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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스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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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왁스호 전투는 1780년 5월 29일, 미국 독립 전쟁 중 사우스캐롤라이나 뷰포드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영국군 배너스터 타르턴 중령이 이끄는 부대가 에이브러햄 뷰퍼드 대령의 버지니아 대륙군을 추격하여 벌어진 이 전투에서, 뷰퍼드는 항복을 거부했으나, 타르턴 부대의 공격으로 대륙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 과정에서 항복한 병사들에 대한 학살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이는 남부 지역의 여론을 악화시켜 독립군에 대한 지지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전투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일시적으로 강화했지만, 이후 독립군 측의 반격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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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스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스케치
19세기 전투 스케치
교전 세력
교전국 1대륙군
교전국 2[[파일:Union flag 1606 (Kings Colors).svg|21px]] 대영제국
지휘관
지휘관 1에이브러햄 뷰포드
지휘관 2배내스터 탈턴
병력 규모
병력 1보병 380명
기병 40명
병력 2보병 및 기병 150명
피해 규모
피해 1전사 113명
부상 150명
포로 53명
피해 2전사 5명
부상 12명

2. 배경

1777년 영국군이 사라토가 전투에서 패배하고, 1778년 초 프랑스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자, 영국은 북미 식민지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남부 전략"을 시작했다. 영국은 남부 지역에 긴밀한 사업 및 무역 관계 때문에 더 많은 지지자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남부에 권력을 집중시킨 후 나중에 북부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1778년 12월 조지아주 서배너를 점령하는 것으로 작전을 시작했다. 1780년, 헨리 클린턴 경 장군은 남부로 군대를 이끌고 1780년 5월 12일 포위 공격 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을 점령했다.[3]

뷰포드 대령은 찰스턴이 함락되기 전에 찰스턴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이미 찰스턴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버지니아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편, 영국군의 배내스터 탈턴 중령은 존 러틀리지가 버포드와 함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2. 1. 버지니아 대륙군의 후퇴

에이브러햄 버포드 대령은 약 380명의 버지니아 대륙군 병사(신병과 베테랑 병사가 혼합된 제3 버지니아 파견대)와 6파운드포 2문을 갖춘 포병대를 지휘했다.[4] 버포드의 병사 대부분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신병이었지만, 버포드는 경험이 풍부한 장교들을 부하로 거느리고 있었다. 버포드는 부대 정비 지연으로 찰스턴 방어전에 참여할 수 없었다.[6] 벤자민 링컨 찰스턴 사령관은 산티 강 레누드의 페리에 방어 진지 구축을 명령했지만, 링컨은 버포드가 도착할 즈음에 항복했다. 버포드는 포위 공격에서 탈출한 약 40명의 버지니아 경기병, 리처드 캐스웰의 노스캐롤라이나 민병대와 합류했다. 항복 소식을 접한 버포드는 아이작 휴거 장군에게서 노스캐롤라이나주 힐스버러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북쪽으로 향했다.[4][5]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캠든에서 버포드와 캐스웰은 헤어졌고, 버포드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왁쇼 지역으로 들어갔다. 버포드는 한동안 존 럿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와 동행했는데, 럿지는 후방에서 민병대를 적극 모집하고 있었다. 버포드가 왁쇼 크릭에서 부대를 쉬게 했을 때, 럿지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으로 먼저 말을 타고 갔다.[7]

찰스 콘월리스 경은 휴거와 럿지의 병력에 대해 알게 되었고, 헨리 클린턴 장군은 5월 15일 콘월리스에게 사우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 후방 지역을 영국군 통제하에 두라고 명령했다.[6] 콘월리스의 군대는 버포드를 따라잡기에 너무 느려, 5월 27일 약 270명의 병력과 함께 배내스트 타르톤 중령을 추격에 투입했다. 타르톤은 주로 왕당파 지방 연대로 구성된 영국 군단을 지휘했다. 그는 170명의 군단과 영국군 경기병, 100명의 기병 영국 군단 보병, 3파운드포 대포로 구성된 병력을 이끌었다.[4][7] 타르톤은 5월 28일 늦게 캠든에 도착, 다음 날 새벽 자정에 버포드를 추격했다.[7] 그날 오후, 제17 경기병 연대와 영국 군단의 기병 60명, 영국 군단에서 차출된 기병 보병 60명, 영국 군단 경기병 30명과 일부 보병으로 구성된 추가 부대가 버포드의 휴식 지점에 도착했다. 타르톤의 추격을 경고받은 버포드는 북쪽으로 이동, 약 3.22km 떨어진 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2. 2. 영국군의 추격

