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니펙 블루 보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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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니펙 블루 보머스는 1930년 창단된 캐나다 풋볼 리그(CFL)의 프로 풋볼팀으로, 12번의 그레이 컵 우승을 차지했다. 1935년 그레이 컵에서 우승하며 서부 캐나다 팀 최초로 우승을 기록했으며, 1958년 CFL 창설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현재 프린세스 오토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사용하며, 마이크 오셔가 수석 코치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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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니펙 블루 보머스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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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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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 1930년 |
연고지 | 매니토바주 위니펙 |
경기장 | 오스본 스타디움 (1935–1952) 캐나드 인스 스타디움 (1953–2012) 프린세스 오토 스타디움 (2013–현재) |
소속 리그 | 캐나다 풋볼 리그 |
디비전 | 웨스트 |
팀 색상 | 로열 블루, 메탈릭 골드, 흰색 |
구단주 | 위니펙 풋볼 클럽 (비영리 법인) |
별칭 | 보머스, 블루 앤 골드, 빅 블루, 트루 블루 |
마스코트 | 버즈 앤 부머 |
웹사이트 | bluebombers.com |
우승 기록 | |
그레이 컵 우승 | 12회 (1935, 1939, 1941, 1958, 1959, 1961, 1962, 1984, 1988, 1990, 2019, 2021) |
디비전 우승 | 33회 (1935, 1937, 1938, 1939, 1937, 1945, 1946, 1947, 1950, 1953, 1957, 1958, 1959, 1961, 1962, 1965, 1984, 1988, 1990, 1992, 1993, 2001, 2007, 2011) |
코칭 스태프 | |
감독 | 마이크 오'셰어 |
단장 | 카일 월터스 |
사장 | 웨이드 밀러 |
2. 역사
위니펙 블루 보머스는 1930년 위니펙 태머니 타이거스와 다른 지역 팀들이 합병하여 '위니펙 럭비 풋볼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었다. 초기에는 비공식적으로 '위니펙스'로 불렸으며, 1935년 서부 캐나다 팀 최초로 그레이 컵 우승을 차지하며 역사를 만들었다. 이 우승 이후 팀은 "블루 보머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16]
팀은 웨스턴 인터프로빈셜 풋볼 유니언(WIFU)의 창립 멤버였으며, 1958년에는 캐나다 풋볼 리그(CFL)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동부와 서부 디비전을 오갔다.
팀 역사상 여러 황금기가 있었다.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초반에 두 번의 그레이 컵 우승을 추가했고, 1950년대에는 쿼터백 잭 제이콥스의 활약과 새로운 위니펙 스타디움으로의 이전이 있었다. 버드 그랜트 감독이 이끌던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는 네 번의 그레이 컵 우승(1958, 1959, 1961, 1962)을 달성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에는 에드먼턴 에스키모스의 강세 속에서도 경쟁력 있는 모습을 보였고, 1984년 캘 머피 감독 아래 22년 만에 그레이 컵 우승을 차지했다. 머피는 이후 단장으로서, 마이크 라일리 감독 체제 하에서 1988년과 1990년 두 번의 그레이 컵 우승을 더 추가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에는 전설적인 리시버 밀트 스테갈이 팀의 간판스타로 활약했으며, 쿼터백 카리 존스와의 호흡으로 2001년 그레이 컵 결승에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다시 침체기를 겪으며 감독 교체가 잦았다.
2014년 마이크 오셔 감독 부임 이후 팀은 재건에 성공하여, 2019년 28년 만에 감격적인 그레이 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듬해 2021년에도 우승하며 2연패를 기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연속으로 그레이 컵 결승에 진출하는 등 최근 CFL의 강팀으로 군림하고 있다.
