[3]태평양 전쟁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민주화 정책에 따라 1946년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노사 협조파의 힘이 강해 노동 쟁의에 소극적이었다. 1947년경부터 규슈대학 교수 사키사카 이츠로가 노동자 학교를 열어 《자본론》 등을 강의하면서 노조의 성격이 변화했다.
1953년경부터 에너지원이 석탄에서 석유로 변화하면서 석탄 수요가 감소했다. 이에 미쓰이 광산은 경영 합리화를 위해 희망퇴직을 모집했으나, 지원자가 적어 3464명에게 퇴직을 권고하고 거부한 2700명을 지명 해고했다. 이러한 조치에 반발한 광부와 사무직 노동자가 113일간 파업을 벌였고, 결국 회사 측이 지명 해고를 철회하여 노동자들이 승리했다.
다른 모든 산업 국가와 마찬가지로 일본과 그 전쟁 시기의 제국은 석탄에 의해 주로 운영되었다. 이는 미이케 탄광을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곳으로 만들었고, 미쓰이 재벌의 핵심 자산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러나 전후 직후, 저렴하고 풍부한 중동 석유의 발견과 개발로 인해 산업이 점점 석유로 전환되면서 "에너지 혁명"이 일어났고, 석탄 수요가 감소했다.[1] 동시에, 1950년대 일본에서는 대규모 기계화와 "작업장 합리화"가 이루어져 석탄 광부를 포함한 많은 수의 수동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다. 1959년에 처음으로 구상되어 1960년에 공식적으로 도입된 소득 배증 계획은 석탄 채굴과 같은 "쇠퇴" 산업에서 석유 정제 및 석유 화학 제조업과 같은 "성장" 산업으로 정부 지원을 전환할 것을 명시적으로 요구했다.
2. 2. 노동조합 결성과 사키사카 이츠로
미쓰이 미이케 탄광은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에서 구마모토현 아라오시에 걸쳐 있던 미쓰이 광산 계열의 탄광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GHQ의 민주화 정책에 따라 1946년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초기 미이케 탄광 노조는 노사 협조파의 힘이 강하여 노동 쟁의에는 소극적이었다.그러나 1947년 무렵부터 오무타시 출신이자 미이케 탄광과도 인연이 깊었던 규슈 대학 교수 사키사카 이츠로가 자주 방문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사키사카 이츠로는 '사키사카 교실'이라고 불리는 노동자 학교를 열어 자본론 등을 강의했고, 이를 통해 노조의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키사카 이츠로는 미이케 탄광을 사회주의 혁명의 거점으로 인식하고, 자본론 교육을 통해 전투적인 활동가를 육성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2. 3. 1953년 파업
1953년경부터 에너지원이 석탄에서 석유로 변화하면서 석탄 수요가 침체되기 시작했다. 미쓰이 광산은 경영 합리화를 위해 희망퇴직을 모집했지만, 지원자가 저조하여 3464명에게 퇴직을 권고하고, 거부한 2700명을 지명 해고했다. 이러한 조치에 반발한 탄광 광부와 사무직 노동자가 함께 파업에 돌입했다.[11] 파업은 113일 동안 진행되었고, 결국 회사 측이 지명 해고를 철회하여 노동자 측이 승리하였다. 이 파업은 당시 ‘영웅 없는 113일간의 투쟁’이라고 불리며, 미이케 노조의 이름을 드높였다.1953년 파업으로 미이케 노조에서는 노사협조파의 발언력이 약해지고, 하이바라 시게오 중심의 활동가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미이케 노조는 1955년에 노동자가 퇴직할 때에는 반드시 그 자녀를 채용하도록 미쓰이 광산 측에 약속시켰다. 또한 노동자들은 각 노동자의 수입을 평균화하기 위해 비교적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교대로 맡는 윤번제를 도입하는 등, 미이케 탄광은 마치 노동자의 자치구와 같은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1953년 파업 성공으로 일부 탄광 노동자들은 오만해져 사무직 노동자를 부리거나 괴롭히기도 해, 점차 사무직원들의 연대의식은 엷어지기 시작했다.[11]
그러나 실제로는 파업 중 빈궁을 견디지 못하고 약 6할의 피통고자가 파업 중 또는 파업 후에 퇴직했다. 또한 일부 사업소나 부실 채산 갱도의 휴폐지 등도 대체로 미쓰이 광산 측의 의도대로 실시되었다. 전국 미쓰이 탄광 노동조합 연합회(삼광련)는 '삼광련 기투 백서 - 영웅 없는 113일의 투쟁(전국 미쓰이 탄광 노동조합 편)'에서 이 사실을 지적했지만, 승리에 취한 미이케 노조는 조직력과 통제 강화로 대처하면서 오히려 유연한 대응력을 잃게 되었다.