에이브러햄 버포드 대령은 350명에서 380명 규모의 버지니아 대륙군 (제3 버지니아 분대: 제7 버지니아 연대, 제2 버지니아 연대의 2개 중대, 그리고 6파운드포 2문을 갖춘 포병대)을 이끌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서 포위된 대륙군을 구원하려 했다. 그러나 찰스턴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영국군에게 도시가 함락되었다는 것을 알고 버지니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편, 영국군의 배내스터 탈턴 중령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 지사 존 러틀리지가 버포드와 함께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탈턴은 러틀리지를 붙잡기 위해 추격을 시작했다. 그의 부대는 130명의 용기병, 100명의 기병보병으로 구성된 약 230명 규모였으며, 3파운드포 1문을 갖추고 있었다. 실제 전투에는 선두에 섰던 60명의 용기병과 60명의 기병보병,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30명의 용기병과 몇 명의 보병이 참가했다.[24]

3. 전투

1780년 5월 29일, 배너스터 타르턴이 이끄는 영국군 부대는 사우스캐롤라이나 뷰포드 인근 왁스호에서 에이브러햄 뷰포드가 지휘하는 버지니아 대륙군 부대를 따라잡았다.

조슈아 레이놀즈의 ''배너스터 타르턴의 초상화''


오후 3시경, 타르턴 부대의 선두가 뷰포드 부대의 후위와 접촉했다. 뷰포드 부대의 후위는 타르턴 부대에게 공격을 받고 피해를 입었다. 뷰포드는 주력 부대의 행군을 멈추고 숲 근처에서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10][17] 타르턴은 근처 언덕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공격을 준비했다. 타르턴은 60명의 영국 군단 용기병과 보병, 17연대 용기병, 그리고 30명의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10]

타르턴 부대의 돌격에 뷰포드는 적이 약 9.14m 이내로 접근할 때까지 사격을 명령하지 않았다.[10] 이는 뷰포드의 실수였는데, 타르턴 부대가 뷰포드 부대에 접근하여 공격하기 전에 단 한 번의 사격 기회만 주었기 때문이다.[11]

타르턴의 기병대가 뷰포드 부대의 대열을 무너뜨리자, 많은 미국인들이 항복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뷰포드는 항복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백기를 보냈지만, 타르턴은 전투 중 말에서 떨어져 갇히는 바람에 백기가 전달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영국 측 기록에는 백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양측의 교전은 계속되었다.

뷰포드와 일부 기병은 전장에서 탈출했다.[12] 타르턴의 보고에 따르면, 미군 사상자는 전사 113명, 부상 및 가석방 147명이었고, 6파운드 포 2문과 마차 26대가 노획되었다. 영국군 피해는 전사 5명, 부상 12명, 말 11마리 사망, 말 19마리 부상이었다.[26]

3. 1. 탈턴의 항복 요구와 뷰포드의 거부

타르턴은 부포드의 항복을 요구하기 위해 백기를 든 데이비드 킨록 대위를 보냈다. 부포드는 행군을 멈추고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타르턴은 부포드의 결정을 흔들기 위해 자신의 병력 규모를 과장하여 700명의 병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편지에는 "저항은 헛되므로 인혈의 유출을 막기 위해 두 번 다시 제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고 적혀 있었는데, 이는 타르턴이 부포드에게 단 한 번만 항복을 요구할 것임을 의미했다. 부포드는 항복을 거부하며 "당신의 제안을 거부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를 방어하겠다"고 답했다.[8] 부포드는 병력을 다시 열로 재편성하고 선두에 짐마차를 두고 북쪽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1780년 5월 29일, 타를턴은 현재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뷰퍼드에 있는 교차로 왁스호에서 뷰퍼드 부대에 따라잡았다. 이때 이미 래트리지 지사는 뷰퍼드 부대에서 떨어져 있었다. 타를턴은 후속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데이비드 킨록 대위를 전령으로 보내 뷰퍼드의 항복을 요구했다. 이 요구 속에서 타를턴은 자군의 세력을 과장하여 (700명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뷰퍼드의 결의를 흔들려고 했다. 뷰퍼드는 "나는 귀하의 제안을 거부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내겠다"라고 말하며 타를턴의 제안을 거절했다.[25]

이 말과는 달리 뷰퍼드는 전투 준비를 하지 않고 행군을 계속하려 했다.