2. 1. 창단 초기 (1930-1935)
1879년 위니펙에 최초의 풋볼팀이 결성되었으며, 위니펙 럭비 풋볼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30년 6월 10일,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위니펙 태머니 타이거스는 해체되었고, 도시의 다른 팀들과 합병하여 새로운 ''위니펙 럭비 풋볼 클럽''을 창단했다. 이 팀은 비공식적으로 '위니펙스' 또는 더 짧게는 '펙스'라고 불렸으며,[10][11] 녹색과 흰색을 팀의 색상으로 채택했다.[12] '위니펙스'는 1930년 6월 13일 세인트존스 럭비 풋볼 클럽을 상대로 첫 경기를 치렀으며, 7-3으로 패했다. 1932년, '위니펙스'와 세인트존스는 합쳐져 파란색과 금색을 팀의 색상으로 채택했다.[13] 1933년에는 '개리슨 럭비 클럽' 풋볼팀도 흡수했다.[14] '위니펙스'는 1930년부터 1935년까지 매니토바 럭비 풋볼 연맹에서 활동했다.2. 2. 첫 그레이 컵 우승 (1935)
1935년까지 서부 팀들은 그레이 컵 경기에 10번 출전했지만,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하고 번번이 패배했다. 동부 팀들의 전력이 훨씬 강해서, 이 10번의 경기에서 동부 팀들은 서부 팀들을 상대로 총 236점을 득점하는 동안 서부 팀들은 단 29점밖에 얻지 못했다.1935년 12월 7일, 당시 '위니펙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팀은 23회 그레이 컵에 처음으로 진출했다. 경기는 해밀턴에서 열렸으며, 상대는 홈팀인 타이거스였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해밀턴 아마추어 운동 협회 구장에는 6,405명의 팬이 모였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위니펙이 5–0으로 앞서나갔다. 해밀턴의 잭 크레이그가 오프닝 킥오프를 놓쳤고, 위니펙 선수가 해밀턴 15야드 라인에서 공을 즉시 회수했다. 이어 밥 프리츠가 버드 마쿼트에게 패스하여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빠르게 리드를 잡았다. 그레그 카바트가 엔드존에서 공을 잡아 또 다른 터치다운을 성공시켜, 위니펙은 전반전을 12–4로 앞선 채 마쳤다.
후반 들어 해밀턴이 터치다운을 성공시키며 점수 차는 3점으로 좁혀졌다. 해밀턴은 위니펙의 킥을 블로킹하여 위니펙 15야드 라인에서 공격권을 얻는 유리한 상황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해밀턴이 루즈를 기록한 뒤, 위니펙의 프리츠 핸슨이 상대 펀트를 받아 몇 번의 움직임과 태클 실패 끝에 약 71.32m 터치다운 리턴에 성공했다. 점수는 18–10으로 벌어졌다. 해밀턴은 세이프티를 기록하며 2점을 만회해 18-12, 6점 차까지 따라붙었지만, 끝내 골라인을 넘지 못하고 위니펙 4야드 라인까지 진출하는 데 그쳤다.
최종 점수는 위니펙 18, 해밀턴 12로 위니펙이 승리했다. 이 승리로 위니펙은 서부 캐나다 팀으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그레이 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2. 3. 영광의 시대 (1936-1960년대)
1935년 그레이 컵 우승 이후, ''위니펙 트리뷴''의 스포츠 기자 빈스 리는 팀을 "서부 풋볼의 블루 보머스(Blue Bombers of Western football)"라고 칭했다. 이전까지 공식적인 별명이 없었던 팀은 곧 "위니펙 블루 보머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언론인 짐 콜먼은 이 이름이 권투 선수 조 루이스가 "브라운 보머(Brown Bomber)"라는 비슷한 별명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던 시기와 맞물려 등장했다고 언급했다.[16]1935년, 블루 보머스는 캘거리 브롱크스, 레지나 러프라이더스와 함께 서부 캐나다 최상위 리그인 웨스턴 인터프로빈셜 풋볼 유니언을 결성했다. 1936년부터 1949년까지 블루 보머스는 1937년, 1938년, 1939년, 1941년, 1942년, 1943년, 1945년에 그레이 컵 진출 자격을 얻었다. 이 중 위니펙은 1939년 오타와 러프 라이더스를 상대로, 그리고 1941년 재대결에서 승리하며 두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1950년, 오클라호마 출신의 크리크족 쿼터백인 잭 제이콥스가 블루 보머스에 합류했다. "인디언 잭(Indian Jack)"으로 알려진 그는 미국에서의 성공적인 경력을 뒤로하고 위니펙으로 왔다. 제이콥스는 팀을 두 번의 그레이 컵 결승으로 이끌었으나, 두 번 모두 패배했다. 하지만 그의 흥미진진한 플레이 스타일과 뛰어난 재능은 티켓 판매를 크게 늘렸고 팀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인기로 얻은 수입 덕분에 팀은 작고 낡은 오스본 스타디움에서 새로운 위니펙 스타디움(훗날 캐나다 인스 스타디움으로 명칭 변경)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17] 제이콥스는 팬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아, 팬들은 새 경기장을 "잭이 지은 집(The House that Jack Built)"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제이콥스는 1954년에 은퇴하고 팀의 스카우트로 활동했다.