2. 4. 탄광 노동자의 자치구
1953년의 파업으로 미이케 노조에서는 노사협조파의 발언력이 약해져, 하이바라 시게오 중심의 활동가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미이케 노조는 1955년에는 노동자가 퇴직했을 때 그 자녀를 채용하도록 미쓰이 광산 측에 약속시켰다. 또한 노동자들은 각자의 수입을 평균화하기 위해 비교적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교대로 맡는 윤번제를 도입했다. 이로써 미이케 탄광은 노동자 자치구와 같은 양상을 띠게 되었다.하지만 1953년 파업 성공으로 일부 탄광 노동자들은 오만해져 사무직 노동자들을 부리거나 괴롭혔고, 점차 사무직원들의 연대의식은 엷어졌다.
3. 1959년 ~ 1960년 파업 (미이케 쟁의)
1959년, 미쓰이 광산은 경영 악화를 이유로 대규모 인원 감축을 추진했고, 노동조합은 이에 반발하여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다. 회사 측은 직장 폐쇄로 맞섰고, 총평 등의 지원을 받은 노조와 '총자본 대 총노동의 대결'이라 불릴 정도로 격렬하게 대립했다.
1960년 3월 17일, 생활고를 겪던 일부 조합원들이 미이케 신노를 결성하며 파업에서 이탈하면서 노조 간 갈등이 심화되었다. 3월 29일에는 미이케 노조 조합원 구보 기요시가 폭력단원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후 노조원 절반가량이 미이케 신노에 가입하며 파업 대열에서 이탈했다.
회사가 해상으로 인원과 물자를 반입하려 하자, 노조는 어선 등을 동원해 저지했고, 양측은 '''아리아케 해 전투'''라 불리는 격렬한 충돌을 벌였다. 7월 7일에는 후쿠오카 지방법원이 노조의 저탄장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경찰이 투입되어 노조원들과 충돌했다.
미이케 노조는 미일 안보 조약에 반대하는 등 정치적 색채를 띠기도 했다. 7월 15일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총사퇴하고 7월 19일 이케다 하야토 내각이 출범하면서, 새 내각은 좌익 활동가들의 온상이던 미이케 노조를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8월 10일, 중앙노동위원회는 회사 측에 유리한 중재안을 제시했고, 이미 한계에 다다른 탄노와 총평은 이를 수락했다. 사키사카 이쓰로도 노조 간부들을 설득했고, 결국 11월 11일 미이케 노조는 파업을 해제하며 쟁의는 노동조합의 패배로 끝났다.
3. 1. 회사 재건안과 노조의 반발
1953년 파업 이후 미쓰이 광산의 경영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미쓰이 광산은 미이케 탄광에서 노동 운동가들을 몰아내기로 결심하고, 1959년 1월 19일에 6,000명의 희망퇴직을 포함한 회사 재건안을 제시했다.[1] 8월 29일에는 4,580명의 감축안을 발표하고, 12월 2일과 12월 3일에 걸쳐 1,492명에게 퇴직을 권고했으며, 이를 거부한 1,278명을 지명 해고했다.미쓰이 노조 측은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여 무기한 파업을 결정했다. 한편, 회사 측도 경영 재건 결의가 확고하여 직장 폐쇄를 시행하고, 조합원의 갱내 출입을 막으며 이에 맞섰다.[1] 재계는 미쓰이 광산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총평은 미이케 노조 측을 전면 지원했으므로, 이들의 대립은 '총자본 대 총노동의 대결'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사무직 노동자는 이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총평의 지원 외에는 수입이 없는 조합원들의 생활은 궁핍해졌다.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일부 조합원들은 1960년 3월 17일 제2조합(미이케 신노(新勞))을 결성하고 파업에서 이탈했다.[1]
3. 2. 직장 폐쇄와 제2노조 결성
1959년 미쓰이 광산은 경영 악화를 이유로 6,000명의 희망퇴직을 포함한 회사 재건안을 제시했고, 이후 4,580명의 감축안을 발표하며 1,492명에게 퇴직을 권고했다. 이를 거부한 1,278명은 지명해고 되었다.[1] 노조는 이에 반발해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고, 회사는 직장 폐쇄로 맞섰다. 재계는 회사 측을,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는 노조 측을 전면 지원하면서 '총자본 대 총노동의 대결'로 불릴 만큼 쟁의가 격화되었다.[1]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생활고를 겪던 일부 조합원들은 1960년 3월 17일 미이케 신노를 결성하여 파업에서 이탈했다.[1] 이는 기존 노조(미이케 노조)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3월 29일에는 미이케 노조 조합원 구보 기요시가 폭력단원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 이후, 미이케 노조 조합원의 약 절반이 미이케 신노에 가입하면서 파업 대열에서 이탈했다.