3. 2. 전투 전개

1780년 5월 29일, 타르턴은 현재 사우스캐롤라이나 뷰포드에 있는 교차로 왁스호에서 뷰포드의 부대를 따라잡았다. 이때 이미 러틀리지 지사는 뷰포드 부대에서 떨어져 나간 뒤였다.

타르턴은 뷰포드의 항복을 요구하기 위해 데이비드 킨록 대위를 보냈다. 뷰포드는 행군을 멈추고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타르턴은 뷰포드의 결정을 흔들기 위해 자신의 병력 규모를 700명으로 과장했다. 또한 이 편지에는 "저항은 헛되므로 인혈의 유출을 막기 위해 두 번 다시 제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고 적혀 있었는데, 이는 타르턴이 뷰포드에게 단 한 번만 항복을 요구할 것임을 의미했다. 뷰포드는 항복을 거부하며 "당신의 제안을 거부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를 방어하겠다"고 답했다.[8] 뷰포드는 병력을 다시 열로 재편성하고 선두에 짐마차를 두고 북쪽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오후 3시경, 타르턴 부대의 선두가 뷰포드의 후위 부대를 따라잡았다. 당시 패트리어트 외과 조수였던 로버트 브라운필드는[9] 후위 부대의 용기병 5명이 체포되었고, 그들의 지휘관인 피어슨 대위는 쓰러진 후에도 휘둘러진 검에 의해 "인간적으로 훼손"되었다고 말했다.[8] 뷰포드는 포병대와 짐을 제외한 병력의 행군을 멈추고 (계속 진행하라고 명령했다) 탁 트인 숲 근처에 단일 전투선을 형성했다.[10][17] 타르턴은 추격으로 인해 일부 말들이 너무 지쳐서 야전 포병을 사격 범위 내로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에 근처 언덕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공격을 위해 병력을 조직했다. 그의 전투 기록에 따르면, 그는 60명의 영국 군단 용기병과 동일한 수의 보병을 오른쪽에 배치하고, 17연대의 용기병과 추가 영국 군단 용기병을 중앙에 배치했으며, "선발된 30명의 기병과 약간의 보병"을 지휘하며 개인적으로 좌익을 지휘했다.[10] 낙오병들은 언덕 꼭대기에 예비대를 형성하게 되었다.[10]

타르턴의 대열이 돌격했고, 뷰포드는 적이 약 9.14m 이내로 들어올 때까지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10] 이것은 뷰포드의 전술적 실수였는데, 타르턴의 부대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면서 뷰포드의 병사들에게 타르턴의 병력이 대열을 공격하기 전에 단 한 번의 일제 사격만 할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다.[11]

전통적인 미국 역사에 따르면 타르턴의 기병대가 뷰포드의 대열을 찢어발기자 많은 미국인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을 제안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패트리어트의 기록에 따르면 뷰포드는 전황이 불리해졌음을 깨닫고 싸움을 멈추고 항복을 협상하기 위한 의사를 나타내는 백기를 타르턴에게 보냈다. 그러나 타르턴은 전투 중 말에서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죽은 말 아래에 갇혔다. 따라서 만약 백기가 보내졌더라도, 그것은 전달되지 못했다. 이 전투에 대한 영국 측의 기록에는 백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양측의 교전은 계속되었다.

뷰포드와 그의 기병 중 일부는 전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12] 타르턴의 전투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반군 사상자는 사망 113명, 부상 및 가석방 147명, 6파운드포 2문과 마차 26대가 노획되었다. 영국군의 손실은 사망 5명, 부상 12명, 말 11마리 사망, 말 19마리 부상이었다. 타르턴의 부대는 또한 미국 짐마차와 포병대를 노획했다.