잭 제이콥스는 1951년 한 시즌 동안 3,248 패싱 야드를 기록하며 프로 풋볼 역사상 최초로 3,000야드를 넘긴 쿼터백이 되었다. 같은 해 그는 33개의 터치다운 패스를 성공시켜 최초로 30개 이상의 터치다운을 기록한 쿼터백이기도 했다. 다음 해인 1952년에는 34개의 터치다운 패스로 자신의 기록을 경신했다.
이 시기 블루 보머스에는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있었다.
- 버드 그랜트: 1957년부터 1966년까지 10년간 헤드 코치를 맡았으며(1965년, 1966년에는 GM 겸임), 팀을 네 번의 그레이 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후 NFL의 미네소타 바이킹스 감독으로 네 번의 슈퍼볼 진출을 이끌었으며, 캐나디안 풋볼 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Tommy Thompson영어: NFL의 피츠버그 스틸러스, 필라델피아 이글스에서 뛰었던 선수로, 1953년 블루 보머스에서 3경기에 출전했으며 같은 해 백필드 코치를 맡았다.
- 맥 헤론: 신장 5피트 5인치(약 165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로, 1970년부터 1972년까지 3년간 뛰었다. 이후 NFL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서도 활약했다.
- 몬테 키핀: 1965년 한 해 동안 선수로 뛰었다. 그는 훗날 NFL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의 디펜스 코디네이터로서 제37회 슈퍼볼 우승에 기여했다.
2. 4. 1970년대-1980년대
1960년대 후반의 침체 이후, 보머스는 1970년대 초 쿼터백 돈 요나스, 러닝백 맥 헤론, 와이드 리시버 짐 소프와 밥 라로즈 같은 선수들의 활약으로 반등했다. 팀은 1962년 이후 처음으로 1972년 서부 컨퍼런스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보머스는 서스캐처원 러프라이더스와의 서부 결승전에서 3쿼터에 13점 차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27–24로 패배했는데, 이는 서스캐처원의 키커 잭 아벤드샨이 경기 마지막 플레이에서 짧은 필드 골을 성공시킨 결과였다. 이 패배로 러프라이더스는 1972년 그레이 컵에서 해밀턴과 맞붙게 되었다. 또한 1972 시즌은 보머스가 2021 시즌 전까지 서부 디비전에서 마지막으로 1위를 차지한 해였다.[8] 짐 스파비탈과 버드 라일리 감독 체제에서 몇 시즌 동안 어려움을 겪은 후, 레이 자우치가 1978 시즌 전에 헤드 코치로 임명되었다. 자우치 감독 아래에서 보머스는 서부의 강팀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지만, 당시 휴 캠벨이 이끌던 강력한 에드먼턴 에스키모스[20]의 그늘에 가려지는 경우가 많았다.1981년, 와이드 리시버 유진 굿로우는 한 시즌에 100개의 리셉션을 기록한 최초의 CFL 선수가 되었다. 굿로우는 100개의 패스를 잡아 약 1366.11m와 14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했다. 그 해 보머스는 한 시즌에 세 명의 리시버가 각각 약 914.40m 이상을 기록한 최초의 팀 중 하나가 되었다: 굿로우(약 1366.11m), 조 팝라우스키(약 1162.20m), 릭 하우스(약 1007.67m).[21]
2. 5. 캘 머피 시대 (1983-1996)

1983년, 캘 머피가 위니펙 블루 보머스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머피는 시즌 중반, USFL에서 뛰기를 원했던 인기 쿼터백 디터 브록을 해밀턴 타이거-캣츠로 트레이드하고, 그 대가로 쿼터백 톰 클레멘츠를 영입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이 트레이드는 성공적이어서, 클레멘츠는 보머스를 1984년 그레이 컵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이끌었다. 공교롭게도 결승 상대는 브록이 이끄는 타이거-캣츠였다. 이는 위니펙이 22년 만에 차지한 그레이 컵 우승이었으며, 107회 그레이 컵 우승 전까지 서부 디비전 대표로서 거둔 마지막 우승이었다. 머피는 1983년과 1984년 연속으로 CFL 올해의 코치로 선정되었다.
1987년, 머피는 감독직에서 물러나 단장직을 맡았고, 어시스턴트 코치였던 마이크 라일리(전 위니펙 코치 버드 라일리의 아들)가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같은 해 시즌 시작 직전, 몬트리올 알루에츠가 해체되면서 동부 디비전 팀 수가 3개로 줄어들자, 리그는 디비전 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서부 디비전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블루 보머스를 동부 디비전으로 이동시켰다.