3. 3. 아리아케 해 전투
1960년 3월 28일, 육로가 봉쇄되자 미쓰이는 해상에서 제2 노조 광부와 광산 물자를 배로 상륙시키려 했다. 이에 맞서 제1 노조는 자체 보트를 임대하여 회사의 보트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물대포, 돌을 던지고 들이받는 이른바 "아리아케 해 전투"를 벌였다.[1]입산을 향하는 신노(제2노조) 조합원을 저지하기 위해 제1노동조합원이 실력 행사에 이르러 쌍방에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신노 조합원이나 회사 관계자의 입산에는 경찰이 1000명 단위로 호위했다. 제1노동조합이 육상을 봉쇄했기 때문에, 회사는 해상으로 인원이나 기재 반입을 시도했지만, 제1노동조합은 어선 등을 준비하여 방해했다. 이에 대해 신노도 전세선을 동원하여 회사 배를 "호위"했다. 해상에서의 투쟁은 방수, 쓰레기 투척, 몸싸움으로 격화되었고, 이러한 일련의 공방은 '''아리아케 해전'''이라고 불렸다.
3. 4. 안보 투쟁과의 연관성
미이케 탄광은 매우 큰 광산이었고, 미이케 노조는 총평 연맹 내에서 중요한 노조였다. 하지만 미이케 쟁의는 실제 위기에 처한 일자리 수에 비해 빠르게 과도하게 확대되었다. 양측 모두 미이케가 결정적인 입장을 취할 시점과 장소라고 결정했기 때문이다.[1] 미이케 광부 노조에 대한 기부금은 다른 총평 산하 노조뿐만 아니라 전노련과 같은 좀 더 온건한 노동 연맹의 노조, 그리고 미국과 유럽의 노동 조합 및 연맹에서도 쏟아져 들어왔다. 마찬가지로, 일본 재계(''자이카이'')는 석탄 채굴과 전혀 관련이 없는 기업과 산업의 기부를 포함하여 파업을 무력화하기 위해 미쓰이에 사실상 무제한의 재정 자원을 제공했다.[1] 이에 따라 갈등은 양측 모두 물러설 수 없다고 느끼는 "전체 사용자 대 전체 노동자"의 전투(''소시혼 타이 소로도노 타타카이'')의 양상을 빠르게 띠게 되었다.[1]이러한 자금의 상당 부분은 수천 명의 우익 및 야쿠자 폭력배를 고용하여 록아웃된 광부들을 폭행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위협하고 괴롭히는 데 사용되었다.[1] 광산 통제권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거의 매일 발생했으며, 특히 미쓰이가 1960년 3월 17일에 일부 광부들을 설득하여 제2 노조를 결성하는 데 성공한 후 더욱 심해졌다. 3월 29일, 제1 노조 광부 중 한 명인 구보 키요시가 야쿠자 갱스터에게 칼에 찔려 사망했다.[1]
파업 중인 제1 노조 광부들이 육로를 통한 광산 접근을 막았기 때문에 미쓰이는 해상에서 제2 노조 광부와 광산 물자를 배로 상륙시키려 했다. 제1 노조는 자체 보트를 임대하여 회사의 보트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물대포, 돌을 던지고 들이받는 이른바 "아리아케 해 전투"를 벌였다.