3. 3. 학살 논란

타르턴은 부포드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자신의 병력 규모를 과장하여 700명이라고 주장했다. 부포드는 항복을 거부하고, "당신의 제안을 거부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를 방어하겠다"고 답했다.[8]

오후 3시경, 타르턴 부대의 선두가 부포드의 후위 부대를 따라잡았다. 패트리어트 외과 조수였던 로버트 브라운필드는[9] 후위 부대의 용기병 5명이 체포되었고, 그들의 지휘관은 쓰러진 후에도 "인간적으로 훼손"되었다고 말했다.[8] 부포드는 병력의 행군을 멈추고 탁 트인 숲 근처에 단일 전투선을 형성했다.[10][17] 타르턴은 근처 언덕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공격을 위해 병력을 조직했다.[10]

타르턴의 대열이 돌격했고, 부포드는 적이 약 9.14m 이내로 들어올 때까지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10] 이것은 부포드의 전술적 실수였는데, 타르턴의 부대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면서 부포드의 병사들에게 단 한 번의 일제 사격만 할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다.[11]

전통적인 미국 역사에 따르면 타르턴의 기병대가 부포드의 대열을 찢어발기자 많은 미국인들이 항복을 제안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패트리어트의 기록에 따르면 부포드는 전황이 불리해졌음을 깨닫고 백기를 타르턴에게 보냈지만, 백기가 사실상 거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타르턴은 전투 중 말에서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죽은 말 아래에 갇혔다. 따라서 만약 백기가 보내졌더라도, 그것은 전달되지 못했다. 이 전투에 대한 영국 측의 기록에는 백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양측의 교전은 계속되었다.

부포드와 그의 기병 중 일부는 전장에서 탈출했다.[12] 타르턴의 전투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반군 사상자는 사망 113명, 부상 및 가석방 147명이었고, 6파운드포 2문과 마차 26대가 노획되었다. 영국군의 손실은 사망 5명, 부상 12명, 말 11마리 사망, 말 19마리 부상이었다.

19세기 역사가들은 학살의 책임을 타르턴에게 돌렸지만, 현대의 대부분의 언급은 이를 학살로 묘사하지 않는다.[13] 1787년에 출판된 버전에서 타르턴은 이 전투를 "학살"이라고 불렀다. 그는 초기 공격 중에 말이 총에 맞아 쓰러졌고 그의 부하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여 "억제하기 어려운 복수심"을 보였다고 말했다.[14] 역사학자 짐 피에추흐는 이 전투가 패트리어트 지휘관이 이끈 유사한 사건보다 더 심한 학살은 아니라고 주장한다.[15] 반면에 데이비드 윌슨은 타르턴에게 학살의 책임을 묻는다. 그는 이 사건이 타르턴이 책임져야 할 규율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찰스 콘월리스의 부관인 찰스 스테드만은 왁쇼 전투와 관련하여 "인간성의 미덕은 완전히 잊혀졌다"고 기록했다.[16]

1780년 5월 29일, 타를턴은 뷰퍼드 부대에 항복을 요구했으나, 뷰퍼드는 "나는 귀하의 제안을 거부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내겠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25]

뷰퍼드는 전투 준비를 하지 않고 행군을 계속하려 했다. 타를턴이 덮쳤을 때 뷰퍼드는 적이 9m 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포 명령을 내렸으나, 버지니아 병사들은 총붕괴되었다. 전투 후 타르턴의 보고서에 따르면 대륙군은 113명이 살해되고 147명이 부상당했으며, 2문의 6파운드포와 26대의 병참 차량이 노획되었다. 영국군의 피해는 전사 5명, 부상 12명, 그리고 말 11마리가 죽고 19마리가 부상당했다.[26]