라일리 감독 체제 하에서 블루 보머스는 동부 디비전의 강팀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1988년에는 B.C. 라이언스를, 1990년에는 에드먼턴 에스키모스를 꺾고 그레이 컵 우승을 차지했다. 라일리 감독 역시 두 번의 우승 시즌 모두 올해의 코치상을 받았다. 라일리가 팀을 떠난 후에는 대릴 로저스와 어번 보우먼이 각각 한 시즌씩(1993년까지) 감독을 맡았고, 이후 캘 머피가 다시 감독으로 복귀했다. 머피는 감독 또는 단장으로서 팀을 총 5번의 그레이 컵 결승으로 이끌었으며, 1984년(감독), 1988년, 1990년(단장)에 우승을 경험했다. 그는 1996 시즌을 끝으로 14년간 몸담았던 팀을 떠났고, 이후 1999년 서스캐처원 러프라이더스의 감독을 맡았다.
위니펙은 동부 디비전에서 총 8시즌을 보낸 후, CFL의 미국 진출 시기였던 1995년에 신설된 북부 디비전으로 잠시 이동했다. CFL의 미국 실험이 1년 만에 끝나고 몬트리올 알루에츠가 재창단되면서, 블루 보머스는 1996 시즌에 재편된 서부 디비전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이 배치 역시 단 한 시즌만 지속되었는데, 오타와 러프 라이더스가 운영을 중단함에 따라 위니펙은 1997 시즌에 다시 동부 디비전으로 이동해야 했다.
2. 6. 밀트 스테갈 시대 (1995-2008)
1996년 11월, 14년간 팀을 이끌었던 칼 머피 감독이 위니펙 블루 보머스를 떠났다. 이는 에드먼턴 에스키모스에게 플레이오프에서 68-7로 대패한 충격과 더불어, 팀이 1995년 7승, 1996년 9승에 그치며 2년 연속 승리 기록을 쌓지 못한 부진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머피의 후임으로는 제프 레인볼드가 임명되었다. 그는 1997 시즌을 앞두고 챔피언십을 공언하며 큰 기대를 모았으나, 결과적으로 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지 못한 감독 중 한 명으로 남게 되었다. 보머스는 레인볼드 감독 아래 1997년에 4승, 1998년에는 단 3승을 거두는 데 그쳤다.
이 암울했던 시기에도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순간들이 있었다.
- 밀트 스테갈은 팀에 합류한 첫 풀 시즌이었던 1997년에 올스타로 선정되었으며, 매 경기 인상적인 장거리 터치다운을 기록하는 듯한 활약을 펼쳤다.
- 1997년 노동절 클래식에서는 그해 서부 디비전 챔피언이 되는 새스캐처원 러프라이더스를 상대로 43-12의 대승을 거두었다.
- 1998년에는 홈에서 러프라이더스를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당시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백업 쿼터백 트로이 코프가 후반전에 교체 투입되어 20점 이상의 점수 차를 뒤집는 대역전극을 이끌었다. 이 경기는 구단이 '승리 보장 데이'로 홍보했던 날이었으며, 시즌 11주차에 거둔 팀의 첫 승리였다.
당시 팀의 기억에 남는 선수로는 라인배커 K.D. 윌리엄스, 세이프티 톰 유로프, 러닝백 겸 리터너 에릭 블런트, 그리고 밀트 스테갈 등이 있었다.
밀트 스테갈은 3년간 킥 리터너와 신시내티 벵갈스의 리시버로 잠시 활동한 후 1995년에 보머스에 합류했다. 그는 1995 CFL 시즌 마지막 6경기에 출전하여 약 428.85m를 기록했다. 1997년, 스테갈은 61번의 캐치로 약 1477.67m (리셉션당 평균 약 24.23m)와 14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리셉션당 평균 야드 부문에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리그 신기록을 세웠다. NFL 뉴올리언스 세인츠로의 이적을 시도했으나 훈련 캠프 막바지에 심각한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무산되었고, 이후 스테갈은 보머스의 핵심 리시버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1999년, 보머스는 BC 라이온스에서 쿼터백 카리 존스를 영입했다. 스테갈과 존스는 강력한 콤비를 이루며 보머스를 다시 강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존스는 2001년에, 스테갈은 2002년에 각각 CFL 최우수 선수(MOP)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2006년 그레이 컵에서는 이 둘이 CFL 역사상 최고의 QB/WR 콤비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1년에는 러닝백 찰스 로버츠가 합류하며 공격진의 위력을 더했고, 그해 보머스는 그레이 컵에 진출했으나 캘거리 스탬피더스에게 아쉽게 패했다. 다음 시즌 오타와 레니게이즈의 창단으로 위니펙은 다시 서부 디비전으로 이동했다. 이 시기 보머스는 리그의 강팀 중 하나로 군림했으며, 특히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리그 최정상급 전력을 자랑했다.