5월까지, 제2노조로의 이탈이 증가하면서, 제1노조의 입장은 점점 더 절망적으로 보였고, 다른 노조의 지원도 흔들리기 시작했다.[4] 그러나 5월 19일, 기시 노부스케 일본 총리는 야당 의원들을 국회에서 끌어내고, 자신의 당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미일 안보 조약(일본어로 "안포"라고 불림)의 개정을 강행했다. 기시의 이러한 행동은 전국적으로 분노를 일으켰고, 조약에 반대하는 안포 투쟁이 대규모로 확대되었다. 기시가 반대했던 파업 광부들에게 동정 여론이 쏟아졌고, 일본 노동 운동은 "안포와 미이케를 연결"할 가능성에 매료되어, 파업 광부들에 대한 새로운 지원 물결을 이끌었다.[5]
6월 19일, 새로운 조약이 발효되자 안포 투쟁은 종식되었고, 이전에 조약에 항의하느라 바빴던 수천 명의 좌익 활동가들이 풀려났다. 이 활동가들 중 다수는 규슈로 내려가 미이케의 광부들을 지원했다.[5] 그러나 안포 투쟁의 종식은 또한 수천 명의 우익 반대 시위자들 또한 자유롭게 했고, 그들 역시 다른 편을 위해 싸우기 위해 미이케로 이동하여, 6월 말과 7월에 격렬한 충돌이 극적으로 증가했다. 대기업들은 끝없는 분쟁에 자금을 대는 것에 지쳐갔고, 기시는 파업을 종식시키라는 압력을 받아 10,000명의 기동대를 파견하여 폭력을 진압했고, 경찰과 광부 사이의 결정적인 전투(kessen)가 임박한 것처럼 보였다.[5] 그러나 기시는 조약 문제 처리를 잘못한 책임을 지고 7월 15일 사임해야 했고, 미이케에서의 파업 파괴 작전은 일시 중단되었다.
일본 사회당 극좌파의 계몽에 의해 정치색을 강화하고 있던 미이케 노동조합은, 미이케 쟁의 중에도 "안보 분쇄" 등 미일 안보 체제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3. 5. 중앙노동위원회의 중재와 쟁의의 종결
1960년 8월 10일, 중앙노동위원회는 회사 측이 지명 해고를 철회하는 대신, 정리 기간 종료 후 지명 해고된 노동자들이 자연 퇴직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내용의 중재안을 제시했다. 이는 노동조합 측에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건이었다.[5]그러나 탄광노동조합과 총평은 이미 투쟁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판단, 중재안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사키사카 이쓰로 역시 미이케 노조 간부들을 설득하여 중재안을 받아들이도록 했다.[6]
결국 11월 11일, 미이케 노조는 무기한 파업을 해제했다. 이로써 312일간 이어진 미쓰이 미이케 쟁의는 노동조합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7]
4. 쟁의의 영향 및 유산
미이케 투쟁은 전후 일본 노동운동의 정점으로 널리 여겨진다. 미이케에서의 노동운동 패배는 일본 노동계가 투쟁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경영진과 노동자 간의 더 개방적인 소통 채널을 가진 협력적인 문화로 이어지게 했다.[8] 특히 총평은 미이케 투쟁으로 약화되었고, 이후 전노련과 같은 더 온건한 노동 연합에게 점점 더 입지를 잃었다.[9]
미이케 투쟁에서 미쓰이의 거의 완전한 승리는 회사가 투쟁적인 제1노조를 훨씬 더 협력적인 제2노조로 대체할 수 있게 했다.[7] 이는 미쓰이가 더 많은 광부들을 해고하고 광산의 안전 기준을 대폭 완화할 수 있게 했다. 1963년까지 미이케에서 일하는 광부의 수는 1960년 약 15,000명에서 10,000명으로 3분의 1이나 감소했지만, 같은 기간 석탄 생산량은 하루 8000ton에서 15000ton으로 증가했다.[10] 1963년 11월 9일, 일본 전후 최악의 광산 사고가 미이케에서 발생하여 석탄 먼지가 점화되어 지하 약 152.40m에서 폭발하면서 터널이 붕괴되고 치명적인 일산화탄소가 광산 전체로 퍼졌다.[10] 그 결과, 458명의 광부가 사망하고 555명이 부상을 입었다.[10]
5. 미이케 쟁의를 다룬 작품
참조
[1]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
서적
Japan's Emergence as a Modern State: Political and Economic Problems of the Meiji Period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Press
[3]
서적
Coal Mining Communities and Gentrification in Japan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4]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5]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6]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7]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8]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9]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0]
웹사이트
Case Details: Coal Dust Explosion at Mitsui Miike Coal Mine on November 9, 1963
http://www.shippai.o[...]
2020-10-20
[11]
서적
現代世相風俗史年表:1945-2008
河出書房新社
[12]
문서
池田諭の会ウェブサイト
https://www.asahi-ne[...]
[13]
웹사이트
制作者研究〈 テレビ・ドキュメンタリーを創った人々〉
https://www.nhk.or.j[...]
放送研究と調査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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