뷰퍼드는 이 장소에서 도망쳤다. 이 전투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뷰포드의 대열을 붕괴시킨 후, 타르턴의 병사들은 항복한 버지니아 병사들을 검으로 쳐 죽였기 때문이다. 뷰포드의 부관과 영국군 병조의 증언에 따르면, 뷰포드는 백기를 들었지만 타르턴에게 무시당했다. 타르턴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사실상 학살을 인정했다. 첫 번째 공격 때 타르턴의 말이 저격당해 타르턴이 죽었다고 생각한 그의 부하들이 격렬한 감정으로 싸움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이 학살 이전까지 미국 남부 식민지 사람들에게는 영국에 충실하려는 생각이 많았다. 그러나 왁스호의 학살 소식은 남부에서의 전쟁의 향방을 바꾸었다. 중립이었던 많은 사람들이 애국자 측에 가담했고, "타르턴의 자비를!"라는 외침이 애국자들을 고무시켰다. 이 학살은 킹스마운틴 전투에서 애국자 부대가 영국군을 완벽하게 격파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4. 전투의 결과

전투 후 부상자들은 인근 교회에서 교인들의 치료를 받았다. 타르턴은 전투가 끝난 후 양측의 부상자들이 "동등한 인도주의"로 치료를 받았으며, 영국군은 "모든 가능한 편의"를 제공했다고 보고했다.[17] 부상자가 많아 전국의 사람들이 치료를 돕기 위해 왔다. 그들은 치료 중인 부상자들로부터 일방적인 내용일지라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자, 타르턴이 항복한 군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는 믿음이 이 지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18]

전투 현장의 기념비와 집단 무덤


이 전투는 적어도 일시적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공고히 했고, 애국심은 쇠퇴했다. 클린턴 장군은 찰스턴을 떠나 뉴욕으로 가기 전에 항복한 애국자들의 가석방을 취소했다. 이 모욕과 이 전투에 대한 보고는 남부에서 전쟁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다. 중립을 지킬 수도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애국자들에게 몰려들었고, "타르턴의 자비!"와 "버포드를 기억하라"는 휘그당의 구호가 되었다. 학살 소식은 오버마운틴 맨 (와토간 정착지에서, 그리고 시카모어 쇼얼스 근처) 사이에서 자원 민병대 창설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 이 민병대는 1780년 8월 18일 머스그로브 밀 전투 (현재 사우스캐롤라이나 클린턴 근처)에서 충성파 군대에 맞서 활동했으며, 1780년 10월 7일 킹스 마운틴 전투 (현재 사우스캐롤라이나 블랙스버그 근처)에서 패트릭 퍼거슨 소령이 이끄는 충성파 군대의 결정적인 패배에 참여했다.

이 전투는 이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뷰포드의 대열을 붕괴시킨 후 타르턴의 병사들이 항복한 버지니아 병사들을 검으로 쳐 죽였기 때문이다. 뷰포드의 부관 헨리 보우어와 영국군 로버트 브라운필드 병조의 증언에 따르면, 뷰포드는 늦게나마 백기를 들었지만 타르턴에게 무시당했다. 타르턴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사실상 학살을 인정했다. 첫 번째 공격 때 타르턴의 말이 총에 맞아 쓰러지자 타르턴이 죽었다고 생각한 그의 부하들이 "쉽게 억누를 수 없는 보복에 불타는 격렬한" 감정으로 싸움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왁스호의 학살 소식은 남부에서의 전쟁의 향방을 바꾸었다. 그전까지 중립이었던 많은 사람들이 애국자 측에 가담했고, "타르턴의 자비를!"라는 외침이 애국자들을 고무시켰다. 이 학살은 후에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벌어진 킹스마운틴 전투에서 애국자 오버 마운틴 부대(테네시주에서 산을 넘어온 부대)가 영국군 패트릭 퍼거슨 소령이 지휘하는 왕당파 군을 완벽하게 격파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5. 전투의 영향

전투 후 부상자들은 인근 교회에서 교인들의 치료를 받았다. 타르턴은 전투가 끝난 후 양측의 부상자들이 "동등한 인도주의"로 치료를 받았으며, 영국군은 "모든 가능한 편의"를 제공했다고 보고했다.[17] 부상자가 많아 전국의 사람들이 치료를 돕기 위해 왔다. 이들은 치료 중인 부상자들로부터 일방적인 내용일지라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해 들었고, 타르턴이 항복한 군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는 인식이 이 지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18]