2004 시즌 중반, 카리 존스가 캘거리 스탬피더스로 트레이드되면서 백업 쿼터백이었던 케빈 글렌이 주전 자리를 이어받았다. 글렌은 트레이드 이후 두 시즌 동안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다. 2006 시즌 전, 레니게이즈가 운영을 중단하면서 위니펙은 다시 동부 디비전으로 복귀했다.
스테갈과 로버츠가 여전히 공격의 중심을 지키는 가운데, 글렌은 2006년에 보머스를 다시 경쟁력 있는 팀으로 이끌었다. 그 시즌에는 여러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지만, "The Play"로 알려진 순간만큼 극적인 것은 없었다. 2006년 7월 20일, 에드먼턴 에스키모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22-19로 뒤진 채 경기 종료 4초를 남기고 자신의 팀 10야드 라인에서 3번째 다운 공격에 나선 상황. 케빈 글렌이 던진 패스를 밀트 스테갈이 약 91.44m 터치다운으로 연결하며 25-22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이 플레이는 많은 이들에게 CFL 역사상 최고의 플레이 중 하나로 회자된다. 이 기적적인 캐치 덕분에 보머스는 2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비록 1라운드에서 탈락했지만, 2007 시즌에 대한 기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2007 CFL 시즌은 여러모로 밀트 스테갈의 해였다. 그는 CFL 통산 최다 터치다운 기록을 경신했으며, 앨런 피츠가 보유한 통산 최다 리시빙 야드 기록 경신에도 근접했다. 당시 37세였던 스테갈은 지난 두 시즌 동안 은퇴를 고려했었기에, 2007 시즌이 그의 마지막 시즌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2007 그레이 컵 경기는 위니펙 블루 보머스와 새스캐처원 러프라이더스의 대결로 펼쳐졌는데, 이는 두 팀이 챔피언십에서 맞붙은 첫 사례였다. 위니펙은 토론토의 로저스 센터에서 열린 경기에서 새스캐처원에게 23-19로 패배했다. 동부 디비전 결승전(토론토 아르고노츠 상대)에서 주전 쿼터백 케빈 글렌이 팔 부상을 당하면서, 위니펙은 경험 없는 신인 쿼터백으로 챔피언십 경기를 치러야 했다. CFL 데뷔 첫 선발 출전이었던 백업 쿼터백 라이언 딘위디는 고전하며 터치다운 패스 1개, 펌블 1개, 그리고 새스캐처원 코너백 제임스 존슨에게 3개의 인터셉션을 허용했다. 존슨은 이 활약으로 경기 MVP에 선정되었다. 인터셉션 중 하나는 리플레이 판독 결과 땅에 닿은 후 잡힌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신인으로서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딘위디는 2008 시즌을 기대하게 하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나, 2009 시즌 전에 방출되었다.
2008년 1월 31일, 밀트 스테갈은 2008 시즌에 한 시즌 더 복귀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아내가 다음 아이를 위니펙에서 낳기를 원한다는 점과 팀이 그레이 컵 우승에 도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20만캐나다 달러의 1년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5만캐나다 달러의 연봉 삭감을 감수한 결정이었으며, 시즌 시작 당시 앨런 피츠의 통산 리시빙 야드 기록 경신까지 단 약 145.39m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스타 수비 엔드 톰 캐나다, 공격 라인맨 댄 굿스피드, 맷 셰리던 등 2008 시즌을 앞두고 자유 계약 신분이 된 다른 복귀 선수들도 2008년에 그레이 컵 우승을 목표로, 다른 팀들이 제시할 수 있는 금액보다 낮은 조건으로 보머스와 계약했다. 특히 톰 캐나다는 위니펙으로 돌아오기 위해 몬트리올 알루에츠의 훨씬 더 높은 계약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머스는 2008년 9월 2일, 올스타 러닝백 찰스 로버츠를 BC 라이온스로 보내고 조 스미스를 영입하는 깜짝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이어 9월 8일에는 올스타 수비 엔드 톰 캐나다를 해밀턴 타이거-캣츠로 보내고 제이크 모레노를 받는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그러나 다음 날인 9월 9일, 캐나다가 최소 10주간 결장이 불가피한 부상을 당한 사실이 밝혀져 트레이드가 취소되었다. 결국 보머스는 캐나다 대신 코리 메이스와 1라운드 지명권을 해밀턴에 내주고 모레노를 영입했다.
보머스가 디비전 준결승에서 패배하며 마감한 2008 시즌 이후, 더그 베리 감독이 해고되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마이크 켈리가 선임되었다. 켈리는 칼 머피 시대 말기에 공격 코디네이터를 맡았으나, 당시 감독직은 제프 레인볼드에게 돌아갔었다. 시즌 초반 무릎 수술을 받고 경기력이 저하된 밀트 스테갈의 은퇴 가능성이 다시 제기되었다.
2009년 1월 13일, 단장 브렌든 타만의 사임은 이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또 다른 신호였다.[20] 마침내 2009년 2월 18일, 밀트 스테갈이 CFL 은퇴를 공식 선언하며 '밀트 스테갈 시대'는 막을 내렸다.
2. 7. The Revolving Door 시대 (2009-2013)
마이크 켈리 감독의 복귀는 짧게 끝났다. 구단은 과거 칼 머피 시대의 성공을 재현하길 바랐지만, 켈리는 2009년 12월 17일, 부임 1년 만에 위니펙 블루 보머스 이사회에 의해 해고되었다.2010년 2월 5일, 폴 라폴리스가 블루 보머스 역사상 28번째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라폴리스는 '팀' 정신과 유니폼을 위한 헌신을 강조하며, 변명 대신 문제 해결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2010년 위니펙 블루 보머스 시즌에서 새로운 접근법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팀은 4승 14패로 시즌을 마감하며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특히 9경기는 4점 차 이하, 10경기는 터치다운 한 번 차이 이하로 패배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2011년 위니펙 블루 보머스 시즌에는 큰 선수 변동 없이 시즌을 맞이했다. 몇몇 선수가 NFL로 이적하고 드래프트를 통해 새로운 선수들이 합류했을 뿐이었다. 놀랍게도 블루 보머스는 전년도 동부 지구 최하위에서 10승 8패의 성적으로 동부 지구 1위를 차지하는 극적인 반전을 이루었다.[21] 이러한 성공의 중심에는 '스웨거빌(Swaggerville)'이라는 별명을 얻은 리그 최고의 수비진이 있었으며, 이는 팀에 10년 만의 첫 지구 우승을 안겨주었다.[22] 팀은 동부 결승에서 해밀턴 타이거캐츠를 꺾고 제99회 그레이컵에 진출했지만,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BC 라이온스에게 34-23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2013년 8월 9일, 위니펙 블루 보머스는 CEO 가스 부치코가 사임하고 단장 조 맥이 해고되었다고 발표하며 또다시 변화를 맞이했다.[23] 이 시기는 감독과 경영진의 잦은 교체로 인해 '회전문(Revolving Door)' 시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2. 8. 오셔 감독과 가뭄의 종식 (2014-현재)

2013년 8월 임시 CEO로 임명된 웨이드 밀러는 2013년 11월 12일 구단 CEO 겸 회장으로 공식 발표되었다.[24] 같은 해 경영진 개편 과정에서 카일 월터스가 임시 단장직을 맡았고, 11월 26일 정식 단장으로 임명되었다.[25]
마이크 오셔는 2013년 12월 4일 위니펙 블루 보머스의 제30대 헤드 코치로 선임되었다.[26] 오셔는 맷 니콜스를 선발 쿼터백으로 교체하면서 팀이 플레이오프에 복귀하는 데 기여했다. 팀은 성공적인 상승세를 보였지만, 여전히 그레이 컵 진출에는 실패했다. 2019 시즌 동안 맷 니콜스의 부상과 앤드류 해리스의 출전 정지는 시즌 종료를 의미하는 듯했다. 보머스는 트레이드 마감 직전에 자크 콜라로스를 영입했는데, 그는 그해 세 번째 팀에 합류했다. 콜라로스는 크리스 스트레벨러와 쿼터백 페어링을 형성했다. 두 쿼터백의 플레이는 수비의 압도적인 활약에 힘입어 팀이 107회 그레이 컵에서 11번째 챔피언십을 차지하며 28년 만에 우승을 안겨주었다. 고향 선수인 해리스는 그레이 컵 MVP와 그레이 컵 최우수 캐나다 선수를 모두 수상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27]
CFL이 2020 시즌을 취소한 후 리그는 2021년에 복귀했고, 보머스는 11승 3패의 기록으로 서부 지구 1위를 차지하며 1972년 이후 처음으로 지구 1위를 달성했다. 팀은 라이벌인 서스캐처원 러프라이더스를 서부 지구 결승에서 21-17로 꺾고 2019 그레이 컵 경기를 해밀턴 타이거-캣츠와 다시 치르게 되었다. 보머스는 연장전에서 2021 그레이 컵에서 33-25로 우승했는데, 이는 몬트리올 알루에츠가 97회와 98회 그레이 컵에서 우승한 이후 처음으로 그레이 컵을 2연패한 팀이며, 에드먼턴 에스키모스가 1978년부터 1982년까지 5연승을 거둔 이후 서부 지구 팀이 우승한 것은 처음이다. 2022년에는 15승 3패의 기록으로 다시 서부 지구 1위를 차지하며 3시즌 연속 그레이 컵 결승에 진출했지만, 토론토 아고너츠의 마지막 순간 필드 골 블록으로 팀의 3연패 희망은 24-23으로 좌절되었다. 그들은 2023년에 다시 한 번 그레이 컵에 진출하여 14승 4패의 기록으로 서부 지구에서 우승했지만, 이번에는 알루에츠에게 경기 종료 13초를 남기고 터치다운을 허용하여 28-24로 역전패했다.