이 전투는 일시적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공고히 했고, 애국심은 쇠퇴했다. 클린턴 장군은 찰스턴을 떠나 뉴욕으로 가기 전에 항복한 애국자들의 가석방을 취소했다. 이 모욕과 전투에 대한 보고는 남부에서 전쟁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중립을 지키던 많은 사람들이 애국자들에게 합류했고, "타르턴의 자비!"와 "버포드를 기억하라"는 휘그당의 구호가 되었다. 학살 소식은 오버마운틴 맨 (와토간 정착지, 시카모어 쇼얼스 근처) 사이에서 자원 민병대 창설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 이 민병대는 1780년 8월 18일 머스그로브 밀 전투 (현재 사우스캐롤라이나 클린턴 근처)에서 충성파 군대에 맞서 활동했다.

이 전투는 뷰포드의 대열이 붕괴된 후, 타르턴의 병사들이 항복한 버지니아 병사들을 검으로 쳐 죽였기 때문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뷰포드의 부관 헨리 보우어와 영국군 로버트 브라운필드 병조의 증언에 따르면, 뷰포드는 늦게나마 백기를 들었지만 타르턴에게 무시당했다. 타르턴 자신의 증언에서는, 첫 번째 공격 때 타르턴의 말이 총에 맞아 쓰러졌고, 타르턴이 죽었다고 생각한 그의 부하들이 "쉽게 억누를 수 없는 보복에 불타는 격렬한" 감정으로 싸움을 계속했기 때문에 사실상 학살을 인정했다.

5. 1. 킹스 마운틴 전투

왁스호 학살 소식은 미국 남부 식민지에서 전쟁의 향방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영국에 충성하거나 중립을 지키던 많은 사람들이 애국자 측에 가담하게 되었고, "타르턴의 자비를!"이라는 구호는 애국자들을 고무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학살은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벌어진 킹스마운틴 전투에서 테네시주에서 산을 넘어온 애국자 오버 마운틴 부대가 영국군 패트릭 퍼거슨 소령이 지휘하는 왕당파 군을 완벽하게 격파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18]

6. 유산

전장이 위치한 지역 사회는 현재 버포드라고 불리며, 인근 고등학교는 버포드 대령의 이름을 따서 버포드 고등학교로 명명되었다.[19] 1990년에 이 곳은 국가 사적지 등록부에 버포드 학살지로 등재되었으며, 랭커스터 카운티에서 소유한 지역 공원으로 보존되어 있다.[20][21] 미국 전장 신탁과 그 파트너들은 2023년 중반 기준으로 지역 공원 주변의 전장 51acres를 매입하고 보존했다.[22]

전투 중 왕당파는 혁명군 소속 군기 3개를 노획했다. 이 군기는 타르톤의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다가 2006년 경매에서 500만달러 이상에 팔렸다.[23] 오늘날 혁명 전쟁 시대의 깃발은 약 30개만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1. 영화 "패트리어트"

2000년 영화 패트리어트에서 멜 깁슨이 연기한 주인공 벤자민 마틴의 장남 가브리엘은 왁스호 학살로 부상을 입는다. 이 사건은 장남이 마틴의 농장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일어났으며, 영화 장면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참조

[1] 서적 The Green Dragoon: The Lives of Banastre Tarleton and Mary Robinson North Carolina Office of Archives and History 1957-08
[2] 웹사이트 The Late Affair Has Almost Broke My Heart: The American Revolution in the South, 1780–1781 https://www.amazon.c[...] Chatham Press 1972-06
[3] 문서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18] 문서
[19] 뉴스 The Roamer visits the Buford Battleground https://www.newspape[...] 2022-07-11
[20] 웹사이트 Park Directory https://mylancasters[...] Lancaster County Government, South Carolina 2011-08-03
[21] 웹사이트 Buford's Massacre Site listing http://www.nationalr[...] South Carolina Department of Archives and History 2011-08-03
[22] 웹사이트 Waxhaws Battlefield https://www.battlefi[...] 2023-06-19
[23] 뉴스 Sotheby's auctions rare Revolutionary War flags http://www.boston.co[...] Associated Press (at boston.com) 2008-06-18
[24] PDF http://www.rsar.org/[...]
[25] 웹사이트 http://www.banastret[...]
[26] PDF http://www.rsar.org/[...]
[27] PDF http://www.rsa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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