3. 팀 정보
구분 | 횟수 | 상세 연도 |
---|---|---|
서부 디비전 1위 | 18 | 1935, 1936, 1939, 1940, 1941, 1947, 1950, 1952, 1958, 1959, 1960, 1961, 1962, 1972, 2021, 2022, 2023, 2024 |
동부 디비전 1위 | 7 | 1987, 1990, 1992, 1993, 1994, 2001, 2011 |
서부 디비전 챔피언십 | 22 | 1935, 1937, 1938, 1939, 1941, 1945, 1946, 1947, 1950, 1953, 1957, 1958, 1959, 1961, 1962, 1965, 1984, 2019, 2021, 2022, 2023, 2024 |
동부 디비전 챔피언십 | 7 | 1988, 1990, 1992, 1993, 2001, 2007, 2011 |
그레이 컵 우승 | 12 | 1935, 1939, 1941, 1958, 1959, 1961, 1962, 1984, 1988, 1990, 2019, 2021 |
팀은 역사적으로 소속 디비전을 여러 차례 변경해왔다. 서부 풋볼 컨퍼런스(1961–1980)를 시작으로 서부 디비전(1981–1986, 1996, 2002–2005, 2014–현재)과 동부 디비전(1987–1994, 1997–2001, 2006–2013)을 오갔으며, 1995년에는 잠시 북부 디비전에 속하기도 했다. 2024년 정규 시즌 기록은 11승 7패이다.
3. 1. 소유 구조
위니펙 블루 보머스는 위니펙 풋볼 클럽(WFC)에 의해 운영된다. WFC는 1951년 3월 5일에 매니토바 법인으로 설립된 비영리 커뮤니티 단체이다.[8] 이 조직의 목적은 매니토바에서 풋볼을 장려하고 육성하는 것이다.[9]WFC는 매니토바 대학교의 IG 필드[10] (구 프린세스 오토 스타디움)에 경기장을 개발, 건설 및 운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상장 법인인 트리플 B 스타디움 주식회사를 관리한다. 이 경기장은 WFC, 매니토바 대학교 바이슨스, 아마추어 육상, 그리고 기타 공공 목적으로 사용된다.
WFC는 또한 위니펙에서 프로 축구 클럽을 운영하고 캐나다 프리미어 리그(CPL)에 참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발러 FC 주식회사를 관리한다.
3. 2. 경기장

블루 보머스의 초창기에는 매니토바 주의회 건물 근처의 작은 경기장인 오스본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치렀다. 보머스 쿼터백 잭 제이콥스의 빠르고 패스 위주의 경기는 경기 관람객 수를 급증시켰고, 이는 더 크고 새로운 경기장의 필요성을 촉진했다. 위니펙 스타디움은 폴로 파크 근처 도시 서부 지역에 건설되었고, 블루 보머스는 1953년부터 그곳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이 경기장은 2001년 카나드 인스 스타디움으로 명칭이 변경되는 등 존재 기간 동안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수년에 걸쳐 경기장을 이전하려는 다양한 계획이 제안되었다. 2008년에는 매니토바 대학교에 사립 및 공공 자금으로 새로운 경기장을 건설하는 계획이 제안되었다. 2009년 4월 2일, 위니펙의 미디어 거물 데이비드 아스퍼 (Canwest 및 Creswin Properties 관련)는 위니펙 남서부의 매니토바 대학교에 33,422석 (45,000석까지 확장 가능) 규모의 새로운 경기장을 건설하기 위해 모든 정부 차원과 합의했다. 이곳은 블루 보머스와 매니토바 대학교 바이슨 팀의 홈 구장이 될 예정이었다. 이 거래에는 연습 및 훈련을 위해 기존 바이슨 스타디움을 개조하고 새로운 스포츠 및 피트니스 시설을 업그레이드, 확장 및 건설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 프로젝트가 완료되면 캐나다 최고의 스포츠 훈련 시설 중 하나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프로젝트 자금은 아스퍼가 이전 카나드 인스 스타디움 부지에 건설할 계획이었던 소매 개발에서 지속적으로 지원받을 예정이었다. 거래의 일환으로, Creswin Properties는 2010년에 팀의 소유권을 인수할 예정이었다. 새로운 경기장과 시설은 2012년 CFL 시즌까지 완공되고, 소매 개발은 2013년에 완료될 예정이었다.[28][29] 그러나 2013년 12월 13일, 아스퍼와 Creswin Properties가 더 이상 경기장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으며, 위니펙 시, 매니토바 주, 위니펙 블루 보머스의 자금 지원으로 프로젝트가 계속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30]
2012년 5월 2일, 블루 보머스는 건설 지연으로 인해 경기장이 9월까지 준비되지 않아 팀이 시즌 초반에 카나드 인스 스타디움에서 4~5번의 홈 경기를 치러야 한다고 발표했다.[31] 2012년 6월에는 경기장이 2013 시즌까지 개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되었다.[32]
블루 보머스는 2013년 6월 27일에 프린세스 오토 스타디움 (당시에는 인베스터스 그룹 필드로 알려짐)에서 첫 번째 홈 경기를 치렀으며, 몬트리올 알루에츠에게 38–33으로 패했다.[33]
3. 3. 유니폼 및 헬멧
위니펙 블루 보머스의 현재 유니폼 색상은 파란색과 금색을 기본으로 하며, 흰색이 포인트로 사용된다.[7] 헬멧은 금색 배경에 파란색 테두리가 있는 흰색 'W' 로고가 특징이다.[6] 창단 초기인 1930년부터 1932년까지는 녹색과 흰색 유니폼을 사용한 바 있다.3. 4. 기타
- '''창단:''' 1930년
- '''이전 비공식 명칭:''' 위니펙스(Winnipegs) (1930–1935년)
- '''헬멧 디자인:''' 금색 배경, 흰색 "W"와 파란색 테두리[6]
- '''유니폼 색상:''' 파란색, 금색에 흰색 포인트[7]
- '''과거 유니폼 색상:''' 녹색과 흰색 (1930–1932년)
- '''별명:''' 봄버스, 블루 앤 골드, 빅 블루
- '''마스코트:''' 버즈(Buzz)와 부머(Boomer)
- '''응원가:''' "봄버스 빅토리 마치(Bombers Victory March)" (T.H 길드 & J. 길드 작곡)
- '''경기장:'''
- * 오스본 스타디움 (1935–1952년)
- * 캐나다 인스 스타디움 (1953–2012년, 2000년 이전 명칭: 위니펙 스타디움)
- * 프린세스 오토 스타디움 (2013–현재, 이전 명칭: 인베스터스 그룹 필드(2013–2019), IG 필드(2019–2024))
- '''지역 라디오:''' 680 CJOB
- '''주요 라이벌:'''
- * 서스캐처원 러프라이더스 (노동절 클래식 및 밴조 볼 참조)
- * 해밀턴 타이거-캐츠 (그레이 컵에서 여러 차례 대결)
4. 선수 명단 및 코칭 스태프
직책 | 이름 |
---|---|
구단주 | 위니펙 풋볼 클럽 |
이사회 의장 | Dayna Spiring |
사장/CEO | 웨이드 밀러 |
풋볼 운영 제너럴 매니저 | 카일 월터스 |
선임 어시스턴트 제너럴 매니저 / 선수 인사 담당 이사 | 테드 고베이아 |
어시스턴트 제너럴 매니저 / 미국 스카우팅 디렉터 | 대니 맥매너스 |
어시스턴트 선수 인사 담당 이사 | 시릴 펜 |
풋볼 운영 이사 | Matt Gulakow |
직책 | 이름 |
---|---|
수석 장비 매니저 | Brad Fotty |
어시스턴트 장비 매니저 | Kevin Todd |
'''주목할 만한 선수'''
- 맥 헤론: 신장 약 1.52m 약 12.70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이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 3년간 블루 보머스에서 뛰었으며, 이후 NFL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서도 활약했다.